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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구신이 고개의 추억] 임실장 가던 길…그 애틋한 그리움의 풍경

고향길서 본 '임실 17km' 이정표, 까마득히 잊었던 어린시절 떠올라 아버지 사업 실패로 가세는 기울고 어머니는 행상 시작 가족 생계유지 등짐 지며 다녔던 40리 넘는 고갯길 힘들었지만 그래도 추억 새록새록오랜만에 고향에 갔다. 진안군 백운면의 소재지 백암리 원촌에서 어린 시절 몇 년을 보낸 나에게 원촌은 갈 때마다 새로운 상념을 불러 일으켰다.원촌은 어떤 일이건 한 번도 성공을 해보지 못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벌인 사업이라고 할 막걸리 집을 열었던 곳이다. 원촌은 조선시대에 백암원이 있었던 곳이며, 옛날 원님이 부임 할 때 이 마을에 숙소를 정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아버지가 술집, 즉 주점을 열었던 집은 주조장 집에 달린 긴 집 중 가운데 집이었다. 백운에서 하나밖에 없는 주조장 옆에 이발소집이 있었고, 바로 그 옆이 바로 우리 집이며 그 아랫집이 주조장 안집이었다. 술집은 너 댓 사람이 나무 의자에 앉아서 술을 마실 정도의 홀과 국수며 고기를 삶아내는 주방의 역할을 하는 부엌, 그리고 술이 한 섬 쯤은 들어갈 수 있는 항아리와 대여섯 말이 들어갈 항아리 그리고 약간의 사발과 주전자가 고작이었다.이사를 가서야 알았지만 우리가 살 집은 아버지가 산 집도 아니고 주조장집 주인과 친구 사이였던 아버지가 술집을 연다는 조건으로 세들어 사는 집이었다.아버지가 차린 주막이 그런대로 잘 되는 날은 5일과 10일에 열리는 장날 뿐 이었다. 장날이 되면 아버지는 부산했다. 언변이 좋고 사람 사귀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신 아버지에게는 백운 면민 모두가 친구나 다름없었다.△아버지와 노름판 장날이면 의례히 우리 집은 노름판(도박판)으로 변형되기가 일쑤였다. 날이 저물어 가는 오후 다섯 시 쯤 되면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판 한 번 돌릴까? 하면 아버지는 사람들을 큰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신 후 지금도 눈에 선한 국방색의 엷은 담요를 꺼내놓으셨다. 그 때부터 노름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눈에 선한 담배연기 자욱한 그 방, 그런 날이면 호롱불이 사라지고 두개의 밝은 호야등이 켜졌다. 멀리서 보아도 사람들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화투 패를 돌리는 사람의 손놀림이 부산 할수록 판돈도 커진다. 한숨과 탄성이 교차하면서 돈을 잃고 빠지는 사람들과 다시 교차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미닫이문도 없는 바로 윗방에서 동생과 누운 채로 그 소음에 귀 기울이지 않으려 애써 보지만 기찻길 옆 오막살이처럼 계속 들리는 소음, 그러다 한판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우리 집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그날 돈을 딴 사람은 소리 소문도 없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잃은 사람들은 퀭한 눈동자로 비실비실 일어나 우리 집 큰 방을 힘도 없이 걸어 나갔다. 어떤 날은 새벽이 다 왔는데도 그 새벽을 잃어버리고 술그릇인 사기그릇이 날라 가고 멱살잡이를 하고, 아버지가 노름을 잘 했는지 못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다만 머리가 영리하거나 재주가 있는 것과 화투를 잘 치는 것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이 지금의 내 생각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화투판을 벌였으면 주인인 아버지는 고리를 뜯기만 하면 무조건 남는 장사였다. 그런데 돈에 눈이 멀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순진해서 그랬는지 기어이 화투판에 끼어들어 방 빌려주고 돈을 잃는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물론 훈수를 두고 개평이나 뜯는 것이 다혈질이셨던 아버지 체질상 안 맞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노름판에서 돈을 챙기는 사람은 개평이나 고리를 뜯는 사람들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꼭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노름판에 들어가 그날 장사한 것 까지 다 날리고 마는 아버지의 심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어린 내가 뭐라 할 수도 없고, 나는 동생과 함께 마치 불을 땐 오소리 굴속 같이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문득 따스한 물이 옷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아서 일어났다. 불을 켜고 보니 누군가 내 곁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알고 보니 술에 취한 성근이 양반이 노름을 하다가 돈을 다 잃고 자던 중, 무심결에 오줌을 누었기 때문이었다.나는 일어나 그분을 밀치고, 동생도 저만치 밀쳐 내고 수건으로 닦고 또 닦았다. 마치 내가 싼 오줌인 것처럼 미움이 아닌 부끄러움으로, 그런 날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곤한 잠에 빠져 있는 동생과 달리 내 잠은 멀리 달아나고, 모래성 같은 꿈만 꾸었다. 언제쯤 이 매캐하고 소란스런, 지옥과 같은 이 공간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쩌다 그 때와 그 집을 생각해보면 매캐한 담배 연기 속에 충혈 된 눈빛들, 그리고 한숨과 탄식이 뒤범벅이던 풍경 속으로 활활 타고 있던 호야 불이 눈앞에 선하다. 슬픔이 되고 절망이 되어 흩어져 갔던 사람들과, 그 불빛은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가 어느 날 어느 순간에 불쑥 튀어 나온다. 아! 사라져 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운 것들이여!△구신이 고개를 넘어가던 추억이런 저런 생각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나에게 임실 17km라고 적힌 이정표가 섬광처럼 눈에 띄었다. 그 순간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서 까마득히 사라졌던 한 시절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동창을 지나 구신리를 거쳐 대운이재를 넘어 임실로 걸어갔던 그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내가 고개 같은 고개인 대운이재를 맨 처음 한 발 한 발 걸어서 넘었던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해였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때의 나에게 제일 부러웠던 것은 친구들이 입고 있던 중학교 교복이었다. 마치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중학교에 간 아이들은 활기에 차 있었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나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은 그들의 까만 교복만 보고도 괜히 주눅이 들어 그들을 피하곤 했다.그 무렵 우리집안의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어 말이 아니었다. 평생에 걸쳐 한 번도 성공이란 것을 해보지 못하고 실패의 연속이었던 아버지를 오래전부터 믿지 못한 어머니는 6~7년 전부터 옷을 떼어다 파는 행상을 시작했다. 그 당시 어머니는 임실군 성수면과 관촌면 일대, 그리고 진안 성수면 일대를 다니며 옷가지를 파는 행상을 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옷가지를 팔고 받아온 쌀, 콩, 보리, 서숙이라 부르는 조 등을 백운에서 임실까지 예닐곱 말씩 이고 가서는 팔고는 했다. 그 이유는 버스 값을 아끼기 위해서였기도 하지만 임실장에 가던 길가 마을인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에 맡겨놓은 곡식을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도 어머니의 길동무 또는 짐꾼이 되어 백운 소재지인 원촌에서 임실읍 까지 17킬로미터를 몇 번이고 오고 갔던 것이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하던 나이에 그것도 친구들은 중학교에 갔는데, 곡식 너댓 말을 무겁게 등에다 지고 40리가 넘는 길을 간다. 어쩔 도리가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내가 그때 어머니와 절충했던 것이 이른 새벽에 떠나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아침 일찍 깨워 달라고 잠이 들었지만 아침 일찍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난다는 중압감에 잠이 제대로 오기나 하는가. 이리 저리 보채는 나에게 새벽은 어김없이 오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얘야 어서 일어나야지 벌써 새벽닭이 울었단다. 그래 무심한 새벽닭은 어서 일어나라 꼬리를 물며 울어대고 그래도 못들은 척 하고 누어있으면 다시 나를 깨우는 소리. 가만히 문을 열고 나 서면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무리들,5일이 장이라서 전날 술을 많이 마신 아버지는 아직도 깊은 한 밤중이고, 동생들은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눈을 부비며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주섬주섬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을 몇 수저 뜨는 둥 만 둥 하고 너 말 쯤 되는 곡식을 멜빵을 해서 메면 어깨가 무지근했다. 유난히 작았던 열 서너 살짜리 소년이 너 댓 말쯤의 곡식을 등에 메고 허리를 구부린 채 길 위를 걷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인가? 옛 시절 창(倉)고가 있었던 동창리(東倉里)를 지나 섬진강의 최상류에 놓여 진 백운교를 건너 덕현리 원덕현 마을에 이른다. 그곳에서 숲이 울창한 구신이재를 넘어갈 때면 불쑥 도깨비가 나올 것 같기도 하고, 귀신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그 고개를 넘으면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에 닿는다. 어머니가 맡겨둔 곡식을 조금 더 찾아서 마을 뒤편으로 이어진 길을 가다가 보면 다시 대운이고개에 이른다. 진안군 백운면 남계리 오정 마을과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대운 마을 사이에 자리 잡은 대운이재고개는 이리저리로 구부러지고 나보다 두세 말을 더되게 머리에 이고 가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자꾸 가쁘다. 나도 힘들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도 없고 나는 언제쯤이면 이처럼 짐을 지고 이 고개를 넘지 않을까? 도무지 그 날이 올 것 같지도 않고 고개 마루를 넘어서 한참을 내려가면 대운 마을에 닿는다. 한글학회에서 나온 〈한국지명총람〉에 지대가 하도 높아서 구름 위에 올라앉은 것 같다 함이라고 기록된 대운 마을에서는 사람의 인기척을 듣고서 개들이 울어댄다. 대운 아랫자락에 있는 매바우마을을 지나 수천리에 이른다. 어머니는 거기쯤에서 보리개떡을 내 놓는다. 배가 고프면 짐을 지고 걸어가기가 쉽지 않으니 새참으로 싸 온 것이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할머니와 고모에게 당한 시집살이 얘기를 늘어놓는다. 사는 것이 힘이 들고 무엇보다 머리에 이고 가는 곡식의 무게가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설움이 복바쳐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어머니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 같지만 지금 이 현실을 잊기 위해 어젯밤에 읽다 만 소설 속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바로 그 아랫마을이 수철리(水鐵里)다. 나중에 알아본 결과 태조 이성계가 지리산에서 상이암으로 들어설 적에 만난 사람에게 수천 리를 걸어 왔다고 했다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한 수철리 마을을 지나 성수리에 이르면 날이 희뿌연 하게 밝아 왔다.그곳에서도 임실읍까지는 제법 먼 거리다. 그 때 쯤이면 내 또래의 아이들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초등학교 아이들은 학교를 가는데 이방인처럼 나는 어깨가 빠지게 짐을 메고 어머니의 뒤를 따라 장을 가고 있으니, 그곳에서 임실읍 갈마리로 넘어가는 서낭댕이 고개를 넘어서 갈마리 거쳐 임실장에 닿으면 해는 중천에 뜨고 사십 리가 넘는 길을 등짐을 지고 걸어온 나의 몸은 이미 파김치가 되어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사주는 국밥 한 그릇을 먹고서 또 돌아갈 시간을 기다릴 때 눈부시게 떠 있는 햇살, 그 햇살이 얼마나 찬연한 슬픔이고 나를 주눅 들게 하였던지?그날 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서 자판으로 그 추억을 두드릴 때 담헌 홍대용(洪大容)이 친구가 죽자 지은 제문(祭文)의 한 구절이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홀연히 떠올랐다.글자마다 눈물방울, 그대 와서 보는가? 그런데 왜 내 기억 속에서 그처럼 아픔을 간직한 채 넘었던 그 고개에 대한 추억을 망각처럼 잊어버리고 있고 있었던 것일까? 그 의문점은 풀릴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토록 아프고 쓰린 추억은 세월의 흐름 속에 깊숙이 침잠되어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되살아나서 가슴을 들쑤시며 일어난다는 사실을 그날 임실 17km라고 쓰여 진 이정표를 보며 깨달았다.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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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22 23:02

[18. 무릉도원이 펼쳐지는 무주 금강길] 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풍광…시간도 멈췄다

겨울이 유난히 추워서 오매불망 기다린 봄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있다. 그것도 4월 둘째 주 주말에 안가면 몸이 쑤시고 몸살이 나는 곳, 그곳에 가면 우선 기부터 막힌다. 꿈에서도 생시에서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저절로 경탄이 나오는 그런 장소를 만날 때가 더러 있다. 이 때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저절로 시인이 되고 어린이가 되고, 신선이 되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야말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라는 것을 갈파한 괴테는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至高)의 것은 경탄(驚歎)이다. 인간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려고 하지만, 그것은 헛된 일이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처음 본 어린애가 거기에 비친 물상(物像)들이 신기로워서 그 뒤에 무엇이 있는가하여 뒤집어 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연둣빛으로 물드는 강이 있고, 흐르는 강물소리가 가슴팍을 적시고 지나가는 강변을 따라가다가 보면 어느덧 시간이 멈춘 자리, 말 그대로 무릉도원이 펼쳐지는 곳, 무주 금강길이다. 잠두마을 앞 길, 무릉도원으로 가는 그 길은 금강 변에 큰 소나무가 있어서 대소리라고 부르는 부남면 유평에서부터 시작한다. 버드나무가 많고 들이 넓어 유평이라는 이름이 붙은 마을에서 다리를 건너면,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세상의 모든 근심이 씻은 듯 달아난다. 비단결 같은 강 길을 따라가다 다리를 건너면 부남면 소재지고 그곳에 부남 파출소가 있다. 지리산 자락인 산청군 시천면 산천재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남명 조식 선생의 좌우명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배움만 못하고 오히려 죄악이 된다. 그래서 가끔씩 배운 것을 실천하는데,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라고 쓰여 진 파출소에 들어가 식수도 얻어 마시고, 운이 좋은 날은 커피까지 한 잔씩 얻어 마신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파출소 직원들은 현장에서 대민 봉사를 하고 우리들은 경찰들의 고마움을 가슴 깊숙이 체험한다. 우리 땅 걷기 도반의 미인계로 커피를 얻어 마시고 지나가는 주민에게 여기서 잠두마을까지는 얼마나 걸릴 까요라고 물었다. 한 십오 분 걸릴 거예요 이 얼마나 무모한 낭만인가. 차로 십오 분이면 갈 거리를 우리들은 세 시간은 족히 걸어야 잠두마을에 도착할 것이다. 비단강이라고 이름 지어진 금강 상류인 무주에서 만나는 금강 벼룻길과 잠두마을 옛길은 구절양장(九折羊腸)이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 길로 구불구불 흐르는 금강의 속내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길이다. 부남면사무소에서 635번 지방도를 따라가다가 보면 대소교에 이르고 그곳에서부터 밤소 마을로 가는 길이 시작된다. 좌측으로는 푸른빛 비단처럼 펼쳐진 금강이 흐르고, 비탈진 길과 논두렁 길, 그리고 과수원 길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이다. 더구나 누런 황토빛 땅과 강 건너 펼쳐진 길이 마치 한 폭의 잘 그린 산수화 같다. 그런 길이 1.8㎞쯤 이어지고, 강 옆 언덕에 자리한 사과밭이 끝나는 곳에서 금강 벼룻길이 시작된다. 이 근처 사람들이 보뚝길이라고 부르는 이 길은 왼쪽은 깎아지른 산이고, 오른쪽은 호수같이 맑지만 무서움을 느낄 정도로 좁은 낭떠러지 길로 밤소마을까지는 약 1.5㎞ 정도 이어지는 길이다. 가을이면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밟고 가는 맛이 남다르고 복사꽃이나 진달래 피는 봄이면 물위에 드리운 그 꽃 그림자를 바라보며 걷는 길이 어찌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지, 마치 삼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 갈 것처럼 황홀하면서도 아름다운 길이다. 벼랑을 깎아 만든 길을 걷다가 보면 옛 사람들의 그 신산스런 삶이 동화처럼 아련하게 떠오르고, 이 땅에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어찌 그리도 감사한 일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걷다가 보면 어디를 보건 다 절경이다. 벼랑길이 끝나고 수풀 속으로 들어서면 예쁜 금낭화 군락지가 나타난다. 꽃 한 송이를 따서 뒤 따라 오는 사람에게 귀고리를 선사한다. 길이 끝날 무렵 시집살이에 지친 한 여인의 슬픈 사연이 서린 각시바위를 깎아서 낸 동굴길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천천히 울창한 숲길을 지나면 밤소마을에 이른다. 바로 건너편에 봉길마을이 있다. 마을이 금강 상류에 둘러 싸여 있어 마치 봉황의 집처럼 보인다고 해서 봉길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이곳을 지나면서 바로 이곳에 집 한 채 짓고 살았으면 했는데, 아직도 나는 이 근처에 바늘하나 꽂을 땅조차 마련하지 못했으니, 내세에서나 이 소원을 이루게 될는지. 한치교를 지나며 바라본 금강은 연둣빛으로 온통 물이 들었고 그 아래 범상치 않은 바위가 대문바위다. 군산 하구둑까지 흘러가는 천리길 금강은 저 대문바위 곁을 안 거치면 갈 수가 없기 때문에 붙은 이름인 모양이다. 느티나무 잎들이 하나 둘씩 푸르러가고 문득 산허리로 하얀 구름이 서둘러 올라가듯이 우리들 역시 강을 따라 내려가야 할 것이다. 상굴교를 지나며 강가에 늘어선 미루나무 아래를 흐르는 강물빛은 더욱 푸르다. 굴바우가 있으므로 굴바우라고 불리어 굴암리라고 지어진 상굴암 하굴암을 지나며 강은 드넓고, 새터마을을 벗어나자 멀리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로 차들은 질주한다. 술암교 아래로 강물은 유장하게 흐르고 건너편에 기암괴석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다리를 건너면 잠두마을로 가는 길이고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옛 시절 신작로를 따라 우거진 숲길이다. 그 길이 서두에 말했던 무릉도원길이다. 잠두마을 옛길(2㎞)은 잠두2교에서 시작해 잠두1교에서 끝난다. 잠두12교를 잇는 37번 국도가 뚫리기 전까지 이 길은 무주와 금산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강은 이곳에서 더없이 아름답다. 누가 이 길을 알아서 이렇게 복사꽃 만발한 채 흩날리는 날,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 털어버리고 걸을 수 있겠는가.가당천, 상류천, 남대천 모두가 이곳에서 금강에 합류하기 때문에 여러 굽이가 된 강물이 마치 꿈틀거리는 용과 같다하여 이름조차 용포인 이곳에서 강은 저렇듯 한갓 진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강 건너 저편 마을은 모양이 누에머리같이 보인다하여 누구머리 혹은 잠두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저 마을에는 어떤 사람이 살다가 갔으며,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을까? 저 멀리 낮게 놓인 저 다리는 어떤 사람들이 다녔던 다리일까? 그리고 그 위에 크게 더 크게 겹겹이 놓인 저 다리로 쌩쌩 거리며 가는 자동차들은 어디로 가는 차들일까? 생각하며 바라보는 이 강변 길, 그런데 이 강변이 야생복사꽃으로 온통 불이 붙었다. 내가 수십여 년간 이 나라 이 땅을 떠돌아다녔어도 복숭아과수원이 아니면서 이렇게 강이고 길이고, 산이고 온통 복사꽃이 별천지처럼 펼쳐진 곳은 본적이 없다.그뿐인가, 길가에 심어진 벚꽃이 만개해 한 점 소리 없이 꽃잎이 지고 꽃 잎 하나 날려도 봄이 가는데, 만점 꽃잎이 가슴을 휘젓고 지나가기도 하는 강변이다. 조팝나무 꽃과 곧 이어 피어날 찔레꽃, 가을이면 온통 단풍잎이 강물까지 빨갛게 물들이는 이 강변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면 다시 찾고 다시 찾은 곳이 바로 잠두마을 건너편의 강변길이다. 복사꽃 피는 정경을 사랑했던 이백은 그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 절창 한 편을 남겼다.문여하사서벽산(問余何事栖碧山)/ 소이부답신자한(笑而不答心自閑)/ 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왜, 산에 사느냐기에/ 그저 빙긋이/ 웃을 수 밖에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분명 여기는/ 별천지인 것을산에 사는 마음을 속된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고/ 빙그레 웃음으로 답하고서/ 흐르는 물에 복사꽃을 띄운다라는 시 구절처럼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그 아름다움의 진면목을 볼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지극한 곳에 이르지 못하면 아무리 곁에 있어도 볼 수가 없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일 것이다.복사꽃 피는 길은 이리저리 휘돌아가고, 강물은 소리도 없이 흐른다. 이러한 곳에 터를 잡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마음이 자유로울까? 내가 훗날 도시를 떠나 전원으로 돌아온다면 이러한 곳에 터를 잡고 세상을 잊은 사람처럼 살아보리라 마음먹는다. 하지만 그것 역시 어쩌면 내 마음속에 다짐으로 끝날지도 모르겠다. 가다가 뒤돌아보면 산은 분홍빛으로 활활 타오르고, 강에는 세 개의 다리가 다리 박물관처럼 놓여 있고 그 아래를 흐르는 강물 소리에 장욱(張旭)의 복사꽃은 온종일 물 따라 흐르는데라는 시 한편이 떠오른다.들녘 저만치 안개 속에 다리 둥실 걸렸는데시냇가 서쪽 바위에서 뱃사공에게 물어 보네복사꽃 온종일 물 따라 흐르는데맑은 시내 어디쯤에 도화동(桃花洞)이 있는냐고?도화동이 어디가 있느냐고? 묻는 시인에게 지금 이곳이 도화동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옛 사람은 이미 간곳이 없고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소리와 연 푸른 빛으로 갈아입은 버드나무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언제 처음 놓았는지도 모르는 다리가 불어 오른 강물에 금세라도 잠길 듯 놓여 있고, 바로 그 위를 잠두1교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인 잠두교가 지난다.강물이 다리 아래를 흘러 바다로 가듯이 우리들의 인생도 쉬지 않고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하니 문득 옛 이야기 두 편이 떠오른다.자가 목지(牧之)인 당나라 말기의 시인 두목이 절강성에서 어느 소녀를 만났다.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두목은 10년 후 그 소녀를 아내로 삼겠다고 약속하였다. 두목은 장안에서 관료생활을 하다 보니 찾아갈 겨를을 얻지 못해 14년 만에 호주의 관리로 부임하여 그 소녀를 찾았다. 그 소녀는 그가 오기 3년 전에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자식까지 두고 있었다. 그 사실을 접하고 절망한 두목이 지은 시가 탄화(歎花)다.스스로 봄을 찾아 나섬이 늦은 것을슬퍼하며 봄꽃 빨리 핌을 한탄한들 무엇하리.광풍에 붉고 아름다운 꽃잎 떨어지고푸른 잎은 그림자를 치우며 과실만이 가지에 가득하네.두목은 꽃이 피고 지고 열매를 맺는 자연에 빗대어 그의 사랑이 결실도 맺기 전에 다른 사랑으로 전이해 간 것을 노래했다. 당나라 중기의 시인 최호도 그와 비슷한 경우를 겪었다. 최호가 청명절에 답청(踏靑)을 나섰다 복사꽃이 만발한 어느 집에서 처녀를 만나 물을 청해 마시고, 그 다음 해 청명절에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복사꽃은 지난해처럼 만발했으나 그 처녀는 간 곳이 없었다. 그때의 애잔함을 시로 표현한 것이 인면도화(人面桃花)다.지난해 오늘의 이 문안에는그 사람 얼굴과 도화 꽃이 서로 어우러져 붉었는데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고도화꽃만 의구히 봄바람에 웃고 있네.머물러 있는 것이 무엇이며 기다리지 못하고 가는 것은 또 무엇인지 계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길을 따라 걷다 돌아보니 봄바람에 하나같이 꽃이라는 시 구절과 미인은 간곳없고 도화만이 휘날리더라라는 최호의 시 한 소절이 가슴 속을 아릿하게 스치고 지나갔다.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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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15 23:02

