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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한가하게 여유롭게 사는 것] 마음도 몸도 가벼워지는 삶…그러한 복된 삶을 꿈꾸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많이 듣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처럼 그 말이 실감이 나는 때도 없는 듯하다. 세상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실속은 없고, 여기저기서 불평만 해일처럼 넘쳐나고 있다.증오는 넘치고 마음의 여유는 없다. 예이츠가 자기 조국인 에이레에 대해서 한 말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개인 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가 되다가 보니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기 때문이 아닐까?방안에 빈 곳이 없다면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싸움을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오장육부가 서로 부딪쳐 조화를 잃게 된다. 큰 숲이나 높은 산이 사람을 반갑게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세속에서 쪼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장자〉 잡편 제 26 외물(外物)에 실린 글이다.자연이란 흙, 나무, 연못, 산 등에 국한되지 않는다. 속도를 줄여 넉넉한 시간 여유를 가지고 자연을 음미할 때, 우리는 평화, 생명의 순환, 계획, 그리고 탐험에 대한 위대한 교훈을 얻게 된다. 자연은 하나의 실존으로서 고유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대양이나 황야는 우리의 오랜 친구였던 것처럼 감동으로 다가온다. 자연의 품안에 자신을 맡긴 채 귀를 기울이면 우리가 자연의 한부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이렇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한가하게 살아도 길지 않은 인생인데, 허겁지겁 쫓기듯 사는 게 일상화 된지 이미 오래인 것은 무슨 연유일까?삶을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시간이다.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리는 시간에 쫓겨 좀처럼 숨 돌릴 여유조차 없다. 시간은 교도관처럼 우리 등 뒤에서 회초리를 들고 감시한다. 그리고 시간은 권태라는 이름의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준다. 쇼펜하우어의 〈인생을 생각한다〉에 실린 글이다.아, 하고 숨 한 번 쉬면 훌쩍 지나가는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그래도 한가하게 산다고 자처하는 나도 가끔씩 바쁘다고 푸념을 할 때가 있다.그럴 때마다 부질없이, 부질없이 영국의 시인 W.H 데이비스의 여유라는 시를 읊조려 본다.무슨 인생이 그럴까. 근심에 찌들어가던 길 멈춰 서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양이나 젖소들처럼 나무 아래 서서쉬엄쉬엄 바라볼 틈 없다면숲속 지날 때 다람쥐들이 풀숲에도토리 숨기는 걸 볼 시간 없다면한낮에도 밤하늘처럼 별이 총총한시냇물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조금 더 한가하게, 여유롭게 해찰도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너무 빠른 속도에 인간의 정신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아버지는 나라 안의 명산들을 두루 다니셨는데, 서쪽으로는 평양과 묘향산, 남쪽으로는 속리산과 가야산, 화양동과 단양 등 여러 명승을 유람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나는 과거를 일찍 그만두어 마음이 한가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산수 유람을 많이 했었다. 박종채가 지은 〈나의 아버지 박지원〉에 실린 글이다. 나 역시 박지원 선생과 같이 시험이나 취직을 할 것이 없었으므로 자유스럽게 세상을 떠돌아다닐 수 있었고, 부담 없이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속도와 느림, 그리고 한가함생각해보면 현대인들은 모두다 축지법을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계가 한 지붕이라서 그런지 마치 바람을 쏘이고 돌아오듯 오늘 점심은 미국, 저녁은 영국, 다음날 아침은 터키, 내일 점심은 러시아, 이러한 생활이 일상이 된 사람들에게 버스에 실려 멀다고 돌아다닌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 거리겠는가?현대인들을 현대인들이게 지탱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무래도 속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속도란 과연 무엇일까?〈국어사전〉에 빠른 정도, 단위 시간에 움직이는 거리, 빠르기라고 실려 있는 속도를 두고 기억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고 한다.라는 말이 있고, 속도가 빠르면 영혼이 못 따라 간다. 라는 말도 있다.아랍의 속담에도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인다. 라는 말이 있는데, 속도 전쟁의 시대에서 더욱 더 필요한 것은 빠르기 빠르게, 즉 속도가 아니라 느림이고 한가함이다. 피에르 쌍소는 느림을 두고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이라고 규정했다.그는 혼자만의 자존을 확인하는 한가로이 거닐기 타자와 공존하는 듣기, 일상을 새롭게 발견하도록 이끄는 순수한 권태 의식의 내면을 일깨우는 꿈꾸기, 무한한 마음의 지평을 여는 기다리기,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마음의 목소리를 옮겨보는 글쓰기 등을 통해 느림을 실천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이다. 인간이 기계의 속도 능력을 위임하고 나자 모든 게 변한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밖에 있게 되고 그는 비 신체적, 비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하게 되었다.밀란 쿤데라의 말이다. 그 말이 어찌 그리도 맞는 말인지.몸이 한가한 것이 마음이 한가한 것만 못하고, 약을 먹어 몸을 보하는 것이 음식으로 몸을 보하는 것만 못하다. 〈산거사요(山居四要)〉에 실린 글이고, 연산군 때의 풍류객인 용재 이행(李荇)도 느리게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사람이다.편안하고 한가함이 약이 되고, 잎이 피고 지는 것에 봄과 가을을 안다. 멀리 알리거니와 산중의 객(客)인 나는 길이 그러한 가운데에서 살아왔다오.한가하게 여유롭게 사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삶이 시작되면서부터 내게 부여된 인생의 괴로움 때문에 하루를 허둥지둥 보내고 지금은 체념한 자세로 멍하게 보내는 새벽 시간이다. 삶이여! 더도 덜도 아닌 내 인생이여!그래,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일까? 답은 두 개가 없는 하나 밖에 없다. 조금 더 한가하게 사는 것,●한적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재산중국의 시인 백옥섬(白玉蟾)은 자신의 서재를 나재당(懶齋堂)이라 명한 뒤 다음과 같은 기문을 지었다.내키지 않으면 노자도 읽지 않는다. 도(道)는 책(冊) 안에 없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장구(章句)도 보지 않는다. 장구는 도보다 깊지 못하다. 도의 체묘(諦妙)는 허(虛)에 있고 징(澄)에 있고 냉(冷)에 있다. 그러나 나는 진일토록 바보스럽다. 또 어디서 허를 구할 것이냐. 내키지 않으면 시서(詩書)도 펴지 않는다. 놓으면 시신(詩神)이 떠나 버리기 때문이다.내키지 않으면 거문고도 잡지 않는다. 노래가 줄 위에서 죽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바둑도 두지 않는다. 그림의 흥취는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내키지 않으면 풍월(風月)도 대하지 않는다. 선경(仙境)은 스스로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내키지 않으면 속세와도 인연을 끊는다. 의관(衣冠)과 제품(諸品)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봄가을도 모른다. 천행(天行)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소나무는 죽으리, 바위는 썩으리, 그러나 나는 나, 영원한 나. 이 집을 나재당이라고 부르기에 어찌 타당치 않겠는가?한적한 생활을 더 할 수 없이 예찬한 글이다. 그렇다면 한적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함일까?한(閒)자의 자의(字義)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달(月)이 대문(大門) 안에 들이비치는 것이 바로 한(閒)자라고 한다. 옛날에는 모두 문(門) 안에 일(日)을 넣은 간(間)자와 같이 보아 왔지만, 그 음(音)만은 달리 쓰이는 경우가 있다.하여간 한가로움이란 저마다 얻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고자 하는 순간 마음도 몸도 가벼워지는 것, 그래서 두목지(杜牧之)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을 것이다.한인이 아니고야 한가로움을 얻을 수 없으니이 몸이 한객(閑客)되어 이 속에 놀고파라한적(閑寂)하다는 것, 그것이 글로 쓰기는 쉽지만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누리기가 힘든 것 중의 한가지이다.소크라테스는 한적(閑寂)을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재산이라고 예찬하였다 고 디오게네스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비밀을 알고 있고 그래서 매일 한적을 꿈꾸면서도 바쁘다고 핑계를 대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마음이 한가로우면 몸도 또한 한가롭다사람 만나 세상일 말하지 않으니, 그가 바로 세상에서 한가한 사람이다.(逢人不說人間事, 便是人間無事人) 당나라 두순학(杜荀鶴)의 〈증질상인(贈質上人)〉에 실려 있는 글과 같이 한가하게 지내기 위해 답사를 가지 않는 날이면 혼자서 약속한다. 내 집을 누가 범접하지 못할 깊은 산속에 있다고 여, 잠시 사람과의 만남도 멀리하자.그리고 우선해서 직업병(사진과 글쓰기) 때문에 아픈 팔을 위해서 조금은 한가하게, 조금은 게으르게 일을 할 것이며, 아직은 괜찮지만 언제 나빠질지 모르니까 눈을 혹사하지 않도록 조금은 책을 가까이 하지 않아야겠다고 굳게 다짐을 한다.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이 그 약속을 지키게 하는가. 자다가도 일어나 글을 쓰고 책을 읽다가 보니 오히려 평상시 보다 더 많이 혹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출퇴근이 따로 없는 프리랜서 작가의 비애일 것이다.조금은 더 한가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런 나의 마음을 거울에 비추듯 쓴 글이 한 편 남아 있다.사방으로 통하는 큰 길 가운데에도 한가로움은 있다. 마음이 진실로 한가롭기만 하다면 굳이 강호(江湖)이어야 하며, 산림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내가 사는 집은 저잣거리 바로 옆이다. 해가 뜨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소란(騷)하고 해가 지면 마을의 개들이 떼를 지어 짖어댄다. 그러나 나는 다만 편안하게 책을 읽는다.때때로 문밖을 나가보면, 달리는 자는 땀을 흘리고, 말을 탄자는 달려가며, 수레와 말이 섞이어 복잡하게 오간다. 나는 홀로 천천히 걸어서 일찍이 소란함으로 인해서 나의 한가로움을 잃지 않았으니 그것은 나의 마음이 한가롭기 때문이다.저들은 마음이 소요(騷擾)하지 않은 자가 적으니 그들의 마음에는 제각기 영위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장사하는 자는 저울눈을 가지고 다투고, 벼슬을 하는 자는 영욕(榮辱)을 다투며, 농사짓는 자는 밭 갈고 김매는 일을 가지고 다툰다.돈 벌이에 급급(汲汲)하여 날마다 생각하는 것이 있으니 이 같은 사람들은 비록 영릉(零陵) 남쪽 소상강 사이에 데려다 놓는다 해도 반드시 두 손을 깍지 낀 채 앉아서 졸면서도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꿈꾸고 있을 것이니 어찌 한가로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마음이 한가로우면 몸은 저절로 한가롭다. 고 말하는 것이다.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의 〈원한(原閒)〉이라는 글이다.이덕무가 표현한 것과 같이 무엇을 위해 다투는 시절을 지났는데, 아직도 제대로 된 한가(閑暇)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내 마음 속에 버리지 못했거나 극복하지 못한 욕심들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신선은 별다른 사람이 아니다. 마음속에 한 점의 누도 없어 도(道)가 이미 원숙한 지경에 이르고 금단술(金丹術)이 거의 이루어졌을 때를 말한 것이다. 매미처럼 껍질을 벗고 날아서 하늘에 오른다는 것은 억지 말이다. 만약 내 마음에 잠깐이라도 누가 없으면 이는 잠깐 동안 신선이 된 것이고, 반나절동안 누가 없으면 반나절동안 신선이 되는 것이다. 나는 비록 오랫동안 신선이 되지는 못하지만 하루에 두세 번쯤은 신선이 된다. 세상을 발밑에 두고도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신선이 되려 하는 사람은 일생동안 한 번도 될 수 없을 것이다.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제 63권 선귤당농소에 실린 글이다.이덕무 선생의 표현대로라면 신선이 되는 것이 별 것이 아니다. 한가하게 사는 것이 매양 쉬운 일만은 아니지만. 한가하고 너무 한가해서 어슬렁거리며 살다가 가는 그 삶을 꿈꾸어 본다. (끝)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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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30 23:02

[38. 길은 삶의 화수분] 길, 그 속엔 삶과 사람이 있다

나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나는 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길 위에 있었고, 지금도 역시 길 위에 있다. 길도 집이고, 집도 길이라고 깨달은 순간부터 내 마음은 맑고 청량한 교외에 나간 것과 같이 홀가분해졌다고 할까? 그런데 금세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 길 위에서 나를 만나고 세상을 배우는 시간들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듯싶어 허전할 때가 많다.그러한 사실을 절감한 뒤부터 순간순간이 마치 천금(千金)이나 된 듯이 소중해졌고, 불현 듯 불쑥 길로 나가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휴일에는 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방에서 리모컨이나 이리 저리 누르면서 보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마음을 열고 길을 나서는 순간, 나를 반기는 놀랄만한 것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길을 나서면 도처가 박물관이고, 도서관이며, 켜켜이 쌓인 역사의 흔적들이다. 돌멩이 하나,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에 스민 세월과 함축된 수많은 사상, 그러한 것들이 도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길 위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리라.●마음을 열고 길을 나서라보행에는 내 생각들에 활력과 생기를 부여하는 그 무엇이 있다. 나는 한자리에 머물고 있으면 거의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내 몸이 움직이고 있어야 그 속에 내 정신이 담긴다. 들판의 모습, 이어지는 상쾌한 정경들, 대기, 대단한 식욕, 걸으면서 내가 얻게 되는 건강, 술집에서의 자유로움, 내가 무엇엔가 매여 있다고 느끼게 하는 모든 것, 나의 처지를 상기시키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 그런 모든 것이 내 영혼을 청소해주고 내게 보다 크게 생각할 수 있는 대담성을 부여해주고 존재들의 광대한 속에 나를 던져 넣어 내 기분 내키는 대로 거리낌 없이 두려움 없이 그것들을 조합하고 선택하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게 해 준다.장 자크 루소의 글이다.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을 이해하고 걷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어느 때부턴가 유행하기 시작한 〈길 위의 인문학〉이 아직도 탁상공론에만 머무는 까닭이다.천천히 걸으면 보이는 것들, 기적처럼 나타나 지친 내 영혼에 향기를 불어 넣어주는 수많은 것들이 길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여기며 길을 나설 때 꼭 가져가는 필수품, 그것이 바로 카메라다.사진작가도 아니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가 벌써 30여 년이 된다. 카메라가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그저 순간을 포착하여 찍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채 사진을 찍는 사람,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 가장 표준형인 캐논 5D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30여년 전만해도 좋은 카메라만 들고 다녀도 사진작가라고 여겨서 선망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온 국민이 스마트폰을 소유한 사진작가다 보니 카메라도, 사진도, 그리 차이가 없어 보인다.그래도 일부 사람들은 자기 사진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사진들을 찍는데, 사진을 배우지만 사진을 어떻게 찍는가? 카메라 조작법에 대한 것만 배울 줄 알지 인문학적인 사진 이야기를 사진작가를 통해서 들을 시간이 없어서 사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극히 미미하다.얼마 전 답사를 가서 찍은 사진을 보는 순간 떠오른 소설이 바로 이청준 선생의 중편소설인 〈시간의 문〉이었다.주인공 유종열씨는 사진기자였고 사진작가로 살다가 어느 날 동남아의 난민선을 찍다가 바다에서 실종되고 만다. 그는 언제나 카메라를 누르는 순간에 대상의 흐름이 정지해버린다고 낭패하던 사람이다. 시간의 문을 지나 흘러야 하는데, 그 흐름을 방해하는 것은 사진을 찍는 사람과 대상 사이의 거리, 그 공간의 벽이라고 여겼다. 그 공간의 두꺼운 벽 때문에 대상의 시간은 렌즈가 열리고 닫히는 순간에 늘 순간으로 정지해 버린다. 고 여겼던 유종열이라는 이름의 사진작가.찍히는 사람과 찍는 사람, 대상과 나, 언제나 둘은 그런 관계지. 둘 사이엔 엄청난 벽이 있거든그래, 바로 그 거리의 벽이에요, 그 두꺼운 거리의 벽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어요. 참으로 엄청난 카메라의 숙명이지. 그 거리가 사라져 주지 않는 한 우린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에 따로따로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어요. 벽을 뚫고 넘어가 함께 있거나 같은 시간의 흐름을 탈 수는 없어요. 그런데 대상의 시간을 찍는다는 것은 그저 그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문제는 결국 이 놈의 지워지지 않는 거리와 공간인데.다시 펼쳐본 〈시간의 문〉을 다시 읽고 방 안 귀퉁이에 놓인 카메라를 바라다본다. 나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 많은 사진을 찍었던 것일까?내가 바라본 그 사물들의 영혼(靈魂)이나 정수가 사진 속에 제대로 들어 있기나 한 것일까?백문이불여일(百聞而不如) 찍이라고 많이 찍는 사람 당할 수 없으며, 대상과 공감하는 정도에 따라 사진이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잘 찍은 사진 한 장〉의 사진작가인 윤광준의 사진에 대한 생각인데, 사진을 잘 모르는 나는 이렇게 말한다. 카메라가 좋아야 다른 사람의 카메라에 주눅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카메라가 좋아야 하고, 자동으로 놓고 찍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어설픈 사진 실력을 가지고 수동으로 찍다가 보면 자동만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아미엘은 어떠한 경관도 마음이다. 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좋은 사진 역시 마음에서부터 비롯된다고, 그래서 어느 순간 시간의 문이 열리고 흐르는 시간이 있을 때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라고.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프로가 아니고 아마추어라서 그런지 몰라도 망설이기를 잘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아깝게 생각하는 것, 경상도 모 비구니들만 사는 절에 갔을 때, 들어가지 말라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빨래 줄에 여스님들의 내의(앞가리개) 수백 개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그대로 두고 나왔는데, 나중에 사진작가들에게 들은 얘기 쪽팔림은 잠시이고 사진은 영원하다 바꿔 말하면 망설임은 잠시이고 사진은 영원하다가 맞은데,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마추어일 수밖에 없다.●글을 써서 먹고 사는 작가그렇다면 내가 매일 쓰는 글이란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어린 시절의 꿈은 작가였고 그때나 지금이나 그 꿈 외엔 다른 꿈을 꾼 적이 없다. 그것도 그냥 글만을 쓰는 작가가 아니고,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작가가 되길 꿈꾸었다. 오랜 나날이 흘러서야 그 꿈이 이루어져,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사는 작가가 되었지만 이 땅에서 글을 써서 먹고 사는 것은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그래서 옛 사람들도 글을 써서 번 돈은 냄새가 너무 심하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소시蘇詩(소동파)에 글을 팔아서 먹고 산다(本寶文爲活)하였고, 밭이 없어서 깨진 벼루로 먹고 산다.(無田食破硯) 라고 하였다.대체로 옛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 본래 세상에 쓰고자 한 것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오히려 몸을 길러갈 재료를 할 수 있었다.우리나라의 풍습은 뛰어난 재주(才華)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지금 현존한 사람으로서 차천로(車天輅).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글을 지어도 일전(一錢)도 벌지를 못하여 항상 밥이 부족한 한탄이 있으니, 비록 깨진 벼루 가 있은들 어찌 먹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그것을 슬퍼한다.허균의 동서이자 문장가였던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실린 글이다.예나 지금이나 글을 쓰는 것도 어렵지만 글을 써서 인세를 받아서 산다는 것, 글을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글이라는 것이 세상에 고루 쓰이면서도 길이 남을 글은 더욱 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어렵고, 그저 편하게 가려운 데를 그것도 조금씩 긁어주는 글만 사랑을 받는 세상이니,시인도, 소설가도, 나 같은 인문학자도 마찬가지로 글을 써서 먹고 살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하물며 조선 중기에는 말해 무엇 하랴,하지만 그때는 글을 쓴다는 자부심이라도 있었고, 세상이 뭐라 해도 내 길만 가겠다는 사명감이라도 있었기 때문에 글을 썼다.〈오만과 편견〉을 지은 제인 오스틴은 작가(作家)로서의 삶을 아주 가는 붓으로 작업을 하여 많은 노동을 한 뒤에도 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아주 작은(5cm의 폭) 상아라는 말로 겸손하면서도 아주 고상하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표현했다.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어떤 기자는 스스로를 집필노동자라고 표현했는데, 나는 나 스스로를 한글 스물 넉자를 가지고 하루 종일 놀면서도 싫증이 나지 않는 문자조립공이라고 썼던 적이 있다.2006년에 모 신문에서는 당시 직업을 가지지 않고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인문학자들을 열 사람 정도 꼽았었다. 그 때 나와 같이 인문학으로 글을 써서 살아가는 사람을 인디라이터, 독립저술가라고 평하였다.글을 쓰는 것도 힘든 노동의 일종이고, 그래서 노동자라는 말은 합당한 것 같지만 나와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는 참으로 어렵다.글을 쓰려는 생각을 버려라. 그 대신 글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보라. 세상으로 나가라. 해적도 되어 보고, 보르네오의 왕도 되어보고, 러시아(소련)의 노동자도 되어 보라.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기본적인 생리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런 어려운 활동에 전념해보라.모든 것을 체험해보고 부딪쳐보고서 글을 쓰라는 러셀의 말은 맞는 말이다. 육신이 흐느적, 흐느적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소.라고 이상이 말했던 것처럼 힘든 노동을 통해서 세상의 여러 면을 경험해볼 것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항상 불공평한 것이라서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일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글을 쓰는 일이 더 그렇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말은 오늘날에도 의미심장하다.피고용자들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바퀴가 계속 굴러가게 하기 위해 치는 기름과 같다. 노동의 진정한 목적은 이제 인간이 아니라 돈이다.돈은 세상의 그 어떤 어려운 일도 해결할 수 있다. 돈 가지고 안 되는 건 하나도 없다 라는 말이 회자 될 만큼 우리는 돈이 가장 우선인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어디 돈만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충고를 해주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했던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는 소크라테스다.나는 제자들에게 밥과 마실 거리, 그리고 노동의 양을 자신의 내면 수준에 적합하게 조정하라고 가르쳤다. 적합한 수준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최고의 주치의를 둔 셈이다.결국 크게 욕심 내지 말고,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도 말고, 세상 모든 것과의 균형을 유지하며 살라는 말이다.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삶인가? 그 해답을 〈탈무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현재의 그릇인 몸을 열심히 사용하라. 내일이면 깨질지 모르니답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면서 이 세상을 의미 있게 살다 가는 것, 그것만이 잠시 살다가 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일 것이고, 그러한 삶에 필요한 것이 인문학이다.그런데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강변하는 한 편에서는 인문학의 위기 라는 말들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세상이 항상 균형 속에서 불균형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균형이나 정도(正道)는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그래서 인문학자들이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다. 라는 명구를 남긴 키츠의 글이 의미심장한 연유다. 세상은 내게 너무 잔인하다.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척박하고 어렵고, 아무리 실용학문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고 할지라도 문학, 역사,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든든한 기초를 제공하고 굳건하게 서 있어야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다.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화수분 같은 것이 아닐까?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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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23 23:02

[37. 잘 놀고 잘 먹고 잘 사는 법] 옛 선비들처럼…풍류를 즐겨라

불과 몇 십 년 사이 사는 것이 너무도 달라졌다. 먹고 사는 것이 어려워 일만하던 시대에서 잘 놀아야 하는 시대에 진입한 것이다. 그런데 잘 노는 법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풍류를 즐기며 살아야 하는데, 풍류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풍류(風流)란 바람 풍(風)자와 흐를 유(流)를 쓰는 것에서 보듯 말 그대로 자연스러움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풍류를 풍치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일 또는 운치가 있는 일로 풀이하기도 하고,아취가 있는 것 혹은 속된 것을 버리고 고상한 유희를 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자연과 인생 그리고 예술이 혼연일체가 된 삼매경에 대한 미적 표현이라고도 부르는 풍류에는 자연적인 요소, 음악적인 요소, 현실을 뛰어넘는 이상적인 여러 가지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 풍류에는 멋과 맛, 그리고 예술적인 모든 것들과 함께 남녀 간의 사랑도 일부 포함되기도 한다. 풍류는 자연을 가까이 하는 것이고, 멋이 있는 것, 음악을 아는 것, 예술에 대한 조예, 여유, 자유분방함, 즐겁고 아름답게 노는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 옛 선인들은 풍류를 통하여 사람을 사귀었고, 풍류를 통하여 심신을 단련하였다. 자연과 같이하는 삶과 사람과 사람 사이가 끈적끈적한 정으로 살았던 옛 사람들의 생활과 달리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회지에서 마치 섬에 갇혀 지내는 로빈손 크루소처럼 단절된 채 고립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역사 속에서 옛 사람들은 어떻게 놀고, 어떻게 공부하고, 어떻게 살았을까?봄날이라고 치자. 매화꽃이지고 산수유가 만발할 때쯤이면 뒷동산에 하나둘 씩 진달래가 피어날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그리던 친구들이 찾아오고 그래 지금이 꽃 시절이다. 술과 찹쌀가루를 가지고 얼음이 풀려서 지저귀며 흐르는 강변에 세워진 날아갈 듯한 정자로 봄 꽃놀이를 가는 것이다. 가슴을 휘젓고 지나가는 진달래 화전에 몇 잎의 진달래를 술잔 위에 띄우면 두견주가 된다. 한잔하게 한잔 주게, 술이 한 순배 돌면 자네 시 한수 듣세, 아니 내가 함세, 금세 정자엔 시흥(詩興)이 돌고 부르는 노래 소리, 그렇듯 정이 깊어지면 흐르는 물소리도 솔바람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그 한잔 술에 취해서 술이 되고 세월이 될 것이다. 노래에 취하고 저물어 돌아오는 길 휘영청 밝은 달이 동무해주는 그런 풍경이 있던 시절을 오래 된 미래라고 한다면 쓸쓸한 이야기인가?예나 지금이나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어떤 모임을 만들어 만나는 것은 변하지 않는 세상 풍경이다. 하지만 그렇게 만나서 노는 방법은 세월 속에 많이도 변했다.봄가을에 만나서 꽃구경을 가는 모임도 있고, 나라 곳곳의 찻집을 찾아다니며 차를 즐기는 모임도 있으며, 전국도 모자라 세계 곳곳의 골프장을 다니며 골프를 즐기는 모임에, 전국의 맛 집을 찾아 식도락을 즐기는 모임도 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지리산이나 설악산만 좋아하여 다니는 사람들의 모임도 있고, 사진 동우회 중에서도 세분화되어 꽃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나 낚시, 심지어 도박까지 수많은 모임들이 여러 형태로 그들만의 놀이를 즐기며 살아간다. 그런 모음과 다른 모임을 만들자는 생각에 만든 단체가 우리나라의 길과 산천을 걸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땅 걷기 이다.●다산 정약용 선생이 만들었던 죽란시사장기와 강진의 유배지,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수많은 저작을 남긴 다산 정약용도 젊은 날에는 풍류를 즐겼다. 아래의 글은 《여유당전서》에 실린 것이다. 당시 정약용과 친교를 맺었던 이치훈, 이유수, 한치응 등 열네 명의 뜻 맞는 선비들이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풍류계를 맺고서 다음과 같은 규약을 정했다.살구꽃이 피면 한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필 때와 한 여름 참외가 무르익을 때 모이고, 가을 서련지(西蓮池)에 연꽃이 만개하면 꽃구경하러 모이고, 국화꽃이 피어 있는데 첫눈이 내리면 이례적으로 모이고, 또 한 해가 저물 무렵 분에 매화가 피면 다시 한번 모이기로 했다.서련지의 연못은 연꽃이 많기도 했지만 연꽃이 크기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죽란시사로 맺은 선비들이 동이 트기 전 새벽에 모여서 배를 띄우고 연꽃 틈에 갔다 대고는 눈을 감고 숨을 죽인 채 무엇인가를 기다렸는데, 그것이 바로 연꽃이 필 때 내는 소리였다. 잎이 필 때 청랑한 미성을 내며, 꽃잎이 터지는 그 연꽃의 아름다운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마치 꽃이슬을 마음속에 떨어뜨리는 듯한 그 청량감, 즉 청개화성(聽開花聲)을 소중하게 여겼던 선비들의 그윽하고도 절절한 멋인 풍류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선비들이 연잎에 가득 술을 따라놓고 구멍이 연근처럼 뚫린 연대로 그윽한 연의 향기와 함께 술을 마시던 풍류 역시 사라진 지 오래이다.연꽃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난 전주 덕진연못이나 나라 안 곳곳의 연지에서 여름 새벽에 청개화성을 체험한다면 얼마나 운치 있고 재미있을까?중종 때의 문신인 문경공 신용개의 풍류도 재미있다. 그는 천품이 호탕하고 뛰어나 탁월한 큰 절개가 있었고, 성격이 술을 좋아하여 때로는 늙은 계집종을 불러 서로 큰 잔을 기울여 취하여 쓰러져야 그만두기도 하였다. 일찍이 국화 8분을 길렀는데, 한 가을에 활짝 피므로 대청 가운데 들여놓으니, 높이가 대들보에 닿았다. 공이 그 국화꽃 향기를 사랑하여 끊임없이 보고 또 보았다. 그런 어느 날 집안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손님이 여덟 분이 올 것이니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라.그 말을 들은 집안에서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손님을 기다렸다. 해가 저물어도 기다리는 손님이 오지 않자 집안사람들이 언제 오시느냐고 물으며 벌써 술상을 준비해 놓았습니다라고 했다.그러자 신용개는 조금만 기다려라 하였다. 그 뒤 둥근달이 떠 그 빛이 대청 안으로 들어와 꽃 빛이 달빛에 아름답고 환하게 비치자 신용개가 그제야 술을 내오라 하며 여덟 개의 국화 분을 가리키면서 하는 말이 이 국화꽃이 오늘 나의 손님들이다하고는 각각 그 앞에 좋은 안주를 차려 놓고 말하였다.내가 은도배(銀桃盃)에 술을 따르겠네하고 각각 두 잔씩을 따라 주고 그도 역시 마셨는데, 그렇게 술이 몇 순배가 돌자 신용개 역시 몹시 취하였다.니코스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주인공 조르바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그리고 돌멩이 하나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느껴서 순간순간 그들과 만나며 경외감을 표시한다. 자연을 섬기는 것이 인간 스스로를 섬기는 것임을 모르는데, 스스로 그러한 자연 속의 한 부분인 사람들이 주제를 파악하지도 못하고 설치다가 화를 당할 때가 많다. 그런데 신용개는 그 자신이 그렇게 애지중지하게 가꾼 국화가 눈부시게 만개하자 그 만개한 친구들과 한잔 술을 기울인다.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달 밝은 밤에 나누는 술 잔치여!그와 비슷하면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온다.중종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세상에 환멸을 느껴 낙향한 박공달과 박수량은 강릉에서 한 냇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술벗으로 살았다. 그들은 쌍한정(雙閒亭)에 모여 나이에 개의치 않고 술을 마셨다. 비가 많이 내려 물이 불어서 서로 오고 가지를 못하면 양쪽 언덕에 서 마주보면서 서로 잔을 들어 권하며 한나절을 흥겹게 보냈다고 한다.조광조와 함께 혁신정치를 펼치다 비운의 죽임을 당한 김정이 금강산을 유람하는 길에 강릉을 지나다 박수량의 집을 찾아갔다. 가난한 박수량은 머슴들 속에서 함께 새끼를 꼬고 있었는데, 여러 사람들 속에 있기 때문에 누가 주인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반갑게 김정을 맞이한 박수량은 마당에 자리를 깔고서 나물로 술안주를 삼아 이틀 동안을 놀다가 작별하였다. 그때 박수량은 철쭉 지팡이를 선사하면서 다음과 같은 헌시 한편을 지었다.깊은 산골짜기 층층 바위 뒤 안에늦가을에 눈서리 맞은 이 가지이 가지를 가져다 군자에게 주노니늘그막에 그처럼 살아보자는 걸세.이 얼마나 운치 있는 놀이인가, 고상하다는 것은 스스로를 꾸미지 않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그와 같이 자연 속에서 자연이 되는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우리 옛 선인들의 술 풍류를 오늘에 되살린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옛 사람과 나누는 술 한잔촉나라 때 사람인 범진(范鎭)이 허하(許下)에 살 때 집 근처에다 큰 집을 짓고 장소당이라 이름을 지었다. 앞에는 다미가가 있는데 그 높이가 손님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매년 늦봄 꽃이 만발할 때 그 아래에서 손님들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악속하기를, 만일 꽃잎이 술잔 가운데 떨어진 사람은 대백(大白술잔의 이름)으로 한 잔씩 마셔야합니다. 하였다.술잔을 들고 담소하는 사이에 미풍이 스치고 지나가면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잔에 빠짐없이 꽃잎이 떨어졌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이 이 모임을 두고 비영회(飛英會)라고 불렀는데, 그 모임이 사방에 널리 전해져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있다. 〈패해〉허균의 《한정록》제 6권 아치에 실린 글이다.내가 사는 게 좀 상스러워서 그런지, 남들과 어울리지를 못해서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지만 제법 살았는데도 어디 변변한 모임하나가 없다. 남매 계나, 여행 계 또는 무슨 무슨 계를 어떤 사람들은 십여 개씩 든 사람도 많지만 어디 하나도 들지 않아서 어떤 때는 홀가분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그렇다.그러다 딱 하나 여러 사람들과 의기소통해서 활동하는 모임이 매월 둘째 주 수요일마다 만나서 근처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먹고 보자라는 모임이다. 얼마나 즐거운가?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음식도 먹고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밥값은 그 때 그때 나온 만큼만 제 각각 내고 헤어지는, 회장도 없고 구속력도 없는 모임, 그래서 대충 지은 이름이 먹고 보자라는 모임이다. 그러다 먹고 보자라는 이름이 조폭들의 모임이나 게걸스럽게 먹는 무슨 집단의 이름 같다고 해서 바꾼 게 이름의 앞 뒤 만 바꾼. 보고 먹자로 바꾸었지만 다시 먹고 보자로 불리고 있다. 그날 만나서 음식을 먹는 모임도 괜찮다고 여겼는데, 꽃 잎 지는 봄날, 술잔에 꽃잎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는 모임인 비영회(飛英會)를 생각하니, 아무래도 먹고 보자 모임을 변화무쌍하게 바꿔야 할 것 같은데 좋은 생각이 안 떠오르니 이를 어쩐다.지금은 한 겨울이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은 이 긴 겨울에는 어떤 풍류를 즐기며 놀았을까?산다는 것은 떠돈다는 것이요, 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연산군 때의 풍류객 성현의 아들 성세창의 친구인 홍모(洪某)가 눈 내리는 밤에 성현의 집 동원별당에서 밤새워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다. 홍모가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자 한 노인이 눈과 달이 소복한 매화나무 밑에서 눈을 쓸고 앉아서 하얀 백발을 날리며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누구인가?하고 묻자 성세창은 아버지라고 하였다. 성세창의 친구 홍모는 그날 밤의 잊히지 않을 장면을 다음과 같은 글로 남겼다.그때 달빛이 밝아 대낮 같고, 매화가 만개했는데, 백발을 바람에 날려 나부끼고 맑은 음향이 암향暗香에 타 흐르니 마치 신선이 내려온 듯, 문득 맑고 시원한 기운이 온 몸에 가득함을 느꼈다. 용재(성현의 아호)는 참으로 선골유골(仙骨遺骨)의 풍류객이라 할 만하다.흰 눈이 내리는 밤에 거문고를 타거나 듣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할지라도, 그윽한 향이 감도는 커피나 차 한 잔이라도 가운데 놓고 담소를 나누는 겨울의 운치, 거기에 군고구마나 군밤이 곁들여 진다해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 아니면 캔 맥주라도 한잔 씩 기울이며 겨울의 긴긴밤을 못다한 이야기를 나눈다면 얼마나 겨울이 겨울다울까?노는 방법을 모르다보니 갈비나 고기를 실컷 먹으면서 술 마시고 2차를 간 뒤 부른 배 꺼지라고 돈 받고 노래 부르는 것이 아니라 돈 주고 노래를 부르는 곳이 노래방이다. 그나마 예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곡에서부터 가요 또는 팝송까지 그래도 몇 곡씩은 할 줄 알았는데 노래방 세대가 되다보니 노래가사가 화면에 뜨지 않으면 노래 한곡을 제대로 부르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악쓰고 춤추는 사이 바람처럼 지나가는 세월옛 사람들은 시절에 따라 잘 놀았다. 정월 초하루. 정월 대보름. 삼월 삼짇날,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유월 유두. 칠월 칠석. 칠월 백중, 팔월 한가위. 구월 중양절. 십일월 동짓달. 달이면 달마다 그 달에 맞는 놀이를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 서로의 동질성과 대동정신을 함양했다. 특히 백중에서 중양절 무렵까지, 서로 가까운 곳을 정해 만나서 놀다가 헤어지는 반보기나 봄. 가을 냇가에서 고기를 잡으며, 즐겼던 천렵놀이나 봄나물을 뜯으며 즐겼던 상춘놀이는 일반 대중들의 놀이였고, 정자나 누각에서 좋아하는 몇 사람이 만나서 시를 읊으며 세상을 논(論)하거나 산수 유람은 사대부들의 놀이였다.옛 사대부들이 놀았던 것처럼 운치 있게 풍류를 즐기며 잘 노는 것을 생활 속에 뿌리 내리게 할 때가 지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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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16 23:02

