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제대로 짚어낸 신경준, 고향 순창 낙향 저술에 힘써
“순창군 남쪽 3 리에 산이 있으니, 산마루에 귀래정의 옛터가 있고, 귀래정의 남쪽 언덕 끝은 그윽하고 기이하여 사랑할 만하니 <여지승람> 에 실려 있다.(중략) 조부 진사공이 늘그막에 이곳에서 지내며 정자를 동쪽 언덕의 꼭대기에 지었으며, 정자 아래에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에 세 섬을 설치하였다. 또 못들의 기이한 것들을 모아서 천연의 부족함을 보완하니 상하좌우에 꽃과 풀이 푸르게 우거져 벌리어 나니 <이아> 와 <초경> · <수서> 에서 일컫지 않은 것도 많게 되었다.” 수서> 초경> 이아> 여지승람>
신경준이 지은 <여암유고> 권 10에 실린 <순원화훼잡설(淳園花卉雜說)> 실린 글로 자신의 조부인 선영이 조성한 귀래정 일대의 조경에 대해 쓴 글이다. 순원화훼잡설(淳園花卉雜說)> 여암유고>
전북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남산에 있는 귀래정은 조선초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인 신말주 선생과 정부인 설씨와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그 뒤 그의 후손인 실학자 신경준 선생 등 그의 후손들이 살았던 곳이다.
신경준은 그의 업적에 비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벼슬이 높았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치적인 파쟁을 많이 겪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신경준을 근현대에 접어들면서 세상에 처음 드러낸 사람은 위당 정인보(鄭寅普)였다.
그는 1934년에 석전, 민세 안재홍, 윤석오 등과 함께 남쪽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 이곳 귀래정에 들렀던 여정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아래의 글은 여행기의 첫 문장이다.
“신여암 선생은 고령인이니 경준(景濬)은 휘요, 순민(舜民)은 그의 자이다. 이렇듯 거룩한 어른을 말하면서 그의 호(號)만으로 부족하여 다시 그의 휘와 자를 쓰게 되는 것을 보면 마치 이 세상에 대화여 첫 번으로 소개하는 것 같다. 세상이 다 여암 선생을 고루 알지 못할 새 이렇게 써서 알아드리기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 어찌 개연치 아니한가?
(중략) 고택에 남긴 저술이 사람 키만큼 쌓였건만 사람들이 귀한 줄 몰라 좀이 쓸고 쥐가 갉아먹고 있었다.”
세상에 더 없이 귀중한 업적을 남긴 신경준과 그의 저작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정인보의 기원이 이루어져 1939년에 <여암전서> 가 활자본으로 발간되었다. 그때 정인보는 교열을 맡았고, 총서(叢敍)를 작성했다. 여암전서>
그러나 총서는 무슨 연유에선지 실리지 않은 채 정인보의 집에 남겨져 있다가 1976년에 <경인문화사> 에서 <여암전서> 영인본을 발간할 때에야 수록되었다. 여암전서> 경인문화사>
“만약에 여암 선생이 그 때 정부의 대권을 잡을 지위에 쓰여서 그 재주를 다 발휘하여 실시케 할 수 있었던들, 지금으로부터 140~150여년 전이니 어찌 알랴, 쇠해지지 않고 떨쳤으며, 무너져 내리던 것이 완전해지고 약한 게 굳건해지고 가난도 넉넉해지고 가뭄걱정도 않고 메진 땅도 백성을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중략)
저 성하게 날로 떨쳐 오르는 자와 견주더라도 어쩌면 앞질렀을 것 같을! 설사 앞지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어찌 문득 그 밑에야 깔리었겠는가. 그럴만한 인재가 있었건만 그로 하여금 그 마음먹은 바를 완수케 하지 못하여 만사가 끝장나게 하였으니 어찌 하리요. 한 선비의 등용됨과 버려짐이 이 세상의 흥망과의 관계가 얼마나 큰가?”