[17. 남원 산내 지리산 자락 '실상사'] 석등에 밝힌 불, 얼마나 간절한 염원 담았을까

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적당하다. 산속에는 100 리나 되는 길 골이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쪽은 넓어서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곳이 있다.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 실린 글이다.민족의 성산 지리산 자락에 고찰 실상사가 있다. 바래봉에서 부터 비롯된 임천강이 뱀사골에서 흘러 내려온 물과 몸을 합치고 강물은 흘러가 경호강과 만나 남강이 된다. 해탈교를 건너기 전에 만나는 한기의 돌장승은 1963년 홍수 때 떠내려 간 짝을 그리워하는지 침울한 채 서있으며 다리를 건너면 1725년 무렵에 만들어진 돌장승 한 쌍을 지나게 된다.남원시 산내면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실상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최초의 산문인 실상사파의 본 찰로서 우리나라 불교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국보 10호로 지정되어 있는 백장암 삼층석탑과 약수암의 목조탱화를 포함하여 보물이 11점이나 있어 단일사찰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 흥척 증각대사가 구산선문을 개산하면서 창건하였다.흥척은 도의선사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을 깨우친 뒤 귀국하였는데 도의는 장흥 가지산에 들어가 보림사를 세웠고 흥척은 이 절을 세운 뒤 선종을 전파하였다. 풍수지리설에는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이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뒤 2대조 수철화상을 거쳐 3대조 편운에 이르러서 절이 중창되었으며 더욱 선풍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 14년에 화재를 입은 후로 20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있었고 스님들은 백장암에 기거하며 근근히 그 명맥을 이어가다가 숙종 5년(1679)에 벽암스님이 삼창하였다.1690년에 침허스님을 비롯한 300여명의 스님이 절의 중창을 조정에 건의하여 1700년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그 뒤 1821년에 의암이 다시 중건하였지만 1882년에 함양 출신 양재물과 산청 출신 민동혁이라는 사람이 사적 감정으로 불을 질러 아까운 건물들이 불타버리는 수난을 겪은 뒤 그 이듬해 스님들이 십여 동의 건물을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현존하는 건물은 보광전을 비롯하여 약사전, 명부전, 칠성각, 선리수도원, 누각이 있으며 요사채 뒤쪽으로 극락전과 부속건물이 있다.△ 삼층석탑석등과 보광전만세루를 들어서자 절 마당에 삼층석탑 두기가 눈을 맞으며 서있고 그 가운데에 석등과 보광전이 서있다.보광전 양옆으로 약사전과 칠성각이 서있으며 석등 양옆으로는 명부전과 요사채가 서있다. 멀리 천왕봉을 바라보며 지리산의 여러 봉우리를 꽃잎으로 삼은 꽃 밥에 해당하는 자리에 절을 지었다는 실상사는 다른 지역의 절들과 달리 평지에 펼쳐져 있다.보물 제 37호로 지정되어 있는 실상사 삼층석탑은 높이가 각각 8.4m이며 동탑서탑으로 불린다. 실상사 삼층석탑들은 규모, 양식, 보존상태 등이 상륜부는 찰주를 중심으로 보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의 손으로 만들었는데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동탑은 용차가 약간 훼손되었고 서탑의 수연은 없어졌지만 나라 안의 석탑 중 상륜부가 이렇듯 온전하게 남은 예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불국사 석가탑의 상륜부를 만들 때 모델로 활용하였다고 한다.동서 석탑의 중간지점에 세워진 실상사 석등(보물 제 35호)은 높이가 5m에 팔각 둥의 전형적인 간주석과 달리 고복형 간주석을 지닌 석등으로 그 전체적인 형태가 화엄사 앞 석등이나 임실 증기사 석등과 흡사하며 이 지방에서 널리 유행되었던 석등으로 볼 수 있다. 8각의 지대석 위에 올린 하대는 이중으로 구획되어 하단부의 각 면에는 인상을 조각하였고 그 뒤로 잎이 넓은 연꽃 8엽이 조각되었다. 연꽃잎 끝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된 귀꽃이 높직하게 솟아있다.하대 위에는 3단의 간주석 받침이 놓여있고 간주석은 3단의 마디로 층 급을 이루어 고복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돌출된 마디마다 중앙에 세줄 띠를 두른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그 아래에 단엽의 연꽃을 장식하였다.마디와 마디 사이의 잘록한 부분에는 세 줄의 가로선이 둘러져 있고 상대 위에 올려진 화사석은 8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사석 위에 놓인 지붕돌은 낙수면이 단엽 연꽃으로 장식되어있고 연꽃잎의 끝에는 하대와 같은 귀꽃이 장식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갔다. 이 석등의 측면에는 등을 켤 때 오르내릴 수 있는 용도로 사용된 석조계단이 남아있다. 이것은 현존하는 여러 석등 가운데 유일한 것으로서 석등이 공양구로서의 장식적인 의미와 함께 더불어 실용적 등기로 사용된 사실을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이 석등이 만들어진 시기는 실상사의 창건과 비슷한 시기인 9세기 중엽 이후로 보고 있다.크기가 장중하고 화려한 장식과 단정한 비례미가 돋보이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이 석등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으며 그들은 얼마나 간절한 염원으로 이 석등에 불을 밝혔을까? 그때에도 저 아름다운 석탑들은 그 불을 지피던 광경들을 그저 침묵한 채 바라만 보고 있었을까?생각하는 사이에 문득 보광전에서 독경소리 들린다. 실상사의 대웅전인 보광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원래 있던 금당터의 기단 위에 또 하나의 작은 기단을 만들어 세운 작은 건물이다. 원래의 금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규모가 큰 건물로 추정되고 있으며 보광전 안에 흥척대사와 수철화상의 영정 및 범종이 있다.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은 현종 5년(1664)에 제작되었으며 종을 치는 자리에 일본의 지도 비슷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이 종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와 일본이 패망할 무렵 남원 경찰서에서 이 절의 주지를 연행하여 추궁하였다고 한다. 주지는 그 때 종을 칠 때마다 그 은공이 일본까지 미치게 해달라는 뜻이다라고 답변하여 풀려 나왔다고 한다. 또 하나 실상사에는 일본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그 당시 왜구가 남해안에 전라도 일대에 심심치 않게 나타나 노략질을 일삼던 때였다. 홍척은 도선에게 부탁하여 절터를 보게 했다. 그때 도선이 현재의 실상사 약사전 자리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약사전의 창호가 우리나라 꽃인 무궁화이고 약사전 앞에는 무궁화가 심어져 있다. 이 약사전에는 창건 당시에 만들어진 초기 철불의 걸작으로 꼽히는 실상사 철제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높이가 260cm이며 보물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철불은 두 발의 양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완전한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꽂꽂하게 앉아 동남쪽에 있는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다. 현재 광배는 없어졌고 수미단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대좌가 아닌 흙바닥에 앉아있다. 실상사 철제여래좌상의 수인은 아미타불의 하품증생인이므로 이 불상이 약사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고 있다. △ 극락전과 증각대사 부도비발길을 옮겨 극락전에 이른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인 실상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식포식 단층 맞배지붕이다. 이 극락전의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좌우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목각보살상이 모셔져 있었으나 오래 전에 잃어버렸다고 한다. 이 극락전 측면에 흥척증각대사부도가 있다. 흥척 대사가 입적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는 증각대사응료탑으로 불리고 있다. 전형적인 팔각원당형부도가 높이가 2.42m이고 보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증각대사 부도비는 비신은 없어진 채로 귀부 위에 바로 이수만이 얹혀있다. 오랜 풍화작용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멸이 심하다. 그 당시 유행했던 용머리 비신이 아니라 거북이 모양의 이 부도비는 신라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인 태종무열왕비와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 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흥척대사의 뒤를 이었던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다. 수철화상능가보월탑이라고 불리는 이 부도는 전체 높이가 2.42m이고 보물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을 기본으로 삼고 높직한 8각 지대석 위에 건립되어 있는 이 부도는 지대석 위에 아무런 굄대도 없이 곧바로 놓여져 있다.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우주가 조각되어 있으며 앞뒷면에 문비형이 조각되고 그 좌우 면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부도 옆에 전체 높이 2.9m에 보물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는 수철화상부도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 그리고 조성된 경위까지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 따르면 그는 신라말기의 선승으로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와 제2조가 되었다. 893년(진성여왕 7년) 5월 77세로 실상사에서 입적하였고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 이 실상사는 그 뒤 후삼국시대의 백제, 즉 후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 절 약수암 가는 길 옆 조계암 터에 편운화상의 부도가 바로 그것이다. 멀리서 보면 하얀 벙거지를 쓰고 있는 듯도 하고 커다란 송이가 피어있는 듯도 싶은 그 부도가 실상사의 3조인 편운화상의 부도이다. 희미한 글씨가 새겨진 그 부도를 자세히 살펴 보자.정개(正開) 경오 신년이라고 쓰여 져 있고 편운화상이라는 이름이 뚜렷하게 보인다.정개라고 쓰여 진 그 글씨가 후백제 견훤의 연호이다. 바르게 열고 바르게 펴고 바르게 시작 한다는 뜻을 지닌 정개라는 연호를 처음 썼던 때가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열었던 900년이었고 편운화상의 부도가 세워진 것이 910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왕건이나 궁예와 달리 자주적인 연호를 사용했었던 견훤 백제는 중국의 오월과 거란 그리고 일본과 교류를 했을 만큼 강성한 나라였지만 큰아들이 아닌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다 결국 아들이었던 신검, 양검의 쿠데타로 통한의 한을 품고 역사의 그늘 속으로 숨어들게 된다.물론 아들과의 내분으로 역사의 패배자가 되고 말았다는 세간의 평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도학 선생의 말대로 가장 임금의 자질이 있는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려고 했기 때문에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던 사람이 있겠느냐 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역사는 항상 이긴 자의 것이기 때문에 오래 전에 방송되었던태조 왕건에서도 견훤은 허풍쟁이처럼 코웃음을 치기도 하고 궁예는 포악한 미륵으로 그려졌으니 그 역사를 누가 알고 누가 평하랴.산수유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그곳에서 1km쯤 올라가면 사람들의 발길이 어쩌다 닿는 약수암이 있다.백장암과 더불어 실상산파의 수행처로 오랜 세월동안을 자리한 약수암의 보광명전에 조선 후기 목조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정조 6년에 만들어진 이 목조탱화는 높이가 1.8m에 폭 1.9m로 보물 제 4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아미타불과 여덟 보살 두 명의 비구가 상하 2단으로 조각되어 있다. 조선후기 목조탱화의 기준작품이 된다고 볼 수 있는 이 탱화는 금분으로 도금되어 있고 조각수법이 화려하면서도 분위기가 엄숙하다.△ 백장암과 석탑실상사를 나와 인월로 가는 길에서 가파른 산길을 1.1km쯤 올라가면 실상사의 산 암자인 백장암(百丈庵)이 있다. 국보 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과 보물 제 40호로 지정되어 있는 백장암 석등이 있는 백장암에는 현재 법당과 칠성각, 산신각 그리고 요사채가 있는데, 예전에는 규모가 상당히 컸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 중에서도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석탑 양식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만든 이형 석탑이다. 탑 전체를 두른 장식 조각들이 화려하면서도 섬세하게 만들어진 이 탑은 통일신라 시기의 절정을 이루는 작품이라 국보 제 10호로 지정하였으나 1980년 도굴범에 의해 여러 곳에 흠집이 생겼고, 그 뒤편에 다소곳이 서있는 석등 또한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이다.그러나 1980년대에 도굴범에 의해 탑이 무너지면서 그 아름다운 탑이 여러 곳이 손상을 입은 채 서 있어서 찾는 이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백장암 요사채의 담 벽에 기대서서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지리산을 바라볼 때 오랜 도반인 조용헌 도반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사는 것이 외롭다고 느낄 때는 지리산의 품 안에 안기고 기운이 빠져 몸이 쳐질 때는 설악산의 바위 맛을 보아야 한다.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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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08 23:02

[16. 진안 풍혈냉천서 용포리까지 섬진강 길] 삼복더위 식히는 서늘한 바람…가을을 손짓하네

여름에 떠오르는 과일이 수박과 참외다. 보리 수확을 끝내고 난 뒤인 장마 무렵에 나오는 복숭아도 여름 과일의 대명사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여름의 대명사는 무엇일까? 과일보다 현실감 있게 떠오르는 것이 보리밥일 것이다. 지금은 건강식품의 대명사가 되어 오히려 잘사는 사람들이 즐겨먹는 보리밥을 유독 여름철에 신물나게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십대 중반을 넘어선 사람들 대부분이 여름날에 대한 추억 한 두 가지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아버님은 굉장한 미식가였던 듯 싶다. 어느 계절의 어느 때에 가면 그 냇가에 진짜 팔뚝만한 장어가 올라오는가를 알고 있었고, 미꾸라지가 많이 있는 둠벙도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그리움이 머무는 마을어느 산에 능이버섯이나 송이가 많이 나오는지를 잘 알고 있어서 송이를 바작 하나에 가득 따가지고 오시는 걸 본 적도 있었다. 또 어느 산에 씨알 굵은 더덕과 통통하면서도 윤기 자르르 흐르는 참두릅이 많이 나는지 등등, 산에서 나는 것뿐만이 아니라 가을철의 별미인 추어탕의 재료인 미꾸라지는 물론이고 깊은 밤에 물고기 잡는 것까지 훤하게 꿰뚫고 계셨다. 아버님이 중반을 넘어선 여름철 점심 무렵에 항상 심부름 시키는 것이 있었다. 익산 바우 밑에 가서 주전자에 물 떠와라. 아버님이 말하는 익산바우는 내가 다니던 백운초등학교 운동장 아래에 있는 바위로 그 밑에는 여름철에 손이 닿으면 손이 시릴 정도로 찬물이 나오는 샘이 있었다. 주전자 가득 샘물을 떠 가지고 가면 아버님은 그때만 맛볼 수 있는 맛있는 물건을 준비해두고 계시다가 내놓곤 했다. 그게 바로 그해 고추밭에서 처음 따온 첫물의 빨간 고추였다. 처음엔 바라만보아도 매울 것 같은 빨간 고추를 어떻게 먹을까 걱정이 앞섰는데, 막 떠온 시원한 샘물에 보리밥을 말아서 한 숟갈 먹고 고추장이나 된장을 찍어 한입 베어 물면 그 생각이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맵기는커녕 달착지근하면서도 상큼하면서 은근한 그 맛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왜 이 글의 서두를 찬물과 빨간 고추로 시작하느냐 하면, 우리 선조들도 나름대로 더운 여름을 지내기 위해 보양식을 즐겼고, 피서철을 무사히 지내기 위해서 시원한 물이나 바람이 시원한 곳을 찾아다녔었다. 그 중 나라 안에 유명한 곳이 밀양의 얼음골과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 있는 풍혈냉천이다.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 양화마을 앞 대두산(459m) 밑에 있는 이 풍혈냉천은 조선시대 때부터 널리 알려져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풍혈은 바위 사이에서 찬바람이 나오는 구멍이며 냉천은 삼복더위에도 손을 넣고 1분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차갑다. 이 냉천에 개구리가 뛰어들면 즉사했다고도 하고 이 냉천에서 목욕하면 웬만한 피부병 정도는 쉽게 낫고 무좀에도 특효가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이 풍혈과 냉천이 발견된 것은 1780년께로 당시 자연적인 지질의 변화로 한쪽에는 사람 체온보다 높은 온천이 두 군데 솟아나고 한쪽에는 찬바람이 나오는 구멍 2개와 삼복에도 찬물이 나오는 냉천이 생겨났다는 것이다.그 당시 성수면 양화리의 대두산 기슭에서 나온 온천물은 성분이 좋아서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소문이 널리 퍼져 나병환자들이 떼를 지어 찾아와 완치를 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목욕을 하고 간 뒤에는 수질이 나뼈져 온천으로서의 가치가 자꾸 없어져 갔다. 그 무렵 힘센 장사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불결한 온천이라고 흥분하여 큰 바위를 들어 온천을 매몰시켜 버리고 주위에 있던 버드나무와 음식을 해먹던 솥과 다른 기물도 다 파괴했다고 한다.△풍혈과 냉천그 뒤로 온천은 땅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다.그러나 이 온천을 찾아내어 일확천금을 벌어 보겠다는 사람이 간간이 드나들어 온천이 있던 장소를 찾아내려 했으나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그러던 중 1943년 3월 전주에 사는 박성근이라는 사람이 온천을 다시 발굴하려는 큰 꿈을 품고 인부 300여 명을 동원 많은 경비를 들여 탐색하였다. 하지만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장소를 찾아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그들은 근처의 땅을 모조리 들추어 파헤치다시피 하여 온천이었던 곳으로 추측되는 부근에서 물길의 자취와 버드나무 솥 등을 발견하였고 이제 온천을 막아버린 바위덩이만 찾아내어 그 바위만 들어내면 온천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막바지 작업을 진행했으나 갑자기 박성근씨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그해 세상을 뜨자 온천발굴사업은 또다시 중단되고 말았다.그 뒤 찬바람이 나왔던 두 개의 냉혈 밑에서 2개의 냉천을 발견하였으나 지금은 지형이 변화되어 1개소는 없어져 버리고 찬바람 나오는 풍혈 1개소와 찬물 나오는 냉천 1개소만 남아 있는데 요즈음 여름철이면 피서객이 급증하여 줄을 이어 몰려들고 있다.풍혈은 삼복더위라 할지라도 온도가 6℃를 유지하고 있으며 자유당 때 굴이 무너지기 전만 하더라도 한 여름에 고드름이 매달린 것을 볼 수 있었으며 일본이 2차대전 막바지에는 여기에다 대규모의 한천공장을 세웠었고 또한 잠종저장소로도 사용되었다 한다.냉천은 석간수로서 3℃의 온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으며 물에 함유된 성분이 또한 여러 가지라 위장병에도 좋고 피부병에 효과가 크고 특히 난치의 병으로 알려진 무좀도 치료가 된다하여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그 때가 아마도 9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무당이면서 〈무당〉이라는 소설을 썼던 정강우 선생이 풍혈냉천을 사고 싶다고 해서 이곳의 주인인 전태수 옹을 만났었다, 그 때 제시했던 금액이 1억이었던가, 2억이었던가는 몰라도 두어 번 찾아갔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새 십몇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이제 정강우 선생도, 전태수옹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세월이 무상한가, 사람의 한 생애가 무상한가!밀양의 얼음골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이 냉천에는 여름마다 그 시원한 바람을 쏘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고 하는데, 옛날 같지는 않다. 바로 근처에 회봉 온천을 개발한다고 떠들썩했지만 아직까지도 설왕설래만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실시되면서 유행처럼 번지는 것이 온천개발과 골프장 건설일 것이다. 나라는 주먹만한데 지역 유지들이나 자치단체장들을 만나게 되면 미국의 무슨 주는 골프장이 2000개가 넘는다느니 일본 만해도 우리나라보다 골프장이 몇 배나 많다느니 하면서 골프장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또한 우리나라 온천이 온천은 무슨 온천 순전히 물 타가지고 온천이라는 말만 붙이고 있으면서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온천만 만들어 놓으면 황금알을 낳는 것처럼 설치고 있으니, 1년이 가도 온천 한번 안가보고 골프채도 잡아보지 않은 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온천이고 골프장이고 다 망하고 말 것인데.△그림 같은 그 반룡마을풍혈냉천에서 아름다운 섬진강 길을 타박타박 내려오다 강 건너를 바라보면 대나무 숲 사이 빈집이 몇 채 보인다. 새로 만든 다리 아래로 손만 뻗으면 닿을 듯하게 낮게 드리운 옛 다리 아래에 푸른 강물이 넘실거리고 그 다리를 건너면 강가에 바짝 붙어 서 있는 느티나무가 평화롭게 보이는 마을이 성수산(491.4미터) 아래 용포리의 반룡마을이다.본래 진안군 이서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을 단행하면서 상회리, 하회리, 포동리, 용회리를 병합하여 용포와 포동의 이름을 합해서 용포리라고 지은 반룡마을은 용회리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놓은 다리와 새로 놓은 다리가 마을로 이어져 있는 그림속의 한적한 풍경 속으로 강이 흐르는 반룡마을 앞을 흐르는 강은 넓고도 넓었는데, 지금은 그 옛 다리는 이미 추억이 되고 말았다. 물막이 댐이 생기기 전만해도 반룡 북쪽에는 형기쏘가 있었고, 남쪽에는 할미쏘가 있어서 깊은 수심을 자랑했다고 한다. 반룡 북쪽에는 마당처럼 넓은 마당바위가 있었다는데, 물이 들어차면서 어디고 간에 쏘가 되어 그 이름을 가진 쏘는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반룡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는 옛날에 샘이 있었다고 해서 새암골이고, 새암골 옆에 있는 골짜기는 바랑골이다. 반룡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는 공군이 골이며, 새암골 동북쪽에 있는 터는 바우배기터이다. 운중반룡(雲中盤龍), 초중반사(草中蟠巳)의 명당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반룡마을 앞에서 섬진강은 휘감아 돌고 성수산자락에 서산터지라는 절터와 은선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반룡리의 서남쪽에는 옛날 도적이 많았기 때문에 작은 저골이고 반룡 서남쪽에는 용아가리 앞에 있는 개구리 같이 생겼다는 구적바우가 있으며, 반룡 동쪽에 있는 골짜기인 초번통골은 전에 초빈(初殯)을 하였던 곳이다. 반룡 마을 뒤쪽으로 해서 산을 넘어가면 성수면 소재지인 외궁에 닿는데 그 고개 이름이 반룡재이다. 하지만 2차선 포장도로인 그 고개를 넘지 않아도 관촌에서 방수리를 거쳐 마령으로 이어지는 길이 뚫려서 전주에서 가는 것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이 되었다. 명나라 때 사람인 오종선이 지은 〈소창청기(小窓淸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며, 시내는 흐르고 돌은 서 있으며, 꽃은 새를 맞아 웃고, 골짜기는 나무꾼의 노래에 메아리치니, 온갖 자연정경은 스스로 고요한데, 사람의 마음만 스스로 소란하다. 또한 송나라 때 문인 소동파는 〈소문공충 공집〉에서 강과 산, 바람과 달을 본래 일정한 주인이 없고, 오직 한가로운 사람이 바로 그 주인이다고 하면서 한가함 속에서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중환보다 후세에 태어났던 독일의 시인 휠덜린(1770-1843)은 자연이 그대를 앗아 가기 전에 그대를 자연에게 맡겨라라고 하였다.내가 자연이 되고 자연 속에 동화되어 살고 싶은 곳 중의 한 곳이 물 맑고 아름답기로 소문난 섬진강이 더 넓혀지기 전에 펼쳐놓은 그림 같은 마을이 반룡마을이었다. 그래서 섬진강을 걷던 길에 이 마을 이장 집을 찾아가 내가 살고자 하는 지점을 가리키며 저 곳에 땅이 나오면 연락을 해달라고 했었다. 하지만 내 행색이 초라하기 때문에 돈이 없을 것 같아 그랬는지, 아니면 지도를 들고 수상쩍게 걸어가는 것이 미심쩍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한 번도 전화가 걸려온 적이 없었다. 이 마을의 어디쯤이던 터를 잡고 살고자 한지 여러 해를 보냈으면서도, 나는 그 마을에 바늘하나 꽃을 땅도 마련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 꿈을 접고 누군가가 내 펼치지 못한 꿈이며 정성을 가득 담은 집을 짓고서 나를 초청해서 하룻밤 재워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찾아가 다리를 건너면 반겨 맞는 느티나무 아래 앉아서 흐르는 강물을 망연히 서서 바라볼 때가 있다,그 때 내 가슴 속으로 살며시 들어오는 글이 소로우의 〈월든〉 의 한 구절이다.시간은 내가 낚시질하는 강을 흐르는 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강물을 마신다. 그러나 물을 마실 때는 모래 바닥을 보고 이 강이 얼마나 얕은 가를 깨닫는다. 시간의 얕은 물은 흘러가 버리지만 영원은 남는다. 나는 더 깊은 물을 들이키고 싶다. 별들이 조약돌처럼 깔린 하늘의 강에서 낚시를 하고 싶다. 나는 셈을 전혀 할 줄 모른다. 알파벳의 첫 글자도 모른다. 나는 태어났던 그 날처럼 현명하지 못함을 항상 아쉬워한다.이렇게 시간이라는 이름의 강물이 유장하게 흘러가는데, 그 시간 속의 나그네들은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시간에 쫓겨서 시간 속에 서서히 매몰되고 있으니. 아, 만물이 오고 만물이 가는 우주순환의 이치는 그 무엇이라는 말인가?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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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01 23:02