[36. 시간의 비밀 속에 추억이 된 군산] 수탈과 저항의 역사 간직한 땅…과거·현재가 공존하다

금강 하구에 자리 잡고 있는 항구도시가 군산이다. 〈여지도서〉의 풍속조에 바닷가 모퉁이 후미진 고을이지만, 인심은 착하고 꾸밈이 없다.라고 실린 군산시 성산면의 금강을 굽어보고 있는 산이 오성산(五城山)이다.오성산은 성산면 성덕리와 나포면 서포리 경계에 있는 높이 266미터의 산이다. 조선조 때 봉수대가 있었던 곳으로 동쪽으로는 불지산 봉수와 서쪽으로 옥구 화산 봉수에 응하였다. 이 오성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치러 왔다가 안개가 자욱하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를 못 하였다. 이때 안개 속에서 다섯 노인이 나타나자 길을 몰라 당황했던 소정방이 그들에게 길을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너희들이 우리나라를 징벌하러 왔는데 어찌 우리들이 길을 가르쳐 주겠느냐 하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화가 난 소정방은 그 자리에서 노인들의 목을 쳐서 죽였다. 그뒤 백제를 함락한 소정방은 그 노인들을 성인이라고 칭송한 뒤 제사를 지내주었고 그때부터 이 산이 오성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오성산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지금까지도 다섯 노인의 무덤인 오성묘(五聖墓)가 남아 있다고 실려 있다.오성산 자락 금강변에 서시포(西施浦)에서 어느 때부턴가 서포리로 이름이 바뀐 마을이 있다. 서포리는 그 당시만 해도 배를 정박하는 곳으로서 강경황산과 함께 강가의 이름난 마을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옛날에 서시(西施월나라 여자로 매우 아름다웠다고 하여 미인의 대명사가 됨)가 이곳에서 출생하였으므로 그대로 지명으로 삼았다는 말이 전해지지만 〈한국지명총람〉에는 서쪽 갯가가 되므로 서포라 지었다고 전한다.군산시 나포면 십자 들녁을 지나서 거슬러 오른 금강 변에 공주산이라는 산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공주산(公州山) 현의 북쪽 13리에 있는데, 전하는 말에 공주로부터 떨어져 왔기 때문에 이름한다.했다. 아름다운 공주산은 옛날에 공주의 태를 묻었기 때문에 공주산이라고도 하고 공주에서 떠내려 왔기 때문에 공주산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산의 형세로 보아서 공주의 태를 묻었다는 설이 더욱 더 타당할 듯싶다.이 산 중턱에 나포리 사람들이 대를 이어 모셔오는 당집이 있다. 고군산열도를 뺀 내륙지방에서는 이곳에서만 영산당제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영산당제는 해마다 정월대보름날 저녁에 지내게 되며 영산당에 밥, 떡, 돼지머리, 과일 등 온갖 제물을 차려놓고 고기잡이와 농사가 잘되며 마을에 아무 탈이 없기를 빌었다. 이 제사에 드는 돈은 제사를 지내기 며칠 전부터 마을의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걸궁굿을 쳐준 뒤 쌀과 돈을 거두어 마련했다.그 산 밑이 곧 진포(鎭浦)인데, 민가들이 즐비하고 배 부리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다.고 기록되어 있는 진포는 군산의 옛 이름이다. 이곳 진포에서 왜구와 고려 수군 사이에 큰 싸움이 있었다. 1380년 8월 왜구의 배 500채가 침략하자 최무선을 비롯한 세 장수가 최무선이 설계하고 감독하여 만든 80여 채의 병선과 새로 만든 무기인 화통과 화포를 싣고 진포에 도착하였다. 새로운 병기를 만든 최무선도 그 효과가 의심스러웠는데, 적선에 다가가 일제히 화포를 쏘자 쌀을 싣기 위해 밧줄로 묶여 있던 일인의 배는 한꺼번에 불타고 왜적 대부분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지금은 군산시에 딸린 하나의 면인 임피 서편에 있는 옥구읍은 만경강의 끝자락인 서해와 인접하였으며, 백제 때의 이름이 마서량현(馬西良縣)이다. 옥구읍 상평리 동문 밖의 옥구향교에는 자천대(自天臺)가 있다. 자천대는 최치원이 일찍이 당나라에서 학문을 닦고 돌아왔을 때 세상이 몹시 혼란하고 민심이 흉흉하자 홀로 바다를 바라보며 독서로 시름을 달랬다는 곳이다. 건평이 30평쯤 되는 이 건물은 원래는 지금의 군산 비행장 자리에 있었는데 식민지 시대 말기에 옥구군 유생들이 옥구읍 상평리 향교 옆으로 옮겼다. 옮기기 전의 자천대를 이곳 사람들은 원자천대라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원자천대의 최치원이 앉았던 바위 위에는 최치원의 무릎 자국과 멱을 감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중환이 〈택리지〉에 기록한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자천대라는 작은 산기슭이 바닷가로 쑥 들나왔고, 그 위에 돌로 된 두 개의 돌 농(籠)이 있었다. 신라 때의 최고운(崔孤雲)이 이 고을의 원이 되어 와서 농 속에다 비밀문서를 보관하였다는데, 농이란 것이 마치 큰 돌과 같았다. 산기슭에 버려져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열어보지 못하였고, 혹 이를 끌어 움직이면 바다로부터 바람과 비가 갑자기 왔다. 마을 백성은 이 농을 이롭게 여겨서, 날씨가 가물 때 수백 명이 모여 큰 밧줄로 끌어서 움직이면 바다에서 비가 갑자기 와서 밭고랑을 흡족하게 적시었다. 그런데 사객(使客 임금의 명을 전달하거나 시행하는 사람)이 옥구현에 올 때마다 번번이 가서 구경하게 되기 때문에 고을에 폐가 될까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이를 심각하게 여겼다. 그런 까닭에 예전에는 이곳에 정자도 있었으나, 100년 전에 정자를 허물고 돌 농도 땅에 묻어 자취를 없애 버려서 지금은 가서 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탁류〉의 작가 채만식이 군산에서 태어난 소설가가 채만식(蔡萬植)이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하나의 독립된 현이었던 임피에서 태어난 그는 태평천하 레드메이드 인생 등 수많은 작품 속에 풍자와 해학 그리고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했는데, 그는 나라 안에서 이름이 가장 아름다운 강 금강을 〈탁류〉라는 소설의 서두에서 이렇게 묘사했다.금강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등께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가지고는 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번 비행기라도 타고 강줄기를 따라가면서 내려다보면 또한 그럼 직할 것이다. 저 준험한 소백산맥이 제주도를 건너보고 뜀을 뛸 듯이, 전라도의 뒷덜미를 급하게 달리다가 우뚝또 한 번 우뚝높이 솟구친 갈재와 지리산, 두 산의 산협 물을 받아 가지고 장수로 진안으로 무주로 이렇게 역류하는 게 금강의 남쪽 줄기다.그놈이 영동 근처에서 다시 추풍령과 속리산의 물까지 받으면서 서북으로 좌향을 돌려 충청 좌우도의 접경을 흘러간다.부여를 한바퀴 휘 돌려다가는 남으로 꺽여 단숨에 놀뫼(논산) 강경에까지 들이닫는다.여기까지가 백마강이라고, 이를테면 금강의 색동이다. 여자로 치면 흐린 세태에 찌들지 않은 처녀 적이라고 하겠다.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웅진)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 흥망의 꿈 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함창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물은 탁하다. 예서부터 옳게 금강이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 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시가지)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그렇다. 채만식은 소설〈탁류〉에서 금강을 눈물의 강이라고 명명하고서 그 당시의 군산을 이렇게 묘사하였다.급하게 경사진 강 언덕비탈에 게 딱지 같은 초가집이며 다닥다닥 주어 박혀 언덕이거니 짐작이나 할 뿐이다. 이러한 몇 곳이 군산의 인구 칠만 명 가운데 육만 명쯤 되는 조선 사람의 거의 대부분이 어깨를 비비면서 옴닥옴닥 모여 사는 곳이다.대체 이 조그만 군산바닥이 이러한 바이면 조선 전체는 어떠한 것인고, 이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에 승재는 기가 딱 질렸다.1899년 5월 2일 부산원산제물포경흥목포진남포에 이어 조선에서 일곱 번째로 개항한 항구 군산은 외국인에게 개방되기 전까지만 해도 옥구군에 딸린 조그마한 포구였다. 백제 때의 군산은 마서량(馬西良)이었고 고려 공민왕 때인 1356년에는 금강 하구에 포구를 설치하여 개성으로 가는 배들을 머무르게 하면서 진포(鎭浦)라고 불렀다. 1397년에는 군산진이 되었다. 군산진, 관아의 북쪽 30 리에 있다. 첨사. 무관. 종 3품이다. 군관 10명이다. 지인 6명이다. 사령 7명이다.라고 영조 때 편찬 된 〈여지도서〉에 실려 있는 군산은 1910년 10월에 군산부로 승격되었다.조선의 문신 박경(朴經)이 땅이 궁하니 3면은 좁고, 하수가 머니 양쪽 변에 편평하다고 노래한 군산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이곳이 호남평야를 배경으로 한 쌀의 집산지임을 알게 되면서 쌀의 수출항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나라에서는 백성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가고 관리는 관리대로 농간을 부려 제 배를 채우기에 바빴다. 그래서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떠돌아 다녔기 때문에 전북충남경기의 곡창 평야지대에는 버려진 옥토가 부지기수였다.한말의 문장가 황현이 지은 〈매천야록〉에 실린 글과 같이 일본인들은 황무지를 힘들이지 않고 차지했다. 그 뒤 일본의 고리대금업자들은 우리 농민들에게 고리채를 놓아 헐값으로 사들이거나 강제로 빼앗았다.●쌀의 집산지 군산농민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북간도로 줄을 이어 떠났고, 그때 아리랑 곡조에 실려 불려졌던 노래는 이러했다.밭 잃고 집 잃은 동무들아어데로 가야만 좋을까 보냐.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아버지 어머니 어서오소북간도 벌판이 좋다 드냐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백두산 고개로 넘어간다.땅을 잃고 살길을 잃은 채 고향을 등진 그 당시 군산의 상황이 시조시인인 가람 이병기(李秉岐)선생이 지은 사비성을 찾는 길에서라는 기행문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그때 보던 군산은 벌써 꿈과 같아 잘 기억할 수 없으나 지금 보는 군산과는 판연히 다른 줄 안다. 그때는 저렇게 일본식 가옥이나 서양식 건축물이 많지 못하고 저렇게 시가도 번창하고 정리되지 못하고 조선인 부락도 저렇게 되지는 아니하였다. 과연 금석(今昔)의 감이 없지 못하다. 더구나 군산은 조선 미곡의 도회로서 해마다 수백만 석이 모여들었다가 그것이 모두 일본으로 건너가고 조선인들은 집도 없이 한편으로 몰려 움을 묻고 산다는 말을 들음에랴.이 현상이 군산만이랴. 그 빈민들은 장사도 못 하고, 품도 못 팔고, 거지로 아니 나가면 됫박이나 들고 다니며 미곡시장에서 볏섬이나 추스를 적에 몇 알씩 떨어지는 알맹이를 주워다 먹고 연명을 한다.이곳 임피현을 두고 고려 때의 문장가인 이규보도 시한 편을 남겼다.고현은 의연하게 물가에 닿아있고, 앞에 달리는 붉은 깃발 수풀을 떨치고 돌아가네. 오고 갈 제 오직 꾀꼬리만이 아는 것인데, 쇠하고 병든 몸이 어찌 나는 듯한 말을 견딜 건가. 객사에는 버들 늘어진 새길 닦았고, 인가는 꽃 비치는 싸립문 반쯤 닫았네. 참군이 야위어 보기도 민방한데, 사녀들은 무슨 일로 모여 둘러싸나.이곳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일제 때 완주에서 옮겨 온 두 점의 석조 유물과 30여점의 불교유물이 남아 있다.군산 개정의 발산리에 큰 농장을 가지고 있었던 시마따니라는 일본인이 자기 정원의 치장물로 조성하기 위해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봉림사터에서 석등(보물 234호)과 오층석탑(보물 276호)을 옮겨간 것은 1940년대였다. 몇 년 후 해방이 되고 농장주인 시마따니가 일본으로 건너간 농장 터에 발산초등학교가 들어섰지만 어디서 가져왔는지 출처도 분명하지 않은 30여 점의 석물들에 둘러싸인 봉림사터 유물들은 돌아가지를 못했다.봉림사터 유물들의 수난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70년대 말까지 봉림사터 가까운 곳 삼기초등학교에 있던 삼존불상을 비롯 여러 점의 불교 유물들을 그 당시 전북대 박물관장이던 분이 밤중에 트럭으로 싣고 가서 박물관 앞에 옮겨 놓고 만 것이다.일본인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일제 때 세워진 건물들이 많이 있다. 군산 세관, 구 한국은행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관광객들을 맞고 있으며, 그 중에 한 곳이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다. 1913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승려 우치다(內田)에 의해 금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동국사는 한국의 전통사찰과는 다른 일본식 사찰이다.주요 건물은 대웅전, 요사채, 종각 등이 있는데, 대웅전은 요사채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고, 팔작지붕 홑처마 형식의 일본 에도(江戶) 시대의 건축양식을 띠고 있다. 건물 외벽에는 창문을 많이 달았고, 우리나라의 처마와 달리 처마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특징을 하고 있는 동국사 대웅전은 2003년에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다.만물이 오고 만물이 가는 존재의 수레바퀴 속에서 군산은 또 얼마나 많은 변화를 거듭하면서 거듭날 수 있을까?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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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09 23:02

【내변산에서 내소사 가는 길】직소폭포 장쾌한 울림 쭉쭉 뻗은 전나무 숲길…세상 시름 '사르르'

얼마 전 조선 중기 문장가이자 혁명가였던 교산(蛟山) 허균(許筠)의〈한정록(閑情錄)〉을 읽었다. 그 책을 읽으며 겨울의 초입에 변산을 넘으리라 생각했었다. 혼자도 좋고 둘이라면 더욱 좋고 그렇게 넘어가리라 생각했는데, 그때 가슴 속 깊이 들어와 떠나지 않는 글이 〈학림옥로(鶴林玉露)〉에 나오는 내용이었다.송나라 조사서가 말했다.나에게는 평생 세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이 세상 모든 훌륭한 사람을 다 알고 지내는 것이요.두 번째 소원은 이 세상 모든 양서를 다 읽는 일이요.세 번째 소원은 이 세상 경치 좋은 산수를 다 구경하는 일입니다.이에 내가 말하였다.다야 어찌 볼 수 있겠소. 다만 가는 곳마다 헛되이 지나쳐버리지 않으면 됩니다.무릇 산에 오르고 물에 가는 것은 도(道)의 기미를 불러 일으켜 마음을 활달하게 하니이익이 적지 않습니다.그러자 그가 덧붙여 말했다.산수를 보는 것 역시 책 읽는 것과 같아서 보는 사람의 취향의 고하(高下)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 굳이 방안에 들어박혀서 공부를 하지 않고, 자연을 벗하는 공부, 그게 참 공부가 아닐까?● 과거 영광 상상케하는 실상사 터오늘의 책은 내변산에서 내소사 가는 길에 펼쳐진 온갖 사물이다. 내변산 탐방 지원센터에서 조금 오르자 나타나는 절, 실상사(實相寺)다. 이 절은 신문왕 9년(689) 초의선사가 창건한 사찰로서 고려시대에 제작된 불상과 대장경 등 보물급 문화재가 있었다. 그러나 625때 전부 소실되고 말았다. 3기의 석조부도와 허튼 돌로 막 싼 기단만 남아 있는 절터는 이름 모를 뭇 새들의 울음소리 속에 붉은 단풍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늦가을 햇살에 온 몸을 드러낸 저 금당 터에 내소사 대웅전이나 개암사 대웅전 같은 날아갈 듯한 절 집이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또한 내소사에 소재해 있는 연재루는 이 실상사에서 1924년에 옮겨갔다는데.어디선 듯 독경소리 들리는 듯 싶고 계단을 내려설 때 뒤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소리 이 산 속에 가을이 너무 깊고 깊구나, 그 때만 해도 보이지 않던 호수가 하나 만들어지고 그 물결이 찰랑거리는 바로 뒤쪽으로 길이 나있다. 잔잔한 물결 너머의 산들은 붉게 타오르고 가족 단위의 산행객들이 쉴 새 없이 오고간다.한참을 올라가자 발아래에 소가 보이고 그 위에서 떨어지는 한줄기 직소폭포, 김수영의 폭포라는 시 한 편이 물소리에 실려 스치고 지나간다.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시정할 수 없는 물결이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곧은 소리는 소리이다.곧은 소리는 곧은소리를 부른다.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나타(懶楕)와 안정을 뒤집어 놓듯이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나는 폭포 아래로 내려가 가만히 바위 위에 걸터앉는다. 떨어지는 폭포수 소리는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고 나뭇잎이 한 잎, 두 잎 물위에 떨어진다. 문득 바람이 우수수 불고 그 바람결에 빗자루로 쓸어대는 것처럼 물살들이 어딘가를 향해 우르르 밀려간다.옥녀봉, 선인봉, 쌍선봉 등의 봉우리들에 휩싸여 흐르고 있는 2km의 봉래구곡 속에서도 단연 빼어난 변산 팔경의 제1경이 실상 용추를 이루고 실상 요추에서 흐르는 물은 바로 아래 제2, 제3의 폭포를 이루며 흘러 분옥담, 선녀탕 등의 소를 이루며 이를 일컬어 봉래구곡이라고 부른다. 이 물이 흘러 백천내에 접어든다. 백천내에서 흐르는 물이 의상봉 아래 중계리에 닿았고 그 아래에는 중계 초등학교가 있었다.직소폭포를 지나면서 길은 평탄하다. 마치 그 옛날 이곳쯤에도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고 살았을 법하다.형형색색 나뭇잎들이 붉게 물들어 있고, 길 아랫자락을 흐르는 물소리는 단아하다. 어쩌다 만나는 등산객들이 서로 만났다 헤어지고 부는 바람결에 우수수 나뭇잎들이 떨어진다. 내가 떨어지는 단풍잎을 한 잎 주을 때 화담 서경덕이 내게 한마디 말을 건넨다.존재하는 만물은 오고 또 와도 다 오지 못하고, 다 왔는가 하면 또 온다. 오고 또 오는 것은 시작이 없는 것에서부터 오는 것인데 그대에게 묻노니 처음에 어디서부터 오는가? 존재하는 만물은 돌아가고 또 돌아가도 다 돌아가지 못하며, 다 돌아갔는가 하고 보면 아직 다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계속 해도 돌아감은 끝나지 않는 것이다. 그대에게 묻나니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그렇다. 화담의 물음처럼 또 어디로 돌아가고 있는가? 이 나뭇잎이나 마찬가지로 내가 이 자연으로 돌아갈 날도 멀지 않을 것인데 나는 이렇듯 바쁘게 어디로 가고 있는가?● 변산, 나라 재목의 보고변산은 바깥에다가 산을 세우고 안을 비운 형국으로 그래서 해안선을 따라 98㎞에 이르는 코스를 바깥 변산이라고 하고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어 한 때는 사찰과 암자만을 상대로 여는 중장이 섰다던 안 변산으로 부르기도 한다.호남의 5대 명산으로 불리는 변산은 능가산, 영주산, 봉래산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왔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변산을 다음과 같이 썼다.서쪽, 남쪽, 북쪽은 모두 큰 바다고, 산안에는 많은 봉우리와 구렁이 있는데 이것이 변산이다. 높은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산꼭대기, 평평한 땅이나 비스듬한 벼랑을 막론하고 모두 큰 소나무가 하늘에 솟아나서 해를 가리웠다. 곧 변산의 바깥은 소금 굽고 고기잡이에 알맞다. 주민들이 산에 오르면 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일을 하며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값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하다.봉래구곡, 직소폭포, 선제폭포 같은 빼어난 절경이 있는 산 변산은 산이 깊고 울창하여 예로부터 약초나 버섯을 재배하거나 벌도 많이 쳤다. 특히 안 변산의 훤칠하게 자란 소나무는 곧고 단단해서 고려 때부터 궁궐을 지을 재목과 목선의 재료로 많이 쓰였다.이규보가 쓴 글을 보자. 변산은 나라 재목의 보고이다. 소를 가릴만한 큰 나무와 찌를 듯 한 나무줄기가 언제나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층층의 산봉우리와 겹겹의 산등성이에 올라가고 쓰러지고 굽고 펴져서, 그 머리와 끝의 둔 곳과, 밑뿌리와 옆구리의 닿는 곳이 몇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옆으로 큰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그런 연유로 원나라가 일본 원정을 할 때에도 이 변산의 나무들로 전함을 만들었다.그러나 지금 변산의 삼림 상황은 어떠한가. 충청도 안면도의 소나무 숲과 더불어 목재의 생산지로서 나라 안의 손꼽히던 변산이 마구잡이 벌목으로 인하여 소나무숲은 없고 잡목만이 무성할 뿐이다.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곧 바로 하산 하는 길, 하나는 능가산 가인봉으로 가다가 내소사(來蘇寺) 아랫자락으로 가는 길, 나는 능가산으로 발길을 옮긴다.천천히 오르는 산, 암벽 사이로 나 있는 길을 올라서자, 멀리 선운산, 소요산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전란에서 살아남은 내소사능가산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길을 내려가자 내소사에 이른다. 경내에는 범종각, 봉래루, 삼층탑, 설설당, 대웅보전 등의 건물들과 요사 채들이 그림처럼 서있다.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위치한 내소사(來蘇寺)는 백제 무왕 34년(633) 혜구두타가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 대 소래사와 소 소래사가 있었는데 지금의 내소사는 예전의 소 소래사라고 한다. 그 뒤 1633년(인조 11)에 청민선사가 중건하였고 1902년 관해가 중창한 뒤 오늘에 이르렀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언제부터 바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고려 때 빼어난 시인인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제변산 소래사(題邊山蘇來寺)라는 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정지상이 변산에 왔던 시절만 해도 소래사로 불렸음을 알 수가 있다.적막한 맑은 길에 솔뿌리가 얼기설기,하늘이 고대, 두우성(斗牛星)을 숫제 만질듯,뜬 구름 흐르는 물 길손이 절간에 이르렀고,단풍잎 푸른 이끼에 중은 문을 닫는구나.가을바람 산들 산들 지는 해에 불고산달이 차츰 훤한데 맑은 잔나비 울음 들린다.기특도 한지고, 긴 눈썹 저 늙은 중은한 평생 인간의 시끄러움 꿈 조차 안 꾸는 구나.위의 시로 보아서 중국의 소정방이 석포리에 상륙한 뒤 이절을 찾아와서 군중재를 시주하였기 때문에 내소사로 바뀌었다는 말은 그냥 전해져 오던 전설이 맞을 듯 싶다. 내소사는 선계사, 실상사, 청림사와 더불어 변산의 4대 명찰로 불렸지만 다른 절들은 전란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내소사만 남아있다.보물 제277호로 지정되어 있는 내소사 고려동종(高麗銅鐘)은 1222년(고종 9년) 변산의 청림사에서 만든 종으로 청림사가 폐사되면서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은 1857년(철종 4년) 내소사로 옮겼다. 높이가 1.3m에 직경 67cm인 전형적인 고려 후기 작품으로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범종각을 지나 봉래루를 지나면 대웅보전 앞에 다다른다. 조선 인조 11년(1633)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내소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위에 낮은 기단과 다듬지 않은 주춧돌을 놓고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집이다.조선 중기 이후에 유행했던 다포계 건물로서 공포의 짜임은 외 3출목과 내 5출목으로서 기둥위에는 물론 주간에도 공간포를 놓은 다포계 양식이다. 법당 내부의 제공 뒤뿌리에는 모두 연꽃 봉우리를 새겨 우물반자를 댄 천장에 꽃무늬 단청이다.내소사 대웅보전 건물은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나무토막들을 깎아 끼운 맞춘 건물로도 유명하다.내소사를 중창할 당시 대웅보전을 지은 목수는 삼년 동안을 나무를 목침덩이만 하게 토막 내어 다듬기만 했다고 한다. 나무 깎기를 마친 목수는 그 나무를 헤아리다가 하나가 모자라자 자신의 실력이 법당을 짓기에 부족하다며 법당 짓기를 포기하고자 하였다.그러자 사미승은 감추었던 나무토막을 내놓았지만 목수는 부정한 나무토막은 쓸 수 없다며 끝내 그 토막을 빼놓고 대웅보전을 완성했다고 한다.그 연유로 지금도 대웅보전 오른쪽 안 천장은 왼쪽에 비해 나무토막 한 개가 부족하다고 한다.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내소사의 제일가는 아름다움은 내소사 대웅보전의 정면 3칸 여덟 짝의 문살을 장식한 꽃무늬일 것이다. 연꽃과 국화꽃이 가득 수 놓여 진 문짝은 말 그대로 화사한 꽃밭을 연상시키며 원래는 형형색색으로 채색되어 있었을 그 꽃살문이 나무 결로만 남아있는 것이 오히려 더 아련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한곳 한곳을 지극한 정성으로 파고 새긴 옛 사람들의 불심에 새삼 고개 숙여지는 이 문살의 꽃무늬는 간살 위에 떠 있으므로 법당 안에서 보면 꽃무늬 그림자가 보이지 않은 채 단정한 마름모꼴 그림자만이 보일 뿐이다.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 마치 가물 현(玄)자의 의미처럼 가물가물한 그 아름다움을 보는 듯하다.● 상쾌한 전나무 숲으로 마무리내소사의 보물 중의 하나가 일주문에서 내소사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이다. 글쎄 이 나무들이 불과 60~70년 전에 심어졌다고 하면 누가 믿기나 할까? 어린 나무들을 심으며 그 나무들이 목재가 되고 열매를 맺을 걸 누가 떠올리기나 할까? 그러나 내소사의 일주문에 접어들면서 그 생각들은 저절로 바뀔 것이다.나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을 진실로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훤칠한 대장부처럼 쭉쭉 뻗은 전나무 숲길에는 내장산 가을 단풍의 인파에 밀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그래도 전나무 숲길은 얼마나 상쾌한가.이런 숲길을 걸을 땐 한 꺼풀 한 꺼풀 입었던 옷들을 벗을 일이다. 삼림욕이 아니라도 잣 내음 같은 솔잎향내 같은 이 냄새에 온몸을 내맡겨볼 일이다. 전나무 숲이 끝나기도 전에 들어오는 붉게 타오르는 단풍나무 뒤편에 내소사 전경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고, 일주문 근처에는 거대한 당산나무가 있다. 나이가 950년쯤 되었을 것이라는 이 나무는 할머니 당산으로 내소사 동종 앞에 서 있는 할아버지 당산나무와 한 짝이라고 한다.그 나무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사이 산자락에 어둠이 내리고 내소사도 변산도 어둠 속에 서서히 잠 있었다.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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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26 23:02

