김영수 (신부·천주교 전주교구 천호성지 관장)
지난 11월 8일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여성위원회는 '종교별로 본 웰다잉(Well-dying)'을 주제로 불교,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 천도교, 유교에서 본 '웰다잉'의 의미를 종교별 학자와 성직자로부터 듣는 세미나를 마련했다. 사회적으로 한동안 웰빙(Well-being) 열풍이 뜨겁더니, 어느덧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이기에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삶은 불확실한 인생의 과정이지만 죽음만은 틀림없는 인생의 매듭이기 때문에 결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죽음과 삶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성숙한 의식을 소유한 세상은 죽음을 삶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 진실을 살아내는 세상은 여유롭고 깊으며 평화롭다.
지난 반세기동안 우리는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죽기 살기로 잘 살아 보기 위해 매진했다. 그러나 세계 경제발전사에서 최단 시일에 잘사는 나라 반열에 들게 되었지만 우리 삶은 여전히 좀 더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매달려 질주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은 더욱 죽음을 두려워하며 발버둥치는 조급하고 초라한 삶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자체마다 좀 더 크고 강한 지역을 만들자는 목표를 내걸고 잘 먹고 사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여놓고 보자는 '무한 유치경쟁'에 뛰어든다.
크고 강한 것, 물질적 풍요와 일류(一流)에 대한 집착의 이면에는 작고 소중한 것에 대한 외면이 자리하고 있다. '슬로우시티(Slow City)운동'을 처음으로 파급시킨 이탈리아의 끼안띠지방은 피렌체 산맥 인근의 작은 마을이었다. 1999년부터 이탈리아 그레베(Greve)시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자연환경과 전통을 지키고 지역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삶을 지켜 나아가자는 철학을 바탕으로 '느림과 여유의 가치'를 지향한다. 무한경쟁의 삶에 지쳐있는 현대인들에게 잠시나마 조급함에서 벗어나 '느림의 미학'을 통하여 얻어진 여유로움으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기 위한 운동이다.
슬로우시티는 무분별한 난개발을 막고 자연의 생산품을 이용하여 지역의 상권을 활성화시키고 이를 통한 지역 살리기 운동을 주목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또한 전통을 보존하고 생태주의를 지향하며 지역민을 중심으로 한 '느림의 철학'을 추구하는 친환경적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목표 때문에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리나라 슬로우시티는 지난 2007년 전라남도 완도·신안·장흥·담양 등이 아시아 최초로 슬로우시티 인증도시가 되었고 현재 경상남도 하동군과 충청남도 예산군이 추가되어 총 6개군이 슬로우시티로 인정받았다. 전라북도에는 아름다운 순례길을 중심으로 이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지만 지역사회의 반응은 여전히 썰렁하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무슨 팔자 좋은 소리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철학이 없는 개발은 삶의 가치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만다.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이익과 만족만을 쫓아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삶은 너저분한 잡동사니로 가득 찬 싸구려 인생이 되고 말듯이 삶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문화는 우리가 소중하게 지켜온 전통을 싸구려 유행으로 만들고 마는 것이다.
전북의 발전을 생각할 때에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것들의 참된 가치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삶의 전체성을 담아내는 큰 그릇을 준비하는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다.
/ 김영수 (신부·천주교 전주교구 천호성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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