[⑮ 내 마음의 명당, 김제 청도리 귀신사 일대] 불현듯 가고 싶고 머물러 살고 싶은 곳

누구나 세상이라는 강물을 숨이 가쁘게 헤쳐가다가 지쳐서 쉬고 싶을 때 가 있을 것이다. 그런 때 불현듯 가고 싶고, 가서 보면 머물고 싶고, 그리고 머물다 보면 몇 해쯤 살고 싶은 곳이 한 군데 쯤은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모악산 자락의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의 귀신사와 그 일대가 바로 그런 곳이다.내가 귀신사를 처음 갔던 때가 아마도 전주에 정착한 다음해였으니,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지 않았는가 싶다. 가을이었고, 바람이 몹시 불던 저물녘이었을 것이다. 금산사를 가는 길이었다. 그러다 문득 귀신사(歸信寺) 라는 나무 간판이 눈에 띄었고, 무언가에 홀린 듯 무작정 내려 찾아가 한 눈에 반해 시도 때도 없이 가게 된 곳이 바로 귀신사였다. 귀신사 바로 아랫집을 우리 집이라는 이름으로 소유할 뻔 했던 적이 있다. 외지고 한적한 곳에 있는 집을 사서 살고자 여러 곳을 돌아다녔던 80년대 후반쯤이었다. 청도리에 집이 났다고 해서 찾아간 곳이 바로 그 집이었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아쉽게도 그 집이 며칠 전에 팔렸다는 것이었다. 아쉬워서 팔린 가격을 물었더니 600만 원이었다고 한다. 놓친 고기가 크다는 말도 있지만 이미 늦은걸 어떻게 하겠는가? 불과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신라 때부터 명찰인 귀신사를 정원으로 두고서 산책을 하면서 신 새벽에 일어나 새벽예불에 동참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금세 마음을 바꿨다. 매일 새벽마다 그 새벽 종소리가 곤한 잠을 깨우게 한다면 매우 불편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귀신사 아래에 집을 장만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귀신사를 가고 올 때마다 그 집을 바라보고 아쉬워하는 것은 그때 그 순간이나 지금이나 매일반이다. 전주일대 관할 화엄십찰 중 하나귀신사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그 중에 한 곳이 전주에서 금산사로 가는 길이다. 전주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삼천(三川)이라고 부르는 세내다리를 건넌다. 용산리-황소리-독배마을을 거쳐 청도재를 넘어 유각 마을을 지나서 좀 더 내려가면 청도리에 닿는다. 청도리는 본래 전주군 우림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두정리, 동곡리와 금구군 수류면의 용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청도리라고 한 뒤 다시 전주군에 편입 되었다가 1935년에 김제군 금산면에 편입 되었다. 청도리 마을회관 광장에 차를 세우고 귀신사로 들어가는 길은 무성한 감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길은 마치 어린 날에 외갓집 가는 길의 풍경을 자아낸다. 그리고 작은 개울을 건너면 이십여 년 전만 해도 담쟁이 넝쿨이 수북히 덮은 나무 창틀 사이로 조선소 한 마리가 얼굴을 내밀면서 낯선 손님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해부터 소가 사라져 버린 외양간에는 담쟁이 넝쿨만 무성하고 돌계단을 올라가면 귀신사에 닿는다. 귀신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세운 절로 창건 당시에는 국신사(國信寺)라 불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정복지를 교화하여 회유하기 위해 각 지방의 중심지에 세웠던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서 전주 일대를 관할하던 큰 절이었다. 의상의 명으로 세워진 화엄십찰은 소백산의 부석사와 중악공산의 미리사, 남악 지리산의 화엄사, 강주 가야산의 해인사, 웅주 가야협의 보원사, 계룡산의 갑사, 삭주의 화산사, 금정산의 범어사, 비슬산의 옥천사, 전주 모악산의 국신사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의상대사 혼자의 힘이라기 보다는 의상대사의 제자들이 힘을 합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옛날 여덟 개의 암자를 거느렸고, 금산사까지 말사로 거느렸다는, 귀신사의 위용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사기에 따르면 고려 때 원명대사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이 구순사(拘脣寺)로 바뀌었다가, 조선 고종 10년에 고쳐 지으며 귀신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몇 년 전에 절 이름을 발음이 귀신과 같다고 하여 국신사로 바꾸었다가 근래 다시 귀신사로 되돌아왔다. 고려 말에는 이 지역에 쳐들어왔던 왜구 300여명이 주둔했을 만큼 사세가 컸으나 지금은 대적광전과 명부전, 요사채 등의 건물, 대적광전(보물 826호)과 이 근래 들어 새로 지은 몇 채의 건물이 있다.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집으로 양옆에 풍판을 달은 귀신사 대적광전은 양쪽 처마는 겹처마이고 뒤쪽 처마는 홑처마로 된 것이 특징이다. 대적광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그 뒤에 복구했는데, 법당 안에는 삼신불 즉,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삼신불인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을 모셨다. 모두 소조불로 1980년대에 금물을 입혔는데 건물에 비해 불상이 너무 커 앉아서 바라보기가 거북스럽다. 완주 송광사에도 이와 같이 큰 불상을 볼 수가 있기 때문에 같은 시기에 같은 사람이 주조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대적광전 뒤편으로 돌아가면 귀산사의 또 하나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돌계단이 있고 그 옆에 야생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돌계단 오르며 또 다른 자연의 맛듬성듬성한 돌계단을 올라가면 오랜 세월 동안 이 귀신사를 지켜보았을 느티나무 와 팽나무 사이에 돌계단이 있다. 금실좋은 부부나 의좋은 남매 같기도 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어느 땐 나에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우리들이 이곳에서 살게 된지가 한 이백년쯤 되었을까? 세월이라는 것이 하룻밤 꿈같기도 하고 허깨비 같기도 하다고 오가는 사람들이 말하던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아.그랬을 것이다. 그 나무들이 침묵한 채로 지켜보는 세월 속에 귀신사 일대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다 녹아들었을 것이다. 내 마음에 가장 편안한 곳, 내 마음의 자유, 내 마음의 평화가 있는 내 마음의 명당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돌계단에 앉아 언제나처럼 나는 귀신사 일대를 내려다본다. 몇 그루 자라난 차나무의 잎들은 아직도 짙푸르고 대적광전 지붕 너머로 백운동 마을은 평화롭다. 문득 한줄기 바람이 뺨을 스치듯 지나가고 그 바람결에〈파우스트〉속에서 린쎄우스의 말 한 구절이 떠오를 때가 있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내 마음에 드는구나. 그렇다. 이 절은 모두가 어지럽게 널려 있고 제 멋대로 내 던져진 듯 하면서도 자세히 보면 질서정연하다. 나는 이 자리를 좋아해서 이 자리에 잠들고 싶다.유령은 우주가 좁다고 여겼다. 항상 작은 수레를 타고 술 한 병을 몸에 지니고는 사람을 시켜 삽을 메고 따르게 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죽거든 그 자리에 묻어라허균의 한정록에 나오는 글이다. 이 나라 산천을 돌아다니다 보면 온 나라가 묘지 공화국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죽게 되면 산에다 묻고 그 위에 나무 한그루를 심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화장해서 바다나 강에 뿌려달라고 했다는데, 나는 오래 전에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내가 죽게 되면 화장을 해서 세 곳에 나누어 뿌려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뒤편과,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뒤편, 그리고 귀신사 대적광전 뒤편에 뿌리고 제사는 지내지 말아라. 혹시 그곳에 갈 때만 나를 생각해라. 내 얘기를 듣고 큰 애가 말했다. 아버지 납골당에라도 모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 말을 듣고 다시 말했다.내가 평생을 길 위에서 떠돌았는데, 나를 납골함에 가두어 두면 얼마나 불편하겠느냐.나를 자유롭게 해줘라. 죽어서도 영혼이 있다면 이 나라 산천을 떠돌고 싶으니 이렇게 말했지만 사후의 일은 아무도 알 수가 없는 일, 어찌될지 그 또한 나의 일이 아니다. 온 우주를 집이라 여기고 어느 날 죽거든 그곳에 묻어라 라는 유령의 말이나 산다는 것은 떠돈다는 것이고 쉰다는 것은 죽는 다는 것이라고 여겼던 용재 성현(成俔)의 말이 새삼 내가 선택해야 할 것을 제시해 주었는지도 모른다.바로 그 뒤편에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백제계 삼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62호)은 그 높이가 4.5m이다. 바로 그 옆에 엎드려 앉은 사자상 위에 남근석이 올려진 석수는 풍수지리에 따르면 이곳의 지형이 구순혈(狗脣穴)이므로 터를 누르기 위해 세웠다고 알려져 온다. 그리고 청도리 입구 논 가운데에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부도(전라북도 유형문화재63호)가 있다. 고요한 쉼한 번 찾은 이 잊지 못해귀신사는 나처럼 조용함과 그윽함에 빠진 사람들이 즐겨 찾는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절이지만, 한 번 찾은 이는 그 은근한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게 되는 절이다. 절 입구에는 당시 조병갑과 함께 악행으로 쌍벽을 이루었던 균전어사 김창석의 비가 세워져 있다. 왜 그의 비석이 이곳에 세워져 있는지를 알 길은 없다. 어쩌면 그가 이절에 사주를 많이 해서 세워진 것은 아닐까?이 절에서 가장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마력을 지닌 것은 삼층석탑이 서있는 그 언덕에서 바라다 보이는 건너편의 마을 풍경일 것이다. 고즈넉한 혹은 그림처럼 보이는 백운동 마을에 증산 강일순의 제자였던 안내성이 세운 증산대도회를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더러는 세상을 하직하였거나 더러는 떠나가서 스무 채 남짓한 마을 사람들이 언젠가 올 그 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을 뿐이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숨은 꽃〉의 작가인 양귀자의 표현대로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라는 귀신사의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다가 보면 이곳을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람 속에 실려 올 것 같기도 하고 숨결이 살아서 달려 오는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한다. 고즈넉한 정취 백운동 마을귀신사 대적광전 지붕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마을이 백운동마을에서 뒤로 난 길을 따라가면 닿는 산이 위대한 어머니의 산인 모악산이다. 모악산 자락 아래에 호남의 거찰인 금산사가 있으며 이 일대를 청도리라고 부른다. 하운동(夏雲洞)은 청도 남쪽에 있는 마을로 화운동(華雲洞)이라고도 부르는데, 산 능지에 있어서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곳이다. 하운동 남쪽에는 임금의 아내라는 뜻을 지닌 제비산(帝妃山)이 있고 그 아래에서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혁명가인 정여립이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대동계를 조직했었다. 그러나 1589년에 일어난 기축옥사로 그의 큰 꿈은 꺾이고 조선의 지식인 일천여명이 희생당한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하운동 동북쪽에 있는 산이 깃대봉(262m)이고, 하운동 남쪽에 있는 산은 탁주봉이며, 하운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는 채봉골이다. 하운동 동쪽에 있는 등성이는 산제당이 있어 산 제당골이고, 하운동 서남쪽에 잇는 마을이 구리골이다. 동곡(銅谷)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에서 한말의 종교 사상가인 증산 강일순이 9년 간에 걸쳐 세상의 도수를 바꾸었다는 천지공사를 행했다. 청도리에서 금구면 선암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살푸령재라고도 부르는 싸리재이고, 하운동에서 무악산으로 넘어가는 거개가 술바탱이라고도 부르는 씨름판 날맹이이다. 청도 북쪽 전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마을이 유각(有角)마을이고, 하운동 북쪽에 있는 터는 옛날에 말을 매던 곳이라는 마룻등이 있다. 미륵 신앙의 본 고장이자 동학의 고장이며, 화엄적 후천개벽을 꿈꾸었던 강증산과 차경석의 텃밭이 이곳 청도리이다. 가끔씩 찾아가면 가슴이 훈훈해지고 마음이 편안해 지는 곳, 문득 그리운 사람들이 못 견디게 그리운 곳이 귀신사가 있는 청도리이다.청도리의 어느 곳이건 터를 잡고서 마음 다 내려 놓고 귀신사 일대를 거닐며 한가함을 누리고 산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시절이 어디 있을까? 하는 것이 지금의 내 생각이다.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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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25 23:02

[⑭한반도 유일하게 지평선 볼 수 있는 호남평야] 광활한 들녘 그리고 굴곡진 역사 간직한 눈물의 땅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호남평야다. 만경강과 동진강 유역에 펼쳐져 있는 이 평야는 나라 안에서 가장 큰 평야로 전주익산정읍군산김제 등 5개 시군을 비롯하여 완주부안고창 등의 군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호남평야,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평야가 동진강 유역에 펼쳐진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다. 만경(萬頃)은 말 그대로 가없이 펼쳐진 들녘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를 일컬어 금만평야라고도 부르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김제맹경 외 애밋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 애밋들이란너른들곧 호남평야를 일컫는 말이다.호남평야에서도 가장 중심지에 있는 김제시의 백제 때 이름은 벼의 고장이라는 뜻으로 순수한 우리말인 볏골이었다. 한자음으로 벽골이라 해서 벽골군(碧骨郡)으로 불리다가 신라 때에 지금 이름인 김제로 고쳐졌다. △김제 부량면에 있는 삼한시대의 저수지 벽골제= 인심이 순후하여 농사일에 부지런하였다라고 기록된 김제시에는 봉산들봉남들죽산들청하들만경들백구들과 같은 비옥한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혔던 홍수인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는 김제맹경들에 배를 띄우고 고기를 낚았다는 이야기까지 생길만큼 너른 평야였다. 오랜 옛날부터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지었으므로 이곳에 물을 대려고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저수지인 벽골제(碧骨提)를 만들었다. 벽골제가 〈여지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옛 사람들이 김제의 옛 이름을 들어 그대로 벽골제라고 이름 했으며, 고을의 이름 역시 이 벽골제를 쌓은 뒤에 지금의 이름인 김제로 고쳤다고 한다.둑의 길이는 1800보(步)이며, 둑 안의 둘레는 7만 6406보이다.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는데, 논이 모두 840결(結) 95부(負)이다.물의 근원은 셋이다. 하나는 금구현 모악산 남쪽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며, 하나는 모악산 북쪽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여 벽골제에서 모였다가 고부군 눌제의 물줄기를 부안현 동진에서 합쳐져, 만경현 남쪽을 거쳐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 둑을 쌓았으며, 고려 때 다시 쌓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서 물이 말라 육지가 되어 백성들의 전답이 되어 버렸다. 다만 비석에 새겨진 기사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고부의 눌제, 익산의 황등제와 함께 호남평야의 3대 저수지 중 가장 규모가 컸던 벽골제는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의 저수지이다.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도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축성되었다고 실려 있지만 그 무렵에 이 지역은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백제 비류왕 27년에 축성한 것을 신라 연대로 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원성왕 6년에 중축되었고, 고려 현종 때와 조선 태종 16년에도 개축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백성들이 벽골제의 일부를 헐어서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하지만 벽골제가 현재의 모습으로 변형된 것은 1924년부터였다. 아베라는 일본 사람이 김제읍과 진봉면 일대의 논을 사들인 뒤 아베농장을 세웠다. 그는 그곳에서 진봉면 서쪽의 바다를 막아서 간척지를 만들고자 했고, 자기 돈 백만 원과 일본 정부의 보조금 백만 원을 합하여 동진농업주식화사를 세웠다. 6년의 세월 속에 10㎞에 이르는 동진방조제라는 이름의 둑이 만들어지면서 논 2천 정보가 생겼다.그 논에서 나온 쌀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려 갔고, 1949년에 그 일대가 따로 독립되어 광활한 만주벌판을 연상시키는 광활면이 되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식민지 시대에 수탈의 현장이 되었고, 현재 김제시에서 생산되는 쌀의 소출이 우리나라에서 나는 쌀의 40분의 1에 이르게 된 것이다.△두 줄기 물이 감싸듯 하여 정기가 풀어지지 않는 곳= 나지막한 산들이 들 가운데를 굽이쳐 돌았던 호남평야 일대를 두고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두 줄기 물이 감싸듯 하여 정기가 풀어지지 않아서 살 만한 곳이 대단히 많다. 두 줄기 물길이란 호남평야를 적시고 서해바다로 들어가는 만경강과 동진강을 이르는 말이다.땅이 넓고 기름져서 풍요로운 땅 호남평야는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나라의 곳간이었다. 이 지역의 풍흉의 결과에 따라 나라 살림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1935년 9월 동아일보에 이병기선생이 연재한〈해산유기(海山遊記)〉를 보면 그 당시 호남평야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무어라고 형용할꼬! 그 광활한 김제 만경의 평야며 백산평 궁안 삼천평 들이 삼면에 에두르고 한편에는 동진강 서해 그리고 점점이 건너다보이는 산과 산 그 빛들은 푸르고 희뜩희뜩 거뭇거뭇하고 또 그 무수한 변화되는 풍경은 잠깐 이렇게 해서 보고는 말할 수 없다.나는 다만 가슴이 넓어지는 듯 이러한 호기가 난다. 저 들판이 무비옥토, 해마다 그곳에서 나는 몇 백 만석의 곡식, 그런데도 왜 헐벗고 주리고 이리저리 유리 전전하는고.나라 안에서 가장 큰 곡창지대였던 호남평야 일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더 팍팍했던 것은 그 무슨 연유일까?지리학자인 최영준 선생은 〈국토와 민족 생활사〉에서 그 연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호남평야의 범위가 현재보다 훨씬 좁았으며, 바닷가의 들은 장기(獐氣)가 많고 관개시설의 혜택을 고르게 받지 못하여 한해와 염해를 자주 입는 곳이 많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들판보다는 약간 내륙 쪽의 고라실(구릉지와 계곡이 조화를 이룬 지역)에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고 바닷가의 들(갯땅)에는 주로 가난한 농민들이 많이 거주하였다.(중략) 기계화의 수준이 낮은 농경사회에서는 홍수의 피해가 크고 관개가 어려운 대하천보다 토양이 비옥하고 관개가 용이한 계거(溪居)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특이성을 고려하지도 않은 조선시대의 관리들은 그들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탐학과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삶이 피폐했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이다. 호남평야는 그때까지만 해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흉년이 들 수밖에 없는 천수답이 부지기수였다. 그 당시 3년 동안에 걸친 가뭄 때문에 전라도 전 지역 사람들은 살아가기조차 힘든 처지였다. 그때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동진강의 상류인 정읍천변에 구보(舊保)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만석보를 만들고서 과중한 수세를 요구했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것이다.한말의 문장가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증언한 내용을 보자.나라에서는 백성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가고 관리는 관리대로 농간을 부려 제 배를 채우기에 바빴다. 그래서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떠돌아 다녔기 때문에 전북충남경기의 곡창 평야지대에는 버려진 옥토가 부지기수였다.참다 참다 못 참은 민중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 조선이 역사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고, 일제가 그 자리를 이어 받은 뒤 호남평야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호남평야에 물 기근을 막게 한 섬진강 중류를 막아 우리나라 최초의 댐인 운암댐을 건설한 것이다. 1928년 동진수리조합에서 만든 운암댐은 바로 전라북도의 지세를 잘 이용한 대표적인 댐이었다. 동진강의 상류와 분수를 이루는 왕자산과 성왕산을 뚫어 유역을 변경한 뒤, 물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던 호남평야에 태인천을 통하여 정읍, 김제, 부안 등지로 내려 보냈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인들은 호남평야 일대가 쌀의 집산지임을 알게 되면서 고리대금업자들로 하여금 농민들에게 고리채를 놓아 헐값으로 사들이거나 강제로 빼앗았다. 미야자끼. 나까니시, 구마모또, 가와사끼, 이시까와 같은 재력가들이 군산을 거점으로 삼아 큰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다.△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1907년에는 전라북도의 기름 진 논 4만 정보가 그들의 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생산된 양곡이 개항한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갔다. 그 무렵 김제지역에 터를 잡은 사람이 아베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동진농업주식회사를 세운 뒤 1924년에 간척지 제방공사를 시작해 둑을 쌓아 만든 농경지에서 생산한 맛 좋은 쌀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다.헐벗은 농민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북간도로 줄을 이어 떠났고, 그때 아리랑 곡조에 실려 불렸던 노래는 이러했다. 밭 잃고 집 잃은 동무들아 어데로 가야만 좋을까 보냐.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아버지 어머니 어서 오소. 북간도 벌판이 좋다더냐.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간다.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으므로 1940년에 신 댐 건설에 착수하였으나 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다. 그 뒤 1961년에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와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 사이를 막아 1965년에 12월 길이가 344m 높이가 64m인 섬진강댐을 만들었고, 정읍시 산내면 장금리에서 칠보면 시산리까지 6215m의 굴(직경 3.40m)를 뚫어 칠보발전소를 만든 것이다.한 맺힌 세월이 지나고 해방 이후 호남평야에 농지정리사업이 진행되었다. 그 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은 맛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해서 전라도 옥백미(玉白米) 맛이다.라는 속담이 생겨나기도 했다. 즉 전라도 만경평야에서 생산되는 쌀로 지은 맛있는 밥을 이르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맛있는 쌀의 대명사가 바로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던 쌀이었지만 지금은 그 명성을 다른 지역으로 넘겨주고 말았다.이렇듯 국가 경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호남평야가 지금은 그 역할을 다른 여러 것들에 넘긴 채 넓은 평야로서만 존재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정치가로 정여립 사건 당시 희생되었던 이발은 김제 일대의 가을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성곽 둘레의 연꽃은 비를 재촉한다. 들에 가득한 벼이삭은 가을 하늘에 상긋거리네. 만물은 가고 만물이 다시 온다. 그러한 우주의 이치 속에서 오늘도 지평선에서 해가 뜨고 지평선으로 해가 진다. 그러나 제천의 의림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세월 속에 그 모습이 변형된 벽골제는 장생거를 비롯한 몇 가지 유물만 남긴 채로 남아 있다. 지금이라도 벽골제를 원형대로 복원하여 호남평야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만들 수는 없을까?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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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18 23:02