[34. 동학의 땅 '정읍 태인'] 시리고 아픈 역사로 쓸쓸하게 퇴락해가다

●태산군, 정읍시 태인면으로 남아 있다오래 전에 지역의 몇 분과 담소를 나누 던 중에 모르고 있던 몇 가지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제가 통감부시절에 전북 지역에 4개의 경찰서를 세웠는데, 전주. 남원, 고부 그리고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였다. 전주와 남원은 당연하다고 생각되지만 고부와 피노리는 어째서 그랬을까? 생각했는데, 고부는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이고, 피노리는 동학의 지도자 전봉준이 붙잡힌 곳이라 그랬다.일제는 1914년에 행정구역을 통폐합했는데, 그 대상 군현이 대부분 기질이 강한 지역이었다.고산자(古山子)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는 군현(郡縣)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1914년 이후 사라진 군과 현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1939년 11월에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면서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쓰게 했는데, 그 창씨개명보다도 훨씬 앞선 1914년에 단행한 군현 통폐합 때문이었다.유주현의 대하소설 〈조선총독부〉에는 1914년의 군면 통폐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짧게 언급하고 있다. 1914년 3월 새로운 관제를 포고하여 조선의 부군면을 통폐합하고 97개의 군을 폐지해 버렸다.조선총독부는 조선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조선 8도의 지방관제를 개편하면서 군(郡)은 317개소에서 220개로 조정하고 4338개의 면을 2521개로 정리하였다. 1895년에 조선왕조가 지방관제 개편을 위해 군현제를 군으로 변경했던 고을을 대폭 줄였는데, 그때 그들이 폐지의 기준으로 삼은 고을이 역사적으로 기질이 강한 고을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인 전라도의 고부는 정읍에, 안의 송장 하나가 함양 산 사람 열을 당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질이 강한 경상도의 안의는 함양에, 그리고 이필제의 난과 의병장 신돌석의 고향으로 도호부였던 영해는 영덕에 귀속시켰다. 그 외에도 오래된 전통과 역사 속의 고을들(진위. 목천(유관순). 결성. 음죽, 청풍, 자인(한장군 놀이), 영산. 예안. 용담. 금구(정여립 사건). 정산(이몽학의 난)이 영문도 모른 채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나라 곳곳에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혈(穴)자리에 박았다는 쇠말뚝이나 지명(산. 마을이름)을 바꾸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도의 정치적 술수로서 조선의 역사와 정신을 송두리째 앗아가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때부터 유서 깊었던 그 고을들(폐군현)의 동헌이나 객사를 학교로 만들면서 그 고을들의 몰락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물론 세상의 모든 것은 나고 죽는다. 무수한 탄생과 소멸을 통해 역사가 진전되어 온 것이라고 볼 때 굳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가버린 것, 또는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연민이 남아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심사이리라.만물은 가고 오며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아간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글과 같이 가고 오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번창했던 지역이 흥망성쇠를 겪으며 쇠퇴해간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면 비애보다도 우선하는 것은 늦은 가을날 11월과 같은 쓸쓸함이다. 1914년 까지만 해도 정읍보다 더 큰 군이었다가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정읍시의 하나의 면(面)이 된 태인(泰仁)을 찾아가는 내 마음을 무엇이라고 설명할까?버스에서 내려 터미널 옆 솔다방으로 들어갔다. 다방에는 40대 중반의 뚱뚱한 여자가 차를 나르고 있었고 항혼 길에 들어선 나이 드신 어르신 몇이 다방을 지키고 있었다. 차를 한잔 마시고 말을 건넸다. 태인이 언제부터 이렇게 쇠퇴했지요? 내 말에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태인이 이 지역의 중심지였어, 그런데 호남선열차가 신태인으로 지나가게 되면서 이렇게 되고 말았어, 60년대 만해도 태인 인구가 2만여 명 쯤 되었는데, 지금은 불과 몇천 명이나 될랑가. 그래도 아직도 다방이 여섯 개나 된다는 태인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지나간다. 내 눈에 비친 태인의 모습은 한가하다 못해 심심하다.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으로 되어 있는 태인은 백제 때 대시산군(大尸山郡)이었다. 신라 때에 이르러 태산군(太山郡)으로 고쳤으며 바로 근처에 있던 인의현(仁義縣)을 무성(武城)으로 고쳐 태산군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 고부군에 붙였다가 후에 감무를 두었고, 조선 태종 9년에 지금의 이름 태인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정읍에 흡수되었다.길은 복잡하지 않다. 옛 시절 해남에서 서울로 이어지던 삼남대로가 지나던 길이 국도 1번이 되고 그 길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는 태인의 태인초등학교 아래쪽에 태인 동헌이 남아 있을 뿐인데 보수 중이었다.정곤의 기문에는 태인관아에 대한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태인현은 곧 옛날의 태산 인의의 고을인데, 아조(我朝)에서 두 고을의 이름을 아울러서 태인이라고 하였다. 읍내는 옛날 태산의 동쪽 구석에 치우쳐 있었으므로 인의의 백성들이 왕래하는데 병통으로 여겼다. 병신년 가을 8월, 현감 황경돈 군이 나와서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거산역 고관(古館)을 현의 객사로 삼았으나, 너무 좁고 누추하였다. 무술년 겨울에 오치선 군이 계속해 와서 고관의 지세를 살피고 후청, 동서침, 낭청 동서행랑을 세우니 모두 몇 칸이다.태인의 서쪽에 병풍처럼 둘러 쳐진 산이 성황산이다. 성황산은 성황신을 모신 산이었는데 성황당은 동학농민혁명당시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다.이곳 태성리는 본래 태인군 군내면 지역으로 향교의 대성전을 본 따서 태성리라 부르게 되었는데, 태인향교 남쪽에 있는 정자인 만화루(萬化樓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 75호)는 조선 영조의 어머니인 최씨나 단종비 정순황후 송씨가 이곳에서 출생하여서 건립하였다는 얘기가 남아 있다. 향교 뒤편으로 보이는 성황산 중턱에는 현대의 산물인 산장모텔이 들어서 있는데 그렇다면 이곳 태인을 진호(鎭護)하였던 진산(鎭山)은 어느 산인가?〈신증동국여지승람〉 의 산천조에는 죽사산(竹寺山) 현의 북쪽 2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아무리 태인 사람들에게 물어도 죽사산을 아는 사람이 없다. 동헌 뒤편에 있는 산은 성황산이고 증산교의 한 파인 미륵불교총본부 뒤편에 있는 항가산(恒伽山120m)이 진산일 듯싶지만 어느 때부터 죽사산이 항가산으로 변했는지도 알 길이 없다.●무성서원 등 곳곳에 최치원의 자취이곳 태인의 여러 곳에 최치원의 자취가 남아 있다.최치원이 스스로 서쪽에서 배워 얻은 바가 많다고 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장차 자기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쇠해가는 나라의 정국은 의심과 시기가 많아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드디어 외직으로 태산군 군수가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글이다. 그런 연유로 태산군수가 된 최치원이 풍류를 즐기며 놀았다는 정자가 호남제일루라는 피향정(披香亭)이다연꽃이 만발하면 그 향기가 그윽하다는 피향정은 앞에는 피향정 뒤에는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태산군수로 와 있던 최치원이 이 연못가를 거닐며 풍월을 읊었다고 전해져 온다. 현재의 건물은 고려 현종 때 현감 박승고가 중건 한 뒤 두 차례의 중수를 거쳤고 지난해에 다시 보수 되었다. 정면 5칸에 측면 4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4면이 모두 트여 있고 기둥이 33개이고 빙 둘러 난간이 처져 있는 연등천장이며 합각 밑에 우물반자를 두었으며 보물 제 2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연지는 객관 남쪽에 있다 고 하였는데 연지는 지금도 정자 아래쪽에 남아 있다. 원래는 상하연지가 있었는데 상연지는 민가가 들어서면서 도로로 편입되고 하연지만 남았다.일제 이후 한때는 태인면사무소로 사용되어 기둥마다 상처를 입은 피향정에 수십 개의 공적비들이 서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만석보를 세운 고부군수 조병갑의 아버지인 조규순의 영세불망비이다. 조병갑은 고부군 수로 부임하자마자 그의 아버지 조규순이 이곳 태인현감을 지냈던 것을 핑계로 주민들의 혈세를 모아 선정을 베푼 그 공을 영원히 잊지 못하겠노라고 태인현감조규순영세불망비부터 세웠다.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하였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비석들이 많이 서 있고, 이름난 산의 반반한 바위에는 어김없이 누군가도 모르는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데, 어떻게 하면 단기간 내에 치부를 할 것인가에만 혈안이 되었던 조병갑이야 오죽했겠는가, 다른 돌과 달리 오석(烏石)에 새겨진 조규순 영세불망비는 엊그제 새긴 것처럼 아주 선명하고 그 뒤편에는 조병갑이라는 이름이 너무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다만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하단은 부러져 그 아랫부분이 없는 것을 보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그 비를 세우며 재미를 본 조병갑이 백성들의 물 걱정을 덜어주겠다고 원래 정읍천변에 구보가 있었음에도 정읍천과 태인천이 만나는 동진강에다 만석보를 만든 뒤 물세를 더 걷게 되면서 근현대사의 출발점이 된 동학농민혁명이 유발된 것이다. 한편 피향정 북쪽에 애련당(愛蓮堂)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해인 1885년에 헐리우고 앞의 연못은 메워져 시장이 되고 말았으니 세월의 탓인가? 사람의 탓인가?태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칠보면 무성리에는 최치원을 모신 무성서원이 있다. 광해군 7년인 1615년에 창건하여 최치원을 모셨던 태산사를 중종 때 현감을 지낸 신영천(申靈川)을 모셨던 생사당을 합해서 숙종 22년에 무성서원의 무성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무성서원은 신잠과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과 김관을 배향하였는데 이 서원은 병산서원이나 도산서원, 또는 소수서원처럼 잘 짜여진 위세가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래 묵은 은행나무가 노란 단풍으로 갈아입을 때는 켜켜히 쌓인 역사의 숨결을 접할 수가 있어서 다시 가고 싶은 서원이다. 이 서원은 고종 5년(1868) 전국의 서원이 철폐될 때도 살아남은 47개 중 한곳이며 사적 제 16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태인 근처 칠보면에는 원백암 남근석이 있고 산외면에는 중요민속자료 제 26호로 지정된 김동수씨 고가가 있다. 한편 태인의 성황산에서 우금치 싸움에서 패한 동학군이 마지막 싸움을 벌였다. 결국 마지막 싸움에서 진 전봉준은 동학군을 해산시키고 입암산 너머 순창의 피노리로 갔고 김개남은 회문산의 종성리로 피신을 했다.전봉준은 그곳에서 부하접주였던 김경천의 고발로 관군에게 다리가 부러진 채 붙잡혔으며 김개남은 회문산 아래 산내면 종성리 매부집으로 몸을 숨겼다. 그 마을에 옛 친구 임병찬이 있었다. 그는 아전 출신이었고 그 근방의 부호였다. 임병찬이 아랫마을에 있는 김개남에게 자기가 있는 마을로 올라 오라고 한 뒤 전주 감영에 신고했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강화 수비병의 종군이었던 황헌주와 포교들을 보냈다.김개남이 숨어 있던 집을 포위한 관군이 어서 나와 포승줄을 받으라라고 말하자 김개남은 측간에서 변을 보고 있다가 올 줄 알았다. 똥이나 누고 나가겠다.하고 껄껄 웃었다고 한다.그를 잡아 갈 적에 그가 혹시 도술을 부릴지 모른다고, 열 손가락 열 발가락 손끝 발끝에 대꼬장이를 박았다고 한다. 김개남은 전주로 끌려가 전라관찰사 이도재의 즉결심판으로 전주 서교장에서 효수당하여 고난에 찬 생애를 마감했다.그 처형 상황을 황현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적 김개남이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을 받았다. 심영(沁營)의 중군 황헌주가 개남을 포박하여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 이도재가 개남을 신문하였다. 개남은 큰소리로 우리들이 한 일은 모두 대원군의 은밀한 지시에 의한 것이다. 지금 일이 실패한 것은 또한 하늘의 뜻일 뿐인데 어찌 국문한다고 야단이냐.고 하였다. 도재는 마침내 난을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 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머리는 상자에 넣어서 대궐로 보냈다.그곳에서 두 사람이 모두 잡히지 않았다면 종성리에서 김개남을 만나 재기의 칼날을 갈았을 것이다. 김개남을 밀고한 임병찬은 훗날 면암 최익현과 더불어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고 대마도까지 동행한다. 면암 최익현의 순절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 후 다시 체포되었고, 1916년 5월 유배지 거제도에서 단식사하고 만다. 나라를 위한 마음은 똑 같았지만 나라를 위한 방법은 그렇게 달랐다.이렇듯 시리고 아픈 사연을 간직한 태인에서 하루를 보내고 시외버스에 올라 전주로 향했다. 그 때 유장하게 흐르는 동진강변에 자리 잡은 태인은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고, 어디선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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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19 23:02

[33. 집에 대한 단상] 허공 속에 지었던 집…그 아련한 추억

● 임실로 이사가던 날 찾아온 콤플렉스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눈에 밟혀서 발길을 붙잡는 것들이 있다. 쇠락한 것, 허물어져 가는 것, 연민이랄까? 슬픔이랄까, 그런 감정에 빠져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망연히 앉아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게 하는 것, 사람이 살다간 빈집이다.집이란 풍경보다는 한 영혼의 상태이다.라고 본 어떤 시인의 말은 대체로 맞다.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데, 금세라도 주인이 나타나 인기척을 들려줄 것 같은 빈집, 그 〈빈집〉을 노래한 시인이 기형도였다.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아ㅣ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집이란 무엇일까? 에드워드 존 펠프스는 집은 자신만의 성城이다.라고 갈파했다. 어린 시절부터 오랜 나날, 나는 그 성을 과잉은 아니지만 결핍되지 않는 마음으로 나의 성 이라고 여기지 못한 채 극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았다. 그 성城 카프카의 장편 소설 성과 같이 들어가기 힘든 그 성을 내 이름으로 소유하고 그 오랜 콤플렉스에서 벗어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남의 집에 살다가 졸업하던 해 이사를 갔던 집이 허물어져 내릴 것 같은 단칸방이었다. 이상의 소설 〈날개〉의 한 구절 같이 손 수건만한 해가 잠시 창문으로 들어왔다가 나가는 그 집에서 일 년쯤 살다가 아버님이 아프시자 어머님은 이사를 결정하셨다.초가을 어느 날, 이사를 가는 날이었다.고구마를 캐가지고 집에 돌아오자 할머니가 내려와 계셨다. 그렇게 말이 많으시던 할머니가, 아무 말도 없으신 채 아버지만 가만히 바라보고 계셨다. 아무리 미워하고 그래서 매일 만나면 욕을 퍼부어댔던 아들이지만 당신의 큰 아들이, 더구나 장손을 데리고 당신이 듣도 보도 못한 먼 곳으로 이사를 간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겠는가? 더구나 자식이 돈도 벌지 못하시고 그토록 미워하면서 시집살이란 시집살이는 다 시키시고 구박만 했던 며느리가 행상을 해서 번 돈으로 산 집으로 이사를 간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힘드셨을 것이다.우리 큰 손주(손자), 인제가면 언제 본디야, 친구들 허고 싸우지 말고, 나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라이 하고 내게 말을 마치신 할머니는 결국 저만치 돌아서서 목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이사를 간다고 하면 먼저 가슴이 설레어야 하는데, 두근거리는 가슴은커녕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니 이 무슨 심사인가?곧 이어 작은 아버지 내외와 큰 당숙까지 내려와 이삿짐을 꾸리지만 저마다 살아온 내력으로 이러한 상황만으로도 가슴이 버겁다는 것을 서로 아는지라 가슴 속에 쌓인 말들은 안하고 있다.그랬을 것이다. 힘들여 형수가 번 돈을 노름빚으로 많이 날린 것을 알고 있는데 이사 갈 집이 얼마나 번듯할 집이겠으며 살아갈 나날이 얼마나 힘들 것인 가가 불 보듯 뻔 한데 이사 가는 것이 그리 기쁠 일이 있겠는가?이사 짐이라야 장독대 몇 개에다 쌀 두서너 가마 그리고 오전에 수확한 고구마 몇 가마가 고작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여동생을 데리고 앞에 타고 우리 삼형제는 짐칸에 실려 진안 백운에서 임실 관촌으로 이사를 간다.그래 우리 집이 지금 이사를 가는구나. 그때까지도 나는 우리 집이 이사를 가는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를 몰랐다. 고개를 넘고 낮선 마을을 지나 몇 시간을 달렸을까?기차가 지나는 철길이 보이고 그 철길을 건너 도착한 마을이 현재 치즈마을로 알려진 행정구역상 임실군 관촌면(임실읍으로 편입됨) 금성리 중금마을이었다.이 마을이 내가 살 곳이구나.하고 안도의 숨결을 내 쉬기도 전 나는 암담한 절망감부터 맛보아야 했다.결심을 한다는 뜻으로서라도 내게는 나의 상황에 끝없이 절망할 권리가 있다는 카프카의 글에서처럼 나는 고대하고 고대했던 이사를 가자마자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내가 살아야 할 집이 대지라고 해야 열다섯 평도 안 되고, 방 한간( 3.5평이나 될까 싶은) 에 부엌 한간(2.5평이나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2.5미터도 채 되지 않는 마을길이 방문 앞에 나 있는 말 그대로 길갓집이었다.네가 흰 바우떡(댁) 큰 아들이구나. 하고 어떤 중년의 아주머니가 내 등을 두드리는데 그 손길이 미치자마자 마치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당황한 쥐가 쥐구멍 속에 얼굴을 감추듯 방안으로 들어간 나는 작은 방 한 구석에 몸을 숨긴 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그런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어머니는 이사를 왔다는 징표로 팥죽을 쑤기 시작했고, 이사를 온 사람을 반기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했다.그날 팥죽과 함께 준비해온 막걸리를 마시며 즐기던 풍물 가락 속에서 내 가슴에 상처는 깊게 패었다.좁은 복도 모퉁이의 그림자 하나 흔들렸네.침묵은 벽을 타고 흐르고 집은 더 없이 어두운 구석에 웅크려 들었네.라고 노래한 르베르디의 〈대부분의 시간〉의 몇 소절처럼 나는 그날부터 임실에 머무르는 동안은 그 집에서 단 한발자국도 떠나는 것이 불편한 붙박이가 되었다.나는 그 집에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고 몇 사람이 나를 찾아왔어도 만나지 않았다. 더 이상 의 희망이 없을 것 같은 곳, 그곳이 바로 비좁은 방이었다.그렇다면 집이란 무엇이며 어떤 존재인가?어린이에게 집을 그리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그가 그의 행복을 그 속에 보호하고 싶어 하는, 가장 은밀한 꿈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 고 발리프(Balif) 부인은 회고했다.● 집 짓는 자체만으로 행복했던 시절언제 쯤 번듯한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을까? 나는 매일 허공 속에 집을 짓고 또 지었다. 부모님에게 내가 내 의견을 말한 것은 집을 옮길 수 없느냐 하는 그것뿐이었다. 우리 집 형편상, 그 무엇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지만, 방이 두 개만 있어도, 길갓집만 아니어도 살 것 같았다.그 말을 여러 번 해서 그랬는지, 아버지가 우리 집 건너편에 있는 빈 집터로 가더니 아무래도 이곳에 우리 집을 짓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얼마나 좋아했던지,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그 빈 집터는 우리 것도 아니고 지금 우리 집 형편에 무슨 집을 짓겠다는 말인가?우선 흙벽돌부터 찍어 놓자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 하신 뒤 개울 건너의 공터에 진흙을 경운기로 몇 차 실어 날랐다.그리고 날이 며칠간 좋을 것이라는 날을 잡아 일꾼들을 사서 벽돌을 찍기 시작했다. 그 때 내 기분은 날아갈듯 좋았다. 임실로 이사를 와서 어느 한순간도 나는 내가 사는 집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집을 짓는다면 그동안의 그 답답했던 마음이 풀릴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물론 3칸 접 집이나 2칸 접 집을 짓는다고 내 생활이나 우리 집의 경제상황에 무슨 변화가 있겠는가, 하지만 집을 짓는다는 그것 자체만도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흙벽돌을 찍는 작업은 순조로웠다. 마당에 널어놓은 흙벽돌도 비에 젖지 않고 잘 말라서 차곡차곡 쟁여놓았고 행여 비를 맞을세라 비닐로 잘 덮어놓았다.그런데 그 후속작업이 더 이상 진전이 없는 것이었다. 며칠, 며칠 하다가 달이 여러 번 지났고 결국 해를 넘겼다. 흙벽돌을 덮었던 비니루가 다 벗겨져 자꾸 벽돌이 마모되어가도 집을 지을 어떤 조짐조차 없던 어느 날이었다.아버지가 유난히 기분이 좋고 상기된 표정으로 어서 옷을 입고 나를 따라가자고 하셨다. 청웅면에 헌 집 한 채가 났단다. 그것을 사서 옮겨 짓자아버지를 따라 버스를 타고 간 곳이 임실읍을 한창 지난 청웅면의 한 마을이었다. 비어 있는 그 집은 3칸 접 집이었는데, 멀리서 보니 낡은 집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가서보니,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집의 주인이 먼데 출타 중이었다. 이리 저리 둘러만 보고 해질녘에야 돌아왔다. 그 것뿐이었다. 그 뒤 그 집에 대하여 아버지로부터 단 한마디의 말도 듣지 못했다.그때 만들었던 그 흙벽돌은 여러 해를 지나는 사이에 무너져 내려 다시 흙이 되었고, 드디어 잡풀에 뒤 덮여서 동산처럼 되었고,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결국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당신이 살 수 있는 새 집을 짓지도 못하고, 이사도 못 가시고, 삽 수년을 살았던 그 비좁은 단칸방에서 57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그 집은 빈집이 되었다.세월이 강물처럼 흐른 뒤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그 때 우리 집 형편에 집을 지을 수 있었어요?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니, 집은 무슨 집? 동생들 학비 대기도 벅찼는데,아버지가 진실로 집을 지을 계획이었는지, 아니면 항상 집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나에게 부질없는 꿈이라도 심어주시려 일부러 집에 대한 계획을 세우셨는지, 아버지의 그 마음속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몇 해 동안, 나는 이런 저런 형태의 집을 여러 채 지었다가 부수곤 했다.내 방에 책 꽃이는 이렇게 저렇게 배치하고, 그 방에서 나는 책을 읽다가 글을 쓰기도 하리라.그 계획은 실재하지 않은 허공에 지어졌다가 스러지고 만 것이다.나는 사랑이 아니라 희망을 잃은 채 살았고, 그리고 내가 그리던 집은 내 앞에 신기루처럼도 나타나지 않았다.다시는 올수 없는 불행했지만 지나고 난 뒤 뒤돌아보니 행복했던(?) 시절인 그 시절, 아버지와 함께 집을 설계하고 집을 짓고자 했던 그 시절,청소년기에 살았던 집은 삶이 계속되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여러 가지를 회고하게 되는 징검다리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까?1985년 가을 남의 집 정원으로 편입되고, 길로 변한 그 집터를 찾아가서 〈그리운 옛집〉이라는 글 한 편을 지었다.열쇠조차 망가져녹슨 괭이로 문을 열면썩은 새물이 방안 가득 고여 있었다.가슴 속으로, 그 속으로만 파고들던 그리운 시절,가슴 아리면서도 그리워하던 옛집드디어 헐렸구나.귀 기울이고 있으면숨넘어갈 듯한 아버님의 기침소리 들릴 듯 싶고,생솔가지 타던 매캐한 연기 냄새코끝을 스칠법한데,온 세상 들썩이던 새마을 운동에도역사처럼 살아남아 마을 중앙을 지키고 있던한 때는 부끄러웠고, 한 때는 눈물겹던작은 집, 결국은 없어졌구나.저어기 우리의 꿈이 잠자던 곳도저어기 호롱불 밝히던 곳도저어기 어머님 새벽마다 밥 지으면서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물 훔치던 곳도부서진 한 줌 흙으로 남아따스한 햇살에 한 줌 흙이 되고 말았구나.살아가는 것이 그리 대수라고바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해마다 두어 번씩,바람처럼 왔다가 눈길만 주고 돌아가던 빈집,지붕을 뒤덮은 풀이며미세한 바람결에도 머리에 내려앉던 썩은 지푸라기가,행여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 갈 길을 붙잡을세라바쁘다고 돌아서던 그리운 옛집,그 집터에는 그날의 꿈만 남아 있는데,햇살은 어찌 그리 찬연하게 빛나고 있던지,아, 가버린 그 세월 속에 그 집,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사라져간 임실의 그 집이 지금 문득 그리운 것은 겨울 탓인가? 내 마음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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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12 23:02