정인보가 <총서> 에서 신경준을 평한 글이다. 신경준은 여러 방면의 학문에 능통하여 세상의 사리를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런 신경준이 국정에 깊이 관여하는 위치에 있었더라면, 그의 학문이 채택되어 나라가 망하는 처지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일본을 능가하는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안타까워 한 것이다. 총서>
△여암 신경준이 태어난 순창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장가인 여암 신경준(申景濬)의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菴)이다. 아버지는 신숙주(申叔舟)의 아우 말주(末舟)의 10대손인 진사 내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 이의홍(李儀鴻)의 딸이고 신경준은 맏아들로 태어났다.
신경준은 태어난 지 겨우 아홉 달 만에 벽에 쓰여 진 글씨를 알아보았고, 네 살에 천자문을 읽었다. 다섯 살에는 시경(詩經)을 읽었으며, 그의 학문은 해가 더하면서 일취월장하였다.
신경준이 일곱 살 때의 일이다. 뜰 안에 있는 늙은 살구나무가 오랫동안 열매가 맺지 않는 것을 나무라는 글을 지었다. 그러자 나무가 그의 말을 알아들었던지 열매가 열려 마을 사람들이 놀랬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공이 재주가 뛰어나고, 큰 뜻이 있어서 일찍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천하의 일은 모두 내 직분을 것이다. 한 가지 일이라도 다 하지 못한 것은 나의 수치요, 한 가지 재주라도 모자람이 있는 것은 나의 흠이다.” 라고 하면서 모든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두루 깨치지 못한 바가 없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지세(地勢)에 대해서는 환하여 ‘무릇 장수가 될 자는 모름지기 먼저 지리에 통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와 가깝게 지냈던 홍양호(洪良浩)의 문집인 <이계집(耳溪集)> 에 실린 ‘묘갈명(墓碣銘)’에 실린 신경준에 대한 글이다. 이계집(耳溪集)>
신경준의 생애는 순탄한 생이 아니어서 어렸을 때부터 내외로 고생이 많았다. 그의 나이 여덟 살 때인 1719년에 유학 차 홀로 상경하여 서울에 있다가 그 다음해인 9살 때에는 강화도로 옮겨갔다.
강화도는 양명학(陽明學)을 계승한 하곡 정제두(鄭齊斗)가 1709년에 낙향해서 학문을 꽃피운 곳이었다.
강화도에서 공부한 지 3년 뒤인 열두 살에 다시 고향인 순창에 내려온 신경준은 청년기를 순창에서 보내며 고체시(古體詩)와 당시(唐詩)를 배우면서 시를 지었다.
스물여섯 살 때까지 이곳 저 곳을 돌아다니던 1737년에 그의 아버지가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진사로 일생을 마쳤지만 자식들에게 엄했고, 그의 가르침은 깊어서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너희들은 세상에서 구차한 사람이란 소리를 듣지 말아라. 재물을 탐내지 말고 벼슬을 구차하게 구하지 말아라. 구차하게 얻은 벼슬은 부끄러운 것이요. 반드시 뒤에 재앙이 있는 법이니, 나는 그런 자식은 가지고 싶지 않다.”
그런 아버지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신경준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만이 아닌 스승과 같은 사람이었다.
부모님 상을 마친 신경준은 동생들과 어머니를 모시고 스물일곱 살에 경기도 소사(素沙)로 이사를 갔고 3년 뒤에 직산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때 지은 글이 <소사문답(素沙問答)> 과 <직주기(稷州記)> 이다. 직주기(稷州記)> 소사문답(素沙問答)>
그 당시의 시대부들 대부분이 한 곳에 머물며 학문을 연마했던 것과 달리 신경준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인간은 경험한 것만큼만 쓸 수 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말과 같이 신경준은 학문의 진리는 스스로의 시색과 체험의 결과로 찾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젊은 시절부터 산수 유람을 좋아했다. 그런 연유로 스무 살에서 서른 살에 이르기까지 나라 안에 이름난 명산들을 두루 답사한 신경준은 그 감회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나의 성품이 멀리서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산에 들어서면 정상에 올라서 산천이 휘돌아가는 모습을 굽어보고, 내 소매 깃을 열어 만 리에서 부는 바람을 맞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젊었을 때는 넝쿨을 붙들고 곧 바로 산에 올라도 발이 오히려 가볍고 피곤한줄 몰랐는데, 나이 들어 벼슬한 지 20년 동안 한 해도 산에 오르지 못했다.”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라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산수관과 학문관을 그대로 실천했던 그때의 경험이 훗날 <강계고> <산수고> <가람고> <도로고> 등, 교통과 지리에 대한 저작을 남길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던 것이다. 도로고> 가람고> 산수고> 강계고>
직산에서 3년을 살다가 서른세 살에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한 신경준은 그의 나이 43세에 이르기까지 고향 순창에 묻혀서 저술에 힘썼다. 그때 강천사를 자주 찼았는데, 강천사는 그의 집안의 원찰이었다.