[⑬사람이 살만한 곳 부안 우반동] 아름다운 포구와 절경의 산수…유유자적한 삶을 찾다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가 있을 것이다. 세상을 잊고 유유자적하면서 살고 싶은 곳, 그런 곳이 나에겐 유난히 많다. 그것은 나라 곳곳을 수십 년 간 떠돌아다니며 섭렵했기에 가능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온 천하를 내 집이라고 여기기 때문인데, 그 중에 한 곳이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이다. 우동리는 본래 부안군 임하면 지역으로 우반동의 동쪽에 있으므로 우동 또는 동편이라고 하였는데, 만화동 동쪽에 있는 계룡산에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하며, 우동에서 성계안으로 가는 고개인 버디재는 옥녀봉(421)이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이므로 이곳은 베틀의 버디(바디)라고 한다. 우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인 성곗골은 선계사(仙啓寺)라는 절터가 있었다. 그 절터에는 8미터쯤 되는 돌탑이 서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춧돌만 흩어져 있다. 이 절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팔도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공부를 할 때, 아름다운 변산이 보이는 이곳에 암자를 짓고서 두 사람의 선생을 모시고 글과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동국여지지〉에는 이곳의 수려한 풍경이 잘 소개되어 있다. 변산(邊山)의 동남쪽에 있는 우반동은 산으로 빙 둘러 싸여 있으며, 가운데에는 평평한 들판이 있다. 소나무와 회나무가 온 산에 가득하고 봄마다 복사꽃이 시내를 따라 만발한다. 또한 조선중기의 문신인 권극중은 변산의 우반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찬탄하는 글을 남겼다. 변산의 남쪽에 우반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아름다운 포구와 산수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비운의 혁명가이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공주목사에서 파면 된 뒤에 이곳 우반동에 왔다. 그는 김청(金淸)이라는 사람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우반동의 골짜기에 지은 정사암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 때 정사암중수기라는 글을 지으면서 우반동의 수려한 경치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해변을 따라서 좁다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가서 골짜기로 들어서니 시냇물이 옥구슬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덤불속으로 쏟아진다. 시내를 따라 채 몇 리도 가지 않아서 곧 산으로 막혔던 시야가 툭 트이면서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들이 마치 봉황과 난새가 날아오르는 듯 치솟아 있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동쪽 등성이에는 소나무 만 그루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나는 세 사람과 함께 곧장 거처할 곳으로 나아가니 동서로 언덕 셋이 있는데, 가운데가 가장 반반하게 감아 돌고 대나무 수백그루가 있어 울창하고 푸르러 상기도 인가의 폐호임을 알 수 있었다. 남으로는 드넓은 대해가 바라보이는데 금수도(金水島)가 그 가운데 있으며, 서쪽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서림사(西林寺)가 있는데, 승려 몇이 살고 있었다. 계곡 동쪽을 거슬러 올라가서 옛 당산나무를 지나 소위 정사암이라는데에 이른다. 암자는 겨우 방이 네 칸이고, 깎아지른 듯한 바위 언덕에다 지어놓았는데, 앞에는 맑은 못이 굽어보이고 세 봉우리가 마주 서 있다. 나는 폭포가 푸른 절벽에서 쏟아지는데, 마치 흰 무지개처럼 성대하였다. 시내로 내려와 물을 마시며 우리 네 사람은 머리를 풀고 옷을 벗은 후 못가의 바위위에 걸터앉았다. 가을꽃이 막 피기 시작하였고 단풍잎이 반쯤 붉게 물들었다. 저녁노을이 서산에 걸리고 하늘 그림자가 물위에 드리워졌다. 물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를 읊고 나니 문득 속세를 벗어난 기분이었다.(중략)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다행이 건강할 때 관직을 사퇴함으로써, 오랜 계획을 성취하고 또한 은둔처를 얻어 이 몸을 편케 할 수 있으니, 하늘이 나에 대한 보답도 역시 풍성하다고 여겼다. 소위 관직이 무슨 물건이기에 사람을 감히 조롱한단 말인가△그대의 집은 곧 나의 집이니허균은 이곳 우반동에 있는 집인 산월헌(山月軒)을 두고 기(記)를 남겼는데 그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이곳 우반동 부근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부안의 봉산을 몹시 기꺼워하여 그 산 기슭에 오두막이나 짓고 살려고 했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산 가운데 골짜기가 있어 우반(愚磻)이라 하는데, 거기가 가장 살만하다 하였으나, 역시 가서 보지는 못하고 한갓 심신만 그리로 향할 뿐이었다.무신년 (선조 41년.1608) 가을에 관직에서 해임되자, 가족들을 다 데리고 부안으로 가서 소위 우반이란 곳으로 나아갔다. 경치 좋은 언덕을 선택하여 나무를 베어 몇 칸의 집을 짓고 평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더니, 일이 미처 마무리되기도 전에 당시의 여론이 나를 조정에 용납하치 않을 뿐 아니라 시골에 사는 것도 허용하지 않으려 하여, 무리가 모여 함께 헐뜯어 대었다.태평세상을 만났는데도 도원(桃源)의 뜻을 품었으니 너무도 옳지 않다. 하여 마침내 나를 끌어다가 북쪽으로 가게 했다. 그 승지(勝地)를 돌아다보면 마치 천상에 격해 있는 것 같으니, 아아, 명이란 어찌하랴.그가 짓고 살고자 했던 곳에 지은 구인기라는 사람이 집을 짓고 허균에게 가(記)를 부탁하며 쓴 글을 보면 그 일대가 마치 손에 잡힐 듯이 들여다보인다.그 거처에 몇 칸의 집을 지었는데, 지형은 탁 트여 밝고 깊숙하였으며, 서쪽으로는 봉산이 바라 뵈는데, 아침 구름과 저녁 안개가 삼킬락 말락 밝을락 말락 하여 책상머리에 교태를 부리고, 남으로는 두승(斗升). 소요(逍遙)등 여러 산이 눈 아래에서 빙 둘러 떠받치고 있으며, 큰 바다가 그 남쪽을 지나는데 파도가 거세게 일어 하늘까지 닿을 지경이고, 밀물이 포구에 들면 마치 영서(靈胥. 물의 신)가 흰 수레에 백마를 몰고 오는 것 같지요, 나는 그 가운데 종일토록 기대어 누웠다가 매번 달이 떠오르는 것을 기다려 숲속을 산책하면서 그림자를 끌고 배회하는데, 서늘하여 마치 얼음 항아리나 은궐(銀闕. 신선이 사는 곳)에 들어 간 듯 하여 몸과 마음이 모두 상쾌하지요. 그러므로 나는 이를 몹시 즐거워하여 그 집에 편액을 산월(山月)이라고 달았소. 허균은 다음과 같이 그 글에 답했다. 내가 거처하고 싶었던 곳인데, 그대가 먼저 살게 되었으니 그곳을 몹시 즐거워하는 것이 나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인즉 내가 어찌 그 글 못함을 사양하겠소, 더구나 바라보니 경치가 아름답고 풍연이 곱다는 것은 내가 비록 그대의 집에 오르지 않더라도 이미 십중팔구는 대략 알고 있소, 은사(恩赦)가 내린 후에 응당 곧바로 옛 골짜기로 향해 가서 그대와 함께 화산의 반쪽을 나누어 갖고 나의 목숨을 바칠 것인즉, 그대의 집은 곧 나의 집이니 어찌 감히 즐거운 말을 만들어 집을 호사시키지 않을 리가 있겠소. △유형원과 허균이 좋아했던 마을허균이 그 뒤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 은거한 한 채 글만 썼더라면 다산보다 더 많은 저작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운명이란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라서 타의에 의해서 다시 벼슬길에 나아간 허균은 결국 반역죄로 비운의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으니, 이곳 변산의 우반동에 큰 흔적을 남긴 인물이 바로 조선 숙종 때의 실학자인 반계 유형원이다. 유형원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였다. 서울에서 살았던 그가 이곳으로 이곳에 살면서 학문을 연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 우반동에 집안의 농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관이 문화(文化)이고, 자는 덕부(德夫)이며 호는 반계(磻溪)인 유형원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7세에 〈서경(書經)〉과 우공기주편(禹貢冀州編)을 읽자 사람들이 매우 감탄하였다고 한다. 1653년(효종 4)에 부안현 우반동(愚磻洞)에 정착한 그는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심하면서 나라곳곳을 유람하였다. 1665년, 1666년 두 차례에 걸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농촌에서 농민을 지도하였다. 그는 구휼(救恤)을 위하여 양곡을 비치하게 하고, 큰 배 4, 5척과 마필(馬匹) 등을 비치하여 구급(救急)에 대비하게 하면서《반계수록(磻溪隨錄)》을 저술했다. 유형원의 사상은 훗날에 이익(李瀷)홍대용(洪大容)정약용(丁若鏞) 등에게 이어져 실학(實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선인만이 살 수 있는 곳유형원의 조부인 유성민(柳成民)은 선대로부터 이어 내려온 우반동의 땅을 농장으로 만들어서 후손들이 이곳에 와서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게 하였다. 그 뒤에 유성민은 우반동 김씨라고 불리는 김씨들의 현조(顯祖)중의 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김홍원(金弘遠)에게 땅을 방매(放賣)하면서 매매문서를 작성해 주었다.대저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앞은 툭 트여 있으며, 조수가 흘러들어 포(浦)를 이룬다. 기암괴석이 좌우로 늘어서 있는데 마치 두 손을 공손히 마주잡고 있거나 혹은 고개를 숙여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혹은 나오고 혹은 물러나 그 모습이 변화무쌍하다. 아침의 노을과 저녁의 노을이 자태를 드러내면 이곳은 진실로 선인(仙人)만이 살 곳이요, 속객(俗客)이 와서 머무를 곳은 아니다.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장천(長川)이 북에서 흘러나와 남으로 향하니 이로 말미암아 동서가 자연히 나뉘는데 이 장천이 또 하나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그 때 매매문서에 실려 있는 글인데, 마치 그 당시의 풍경을 눈으로 보는듯하게 세밀히 묘사되어 있다. 이곳 우동리에는 유형원이 서당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는 서당이 있고, 서당골 북쪽 산 중턱에 있는 큰 바위가 있고 그 아래 큰 굴이 있다. 이곳에 불을 때면 그 연기가 산내면 해창으로 나온다고 한다. 그 당시 전화도 없던 시절인데 어떻게 몇 십 리 밖에서 불을 때는 걸 알고 연기가 나오는 것을 알았는지 모를 일이다.이곳 우반동 주변의 경치를 우반십경이라고 지은 사람이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냈던 사암思菴 박순朴淳이다. 사포의 떠들썩한 상선, 죽도의 고기잡이 등불, 검무포, 수군의 저물녁의 호각소리, 수락사의 새벽종소리, 선계의 맑은 폭포, 배고개의 울창한 소나무 숲, 황암의 고색창연한 고적, 창굴암의 고승, 심원에 노니는 사슴, 어살 가득한 고기잡이었다. 옛 사람들이 보았던 우반동의 풍경은 사라진지 오래인데, 그 당시의 풍경으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우동리 당산제이다. 이 마을의 당산은 전형적인 솟대 당산으로서 오리솟대오리수살대오리살대 등으로 불리고 있으며 부안군 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행사이다.이곳에서 내 변산으로 넘어가는 도로를 만들면서 마을 뒷산의 산허리가 크게 잘려나갔고, 우동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계곡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기암괴석들은 물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사라지고 훼손되기도 했지만 바로 근처에 아름다운 곰소항과 내소사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다. 마음만 먹으면 45키로미터 부근에 있는 내소사에 찾아가서 그 울울창창하게 늘어선 전나무 숲길을 거닐기도 하고 검을 현玄자와도 같은 가물가물한 내소사의 문살을 바라보기도 하며, 저물어가는 곰소항에서 하염없이 선운산 쪽으로 뻗어나간 줄포만을 바라보아도 좋은 곳이 우반동이다.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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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11 23:02

[⑫남고산성 거닐며 역사를 회고하다] 후백제 견훤…고려 정몽주…조선 이정란 발자취 따라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산성인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소식에 기쁨이 앞서면서도 서운한 것은 그 무슨 연유인지,몇 년 전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에 초청을 받아 남한산성에서 강연을 했던 적이 있다. 셀 수도 없이 답사한 남한산성을 그들과 함께 답사하며 줄곧 떠올랐던 곳이 남고산성이었다. 전주를 굽어보는 남고산성을 전주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답사했을까를 생각하면 못내 가슴이 아파지지만 어쩌겠는가?아직도 우리 지역의 대표적 산성인 남고산성이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은 보여주면 안 될 알 수 없는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고산성(南固山城)은 전주시 동서학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축산성으로 사적 제 294호로 지정되어 있다. 둘레는 3,024m로 현재 성문지와 장대지(將臺址)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있다. 일명 견훤산성(甄萱山城) 혹은 고덕산성(高德山城)이라고도 불리는 남고산성은 고덕산의 서북쪽 골짜기를 에워싼 포곡형(包谷形) 산성이다.그렇다면 성을 쌓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모든 성곽은 원래 맹수나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흙나무벽돌 등으로 높이 쌓아올린 담장과 같은 장애물을 말한다. 또한 성곽(城郭)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성과 외성의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성(城)은 내성만을 가리키는 것이다.성곽은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축조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기원전 1~2세기 경부터 이러한 시설물들이 나타났다.〈사기(史記)〉를 보면 한(漢)이 위씨 조선(衛氏朝鮮)을 공격하는 부분에 위씨 조선의 도심인 왕검성(王儉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성곽을 쌓는 기술은 곧 국가발전의 척도로 여겨질 만큼 국가 차원에서 중요시 했던 것이었다.삼국시대에는 세 나라 모두가 국가 차원에서 국가의 중요인물을 책임자로 내세운 다음 15세 이상의 남녀를 징집하여 성을 쌓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국가에 성을 쌓는 전담부서를 두어 성을 축조하였다.성곽은 대체로 성곽을 축성한 재료가 무엇이냐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는데 나무를 땅에 가로 세로로 단단하게 엮어 방어시설을 설치한 성이 목책성(木柵城)이고 흙으로 쌓은 성은 토성(土城)이다. 돌로 쌓은 석성(石城)과 흙과 돌을 함께 사용하여 축조한 토석혼축성, 벽돌로 쌓은 전축성(傳築城) 등으로 분류되며 성곽이 축조된 지형에 따라 산성(山城), 평지성(平地城), 평산성(平山城), 장성(長城)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남고산성은 901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전주부윤 이정란이 이곳에 입보(入保)하여 왜군을 막을 때 수축하였다. 그 뒤 1811년(순조 11)에 관찰사 이상황이 중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박윤수가 관찰사로 부임한뒤 완성한 것이다. 숙종 때 완주소양의 위봉산성에 이어 진(鎭)이 설치되었고, 성내에는 진장(鎭將)이 머무르는 관청과 창고화약고 등이 있었다. 남북에 장대(將臺)가 있으며, 문은 동쪽과 서쪽에 있었다. 서쪽에는 암문(暗門)이 하나 있었고,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포루(砲樓)가 있었으며, 특히 천경대만경대와 같은 절벽이 있는 자연적 요새를 이용하였다. 남아있는 북문지는 석축만 남아있는데, 너비 3.4m, 높이 1.2m이며, 세 봉우리에는 각각 10㎡의 장대지가 있다. 성내에는 연못이 네 군데나 있었고, 우물이 25개나 되었으며, 영조 때의 기록에 의하면 둘레 2,693보(步), 여장 1,946척이고 성 안에 민가 100여 채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성내에는 남고사와 관성묘가 있고 조선후기의 명필로 알려져 있는 창암 이삼만의 글씨로 남고진의 내력을 기록한 남고진사적비(南固鎭事蹟碑)가 남아있다.1911년 발간된 완산지에는 남고산성이 완성되고 진이 설치된 시기가 1813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천경대에서 산성 안을 내려다보니 관성묘가 보인다. 암문은 성의 구석지고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만들어 놓은 비밀 문이다. 정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지만 평시에는 성벽과 다름없이 막아 두었다가 전시에는 적의 눈을 피해 구원요청을 하거나 적을 기습하는 전술상 통로라고 볼 수 있다.크기도 작아 문루도 양쪽으로 여는 형태이기보다는 한쪽으로 여닫는 구조가 많은데 작은 우마차 정도가 지나갈 정도라고 한다.남고산성을 따라가는 길은 고덕산으로 가는 등산로이다. 이규보의 기(記)에, 고덕산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보덕(普德)의 자는 지법(智法)인데 고구려 반룡산의 연복사에 거하였다. 하루는 갑자기 제자에게 말하기를, 고구려는 도교만을 숭상하고 불법을 존숭하지 않으니 이 나라는 반드시 오래지 못하리라. 몸이 편히 피란할 곳이 어디 있을까하니, 제자 명덕이 말하기를, 전주의 고달산이 안주하여 움직이지 아니할 곳입니다.하였다. 보장왕 26년 정묘 3월 3일에 제자가 문을 열고 나가보니 집은 이미 고달산에 옮겨져 있었으니, 반룡산으로부터 1천여 리나 떨어진 곳이다. 명덕의 말이, 이 산이 비록 뛰어나긴 했으나 샘물이 말라 있다. 내 만약 스승께서 옮겨오실 것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반룡산의 샘도 옮겨왔을 것을하였다역사 속에서 고구려의 불교가 백제의 땅으로 망명해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고덕산은 그들이 내려와 지었다는 경복사터를 품에 안은 채 저만치 있고 남측성벽 끝 포루가 있던 곳에서 고덕산으로 가는 길과 억경대 가는 길이 나뉜다.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는 고덕산으로 향하는 산악자전거 일행들이 힘겹게 페달을 밟으며 지나간다. 그 아랫부분에서 남고산성은 제 북장대에 이르고 건너편에 치명자산이라 불리는 승암산이 보이며 그 산 너머 기린봉이 있으며 후백제를 창업한 견훤의 별궁터라고 알려진 동고산성이 있다.억만 가지가 보인다고 하는 억경대에 올라서면 빼곡이 들어선 아파트 숲 건너로 완산칠봉이 보이고 더 멀리 황방산이 흐릿하게 펼쳐져 있다. 이곳 억경대에서 곧바로 내려가면 좁은목 약수터가 있는데 지금은 남원으로 순천으로 가는 길이 사통팔달로 뚫려 있다. 하지만 옛날이야 전주천변에 작은 길이 나 있었을 것이다. 내려가는 성벽 길은 가파르고 성 안쪽 남고사에서 목탁소리 들린다.전라북도 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되어 있는 남고사지의 본래 터에 세워진 남고사는 보덕화상의 수제자였던 명덕화상이 창건하였다. 원래는 남고연국사라고 하였으나 뒷날 남고사라고 하였다가 다시 남고사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남고사는 고려시대까지는 교종계열의 사찰로 내려오다가 세종 때 모든 종파의 불교가 교(敎) 선(禪) 양종으로 통합되어 48개의 사찰만 공인하게 되었을 때 탈락된 뒤 사세가 크게 위축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선종이 주류를 이루게 되자 선종계의 사찰이 되었다. 남고사터는 현재 대웅전과 요사채 그리고 사천왕문이 있으며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우측에 약사여래불을 봉안되어 있다. 전주 팔경 중의 하나인 남고사에서 들리는 저녁 종소리를 언제쯤 듣게 될까?천천히 내려간 남고사로 오르는 길이 있고 성벽 옆에 남고진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조금 가파른 돌계단 길을 오르면 만경대에 이른다. 전주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 뵈는 봉우리인 만경대에는 동포루가 있었던 곳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만경대=고덕산 북록(北麓)에 있다. 돌 봉우리가 우뚝 솟아 마치 층운(層雲)을 이룬 듯이 보이는데,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사면으로 수목이 울창하며 석벽은 그림 같이 아름답다. 서쪽으로 군산도(群山島)를 바라보며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한다. 동남쪽으로는 태산(太山)을 지고 있는데 기상이 천태만상이다.천인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올라오니 품은 감회 이길 길이 없구나. 청산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니 부여국이요, 황엽이 휘날리니 백제성이라. 9월 높은 바람은 나그네를 슬프게 하고, 백년 호기는 서생을 그르치게 하누나. 하늘 가로 해가 져서 푸른 구름이 모이니, 고개 들어 하염없이 옥경(玉京)을 바라보네. 포은 정몽주의 시다. 포은이 이 시를 남긴 이유를 전주사람들은 아래와 같이 알고 있다. 고려 말에 이성계 장군이 지금의 남원시 운봉면 황산에서 왜구들을 크게 물리친 일이 있었다. 그 전투가 유명한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이다.왜구들을 무찌른 이성계가 전주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오목대에서 전승의 기념으로 큰 잔치를 베풀면서 고려를 엎고 조선을 개국할 뜻을 피력했다고 한다. 이때 종사관으로 함께 참석했던 정몽주가 말을 달려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당시 서울인 개경을 바라보며 지은 시가 지금도 바위벽에 그대로 남아 있어 보는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이성계가 양광, 전라 경상도로 순찰사가 되어 왜구를 무질렀던 때가 1380년이었는데 정몽주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성계가 무사했을 리가 있었겠는가?다만 나라가 자꾸 황혼녘에 접어드는 것을 느낀 정몽주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생각하며 지은 시가 조선시대에 또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인 결과일 것이다.만경대의 바위벽에는 만경대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고 바로 아랫부분에 포은 정몽주의 시가 새겨져 있어 700여 년 전의 그 날을 생각게 할 따름이다. 만경대에서 남문 터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기 이를 데 없고 서암문터에는 지대석 두어개 남은 위에 새로 쌓여진 돌들이 생경하게 있을 뿐이다. 산성별장 이신문의 영세불망비가 망부석처럼 서있고 여정은 관성묘(關聖廟)로 향한다. 옛날 관성묘 부근에 남고진 관아가 있었고 개울 건너에 화약고가 있었다고 한다. 관성묘 입구에는 하마비가 서있다. 대소인원을 막론하고 이곳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하마비를 지나 돌 계단길을 오른다. 관성묘는 중국 촉한의 장군이었던 관우를 무신으로 받들어 제사하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친 데에는 관우의 덕이 컸기 때문이라고 여겨 임진왜란 중에 관성묘가 많이 세워졌는데, 조선후기에 그 폐해가 너무 심했다. 숙종 때 태어나 영조 때까지 살았던 남유용이 지은 〈뇌연집〉에 그 당시의 상황이 실려 있다.명나라 장수들이 관우묘를 짓고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한 것인데, 요사이는 어리석은 지아비나 아낙네들이 어제보다 더 많은 피륙과 돈을 바치니 이는 오히려 관우를 욕보이는 것이다. 관우묘를 찾는 이들이여, 모름지기 자숙할지어다. 남고산성 안에 있는 관성묘는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과 산성별장 이신문의 발기로 1895년에 건립되었다. 서울에 두 곳, 경주와 남원 등 다섯 곳에만 남아 있다. 천천히 걸어서 당도한 충경사는 이정란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전주에서 7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남고산성과 만경대 등에 복병을 배치 고바야가의 침입을 막았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충경공(忠景公)이라는 시호를 얻었던 인물로 대동사상을 주창했던 조선시대 혁명가 정여립과 인척관계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미움을 받아 한직으로만 내몰렸던 그는 전주성 수호의 영웅으로 남아있고 정여립은 신원도 되지 못한 채 역사 속에 묻혀있을 뿐이다. 전주에 살면서도 남고산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전주에 산재한 역사문화유산을 많이 찾고 사랑하는 것이 전주 사랑의 지름길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 남고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을 만들어 남고산성을 보존하고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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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04 23:02