[32. 진안 천반산·죽도] '비운의 혁명가' 정여립 자취따라 강물은 쉼없이 흐른다

조선 역사상 가장 큰 역모사건은 어떤 사건일까? 무오, 갑자, 기묘, 을사 등 4대 사화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역모 죄로 희생당한 사건이 기축옥사(己丑獄死)라고 불리는 정여립 사건이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에 일어난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의 흔적이 진안 죽도와 천반산에 남아 있다.그 곳을 찾아 진안의 물곡리에서 좌회전하여 자연발생유원지 가막천이라고 쓰여진 팻말을 지나 가막골재를 넘는다.조선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드리운 곳에 자리 잡은 진안읍 가막리 노인정을 지나 아랫 가막리로 내려가면, 북서쪽으로 홍두깨날처럼 길게 뻗은 산등성이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 천반산 쪽으로 향하면 정월 초사흘 날에 당산제를 지냈다는 당산터가 남아 있지만 당산은 허물어지고 우거진 느티나무 숲만 무성하다. 길은 묵치, 또는 먹재라는 재 넘어가는 길로 뻗어있다. 한 시절 중석광산이 있어서 호황을 누렸다고 하지만 지금은 폐광으로 길은 그저 임도처럼 어설프고 천반산 산행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초입은 희미하지만 올라갈수록 산길은 뚜렷하다.능선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좌측으로 난 능선 길을 십 여분 걸었을까, 십여 명은 너끈이 앉을 마당처럼 생긴 바위가 나타난다. 그 바위에서면 멀리 북쪽으로 덕유산, 남덕유산, 그리고 육십령 장안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눈금이 선명하게 들어오고, 장안산, 덕태산 지나 마이산으로 이어지는 호남 금남정맥이 눈 안에 가득 찬다. 그리고 다시 눈을 돌리면 구봉 송익필의 자를 운장산 자락 지나 구봉의 연봉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산 위가 소반과 같이 납작하다 하여 이름붙 은 산, 천반산 아래에서 남쪽 장수에서 흘러내려온 금강과 동쪽 무주 덕유산에서 시작되는 구량천이, 파(巴)자형으로 굽이쳐 흐르는 중간 지점에서 몸을 합하여 금강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그 합수머리는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딴 데로 돌려졌다가 다시 본래의 물길을 되찾았다.이곳 천반산 기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땅에는 천반(天盤), 지반(地盤), 인반(人盤)의 명당(明堂) 자리가 있는데 이 산은 천반에 해당하는 명당이 있다 하여 천반산으로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신기마을에 사는 김진대씨의 말에 의하면 그가 이곳에 이사를 왔던 이십여 년 전만 해도 5000여 평은 될 듯 싶은 평지가 펼쳐진 이곳에 세가구쯤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잡목만 무성하고 군데군데 돌보는 사람 없는 듯 싶은 무덤이 남아 가을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다시 길을 나와 능선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면 동향 쪽에서 내려온 물길은 그 맑은 물속을 속속들이 보여주며 흐르고 있다. 떨어진 낙엽들이 비단처럼 깔린 길로 15분쯤 따라가면 뜀바위에 닿는다. 가을 천반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곳에 와서 보면 알 것이다. 붓끝으로 한점 획을 그은 것처럼 강물은 이어지고 활활 타오르는 단풍은 차마 바라볼 수가 없을 만큼 아름답다.이 천반산에 정여립 장군이 서있고, 부귀산에는 관군이 서 있어 서로 싸웠다는 이야기와 함께 송판서 굴에서 정여립이 최후를 맞이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약 15미터쯤 되는 이 바위와 20미터 거리로 마주보고 있는 뜀 바위를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정여립 장군이 훌쩍훌쩍 뛰어 다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산과 산이 겹겹이 포개진 곳에 감싸여 있는 천반산과 죽도의 모습은 그 어디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다시 연평리 쪽으로 몸을 돌리면 금강의 물줄기가 끊임없이 낮은 곳을 향하여 달려오고 이곳에서 30미터쯤 바위 사이로 비탈진 길을 내려가면 천반산의 명물 송판서굴이 나타난다. 바위굴 2개가 15미터쯤의 거리를 두고 서북쪽을 향하여 쌍굴을 형성하고 있는 이 굴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굴로서 큰 굴의 길이가 7미터쯤 되고 작은굴은 5미터쯤 되며 10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쉴 만한 넓이다. 이 굴의 중간쯤의 바위틈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끊이지 않고 흐르는 약수라고 전해지는 한 줄기 물길이 있다.이 굴 이름의 유래가 된 인물인 송 판서는 호는 보신이며 아호는 퇴휴제로서 연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438년(세종 20)에 도승지에 올랐고 1449년에 예조판서에 올랐는데, 그는 1456년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에 항거하여 벼슬을 하직하고 처가인 장수군 계남면 방아재로 낙향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이조판서를 지내다가 먼저 낙향한 김남택과 한 마을에 살면서 낙산낙수를 즐기며 도학과 제자백가를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484년에 죽었다. 이 굴은 낙향한 송 판서가 은둔할 곳을 찾던 중에 도인의 안내를 받아 이 굴을 발견하여 학문을 연구하였다는 곳이다.그 뒤 이 굴은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죽도 선생이라 불린 정여립이 대동계원들을 거느리고 병마를 훈련하던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나는 죽도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천반산의 능선에 앉아 내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진안군 통계연보에 따르면 28년 전 이 천반산 아래 죽도 근처에서 정여립과 그의 일파가 쓰던 것으로 보이는 솥과 화살촉이 발견되었다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름이 6미터쯤 되는 거대한 돌솥이었는데, 솥이 어찌나 크든지 솥전 난간으로 젊은 장정들이 뛰어다녔다고 하며, 화살 촉 한 개로 낫을 다섯 개나 만들고도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발굴된 돌솥은 어쩌다가 물속으로 다시 묻혀버리고 말았고, 당시 돌솥을 실제로 보았다는 노인네들은 언젠가 그 돌솥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그러나 정여립이 서울에서 낙향하여 전주 지역에서 활동한 시절이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는데, 이 죽도에 건물을 지어놓고 훈련 시에 그 무기를 썼었다는 그것 역시 불운했던 혁명가 정여립에 대해 품었던 이 지역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이 만들어낸 신화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어떤 사람이 정여립이 썼던 무기를 주었다 거니 그 당시 기왓장이 발견되었다느니 하는 안쓰러운 이야기를 흘린 것은 아닐까?나는 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반란을 꾀했거나 역적으로 몰려서 죽은 사람들의 말로를. 그들뿐인가. 그들의 주변 사람들, 가족, 선조들까지도 3대가 멸족당하고 모든 행적들이 부정적으로 각색되었으며, 얼마나 처참하게 잊혀지고 사라져버렸던가를.나는 죽도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천반산의 능선에 앉아 기축년의 그 가슴 아픈 역사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1589년 10월 2일(선조 2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이었다. 정여립(鄭汝立)이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모반을 꾀했다는 황해감사 한준의 비밀 장계가 올라왔다. 비밀장계는 원래 임금만 개봉할 수 있었다. 당시 조정은 동인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영의정 유성룡,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정언신 등 세 정승도 동인이었으며 정여립 역시 동인에 속해 있었다. 그날 밤 선조는 중신회의를 열어 내용을 알렸는데 역모의 시나리오는 아래와 같았다.기축년 겨울 서남에서 일시에 거병하여 얼어붙은 강진(江津)을 건너 서울로 직범하여 무를 불사르고 강창을 탈략하여 심복을 도내에 배치하고 자객을 분송하여 먼저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죽이고 거짓 교지를 꾸며서 방백과 병사, 수사를 죽이며 대간을 가만히 사주하여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을 파직시키고 그 틈을 타서 일제히 일어난다.그러나 황해감사의 장계는 박충간의 보고에 의한 것이라고 했을 뿐, 어떠한 경위로 첩보를 취득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는 엉성하기 이를 데 없이 선전관과 금부도사가 전라도와 황해도로 급파되었다. 그때 동인들은 정여립이 서울로 붙잡혀오면 그의 능숙한 능변으로 그간의 경위를 해명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동인 측의 기대와는 달리 10월 7일 금부도사 유담으로부터 의외의 급보가 올라왔다. 정여립이 하루 전에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한양이 술렁거렸다.정여립은 그때 황해도 안악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변숭복으로부터 고변사실을 전해듣고 변숭복과 아들 옥남, 그리고 동지였던 박연령의 아들 춘룡을 데리고 진안 죽도로 숨어들었다고 기록되었다. 정여립 일행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진안의 죽도 천반산 속에 숨어 지내면서 며칠을 그 인근 마을에서 밥을 얻어먹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마을 사람들이 진안현에 알렸고, 진안현감 민인백이 이끄는 관군이 산을 포위했다. 민인백은 바위 속에 숨어있는 정여립 일행을 반견하고 왕명을 전하고서 사로잡으려 했다. 그때 정여립이 변숭복을 먼저 칼로 치고, 그의 아들 옥남과 춘룡을 차례로 내려쳤다. 그리고 정여립은 칼자루를 땅에 꽃아 놓고 목을 칼날에 대어 자결했다. 죽으면서 정여립은 황소 울음소리를 냈다고 한다.정여립 사건의 전말이다. 혁명가이며 사상가였던 정여립이 낙향하여 금구일대를 중심으로 대동계를 조직했고 이 죽도를 오고가며 힘을 키우던 중 그 대동계가 세를 불리기 전에 서인 정철과 송익필에 의해 싹둑 잘린 것이다.그 사건의 여파로 조선의 지식인 1000여 명이 희생되었으며 그 뒤로 전라도 선비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그 영향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호남차별의 분수령을 이룬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어록은 아래와 같다.사마공(司馬公)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위(魏)나라를 정통(正統)으로 삼은 것은 참으로 직필(直筆)이다. 그런데 주자(朱子)는 이를 부인하고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삼았는데, 후생(後生)으로서는 대현(大賢)의 소견을 알 수 없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요(堯)순(舜)우(禹)가 임금의 자리를 서로 전했는데, 그들은 성인(聖人)이 아닌가? 또 말하기를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한다고 한 것은 왕촉이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 성현(聖賢)의 통론은 아니다. 유하혜는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는데, 그는 성인 중에 화(和)한 자가 아닌가? 맹자(孟子)가 제(薺)나라, 양(梁그)나라의 임금에게 천자(天子)가 될 수 있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권하였는데, 그는 성인의 다음 가는 사람이 아닌가?이를 풀어서 말하면 위나라의 조조가 정통이지, 촉나라의 유비는 틀린 것이며, 따라서 유비를 정통이라고 주장한 주자를 싸잡아 비난한 것이다.그래서 율곡 이이가 호남 제일의 인물이라고 평했던 정여립은 호남지역의 역사 속에서도 깡그리 지워지고 말았다.모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려 했던 정여립은 그렇듯 사라지고 그래서 조선 역사상 복권되지 않은 사람은 그와 허균뿐인 것을.하지만 그의 행적들은 입에서 입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요 근래 들어야 몇 권의 책들이 나오고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다.그날의 정여립도 마지막 순간에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새로운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강물은 무심히 흘러갔을 것이다. 그가 마지막 보았을 그 강물은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흐르고 있건만.나는 다시 이 죽도에 오리라. 그리고 그날 그들이 이곳에 뿌린 눈물 젖은 핏자국들을 찾아보리라. 어느새 죽도에도 어둠이 내리고 어둠내린 물 건너 산자락에 자막처럼 시인 고은의의 <만인보(萬人譜)>중 시 한편이 흐르고 있었다.일자 한 자 늘어놓겠습니다. 무식이 배짱입니다. 성리학 주리노선은 천지 음양귀천 상하 계급 노선입니다. 그런데 좌파 주기철학은 일체 만물 평등 노선입니다. 바로 이 화담, 율곡 주기론을 이어 정여립은 그것을 더 발전시켜 허 균의 자유주의와는 또 달리, 앞장 선 천하평등 노선을 강화합니다./ 주자는 다 익은 감이고 율곡은 반쯤 익은 감이고, 또 누구는 숫제 땡감이라고 원조파 은사, 그리고 선배따위 닥치는 대로 평가합니다. 그는 동인계입니다. 정철과 대결하다가, 그 놈의 늪같은 권세 때려치우고 낙향해 버립니다. 천하는 공공한 물건이지 어디 정한 주인이 있는가, 어허 위태한지고, 이 말은 곧 존왕주의 주자학을 마구 거역함이 아닌가, 될 말인가, 어디 그 뿐인가, 인민에 해되는 임금은 살함도 가하고, 인의가 부족한 사대부 거함도 가하다. (중략)대동계 식구 늘어나서 임진왜란 전 백성이 모여들었습니다. 한데, 이 민족자결주의 세력 늘어나자, 조정의 정철은 대동계 일당과 선비 1천여 명을 검거합니다. 천하 대역죄 먹여 홍살문턱 닳았습니다. 정여립은 막판에 진안(鎭安) 죽도(竹島)에서 아들하고 자결한 것이 아니라 서인 관헌 암살패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300년 뒤에나 500년 뒤에나 그 이름이 알려 줄 뿐이라고, 이것이 전민족의 항성(恒性)을 묻고 변성(變性)만 키우는 짓거리라고한탄하는 단재의 말마따나.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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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05 23:02

[31. 아름다운 사랑의 고장 남원] 흐느끼는 여인의 울음 소리…아직도 그곳에 서려 있는 듯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 사랑이다. 그 사랑을 두고 수많은 예술이 탄생하였다.인류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사랑이요, 감각이 있는 샘물의 영혼도 사랑입니다. 부드러운 사랑만이 최고의 수단입니다.프랑스의 철학자인 볼테르가 지은 〈깡디드〉에 실린 글이다. 그는 덧붙여서 사랑을 다음과 같이 예찬한다. 감정의 극치요, 우리들 영혼의 정수가 바로 사랑입니다. 수많은 애절한 노래와 문학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심지어 왕의 자리까지도 포기할 만큼 커다란 반향을 남기는 것이 사랑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에 묘사된 글을 보자.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만 몸을 떠는 법이다. 우리의 행복이 더 이상 사랑하는 이의 손 안에 있지 않을 때, 우리는 그 곁에서 얼마나 침착하고, 편하고, 대담하게 행동하는가!그토록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 역사 속에 길이 남을 문학과 판소리로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고을이 남원이다. 남원의 만복사지를 배경으로 지은 매월당 김시습의 한문소설 〈만복사 저포기〉와 판소리의 대명사인 〈춘향전〉이 이곳 남원을 배경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남원에서 순창으로 가는 남원시 왕정동에 폐사지 만복사 터가 있다. 만복사(萬福寺) : 기린산(麒麟山) 동쪽에 5층의 전당이 있고 서쪽에 2층의 전이 있는데 그 안에는 길이 53자의 동불(銅佛)이 있으니 이는 고려 문종(文宗) 때 창건한 절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도호부 불우 편에 실린 글이다. 사적 제 349호로 지정되어 있는 만복사터는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신라 말기에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도선이 당나라 군사를 기묘한 말로 제압한 뒤 이곳에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였으며, 탑을 건립하였다. 또 철우와 철환을 설치하고 호산과 용담에도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 뒤 만복사는 남원일대의 가장 큰 절로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수백 명의 승려가 아침에 시주를 받으러 나갈 때와 저녁에 돌아올 때의 행렬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은 예로부터 남원 8경 중의 하나로 손꼽혔다.그러나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선조 30) 8월 14일에 왜적이 남원 서문을 통과하여 이 절에 와서 방화를 하였으므로 이 절은 2칸의 불전과 석불만을 남긴 채 모두 불타버렸다. 당시에 불탄 건물로는 대웅전약사전쟝륙전영산전종각천불전나한전명부전 등이었다고 한다. 그 뒤 1678(숙종 4)에 남원부사 정동설이 중창을 하고자 하였으나 절터의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원래의 형태로 복원하지는 못하고 승방 1동을 지어 불전에 올리는 향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현재의 절터에 남아있는 문화재로는 보물 제 30호인 만복사지 오층석탑을 비롯하여, 보물 제 31호인 만복사지석좌, 보물 제 32호인 만복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 43호인 만복사지석불입상 등이 있어 화려 했던 옛 모습을 무언으로 전해주고 있다. 만복사지는 동전서탑(東殿西塔) 양식이며, 탑과 금당의 중심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이밖에도 많은 석물들이 남아있으며, 1979년부터 전북대학교에서 발굴을 시작하여 현재 많은 유물이 수습되었다.보물 제 32호로 지정되어 있는 규모가 큰 당간지주는 작품 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그 앞에는 석등 대좌가 있다. 그 뒤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추정되는 중문(中門)터가 있고 중문터 뒤에 5층 전각의 목탑 터가 있다. 그 옆에 서 있는 탑이 만복사지 오층석탑이다. 보물 제 30호인 만복사지 오층석탑은 높이가 5.5m로 현재는 4층 옥개석까지만 남아 있다.이 만복사지에 소설 속이지만 한 남자의 애틋한 사랑이 싹트고 그리고 슬프게 끝난 여운이 남아 있다.조선의 아웃사이더인 매월당 김시습이 경주의 금오산(현재 남산)에서 지은 소설이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다. 이 소설은 15세기 후반 매월당 김시습이 지은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 중에 나오는 이야기다. 원본은 전하지 않는데 일본 동경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금오신화〉에 실려 있다. 국내의 것으로는 김집이 편찬한 〈이생규장전〉과 더불어 필사된 것이 남아 있다. 이 소설은 산 남자와 죽은 처녀의 사랑이 주를 이루는데 아래의 글은 〈금오신화〉 중 만복사저포기에 실린 일부분이다.전라도 남원 땅에 양서생이라는 늙은 총각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서생은 만복사의 불전에 찾아가서 부처님께 저포놀이를 청했다. 그가 부처님에게 지면 매일매일 부처님에게 불공을 드리고 부처님이 지게 되면 아름다운 여인을 중매해달라는 것이었다. 부처님이 흔쾌히 승낙하고서 양서생이 먼저 저포를 두 번 던졌다.결국 양서생이 저포놀이에서 이겼다. 서생이 불상 뒤에 숨어서 그의 배필이 될 여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데 그때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서 부처님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하소연하며 좋은 짝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것을 지켜본 양서생이 그 여인 앞으로 나가서 자신의 사연을 말하자 그 여인도 그의 말에 이끌려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왜구가 쳐 들어왔을 때 왜구의 손에 죽은 처녀의 환신(幻神)이었다. 다음날 그 여인은 양서생에게 그가 사는 마을로 가기를 원했고 그곳에 따라간 서생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사흘이 지나 양서생이 돌아가는 날 그 여인은 은주발 한 개를 선사하였다. 그 은주발은 그 여인의 무덤에 함께 묻힌 매장품이었다. 그 다음 날은 그 여인의 대상(大祥)날이었다. 그들은 보련사에서 다시 만났고 제가 끝난 뒤 그 여인은 인연이 다해 저승으로 떠나가야 했다.이윽고 영혼은 떠났다. 여인이 전송을 받을 때는 울음소리가 끊어지지 않더니 문밖에 이르러서는 은은한 소리만 들려왔다.저승길이 촉박하여 애달프게 떠납니다.비나이다, 님이시여. 저버리진 마옵소서.슬프다 우리 부모 내 배필 못 지었네.아득한 저승에서 원한만이 맺히리.남은 소리가 점점 사라지면서 목메어 우는 소리와 분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여인의 부모는 그제야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고 다시는 의심하지 않았으며, 양서생도 또한 그 여인이 귀신임을 알고는 더욱 슬픔이 복받쳐 여인의 부모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슬피 울었다. 여인의 부모가 양서생에게 말했다.은주발은 그대의 뜻에 맡기네. 그리고 내 딸에게는 토지 몇 백 이랑과 노비 몇 사람이 있으니 자네는 그것을 신표로 지니고 부디 내 딸을 잊지 말아주게.이튿날 양서생은 고기와 술을 가지고 개령동을 찾아가니 과연 시체를 임시로 안치한 관이 있었다. 양서생은 제물을 차려놓고 슬프게 울면서 그 앞에서 지전(종이로 만든 돈 저승에서 쓰인다고 함)을 불사른 뒤 정식으로 장례를 지냈다. 그리고 제문(祭文)을 지어 장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오오, 님이시여! 당신은 어릴 때 천품이 온순했고 커서는 얼굴이 깨끗했소. 모습은 서시(월나라의 미인으로 오왕의 총희가 되었다)와 같았고 시부(詩賦)는 숙진(송나라 때의 여류시인)을 능가하였소. 스스로 규문 밖에 나가지 않았고 언제나 가정의 교훈을 고이 받아왔었소. 난리를 당하고도 오히려 정조를 지켰으나 끝내 왜구의 손에 목숨을 잃었소. 황량한 다북쑥 속에 몸을 의지한 채 홀로 살면서 피는 꽃 밝은 달에 마음만 슬퍼했소. 봄날엔 애끓는 두견새의 울음을 슬퍼했고 서리 내리는 가을엔 비단부채의 무용함을 탄식했었소.지난 하룻밤 당신과 만나 정을 나누었더니 유명(幽明)은 비록 서로 달랐으나 물 만난 고기처럼 서로 즐겁지 않았소. 장차 백년을 해로하려 했는데, 어찌 하루 저녁에 이별이 있을 줄 알았겠소. 님이시여. 당신은 응당 달나라에서 나는 새를 타는 선녀가 되고 무산에 비를 내리는 낭자가 되리니 땅은 어두침침해서 돌아볼 수가 없을 것이오, 하늘은 아득해서 바라보기가 어렵겠소.나는 집에 들어가도 그저 멍멍히 지내고, 밖에 나가도 아득하여 갈데없는 몸이 되었소. 영혼을 모신 휘장을 대하면 얼굴을 가리어 울게 되고, 좋은 술을 따를 때엔 마음이 더욱 슬퍼지오. 요조한 그 모습은 눈에 삼삼하고 명랑한 그 음성은 들리는 듯하오.아아! 슬프기 한이 없습니다. 총명한 당신의 슬픔, 정밀한 당신의 기상, 몸은 비록 흩어졌을지라도 영혼만은 남아 있을 것이니 응당 내려와서 뜰에 오르시고 어쩌면 나타나서 곁에 있겠는지요. 비록 저승과 이승은 다를지라도 당신은 이 글월에 느낌이 있을 것이외다. 상 향장례를 지낸 양서생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땅과 집을 다 팔아 절로 가서 사흘 저녁 제를 올렸다. 그러자 그 여인이 나타나 양서생을 부르며 말했다.저는 낭군의 은덕에 힘입어 이미 다른 나라에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저승과 이승이 막혀 있지만 낭군의 은덕에 깊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낭군께서도 이제 부디 착한 업을 닦으시어 저와 함께 속세의 우에서 벗어나도록 하십시오.양서생은 그 뒤 다시는 장가를 가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어디에서 세상을 하직했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만복사 터에서 천천히 발길을 옮겨 호남의 3대 누각 중의 하나인 광한루원에 이른다. 〈남원부지(南原府誌)〉에는 동쪽에는 지리산이 병풍을 두른 듯하고 서쪽에는 중진이 띠를 두룬 것처럼 흐르고 있으며, 인물이 번성하여 남방에 하나의 큰 도회가 되었다 하였다. 또한 황수신(黃守身)은 광한루기(廣寒樓記)에서 남원은 옛 이름이 대방(帶方)인데, 산천이 수려하고 옥야가 백리에 뻗쳐 실로 천연의 부자고을이라 하였다.광한루는 장수가 고향인 명재상 황희가 세운 아름다운 누각이다. 황희의 아버지인 황감평이 일재(逸齋)라는 조그만 서실을 지었는데, 양녕대군 폐위를 반대했던 황희가 이곳으로 유배를 와서 누각을 짓고 광통루(廣痛樓)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뒤 남원부사 민여공이 중수하였고, 다음 해 전라감사인 정인지가 이 광한루에 올라 펼쳐진 경관을 감상하다가 달나라에 있는 궁전 광한청허부가 바로 이곳이 아닌가. 감탄하고서 광한루라고 이름을 바꿨다.보물 제 281호로 지정되어 있는 광한루에는 강희맹, 김시습, 김종직 .정철 등의 시문들이 걸려 있으며, 호남 제일루 광한루 등의 현액들이 걸려 있다.이곳이 바로 판소리 〈춘향전〉이 시작된 곳이다. 기생 월매의 딸 춘향이 떠나간 낭군을 기다리다 변사또에게 모진 고난을 당하는 이야기가 시작된 곳이 광한루다. 이곳 광한루에서 〈춘향전〉의 주인공 이도령과 춘향이의 험난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 시작되었다.이도령이 어느 봄날 방자를 불러 물었다. 너희 고을 좋은 승지 강산 어디가 제일 좋으냐. 방자가 대답하기를 북문 밖에 나가오면 교룡산성 좋사옵고 서문 묘 나가면 관왕묘도 경치 좋고 남문 밖 나가면 광한루 좋사온데, 오작교 영주각은 삼남 제일의 승지로소이다.이도령과 성춘향이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을 했다. 하지만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고, 이 도령이 떠난 고을에 변사또가 오면서 이들에게 시련이 닥친다.결국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어사 출도를 외치며 사랑이 완성되는 〈춘향전〉이 판소리로 구전되어 온 것이 한편의 드라마 같은 사랑의 이야기다.〈춘향전〉이 나라 안에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만복사저포기〉를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늙은 총각 양생이 귀신처녀를 그리워한 〈만복사저포기〉가 남아 있고 춘향이가 이도령을 그리워한 〈춘향전〉이 있는 고을이 남원이다. 이런 독특한 이야기가 남아 있는 남원을 〈사랑의 고장〉이라 명명한 뒤, 아름다운 사랑을 승화한 〈사랑 축제〉를 개최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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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28 23:02

[30. 연애하듯 공부하고 연애하듯 일하라] 산천 유람은 한권의 책…그래서 자연이 그립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그 속담과 같이 늦게 배운 공부재미에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도둑질과 달리 공부는 그런 것이 아니다.습관이 오래 되면 품성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그 품성이라는 것이 한 번 형성되면 도저히 바꿀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품성은 문으로 내쫓으면 창문으로 들어온다. 어릴 때부터 독서나 공부에 대한 좋은 습관이 들지 않으면 쉽지 않다는 말인데, 어려서 배운 공부법이 평생을 따라 다닌다는 말이다.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둔 사람들은 여행을 위해 집을 나서서도 마음이 편치가 않다. 내가 이렇게 떠나면 아이들이 공부를 잘 못하는 것은 아닐까? 좋은 학교에 가지 못해서 나중에 잘 못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근심의 원인은 공부 탓이다.공부, 어떻게 하는 공부가 가장 바람직한 공부일까?공부를 하는 방법이 몇 가지가 있다. 즉 노동으로 하느냐, 아니면 놀이로 하느냐, 아니면 의무나 책임으로 하느냐, 그러나 그 몇 가지가 경우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있다.공부 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를 하는 것,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 또는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이 도박을 하는 것처럼 한다면 침식(寢食)을 잊어도 좋을 만큼 재미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랜 세월 저편에서부터 성적에 따라 등수와 등급이 매겨지고 학교가 결정되다 보니 엄청난 중압감을 가지고 힘겹게 하는 것이 소위 요즘의 학교 공부다.창조성을 중시하는 학교라는 말에 걸맞지 않게 학교에서 창조성을 중시하는 교육은 사라지고 달달 외워서 일류대만 선호하고 일등만 대우받는 공부를 가르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자발적인 공부나 혼자서 독학을 한다는 것은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되었다. 왜 그런가?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이반 일리히는 〈성장을 멈춰라〉에서 다음과 같이 갈파하고 있다.학교는 배움에 대한 근본적인 독점을 확장하고, 배움을 학교교육으로 재정의했다. 사람들이 학교와 교사의 정의를 받아들이는 한, 학교 밖에서 배운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교육받지 않은 인간으로 낙인찍힌다.나 역시 혼자서 독학을 하였기에 사회에 적응하기가 힘들었고 수많은 난관을 겪었는데, 옛날에는 나와 같은 환경에 처한 사람이 많았다. 회재 이언적과 화담 서경덕, 그리고 퇴계 이황은 혼자서 공부했다. 연암 박지원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는 제 아비를 죽인 놈이라고 노하셔서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다. 까막눈으로 살다가 열여섯에 결혼을 하자 처 작은 아버지가 박지원을 불렀다. 자네 여지껏처럼 까막눈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공부를 할 것인가?그런 연유로 결혼을 하고서야 공부를 시작하여 조선 역사 속에 뛰어난 학자가 되지 않았던가,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도 순전히 독학을 통해서 그의 문학을 꽃피웠다. 세계문학사를 보더라도 위대한 작가로 손꼽히는 사람들도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찰스 디킨스는 부모가 감옥에 가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구두약 공장에 다녔으므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엘리어트는 16세 이후부터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오스틴 역시 16세 이후에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콘라드, 하디, 키플링이나 키이츠 등은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디킨스는 어린 시절에 그의 삼촌이 살던 집 아래층에 있던 책방의 주인(여성)이 많은 책을 읽어주었고, 오스틴과 브론테 그리고 엘리어트는 어린 시절 책속에 파묻혀서 살았다.헤르만 헤세는 어떤가? 중학교를 다니다가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고 어느 날 서점의 점원으로 취직을 해서 수많은 책을 접한 뒤 세계적인 문호가 되었으며,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링컨은 단지 책 한권을 빌리기 위해 수 마일을 걸어가며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고 한다.나는 공부할 것이며, 준비할 것이다, 그러면 기회가 올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내가 혼자 무언가 모를 미지의 세계가 도래하기를 갈망하며 읽었던 독서는 그 어떤 것보다 효과적인 교육의 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장자의 학풍을 계승한 열자(列子)는 책이란 큰 도둑이 재물을 훔치듯 골라 읽어야 한다.(大盜讀書)고 하였다. 좀도둑처럼 아무거나 잡동사니까지 훔치다가 보면 실속이 없으니, 큰 도둑처럼 값이 나가는 금은보화만 훔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그렇다면 나의 독서법이나 공부 방법은 과연 보편타당했을까? 아니다. 나는 무척 편벽된 독서를 한 사람이다. 누구 한 사람 나에게 이런 책을 읽어라 이렇게 살아라 하고 조언해 줄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마치 연애를 하듯 놀이를 하듯 읽었고 내 식대로 살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다.영국의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는 40세까지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몹시 게을렀고 아버지는 관대했다.그의 나이 13세에 아버지는 허버트를 엄격하기로 소문난 백부 밑에서 공부하도록 힐튼으로 보냈다. 그러나 허버트는 곧 달아나서 더비에 있는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왔다. 첫날은 48마일, 둘째 날은 47마일, 세 째 날은 20마일을 약간의 빵으로 때우며 걸어왔다. 그러나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2~3주가 지난 후 다시 힐튼으로 돌아가서 3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것이 그가 받은 유일한 정규교육이었다.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바꿔 말하면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산천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공통된 말이다. 조선 성리학의 근원을 제공한 주자(朱子)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견문이 넓은 사람일수록 안목이 좁은 사람을 본적이 없다.공부란 것이 학교나 연구실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현장을 직접 보아야만이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조선 시대 사대부들 사이에 회자되었던 아름다운 선비는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文史哲)을 통달한 사람을 말함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수학 한 과목을 잘하거나 영어, 또는 국어, 과학 한 과목을 잘해서 잘 사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한 과목을 잘하면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겼다.앙드레 지드도 〈지상의 양식〉에서 서책(書冊)을 불살라버려라. 강변의 모래들이 아름답다고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원컨대 맨발로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어떠한 지식도 우선 감각(感覺)을 통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면 아무 값어치도 없다.그의 말처럼 가보지 않고서 알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 것인가?저마다 다른 우주 같은 존재가 사람이다.저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저마다 다른 삶, 그리고 저마다 다른 소질을 가지고 태어나 살다가 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다고 인정할 때,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고 있는 정규교육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정규교육이 맞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공부법을 가지고 공부하는 게 나은 사람도 있다. 자득(自得)처럼 좋은 것도 없다. 그렇다는 전제 하에 어떤 공부가 좋은 공부인가? 저마다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사람은 저마다 다른 우주(宇宙)다. 거기에서 출발하자. 저마다 잘하는 것을 하도록 하자. 그것도 첫사랑의 연인과 연애를 하는 것처럼 하자, 그렇게 순간순간 설레며 읽은 책이나 공부는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화살이 과녁에 들어가 박히듯 가슴속에 쏙쏙 스며들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공부라고 할 수 있다.수학을 못하는 사람이나 영어를 못하는 사람(과학이나 국어를 비롯한 전 과목이 해당됨)들에게 많게는 10년에서 6년 아니면 평생토록 주눅 들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공부법은 아닐 것이다.나는 왜 이렇듯 좋은 책을 쓰는가?나는 왜 이토록 현명한가.라고 자신 있게 말했던 사람이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그렇게 살아도 얼마 못 사는 인생인데, 나는 왜 이렇듯 무슨 공부, 무슨 공부를 못하는 가? 하고 자괴감에 빠져 가장 좋은 시절을 랭보의 시 제목처럼 〈지옥에서 보낸 한 철〉처럼 보낸다면 인생이 얼마나 소모적으로 보내는 것인가?내가 원하는 일을 할 때 내가 가장 행복하고, 내가 행복할 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다. 창조란 불행한 것들 사이로 자신의 길을 금 그어 간다. 프랑스 철학자인 들뢰즈의 말이다. 그렇게 돈키호테처럼 살다가 간 몇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사람은 저마다 그의 재질과 성격을 결정하는 개인 특유의 기질을 타고 나는데, 이는 변화시킬 수도 강요할 수도 없는 것이며, 오로지 각자가 만들어가고 완성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루소의 말이다.그러나 그런 몇 사람들은 예외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해진 그 질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평생을 살다가 간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질서, 즉 자유롭게 풀어줘도 그것을 달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적당한 구속을 원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대다수이다.몇 개의 문제를 잘 풀고, 시험을 얼마나 잘 보느냐에 따라 남은 인생이 결정되는 시대가 지금의 이 시대다. 이러한 시대에 스스로의 의지대로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면서도 의식주 걱정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가능할까?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내 공부법은 이렇다.내가 좋아하는 책을 연애하듯 읽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이 되어 살자. 생각은 좋은데, 실천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리 못할 것도 없다. 〈노마디즘〉의 저자인 이진경의 글을 보자.생존의 중력을 이기기 위해서 하는 강의는 노동입니다. 대학에서 하는 강의가 흔히 그렇지요. 뻔한 내용을 특별한 준비도 없이 떠들어대야 합니다. 여기서 최대의 장애는 지겨움이지요. 중력을 견디듯 지겨움을 견뎌야 합니다. 비슷하게 시험을 보기 위한 공부라면 그건 틀림없이 지겨움과 힘겨움에 수반되는 고통을 이기는 싸움이 되게 마련이지요. 생계를 위해서 쓰는 글이나, 요구되는 업적을 채우기 위해 쓰는 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다 노동의 일종이지요.그러나 자신이 좋아서 하는 공부, 신나고 즐거워서 하는 연구는 심지어 하루의 대부분을 책과 씨름하는 경우에조차 이런 중력과 저항, 고통과 인애의 성분이 없습니다. 스스로 던져 놓은 문제를 들고 돌진하는 연구나 집필 또한 마찬가지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기가 몰두해서 공부한 것을 강의 하는 것은 지겨움과 같은 고통을 전혀 수반하지 않습니다. 신나고 즐거운 놀이나 게임 이 되지요. 중력을 받는 지적 노동이라면 당연한 전공, 실적, 이런 것과 관계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자유행동은 전공과도 상관없고, 실적과도 무관하게 자기의 문제의식이 뻗치는 곳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지요. 이런 점에서 중력을 받는 노동으로서의 공부와 자유행동으로서의 공부는 크게 다르지요. 한 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공부를 노동으로 하고 있는지, 자유행동으로 하고 있는지.이진경 저 노마디즘 2 유목의 철학, 전쟁기계의 정치학에 실린 글이다.나는 요즘 사람들에게 그렇게 필요하다는 수학의 적분 미적분을 모른다. 영어나 과학도 못한다. 단지 혼자서 문사철을 공부했을 뿐이다. 그래도 사는 것은 지장이 없다. 일반적인 사람이 말하는 대로 잘 사는 것은 아니지만 세끼 밥 굶지 않고 소신껏 살고 있다.의도한 것은 아니고 운명처럼 이 나라 이 땅을 떠돌면서 수많은 책들과 벗하며 살다가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그처럼 호사를 누렸던 제왕들도, 삼성그룹의 이병철, 현대그룹의 정주영회장도 몇 푼의 재산이나마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는가?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고 살다가 가는 삶 그게 복 받은 삶이 아닐까?만약 내가 죽은 다음에 훌륭한 글을 남길 수 있다면 그 영광과 명예는 모두 고래잡이 덕이다. 고래잡이 배야 말로 나의 예일 대학이요, 하버드 대학이다. 4년간에 걸쳐 포경선을 타고 난 뒤 〈백경〉을 지은 허만 멜빌이 서술자 이슈메일을 통해서 한 말이다.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책과 산천이 나의 종합대학교였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를 제법 먹은 지금도 자연 속으로만 들어가면 신이 난다. 온 산천이 잘 써진 한 권의 책 과 같은 곳인 자연, 자연 대학교 만 만세다,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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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21 23:02