신경준이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서 향시(鄕試)에 응시한 것은 마흔세 살 때인 1754년(1754년(영조 30)이었다. 그때 시험관이 바로 홍양호(洪良浩)였다.
신경준은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문헌비고〉 편찬에서 〈여지고(與地考)〉를 담당했다. 여조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은 그는 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참지가 되어 〈팔도지도〉·〈동국여지도〉를 완성했다. 그 뒤 1771년 북청부사, 1773년 좌승지, 강계·순천부사, 제주목사를 지냈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은 1750년(영조 26)에 지은 〈훈민정음운해〉이다. 이 책에서는 한글의 작용·조직·기원을 논하여 과학적인 한글 연구의 기틀이 되었다.
그의 업적 중에서도 가장 큰 업적은 <산경표> 를 저술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유 지리학인 <산경표> 가 오늘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10년 12월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조선광문회의 고전 간행사업에 의해서였다. 산경표> 산경표>
조선 광문회는 우리 고전의 보존과 보급을 통한 민족문화의 선양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그 뒤 <동국통감> 과 박지원의 <열하일기> , 그리고 이중환의 <택리지> 와 <도리표> 를 발간 한 뒤 <산경표> 를 다섯 번째로 출간했다. 그리고 이 책을 지은 사람이 확실하지 않다고 밝히면서 다음과 같은 해제를 실었다. 산경표> 도리표> 택리지> 열하일기> 동국통감>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펴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없다. 오직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輿地考)> 와 <산경(山徑)> 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돌며 사람 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만하다. 산경(山徑)> 여지고(輿地考)>
이 <산경표> 는 ‘산경’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이수(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산경표>
그 해제문에는 <산경표> 의 저자를 모르지만 이 책은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 의 <산경> 을 기본삼아 쓰여 진 것이라고 적고 있다. 산경> 여지고> 산경표>
1769년 신경준이 지은 『산수고(山水考)』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하나의 근본이 만 갈래로 나뉜 것이 산이고, 만 갈래가 하나로 합한 것이 물이다. 나라의 산수는 열둘로 나타낼 수 있다. 백두산에서부터 나뉘어 여덟 줄기(八路)의 여러 산들이 된다. 여덟 줄기의 여러 물들이 합하여 열두 수(水)가 되고, 열두 수는 합하여 바다가 된다. 물이 흐르고 산이 솟는 형세와, 산이 나뉘고 물이 모이는 묘리(妙理)는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열두 산은 삼각산, 백두산, 원산, 낭림산, 두류산, 분수령,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육십령, 지리산이라 이른다. 열두 물은 한강, 예성강, 대진, 금강, 사호, 섬강, 낙동강, 용흥강, 두만강,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이라 이른다. 산은 삼각산을 머리로 삼고 물은 한강을 머리로 삼으니 서울을 높인 것이다.”
이렇듯 우리 국토를 하나의 대간인 백두대간(白頭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인 장백정간, 그리고 열세 개의 정맥(正脈)이 큰 강의 유역을 이루고 있다.
그로부터 가지를 친 지맥들이 내와 골을 이루어 삶의 지경을 마련하고 있다. 이를 분류하면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우리나라 등뼈를 이루는 것이 백두대간(白頭大幹)인데, 이것을 제대로 찾아낸 사람이 신경준이었다.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여러 학문에 능통했던 신경준이 추구했던 학문은 실제 생활에서의 효용성과 이용후생을 목적으로 한 실용주의 학문이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재야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신경준은 그들과 달리 국가적인 사업에 자신의 지식과 학문을 마음껏 발휘하여 우리나라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적 방법으로 조선후기 역사지리학에 큰 족적을 남긴 실천적 지리학자였다. / 신정일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