[⑪ 바다에서 배운 것들] 고된 삶에 지친 나에게 푸르른 바다는 희망이었다

내가 처음 바다를 본 것은 내 나이 열다섯 살, 초가을이었다. 토끼와 발맞추고 사는 심신산골 진안이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일찍 세상에 환멸을 느낀 나는 출가를 결심했다. 어렵게 도착한 화엄사에서 두어 달을 지낸 어느 날이었다. 스님이 방안에서 나를 불렀다. 얘야, 힘들지 않느냐. 예 힘들지 않습니다. 한 참 동안 나를 바라보고 계시던 그 스님이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내가 너를 예의 주시해 보았는데, 너는 아무래도 절에는 맞지 않고 세상에 나가서 사는 게 좋겠다.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내가 처음으로 선택한 길,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막바지라고 찾아온 곳에서 나가야 되다니,내 생각은 아랑곳 없이 스님의 말은 이어졌다. 물론 네가 큰마음 먹고 찾아와 두어 달 동안을 머문 이곳에도 길이 있지만 사람의 마음이나 생김생김이 제각각 다르듯이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단다. 네가 건너가야 할 수많은 길이나 강(江)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데 있는 것 같다그리고 세상에선 누구나 혼자란다. 그 혼자의 길을 가거라, 가서 세상의 바다를 헤엄쳐 보아라.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나는 절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고, 구례구 역으로 가는 길목에서 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여수에서 그 푸른 바다를 본 뒤 배를 타고서 부산에 도착하여 다시 생각하자.열차로 여수까지 내려가 하룻밤을 역 건물에 기대어 지내고 그리고 아침에 바다를 난 생 처음 보았다. 바다에서의 아침은 세상의 처음을 보는 것과 같다는 알베르 카뮈의 말과 같이 푸른빛으로 신비롭게 펼쳐진 바다, 파도는 지치지도 않고 줄기차게 일렁이고 있었다.고려 때의 문장가인 이규보가 푸른 물이 하늘에 닿은 듯, 하늘에 물에 닿은 듯, 엷은 구름이 안개인 듯, 안개가 구름인 듯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바다는 현실이 아니라 환상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 넓은 바다에서도 사람들의 삶이 펼쳐지고, 그리고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 때 나를 주눅 들게도 했지만, 일면 설레게도 했다. 그 순간 역경에 처했을 때 가슴이 뛴다.고 말한 니체의 말을 이해했던 것은 아닐까?하여간 여수항에서 갯바람 속에 섞여 있는 비린내를 맡으며 바다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은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라서 나는 순간순간 나 자신에 회의했고, 그래서 여수에서 한려수도를 지나 통영으로 가는 뱃전에서 뛰어 내리고 싶었다. 저는 수없이 자살하려고 했지만 삶에 대한 미련이 더 컸어요. 이 어이없는 약점은 아마도 우리 인간들의 가장 운명적인 특색인 것 같아요. 언제든지 내 버릴 수 있는 짐을 줄곧 지고 다니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요? 볼테르가 〈깡디드〉에서 토로한 것처럼 그러나, 그러나 하고 머뭇거리다가 바다에 용기 있게 뛰어내리지도 못한 채 통영에 닿았다.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라고 백석 시인이 노래했던 아늑한 항구, 그 통영에서 떠올랐던 생각이 좀 더 좀 더 살아보자.였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고 노래했던 발레리의 마음도 내 마음과 비슷했을 것이다.충무에 도착하자 배에 오른 사람들이 충무 김밥 있어요,하고 지나갔고 나는 그곳에서 충무김밥이라는 것을 최초로 맛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대책도 없고, 희망도 없는 나를 살게 했던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은 행복이지만, 젊다는 것은 진정한 천국과도 같다.고 썼던 워즈워스의 아름다운 시 한 소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뒤로도 나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무엇 하나 시도해보지도 못한 채 책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군대에 입대해 중부전선의 철원에서 군 생활을 했고, 군대를 제대 한 뒤 절망적인 상황이 극에 달했다. 배운 것도, 기댈 것도 없는데, 망망대해에 작은 돛단배처럼 던져진 생, 이렇게 사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그 자괴감, 그때의 내 상황이 어쩌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인 〈햄릿〉과 비슷했다.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고 참고 견디는 것이 보다 고상한 정신인가, 아니면 바다처럼 많은 고통을 두 팔로 견뎌내고 그것들을 대결로써 끝장내는 것이 보다 고상한 정신인가?내 운명은 평탄하지 않았다. 내가 모든 것을 걸고 쓰고자 했던 글은 쓰여 지지 않았고, 이도 저도 안 되던 시절, 배를 탈까도 싶었다. 허만 멜빌의 소설〈모비딕〉에서 에이허브 선장처럼 흰 고래를 찾아서가 아니고 오직 푸른 파도에 온 몸을 내 맡기고 큰 바다를 떠돌다보면 이어도 같은 이상향이 보이지 않을까 마음먹었던 것이다.소설 속에서 백경을 찾아 헤매는 에이허브 선장이 이것은 잡을 수 없는 삶의 망상이다. 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 당시 나의 꿈들은 잡을 수 없는 신기루였는지도 모른다.그러나 세상은 이렇게 저렇게 흘러 내 본래의 꿈을 허우적대며 따라가는 상황으로 전개되어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의 꿈은 내세에나 가능하게 되었다.꿈꾸던 것이 하나하나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기도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어떤 것들이 소리도 없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일종의 암시이기도 하다. 그 뒤로도 어딘가 빈 듯, 가슴이 허전할 때마다 내 발길은 바다로 향했다. 바다는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모성적(母性的)상징 가운데 가장 크고 변하지 않는 것 중의 하나라는 말은 진실이다. 바다는 언제나 타향을 헤매다 돌아온 자식처럼 다시 찾아간 나를 변함없이 맞아 주었다. 바다는 가끔씩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할 때도 있지만 항상 바람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박한 몇 척의 배에 매달린 깃발들이 흔들리고, 내 마음도 더불어 흔들리고, 흔들리는 수평선 너머 우리가 알지 못할 세상도 흔들리고 있었다. 걸어가며 부르는 노랫가락도 흔들리고, 흔들리는 것들 외에 그 어떤 것도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 나는 사고(思考)를 시작하면서부터 흔들리는 것들을 사랑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수많은 길을 걸으며 길을 잃었고, 길은 잃을수록 좋다는 하나의 명제를 터득했다. 길을 잃어야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고, 그래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흔들림 없이 견고해지 않는 다는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흔들리는 바다를 바라볼 때 문득 떠오르던 시가 박재삼 시인의 〈바다에서 배운 것〉이라는 시였다.고향 앞바다에는, 꿈이 아니라고 흔드는, 수만 잎사귀의 미루나무도 있고, 미칠만하게 흘러내리는, 과부의 찬란한 치마폭도 있고, 무엇도 있고, 무엇도 있고, 바다에서처럼 어리벙벙하게, 많이 있는 것은 없는가그 시를 가슴 아리게 읊조리며 바다가 보이는 산길을 걸었다. 바다 멀리 수평선을 넘어가는 한 척의 배, 그 사이에 일렁이는 물살이 마치 들녘에 어른거리는 아지랑이와 같이 보였다.매 순간 쉬지 않고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의 움직임, 그 움직임을 따라 끝없이 변모해가며 파도는 포말 져 부서져 내리는데, 지금의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그 때 나에겐 스피노자가 말했던 울지 마라, 화내지 마라, 체념하라라는 암담한 절망감이 한 시도 떠나지 않았었다. 그것이 극에 달해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찾았던 곳이 바로 제주시 사라봉 아래 자살바위였다. 바다는 나의 절망 나의 체념을 다 받아줄 것 같았다. 나는 그곳에서 자살하고 싶었다. 그 시절의 상황을 나는 다음과 같이 썼었다. 푸르디푸른 젊은 시절, 제주도 제주시 북쪽 해안가에 있는 사라봉에서 시퍼렇게 입을 벌린 듯 일렁이는 바다를 보았지. 오랜 세월을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떨어지는 꽃잎처럼 몸을 날렸다는 일명 자살바위 사라봉 깎아지른 절벽 아래 파도는 그침이 없이 반복적으로 철썩거리고 있었지. 그곳에선 단 한번 몸을 던지면 자유(自由)가 되는 경이(驚異)를 느낄 수도 있었지, 하지만, 하지만 하면서 망설이다 돌아서던 그 사라봉.그러나 용기가 없기도 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 때 죽어야 될 운명은 아니었던지, 나는 마지막 순간에 뛰어내리지를 못하고 항상 자취집으로 되돌아갔다. 검푸른 바다에서 나만 그런 자살의 유혹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소설가 이문열도 세상에 절망하여 동해 바닷가 한적한 대진 항에서 생을 마감하고자했다. 하지만 거센 물결과 싸우는 갈매기를 바라보며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자전적 소설인 〈젊은 날의 초상〉중 그해 겨울에 그 순간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돌아가자. 이제 이 심각한 유희는 끝나도 좋을 때다.(중략)그러나 갈매기는 날아야 하고, 삶은 유지돼야 한다. 갈매기가 날기를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갈매기가 아니고, 존재가 그 지속을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존재가 아니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바다는 끊임없이 살아서 소리친다. 강하게 살아남으라, 한 치의 타협도 없이라고, 단말마의 비명을 내 지른다. 파도소리는 그런 의미에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복음서나 다름없다.〈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바람과 파도는 항상 유능한 항해사의 편이 된다. 고 말했다. 스윈번 역시 〈이별의 발라드〉라는 글에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바다가 주는 긍정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나를 키운 것은 바다, 초록빛 거품이 이는 영불해협에, 내 마음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견고하게 맺어져 있다. 나를 위해 바다는 너그러운 가슴을 벌리고, 그지없이 장중한 사랑의 노래를 시작하며, 태양이 빛을 아주 마음껏 뿌리도록 명령하고, 그토록 기분 좋은 격렬한 나팔소리를 나를, 위해 울리게 하는 것이다. 바다는 그런 곳이다. 세상의 모든 강물을 다 받아들이는 곳, 언제나 새로움만 가득한 곳, 그래서 가끔씩 삶이 쓸쓸하거나 허전할 때 바다로 나간다. 수천 년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이 파도소리로 들리는 바다, 그 바다에서 부서지고 부서지면서도, 계속 달려드는 파도의 움직임과 포효, 그리고 매일 장엄하게 뜨는 일출을 볼 수도 있는 바다로 나간다. 망연히 바라보는 망망한 물결 사이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그리고 눈이 내리는 경이롭다 못해 처연한 시간을 바다 한가운데에서 경험한 사람은 알 것이다. 바다는 매 순간이 연속적인 기적이고, 전쟁터이자,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며, 생각의 산실 이라는 것을.가끔씩 나는 생각했다. 진리는 변화라고, 그렇다면 그 진리에 가장 합당한 것이 무엇일까? 항상 머물러 있지 않고 흔들리는 바다야 말로 우리가 도달하기를 갈망하는 그 진리가 아닐까? 그러나 부조리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 흔들리기를 원하지 않고 평온하게 머물러 있기를 좋아한다. 알프레드 드 비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우리가 사랑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여야 할 것은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가고 오는 것이 우주의 이치이고, 그 이치에 따라 만물은 오고 만물은 돌아간다. 그렇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 누구라도 정지된 시간을 살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음의 평정을 누리는 시간은 손을 꼽을 만큼 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런 나날을 끊임없이 기다린다. 그렇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바다는 다음과 같이 속삭인다. 잠시 참으면 바람이 평온해지고, 물결이 고요해진다. (忍片時平浪靜 )한 발 물러서면 바다가 열리고 하늘이 맑아진다. (退一步海開天空).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 안달이 나면 격포나 군산으로 가고는 했다. 바다에 도착해서 푸른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 항상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중에 한 구절이 예리한 비수처럼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오! 이처럼 바다가 보고 싶었을까!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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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6.27 23:02

[⑩ 미륵산 사자암 지나 미륵사지 가는 길] 민초들 '佛心' 보듬은 곳…길 위에서 '미륵 세상' 꿈꾸다

호남평야를 바라보고 우뚝 서 있는 평지돌출의 산이 있다. 그 산이 익산의 미륵산이다. 미륵산, 미륵의 나라를 염원했던 사람들이 이 산 아래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미륵사라는 큰 절을 지었다. 모든 사람들이 갈망했던 미륵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 세상에는 계두성(鷄頭城)이라는 커다란 도시가 생길 것이다. 동서의 길이는 12유순(由旬:1유순은 40리 정도)이고 남북은 7유순인데, 그 나라는 땅이 기름지고 풍족하여 많은 인구와 높은 문명으로 거리가 번성할 것이다. 향기로운 비를 내려 거리를 윤택하게 하고 낮이면 도시를 화창하게 하리라. (중략) 저때에 염부제(인간 세계의 총칭. 현세의 뜻)의 땅 넓이는 동서남북이 10만 유순이나 될 것이며 산과 개울과 절벽은 저절로 무너져서 다 없어지고, 4대해(大海)의 물은 각각 동서남북으로 나누어질 것이다. 대지는 평탄하고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며, 곡식이 풍족하고 인구가 번창하고 갖가지 보배가 수없이 많으며, 마을과 마을이 잇달아 닭이 우는 소리가 서로 들리느니라. 아름답지 못한 꽃과 맛이 없는 과실나무는 다 말라서 없어지고, 추하고 악한 것 또한 스스로 다 없어져서, 달고 맛좋은 과실과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만 자라느니라. 글만 읽어도 행복한 마음에 웃음꽃이 피는 미륵의 세상을 염원하며 지어진 미륵산 자락의 사자암은 전북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미륵산의 남쪽 중턱에 있는 사찰로서 금산사의 말사이다.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백제의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있었던 사찰이다. 이 절에는 법력이 높았던 지명법사가 있어서 서동이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았고 뒷날 서동은 선화공주를 얻은 뒤 그가 가지고 있던 보물을 신라 궁중으로 보내기 위해 지명법사에게 신라로 수송할 계획을 물었다고 한다. 이때 법사는 신통력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 놓으니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보내주었다. 진평왕은 신비로운 조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사위인 서동을 존경하였고, 늘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기 때문에 서동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서린 사찰이다. 그러나 지명이 머물렀던 사자사가 오늘날의 사자암인지는 분명치 않다. 사자사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용화산 위에 있다. 두 바위가 벽처럼 솟아 있다, 내려다보면 땅이 보이지 않는다. 돌길이 갈퀴처럼 걸려 있는데, 길을 따라 올라가면 바로 지명법사가 거주하는 곳이다.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 지명법사는 보이지 않지만 암벽에는 사자동천(獅子洞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옛날의 그 정경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이 사자암에는 지은 지 오래지 않은 대웅전과 새로 황토로 지은 요사 채, 그리고 작은 삼층석탑이 세월 속에 마모된 채로 서있고 윤흥길의 작품에미에서 어머니가 불공을 드리러 갔던 절로서 한과 슬픔이 오롯이 배어 있는 절이다.한편 이절 가까운 곳에 있었다던 오금사(五金寺)에 대한 글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보덕성(報德城)남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薯童)이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감자를 캐던 땅에서 갑자기 오금(五金)을 얻었다. 뒤에 그는 임금이 되어 그 땅에 절을 짓고 오금사라 하였다. 천천히 오르면서 굽어본 미륵산 아래로 삼례, 전주의 너른 들판이 눈앞에 펼쳐지고, 그때 나는 보았다. 우리나라의 지도가 시대산(227m)자락에 펼쳐진 왕궁저수지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었다. 둑을 쌓고 만드는 과정에서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자연스레 땅의 형국이 우리나라를 저렇게 만들어 냈을 것이다. 최남단에 위치한 땅 끝 갈두리에서 부터 서산 간척지, 웅진반도 그리고 우리나라의 지도상에 호랑이 꼬리라고 이름 붙여진 장기곶에 이르기까지 나는 함께 산을 오르는 일행들을 불러 모아 국토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 길은 다시 미륵산으로 이어지고 조금 오르자 만나는 바위가 미륵산에서 가장 전망 좋은 곳으로 알려진 전망대 바위다. 가깝게 혹은 멀리 서방산, 종남산 너머 운장산이 펼쳐지고 건지, 완산, 황방산 자락의 전주가 한눈에 들어서며 모악산(794m)이 조망된다. 멀리는 마한의 땅이었고, 백제의 견훤이 후백제로 이어지다가 고려를 지나서는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관향으로 자리했던 곳이 이곳 전라도였다.끝없는 상념을 접어둔 채 바위 난간에 기대고 서 있다가 다시 길을 재촉하여 10여분쯤 오르자 미륵산 정상이다. 호남평야가 산 아래에 펼쳐지고 날이 맑은 편인데도 서해바다는 보이지 않고 웅포. 용안 쪽으로 금강의 물줄기가 희미하게 보인다. 그리고 천호산 너머 대둔산이 포착되다가, 다시 눈을 돌리자 구름위에 보이는 연봉들 충남의 계룡산이다. 백제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죽은 계백은 황산벌판의 구석진 곳에 한 개의 무덤으로 남아있고 가련토다. 완산애기 애비 잃고 눈물짓네.라는 참요만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견훤은 연무읍 금곡리에 전주 땅을 바라보며 잠들어 있다. 56억 7000만년 후에 온다는 미륵의 세상이여, 과연 그날이 올 날은 언제이며, 꼭 오기나 하겠는가? 나는 의문점을 안고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하산 길은 사자암에서 갈라진 길을 택한다우리국토 중 가장 넓은 평야 호남평야가 텅 빈 채로 나타나고 그 가운데 점점 히 박힌 사람 사는 마을들을 바라보며 내려가는 길에 산을 오르고 내려가는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길은 평탄하게 이어지고, 바윗길을 내려서면 냉정약수터에 이른다.금마지에 의하면 이 물에 목욕을 하면 부스럼이 잘 낳고 미륵산의 정기를 받았기 때문에 정력수로 이름이 높다는 이물을 떠 담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이어 서 있다. 우리들 역시 목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그 물을 마셨지만 사자암 물이나 이 물이나 거기가 거기 아닐까?찻길을 따라 내려서면 겨울도 푸르른 대 숲길이고 그 길을 벗어나면 나타나는 넓은 절터가 미륵사터다.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미륵사지에 얽힌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의 어머니가 서울의 남지란 연못에 집을 짓고 홀어미로 살더니 그 못의 용과 상관하여 그를 낳았는바, 아명은 서동이다. 그는 평소에 마를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그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서 서울로 와서 동리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 먹였더니 여러 아이들이 그에게 친하게 되어 따르게 되었다.그는 동요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달래어 노래 부르게 하였다.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서 서동이를 밤이면 안고 돈다.모든 관리들이 말썽을 피워 공주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되었다.그런 우여곡절 끝에 서동은 선화공주를 만나 인심을 얻어 임금이 되었다. 하루는 왕이 선화부인(善花夫人)과 더불어 사자사(獅子寺)로 가고자 용화산 아래 밑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미륵불 셋이 못 속으로부터 나타났다. 왕이 수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리자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여기다가 꼭 큰절을 짓도록 하소서. 저의 진정 소원이외다.왕이 이를 승낙하고 지명법사를 찾아가서 못을 메울 방법을 물었더니 법사가 귀신의 힘으로 하루 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리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미륵 불상 셋을 모실 전각과 함께 탑과 행랑채를 각각 세 곳에 짓고 미륵사라는 현판을 붙였다. 〈삼국유사〉를 토대로 익산에서는 서동과 선화공주를 주제로 매년 축제를 열었다, 그런데, 미륵사지를 발굴하다가 석탑 조성의 내력을 밝힌 금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가 발견되면서 그것이 설화로 판명된 것이다. 미륵사를 창건 했다고 알려진 사람이 선화공주가 아니고, 백제 무왕의 왕비이자 백제 최고관직인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밝혀진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던 백제와 신라가 사돈 관계를 맺었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는데, 그 사리봉안기를 통해 그 의문점이 풀린 것이다. 그에 따라 미륵사는 백제의 독자적인 기술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커졌으며,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결혼 자체에도 의문을 던지게 된 것이다.● 미륵사는 동양 최대 절터, 백제문화 집대성지금도 동양 최대의 절터라고 하는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 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도로 발휘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처럼 백제의 전 국력을 집중하여 창건하였기 때문에 백제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동서로 172m 남북으로 148m에 이르는 미륵사터는 넓이가 2만 5000 평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로서, 국보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 9층 석탑인 서 석탑과 1993년에 복원된 동 석탑 그리고 당간지주가 있는데 다른 절과는 달리 2기가 있다.하지만 미륵사가 어느 때 폐찰이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 정조 때 무장지역의 선비였던 강후전이 쓴 〈와유록(臥遊錄)〉에 의하면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에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100여 년 전에 부서 졌더라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대다수의 절들이 임진, 정유재란 때에 불타버린 것과는 달리 다른 원인에 의해서 폐사가 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그 후 미륵사의 발굴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 절터에는 논밭과 민가가 들어서 있었고 절의 석축들 대부분이 민가의 담장이나 주춧돌로 사용되고 있었다. 발굴결과 일연스님이 기록한대로 가운데 목탑을 두고 동서로 두 개의 탑이 있었고 각 탑의 북쪽으로 금당이 하나씩 있었으며 각기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이는 탑, 금당, 강당, 승방이 일직선상에 하나씩 배치되는 일반적인 백제계 탑과는 매우 다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특히 우리나라 탑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 주로 목탑이 건립되었다. 그러던 도중에 이 익산지역의 질 좋은 화강암을 가지고 미륵사탑을 만들게 되는데 이 탑을 만들면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석탑발생의 시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미륵사탑은 신라시대에 경주 감은사탑으로 이어지고 다시 석가탑을 통하여 완벽하게 완성된다. 이 탑은 일제 무렵에 허물어져 가고 있던 것을 시멘트로 떠받쳤기 때문에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 그렇게라도 살리고 보수하지 않았더라면 국보11호로 지정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남아 있는 서 석탑과 남아있는 상륜부의 노반을 토대로 컴퓨터로 정밀하게 계산하여 복원한 동 석탑이 세워졌는데 처음 세워졌을 당시만 해도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볼수록 그런대로 어색하지 않음은 익숙해진 탓일까?물론 천 삼백여년동안을 비바람과 세월의 무게로 얹어진 그 무게와 옛사람들의 지극한 불심이 만들어낸 서 석탑의 그 아름다움을 계산에 따라 기계로 잘라 만들어낸 동 석탑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지금은 서 석탑을 복원하느라 어수선한 미륵사지에서 9층으로 만들어진 동 석탑 사이사이에 끼어 넣은 옛 시절의 이끼 얹어진 석물들을 바라보며 그 옛날로 돌아가 보고 싶었다. 아 옛날이여! 그 날은 시간 속에 실제로 있었던 날들이었을까? 하는 생각 속으로 이태백의 〈춘야연도리원서〉가 그리움처럼 떠올랐다.무릇 천지는 만물이 쉬는 곳, 시간은 백대를 흘러가는 길손인데, 덧없는 삶은 꿈과 같으니, 즐거움인들 얼마나 될꼬.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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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6.20 23:02