[29. 고창 문수사~장성 축령산 숲길] 단풍 아름다운 산길 지나 호젓한 편백나무 숲으로

인생이란 처음도 끝도 찾을 길 없는 무한한 천지 사이에 속절없이 놓여 진 것이고, 한번 죽으면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토요테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뒤를 이어 일본을 제패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은 다음과 같은 유훈을 남겼다.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서둘지 말라.그의 말과 같이 세상의 일이란 것이 그렇게 서둔다고 되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런데도 나이가 들어 갈수록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 서두르는 일들이 많아진다. 그래서 아직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기엔 시간이 한창 남은 단풍의 명소인 문수산 자락에 자리 잡은 문수사로 향하는 마음 역시 편치가 않다.고창 지나 고수면 소재지에서 문수사로 향한다. 푸른 대숲만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을을 지나는 길은 어느 사이에 잘 뚫린 2차선 포장도로가 되어 있다. 세월이란 것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사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데도, 그 변화의 흐름을 타지 않고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그래도 몇 곳이 있다. 그 중에 한곳이 김제 귀신사 대적광전의 아무렇게나 쌓여진 돌 계단과 지금 내가 가는 문수사 들목의 호젓하고 쓸쓸한 길이다.문수산 아래 첫 마을 칠성리는 마을의 돌담이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는 마을이었는데, 마을 앞 주차장이 넓어지고 길도 넓어져 그때의 정취를 찾을 길이 별로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다른 곳보다 변화의 속도가 느린 것만은 분명하다.문수산 500m 라는 안내판을 뒤로 하고 한참을 올라가 고갯마루를 넘어서자 세운지 오래되지 않은 문수사의 일주문이 보이고 드러누운 듯한 단풍나무 둘레에 잘 정돈 된 주차장이다. 멀리 문수산 정상이 보이고, 그곳에서부터 내장산의 단풍보다 더욱 울창하게 우거진 단풍나무 숲길이다.약간은 쌀쌀하고 적적한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지, 오랜 가뭄 탓인지 아직 물들지 않은 단풍잎들이 마른 나뭇잎으로 떨어져 길을 가득 메우고, 나는 그 마른 나뭇잎 위에 누워서 단풍나무, 소나무, 서어나무, 굴참나무가 사이좋게 하늘을 향해 뻗은 그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바라다본다. 푸르고 푸른 한국의 가을 하늘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대지〉의 작가 펄벅이 한국의 가을 하늘을 세모 네모로 접어 편지에 넣어 보내고 싶다.라는 말을 남겼을까.나뭇잎이 떨어져서 가을바람에 불려가네. 붉게 물든 단풍잎이 한잎 두잎 떨어지네. 김추자의 노랫가락을 읊조리며 갈지(之)자로 걸어가는데, 차 한대가 오더니 창문을 열며, 신정일씨 아니세요? 하고 손을 내 미는 스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인사 치례로 어디 가세요 했더니,절에 가지요,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하고 물어 여차여차 했다는 말을 하면서도, 스님이 절에 가는 데 어디를 가느냐고 묻다니, 글쎄 내가 또 우문을 던졌구나.하고 먼저 보내드린다. 그제야 그 스님이 십몇 년 전에 이절의 주지스님이었구나하고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느릿하게 걸어도 작게 노래를 부르며 걸어도 누구하나 탓하지 않는 단풍나무 숲길을 걸어갈 때 문득 우정인지 사랑인지 모를 은은함으로 사귀었던 옛 사람들 생각이 났다.단풍이 가장 아름다웠던 가을에 유람을 떠난 박제가에게 이덕무(李德懋정조 때의 개혁 사상가)는 시 한편을 보냈다.단풍이 한창일 제향산에는 들렀다가어서 빨리 돌아와서그리운 회포 풀어보세그 편지를 받은 박제가는 묘향산의 퇴락한 상원암을 보고 다음과 같은 가슴 아린 글을 남겼다.나는 일찍이 옛일이란 어떤 것이건 매양 찾을 데 없음을 한하여 오던 터이다. 이제 가을 산 조각돌이 거친 풀, 찬 이슬 속에서 옛일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옛것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를 대하여 서글프고 심란해서 저축저축 머뭇머뭇 오래 동안 가지를 못하는가! 빈 산, 떨어지는 해, 끊어진 다리, 흐르는 물, 이는 예로부터 회고의 정서를 하염없이 자아내게 하는 곳이로구나!떨어져 내리는 나뭇잎 하나하나에도 가슴속이 텅 빈 것처럼 저며 오는 것을 보니 가을은 가을이다. 가을이 노랗고 빨갛고 푸르스름한 단풍으로 물든 길이 끝나는 곳에 문수사가 있다.문수사(文殊寺)는 문수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절로 사지(寺誌)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 의자왕 3년(643)에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했다고 한다.자장율사는 당나라의 청량산에 들어가 삼십칠 일 기도를 거듭한 끝에 지혜를 표상하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깨닫고 귀국하였다. 우연하게 이곳을 지나가던 자장율사는 이곳의 산수(山水)가 중국의 청량산과 너무나 흡사한 것을 이상하게 여겨 산기슭의 암굴을 찾아 이레기도를 올렸다. 그 때 문수보살이 땅 속에서 솟아나오는 꿈을 꾸고 그 자리를 파보니 화강암으로 된 커다란 문수보살이 나왔다. 그래서 이 산을 청량산 또는 문수산(文殊山)이라 이름 짓고 절을 세운 후 문수사라 이름했다.그 이후 취령산이라 부르던 것을 문수산, 혹은 청량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문수사는 그래서 문수보살상에 얽힌 전설적 의미와 문수도장의 창건 기록에 힘입어 대웅전보다 문수전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로 갔던 때가 신라 선덕여왕 5년(636)이며 그로부터 8년 후에 귀국하였다. 백제가 멸망하기 20년 전이었고, 의자왕 3년에 선덕여왕 12년 이었다. 그 때는 두 나라가 정치적으로 심하게 대립되었던 시대였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과연 자장율사가 고창의 문수산을 통과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고, 신라의 고승이 백제 땅에 와서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믿겨지지는 않으나 그 무렵 이 나라를 스치고 지나간 불교의 파급효과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가 개인적인 내 생각이다.그 뒤 문수사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1653년(효종 4)에 성오대사(性悟大師)와 상유비구(尙裕比丘)에 의하여 재건되었고, 신화(信和). 쾌영(快英)이 중창하였고, 1835년(현종 1)에 주지인 우홍(宇弘)이 중창하였다고 한다.문수사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지은 건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5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의 중심부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이 건물은 1823년 1차 중수 이후 1876년에는 고창현감 김성로(金星老)의 시주로 묵암 스님이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이며, 공포는 다포식(多包式)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이다.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25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수전에는 이 절의 창건설화와 관련이 있는 문수석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이 석불은 상체가 큰 불상으로 좌대와 하반신 일부가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이 특색으로 높이는 약 2.5m쯤 된다.가끔씩 등산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문수산(630m)은 고창의 진산 방장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여러 봉우리를 지나 양고살재, 솔재, 검곡재를 이루고 전 남북을 가르며 뻗어 내린 곳에 우뚝 솟은 산이다.단풍나무가 길길이 이어지는 숲. 가을이면 핏빛 붉은 노을로 타오를 것이고, 나는 다시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이 문수산을 찾아올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적막이 나를 반겨 맞아줄까 생각하며, 아직 물들지 않은 단풍잎이 봄날에 지는 매화꽃잎처럼 흩날리는 문수사를 뒤로하고 장성군 서삼면으로 행했다. 수렁이 많다는 수랑동을 지나자 해넘골이고 야트막한 잔등 같은 초치산(草峙山) 자락에 있는 초치재를 넘어서자 변동해씨 집이다. 사람 좋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이 들끓는 변동해씨 집에서 하룻밤 묵었던 적이 있었다. 그 밤 주인이 손님보다 더 취해서 내 오던 그 술맛이 지금도 가슴속에 아련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술맛이 좋기는 좋았던가 보다. 바로 아랫마을이 금곡 영화마을이다. 장성읍에서 태어나 남면 월곡리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한국 영화의 거장 임권택 감독은 이곳 금곡마을을 무대로 태백산맥 서편제 내 마음의 풍경 등의 영화를 촬영했다. 그래서 영화의 무대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금곡 마을 뒷산을 뒤덮고 있는 나무숲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삼나무 편백나무 측백나무들이 숲을 이룬 곳, 그곳이 바로 축령산 휴양림이다. 전북 순창 출신의 임종국(1915~1987)씨는 1956년 무렵부터 이곳 축령산 자락에 나무를 심기 시작해 세상을 뜨기 전까지 숲을 가꿨다. 이 숲은 2000년에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 되었고 그런 연유로 얼마 전에 산림청에서 사들여 관리를 하고 있다.그래서 이 고개를 넘지 않고 조림 왕 임종국씨가 심은 편백나무 숲길을 따라서 넘는 길을 택한다.이렇게 걷기에 가장 좋은 길인데도 걷지 않고 차타고 가기를 택한 사람들이 타고 오는 자동차가 지나는 길을 조금 지나자 편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삼나무, 층층나무, 편백나무, 참나무와 소나무가 간간이 섞여 있는 내리막길을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 하며 내려간다. 이런 호젓한 나무숲 길이 얼마나 사람들의 가슴속을 아릿하게 만드는지 가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나무숲이 우거진 길이 끝나며 추암리에 닿는다. 바로 길 건너에 나의 오랜 도반(道伴)인 조용헌 선생이 집을 마련한 것은 오래 전 일이다. 그러나 며칠 째 출타중인지 대나무 대문이 잠겨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신발만 가지런하고 방안을 들여다보자 전기 콘셋트들이 모두 꺼져있다. 첨성대 닮은 굴뚝에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고 오로지 집 앞 감나무 가지만 알맞게 부는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을 뿐이다.추암리는 추서와 충암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추서에 있는 추서사터에는 고려 때 글씨로 유명한 운묵 스님이 만든 석탑(石塔)과 큰 석종(石鐘)이 있었다는데, 그 종을 일제 때 일본인들이 가져갔다는 취서사터가 남아 있다. 이곳에는 유독 암자가 많았었다. 통적골 북쪽에는 가섭암이 있었고, 망월 서쪽에는 망월암(望月庵)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망월 북쪽에 있는 백련(白蓮)마을에 백련암의 터에는 백련암의 축대만 남아 있고, 백련 북쪽에 있는 골짜기에는 관불암(觀佛菴)의 법당터가 남아 있다. 한편 백련 북쪽에서 전북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너무 가팔라서 오르는 것이 되다는 뜻을 지닌 된재이다이곳 추서리로 부르는 추서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마을을 없앴던 곳인데 현재 드문 드문 있는 집들은 그 뒤에 새로 들어선 집들이다.한 배미가 열두 마지기나 되어 열두마짓걸, 송계 서쪽에 있는 송강골, 바위 틈에서 물이 나오는데 매우 차고 맛이 좋아 참 샘 등이 이곳 추서리에 있는 지명들이다. 고창 은사리에서 장성 추서리로 넘어 오는 길 그 길이 끝나는 곳에서 바라본 산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있다.어떤 시인은 말했지. 일 년 중 다른 계절에 나는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 내가 구름이 되는 가을까지.얼마나 아름다우면 다른 계절에는 숨어 있다가 가을에 나타나겠다고 말했을까? 하지만 그보다 더 구름을 사랑했던 사람은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였다.너는 누구를 사랑하느냐? 수수께끼 같은 사람아, 말하여 보라. 너의 아버지냐, 또는 형제 자매이냐? 내게는 부모 형제자매도 있지 않다. 그러면 너의 친구냐? 지금 당신은 뜻조차 알 수 없는 어휘를 쓰고 있다.그러면 너의 조국(祖國)이냐? 그것이 어느 위도(緯度)에 자리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면 아름다운 여인이냐? 아아, 불사의 여신이라면, 나는 그를 사랑할 수도 있으련만, 그러면 돈이냐? 나는 그것을 가장 싫어한다. 마치 당신이 신을 미워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면 너는 무엇을 사랑하느냐? 세상에서도 보기 드문 에뜨랑제여!나는 저 구름을 사랑한다저 하염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사랑한다보라, 다시 보라저 불가사의한 몽롱한 구름을.보들레르가 〈이방인〉이라는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누구를 아는 것도,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것도, 알고 보면 모두가 다 개별적인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우주라서 저마다 외롭고 외로울 뿐이다. 어느 순간 푸른 하늘에 나타나 흐르다가 소멸되는 하얀 구름 같은 우리들의 생(生), 그 길목에서 하루를 보낸 문수사에서 추서사에 이르던 오늘의 여정이 먼 훗날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지.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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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14 23:02

28. 길 위에서 만나는 고통의 축제 - 삶과 죽음은 항상 가까이…욕심을 버리소서

자네한테만 말해주지.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에 언제나 나는 무서운 고민에 휩싸인다네 앙드레 지드의 〈배덕자〉중에서 메날끄의 말이다. 절망과 좌절속에서 보낸 젊은 시절, 나 역시 많은 고민에 사로잡혔었다. 그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이나 아침이 오기 전 신 새벽에 장송곡들을 몇 시간이고 반복해서 들었었다.슈베르트의 현악4중주곡 〈죽음과 소녀〉의 2악장을 들으면서 죽음이 아주 감미롭게 올 것이라고 주제넘게 생각했다. 모차르트 〈레퀴엠〉, 포레의 〈레퀴엠〉, 베르디의 〈레퀴엠〉, 브람스의 〈독일진혼곡〉,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 중의 2악장,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비창〉의 4악장, 쇼팽의 〈장송 소나타〉 등을 지금도 첫 소절에서 마지막 소절까지 흥얼거릴 수 있는 것은 그 시절 내 젊음을 후비고 지나갔던 그 어두운 그림자 덕일 것이다.잔잔한 감미로움으로 혹은 격렬한 흐느낌으로, 포근함으로 내 삭막하기만 한 영혼의 바다를 그 죽음들이 스치고 지나간 후에야 내 정신은 평온을 되찾을 수가 있었고, 나는 이른 아침에 마음 비우고 길을 나서곤 했다.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기 전의 불안감을 느끼는데, 부조리의 철학자인 알베르 카뮈의 글에도 그 불안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그의 스승 장 그르니에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망설이고 있자 카뮈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긴 여행을 하고 싶을 때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만 합니다. 더 나쁜 어떤 일이 내게 일어 날 수 있는가? 그건 죽는 겁니다. 그러면? 하고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장 그르니에가 여행을 가지 않았다고 말하자 까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아주 하고 싶은 일 이외에는 하지 말아야죠그렇게 말한 알베르 카뮈는 아이러니칼 하게도 자동차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그가 죽은 뒤 그의 주머니 속에선 몇 시간 뒤 파리에 도착하는 열차 표가 있었습니다.열차 표를 예매했던 카뮈에게 지인이 자동차로 같이 가기를 원했고 그것이 결국 피할 수 없는 그의 운명이었다.그렇지만 여행이건 어떤 것이건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을 예측 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여행을 두려워 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로망 롤랑은 〈매혹된 영혼〉 에서 인생은 왕복차표를 발행하지는 않는다. 한번 여행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는 말을 남겼고, 영국의 시인 드라이든은 인생은 여행이고 죽음은 그 종점이다 고 말하고 있다.여행 같은 인생길에선 언제나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데, 내 여행의 여정에서도 그와 같은 일들이 비일비재했다.구절초 꽃이 아름다운 공주의 영평사에 하룻밤을 묵었던 때의 일이다. 새벽 종소리를 들으면서도 일어나서 새벽예불에 가기가 싫어 이리저리 뒤척여도 자꾸 들려오던 새벽 종소리, 거기에 뒤섞여 들리는 개구리 소리, 그러다가 잠시 잠이 들었다.여섯시 아침 공양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깨어 아침밥을 먹고 주지스님이 따라준 아름다운 백련차에다, 지천으로 피어난 흰 연꽃에 호사를 누릴 때만 해도 아무런 일도 없는 행복한 시간이었다.수자원 공사에 근무하던 권성일씨의 차를 타고 공주로 가다가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의 선대(先代)인 이진휴가 숙종 때에 세운 금강변의 사선정을 보기 위해 차를 세우자고 했다.조금 지나쳤으니 100m 쯤 지나서 차를 세우지요. 알았습니다.고 내 말을 받았던 권성일씨가 차를 돌리면 되지요 하고서 내가 만류할 사이도 없이, 차를 돌려버린 것이다.그 길이 중앙 분리대가 있는 4차선임을 잊어버린 권성일씨가 1차선으로 차를 역주행한 것이다.꿈인 듯 생시인 듯 2차선과 1차선에서 쏜 살같이 달려오던 차들, 이렇게 죽는구나하는 순간 상황을 알아차린 권성일씨가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찰라 속에 우리가 탄 차를 스치고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행렬들,그래서 한 숨을 내쉬며 이렇게도 사는구나했는데 그 차엔 권성일씨의 아들 둘과 내가 타고 있었다. 아빠 때문에 우리가 죽을 뻔 했잖아 하고 볼멘소리를 하는 아들의 말을 들으며 한 숨을 내쉬던 권성일씨.저 사람 미쳤어 아냐, 착각이었을 거야 우리가 가끔 설왕설래하는착각과 미쳤다는 것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그 순간이 그대로 진행되었으면 저녁 뉴스에 삼부자와 한 사내가 대전 공주 간 국도에서 원인모를 역주행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를 제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은 순전히 운이라는 말이 맞는 듯싶었다.그 순간을 벗어난 뒤 천천히 공산성을 올라가 쌍수정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 저승에도 이렇게 맛있는 커피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서 내려가는 길에 그림을 그리러 올라오던 한 무리의 아이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중에 한 아이가 뒤 따라오는 아이에게 깎아지른 듯한 성벽을 보며 물었다.이곳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아마 최하 사망일거야그 말을 들으며 오늘의 시대는 아이들에게조차 죽음이 저렇게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일상적인 것을, 위험한 순간을 잘 넘서, 마치 지옥에서 살아오기나 한 것처럼, 덤으로 살고 있느니, 또는 구사일생했느니 하며 너스레를 떨었던 내가 얼마나 작아 보이던지, 흐르는 금강 그 탁한 물을 바라보며 잠시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허겁지겁 살고 있는 나를 돌아 본 하루였다.그렇다면 삶과 죽음의 간격은 얼마나 될까? 한 순간이라고도 하고, 찰나라고도 하는데, 그 순간이 죽음이 아니고 삶일 때 그 순간을 금세 잊어버리는 그 마음을 어찌 해야 하는지.역주행 사건이 우연처럼 다가온 사건이라면 입암산성으로 취재를 하러 가던 때의 일은 나에게 있어서 무슨 사건일까?호남 고속도로 금산 IC 부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KBS 김명성 와 입암산성 일대 취재를 가던 길이었다. 광주 민학회의 배성자씨가 민학회 답사를 위해 왔다가 동참했고, 카메라 와 다섯 명이 가던 길이었다.피곤한 지 세 명은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고, 승용차 기사와 나만 깨어 있었다. 곧 금산사 부근을 지나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그랬다. 눈 깜짝할 시간에 차가 기우뚱 거리더니 1차선에서 바깥 차선으로 나가는 게 아닌가? 아! 하고 놀랄 사이도 없었다. 차는 큰 트럭과 부딪쳤고, 반동으로 중앙분리대를 들이 받았다. 이렇게 해서 죽는구나하는 순간, 차는 중앙분리대를 들이 받은 뒤 주저 앉았다. 충격에 의해 잠에서 깨어난 김명성 가 밖으로 나가 1차선으로 오는 차들을 제어 했고, 얼떨결에 깨어난 사람들이 고속도로 바깥 차선으로 나가자 우리가 받았던 13톤 트럭의 기사가 얼굴이 사색 되어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안 다쳤어요.? 하고 묻는데 다행히 큰 부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가 들이 받았던 부분을 보니, 이럴 수가? 타이어의 고무부분을 들이 받고 그 반동에 의해 차가 중앙분리대 쪽으로 들어갔고, 중앙분리대를 들이 받고 승용차가 주저앉는 그 시간에 다행히 고속도로에 차가 뒤따라오지 않아서 무사한 것이었다.트럭이 없었더라면 고속도로 밖으로 뛰쳐나가 죽었을 것인데, 그 차를 들이 받아 무사했다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금세, 레카 차들이 고속도로에 들어와 사고를 수습하고 우리는 구급차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진단 한 결과 신기하게도 그 어느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다.알고 보니 타이어 정비 불량으로 타이어가 펑크 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결국 그 차는 폐차가 되었다는 후문을 들었다.하마터면 KBS 취재차 가던 우리들이 타 방송국에 의해 취재를 제공할 뻔 했다. 그날 다시 방송국에 가서 우리들이 그날 새로 살아난 날이기 때문에 매년 그날이 되면 밥 한 끼라도 먹자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바쁜 사람들의 약속이 지켜질 리가 있는가. 하여간 그날의 취재는 그 다음으로 미뤄졌고, 다시 취재를 떠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병원에서는 그 뒤 계속 입원을 하라고 전화가 결려 왔지만, 안 아픈 데, 그리고 바쁜데, 병원에 누워 있을 시간이 어디 있는가?그 뒤 여러 명의 무속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얘기를 했더니,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선생님이 김개남 장군 추모비, 정여립 장군 추모비, 동학농민군 위령제, 빨치산과 토벌군 위령제를 지내주었기 때문에 그 혼령들이 보호해서 그런 것이지요.하여간 그 절체절명의 순간을 견디면서 어디 한 군데도 다치지 않고 무사한 고속도로 사고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가끔씩 생각하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구절이 있다. 전쟁과 피하기 어려운 죽음에 직면해서 아타락시아 조용한 마음으로 만사를 방관하는 이외의 나은 지혜는 없다.는 말.사실 그날 그 시간에 일어난 일은 어느 것 하나 생각할 시간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닥쳐오는 일이기 때문에 그 말도 그리 유효한 것은 아니리라.수없이 많은 위험한 길을 걸었고 그렇게 위험에 노출된 길을 걸었는데도 내가 이제껏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운이 좋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어느 날 나는 그런 순간에 또 다시 직면할 것이다. 그 때 나는 엘리어트의 시 한 구절을 꼭 기억할 것이다.근심할 것과 근심하지 말 것을 분별케 하소서, 조용히 앉아 있기를 가르쳐 주소서언제든 삶이 죽음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노라면 우선 마음이 편안하다. 하지만 오늘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서운 할 것이 없는 그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필요하다.부처님도 다음과 같이 말했지 않은가?태어난 것은 죽게 되고, 모인 것은 흩어지고, 축적된 것은 소모되고, 쌓아올린 것은 무너지고, 높이 올라간 것은 떨어진다.우리가 실제로 지닐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이 순간뿐이다. 우리의 모든 욕심은 부질없는 것이고 헛된 것이다.우리의 존재는 가을 구름처럼 덧없다.존재의 삶과 죽음은 마치 춤동작을 보는 것과 같다.삶은 하늘에서 번쩍이는 번갯불처럼 잠깐이며,깎아지른 산에서 흘러내리는 급류와 같다.다시 부처님의 말이다. 삶과 죽음은 항상 가까이 있다. 단지 한치 앞을 모르기 때문에 그걸 인식하지 말할 뿐이다. 내일 또는 다음의 생, 어느 것이 먼저 올지 그것을 어느 누가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삶과 죽음에 초연한 마음을 가지고 먼 길 떠나면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힘들겠는가?다시 떠나는 길이 나에겐 희망이다.길에서 노닐고 길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11월 11일을 길의 날로 제정하고 길 문화 축제를 연지 어언 10여년이다. 11월 9일 오후 전주천변 청연루 일대에서 여는 길 문화 축제에 앞서 정현종 시인의 고통의 축제를 떠올린다.나는 축제주의자입니다.그 중에 고통의 축제를 가장 사랑합니다.합창소리 들립니다.우리는 행복하다고그래, 알고 보면 나 역시 축제주의자다. 길을 걷는 고통, 살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의 시절도 어느 날 문득 다시 그리워질 테지./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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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07 23:02

