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 거목 김병로 선생 생애 업적·정신세계 조명 전북인의 자긍심 높여야
가인 선생은 자랑스럽게도 우리의 고장인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무살이 될 무렵이던 1906년 최익현 선생이 정읍에서 봉기하였을 때 의병의 일원으로 직접 전투에 참전했다. 또한 전남 광양에서 백낙구 의병장의 봉기를 지원했다. 의병항쟁의 실패를 경험한 그는 실력배양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신학문을 배우게 된다.
가인은 1910년 3월 일본 유학길에 나선다. 1915년 법학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경성전수학교의 법률학 조교수로 부임하였다가 1919년에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로 부임한다. 그런데 1년 만에 판사 자리를 내던지고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인으로 전환한다. 그는 변호사가 된 이유에 관하여 “내가 변호사 자격을 얻기에 유의하였다는 것은 생활 직업에 치중한 것도 아니요, 재산을 축적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며, 다만 일정(日政)의 박해를 받아 비참한 질곡에 신음하는 동포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하려 함에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가인은 변호사로 개업한 직후부터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을 맡기 시작하여 의열단 사건 등 수 없이 많은 독립투사들의 사건을 맡아 그들을 열렬히 변호하였다.
해방이 되자 가인은 건국운동의 일선에 나선다. 가인은 1946년 미군정청 사법부 법전기초위원회 위원, 미군정청 사법부장으로 활동하며 사법제도의 기초를 닦았고, 1948년 8월 5일 대한민국 사법부의 첫 수장이 되었다. 그 후 가인은 정부시책에 협조하는 사법부가 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와 반민특위를 무장 습격한 친일세력들의 위협을 버텨내는 등 사법부의 독립을 위한 초석을 다졌다.
지난 1월 13일은 가인 서세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대법원은 그날 전현직 대법원장, 감사원장,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국회 법사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과 아울러 ‘가인 김병로와 21세기의 사법부’라는 주제로 선생의 삶과 업적을 조명하는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 필자는 위 행사에 참석하면서 큰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다. 우리 지역이 배출한 인물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가인 선생의 구체적인 생애와 업적을 보여주고 자랑할 수 있는 별도의 기념관이 없고, 일반 시민들은 가인 선생이 우리 지역이 배출한 인물인지도 잘 알지 못하는 형편인 것은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전라북도지방변호사회는 새로 조성되는 덕진구 만성동 법조타운 내에 가인 선생을 비롯하여 이 지역이 배출한 훌륭한 법조인들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그 부지대금을 변호사회가 기부하고 전주시나 전라북도가 국비 등의 지원을 받아 건축비를 부담하여 기념관을 건립하자고 제안한 상태이다. 가뜩이나 이 지역이 소외되어 가고 있는 지금 시대와 지역을 넘어 존경을 받는 가인 선생의 생애와 업적, 정신세계를 조명하고 보존하는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전북인으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을 고취하기 위한 꼭 필요한 사업이다.
전주시와 전라북도의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검토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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