[⑨ 완주 송광사 가는 길]'민중 예술' 품은 사찰…그곳엔 숨겨진 보물이야기가 있다

절의 들목에 벚꽃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절이 어디냐고 물을 때 나는 자신 있게 송광사라고 얘기한다. 그러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남 순천에 있는 조계산 송광사를 떠올리고 낙안읍성과 선암사를 들먹일 것이다. 그러면서 전주 인근에 이름이 같은 송광사, 송광사가 있다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절도 있었느냐고 반문하기 일쑤다. 도시 근교에 있으면서 금산사나 선운사 또는 내소사와 실상사에 가려 그윽하게 숨어있는 절 송광사는 전주에서 진안 가는 길 옆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종남산 아래에 있다.신라 경문왕 7년 도의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하고 그 뒤 폐허가 되었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선사(普照禪師)가 다시 세웠다고 하는데 송광사의 내력을 기록한송광사 개창비에는 이러한 내용의 쓰여 져 있다.옛날 고려의 보조국사가 전주의 종남산을 지나다가 한 신령스런 샘물을 마시고는 기이하게 여기어 장차 절을 짓고자 하였다. 마침내 사방에 돌을 쌓아 메워두고 승평부(지금의 순천시)의 조계산 골짜기로 옮겨가 송광사를 짓고 머물렀다. 뒷날 의발을 전하면서 그 문도들에게 이르기를 종남산의 돌을 메워둔 곳은 후일 반드시 덕이 높은 스님이 도량을 열어 길이 번창하는 터전이 되리라 했다. 그러나 수백 년이 지나도록 도량이 열리지 못했으니 실로 기다리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스님 등이 서로 마음으로 맹세하되 보조스님의 뜻을 이루고자 정성을 다해 오연하니 뭇사람들이 그림자 좇듯 하였다. 이에 천계(天啓) 임술년(1622) 터를 보고 방위를 가려 땅을 가르고 풀과 나무를 베어내며 산과 바위를 깎아 가람을 이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때 절이 창건된 것이 아니고 조선 초기에 창건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로는 보조국사가 이 절을 창건한 것이 아니라 고려 때의 지눌이 창건했다고 한다. 그 뒤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광해군 14년 운전, 승령, 덕림 등이 전주에 사는 이극용의 희사로 절을 중창하고 벽암대사를 초청하여 50일 동안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그때 전국에서 수천 명이 모여들어 시주를 하였으므로 인조 14년(1636)에 이르기까지 큰 공사를 벌려 대가람을 이룩하였고 인조 임금으로부터 선종 대가람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선종 대가람으로 시호를 받다그 당시 대웅전은 부여 무량사의 대웅전처럼 이층 건물이었고 일주문은 남쪽 3km, 만수교 앞 나들이라는 곳에 설치되었었다고 한다. 그 뒤의 절의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남아있는 절 건물은 철종 8년에 지어진 대웅전(보물 제 1243호)과 천왕문(보물 제 1255호), 십자각이라고 부르고 있는 송광사 종루(보물 제1244호)와 더불어 명부전, 응진전, 약사전, 관음전, 칠성각, 금강문, 일주문 등이 있다. 매표소 앞에 차를 세우자 눈앞에 나타나는 일주문은 통도사나 가까운 곳 변산에 개암사의 육중한 기둥들과는 달리 가냘프기 짝이 없어 지붕이 하늘에 떠있는 듯하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금강문을 넘어서면 사천왕문에 이른다. 흙으로 빚어 만든 이 사천왕상은 4m가 넘는 거대한 것이지만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광목천왕이 쓰고 있는 보관의 뒷면 끝자락에 순치 기축 육년 칠월 일필이라는 먹 글씨가 남아있어 1649년에 이 사천왕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송광사 사천왕상 때문에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던 소조사천왕상의 기준을 얻게 된 것이다. 소설가 최명희는 대하소설 〈혼불〉에서 이 송광사 사천왕을 도환의 입을 빌려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소승이 보기에는 완주 송광사 사천왕이, 흙으로 빚은 조선 사천왕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조형으로서, 높이 삼십척의 위용도 웅장하고, 그 신체 각 부위 균형이며, 전체 조화가 놀랍도록 알맞게 어우러져 큰 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천왕문을 지나면 넓 다란 뜰이 나타나고 그 너머에 대웅전이 우람한 실체를 드러낸다. ● 대웅전 천장에는 비천무가 춤을 추고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인 송광사 대웅전은 절이 창건될 당시 지어졌고 1857년 중건되었다. 대웅전 천장 가운데 3칸은 우물반차를 치고 나머지는 경사진 빗천장을 꾸몄다. 불상 위 천장에는 운궁 형 보개를 씌웠고 우물천장에는 칸마다 돌출된 용, 하늘을 나는 동자, 반자틀에 붙인 게, 거북, 자라 등 여러 물고기 등이 장식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가는 자라와 새끼를 등에 업고 네 활개를 치는 거북이 보인다.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빗천장에 천장화로 그려진 비천도일 것이고 그것을 전문가들은 송광사가 민중예술을 끌어안았던 사찰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벽화들은 천상계에 있으며 춤사위와 악기를 연주하는 형태의 민화풍의 불화로 대다수의 많은 사찰들이 주악비천도 1,2점이 그려져 있지만 이처럼 11점이 대웅전 천장에 그려져 있는 경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대웅전 천장에서 부처님께 춤사위와 음악으로 공양을 올리는 듯한 형태의 주악비천도를 보고 다른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전라도 지방이 춤사위의 본고장이며 그 실체적 입증자료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사람도 있다. 곱게 가리마를 탄 단정한 머리 모양새와 화려한 복장을 한 여인네가 빗끈 횡적을 연주하며 하늘을 나는 그림인 비천횡적주악도를 시작으로 머리는 비스듬하게 기울인 채 오른손으로 악기의 목 부분을 잡고 현을 튕기며 당비파를 연주하는 비천당비파주악도, 매우 역동적으로 박력 있게 춤을 추며 날아가는 모습인 비천비상무, 전립 같은 모자를 쓴 무당처럼 보이는 여인네가 장구의 허리부분을 가볍게 거머쥐고 춤추는 그림인 비천장고무, 천도복숭아 두 개를 머리에 받쳐 들고 나는 형상의 천도현정무 전립을 쓴 무당이 울긋불긋한 화려한 색깔의 치렁치렁한 옷차림 새로 활달한 춤사위를 선보이는 비천무장무. 한 명의 무당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하늘을 향해 북을 치며 멋들어지게 춤을 추는 비천타고무, 머리에 연꽃장식의 모자를 쓴 스님이 바라를 연주하는 비천바라무, 하늘을 향해 나발을 치켜들고 힘차게 연주하는 모습인 비천나발주악도, 머리에 고깔을 쓰지않고 승무를 추고 있는 비천승무도, 무당이 신 칼을 들고 춤을 추는 모습의 비천신칼무가 대웅전을 빛내고 있다. 비천장고무를 추는 여인네만큼만 되면 여자친구를 삼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같이 간 도반의 말대로 바라볼수록 비천주악도는 한 점 한 점 여러 가지 생각들을 일깨워준다. 대웅전에는 세분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가운데에 석가세존과 동쪽에 약사여래 서쪽에 아미타여래 삼존불로 모셔져 있는데 흙으로 만든 이 불상들은 석가세존이 5.5m이고 협시불은 5.2m의 거대한 불상들이다. 나라 안에 소조불로 가장 큰 이 불상은 워낙 크기 때문에 법당 안이 오히려 협소하다고 느낄 정도이다. 무량사처럼 2층 법당이 있으면 몰라도 1층 법당으로는 무리지 않을까 싶은 이 불상은 나라 안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고 알려져 있고 또 하나 이 불상이 도난을 입는 와중에서 복장유물이 수습이 되었으며 그때 세 불상에서 똑같은 내용의「불상조성기」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 이 불상을 만드는 공력으로 주상 전하는 목숨이 만세토록 이어지고 왕비전하도 목숨을 그와 같이 누리시며 세자저하의 목숨을 천년토록 다함없고 속히 본국으로 돌아오시며 봉림대군께서는 복과 수명이 늘어나고 또한 환국하시기를원하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억불숭유정책 속에서 대다수의 절들의 선비들의 놀이터가 되었던 시절 병자호란으로 인해 붙잡혀간 사도세자와 봉림대군을 속히 돌아오게 해달라는 의미에서 제작된 이 불상은 세월 속에 한 역할을 담당했었고 지금은 힘들고 어려운 이 땅에 민중들의 맺힌 한과 기원을 들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대웅전의 수미단 위에는 전패 또는 원패라고 불리는 조각이 아름다운 목패 세 개가 서있다. 왕과 왕비 그리고 왕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원 패로서 세 개 모두 2m가 넘고 구름 속에서 화염을 날리며 꿈틀거리는 용무늬가 복잡하게 조각된 앞면은 매우 절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웅전에서 바라보면 남서쪽에 송광사 종루가 있다. 우리나라 전통건축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십자각인데 십자각이라는 이름은 건물의 평면구성이 十자 모양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2개의 기둥을 사용하며 2층 누각 형태를 갖춘 건물이다. 이 십자각 내에는 1716년(숙종42)에 주조된 범종과 법고 목어 등이 있다.△송광사에서 만났던 지원스님 오래 전에 송광사를 찾았던 적이 있다. 그때 만났던 스님이 주지로 재직하고 있던 지원 스님이었다. 비스듬하게 내어 걸린 대나무 문을 열고서 주지스님을 찾아간다. 흰 고무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있고 울안에는 여러 형태의 민속공예품들이 가지런히 널려있다. 조계종 총무원의 기획실장으로 올라갔다가 사직을 하고 내려온 지원스님은 문화스님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우리문화에 대한 전반적 애정이 깊은 스님이었다. 지원스님은 나보다도 더 열 받쳐서 문화관광부와 지역의 문화정철에 신랄한 비판을 토로했다. 그 중에 소리축제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고 우리 것 즉 새로운 것만을 선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지요. 전통문화특구도 그렇습니다. 거창한 마스터플랜보다 실천적인 그러니까 개미시장처럼 골동품도 좋고 각자의 집에서 쓰고 있는 여러 물품들을 가지고 와서 물물 교환하는 그러한 형태도 생각해 봐야지요. 그렇다. 그 지역마다 그 지역 아니면 안 되는 문화상품이나 먹거리로 승부해야 하는데 힘들여 기획해서 제안하면 그 제안은 소리도 없이 묻혀버리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어디 그것뿐인가, 한지도 이곳 완주나 전주 일대의 한지가 나라 안에서 유명했는데, 지금은 원주나 다른 도시에 밀려서 그 맥을 빼앗기고 있으니,나는 지원스님의 말을 들으며 나보다도 더 세상에 대해 분노하고 세상 깊숙한 곳에서 살면서 세상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구나하며 문득 김수영 시인의 강가에서라는 시를 떠올렸다.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자꾸자꾸 小人이 돼간다 속돼간다 속 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그래 김수영 시인처럼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고, 생각 할수록 나 자신이 가여워지지만 세상은 살아갈만하다 고 자위하면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다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온갖 풍경들은 마음의 상자 안에 차곡차곡 쟁여두고 돌아가야 하는데, 내가 돌아갈 나의 집은 고개 너머 저쪽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결 사이로 〈혼불〉의 한 구절이 들리는 듯 했다.서러운 세상의 애끓는 애愛, 오(惡). 욕(欲)과 희로애락(喜怒哀樂)굽이굽이 몸부림치며 우는 하소연, 지그시 듣고 계시는 것인가. 내 다 들어 주마. 내 다 들어 주마. 피 토하고 우는 사연, 내 다 들어주리니,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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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6.13 23:02

[⑧ 두 봉우리가 우뚝 솟아 하늘에 꽂힌 마이산] 기암괴석·돌탑 뒤엉킨 신비의 영산

유독 어린 시절을 떠 올리면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절절하게 떠오른다. 기쁨에 대한 추억은 이제 기쁨이 아니지만, 슬픔에 대한 추억은 언제까지나 슬픔이다고 노래한 발레리의 시 구절과 같이 슬픔이 사람의 근원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지난 시절을 회상하다 보면 빙그레 웃음을 머금게 하는 일들도 더러 있다. 그 중 하나가 초가을 길가에 코스모스가 하늘거릴 때의 일이다. 학교 가는 길, 흰 메리야스를 입고 가는 아이들의 어깨 죽지에 꽃분홍색 코스모스를 손가락에 끼워서 딱 소리가 나게 두들기면 그 빨간 꽃망울이 선명하게 묻어났는데. 그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던지, 그보다 더 가슴 설레는 일은 가을 소풍을 가기 전 날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만 해도 가까운 곳으로 소풍을 갔었다. 고학년인 4학년이 되자 소풍가는 장소가 진안의 마이산으로 바뀌었다. 내가 살던 백운면의 백운초등학교에서 마이산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다. 새벽밥을 먹고 학교에 도착해서 평장리 지나 송림재를 넘어 마이산에 이르면 열한시 반쯤은 되었다. 마이산 탑사근처에서 점심을 먹을 때 보면 칠성 사이다나 비과 두어 개에 계란 삶은 것 한 개쯤 가져온 아이면 잘 사는 집 아이가 가져오는 진수성찬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보물찾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보물찾기는 항상 내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다른 애들이 두서너 개씩을 찾는 동인 나는 항상 언저리만 맴돌아서 그랬는지 한 장도 못 찾아서, 다른 아이들이 그 보물종이를 보여주며 공책도 타고 연필도 타는 동안 나는 그저 그 아이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은수사의 절 어귀에 있던 청실배나무에서 배 하나를 주워 먹고서 땀을 뻘뻘 흘리며 누가 먼저 올라가는지, 시합을 하는 것처럼 암마이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와 곧바로 가야 어둡기 전 전에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그 어린 시절 내가 가을마다 소풍이라는 이름으로 한번 씩 찾았던 그 마이산이 어느 날부터 사람들에게 명산으로 알려져 장날처럼 북적거리고 있다. 나 역시 마이산이 백두대간 속에 호남정맥이 지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어린 시절 추억의 요람이라는 사실이 채색되면서 그때부터 마이산은 내가 보았고 들었던 마이산이 아니었다. △기기묘묘한 생김새, 곳곳에 전설두 봉우리가 우뚝 솟아, 하늘에 꽂혀 있는 듯한 마이산은 진안군 진안읍과 마령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2003년 10월 명승지 12호로 지정된 해발 667m의 마이산은 자웅의 두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으며 용암동문이라 새긴 암벽 사이를 들어서면 기암괴석이 뒤엉켜 기기묘묘한 형상을 연출하며 절경을 펼쳐놓고 있다. 이곳 마이산은 옛 신라 때에는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에는 용출산,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속금산이라 부르다가 태종 때에 이르러 마이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산의 특징과 매력은 누가 뭐래도 그 생김새가 기기묘묘한 형태로 갖가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동쪽에 있는 봉우리를 숫마이봉, 서쪽에 있는 봉우리를 암마이봉이라 부르는데 숫마이봉 중턱에는 화암굴이 있고, 이 굴속에는 맑은 약수가 솟아올라 이 약수를 마시면 옥동자를 잉태한다는 전설이 있다. 서쪽의 암마이봉 절벽 아래에는 120여 기의 돌탑을 쌓은 유명한 마이탑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탑사는 조선 후기에 이갑룡이라는 처사가 발원하여 전국 명산의 돌을 몇 개씩 날라다 이곳의 작은 바윗돌과 함께 쌓아 만든 탑이라고 한다. 이름이 이경의(李敬議) 자(字)는 갑룡(甲龍) 호(號)는 석정(石亭)인 그는 임실 둔덕 태생으로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묘 옆에 움막을 치고 3년간 시묘를 했다.△탑사의 신비, 외국인도 감탄그 후 전국의 명산을 전전하다 25세 때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을 주식으로 생식하며 수도를 하던 중에 신의 계시를 받아 탑을 쌓기 시작했다. 만불탑(萬佛塔)을 단석으로 쌓아 올린 것도 있고 기단을 원추형으로 단석으로 쌓아 올린 것도 있다. 이 지역에는 이갑룡 처사에 대한 신령스런 이야기도 많이 만들어졌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숫마이봉을 나막신을 신고서 오르내렸다고도 하고 어느 때는 명주 열여덟 필을 써서 서로 외면하고 있는 마이산 두 봉우리를 연결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기단을 쌓을 때에도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는 탑을 쌓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탑은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이갑룡 처사 혼자서 쌓은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힘을 모아 쌓은 것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그가 9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성스런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전라북도 기념물 제 35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돌탑들은 거센 폭풍우에도 넘어지는 일이 없으며 단위에 놓여있는 정화그릇은 겨울에 물을 갈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 표면으로부터 10~15cm의 고드름이 솟아오르는 신비를 보여주기도 한다.이 탑이 쓰러지지 않는 것은 석질에 순인력(順引力)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숫 마이봉 남쪽 기슭에는 은수사가 자리 잡고 있고 맞은편에는 마이산과 비슷한 작은 마이산이 서있다.한편 마이산은 흙이 하나도 없는 콘크리트 지질의 두 개의 커다란 역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산으로 그 모양이 흡사 말의 귀같이 생겼다고 하여 마이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흙 한줌 없는 이 산을 본 어떤 미국인이 이 산을 쌓을 수 있는 기술은 물론이고 그 엄청난 양의 시멘트를 어떻게 충당했느냐하며 혀를 내둘렀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져 온다.△마이산 오르는 길 마이산을 오르는 길은 진안읍에서 사양골을 지나 마이산을 오르는 방법이 있고, 마령면 동촌리로 해서 마이산 탑사를 거쳐 암 마이봉으로 오르는 코스가 있다. 산악인들은 장비를 갖추면 숫마이 봉을 오를 수 있지만 대개의 일반인들은 암마이봉을 오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사이에 바위산인데도 암마이봉을 오르는 길이 제법 잘 나 있어서 초보자도 무리 없이 오를 수가 있다. 진안에 살면서도 이곳 마이산을 한 번도 오르지 않은 사람이 많지만 오랜만에 오르는 마이산을 그저 만만하게만 보았던 것이 아닐까 싶게 가파르다.산은 자꾸 가파르고 먼데, 산들이 더욱 선명하게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흘린 땀을 오랜만에 소매 끝으로 닦는다. 후련하면서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살아나는 생각들 이 세상에 살면서 나는 얼마나 간절히 이 세상을 벗어나고자 했던가. 내가 흘린 땀 만큼 내가 세상을 사랑한 만큼 세상은 나를 몰아세운다고 속좁게 생각하지는 않았던가? 생각하며 오르는 사이 정상에 이른다. 진안군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산에서면 장수 영취산에서부터 비롯된 호남금남정맥이 장수 팔공산과 섬진강의 발원지산인 봉황산을 지나 성수산을 거쳐 마이산이 이어진 산금이 보이고, 덕태산 선각산. 운장산 부귀산이 보인다. 저기쯤이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이 몸을 나뉘는 주화산일 것이다. 해발 667m의 마이산은 자웅의 두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이 마이산이〈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마이산(馬耳山) : 현의 남쪽 7리에 돌산이 하나 있는데 봉우리 두 개가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용출봉(涌出峯)이라 이름하였다. 높이 솟은 봉우리 중에서 동쪽을 아버지, 서쪽을 어머니라 하는데 서로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이 마치 깎아서 만든 것 같다. 그 높이는 천 길이나 되고 꼭대기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사면이 준절(峻絶)하여 사람들이 오를 수 없고 오직 모봉(母峯)의 북쪽 언덕으로만 오를 수가 있다.△김종직 감상기 시로 남겨조선 태종(太宗)이 남행(南幸)하는 길에 산 아래에 이르러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馬耳山)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던 이 산을 두고 조선초기의 문신 김종직(金宗直)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기이한 봉우리가 하늘밖에 떨어지니, 쌍으로 쭈삣한 것이 말의 귀와 같거나, 높이는 몇 천 길인지 연기와 안개 속에 우뚝하도다. 우연히 임금의 행차하심을 입어 아름다운 이름이 만년에 전하네, 중원(中原)에도 또한 이 이름이 있으니 이름과 실제가 서로 비슷하도다, 천지 조화의 공교함은 끝이 없으니, 길이 천지가 혼돈했던 처음 일을 생각하도다. 내 이곳에 가을비 뒤에 오니, 푸른빛과 붉은빛이 비단처럼 엇갈렸네, 멀리 바라보노라고 고개를 돌리지 아니하니 문은 밤새도록 열어 둔 대로다. 어떻게 해서 신선의 녹옥장(綠玉杖)을 얻어 높이 걸어 진흙 찌꺼기 같은 이 세상을 벗어나 쇠석암에서 묵고 봉정에 올라 샘물을 웅켜서 선동(仙童)과 서로 상의하여 방촌(方寸) 숟갈의 약을 먹을 고.전설에 의하면 1억여년 전 마이산의 들머리가 호숫가 즉 선상지였다고 하며 4천만여 년에 걸친 지각변동으로 다른 지역보다 600여 미터 이상 솟아올라 산이 되었다고 한다.산 전체가 수성암(水成岩)으로 이루어진 마이산을 두고 부부봉 또는 부부산으로도 부르며, 그에 얽힌 이야기도 전한다.마이산의 명칭 역시 세월 속에서 여러 개의 이름으로 변해왔다. 조선시대의 태조악가에 있는 몽금척가사(夢金尺歌詞)에돗대같다는 구절이 있어서 봄에는 돛대봉, 녹음 속에 우뚝 솟아난 사슴뿔인양 돋보이는 여름철에는 용각봉(龍角峯)이라 부른다. 온 산이 물드는 가을이면 빨갛게 타오르는 단풍이 멀리서 보면 마치 천리마 색깔 같아 마이산, 하얀 눈으로 덮인 두 봉우리가 두 자루의 붓끝과 같아 저절로 시 구절이 우러나오는 겨울의 산을 문필봉(文筆峯)이라 부른다.이 산 의 중턱 쯤의 화암굴에서 이승異僧이 연화화암경蓮華華岩經을 얻었다고 하며 이 굴에서 떨어지는 물이 온수천의 물줄기가 되는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은수사에서 백일기도를 드릴 때 약수의 빛이 은빛과 같았다고 한다. 금당사는 금촌 동쪽에 있는 절로 신라 헌덕왕憲德王 6년에 혜감慧鑑이 창건하였고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다. 금촌 서쪽에 있는 나옹암은 고려 때 나옹스님아 수도를 하였다는 굴이며 금당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기도한 산진안지(鎭安誌)에 의하면 이조시대 초기에는 속금산(束金山)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야사에 의하면 이씨조선을 세운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젊었을 때 명산 대천을 찾아 다니며 수양하고 기도를 드렸는데 하루는 꿈에 말의 귀와 같은 영봉에서 한 선인이 금척(金尺)을 가지고 삼한(三韓)의 강토를 재는 것을 본 일이 있었다고 한다.그 뒤 고려 말에 전라도 서해안에 노략질 해온 왜구들을 운봉 황산에서 맞아 싸워 왜장 아지발도를 한 대의 화살로 떨어뜨리고 승리하여 완산주를 두루 살피던 중 명산 마이산에 올랐다.그런데 마이산의 형태가 지난날 자기가 꿈속에서 본 산과 흡사하게 닮은 것을 보고 속금산(束金山)이라 이름을 내리고 그때부터 새나라 세울 뜻을 확실히 작정하고 천지신명께 백일기도를 드렸다 한다.태조 이성계는 나라를 창업할 뜻을 세우게 된 마이산이 명산임을 잊지 않고서 태자인 정안군(태종임금)을 시켜 속금산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마이산의 이산묘는 이성계가 임금에 오르기 전에 임실의 성수산에서 백일 기도를 드리던 중 마이산에 들어설 때 말을 매어 놓았던 자리이다. 단군과 태조 세종, 고종등의 위패를 모신 회덕전, 한말의 명신과 유학자를 모신 영모사, 그리고 한말의 의병장 33위를 모신 영광사로 이루어졌다. 오늘 나는 신비의 탑사가 있는 마이산에서 산이 나인가, 내가 산인가를 생각하며 이리저리 서성거렸던 것은 아닐까?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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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6.06 23:02