[27. 강이 살아야 인간이 산다]강물따라 거닐며 삼라만상 소리 듣고 기다리는 법 배워

친구여 강은 여러 가지 소리를 갖고 있군요! 무척이나 많은 소리를 말이오. 강은 왕자의 목소리, 전사의 목소리, 황소의 목소리, 밤에 우는 새의 소리, 산모의 목소리를 갖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탄식하는 자의 목소리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밖에도 다른 수천의 소리를 갖고 있는 게 아닐까요?바스테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소. 강물의 소리 안에는 삼라만상의 목소리가 다 깃들어 있지요그가 강가에서 배운 것은 기다리는 것과 참는 것과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내 나이 스무 살 그 어두운 시절에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암담한 절망과 고뇌 속에서 기다리는 것과, 참는 것과, 귀를 기울이라 는 그 공허한 외침을 들으며 삶을 이어갔고, 강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졌는지도 모른다.그때부터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나는 강으로 나가 강변을 거닐었고, 그 쌓인 세월의 힘이 우리나라 10대 강 도보답사에 나서도록 했을 것이다.이른 아침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 길도 좋지만 저물녘에 강변에 나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걷다가 보면 강물이 내게 말을 건네는 소리가 들린다. 어서 오게, 와서 내 오래된 이야기를 듣게 이 지구상에 땅이 형성된 뒤부터 쉬지 않고 흐른 강물은 거침없이 흘러서간다 시냇물엔 멈춰선 물길이 없다는 옛말처럼 어디에서 비롯되어 어디를 향해 가는지 물어도 대답조차 없이 강물은 유유히 흘러서간다.열나라, 백 나라가 쓰러지고 일어섰어도 밤낮을 모르고 그침이 없이 흐르고 흘러가는 것이 강이다. 강은 한자 江의 음으로 수(水)와 공(工)이 합쳐져 형성된 문자로 보통 명사가 아니라 장강 곧 양쯔강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 양쯔강이 흐르며 내는 물소리 곧 끙끙(工의 고음)을 본떠 만든 의성어가 강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일반적인 강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또한 가람은 갈래진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물줄기의 갈래가 모여 흐르는 것을 의미하였다.우리나라의 신화 속에서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 유화는 강의 신의 딸이었다고 한다. 하느님의 아들 해모수가 그녀를 유혹하여 봉신산 아래 압록강 변에서 인연을 맺은 뒤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주몽이었다. 그것은 하늘의 신과 물의 신이 결합하여 땅을 다스리는 지위와 권력을 부여받은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강은 고구려 건국의 신성한 모태를 상징하고 있다. 강은 또한 희망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통로 즉, 낙토의 길목으로서 추격 병에 쫓긴 주몽이 별의 도움을 받아 강을 건너 졸본부여를 건설하였다.강은 또한 이쪽과 저쪽을 구분 짓는 경계선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강 건너 불구경이나 강 건너 호랑이라는 말은 강의 거시적 거리만큼 나와는 상관없다는 뜻을 나타낸 말이었다. 그리고 강은 건너가 봐야 안다, 강물은 위로 흐르지 않는다는 말은 순리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또한 옛 사람들은 꿈에 강을 보면 길조라고 보았다. 꿈에 강과 모래를 보면 문장이 더하고 강물이 집안으로 밀려들면 좋은 일이 있을 징조라고 하였다. 이처럼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강을 미국의 시인 W.C 윌리엄스는 강은 어디에선가 시작되어야 한다. 강의 시작은 모든 곳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의 말처럼 강은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자연의 선물이다.시냇가에서 보낸 어린 시절성격이 내성적인 데다가 친구들로부터 적잖게 따돌림(오늘날의 왕따)을 받았던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그런 나날이 계속되자 나는 자연스럽게 혼자 노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건 다름 아닌 내가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이 되는 놀이였다.학교가 파하기가 무섭게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가 밭을 매는 가는골이나 시암골의 시냇가에서 가재를 잡으며 보낸 것이다.가재를 잡다가 보면 이 시냇물이 어디를 흘러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궁금해서 삼촌이나 고모에게 물어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프랑스의 시인 프랑시스 쟘도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마을의〉라는 시에서 나와 똑 같은 생각을 했었다.그늘 속에서 그 물이 어디로 그토록 멀리 어디로 흘러가는지 나는 궁금해 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물의 끝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고 하던 내 어린 시절을 다시 보는 것이었다.그 이후 그 시내 또한 나는 다시 보았다.나는 슬플 때나 기쁠 때마다 어린 시절 그 작은 손으로 돌을 들추며 가재를 잡던 추억을 간직하고 지금까지 살았는지도 모른다.세월이 흐르고 흐른 뒤에야 내가 가재를 잡으며 보낸 꿈 같은 유년 시절을 지켜본 그 시냇물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이라고 일컬어지는 섬진강의 발원지 부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평생을 내 곁에서 그림자처럼 떠나지 않는 강에 대한 그리움은 이미 그때부터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강은 그 후로도 나를 언제나 소년처럼 들뜨게 하였고 가끔은 망연자실한 채 바라보게 하였다. 그 강에 대한 숙명적인 그리움으로 한강과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10대 강을 걸어갈 도보답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걷기 시작해서 그 강들을 서너 번 씩 걸었다.강을 따라가는 길은 항상 평탄하지 않고, 항상 낯설었으며, 가는 길은 항상 힘에 겨웠다. 다리가 아파서 쉬고 있을 때. 문득 떠오르던 생각, 저 모퉁이 돌아가면 어떤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픈 다리 일으켜 세월 모퉁이를 돌아가면 기적처럼 아름다운 풍경들이 나타났다.안동의 가송리 부근, 정선의 구미리 부근, 순창의 장구목 부근, 무주의 용포리 부근, 지금도 그 강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뛴다. 아름다운 경치를 만날 때 덩실덩실 춤을 추었던 서경덕, 주저앉아서 통곡을 했던 김시습, 그리고 파우스트에서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 정말 아름답구나.하고 경탄했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강을 따라가며 느끼는 소회였다.오랜 나날, 강을 따라 걸어가면서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강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중환(李重煥)은 역모사건에 몰려 수차례의 국문과 오랜 동안의 유배생활을 마친 뒤에 사대부들이 살만한 곳은 어디인가를 찾아 나섰다. 그는 이십 여 년간 우리 국토를 헤매고 다닌 뒤에 〈택리지(擇里志)〉를 지은 뒤 다음과 같이 삶터를 규정했다.오직 시냇가에 사는 것은 평온한 아름다움과 시원스러운 운치가 있고, 또 관개의 농사짓는 이점이 있다. 이러므로 시냇가에 사는 것이 강가에 사는 것보다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이 바닷가에 사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은 옳지 못하다.그러한 연유 탓인지,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관직에서 물러나면 강가에 터를 잡고, 후학들을 가르치거나 공부에 전념하며 남은 생애를 보냈다.황희 정승은 임진강변의 반구정, 이황은 안동의 도산서원 근처, 이이는 해주의 석담구곡 근처, 송시열은 괴산의 화양동계곡에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들을 가르쳤다.오늘날은 어떤가, 대도시의 강가에는 조망권이 좋은 아파트가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몰려들고, 한적한 강가에는 별장이나 음식점, 그리고 펜션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다.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 김수영 시인이 〈거대한 뿌리〉라는 시에서 갈파했던 것을 이어가기 위해 삶터를 경치 좋으며 한적한 강가로 옮기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강을 중심으로 살았던 옛 사람들옛날의 강은 말 그대로 실크로드였다. 사람들의 삶이 강을 중심으로 발달하였고, 그런 연유로 고대국가는 대부분 큰 강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지게나 수레, 말이 운송수단이었던 시대에 배가 다니는 강은 그 당시의 고속도로나 하늘 길 같은 역할을 했으므로 강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펼쳐졌다. 그래서 모든 길은 강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졌고 길은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을 지나갔었다.그러나 현대에 접어들어 교통이 발달되면서부터 강은 교통이나 소통의 역할을 접고 사람들의 삶이나 기억 속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도시 근교를 제외하고 강가에 살던 사람들이 자꾸 떠나기 시작했고, 빈집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길이 곧 도(道)였고, 강이 또한 도였던 시절은 어느새 사라지고 강 마을은 소외된 채 길이 속도로서만 존재하고 있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선종의 격언에 물의 가르침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물을 마셔라라는 말이 있다. 그 말처럼 30여년전만해도 강가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흐르는 강물에 채소를 씻고, 그냥 마셔도 괜찮았다고 한다. 그러나 낙동강 유역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로 안동 똥물 대구가 먹고, 대구 똥물 부산이 먹는다.는 말이 사라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제방에 갇힌 채 흐르는 오염될 대로 오염된 그 물을 그냥 마실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오천년 역사를 안고 흐르는 것이 강이다우주 순환의 이치를 안고서 흐르는 강, 한반도 오천년 역사를 안고서 산천을 실핏줄처럼 흐르는 강을 두고 사람들은 민족의 젖줄, 역사의 숨결이라고 부른다.하지만 그 강의 역사가 어디 오천년뿐이겠는가? 강에 기대어 살아온 것이 인류의 역사다. 엘리어트는 〈네 개의 사중주〉에서 유장하게 흐르는 강을 두고 인간들이 잊고 싶은 것을 회상시키는 자라고 노래했다.사도 바울은나는 매일 죽노라. 라고 말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똑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라고 강물을 평했다. 강물이 바로 그렇다.고대인들은 자연을 따르고 자연의 이치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런 세상의 이치라고 여겼고, 노자 역시 만물은 자연스레 생성한다. 고 했다.그래서 생태학자들은 조그만 하천에다 보를 막는 것조차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간섭이기 때문에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강을 살리자라는 구호의 물결 속에서 대운하가 계획되다가 4대 강 사업이 온 나라를 휩쓸고 지나간 뒤,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도출되고 있다.동학의 2대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崔時亨) 선생은〈개벽운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이 세상의 운수는 개벽의 운수라 천지도 편안치 못하고 산천초목도 편안치 못하고 강물의 고기도 편안치 못하고 나는 새 기는 짐승도 다 편안치 못하리니 유독 사람만이 따스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으며 편안하게 도를 구하겠는가. 선천과 후천의 운이 서로 엇갈리어 이치와 기운이 서로 싸우면서 만물이 다 싸우니 어찌 사람의 싸움이 없겠는가?최시형 선생의 말처럼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 아래 자연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성호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이란 모습 속에 있는 것인데, 모습이 이미 같지 않다면 어찌 정신을 온전하게 전할 수 있겠는가?만물의 영장이라는 미명하에 인간들이 강을 자꾸 훼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강은 그 푸르디 푸른 물빛으로 흐르고 스스로 정화하면서 인간들에게 생명과 무한한 사랑을 주고 있다.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말해야 한다.강을 사랑하는 이여, 강에 기대 사는 이들이여, 강을 따라 천천히 걸어보시라, 삼라만상이 내는 모든 소리가 깃들어 있다는 강물소리를 들으며 듣고, 생각하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시라.이익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핑계로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오염된 강이 그래도 머무르지 않고 흐르면서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것을 바라보시라. 작은 물방울에서 비롯된 강물이, 오염되고 작은 물길들까지 하나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 겸손하게 낮은 곳으로만 흘러서 망망한 바다로 흐르는 것이 강이다. 그래서 니체는 말하지 않았는가.강을 보라.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그 근원인 바다로 들어가지 않는가?수많은 질곡의 세월들을 거치며 영원의 바다로 들어가는 그 강을 따라 걸으며 강을 바라보며 강과 사람이 하나라는 것, 사람도 역시 그 강물처럼 흐른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시라.세세천년을 흘러온 한국의 강이 오천년 우리 역사의 숨결과 유장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흐르도록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들의 몫이다. 강이 살아야 사람이 살고, 자연의 미래가 있다.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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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31 23:02

[26. 인생의 길에서 만난 사람] 길에서 그 사람을 영화처럼 만나다

누구나 일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길이나 장소가 가슴속에 선명히 낙인이 찍혀 지워지지 않는 곳이 있을 것이다.내게 있어서 그런 장소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노송동 안기부 분실 지하실이 그곳이다. 그 밀실에서 나를 사람으로 대우하는 그 사람은 삼십대 후반쯤 되어 보였는데, 나에 대해 깍듯이 예의를 차렸고, 얼굴만 보아도 지식인 타입이었다. “신정일씨는 어떤 시인들을 좋아하시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데, “미당 서정주 시인은 우리말을 가지고 시를 너무 잘 쓰기 때문에 존경합니다. 신정일씨는 어떻소? 나는 김승옥씨의 소설도 좋아하오. 당신은 조사해보니까 김지하,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던데, 어떻소?”하고 말끝을 흐르는 그에게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고 의자에 시체처럼 누워 있을 뿐이다. 지금 내게 서정주는 무슨 의미고, 김승옥이나 김지하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쩌면 다시 살아나갈지,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그런 나의 생각이나 표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이 그 사람은 시와 소설을 이야기했다. 저 사람도 나처럼 문학도였나? 글은 안 써지고, 그러다 이곳에 밥벌이를 위해 취직한 건가? 그런 상황에도 나는 그런 쓸 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현실은 냉혹하기만 한데…….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들에게 자꾸 간첩이라고, 북한을 얼마나 여러 번 갔고, 돈을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고 다그침을 당했다. 그러다보니 내가 정말로 북한에 갔었고 그들로부터 지령과 함께 돈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신을 만나기를 열망하다가 정말로 신을 만나게 되었다는 종교인들의 말과 같이,아닌데, 내가 제주도에서 줄곧 했던 일은 온 몸이 바스라지게 혹사하며 행했던 노동과 책읽기, 그리고 어설픈 습작밖에 더 있었던가?그러나 그가 나가고 다시 취조관이 바뀌자 나는 또 그 무시무시한 간첩혐의자가 되어 그들에게 무자비한 취조와 함께 고문을 당하기 시작했다.그들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애애초 그 믿음과는 관계없이 내가 얽혀 들어갔고, 그 믿을 것도 없는 나를 중심으로 하나의 범죄 집단(간첩단)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증거가 필요 없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어떤 증거도 가능하지 않다.” 미국 경제학자인 스튜어트 체이스(Stuart Chase)의 말은 너무나 지당하다.그런데 굳이 부정하는 내 말을 그들이 믿을 것이 뭐가 있었겠는가?두들겨 맞다가 기절을 하면 물을 끼얹으며 취조를 받는 것은 감당할만했다. 그런데, 진실로 괴로운 것은 가끔 옆방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였다. 숨이 넘어갈듯,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듯, 가냘프게, ‘아, 아악, 어머니, 어머니’ 하고 되뇌는 비명소리,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고, 몇 사람씩 들리는 그 소리, 이곳에서 살아나가기는 어렵겠구나. 하는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마치 내가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는 듯, 그 비명소리가 들릴 때마다 살점이 찢겨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눈이 부신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취조와 구타를 당하다 보니 며칠이 지났는지 분명하지 않은 어느 날,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한가한 날, 세상에 정적만 감도는 것 같은 시간.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내가 있는 그곳이 잠깐 생각이 아니 않다가 문득 내 위치를 깨달았다. 그때의 암담함과 참담함, 나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지, 나는 과연 다시 이 지하실에서 나아가 푸른 하늘과, 해와 별, 그리고 흐르는 흰 구름과 두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자유롭다는 사실까지도 잊은 채 느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그 순간 누군가 불쑥 문을 열었다. 놀라서 바라보니 문학에 관심이 많다는 취조관이었다. “커피를 드시겠소?” 달리 할 말도 없었다. 그가 가져 다 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두려운 눈으로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신 선생?” 하고 그가 내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웃음을 짓더니, 다음과 같이 내게 말했다. “이제야 조사가 끝났소, 자술서만 쓰면 나갈 수 있을 것이오. 자술서를 써야 하는데, 당신이 나보다 글을 잘 쓸 테지만 자술서 양식에 맞게 써야 하니까, 당신이 태어나서 살아온 그대로를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구술하시오, 어린 시절 아팠던 것이나 누군가를 짝 사랑 했다는 것까지, 그러니까 아주 사소하고 시시한 것까지도 다 말해야 하오. 조금이라도 숨기는 것이 있는 것 같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소.”누구나 그럴 것이지만 일생의 중요한 어느 시기나 말년에 이르지 않고서는 자기의 살아온 삶을 속속들이 뒤돌아보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기이한 상황 속에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내 전체의 삶을 반추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그날 그때까지 살아온 생애를 다 돌아보며 내 입으로 아주 기이한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내가 살아온 과거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아주 낯선 풍경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대여섯 시간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가끔씩 피곤하면 내게 웃음을 지으며 말하곤 했다. “커피를 마시겠소?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우겠소.” 그는 그 사이 담배를 두어 갑은 피웠을 것이다, 매캐한 담배 연기 속에서 나는 살아온 내력을 다 토해냈고, 그는 내 이야기를 빠른 속도로, 곧 속기로 적었다. 푸르던 젊음의 시절 찬란하게 빛나야 할 그 이십대 중반에 나는 생각만 해도 기이한 자서전을 입으로 구술했던 것이다. 구술이 끝나자 그는 말했다. “다시 자술서를 쓰는데, 내가 부르는 대로 쓰시오.” 나는 그가 부르는 대로 자술서를 썼다. 세상에 나와서 책을 읽고 중부전선인 철원에서 군대생활을 하고 제주도에서 노동을 한 것 밖에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나의 자서전을 나하고 전혀 안면이 없는 한 사내가 국가에서 월급을 받으며 써 주고 있었다.에드워드 올비는 〈아기에 관한 연극〉에서 상처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상처라는 깨어진 가슴이 없다면 어떻게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 당신에게 깨어진 가슴이 없다면 당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과거에 누구였는지 지금까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다. 내게 그런 이상하고도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의 지난날을 샅샅이 되돌아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하여간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상야릇한 〈자서전〉이 완성되었다. 자서전을 들고서 그는 내게 말했다. “이 글은 〈영구 보존함〉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게 다시 다짐을 했다.“여기에 왔던 일, 여기 와서 겪었던 일을 죽는 날까지 누구에게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 와서 겪었던 것은 당신의 가슴속에만 있어야 하오. 하여간 수고했소. 언젠가 이곳에 왔던 것을 영광의 한 시절이라고 여길 날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밖으로 나가더니 들어갈 때 벗어놓았던 옷을 가져다주었다. 그 때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며칠만인가, 내가 마치 은빛 모래사장이 빛나는 해변의 나체촌에서처럼 옷을 벗고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지내다가 다시 옷을 입다니……. 옷을 입는데 돌연 눈물이 났다. 입술을 질끈 질끈 씹으며 나는 울었다. 나는 울면서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위독하신 아버님은 얼마나 나를 기다렸을까? 매일 저녁 통학차로 가면 힘도 없이 나를 맞던 아버님, 그리고 어머니는? 또한 가게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일이 있은 뒤 몇 년이 지나 TV에서 한수산의 필화 사건에 휘말린 박정만 시인의 고문을 본 적이 있다. 어찌 그리도 내가 겪었던 상황과 흡사한지, 김대중에게 돈을 얼마나 받았고,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얼마나 여러 번 만났는지, 그리고 이어지던 고문. 그들은 말 그대로 기계와 같았다. 가책은 커녕 오히려 정의감과 사명감에 불탔다. 그래서 클레오메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전쟁 때에는 적에게 아무리 나쁜 일을 해도 정의 개념 밖의 일이며, 신들에 대해서나 인간들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그런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이 점찍은 사람들을 그처럼 가혹한 취조와 고문을 했을 것이다. 나처럼 그곳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간첩이 되거나 정신이 이상이 되어 폐인이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한 번 그 지하실로 들어가면 들어가기 전의 정신을 가지고 나오기는 어려운 곳이 그곳이었던 악명 높은 안기부 지하실이었다.그리고 여럿이라면 공동체 운명이라고 여겨서 그나마 다행한 일일 것이지만 불행스럽게도 혼자였다. 더구나 여러 사람의 감시 속에서 혼자만 벌거벗은 채, 잠을 못자고 짐승처럼 여러 사람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아우성소리를 들으면서 그 어떤 사람도 믿지 못하는 속에서 보낸 며칠이었으니, 마치 랭보의 시 제목처럼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 그곳과 같았다고 할 수 있을까? “자 이제, 당신은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곳으로 끌려오던 것처럼 수건으로 내 얼굴은 가려 졌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 다시 시멘트 길을 걸어가서 차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를 차가 달렸을까?모르긴 몰라도 내가 처음 이곳으로 오던 길을 그대로 따라 갔을 것이다.“다 왔습니다, 내리십시오.” 그들은 나를 내려준 뒤 차에 오르며 “우리가 간 한 참 뒤에 수건을 풀면 됩니다.”차는 곧바로 떠났고 그들의 말을 좇아서 잠시 후 수건을 풀자 낯익은 풍경, 바로 가게 앞이었다. 글쎄, 그들은 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혹시 내가 긴 꿈을 꾼 것은 아니었을까? 그 날 그들에게 끌려가던 새벽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가 긴 꿈이었거나 아니면 환상은 아니었을까?나는 내 뺨을 꼬집었다. 아팠다. 마치 세상에 홀로 내 던져진 느낌이었다.어둠이 장막처럼 드리운 밤인가, 새벽인가 모를 거리에 바람은 차갑게 불어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하실로 내려가 문을 열고 카페로 들어섰다. 나를 바라보던, 그 눈길,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오늘이 며칠이지?, 지금이 몇 시지?”내가 끌려갔던 날로부터 닷새가 지난 뒤인 1981년 여름 풍경이었다. 그 때 기이한 자술서를 썼던 그 순간을 한 편의 시로 쓴 것은 약 5년이라는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흐른 뒤였다.1984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고 그 상황을 〈그 때 그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로 남겼던 적이 있다.“그는 여섯 사람 중에 나에게 유일하게 친절했다.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밖이 안 보이는 낯선 지하실 방하나의 소지품도 없이팬티마저도 걸치지 않은 이상한 차림의 나에게팔월의 성하(盛夏)가 무색하도록오싹 한기를 느끼며 얼어있던 나에게,둘만 있을 때에는 담배도 권하고자기는 문학에 뜻을 두었었다며근간의 소설(小說)과 시(詩)의 경향을 얘기도 했다.넥타이 단정히 맨 그는잠바 차림의 그의 동료들이나를 데리고 놀(?)때는고개 숙이고 담배를 피우다가그들이 사라지면 안쓰럽게 바라보았다.그는 나에게 깍듯이 공손했고,뺨은커녕 욕 한마디 선물하지 않았는데,단 마지막 자술서를 쓸 때“다른 글은 당신이 잘 쓰실 테지만이것만은 내가 부르는 대로 쓰시오” 하였다.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부르는 대로 썼고 마지막에“힘들었지요, 이곳에 왔던 것이 어쩌면 영광이라고 느낄 날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세월 흘러 시내를 걸어 가다가눈 안에 선뜻 안기던 사람허리 굽혀 인사 나누었는데,‘누구였더라.’ 뒷모습 봐도 모르겠더니,열 걸음 쯤 걸어 고려당제과점(현 대한문고) 앞을 지날 때진열된 빵을 보니 배고픔처럼 떠오르던그 속에서 유일하게 사람 같이 보였던그때 그 사람. ( 1985. 5월 31일)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었을까? 그렇게 생각나지 않다가 열 걸음쯤 걸어가다가 뒤돌아보니, 그 역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옛 사람이 말한 너무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게 되면 ‘가인(佳人)과 헤어지는 것과 같아 열 걸음을 걸어가다가 아홉 번을 뒤돌아본다.’ 는 말이 있지만, 어떻게 열 걸음쯤 걸어가다가 생각이 났는지, 그래서 다시 손을 흔들며 제 갈 길을 가던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던 그 때 그 순간. 그 당시의 혼돈스럽던 내 마음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지금도 역시 그 때처럼 내 마음은 혼돈 속에서 깨고 혼돈 속에 잠이 든다. 그렇다. 삼십 여 년의 세월 속에서도 근본은 변하지 않는 것, 해는 뜨고 지고, 꽃도 피고 진다. 이렇게 저렇게 가는 세월.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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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24 23:02

[25. 우리민족에게 산이란 무엇인가] '등산' 아니라 '입산', '정복' 아니라 '합일'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나의 삶은 가난하고 외로웠지만 어쩌면 풍요로웠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사르트르가 나중에 술회하기를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잃은 것이 행운이었다. 라고 한 것과는 약간은 다른 맥락이지만 나는 어린시절을 부모님과 떨어진 채로 할머니와 단둘이서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또는 열심히 공부해라 하는 일종의 간섭을 누구에게도 받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일찍부터 허전하면서도 달콤한 그 외로움의 의미, 그 쓸쓸함의 의미를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나는 그만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 당시를 떠올려보면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내 눈에 뜨이던 산과 강이 나의 유일한 벗이자 스승이었다.요즘에야 개인 집이나 아파트를 막론하고 집집마다 수도 시설이 완벽해서 수도꼭지만 틀면 좔좔 쏟아지는 게 물이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만 해도 마을의 공동 우물이나 깊은 샘에서 물을 길어다 놓고 먹었다. 내가 태를 묻은 고향마을은 마을 앞 집집마다를 거쳐서 지나가는 작은 냇물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다 그 물에서 나물을 씻고 빨래를 했으며, 그 물에서 세수를 하였고, 밤중에는 목욕을 하기도 하였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마다 물동이를 이고서 물을 길어오면 그 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하얀 사발에 정갈한 물(淸水) 한 그릇을 떠 놓고 내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무엇인가 소원을 빌었다.아직 잠이 덜 깬 나는 바로 앞집인 상관이네 집 앞을 흐르는 개울가에서 세수를 하며, 저 물은 흘러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였지만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싸리문을 밀고서 우리 집 담벼락 너머에 있는 모정(茅亭)에 나가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면 주위는 온통 산이었다. 서쪽을 내려다보면 성수면 구신리와 백운면 덕현리 그리고 마령면 계서리까지 그 긴 능선을 마치 병풍처럼 드리운 산이 보이는데, 그 산이 옛적에 백색의 신마(神馬)가 내왕했다는 설이 있는 내동산(887m)이고 남쪽인 백암리와 동창리에 걸쳐 있는 산이 갈모처럼 봉우리가 뾰족한 갈미봉(762m)이었다.다시 고개를 돌리면 산삼이 많이 나는 큰덕골이고 그 뒤편에 삼각형인 산이 선각산(仙角山.1,034m)이었다. 바로 뒤편에 인자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산이 봉우리가 덕스럽게 생겼다는 덕태산(德泰山.1,113m)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각산 줄기에 있는 산으로 그 모양이 감투 같다는 감투봉이 있으며, 감투봉 건너편에는 감투봉에 있는 장군을 보호하고 있다는 망바우가 보였다. 그 아랫마을이 지대가 높아서 늘 흰 구름이 떠 있다는 백운동(白雲洞)이었다.홍두깨처럼 생겼다는 홍두깨재는 장수군 천천면과 경계에 있는 고개인데, 그곳에서부터 비롯된 백운동천이 웃 흰바우와 아래 흰바우를 지나 전에 사기점이 있었다는 점촌을 지나면 원촌이다. 오일장이 서던 원촌을 지나면 주위에 넓은 바위가 많은 번바우에 이르고, 그 건너가 내동산 기슭에 자리잡은 내동마을이다. 그 마을 앞에서 백운동천과 섬진강의 가장 상류천인 제룡강이 만났다.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상초막골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구름다리라고 불리는 운교리를 지나 마령면 강정리 앞에서 오원천으로 들어가는 부분까지를 제룡강이라고 부르는데, 사람들은 그 강을 백마천이라고도 부른다.내가 어린시절을 보낸 그 자그마한 지역만 해도 그렇게 많은 산(山)과 내(川)가 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 하물며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이라는 이 나라 산천의 곳곳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그 많은 산과 강을 만나기 위해 옛 선인들은 오랫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 국토편력에 나서곤 했다. 정시한의 산중일기, 박종의 동경기행, 김일손의 두류산 기행이나 김창협의 동유기 그리고 박제가의 묘향산 기행을 비롯한 수많은 기행문들이 그들이 이 나라 산천을 주유한 뒤에 쓰여졌다. 그 뒤를 이어 현대인들도 수없이 산을 오르고 있다. 지역마다 수없이 많은 산악회를 통하여 산을 오르거나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우리나라의 등줄기인 백두대간뿐만이 아니라 정맥 종주를 나서고 있다.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많은 산을 오르는 것을 마치 벼슬이나 한 것처럼 떠들며 몇 개의 산을 정복했느니 하며 산을 오른다.옛 사람들도 그랬을까? 옛 사람들은 오늘날의 산사람들처럼 몇 개의 산을 올랐다는 것을 어느 한 사람도 자랑하지 않았다.김일손, 정여창, 김종직 남명 조식, 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그들은 겸허하게 자기를 돌아보기 위해 산을 올랐고, 그 산을 오르면서 느끼는 인간의 슬픔 비애 등을 통하여 새로운 사람을 준비하기도 했고 그 산을 다녀와서는 아름다운 기행문을 써서 그 자신의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참으로 이상한 것은 한국 사람이 높은 데에 오르면 반드시 노래를 하는 것이다. 나는 산에 올라가서 노래하지 않는 한국 사람을 본적이 없다. 산에서 만나는 한국 사람은 아이거나 어른이거나 노래하지 않으면 입으로 웅얼거린다.조선 후기에 한국을 찾았던 외국인 길모어의 기록이다산기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산을 오른다(登山)고 하지 않고 산으로 들어간다(入山) 고 하였다. 그것은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산을 허전할 때 기대고 싶은 어떤 대상이거나 고향집 또는 놀이 공간 혹은 내 몸처럼 더불어 살아가야할 어떤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육당 최남선은 〈조선의 산수〉라는 강연집에서 산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한민족의 생활에 있어서 그 국토를 존경하는 감정은 심히 소중한 것이다. 국토를 존경하는 태도는 신앙적 종교적으로까지 봐야 비로소 든든하다. 옛날 우리 조상님 들은 신앙적으로 높은 성산(聖山)에 들어갈 때는 대소변을 받아 가지고 나올 그릇을 가지고 가서 행여나 신성한 산을 더럽힐까 조심하고, 또 산중에서도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큰 소리로 지껄이지도 않고 마구 몸을 가지지도 아니하여 행여나 산신령을 성나게 할까봐 극진히 조심하였다.그러므로 우리네 말에는 소중한 산이라 감히 오른다.하지 않고 반드시 산에 든다. 고 하였다. 요 사이 철 부족한 사람들은 혹시 이것을 어리석은 일로 돌리고 코웃음을 칠지 모르지만 산악(山嶽)과 산천강해(山川江海)를 통해서 그네의 국토를 대하여 그네들이 이렇게 겸허하고 엄숙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나는 그네의 총명예지로서 못내 탄복한다.최남선 선생의 말과 같이 산을 신령스럽게 여겼던 거룩한 전통이 없어지고 외국에서 들어온 외래 사상에 물들어 자연을 정복한다 또는 히말라야 팔천 미터 급 봉우리 몇 개를 정복하였다는 등 마치 천지(天地)를 자기 힘으로 정복한다.는 식의 만심(慢心)이 판을 치고 있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갈하고 있다.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다만 신순과 융합이 있을 뿐이요. 온전히 그 은혜를 못 받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무궁무진한 천지조화 중에서 정기(精氣)를 좀 끌어다 쓰는 것이 무슨 자연의 정복이겠느냐? 숨이 턱에 닿아서 어느 봉우리에 발을 좀 붙인 것이 무엇이 산악을 정복한 것이냐?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지금도 정복이라는 말을 부끄러움도 없이 즐겨 쓰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산에 얽힌 내력이나 문화유산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는 헤겔의 〈법철학〉 서문에 나오는 격언을 따르기라도 하듯 오로지 앞서가는 사람의 발뒤꿈치만 보고 정상을 향해 오르고 다시 빠르게 내려가기에 바쁘다. 그래서 그 산에 산재한 문화재나 아름다운 절집의 고적함은 보려고도 들지 않고, 그 절에 들어가지도 않는다.그러한 폐단을 미리 예감했음인지 소식(蘇軾)은 제서림벽(題西林壁)이라는 시를 남겼다.이리 보면 고개요, 저리 보면 봉우리라.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한결같지 않구나.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함은단지 몸이 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네.(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산속에서 산을 보지 못하고 앞서 가는 사람의 발뒤꿈치만 바라보고 올라갈 뿐이다. 그와 같은 일이 아무런 반성 없이 현재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등산객이나 관광객들이 수박 겉핥기식의 등산문화, 관광문화에 찌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은 어느 때 산을 오르고 산에서 무엇을 찾았을까?그들은 산을 단순히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오르지 않았으며, 산을 오르면서 사람과 자연의 합일을 체득하고자 올랐고, 스스로의 자아실현을 위해 올랐다.일부 사대부들은 동남풍(東南風)이 부는 날 산에 올랐다고 한다. 산에 오르다 보면 길옆에 진기한 보물들이 얼마나 많이 숨어 있는가, 봄 산은 고사리, 고비, 취나물, 수리취를 비롯한 산나물이 지천이고, 도라지나 잔대, 그리고 그 상긋한 냄새를 풍기는 더덕에 이르기까지, 보이는 대부분의 잎사귀들이 다 사람의 미각을 돋우는 것이었다. 그뿐인가.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연이어 익어가는 온갖 딸기에서부터 싸리버섯, 능이버섯, 석이버섯과 버섯 중에 버섯인 송이버섯이 온 산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가을이 오면 가을 산을 수놓는 머루며 다래, 산머루까지 산속에 숨어 있는 보물들과 은밀히 교감하면서, 동반한 길벗과 도란도란 오르다보면 정상에 가까워진다.산의 정상에 오르면 가쁜 숨을 고른 다음에 상투를 풀고서 긴 머리를 풀어헤친다. 얼마나 시원했을까? 1년 내내 망건으로 죄고 있어야 했던 머리를 풀고 바람 부는 방향에 서서 그 머리를 마음껏 날렸는데, 바람으로 머리 빗질을 하는 그 풍습을 즐풍(櫛風)이라고 하였다. 그 즐풍은 방향을 가려서 하였으며 동풍은 좋지만 서풍이나 북풍에는 바람 빗질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날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불 것인가를 예측한 뒤에 산을 올랐다고 한다. 바람으로 머리 빗질을 한 뒤에 했던 풍습이 거풍(擧風)이었다. 거풍은 햇볕이 잘 내려쬐는 곳에서 바지를 벗은 뒤 하체를 노출시킨 다음에 하늘을 보고 누워서 양기(陽氣)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즐풍과 거풍 습속은, 감추어두고 얽매어 놓았던 생리적 부분을 해방시키는 뜻도 있지만 중요한 목적은 자연 속에 산재해 있는 정기(精氣)를 받기 위한 동작이며 의식이었던 것이다. 태양과 가장 가까운 산의 정상에서 하체를 노출시켜 태양과 맞대면시켰던 거풍 습속은 양(陽) 대 양(성기)의 직접적인 접속으로 양기(陽氣)를 받는다고 믿었던 주술(呪術)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풍속이 남도지방에서는 거풍재, 거풍암 같은 이름과 벼랑 밭 반 뙈기도 못 가는 놈이 거풍하러 간다.라는 속담 등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에는 거풍이나 즐풍 습속이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그러한 풍속을 따를라치면 풍기문란죄로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르고 평일에도 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엄두를 낼 수가 없다.수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내려오는 산, 그 산은 우리 민족에게 무엇이었으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알면서 오르는 것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겠는가?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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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17 23:02

[24.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너무 많이 가지려고, 너무 많이 오르려고 하지 마라

△사람이 사는 곳은 나무가 자라는 높이까지세상이 눈이 부시게 변하면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주거 환경일 것이다. 농촌에서 도시로만 이주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영국의 시인 윌리암 쿠퍼는 신은 시골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그 도시의 미래를 어둡게 보았던 사람은 살루스티우스였다. 〈유구루타 전쟁사〉에서 유구르타 왕이 로마를 방문했을 때 오오, 팔려갈 도시, 살 사람이 나오면 당장 망할 것이라고 말하였다.릴케 또한 〈말테의 수기〉에서 그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다. 아마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이 도시로 오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오히려 여기서는 모두가 죽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 달리 도시는 시대가 변할수록 더 팽창해지고 발달을 거듭하여 현대인들은 큰 도시는 큰 고독이다. 라는 말을 실감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골보다 도시에 살기를 원하고 있다.사람들은 소도시에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때때로 그 소도시가 가장 고독하고 은밀한 자연 속으로 우리를 몰아버리곤 하는데, 왜냐하면 그 소도시가 언젠가 우리에게는 너무도 빤히 들여다보이게 될 때가 오기 때문이다.마침내 우리는 다시금 이러한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보충시키기 위해 대도시로 간다. 그 대도시의 몇 모금만 마셔보면, 우리는 그 술통의 바닥에 남아 있는 것까지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소도시로부터 시작되는 그 순환이 다시금 재개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현대인들은 살아간다. 현대인은 여타의 시대에 살았던 인간들처럼 안주하기에는 모든 면에서 지나치리만큼 철저하다.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에 실린 글로 시골에서 소도시로 소도시에서 대도시로 이동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해 설파한 글이다.도시가 현대인들의 삶터로 자리 잡으면서 여러 가지가 파생되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다. 현재의 풍수가들이 말하는바 사람이 사는 곳은 나무가 자라는 높이까지가 적당하다고 한다. 즉 땅의 기운을 받을 수 있는 아파트 3층까지가 살기가 알맞은 곳이라고 하는데, 20~30층 아파트들 중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층은 10층 이상이라고 한다. 특히 미국의 상류층은 조망권이 좋은 맨 윗 층이라고 한다.인간존엄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없는 도시와 인간과의 관계를 위스는 1938년에 쓴 논문〈생활양식의 도시성〉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도시에서의 접촉은 대면접촉이지만 그 관계는 희박하거나 피상적이며 깊이가 없고 단절적이다. 따라서 도시인들이 대인관계에서 보여주는 체면, 무관심, 짜증 등은 타인들이 개인적 보수성과 표현에 대해 자신들을 적용시키기 위한 반응으로 간주할 수 있다.도시는 결코 친화적이지 않고 항상 낯설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보면 옆집에 누가 사는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이사를 간지 수십 년이 지나도 서로 통성명도 없다. 누가 이사를 갔는지 아니면 이사를 왔는지도 중요하지 않은, 아파트 통로에서 만나면 그저 가볍게 목례만 올리는 관계가 전부이다. 사람들은 길을 걸어도 무표정하기 이를 데 없다.그러나 사실 문명이 창조한 도시란 얼마나 위대한 말인가? 한번 그 도시의 구성원이 되면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빠져나갈 길이 없다. 그래서 현재의 군소도시나 농촌에는 사람이 없다. 낮에는 그런대로 사람이 눈에 띄지만 저녁에는 모두 사라져버린다. 간간이 비치는 가로등 불빛과 유령들만이 밤을 지키는 것이다.워드(Babara Ward)는〈인간의 집(Home of Man)〉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도시에 대한 첫 번째 인상은 개개의 도시가 인간의 목적을 위해 계획되기보다는 거대한 망치의 반복적인 두드림에 의해 일정한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수준일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기술과 응용력의 망치이며 자국의 이익을 지나치게 추구하고 경제 이득만을 유일하게 갈구하는 두드림이다.매일같이 논이나 산 위에 성냥갑 같은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길 위에 또 길이 만들어진다. 창조란 이름으로, 편리함이란 이름으로 하나하나 없어지면서 또 다른 것들이 들어서고 있다. 이 역시 역사의 순환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존의 것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다시 새로운 것이, 아니 커다란 공룡처럼 그 무엇이 들어선다.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강원도 산골짜기나 제주도처럼 척박한 곳에 살았던 처녀들이 좁쌀 서 되도 못 먹고 시집갔다 는 말이나 아들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도 보내라라는 말은 죽은 말이 된지 이미 오래이다. 그러나 아들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라는 말은 딸도 보내라는 말까지 덧붙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돈은 매정한 놈이야 돈은 어수룩하지 않아 돈에겐 더 많은 돈 이외엔 친구가 없어라고 존 스타인벡이〈분노의 포도〉에서 얘기한 것처럼 말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오히려 더 필요한 사회가 되어서 신년 덕담이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부끄럽지가 않다. 아니 받으면 더 기쁜(?) 인사말이 되었다.돈도, 지혜도, 진실도,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는 언제나 모자라는 것이다. 라는 이탈리아 속담도 있지 않은가?.그러다보니 모두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라는 옛 속담을 비웃듯 사회지도층 인사들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의 돈을 횡령하는 방법도 고도로 발달되어 숫제 국제범죄 조직들이 하는 방법을 채용하고 있다. 채소장사들이 써먹던 차떼기 방법을 모방하지 않나, 문화인답게 책처럼 포장해서 건네지 않나, 그러면서도 반성은커녕 서로 네 탓만 하고 있다그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이 살만한 곳은 교육여건이 좋은 곳, 좋은 학원이 있는 곳,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 대형백화점과 전망이 좋은 곳이 살만한 곳으로 탈바꿈했다. 우리나라에서 8학군이 있는 강남일대와 분당구 일대의 땅값이 제일 비싸다. 그런 연유로 그곳에 있는 타워팰리스를 비롯한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나 땅을 사두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하지만 강남이 꼭 좋은 곳만은 아닌 모양이다. 이수학회(理數學會)의 고문인 수강(秀崗) 유종근(柳鍾根)선생은 강남 지역은 부는 얻을 수 있는 지역이지만 사대부가 살만한 곳은 아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온갖 잡탕으로 뒤섞인 강남 지역은 이미 순수성을 잃고 있기 때문이란다. 문명이 발달 할수록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상황을 에머슨은 다음과 같이 질타하고 있다.문명의 참된 기준은 통계조사, 즉 도시의 크기나 작물의 수확량 같은 것이 아니다. 문명의 참된 기술은 그 나라가 어떤 인간을 양성해 내고 있는가이다.습관이 오래되면 품성으로 굳어지는 법이다. 반성이 없이 새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혈구지도라는 말일 것이다. 그 말은 곧 나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 우리들의 고통으로 볼 수는 없을까?△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중국 악양루에는 중국 북송 때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범중엄이 쓴 〈악양루기〉에 나오는 글이 걸려 있다.천하(天下)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先天下之憂而憂) 천하의 즐거움은 나중에 즐긴다.(後天下之樂而樂)또한 천하를 생각하는 사람은 가사(家事)를 돌보지 않는다. 라는 옛 말이 있다. 니체도 그와 비슷한 글을 남겼다. 가까운 곳에 대핸 사랑보다 더 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그렇다 그러한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깊고도 넓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먼저 먹기는 곶감이 달고 양잿물도 큰 것을 먹고 내 가족과 나만 무사하다면 세상이 다 타버려도 좋다는 루이 14세의 애인의 말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마다 개인의 이익이나 집단의 이익만 있지 천하의 일을 먼저 근심하는 국가나 단체는 찾아보기가 힘들고 세계차원의 대동의 이익은 사라진 지 오래이다.가난을 절실하게 체험했던 시절은 가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라고 하는 이 시대에 어찌된 일인지 절대적 빈곤은 없다고 하면서도 절대적 빈곤은 끊이지 않고 상대적 빈곤이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와 은행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만큼 돈에 대한 갈망도 크게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의 종교는 돈이라고 할 수 있다. 150만원 월급쟁이가 10년 안에 10억 모으기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그 뿐인가? 서울의 모 여자대학에서는 부자학 개론이 인기 폭발이고, 강남의 잘 나가는 사모님들이 실전재테크를 강의하기도 한단다.물질 가는데 마음도 간다. 우리나라의 옛 속담이 있다. 네 눈이 미치는 곳에 네 보물도 있느니라. 성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지당한 말씀들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설정한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위해 간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들이 제일 숭상하는 것이 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은 어떠한 종교보다도 더 강력한 흡인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은 대다수 사람들을 마비시키는 마약과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다.우리나라 속담에 3대 가난 없고 3대 부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부나 가난이나 영원한 것은 아니고 사람의 노력이나 또는 자연의 순환법칙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말을 나타낸 말이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부자들의 재산이 여기저기 많기 때문에 아무리 망해도 남은 재산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호남지방에서는 땅 부자들의 흥망성쇠를 두고 권불십년(權不十年) 재불백년(財不百年)이라는 말이 있는데 부자가 3대를 간다는 것은 백 여 년을 간다는 것이고 권력은 십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다.그러나 요즘은 재력은 십년이 못가고 권력은 일 년은커녕 몇 개월도 지속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내 노라 하는 큰 그룹들은 나라가 망하거나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천 년 만년을 이어갈 재불유한(財不有限)이라 할 정도로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가고 부와 권력도 세습되지만 가난 역시 세습되고 있다는 말이 정설이기도 하다.적소(謫所)인 제주도에 있던 추사 김정희는 변함이 없이 그를 따르는 제자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고 그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세상의 도도히 흘러감은 오로지 권리(이것만을 붙좇아 이를 위해 마음을 태우고 애를 쏟는다. 이 같은데도 그대는 권세와 이욕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바다 밖 초췌하고 파리한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욕을 향하듯 하는구나, 사마천은 말하기를, 권리로 합쳐진 자는 권리가 다하면 사귐이 성글어진다.고 하였거늘,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연히 도도한 권리의 밖으로 스스로 벗어남이 있으니 권리를 가지고 나를 보지 않은 것인가? 사마천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주자 역시 사람이 이(利) 만을 추구하면 이(利)도 얻지 못할 뿐 이니라 또한 장차 그 몸을 해치고 의(義)를 추구하면 이利는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 진다고 하였다.권력이 무엇이고, 재산이 또한 무엇인지를 추사와 주자의 말에서 다시 한 번 새겨볼 필요가 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그 오래 된 미래와 같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사라진 뒤 그 시대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몰라보게 변한 이 시대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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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03 23:02

[23. 어떤 집을 짓고 살 것인가?] 작은 집·자족하는 삶…옛 사람들의 '안빈낙도 정신'

강연을 하다가 가끔씩 청중에게 질문을 할 때가 있다. 훗날 시골에 별장을 짓고 살고 싶은 분이 있습니까? 대개 열에 서너 명은 별장을 짓겠다고 한다. 나라 안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잘 지은 별장들이 사람들이 살지 않아 풀만 우거진 폐가가 된 것이 부지기수다.도시에 길이 든 사람들이 무작정 시골을 동경하여 별장을 짓고 잠시 살다가 보면 싫증을 느낀다. 금세 번잡과 소음이 그리운 탓이다. 그런데 집이 팔리지 않는다. 그래서 버려두고 간 집들이다.조촐한 집을 짓고 살거나 아니면 시골집을 임대해서 살다가 시골 생활이 적성에 맞으면 분수에 맞게 짓고 살면 될 것인데,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 큰 돈 들여 지은 결과다.그렇다면 옛 사람들이 추구한 집은 어떤 집들일까?홍귀달洪貴達의 집이 남산 밑에 집이 있었다. 그 언덕에다가 초가로 정자를 만드니 세로와 가로가 겨우 두어 발(丈)이었다. 허백당虛白堂이라 이름을 써 붙이고 매양 퇴근하면 복건을 쓰고 여장을 짚고 그 안에서 읊조리며 마치 세상을 잊은 것 같았다. 파직된 뒤로는 더욱 세상일에 관계하지 않았다. 그의 한 시 구절에는 산비 솔바람에도 역시 시끄러움을 싫어하노라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친구들이 그의 풍채를 흠모하여 모여드는 이가 많아 즐거이 상대하여 술상을 벌려놓고 회포를 풀며 시를 읊었다.보는 사람들은 그가 정승을 지낸 귀인인줄 몰랐다. 평생에 남과 눈 한 번 흘긴 일이 없으나 다만 국사에 대해 말할 것이 있으면 침묵하지 않았다. 자제들이 때로, 왜 좀 참으셔서 집안 식구들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그는, 내가 역대 조정에서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또 이미 늙었으니 지금 죽은들 무엇이 아까우냐. 고 말하며 끝내 고치지 않았다. 〈연려실기술〉 연산 조 고사본말에 실린 글이다.그 당시 세상에 떠도는 소문이 있었다. 한양의 남산에 9만9천9백99칸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호화주택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소문은 팔도에 떠돌았다. 그래서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그 집을 구경하고자 남산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 그 집을 발견하고선 실망이 컸다. 왜냐하면 그 집이 판서를 지낸 홍귀달의 집인데, 허백당虛白堂이란 당호가 붙은 단칸 초막이었기 때문이다.홍귀달은 그 단칸방에서 9만9천9백99칸에서 할 수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여겼고, 그의 생각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던 것이다.허백당 옆에다 단칸 헛가리를 짓고서 적암適菴이라고 이름 짓고서 살고 있는 역관譯官 조신曹伸에게 홍귀달이 적암부適菴賦를 지어 보냈다. 그 글을 받은 조신이 웃으며 지었다는 시가 일품이다.아, 나는 가는 곳마다 자적自適 하네몸이 천하므로 작은 벼슬도 영광이요,집이 가난하므로 박봉이라도 만족,거처하는 곳은 무릎이나 들이면 그만이요,음식은 산해진미가 아니라도 배부르면 좋고,술은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그만두고,혼자면 자작自酌, 둘이면 대작對酌시는 잘 지어 무엇 하리, 내 뜻이나 말할 뿐,글도 탐독이 아닌 노곤하면 자고마니,이것이 모두 나의 자적이로세.그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중종 때 학자인 김정국金正國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 나게 재물을 모으고 있다는 가까운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 속에 청빈하게 살았던 그의 집 풍경이 들어 있다.내가 20년을 빈곤하게 사는 동안, 두어 칸 집에 두어 이랑 전답을 갈고, 겨울 솜옷과 여름 베옷이 각기 두 벌 있었으나 눕고서도 남은 땅이 있고 신변에는 여벌 옷이 있었으며, 주발 밑바닥에 남은 밥이 있었소, 이 세 가지 남은 것을 가지고 한 세상 편하게 지냈던 것이요. 비록 넓은 집 천 칸과 옥 같은 곡식 만 섬과 비단옷 백 벌을 보아도 썩은 쥐와 같이 여겼고, 이 한 몸이 살아가는데 여유와 낙이 있었소.없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서책 한 시렁, 거문고 하나, 벗 한 사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개 하나, 바람을 들일 창 하나, 차 다릴 화로 하나, 햇볕 쬐일 마루 한 쪽, 늙은 몸을 부축할 지팡이 하나, 봄 경치를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면 족한 것이요, 이 열 가지는 비록 번거롭기는 하지만 하나도 빠질 수는 없는 것들이요, 늙바탕을 보내는 데에 있어 이외에 더 무엇을 구할 것이요, 분주하고 고단한 중에도 매양 열 가지 재미가 생각나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오.하지만 당시의 사대부들이 소박한 집만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홍길동전을 지은 개혁 사상가 허균(許筠)이 1607년 정월 평양에 가 있던 화가 이정(李楨)에게 보낸 글을 보면 그 당시 사대부들이 꿈꾸었던 집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큰 비단 한 묶음과 갖가지 모양의 금빛과 푸른빛의 채단을 짐 종에게 함께 부쳐 서경으로 보내네. 모름지기 산을 뒤에 두르고 시내를 앞에 둔 집을 그려주시게. 온갖 꽃과 대나무 천 그루를 심어두고, 가운데로는 남쪽으로 마루를 터주게. 그 앞뜰을 넓게 하여 패랭이꽃과 금선화를 심어놓고, 괴석과 해묵은 화분을 늘어놓아 주시게. 동편의 안방에는 휘장을 걷고 도서 천 권을 진열하여야 하네. 구리병에는 공작새의 꼬리 깃털을 꽃아 놓고, 비자나무 탁자 위에는 박산향로를 얹어놓아 주게. 서쪽 방에는 창을 내어 애첩이 나물국을 끓여 손수 동동주를 걸러 신선로에 따르는 모습을 그려주게.나는 방 한가운데서 보료에 기대어 누워 책을 읽고 있고, 자네와 다른 한 벗은 양 옆에서 즐겁게 웃는데, 두건과 비단신을 갖춰 신고 도복을 입고 있되 허리띠는 두르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야 하네, 발 밖에서는 한 올 향연이 일어나야겠지. 그리고 학 두 마리는 바위의 이끼를 쪼고 있고, 산동은 빗자루를 들고 떨어진 꽃잎을 쓸고 있어야겠네.그러나 허균은 그가 의도했던 그림을 받지 못하였다. 이정이 그의 편지를 받은 며칠 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시의 사대부들은 비록 실제로는 호화로운 집을 짓고 살지는 않았지만, 상상 속에서는 남부러울 것 없는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다.한편 정약용은 호수와 산 사이에 집을 지으니 물가와 묏부리의 아름다움이 양편으로 둘러 얼비친다. 대나무와 꽃과 바위도 무리지어 싸여 누각과 울타리에 둘러 있다(「캄캄한 방에서 그림 보는 이야기」)고 상상 속의 집을 묘사하고 있다.18세기의 문인 이용휴(李用休)가 짓고자 했던 집은 우리 이웃집 풍경처럼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집이다.나는 일찍이 한 가지 상상을 한 적이 있다. 깊은 산 중 인적 끊긴 골짜기가 아닌 도성 안에 외지고 조용한 곳을 골라 몇 칸 집을 짓는다. 방안에 거문고와 서책, 술동이와 바둑판을 놓아두고, 석벽을 담으로 삼고, 약간의 땅을 개간하여 아름다운 나무를 심어 멋진 새를 부른다. 그 나머지에는 남새밭을 가꿔 채소를 심고 그것을 캐서 술 안주를 삼는다. 또 콩 시렁과 포도나무 시렁을 만들어 서늘한 바람을 쏘인다. 처마 밑에는 꽃과 수석을 놓는다.대부분의 사대부들과는 달리 이용휴는 고향 근처나 경치 좋은 먼 곳으로 가지 않고 도성 근처에 자리를 잡고자 했다.그러나 대동법 시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김육金堉은 사람들이 누대와 정자를 짓는 것까지도 좋지 않게 보았다. 그것들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허황된 면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집은 띠풀을 엮어서 지은 초가집이었다. 또 집의 안쪽에 있는 당을 공극당이라 이름 짓고 그 바깥쪽의 정자를 구루정?樓亭이라고 하였는데 초가의 지방이 낮아 머리를 부딪치지 일쑤여서 반드시 허리를 구부린 다음에야 움직일 수가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하지만 조선시대의 모든 사대부들이 김육처럼 소박한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더러는 개성이 넘치는 집이나 정원을 짓고자 하였다.그렇다면 중국의 사대부들 중 문인들은 어떠한 집을 지었을까? 여산초당원廬山草堂園을 짓고 살았던 당나라 때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그가 짓고 살았던 초당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초당은 세 칸에 기둥이 두개이고 방이 두개... 나무는 쪼개기만 하였고 붉은 칠은 하지 아니하였다. 담은 흙손으로만 칠 하였고, 석회는 바르지 아니하였다 그가 말한 초당처럼 다산 정약용도 유배지인 강진의 다산에서 초당을 짓고서 공부에만 열중했는데 지금 그 곳에 가면 다산와당만 있지 초당은 찾아볼 길이 없다. 백거이는 대 나무 숲에 거문고 하나에 술 한 병만 있으면 된다.고 하였다.공자 역시 그의 제자인 안회가 청빈하게 살면서도 자족하며 사는 것을 보고 글 한 편을 지었다.어질도다. 회여, 한 그릇 밥과 한 표주박물로 누추한 마을에 살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는데 , 안회는 그 즐거움이 변하지 않으니. 어질도다. 회여.위의 글은 온갖 가난 속에서도 배움을 좋아하고 진리에 안주해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경지에 오른 제자를 공자가 칭송한 글이다.한편 명明나라 말기의 지사 황주성黃周星은 장취원기將就園記라는 글을 지었다. 그 글의 내용은 경치가 좋은 산 속에다 장원將園과 취원就園이라는 그럴듯한 장원을 마련하여 온갖 건물과 나무, 꽃, 시내, 언덕을 배치한 뒤 그곳에서 여유 있는 나날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글을 읽은 조선의 사대부들 글이 가진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다고 한다.내 유년을 지켜보았던 진안의 고향집은 측면 2칸에 정면 3칸이었다. 본채에는 방이 골방까지 세 개에 마루, 그리고 제일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큰 방은 할머니가 기거하는 방이자 겨울에는 삼을 삼든지 사람들이 모여 공동의 일을 하는 공간이고, 마루 옆에 있는 세 명만 누워도 꽉 찰만큼 작은 방이 부모님이 기거했던 방이다. 그 방에서 어머니는 나와 두 동생을 낳았다고 했다. 마루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견고하긴 했지만 항상 삐걱대기 일쑤였다.본채 뒤가 바로 뒤 안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장독대와 함께 본채에 달린 광이 있었다. 광에는 꿀이며 감이며 곶감과 아편(그 시절은 아편이 담방 약으로 필요했다.) 등, 집에서 가장 귀중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들어 있었고 장독대 옆에 늙은 대추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기둥들이 하나같이 못생긴 나무들이었다. 못 생긴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라는 속담을 따라서 그랬는지, 집만 보아도 실감나게 가난한 집의 전형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아주 해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안성 청룡사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나, 서산 개심사 심검당의 기둥처럼 자연 그대로의 나무인데다 그 S자로 구부러진 나무들이 우리 집 본채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들이었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에도 나는 가끔씩 이런 생각을 했었다. 산에 가면 그렇게 쭉 뻗은 소나무들이 많은데, 어쩌면 저렇게 구부러지고 구부러진 못난 소나무들을 수소문해 모아 가지고 집을 지었을까 사실 집을 짓는 것도 곧은 나무로 짓는 게 쉽지, 구부러진 나무로 짓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집이 남아 있다면 그런 건축사적 특징만 가지고도 지방문화재로 등록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아아, 나는 호도껍질 속에 갇혀 있어도 내 자신을 끝없는 천지의 왕이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야.셰익스피어가 지은 〈햄릿〉 제 2막 2장에 실린 글과 같이 작은 집을 짓고 자족하는 삶을 살았던 옛 사람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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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26 23:02

[22. 어디서 살 것인가] 지리·인심·생리·산수 모두 갖춰야 '사람이 살만한 땅'