[⑦선운산 자락에 선운사가 있다] 속세 벗어나 천천히 오르는 산길…부처의 진리를 엿보다

선운산을 넘어 선운사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선운산과 소요산 사이 풍천장어집이 즐비한 길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길이다. 그리고 심원에서 질마재 길을 따라 참당암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길은 해리에서 낙조대와 용문굴을 지나 도솔암을 거쳐 가는 길이다.저수지를 지나서도 한참 동안을 울창한 숲은 나타나지 않고 올망졸망한 나무숲들을 지나가는 길은 야생화가 지천이다.땀은 온 몸을 적시고 나무 숲길은 눅눅하며 사람의 기척은 어디에도 없다. 천천히 오르는 산길, 아직도 멀었는가 싶은데 눈 들어보니 능선이 저만치 보이고 능선에서 서쪽으로 조금 오르자 어느새 낙조대에 이른다. 변산 월명암의 낙조대나 불갑산 해불암의 낙조와 더불어 서해 낙조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선운산 낙조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사뭇 목가적이다. 해리, 무장, 법성포를 넘어 서해 바다는 아스라이 멀고 죽도 건너 변산반도의 풍광은 고적하고 포근하며 손만 뻗으면 닿을 듯 지척이다. 이 선운산의 본래 이름은 도솔산이었다.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가 있어 선운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몰이 아름다운 선운산 낙조대선운산은 흔히 선운사의 뒷산인 수리봉(해발 342m)을 가리키지만 실제로는 1979년 전라북도에서 지정한 도립공원 범위인 선운계곡을 둘러싼 E자 모양의 산 전체를 선운산으로 봄이 더 타당하다. 가장 높은 경수산(444m)과 청룡산(313m), 구황봉(285m)개 이빨산(355m)이 독립된 산처럼 솟아있고 이 산에서 모인 물이 인천강(인냇강)을 이루어 곰소만으로 유입된다.구름 속에 누워 선도를 닦는다는 뜻을 지닌 이 선운산은 바위들이 많기로 유명하다. 고려 때의 문장가로 산천 유람으로 한 평생을 보낸 김극기는 이 산에 올라 한 편의 시를 남겼다.산 숲이 앞 뒤 사면을 둘렀는데, 한 족(簇) 천당(天堂)에 정거(淨居), 자수(紫綏)는 늘어진 것을 자랑하랴 현전(玄筌 : 현묘한 기틀)에는 다만 부처의 진리를 엿보고자 하네. 폭포소리 옥 부수듯 단풍진 골짜기에 울고, 산 경치는 소라를 모아 놓은 듯 푸른 하늘에 솟았네. 마주 앉아 조용히 옥진(玉塵)를 날리니 웃으며 이야기하는 끝에 맑은 바람 문득이네.해 떨어지기는 아직은 이르고 용문골로 내려선다. 선운사를 창건할 당시 검단선사가 연못을 메울 때 쫓겨난 이무기가 급하게 서해로 도망가기 위해 뚫어놓은 것이라는 용문굴은 규모 면에서 대단히 큰 굴이면서 신기하기 짝이 없고 시원스럽다. 수없이 떠나고 수없이 돌아오는 그 삶의 연장선상에서 오늘 내가 선택한 이 선운산은 내게 어떤 의미를 주고 내 마음은 얼마나 다독거려 줄 것인가. 명나라 때의 문인 오종선이〈소창자기(小窓自紀)〉에서 산에 오르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속세를 벗어나 정을 줄만한 대상은 오직 산뿐이다. 산은 반드시 사물의 도리를 깊이 관찰하는 눈과 명승지를 탐방하기에 알맞은 체구와 오래도록 머무는 인연이 있어야만 비로소 허물없는 교우관계를 허락한다.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의 산행은 어쩌면 그리도 잘 맞아 떨어지는지, 용문굴에서 조금 내려가자 도솔암의 마애불 앞에 도착한다. △선운사 마애불에 얽힌 사연암벽타기를 즐기는 산악인들이 연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바위벽을 돌아가면 도솔암으로 내려가는 길 옆 절벽에 고려시대 초 지방 호족들이 세웠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전체 높이 17m, 너비 3m인 이 불상 낮은 부조로 된 거대한 크기의 마애불로 결가부좌한 자세로 양끝이 올라와 있고 입도 역시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부처님다운 부드러움이나 원만함이 없이 위압감을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애불의 머리 위에 누각 식으로 된 지붕이 달려있었는데 인조 20년(1648)에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 속에는 신비스런 비결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전설이 끈질기게 전해져 왔다. 오지영이〈동학사〉에 기록한 비결 탈취 과정은 이렇다. 지금 고창군(당시 무장현) 아산면 선운사 동남쪽 3킬로미터 지점에 도솔암이란 암자가 있고, 그 암자 뒤에 50여 척 높이의 층암절벽이 솟아 있는데, 그 절벽에 미륵이 하나 새겨져 있다. 이 미륵상은 3000 년 전에 살았던 검당선사(黔堂禪師) 진상이란 것으로 그 미륵의 배꼽에는 신비스런 비결이 한 숨겨져 있는데,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비결과 함께 벼락 살을 동봉해 놨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비결을 꺼내기 위해 손을 대면 벼락에 맞아 죽는 다는 것이다. 그 벼락 살이 같이 봉해져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지금(당시)부터 130년 전에 전라감사로 내려왔던 이서구가 그것을 꺼냈을 때 벼락이 쳤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중략) 그 때 이서구가 본 것은 전라감사 이서구 개탁이란 글자뿐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세상 사람들은 그 비결을 꺼내보고 싶어도 벼락이 무서워 꺼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미륵비결이 숨어있는 마애여래불이 비결을 1892년(임진) 8월 무장 접주 손화중과 동학의 지도자들이 우여곡절 끝에 한 밤 중에 마애불의 배꼽에서 그 비결을 꺼내게 된다. 이 사건으로 동학의 지도자들이 여러 형태로 피해를 받았지만 손화중이 왕이 될 것이라니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이어 무장 접주 손화중의 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이 결국 동학농민혁명의 주력으로 활동하게 된다. 바라볼수록 마애불과 잘 어울리는 한 그루 소나무를 뒤로하고 내원궁으로 오른다. 깎아지른 절벽과 푸르른 나뭇잎 새들이 손짓하는듯한 정경 속에 내원궁(內院宮)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안에는 보물 제280호로 지정된 선운사 지장보살 좌상이 있다. 남해 금산의 보리암 만큼이나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있는 지장보살은 관음전에 있는 금동보살과 크기나 형식은 비슷하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아름답다. 먼저 온 몇 사람이 정성스레 절을 올리고 있는데 우리들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만 있다. 그래 나는 저 내원궁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 곁에 앉아 보지도 못하고 저 건너 산봉우리의 낙조대만 바라보고 있으니도솔암에서 물을 마신 후 대나무 잎 새가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잠시 내려가면 훤칠한 미남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장사 송을 만나게 되고 그 옆에 진흥굴이라고 불리는 천연굴이 있다. 불교에 심취한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도솔왕비와 중애공주를 데리고 이곳 선운사에 와서 이 굴에서 자던 중 꿈속에서 미륵 삼존불이 나오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이곳에 중애사를 창건하고 다시 이 절을 크게 일으키니 그 것이 선운사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한국의 대표주 중의 하나인 복분자술선운산의 아름다운 풍경 한 가지를 떠올리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백꽃을 먼저 떠올릴 것이지만 나는 선운산의 꽃무릇을 떠올린다. 9월경에 선운산 골짜기를 시나브로 걸을라치면 가을나무들 새로 새빨갛게 피어난 꽃들을 볼 것인데 그 꽃이 꽃무릇이다. 또 하나 들라하면 선운사의 복분자주와 풍천장어일 것이다.이 산에는 선운산가라는 선운산과 관련된 백제 때의 노래가 전해온다. 백제 때 지금의 상하면, 공음면, 해리면을 아우르던 장사현에 살던 사람이 나라의 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갔으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돌아오지 않자 그 부인이 선운산에 올라가 낭군을 그리며 부른 노래인데 가사는 전해지지 않고 노래에 얽힌 이야기만 남아있다.선운 야영장을 지나 쉬엄쉬엄 걸어가자 선운사에 이른다. 선운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선운사는 사기에 의하면 백제 제27대 위덕왕 24년에 검단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검단선사가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신라의 의운조사와 함께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창건했다고 한다. 훗날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운사 창건설화는 이렇다. 죽도 포에 돌배가 떠와서 사람들이 끌어오려고 했으나 그 때 마다 배가 자꾸 바다 쪽으로 떠나가곤 했다. 그 소식을 들은 검단선사가 바닷가로 가보니 배가 저절로 다가왔다. 배 위에 올라가 보니 그 배 안에는 삼존불상과 탱화, 나한상, 옥돌부처, 금 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의 품속에서 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봉안하면 길이 중생을 제도 이익이 있게 하리라라고 쓰여 진 편지가 나왔다. 검단선사는 본래 연못이었던 현재의 절터를 메워 절을 짓게 되었다. 그 당시 선운산 계곡에는 도적이 들끓었다고 한다. 검단선사가 그들을 교화하고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서 생계를 꾸리게 했다. 그때 그들이 살던 마을을 검단리라고 하였으며 그들은 해마다 봄가을에 보은염이라는 이름의 소금을 선운사에 보냈고 그 전통이 그대로 해방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선운사가 한창 번성했던 시절에는 89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30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선운사는 현재 조계종 제 24교구의 본사로서 도솔암, 참당암, 석상암, 동문암 등 4개의 암자와 천왕문, 만세루, 대웅전, 영산전, 관음전, 팔상전, 명부전, 산신각 등 십여 개가 넘는 건물들이 남아있다. 선운사 만세루는 강당으로 쓰이고 있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세루 앞에 보물 제 290호로 지정되어 있는 선운사 대웅전이 있다. 광해군 때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 계 맞배지붕인 이 건물은 측면에 공포가 없고 대신 높은기둥 두 개를 세워 중량을 받치도록 하였다. 조선중기의 건축으로 섬세하면서도 장식이 뛰어난 다포구성과 꽃 살 분합문이 화려하며 내부의 천장에는 우물반자를 대었으며 단청의 백화가 매우 아름답다.이 절 관음전 안에는 성종 7년(1476)에 만들어져서 선운사가 모두 불에 탄 정유재란 때에도 화를 모면한 금동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보물 제 279호인 이 불상은 대좌와 광배는 남아있지 않지만 15세기 경 보살상의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불상은 일제 때에 일본인이 훔쳐갔던 것을 1940년에 찾아와 이곳에 모셨다. 이절 뒤편에 이 나라에서 가장 소문난 것 중의 하나인 500여 년 이상 된 동백나무가 삼천여 그루 숲을 이루고 있다. 4월말이면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모가지 채 뚝뚝 떨어지는 눈물겹도록 가슴 시리고 아린 동백꽃을 볼 수가 있는데 지금은 때가 아니라서 볼 수가 없다. 이 선운사에서 가까운 소요산 자락 질마재 아래 선운리에서 태어난 미당 서정주는 선운산 동백꽃에 대한 시 한 편을 남겼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습니다. 선운사 동구(洞口)선운사를 나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부도 밭에 추사 김정희가 쓴 백파선사 부도비가 있었지만, 지금은 진품은 박물관으로 들어가고 모조품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율사로서 일가를 이룬 이가 오직 백파만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고로 여기에 율사라고 적은 것이다.로 시작되는 이 비문을 추사의 글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탁본을 많이 해가 보기가 좀 민망했는데, 그것도 이미 옛일이다. 일주문을 나오는데, 어디 선가 선운산가 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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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30 23:02

[⑥ 후백제 도읍지 전주성에 남은 자취] 견훤 왕궁터 추정만…제대로 된 발굴조사 아쉬워

삼한, 즉,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한 신라가 융성기를 지나 쇠퇴해지자 여러 지역에서 영웅들이 나타났다. 그 중에 한 사람이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다.견훤은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아차마을 갈전2리에서 가난한 농부인 아자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광주 북촌에서 태어났다는 설과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전설을 지닌 견훤은 청년시절 군인의 길을 택했고, 마침내 892년 견훤은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견훤은 북원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양길에게 비장이라는 벼슬을 내렸으며, 900년 완산주(지금의 전주성)에 무혈 입성하여 도읍을 정하게 되었다.전주성 밖을 나와 열렬히 환호하는 백제 유민을 향하여 견훤은 크게 외쳤다. 내가 삼국의 시작을 상고해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난 후에 혁거세가 흥기한 고로 진한과 변한이 이것을 따라서 일어났다. 이때에 백제는 나라를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668~669)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따라 장군 소정방을 보내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의 김유신이 권토하여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처럼 비겁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나는 지금 감히 도읍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백제의 사무친 숙분을 풀려온 것뿐이다.(삼국사기 제 50권 열전 제 10 견훤)견훤은 나라 이름을 당당하게 백제의 맥을 잇는다는 뜻으로 백제라고 선포하였다. 후백제란 이름은 후세에 역사가들이 전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지었던 이름일 뿐이다. 그리고 견훤은 대왕을 칭하면서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반포하였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인 후 당나라 연호를 사용했던 것과 달리 자주적인 연호를 쓰게 된 것이다. 정개란 연호에는 바르게 열고, 바르게 시작하고, 바르게 깨우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견훤은 신라보다 일렀던 백제의 역사를 재정립하겠다는 일종의 역사 바로 잡기와 더불어 의자왕의 숙분을 푸는 것을 당면 과제로 내세웠다. 견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백제에 의한 국토 통일을 내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견훤은 비참하게 몰락한 백제 왕조를 부활하기 위해 힘찬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며,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구원하고 한 세상을 건지겠다는 미륵의 나라 건설을 피력한 것이었다.△중국의 오월과 교류를 맺다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한 견훤은, 내적으로는 호족들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그들을 포섭하면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한편 호족들의 견제와 통제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아 호족의 영내에 관리와 군대를 파견하였다. 동시에 호족의 자제들을 상경시켜 볼모로 붙잡아 두었던 것이다. 국방상의 요충지에는 중앙군을 파견하였는데, 현지 호족 세력들의 지원 없이도 둔전(屯田)을 통해 그 주둔이 가능하게 하였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견훤이 백제의 옛 땅을 남김없이 차지했는데 그의 재력의 부유함과 갑병(甲兵)의 막강함은 족히 신라와 고려보다 뛰어나서 먼저 드러났다고 적고 있다. 견훤은 그의 해상 세력을 바탕으로 옛 백제의 외교를 복원하는 데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견훤은 그와 더불어 중국의 오월국(吳越國)과 후당(後唐)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신의 존재를 남중국에 알림으로써 그 위상을 높이는 한편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려는 의지를 과시했던 것이다. 이는 또한 신라를 고립시키려는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다.견훤은 그 후 중국의 후당 및 묘하 부근의 거란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는데 그것에 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남아있다. 거란의 사신 사고와 마돌 등 35인이 예물을 가지고 찾아오니 견훤이 장군 최견으로 하여금 마돌 등을 동반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항해하여 북쪽으로 가다가 바람을 만나 당나라 등주(登州)에 이르러 죄다 학살되었다. 그리고 견훤은 일본과도 긴밀한 외교적 접촉을 가졌다. 견훤은 인재 등용에도 힘썼는데 그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 최승우였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3년 만에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면서 명성을 떨쳤던 최승우는 6두품 출신으로서 출세가 막혀 있었다. 하지만 최승우는 출세보다는 사회 개혁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다.큰 세력을 형성하며 삼한 통일을 염원했던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를 쳐들어가 경애왕을 징치하고 돌아오던 중에 팔공산에서 왕건과 맞붙어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였다. 그 뒤 신라와 고려의 세력보다 더 큰 세력을 형성했던 후백제였지만 아들과의 내분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오랜 세월이 흐른 뒤 김동인은 〈견훤〉이라는 중편 소설에서 후백제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가던 그 당시를 이렇게 묘사하였다.그날 밤 견훤왕은 밤새도록 소리 없이 울었다. 이미 정한 운명이었지만 눈앞에 이르니 가슴이 저리었다. 더욱이 자기 평생 공을 다 들여서 쌓은 탑이 지금 무너지는데 자기가 그것을 붙드는 데 일호(一毫)의 힘도 가할 수 없고, 도리어 무너뜨리는 편에 붙어서 방관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 더욱이 애달팠다. 베개에서 물을 차낼 수가 있도록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누가 견훤의 그 비통한 심사를 알 수가 있으랴.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마흔 몇 해에 걸쳐 백제의 맥을 잇겠다고 궁예와 왕건이 이끄는 후고구려와 맞붙어 싸웠던 그의 큰 뜻은 사라지고 말았다.견훤은 그 후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로 수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지금의 논산시 연산면에 있던 절 황산사에서 죽고 말았다. 그가 죽을 때 하늘이 나를 보내면서, 어찌하여 왕건이 뒤따르게 하였던고 () 한 땅에 두 마리 용은 살 수 없느니라라고 길게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그의 무덤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전주 땅을 바라보며 남아 있는데, 그 당시 항간에는 아래와 같은 참요가 유행하였다고 한다.가련토다. 완산 애기애비 잃고 눈물 흘리네.〈삼국사기〉전체 50권의 맨 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신라의 국운이 쇠퇴하고 정치가 어지러워 하늘이 돕지 아니하고 백성들은 갈 곳이 없었다. 이에 군도(群盜)들이 틈을 타서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 털처럼 되었으나, 그중에서 가장 악독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였지만 도리어 종국(宗國)을 원수로 삼고 그 전본(전복)을 도모하였으며 심지어 선조의 화상(畵像)까지 베기에 이르렀으니 그 무도함이 극심하였다.견훤은 신라의 백성으로부터 일어나 녹을 먹으면서 불측한 마음을 품고 나라의 위태한 틈을 기화로 하여 도성과 성읍을 침략하고 임금과 신화를 살육하기를 마치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하였으니, 실로 천하의 으뜸 가는 악인이며 백성들의 큰 원수였다. 그러므로 궁예는 자기 부하에게 버림을 당하였고, 견훤은 제 자식에게 화를 당하였다. 이는 모두 제 자신이 저지른 것이니 또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항우(項羽)와 이밀(李密)과 같은 특출한 재주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발흥(勃興)을 대적하지 못하거늘, 더군다나 궁예와 견훤과 같은 흉악한 자가 어찌 우리 태조와 더불어 서로 상대할 수 있으랴? 다만 태조에게 백성들을 몰아다 주는 자가 되었을 뿐이다.견훤 백제는 결국 스스로의 내분에 의해 무너진 것이지 왕건이 거느린 고려 군사의 힘으로 멸망한 것이 아니었다.그렇다면 백제의 맥을 이었던 견훤, 즉 후백제는 전라도 지역에서 오늘날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물왕말에는 백제 왕궁의 석축만 남아육당 최남선이 1925년에 발표한 국토순례기 〈심춘순례〉에서 후백제의 도읍지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반태산 밑 철로 밑으로 논두렁처럼 울묵줄묵하게 약간 일자로 남아있는 것이 후백제의 성터라고 한다. 대개는 마한 이래의 옛 자리를 그대로 써 내려온 것일 듯 하여 거의 없어지고 겨우 남은 몇 줌 흙이 몹시 남의 마음을 잡아당긴다. 저 고려 태조 같은 이도 여러 번 혼이 나서 통삼(統三)의 자신이 하염없이 무너지려 함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그토록 절대하던 후백제의 근거지의 떨어진 자취가 시방 저 흙덩이이다. 그나마 없었다면 행인의 조상하는 눈물을 받을 후백제 때 물건이랄 것이 무엇이었을른지.또한 1943년에 간행된 〈전주부사 (全州府史)〉에 의하면 전주역 동편 반태산(현 중노송동 2가 사무소앞 무랑말)의 구릉지는 후백제 견훤왕의 궁터로 보아도 큰 잘못이 없으며, 또 승암산 동남방 성황사에 소재한 산곡의 성터가 같은 왕궁에 인접한 산성으로 보인다.거나 조선 총독부 도서관의 조사관 오기야마 히데오(적산수웅荻山秀雄)가 조사한 바대로 반태산 일대 민가를 조사한 결과 후백제 왕궁의 건축 초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각이 진 석재와 대형 댓돌이 1만여 개가 현존하고 있다라는 기록도 있다. 그런 기록들을 토대로 오랫동안 답사를 계속한 결과 오래 전에 KBS와 답사 도중 민가에서 당시의 주춧돌 세 개를 발견하기도 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후백제의 도읍지가 정확하게 어디였는지에 대해 제대로 된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왕궁터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물왕말 일대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고 있다. 나라 곳곳에서 소설 속 인물들까지도 부활되고 있으며 각 지역마다 잊혀 진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과는 아예 대조적이다.어디 그뿐인가? 견훤이 태어났다는 문경시 가은읍 아차리에는 견훤을 모신 사당이 만들어졌고, 논산시 연무읍에는 전해오던 견훤묘라고 해서 전 견훤 묘라고 표시되어 있던 것을 당당히견훤묘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도 전라북도와 전주시는 아직까지 후백제의 궁궐터를 비정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그나마 1980년에 발굴을 마친 동고산성에선 전주성이라는 글씨가 찍힌 연꽃무늬 와당이 발견되었고, 남고산성에는 후백제 견훤이 쌓은 산성으로 추정된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김제 금산사 들목에 있는 견훤이 축조했다는 홍예문이라는 견훤성문이나 그가 3개월여 유폐되었던 금산사에도 견훤에 대한 문구 하나 찾아볼 수 없다.미국 켄자스 대학의 허스트 3세 교수는 〈선인, 악인, 추인〉이라는 논문 중 고려 왕조 창건기 인물들의 특성이라는 글에서 견훤을 다음과 같이 변호하고 있다.견훤 역시 악인이라는 이미지로부터 상당히 회복될 필요가 있다. 그는 쇠퇴하는 힘에 대항하여 맹렬히 공격한 한반도 남서부 지역 인물(?)로서, 아직도 천명을 보유하고 있던 신라 왕조와 함께 상당한 군사적도덕적 힘을 지니고 있던 백제인이었다. 견훤의 왕국은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존재하였으며 더구나 번성했었다. 다만 지지한 사람들과 지지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러나 나는 그도 역시 상당한 지도력과 군사적 자질을 소유하였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운명의 뒤틀림이 없었더라면 10세기 한국은 견훤에 의해 통일되었을지도 모른다. 옛 백제의 중심 지역으로부터 한반도를 통일하는 새 왕조 창건을 합법화하기 위하여 백제 계승자로서의 역사를 선전했을 왕조가 생겨났을 수도 있었다라고 말하며 견훤 백제의 패망을 아쉬워했다.그렇다. 한 때 전주는 견훤이라는 사람이 세운 한 나라의 수도로 나라 안에 몇 안 되는 도읍지였다. 견훤은 기울어져 가는 통일 신라 말에 태어나 백제의 부활을 위해 백제라는 나라를 열었었다.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 미륵의 나라를 열고자 했었고, 삼한을 통일하여 더 큰 세상을 꿈꾸었던 그는 집안의 내분으로 역사의 승자가 아닌 패자로 낙인찍힌 채 역사의 뒤안길로 숨어들고 말았다. 언제쯤 후백제가 전라도의 역사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이 나라의 역사의 전면에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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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23 23:02