- 동양 사람들이 보는 좋은 땅 "하늘은 맑고 빛이 있고 들 넓을수록 터는 더욱 좋고 달별빛이 항상 환하게 비치고 바람비, 기후가 알맞으면 더 좋다"- 서양 사람들이 보는 좋은 땅 "생태적으로 건강 동풍을 받을 수 있는 곳, 주민들 쉽게 탈출할 수 있는 수원의 공급이 원활한 곳"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림 같은 강가에 작은 집을 짓고 말년을 지내고자 생각했다. 그 강이 섬진강이 될지, 아니면 금강이나 한강 그리고 낙동강이 될지 모르지만 답사 때마다 눈 여겨 보았던 여러 곳 중에서 한 곳이 나의 말년을 의탁할 곳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는 그 계획을 완전히 접고 다른 계획을 세웠다. 어차피 나는 죽는 날까지 떠돌 것인데 아무리 그림 같은 좋은 집이라도 집은 머물러 살아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며칠씩 떠나 있으면 누가 그 집을 관리하고 사랑해 준단 말인가?온 나라에 좋은 벗, 즉 도반(道伴)들을 많이 사귀어두고 그 다음에는 경치 좋고 땅의 기운이 좋은 절의 주지스님을 많이 사귀어두자. 그러면 답사 때마다 그 집이나 절에서 묵게 된다면 내가 집을 관리하지 않아서 좋고 지인이나 도반들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서 좋으니 1석 2조가 아니고 1석 5조쯤 될 듯 싶다. 그게 요즘 열병처럼 유행하는 웰빙(well-being)이 아닐까? 모든 길이 로마도 통하듯 요즘에는 모든 것이 웰빙으로 통한다고 한다. 웰빙은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고 삶을 즐기는 것이며, 그것을 이루어 가는 모든 행동양식을 의미하는 말이다.진정한 웰빙이란 무엇보다도 어디에 살 것인가를 따져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단순히 재산을 불리거나 시류를 따라가는 것만이 아닌, 피로한 몸과 정신이 머물 수 있는 집을 어디에다 어떻게 지을 것인가?공자는 〈논어〉에서인후(仁厚)한 마을에서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스스로 인후한 곳을 가려서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하였다. 군자는살만한 마을을 반드시 가려서 택한다고 하였다. 또 이익은〈택리지〉서문에서 대저 의복과 식량이 모자라는 곳이나 토기(土氣)가 사그라진 곳, 무력(武力)이 승한 곳, 시기와 혐의가 많은 곳 등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이런 몇 가지를 가리면 취하고 버릴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그렇다면 이중환이 생각한 사람이 살만한 땅은 어떤 곳이었을까? 사람이 살만한 곳을 고를 때는 첫째로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다음 그 곳에서 얻을 경제적 이익 즉 생리(生利)가 있어야 하며, 다음 그 고장의 인심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에서 하나라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지리는 비록 좋아도 그곳에서 생산되는 이익이 모자란다면 오래 살 곳이 못 되고, 생산되는 이익이 비록 좋을지라도 지리가 좋지 않으면 이 또한 오래 살 곳이 못된다. 지리도 좋고 생산되는 이익이 풍부 할지라도 그 지방의 인심이 후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있게 되고, 가까운 곳에 소풍할 만한 산천이 없으면 정서를 화창하게 하지 못한다.(〈택리지〉복거총론)이중환은 사람이 살만한 곳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지리, 인심, 생리, 산수 등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을 토대로 조선전역을 사람이 살 만한 곳과 살 만하지 않은 곳으로 나누어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복지(福地), 덕지(德地), 길지(吉地), 피병지(避病地), 피세지(避世地), 경승지(景勝地) 등으로 구분한다.그 가운데 지리의 내용을 살펴보자. 어떤 방법으로 지리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인가. 제일 먼저 물이 흘러나오는 수구(水口)를 보고, 다음 들판의 형세를 본다. 다음에는 산의 생김새를 보고, 다음에는 흙의 빛깔을, 다음에는 앞에 멀리 보이는 높은 산과 물, 즉 조산(朝山)과 조수(朝水)를 본다. 물이 흘러나오는 곳이 엉성하고 넓기만 한 곳은 아무리 좋은 밭과 넓은 집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수구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골라서 구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산중에서는 수구가 닫힌 곳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들판에서는 수구가 굳게 닫힌 곳을 찾기 어려우니, 반드시 거슬러 흘러드는 물이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높은 산이나 그늘진 언덕이나, 거슬러 흘러드는 물이 힘 있게 가로막았으면 좋은 곳이 된다. 막은 것이 한 겹이라도 진실로 좋지만, 세 겹이나 다섯 겹이면 더욱 좋다. 그런 곳이라야만 온전하게 오랜 세대를 이어나갈 터가 된다.사람은 맑고 밝은 기운을 받아서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맑고 밝은 빛이어야 하고, 만약에 하늘이 조금만 보이는 곳은 결코 살만한 곳이 아니다. 그러므로 들이 넓을수록 그 터는 더욱 좋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와 달과 별빛이 항상 환하게 비치고 거기에다 바람과 비 등의 기후기 알맞고 더운 기후가 고른 곳이면 인재가 많이 나고 또 병도 적다.여기에서 말하는 지리의 내용은 현대지리학의 본질적 물음, 즉 인간집단이 생활을 위해 어떻게 공간을 간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너무도 흡사하다.다음은 한영우(韓永愚)교수가 말하는 지리학의 개념이다. 지리학은 땅에 이치가 있다고 보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이치가 바로 생명체이론(生命體理論)이다. 땅을 생명체로 보는 것은 모든 우주만물을 생명체로 보는 우주관과 관련되어 있다. 크게 보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하늘, 땅, 인간이 모두 유기적 생명체를 이루고 있으며, 작게 나누어 보면, 땅 위에 있는 모든 산과 물 그리고 인간도 유기적 생명체요 작은 우주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생명체로서의 의지와 이치를 가진다. 하늘의 큰 의지와 원리를 천리(天理)라 한다면, 땅의 원리와 의지가 지리(地理)다.〈생명체이론〉당나라 복응천(卜應天)이라는 사람이 지은 풍수서인 〈설심부(雪心賦)〉에서는 지리란 조리, 즉 문리와 맥락의 이치를 갖는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지리와 지맥을 구분하고 있는〈지리대성산법전서(地理大成山法全書)〉(상해 九經書局)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지리란 산천의 험함과 평탄함을 살려 성곽과 고을과 마을을 설치하여 나라를 세우고, 한편으로는 도로와 촌락의 균형과 멀고 가까움을 살펴 출입에 용이하도록 하며, 땅의 높낮이를 알아 도랑을 파고 개천을 뚫어 관개에 도움이 되게 함을 말한다. 한편 지맥이란 땅의 음양과 그 흐름을 관상(觀相)하여 크게는 도읍을 지어 나라를 세우고 작게는 집을 짓고 산소를 축조하여 복됨과 길함을 맞아들이는 일이다. 따라서 지리는 백성의 후생을 돕는 일이고 지맥은 사람의 명운을 관장하는 일이다조선후기의 문신 미수 허목(許穆)은 지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조선의 지역적 특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는지승(地乘)이라는 글에서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의 풍기(風氣)의 특색을 논하면서 우리나라는 중국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오행(五行)의 목성(木性)을 가졌다. 그래서 사람이 어질고 예의가 바르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목성이 인(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풍기와 성음(聲音), 그리고 요속(僚屬), 기욕(嗜慾)이 중국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백리마다 풍속이 다르고 천리마다 노래가 다르며, 남방에는 새가 많고 북쪽에는 짐승이 많다고 하면서 나라의 크기는 중국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지역적 다양성은 중국과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조선시대의 문장가이자 혁명가인 허균(許筠)은 대장부는 천하(天下)에서 가장 넓은 집에 사는 법이라고 하면서 세상 자체를 집이라 여겼는데, 그 역시 좋은 땅을 고르는 법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그가 지은 〈한정록閑情錄〉에서 좋은 땅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설명하고 있다.생활의 방도를 세우는 데는 반드시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해야 하는데, 지리는 물과 땅이 서로 잘 통하는 곳을 제일로 치기 때문에 산을 등지고 호수를 바라보는 곳이라야 가장 좋다. 그러나 지역이 넓으면서도 가장 긴속(緊束)한 곳을 필요로 하니, 대개 지역이 넓으면 재물과 이익을 많이 생산할 수 있고, 지역이 긴속하면 재물과 이익을 모아들일 수 있다.풍수지리학자 최창조 선생은 지리가 먹고 사는 일에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지리는 물과 땅이 탁 트인 곳을 최고로 삼으며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널찍하면서도 짜임새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대체로 땅이 넓은 곳은 재리가 생산될 수 있고, 짜임새가 있는 곳은 재리가 모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유암의 〈택경(宅經)〉에 나오는 산 하나 물 한 줄기가 다정하게 생긴 곳은 소인이 머물 곳이고, 큰 산과 큰물이 명당 터로 들어오는 곳은 군자가 살 곳이다고 한 대목을 받아들여서 요즘의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좁다란 계곡 아름다운 경치의 장소에 달랑 제 식구 한철 보낼 수 있는 별장 터를 잡아놓은 사람들은 택경이 지적한 대로 소인배에 지나지 않으니 서둘러 원래 땅으로 복원시켜야 군자 근처에라도 갈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의 일부지역에 있는 호화주택들은 우선 성현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은 물론이요, 풍수사상의 입장에서도 큰 잘못을 저지른 땅 위의 구조물들임을 말해두고자 한다.한편 서양 사람들이 보는 좋은 땅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이상적인 도시를 잡을 때 보아야할 네 가지 조건을 이렇게 제시했다.첫째는 생태적으로 건강한 곳, 둘째는 동풍을 받을 수 있는 곳, 즉 동쪽을 향한 경사면이거나 겨울에 북풍을 피할 수 있는 남향, 셋째는 군사적인 이유로 외부인은 쉽게 접근하기 어렵고 거주민들은 쉽게 탈출할 수 있는 곳, 넷째는 수원의 공급이 원활한 곳. 그런 곳에 터를 잡고 살면 사람도 자연을 닮을 수 있을 것이리라. 그래서 소설가 이병주(李炳注)는 산하의 정을 사람은 닮는다고 하였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지은 신영복 역시 감옥에서 출소한 뒤 고향에 돌아와 맨 처음 느낀 것은 사람은 먼저 그 산천을 닮는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풍수서〈청오경〉에서는 눈으로 산천의 형세를 관찰하고 마음으로 바람과 물의 이치를 잘 생각해야 음양조화를 깨달아 좋은 땅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이중환은 그런 의미에서 좋은 땅을 찾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조수라는 것은 물 너머의 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작은 개울물과 작은 시냇물은 거슬러 흘러드는 것이 좋다. 그러나 큰 시냇물이나 큰 강이 거꾸로 흘러드는 곳은 결코 좋지 못하다. 큰물이 거슬러 흘러드는 곳은 집터나 묘지를 막론하고 처음에는 비록 흥할지 몰라도 오래가면 패망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런 곳은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흘러드는 물은 반드시 산맥의 방향과 음양의 이치에 합치되어야 한다. 또한 꾸불꾸불하게, 길고 멀게 흘러들어 오는 것은 좋은 것이고 한 줄로 활을 쏘는 듯한 곳은 좋지 못하다. 이런 이유로 장차 집과 정자를 지어서 자손에게 대를 이어 전할 계획을 세우려면 지리를 살펴서 지어야 할 것인데, 이 여섯 가지가 살 곳을 정할 때 신경 써야 할 중요한 내용이다.(〈택리지〉복거총론)그런 까닭에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산천이 아름다운 곳에 터전을 삼고 말년을 지내는 것이었다. 현대인들도 그들과 같이 말년을 보내기 위해 그림 같은 강변이나 계곡에 별장이나 펜션을 마련한다.그런데, 스스로가 정한 삶을 추구하고, 삶을 즐기기 위해 시골에다 별장을 지은 사람들의 고충이 한 둘이 아니다. 새 집 지었다고 친구들이 찾아오면 집 청소해야하지, 고기 사다 놓아야하지, 그들이 머물다가 떠난 뒤에는 청소해야지, 몇 달 동안 그런 난리가 없다. 그 뒤로는 고적한 적막감, 다시 두고 온 도시가 그리워진 사람들은 일 년을 못 넘기고 도시로 되돌아간다. 그런 폐단을 막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야 하는 것이 인생 말년에 집 짓는 것이라고 한다면 집을 짓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누가 될까?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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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19 23:02

[21. ‘전주 천년고도 옛길’ 제1코스 건지산 길] '가을 힐링' 여기가 딱이네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이 있다. 가까운 곳을 멀리 있는 곳보다 모른다는 뜻이다. 바로 내 말이다. 수십 년간 이 나라 이 땅의 길을 이 잡듯이 헤매고 다닌 내가 정작 엎드리면 코 닿을 만한 곳에 숨겨진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 했으니.오래 전부터 이렇게 저렇게 전주의 여러 길을 걸었으면서도 그 길이 이어지면 어떤 길이 되리란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차일피일 세월이 흐르다가 그 길들을 한 번 걸어보자 하고서 걷다가 보니 그대로 보석 같은 길이 펼쳐졌다. 전주의 길을 이어서 붙인 길 이름이 전주 천년 고도 옛길 12코스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이 바로 1코스인 건지산 길이다. △최고의 연지(蓮池), 덕진공원전주 사람들의 휴식처인 덕진공원이 건지산 길의 초입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연못 중의 하나인 덕진공원에서 건지산을 지나 가련산으로 해서 전주 천변까지 이어지는 길, 그 길이 얼마나 운치 있는 길인지는 걸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건지산 길은 덕진공원의 입구인 연지문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라 안에 최고의 연지(蓮池)를 자랑했던 덕진연못은 가련산과 건지산 사이에 있다. 이 덕진연못에 관한 글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 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덕진지는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부의 지세는 서북방이 공결(空缺)하여 전주의 기맥이 이쪽으로 새어버린다. 그러므로 서쪽으로는 가련산으로부터 동으로 건지산까지 큰 뚝을 쌓아 기운을 멈추게 하고, 이름을 덕진이라고 하였으니, 둘레가 90 73자이다. 풍월정(風月亭)의 시에 깊은 못을 일망하니, 푸린 하늘이 비쳐 있네. 고래로 이 못을 파기에 몇 사람의 공이 들었을까. 마을 연기 멀리 끼어 가을달이 몽롱하고, 어부의 피리소리는 저녁 바람에 비꼈도다 고려 시대에 유행했던 풍수지리설 때문에 조성된 덕진연못은 못의 절반을 뒤덮는 연꽃과 빼어난 조경 때문에 시민공원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덕진연못에서 흘러내린 물은 송천동을 지나 전주천의 물과 합한 뒤 만경강으로 들어간다.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덕진공원에 부안 출신 시인인 신석정의 시비와 동학의 삼대 지도자인 전봉준의 동상, 그리고 김개남과 손화중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사람이 살만한 곳을 지리, 인심, 산수, 그리고 생리라고 평한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는 전라도 일대에서 가장 살만한 곳이라고 평한 곳이 전주였다. 그 중에서도 연꽃 향기 그윽한 덕진공원 일대는 그 빼어난 아름다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다.△〈혼불〉의 못다한 이야기 서려덕진연못을 지나 전북대학교 예술대학을 거쳐 도로를 건너면 연화마을의 초입에 이른다. 그곳에서부터 본격적인 건지산 길이다. 연화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 샛길로 접어든다. 불과 십여 미터도 오르지 않았는데, 마치 심신산골에 들어선 듯 나무숲이 울창하다. 길은 단풍터널로 이어지고 그곳에서 조금 오르면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하소설인 〈혼불〉의 저자인 최명희 묘소에 이른다. 1947년 10월 10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출생하여 1998년 12월 11일 작고한 최명희는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쓰러지는 빛으로 당선됐다. 그 뒤 〈혼불〉에 매달렸다. 이 책은 소설이기 이전에 역사와 민속, 사라져 가는 우리말의 보고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우리말이 도처에 펼쳐져 있다. 그리고 전해 내려온 민화와 옛글이 방대하게 실려 있다. 그는 기나긴 17년 동안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글을 쓰다가 결국 〈혼불〉을 미완(未完)으로 남긴 채 생을 마감했다.△단풍나무와 편백나무 사이로〈혼불〉 속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바람결에 들릴 것 같은 최명희 묘소를 지나면 단풍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단풍나무 숲길이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단풍나무 숲길을 따라서 가다가 보면 복숭아 과수원이 나타나고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두 길을 갈수가 없는 한 사람의 나그네라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보았습니다.로버트 프루스트의 〈가지 않는 길〉을 떠올리며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하늘이 안 보이도록 빼곡하게 우거진 단풍나무숲에 이른다. 숲에서 한가로움을 마음껏 누리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고, 그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장군바위라는 바위 하나가 덜렁 놓여 져 있다. 가끔 햇살이 눈비시게 내려 쪼일 때면 천지창조처럼 한줄기 햇살기둥이 은밀하게 비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은 산길을 올랐다가 울창한 숲 사이를 내려가면 복숭아 과수원 사이길이다. 오송지를 지나면 울울창창하게 우거진 편백나무 숲에 이른다. 아픈 사람의 몸을 치유 하는데, 더 없이 좋다는 편백나무 숲으로 들어가 편백나무의 정갈한 정기를 받아들인다. 청춘의 힘과 정기는 점점 없어지고 나이와 함께 우리는 늙어간다. 루크레티우스의 말을 이해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세상에 부대낀 마음들을 내려놓고 나무 아래서 스스로를 잊고 앉아 있다.어디 여기 저기 아픈 현대인들만 그러했을까? 그리스인들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스치는 바람결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그들은 마음을 열고 들어오는 그 상쾌한 소리를 사랑스러운 드라이드, 숲의 요정들의 움직임으로 보았다. 또한 그리스의 시인들은 어떤 놀라운 발상이나 영감을 얻고자 할 때 그 스스로가 오랫동안 숲속을 배회, 즉 산책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 숲길을 걸으면서 세상을 떠돌면서 관조하고 있는 신(神)과 여신들의 생각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여야 된다고 믿었다. △순간순간의 새로움에서 진리를편백나무 숲에서 나무를 얼싸 안기도 하고 기대기도 하다가, 천천히 발길을 옮겨 어린 날의 기억 같이 그윽한 고개를 넘어서면 소리문화의 전당에 이른다. 이 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데없다. 문득 사철가의 한 대목이나,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의 4악장이 들릴 것 같은데, 푸른 나뭇잎만 바람에 휘날리는 길을 따라 가다가 우측으로 눈을 돌리면 나이든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사열하듯 서 있다. 장엄이랄까? 아니면 탄성이랄까? 하여간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마음으로 플라타너스 숲으로 들어가 그 굵은 나무에 등을 기댄다. 사람이 나무를 지나갈 때, 그 나무가 있고, 나무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지 않고, 어떻게 나무 옆을 지나갈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삶의 매 걸음마다, 방탕아까지도 경이롭게 느끼는 놀랄만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얼마나 나무를, 아니, 모든 사물들을 사랑했으면 도스토옙스키는 이런 말을 남겼을까?내가 나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나무들이 막 말을 건넬 듯 싶다. 길은 숲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과수원 길로 이어지기도 하다가 대지마을에 이른다. 구부러지고 휘돌아가는 그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대들의 눈에 비치는 사물들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바라보는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다.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의 한 구절처럼 경탄에 경탄을 거듭 하며 걷노라면 어느 새 나도 현자(賢者)가 될 것도 같다. △온전한 고장의 무게 중심이윽고 길은 호송동과 동물원을 잇는 포장도로롤 건너고, 길은 넓지도 그렇다고 좁지도 않다. 조릿대 우거진 길을 지나면 아름드리 참나무가 우뚝우뚝 서 있는 길, 그 길을 천천히 오르다 보니 건지산(乾止山)정상이다.전주부의 북쪽 6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이규보(李奎報)의 기(記)에 전주에 건지산이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여 주(州)의 웅진(雄鎭)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부 산천에 실린 글이다. 푸른 나무숲이 우거진 숲길을 세상의 근심 걱정을 잊어버리고 걸어가면 어찌 그리도 마음이 한가로운지, 천천히 휘돌아가다 묘지석도 없는 무덤에 이르면 전주가 한 눈에 들어온다. 자주 온전한 고장이라고 부르는 전주에 터를 잡고 산지,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왜 나는 전주를 그처럼 좋아하는 것일까?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고자 하건 반나절이면 갈 수가 있고, 역사적 유물이 많으면서 문화적 풍토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고덕산, 모악산, 황방산으로 둘러싸인 전주를 그윽하게 바라보다가 숲길 사이를 걸어가면 조경단에 이른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조상인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공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항상 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고개를 내밀고 보아야 한다. 조경단을 돌아 산길을 휘돌아 가면 울창한 편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바로 그 앞은 전주 시민이 모여서 운동을 즐기는 체련공원이다. 장성의 편백나무 숲과 같이 울창한 편백나무 숲에서 마음을 내려놓고, 아니 육신까지 다 내려놓고 나무에 기댄다. 그 때 문득 떠오르는 시가 괴테의 나그네의 밤 노래라는 시다. 산봉우리마다 깃든, 고요, 미풍 한 점 없는 나뭇가지들, 여린 숨결 하나, 숲속 새들도 노래를 그쳤다. 기다리라, 그대 또한, 곧 쉬게 되리니.지친 몸과 마음이 저절로 상쾌해지고, 새로운 생각이 물씬 물씬 피어오르는 길이 바로 건지산길이다. 그 길을 걷다가 보면 〈혼불〉의 한 구절처럼 저기 저 만큼에서 누군가 지친 다리 이끌며 다가오는 사람 있지 않을까?인연이 그런 것이란다. 억지로는 안 되어 아무리 애가 타도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 해도 달아날 수 없고, 지금 너에게로 누가 먼 길 오고 있을 것이다. 와서는 다리 아프다고 주저앉겠지, 물 한 모금 달라고.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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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12 23:02

[20. 섬진강이 비단처럼 펼쳐진 길] 기기묘묘 바위마다 숨쉬는 사연...강물 따라 그리움이 흐르네

섬진강하면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강이라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섬진강을 떠 올리면 사람들은 대부분 곡성 구례 하동을 떠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봄의 전령인 매화꽃과 산수유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를 흐르는 섬진강이 하도 아름다워서도 그렇지만 중상류를 가본 사람들이 별로 없고, 더더구나 그 강 길을 속속들이 걸어본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섬진강 댐에서부터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의 고향 마을인 덕치면 장산리 진메마을을 지나 천담구담 거쳐 강물이 휘돌아가는 회룡마을을 한발 한발 걸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곳에 이르는 길들이 그냥 무심코 걷는 길이 아니라, 아무도 잠깨지 않은 새벽에 내리는 이슬처럼 그 이슬 맞으며 피어나는 연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난 한 송이 꽃과도 같다는 것을,나무숲이며, 징검다리며, 이름을 알 수 없는 아무개 네의 집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까지 모든 것이 다 우리네 산천에 아직도 남아 있는 그윽한 역사의 숨결이라는 것을, △아름답게 피어난 한 송이 꽃과도 같은 마을천담리에서 휘돌아가는 강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보면 구담(九潭)마을에 이른다. 구담은 본래 안담울이었으나, 마을 앞을 흐르는 섬진강에 자라(龜)가 많이 서식한다고 하여 구담(龜潭)이라는 설도 있고 일설에는 이 강줄기에 아홉군데의 소(沼)가 있다고 하여 구담(九潭)이라고 부르기도 한 곳이다.주서동(뒤주골), 가운데골(중동), 장작골(용동)등의 옛 이름들이 남아 있는 구미리에는 북쏘, 사발쏘, 조쏘 등의 깊으디 깊은 쏘가 있고 거북바위 동남쪽에는 구암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나라 안 이름난 강에 아름다운 물돌이 동이 몇 개가 있다. 낙동강 변에 위치한 하회마을과, 회룡포 물돌이 동, 금강의 죽도가 이름이 났는데, 섬진강 530리에서는 구담리에서 휘돌아가는 물돌이동 풍경이 제일이다. △아름다운 마을 구담리옛날 옛 시절 사람들은 이 깊은 골짝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구담리 마을에 국기봉은 녹슬어있고 새마을회관에 새마을 기가 바람에 펄럭이며 사람들이 살다가 떠난 빈 집터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정든 마을, 정든 사람들, 정든 집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의 신산했던 마음 풍경을 시인 김용택 시인은 이렇게 그리고 있다.우리들은 저녁밥을 일찍 먹고 너나없이 모여들어 이삿짐을 꾸렸다. 거울, 깨진 농짝 하나, 테 맨 장독 몇 개, 헌옷 보따리, 때 낀 카시미롱 이불, 그 흔한 흑백 텔레비전 하나 없는 이런 촌 세간들이 서울에 가서 산다는 게 우습고 기막히는 일이지만 우리들은 말없이 이삿짐을 꾸려 회관마당 삼륜차에 실었다. 아주머니는 연신 눈물콧물을 훌쩍이며 코를 풀어 치맛자락에 닦았다구담리 마을 숲에서 흘러오고 가는 강들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다. 가고 오는 것들이여 나는 그 속에서 어디만큼 가고 있는가. 오고 간다. 나는 우주순환의 섭리를 이곳 구담마을의 빈집에서 느낀다. 느티나무 숲 우거진 동산에서는 흐르는 섬진강의 아름다운 모습만 보이고 흐르는 저 강물을 따라 나도 역시 흐르듯 내려갈 것이다징검다리를 건너 빈집들이 즐비한 회룡마을을 지나 언덕을 넘어 내려가면 장구목에 이른다. 이곳 내령리는 본래 임실군 영계면의 지역으로 영계면에서 가장 안쪽이 되므로 안영계 또는 내령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장군목, 장구목, 장군항, 물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느재 동쪽 기산(345미터)과 용골산 사이의 기슭에 있는 내동마을에는 장군대좌형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 내동마을 부근이 섬진강 중에서도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곳이다.저마다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수많은 바위들이 강을 수놓은 가운데 바라보면 볼수록 기기묘묘한 바위가 요강바위이다. 큰 마을 사람들이 줄 서서 저녁 내내 싸도 채워질 것 같지 않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요강처럼 뻥 뚫린 이 바위를 한때 잃어버렸던 적이 있었다. 섬진강을 같이 걸었던 박준열씨가 남원 KBS에 근무하던 때였다니까 94년쯤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이 마을에 와서 골재 채취업자라고 한 후 한참을 지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막걸리도 사주고 밤을 새워 이야기도 하면서 한 두어 달 사이좋게 지내면서 밤마다 포크레인으로 골재채취를 한다고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 사람도 사라지고 요강바위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발칵 뒤집힌 마을 사람들이 남원 KBS에 연락을 해서 전국방송으로 내보낸 뒤 마을 사람의 인상착의를 알려주어 몽타주를 만들어 보냈다. 그리고 두어 달 지났는데, 경기도 지역에서 신고가 들어온 것이다.언젠가 방송에서 보았던 그 바위가 모모지역에 있더라, 하는 제보를 받고 경찰들을 급파해보니 자기 집에는 두지 못하고 외딴 곳에 숨겨놓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은 붙잡혀 감옥에 가고 요강바위는 약간의 상처를 입은 뒤에 이 고향에 되돌아 올 수 있었다고 한다.△장구목 그 아름다운 풍경수석이나 분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나라는 오밀조밀한 아름다움이 구석구석에 많은 나라라서 시간을 내어 조금만 도심에서 벗어나면 도처에 분재가 널려있고 수석들이 즐비하다. 그런데도 그 수석들이나 분재들을 힘들여 가져다놓고 물주고 거름 주고 정성을 쏟고 하면 그 분재나 수석들이 고마워할까? 그들에게 영혼이 있다면 수천 수백 년을 더불어 살아온 이웃과 친지들을 떠나 좁은 방안에 갇혀있으면 갑갑하기만 할 것이다. 그 나무나 돌멩이들이 그 모심(?)당함을 절대로 행복해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수집가들은 그 수석이나 분재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상품성을 생각해서 가져온 경우가 더 많다. 나와 내 가족의 이익이라는 개인주의적인 입장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세상은 얼마나 자유스럽고 사랑스러워질까 그런데 이렇게 큰 요강바위를 어떻게 싣고 갔을까?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무량산에서 회문산으로 가는 루트가 이 요강바위 부근이었다고 한다. 요강바위에 빨갱이들이 다섯 명이 들어갔대요. 다섯 명이 들어간 뒤에 바위로 모자를 쓰고 있으면 토벌대들이 모르고 지나가고 그러면 바위에서 나오고, 그래서 살아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요그곳에서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 강 길을 한참만 따라서 가면 순창군 동계면의 구미리에 이른다. 순창군 이동면의 지역으로 거북바위가 있어서 구미리라고 이름 지은 이 마을은 600 년 전 고려 우왕 때 직제학을 역임한 양수생의 처 이씨 부인이 이곳에 온 뒤에 나무 매 세 마리를 날려 보냈다. 그러자 그 매들이 순창군 동계면 관전리와 구미리 그리고 적성면 농소리로 날아갔는데, 구미리 마을이 마음에 들어 구미리에 정착해 살면서 농소리에는 묘소를 썼다고 한다.풍수 지리학자인 최창조 선생은 〈한국의 자생풍수 2〉에서 이곳 구미리를 김용규씨의 증언을 받아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이 마을은 거북바위가 하나 놓여있는데 마을 사람들과 취암산 취암사 승려들 사이에 이 문제를 놓고 싸움을 벌이다 결국 승려들이 거북의 머리를 잘라 버리고 말았다. 그 거북이가 지금도 길가에 서 있다. 그 뒤 마을은 번창하고, 절은 폐사가 되고 말았다 한다. 금구몰리형의 자리에 아직 못 찾은 또 하나의 명당이 있다함(김용규)주산은 무량산(56.4m). 덕유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온 산맥이 남원 교룡산을 지나 비홍재에서 적성강을 끼고 북으로 달려와 남향으로 앉았다. 무량산의 본래 이름은 구악산(龜岳山), 즉 거북산이다. 지금 청룡이라 부르는 산 쪽이 주산에서 뻗어 내린 청룡이고 거북의 머리 부분에 해당된다. 백호는 청룡보다 짧지만 역시 주산에서 그대로 뻗어 내렸다.거북이 남성을 상징하듯 안산은 옥녀봉, 그 형국은 옥녀탄금형 또는 옥녀직금형으로 묘가 있다. 옥녀봉 앞으로 동에서 서로 냇물이 흐르고 백호 쪽에서 흐르는 적성강은 서북쪽에서 남동쪽으로 흘러 내외수류역세가 된다.한편 이 마을은 탕록음수형으로 그 사슴의 먹이 부분에 해당된다는 설도 있다. 종가 안쪽 대모정이 형국을 완성하였고, 종가 뒤에는 대나무숲이 있으며, 여기에 사슴을 상징하는 녹갈암이 있다. 지금도 바위가 마르지 않도록 가끔 대모정의 물을 떠다가 부어 준다고 한다. 금구예미형의 자리에 아직 못 찾은 또 하나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명당자리가 숨어서 기다리는 곳이 마을이 고향인 양병완 선생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구미리에 300여호가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78호 뿐이다. 그것도 양씨 외에 타성받이는 다섯 집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한 성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 것은 좋은 점도 있지만 안 좋은 점도 많다고 한다. 이웃마을인 장구목에서 가든을 운영하는 유영길(52세)씨의 말이 재미있다. 씨족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는 농사철엔 촌수가 없다고 한다. 날이 가물면 물싸움이 시작되는데 그때는 물이 곧 지난한 삶이기 때문에 전쟁 같은 물싸움을 벌리고 농사철이 끝나야만 아재, 또는 할아버지가 된다고 한다.오죽했으면 날이 몹시도 가물었던 어느 해에 논이 거북이 등처럼 타들어가자 젊은 여자가 옷을 발가벗고 논두렁에 앉아서 물꼬를 잡고 있어서 남자들이 차마 그 여자와 물싸움을 할 수 없었다.는 말이 남아 있을까? 이곳 구미리의 남원양씨들이 소장하고 있던 종중문서가 보물 제 72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내용은 1355년(공민왕 4년)과 1376년(우왕 2)에 이시(以時) 수생(首生)의 고거 합격증서 2통과, 임진왜란 이전의 교지(敎旨)로 1508년(중종 3년)과 1540,1591년(선조 24)의 양공준이 홍(洪)시성(時省) 등의 백패(白牌) 2장, 홍패(紅牌) 2장, 1559(명종 14)의 양홍을 청도군수로 임명한다는 고신(告身) 1장 등 5통으로 되어 있다. 특히 고려시대의 과거합격증서는 조선시대의 백패. 홍패의 서식과 달리 왕명(王命)으로 되어 있는 귀한 자료로 고려시대 과거제도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의 홍패,백패,고신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문서 서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고려 때 합격증서로는 1305년(충렬왕 31) 장계(張桂)에게 사급(賜給)된 인동장씨선세홍백패(仁同張氏先世洪白牌)가 보물 제 501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미리 마을은 섬진강변의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오랜 역사가 있으며 아름다운 경치가 즐비한 곳이다. 진나라 장한은 제 멋대로 살아 거리끼는 바가 없어서 당시 사람들이 강동(江東)의 완적(阮籍)이라 하였다. 어떤 사람이 장한에게 물었다. 경은 한 세상을 방탕하게 살면서 죽은 후의 명성은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나에게는 죽은 후의 명성이 당장의 한 잔 술보다 못하네.〈세설신어〉에 실린 글이다.죽어서 잘 사는 것보다 살아 있는 동안의 행복이 참된 행복이고, 지금 바라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이러한 곳에 자리 잡고 사는 것이 더 할 수 없는 기쁨일 것이다. 이곳을 흐르는 섬진강, 즉 적성면, 동계면, 인계면의 퇴적암류와 응회암지대의 깊은 골짜기를 흐르는 지역을 적성강이라고 부른다. 강의 물이 맑아 소녀의 눈동자 같다는 적성강, 섬진강 오백 삼십리 물길 중에서도 가장 경치가 아름다우면서도 한적한 곳이 이 지역이다. 선돌 마을을 지나 무량산과 용골산이 섬진강에 물 그늘을 드리운 길을 거닐 때 랭보의 〈감각〉이라는 시가 친구해준다면 더 없이 황홀하지 않을까?.여름철의 푸른 저녁나절에는, 나는 오솔길로 나서리라.. 보리가 듬성듬성한 그 길을, 나는 여린 잡초를 밟으며, 걸으리라몽상가인 나는 그 싱그러움을 발밑에서 느끼면서,바람에 내 맨 머리를 멱 감기리라.나는 말 하지 않으리라,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리라.하지만 무한한 사랑이 내 마음 속에 솟아오르리라.그리하여 나는 가리라. 멀리, 아주 멀리, 방랑자처럼, 자연 속으로 따라가리라,-어느 여인과 함께라면 행복하리라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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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29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