⑤ '산경표' 정립한 신경준 살았던 순창

순창군 남쪽 3 리에 산이 있으니, 산마루에 귀래정의 옛터가 있고, 귀래정의 남쪽 언덕 끝은 그윽하고 기이하여 사랑할 만하니 <여지승람>에 실려 있다.(중략) 조부 진사공이 늘그막에 이곳에서 지내며 정자를 동쪽 언덕의 꼭대기에 지었으며, 정자 아래에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에 세 섬을 설치하였다. 또 못들의 기이한 것들을 모아서 천연의 부족함을 보완하니 상하좌우에 꽃과 풀이 푸르게 우거져 벌리어 나니 <이아>와 <초경><수서>에서 일컫지 않은 것도 많게 되었다. 신경준이 지은 <여암유고> 권 10에 실린 <순원화훼잡설(淳園花卉雜說)> 실린 글로 자신의 조부인 선영이 조성한 귀래정 일대의 조경에 대해 쓴 글이다.전북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남산에 있는 귀래정은 조선초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인 신말주 선생과 정부인 설씨와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그 뒤 그의 후손인 실학자 신경준 선생 등 그의 후손들이 살았던 곳이다. 신경준은 그의 업적에 비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벼슬이 높았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치적인 파쟁을 많이 겪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신경준을 근현대에 접어들면서 세상에 처음 드러낸 사람은 위당 정인보(鄭寅普)였다.그는 1934년에 석전, 민세 안재홍, 윤석오 등과 함께 남쪽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 이곳 귀래정에 들렀던 여정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아래의 글은 여행기의 첫 문장이다.신여암 선생은 고령인이니 경준(景濬)은 휘요, 순민(舜民)은 그의 자이다. 이렇듯 거룩한 어른을 말하면서 그의 호(號)만으로 부족하여 다시 그의 휘와 자를 쓰게 되는 것을 보면 마치 이 세상에 대화여 첫 번으로 소개하는 것 같다. 세상이 다 여암 선생을 고루 알지 못할 새 이렇게 써서 알아드리기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 어찌 개연치 아니한가?(중략) 고택에 남긴 저술이 사람 키만큼 쌓였건만 사람들이 귀한 줄 몰라 좀이 쓸고 쥐가 갉아먹고 있었다.세상에 더 없이 귀중한 업적을 남긴 신경준과 그의 저작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정인보의 기원이 이루어져 1939년에 <여암전서>가 활자본으로 발간되었다. 그때 정인보는 교열을 맡았고, 총서(叢敍)를 작성했다. 그러나 총서는 무슨 연유에선지 실리지 않은 채 정인보의 집에 남겨져 있다가 1976년에 <경인문화사>에서 <여암전서> 영인본을 발간할 때에야 수록되었다. 만약에 여암 선생이 그 때 정부의 대권을 잡을 지위에 쓰여서 그 재주를 다 발휘하여 실시케 할 수 있었던들, 지금으로부터 140~150여년 전이니 어찌 알랴, 쇠해지지 않고 떨쳤으며, 무너져 내리던 것이 완전해지고 약한 게 굳건해지고 가난도 넉넉해지고 가뭄걱정도 않고 메진 땅도 백성을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중략) 저 성하게 날로 떨쳐 오르는 자와 견주더라도 어쩌면 앞질렀을 것 같을! 설사 앞지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어찌 문득 그 밑에야 깔리었겠는가. 그럴만한 인재가 있었건만 그로 하여금 그 마음먹은 바를 완수케 하지 못하여 만사가 끝장나게 하였으니 어찌 하리요. 한 선비의 등용됨과 버려짐이 이 세상의 흥망과의 관계가 얼마나 큰가?정인보가 <총서>에서 신경준을 평한 글이다. 신경준은 여러 방면의 학문에 능통하여 세상의 사리를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런 신경준이 국정에 깊이 관여하는 위치에 있었더라면, 그의 학문이 채택되어 나라가 망하는 처지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일본을 능가하는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안타까워 한 것이다.△여암 신경준이 태어난 순창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장가인 여암 신경준(申景濬)의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菴)이다. 아버지는 신숙주(申叔舟)의 아우 말주(末舟)의 10대손인 진사 내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 이의홍(李儀鴻)의 딸이고 신경준은 맏아들로 태어났다.신경준은 태어난 지 겨우 아홉 달 만에 벽에 쓰여 진 글씨를 알아보았고, 네 살에 천자문을 읽었다. 다섯 살에는 시경(詩經)을 읽었으며, 그의 학문은 해가 더하면서 일취월장하였다.신경준이 일곱 살 때의 일이다. 뜰 안에 있는 늙은 살구나무가 오랫동안 열매가 맺지 않는 것을 나무라는 글을 지었다. 그러자 나무가 그의 말을 알아들었던지 열매가 열려 마을 사람들이 놀랬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공이 재주가 뛰어나고, 큰 뜻이 있어서 일찍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천하의 일은 모두 내 직분을 것이다. 한 가지 일이라도 다 하지 못한 것은 나의 수치요, 한 가지 재주라도 모자람이 있는 것은 나의 흠이다. 라고 하면서 모든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두루 깨치지 못한 바가 없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지세(地勢)에 대해서는 환하여 무릇 장수가 될 자는 모름지기 먼저 지리에 통하여야 한다.고 하였다.그와 가깝게 지냈던 홍양호(洪良浩)의 문집인 <이계집(耳溪集)>에 실린 묘갈명(墓碣銘)에 실린 신경준에 대한 글이다.신경준의 생애는 순탄한 생이 아니어서 어렸을 때부터 내외로 고생이 많았다. 그의 나이 여덟 살 때인 1719년에 유학 차 홀로 상경하여 서울에 있다가 그 다음해인 9살 때에는 강화도로 옮겨갔다. 강화도는 양명학(陽明學)을 계승한 하곡 정제두(鄭齊斗)가 1709년에 낙향해서 학문을 꽃피운 곳이었다. 강화도에서 공부한 지 3년 뒤인 열두 살에 다시 고향인 순창에 내려온 신경준은 청년기를 순창에서 보내며 고체시(古體詩)와 당시(唐詩)를 배우면서 시를 지었다.스물여섯 살 때까지 이곳 저 곳을 돌아다니던 1737년에 그의 아버지가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진사로 일생을 마쳤지만 자식들에게 엄했고, 그의 가르침은 깊어서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너희들은 세상에서 구차한 사람이란 소리를 듣지 말아라. 재물을 탐내지 말고 벼슬을 구차하게 구하지 말아라. 구차하게 얻은 벼슬은 부끄러운 것이요. 반드시 뒤에 재앙이 있는 법이니, 나는 그런 자식은 가지고 싶지 않다. 그런 아버지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신경준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만이 아닌 스승과 같은 사람이었다.부모님 상을 마친 신경준은 동생들과 어머니를 모시고 스물일곱 살에 경기도 소사(素沙)로 이사를 갔고 3년 뒤에 직산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때 지은 글이 <소사문답(素沙問答)>과 <직주기(稷州記)>이다.그 당시의 시대부들 대부분이 한 곳에 머물며 학문을 연마했던 것과 달리 신경준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인간은 경험한 것만큼만 쓸 수 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말과 같이 신경준은 학문의 진리는 스스로의 시색과 체험의 결과로 찾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젊은 시절부터 산수 유람을 좋아했다. 그런 연유로 스무 살에서 서른 살에 이르기까지 나라 안에 이름난 명산들을 두루 답사한 신경준은 그 감회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나의 성품이 멀리서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산에 들어서면 정상에 올라서 산천이 휘돌아가는 모습을 굽어보고, 내 소매 깃을 열어 만 리에서 부는 바람을 맞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젊었을 때는 넝쿨을 붙들고 곧 바로 산에 올라도 발이 오히려 가볍고 피곤한줄 몰랐는데, 나이 들어 벼슬한 지 20년 동안 한 해도 산에 오르지 못했다.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라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산수관과 학문관을 그대로 실천했던 그때의 경험이 훗날 <강계고> <산수고> <가람고> <도로고>등, 교통과 지리에 대한 저작을 남길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던 것이다. 직산에서 3년을 살다가 서른세 살에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한 신경준은 그의 나이 43세에 이르기까지 고향 순창에 묻혀서 저술에 힘썼다. 그때 강천사를 자주 찼았는데, 강천사는 그의 집안의 원찰이었다. 신경준이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서 향시(鄕試)에 응시한 것은 마흔세 살 때인 1754년(1754년(영조 30)이었다. 그때 시험관이 바로 홍양호(洪良浩)였다. 신경준은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문헌비고〉 편찬에서 〈여지고(與地考)〉를 담당했다. 여조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은 그는 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참지가 되어 〈팔도지도〉〈동국여지도〉를 완성했다. 그 뒤 1771년 북청부사, 1773년 좌승지, 강계순천부사, 제주목사를 지냈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은 1750년(영조 26)에 지은 〈훈민정음운해〉이다. 이 책에서는 한글의 작용조직기원을 논하여 과학적인 한글 연구의 기틀이 되었다.그의 업적 중에서도 가장 큰 업적은 <산경표>를 저술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유 지리학인 <산경표>가 오늘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10년 12월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조선광문회의 고전 간행사업에 의해서였다. 조선 광문회는 우리 고전의 보존과 보급을 통한 민족문화의 선양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그 뒤 <동국통감>과 박지원의 <열하일기>, 그리고 이중환의 <택리지>와 <도리표>를 발간 한 뒤 <산경표>를 다섯 번째로 출간했다. 그리고 이 책을 지은 사람이 확실하지 않다고 밝히면서 다음과 같은 해제를 실었다.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펴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없다. 오직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輿地考)>와 <산경(山徑)>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돌며 사람 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만하다.이 <산경표>는 산경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이수(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그 해제문에는 <산경표>의 저자를 모르지만 이 책은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의 <산경>을 기본삼아 쓰여 진 것이라고 적고 있다. 1769년 신경준이 지은 『산수고(山水考)』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하나의 근본이 만 갈래로 나뉜 것이 산이고, 만 갈래가 하나로 합한 것이 물이다. 나라의 산수는 열둘로 나타낼 수 있다. 백두산에서부터 나뉘어 여덟 줄기(八路)의 여러 산들이 된다. 여덟 줄기의 여러 물들이 합하여 열두 수(水)가 되고, 열두 수는 합하여 바다가 된다. 물이 흐르고 산이 솟는 형세와, 산이 나뉘고 물이 모이는 묘리(妙理)는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열두 산은 삼각산, 백두산, 원산, 낭림산, 두류산, 분수령,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육십령, 지리산이라 이른다. 열두 물은 한강, 예성강, 대진, 금강, 사호, 섬강, 낙동강, 용흥강, 두만강,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이라 이른다. 산은 삼각산을 머리로 삼고 물은 한강을 머리로 삼으니 서울을 높인 것이다. 이렇듯 우리 국토를 하나의 대간인 백두대간(白頭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인 장백정간, 그리고 열세 개의 정맥(正脈)이 큰 강의 유역을 이루고 있다.그로부터 가지를 친 지맥들이 내와 골을 이루어 삶의 지경을 마련하고 있다. 이를 분류하면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우리나라 등뼈를 이루는 것이 백두대간(白頭大幹)인데, 이것을 제대로 찾아낸 사람이 신경준이었다.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여러 학문에 능통했던 신경준이 추구했던 학문은 실제 생활에서의 효용성과 이용후생을 목적으로 한 실용주의 학문이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재야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신경준은 그들과 달리 국가적인 사업에 자신의 지식과 학문을 마음껏 발휘하여 우리나라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적 방법으로 조선후기 역사지리학에 큰 족적을 남긴 실천적 지리학자였다. / 신정일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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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16 23:02

[④ 부안 기생 이매창과 인연을 맺었던 허균] 마음만으로 나눈 허균과 매창의 아름다운 사랑…詩로 남았네

부안을 떠올리면 문득 아릿한 슬픔처럼 떠오르는 사람이 이매창이고, 이매창과 인연을 맺고 살았던 사람이 〈홍길동전〉을 지은 혁명가이자 문장가인 허균이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기행문에서 연회의 내용은 기록하지만, 기생에 대한 일이나 자세한 내용을 쓰지 않았다. 그래도 많이 남아 있는 글이 황진이에 대한 글이다. 하지만 황진이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글에는 단 한 줄도 들어 있지 않다. 황진이의 스승이었던 서경덕(徐敬德)이나 황진이와 사랑을 나누었던 소세양(蘇世讓)의 문집, 어느 곳에도 황진이에 대한 글은 한 줄도 없다. 그것은 그 당시 사대부들이 황진이가 여자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관기(官妓)였기 때문에 넣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만 후대의 사람들 중 영의정을 지낸 한음 이덕형(李德馨)이 개성 유수로 가서 어린 시절 황진이를 직접 보았다는 어떤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황진이에 대한 장문의 글을 남겼고, 유몽인과 백호 임제 등이 그에 대한 글을 썼을 뿐이다. 그 뒤, 허균의 글에 황진이에 대한 글과 이매창 그리고 다른 여러 기생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솔직하고 순수하며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허균은 기생과의 사이에 일어난 일도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기록하였다. △전운판관으로 가던 길에 이매창을 만나다 1601년 6월에 허균이 호남 지방의 전운 판관(轉運 判官:삼창의 양곡을 서울로 운반하는 직책)으로 임명 되었다. 허균 일행이 보령과 남포를 지나 전라도 만경에 이르렀고, 부안에 도착한 것은 7월 23일이었다.이때 부안의 기생인 계생(이매창)을 만났다. 그때의 상황이 〈성소부부고〉의 조관기행(漕官紀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23일(임자) 부안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高弘達)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위의 글을 보면 허균이 만난 이매창은 얼굴보다 문학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던 여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때부터 허균과 이매창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3대 여류시인 이매창 허난설헌(許蘭雪軒)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여류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이매창(李梅窓은 선조 6년(1573)에 부안현의 아전이었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桂生)이었고 매창은 호였다. 이매창은 서녀로 태어나 기생이 되었지만 얼굴은 예쁜 편이 아니었고 시와 글, 노래와 거문고 등이 능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매창과 교류를 나누었던 사람 중에 천민이었으나 훗날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집한 공로로 인해 천민에서 벗어났던 촌은 유희경(劉希慶)이 이매창의 연인이었다.〈한경지략〉 각동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밖에 촌은(村隱) 유희경의 옛집이 있었다. 그 뜰이 후에 창덕궁의 담장 안으로 편입되어서 지금 창덕궁의 내각(內閣) 뒤뜰에 있는 오래된 전나무가 바로 유희경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또한 유희경이 지은 〈촌은집〉에도 그 당시 서울 장안에 손꼽히던 명소였던 침류대(枕流臺)의 정경이 그대로 실려 있다.장안 북촌(北村)에 정업원(淨業院)이 있는데, 궁벽하나 산이 가깝고 바위에서 나오는 맑은 샘물 한줄기가 골짜기 사이로 흐르므로 이 땅을 사서 살았다유희경은 서민 출신의 풍류시인이었다. 그는 이곳 침류대에서 신흠, 권필, 임숙영. 이정구를 비롯한 당대의 문사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지냈다. 이안눌, 차천로 등과 친교를 맺었던 그는 최대립, 박지화 등과 이곳 침류대에서 풍월향도시회(風月香徒詩會)를 가졌다.유희경이 부안기생 이매창을 만난 것은 고경명이 주창해서 궐기한 의병에 참여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부안에서 아기 기생 이매창을 만나 시와 노래를 주고받으며 사랑이 싹텄다. 그때 유희경의 나이 48세였고, 이매창의 나이 스무 살 꽃다운 나이였다. 소나무 잣나무는 아름다운 인연 맺고생각하는 나의 정 바다처럼 깊건만강남으로 오는 글월 끊기니한밤중에 나 혼자 애가 타누나.라는 이매창의 시에그대 집은 부안에 있고나의 집은 서울에 있고,그리워하면서 만나지 못하니오동잎에 비 뿌리는 소리 애간장을 끊누나.라는 시를 보냈다. 하지만 사랑했던 시절은 짧고 이별의 시간은 길어서 이매창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도다.함열로 유배를 왔을 무렵 허균은 이매창을 자주 찾았고, 이 지역을 사랑했던 그는 아예 눌러 살고자 하였다. 허균은 생전에 수많은 여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진실로 사랑했던 여자는 첫 째 부인 김씨와 그리고 부안 기생 이매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허균과 매창은 육체적으로가 아닌 정신적으로 사랑과 우정을 나누었던 사이다. 이매창 역시 허균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정인(情人)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관계는 이어가지 않았다.△유희경과 이매창허균의 〈성수시화〉에 유희경과 이매창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유희경이란 자는 천례(賤隷)이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시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의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해, 매우 순숙(純熟)했다. 젊었을 때 갈천 임훈(林薰)을 따라 광주에 있으면서 석천 임억령(林億齡)의 별장에 올라 그 누각에 전 사람이 써 놓은 성(星)자 운에 한하여댓잎은 아침에 이슬 따르고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라 하니, 양송천(梁松川:양응정의 호)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부안의 창기 계생은 시에 솜씨가 있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뛰어났다. 어떤 태수가 그녀와 가깝게 지냈다. 나중 그 태수가 떠난 뒤에 읍인 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를 새웠는데, 계생이 달밤에 그 비석 위에서 거문고를 타고 하소연하며 길게 노래했다. 이원형(李元亨)이란 자가 지나다가 이를 보고 시를 지었다.한 가락 요금(瑤琴)은 자고새를 원망하나묵은 비(碑)는 말이 없고, 달만 덩실 외롭네.현산(峴山)이라 그날 양호(羊祜)의 비석에도눈물을 떨어뜨린 가인(佳人)이 있었던가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절창이라고 했다. 이원형은 우리 집에 드나드는 관객(館客)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와 이여인과 함께 지냈던 까닭에 시를 할 줄 알았다. 다른 작품도 좋은 것이 있으며, 석주 권필이 그를 칭찬하고 좋아하였다.허균은 이 매창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항상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지냈다. 가까운 듯 먼 듯 지내지만 그리운 마음을 간직하고 살던 허균이 1609년(기유년) 1월, 매창에게 편지 한통을 보냈다. 아가씨는 보름날 저녁에 비파를 타며 산자고를 읊었다는데, 왜 한가하고 은밀한 곳에서 하지 않고, 바로 윤비(尹碑) 앞에서 하여 남의 허물 잡는 사람에게 들키고, 거사비(去思碑)를 시로 더럽히게 하였는가. 그것은 아가씨의 잘못인데, 비방이 내게로 돌아오니 억울하오. 요즘은 참선(參禪)은 하는가? 그리운 정이 간절하구료.그리고 그해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9월에 다시 편지를 보냈다. 봉래산(蓬萊山)의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려는 흥취가 도도하오.아가씨는 반드시 성성옹(惺惺翁:그 자신을 말함)이 시골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을 걸세. 그 시절에 만약 한 생각이 잘못되었더라면 나와 아가씨의 사귐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그토록 다정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 와서야 풍류객 진회해(秦淮海)는 진정한 사내가 아니고 망상(妄想)을 끊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한 줄을 알았을 것이오. 어느 때나 만나서 하고픈 말을 다할는지, 종이를 대하니 마음이 서글프오.허균은 그러나 그 편지를 보낸 뒤 다시는 이매창을 만날 수가 없었다. 이매창이 그 다음해인 1610년에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마음과 몸으로 다 사랑을 나누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만으로 사랑하는 것도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런데 그토록 마음으로 지극한 정을 나누었던 이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는가. 허균은 〈계랑의 죽음을 슬퍼하다〉라는 시 한편을 지었다.계생은 부안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개결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亂)의 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그 수를 지어 슬퍼한다.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妙句堪璃錦)청아한 노래는 가는 구름을 멈추게 하네(淸歌解駐雲)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 세상에 귀양 왔고(偸桃來下界)선약을 훔쳤던가 이승을 떠나다니(竊藥去人群)부용의 장막에 등불은 어둑하고(燈暗芙蓉帳)비취색 치마에 향내만 남았구려(香殘翡翠裙)명년이라 복사꽃 방긋방긋 피어날 제(明年小桃發)설도의 무덤을 어느 뉘 찾을는지(誰過薛濤墳)처절한 반첩호의 부채라(凄絶班姬扉)비량한 탁문군(卓文君)의 거문고로세(悲凉卓女琴)나는 꽃은 속절없이 한을 쌓아라(飄花空積恨)시든 난초 다만 마음 상할 뿐(襄蕙只傷心)봉래섬에 구름은 자취가 없고(蓬島雲無迹)한 바다에 달은 하마 잠기었다오(滄溟月已沆)다른 해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엔(他年蘇小擇)낡은 버들 그늘을 이루지 못했네(殘柳不成陰)허균은 그 당시 천대받던 기생도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였던 것이다. 이매창이 죽고 60여 년이 지난 후 부안의 아전들이 그의 시들을 모았고 그가 생존에 자주 찾았던 개암사(開巖寺)에서 남아 있는 시들을 모아 책을 펴냈다. 부안을 고향으로 두고 시작활동을 했던 시인 신석정(辛夕汀)은 이매창유희경직소폭포를 가리켜 송도삼절과 견주어 부안삼절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다시 짓는다면 이매창, 허균, 직소폭포를 부안 삼절로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매창이 사랑이 끊어질 것을 두려워하며 쓴 시 취하신 님께(증취객:贈醉客)를 읽으면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도 슬픈 것인가를 느낄 때가 있다.술 취한 님 비단 옷소매를 잡았네(醉客執羅衫) 옷소매가 손 길 따라 찢어졌네(羅衫隨手裂 )비단 저고리 조금도 아까울 건 없지만(不惜一羅衫) 다만 맺은 정이 끊어질까 두려워 그러네(但恐恩情絶)이매창도 가고 허균도 세월 속에 사라져 간 부안에 매창의 묘(매창이 뜸 이라고 불렀음)와 허균의 시만 남아 길가는 나그네들을 맞고 있을 뿐이다.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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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09 23:02

[③ 완주 경천 화암사 가는 길] 흩날리는 꽃비에 취하니 세상사 저만치…

가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부터 설레는 절이 있다. 가까워지면 질수록 가슴이 훈훈해지는 절이 완주군 경천면에 있는 화암사다. 경천면 소재지를 지나고 가천리에 접어든다.맑은 냇물이 아름답게 흐른다고 하여 가천(佳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가천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화암사 입구에 이른다.나라 안에 절로 가는 길이 아름다운 길이 많이 있지만 화암사로 가는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직접 가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이절 화암사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주줄산에 있다. 가느다란 잎사귀에 털이 덥수룩한 나무가 있어, 허리띠처럼 어지럽게 드리웠는데, 가느다란 빛이 구경할만하며, 다른 군에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세속에서는 전단목이라고 부른다나무숲이 깊은 산처럼 우거져서 나무의 이름조차 헤아릴 수 없는 화암사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숨은 보석 같은 길이다.그 아름다운 정경이 15세기에 만들어진 〈화암사중창기華巖寺重創記〉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절은 고산현(高山顯) 북쪽 불명산(佛明山) 속에 있다.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며 봉우리들은 비스듬히 잇닿아 있으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이 없어 사람은 물론 소나 말의 발길도 끊어진지 오래다. 비록 나무 하는 아이, 사냥하는 남정네라고 할지라도 도달하기 어렵다. 골짜기 어구에 바위벼랑이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에 이른다. 골골의 계곡물이 흘러 내려 여기에 이르면 폭포를 이룬다. 그 바위벼랑의 허리를 감고 가느다란 길이 나 있으니, 폭은 겨우 한자 남짓이다. 이 벼랑을 부여잡고 올라야 비로소 절에 이른다. 절이 들어선 골짜기는 넉넉하여 만 마리 말을 감출만하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해묵어 늠름하다. 고요하되, 깊은 성처럼 잠겨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둔 복된 땅이다. 천천히 오르는 산길, 그 어디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처럼 수수하다. 세월의 이끼 얹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린 오솔길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작은 폭포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숲길의 정취가 마음속으로 고스란히 스며들 것 같은 이 길을 걸었던 사람이 백문절(白文節)이었다. 고려 충렬왕 때의 학자이자 빼어난 문장가로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과 보문각학사를 지냈던 그가 이절을 찾아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어지러운 산 틈 사이로 급한 여울 달리는데, 우연히 몇 리 찾아가니 점점 깊고 기이하네. 소나무. 회나무는 하늘에 닿고 댕댕이 줄 늘어졌는데, 백 겹 이끼 낀 돌다리는 미끄러워 발 붙이기 어렵구나. 말(馬)버리고 걸어가니 다리는 피곤한데, 길을 통한 외나무다리는 마른 삭정이일세. 드물게 치는 종소리는 골을 나오기 더디고, 구름 끝에 보일락 말락 지붕마루 희미하다.(중략)조용히 와서 하룻밤 자니 문득 세상 생각을 잊어버려, 10년 홍진(紅塵)에 일만 일이 틀린 것 알겠구나. 어찌하면 이 몸도 얽맨 줄을 끊어버리고, 늙은 중 따라 연기와 안개에 취해볼까. 산 중은 산을 사랑해 세상을 나올 기약이 없고, 세속 선비도 다시 올 것 알지 못하는 일, 차마 바로 헤어지지 못해 두리번거리는데, 소나무 위에 지는 해 세 장대(三장)기울었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글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듯한 산길을 한참 올랐다. 그렇게 오르기 힘들었던 바위벼랑 아래 철 계단을 만들어서 옛길을 오르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화암사를 갈 때마다 나는 항상 그 길을 따라간다. 요란스레 물소리가 들렸다. 눈을 들어보니 70여m 쯤 깎아지른 절벽위에서 떨어지는 폭포소리였다. 쇠다리로 만든 층계가 있지만 옛 사람들이 다녔던 바위벼랑길을 오르며 나는 그 작은 폭포마다 이름을 짓고 싶었다. 마지막 계단을 올랐을 때, 그렇다. 도솔천이 눈앞에 펼쳐지고 화암사가 눈앞에 펼쳐진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 극락전 앞에 조심스레 가만히 서서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 아이들을 데리고 이 절에 왔을 때 나는 너무 화암사의 정경에 취해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때 어린 딸이 침묵을 깨고서 우화루를 보며 나에게 말했다. 아빠! 저기 의자에 앉자. 그때 너무도 낮 익은 풍경에 나는 놀랬었지. 어쩌면 오래전에 혹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절집 우화루에 작은 창문이 있었고 창문 옆에 엇비슷이 약간 찌그러진 나무 의자가 있었지. 조심스레 앉아 나는 개울물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나 자신 깊숙한 곳으로 천천히 빠져 들어 갔었지.작지만 아늑하고 가슴이 훈훈해지는 절 화암사에 우화루(雨花樓)(보물 662호)가 있다. 꽃 비 흩날리는 누각이라는 이름의 이 누각은 목조로 지은 정면 3칸과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누각형 식이다. 외부는 기둥을 세우고 안쪽은 마루를 깔았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있는 전면 기둥들은 이층이며 계곡을 바라보고 있는 후면은 축대를 쌓은 후 세운 공중누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우화루는 건축형식으로 보아서 극락전을 세운 시기에 만들어진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 문무왕 때의 초창된 것으로 추측되는 천 삼백여년의 세월을 견디어 온 옛 절 화암사는 창건자나 창건연대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이곳의 별장에 와 있을 때 용추(龍湫)에서 오색이 찬란한 용(龍)이 놀고 있었고, 그 옆에 서 있던 큰 바위위에 무궁초가 환하게 피어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 절을 지은 뒤 화암사라고 했다고 한다. 화암사 극락전과 우화루를 보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실린 〈화암사 중창기〉의 내용을 보자.예전 신라의 원효, 의상 두 조사가 중국과 인도를 편력하다 도를 이루고 돌아와 이곳에 석장(錫杖)을 걸고 절을 지어 머물렀다. 절의 주존불인 수월관음상은 의상스님이 도솔천에 노닐다가 친히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을 보고 만든 것으로, 등신대의 원불이다. 절의 동쪽 산마루에 대가 있으니, 그 이름을 원효대라고 하고, 절의 남쪽 고개에 암자가 있어 그 이름을 의상암이라 하는데, 모두가 두 분 조사가 수행하던 곳이다.원효와 의상 이후 고려시대의 사찰 기록은 거의 없고, 조선 1425년 세종 7년에 전라관찰사 성달생(成達生)의 뜻에 따라 당시의 주지 해총(海聰)이 1429년까지 이 절을 4년간에 걸쳐 중창, 이 때 화암사가 대가람의 면모를 갖춘다. 그 후 화암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극락전과 우화루를 비롯한 몇 개의 건물만 남기고 모조리 소실되었으며 훗날에 지어진 명부전과 입을 놀리는 것을 삼가라는 뜻을 지닌 철령재와 산신각 등의 건물들이 ㅁ자를 형성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극락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 가을에 다시 와 떨어지는 나뭇잎 바라보리라극락전을 나온 나는 최순우 선생이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 굽이쳐 흘러가는 소백산 자락의 산들을 바라보았듯이 화암사 극락전의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녹음우거진 산들을 바라보았다. 비 내린 뒤끝이라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쉴 새 없이 내 귀를 어지럽혔다. 나는 허물어 내려앉듯이 적묵당 마루에 앉았다.적묵당은 우화루와 극락전 사이 서편에서 동쪽을 향하여 후원을 겸한 건물로 날개를 맞대고 서 있는데 마루에 앉으면 한없는 부드러움이 돌아감을 잊게 한다. 지난번 답사 때부터 낮이 익은 해맑은 낮 빛의 젊은이와 인사를 나누었다. 스님은 출타중이시란다. 지난번에도 스님이 안계셨는데 이 좋은 절집에서 스님을 뵐 수 없으니, 그러나 알고 보면 같이 온 일행들이나 나도 모두 다 세상이라는 여행길에 저마다의 방법으로 나름대로의 수행을 쌓고 있는 수행승들은 아닐는지.극락전으로 들어가 마음 비우고 절을 올렸다. 그때 딸인 듯싶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30대 초반의 젊은 여인이 들어서서 향불을 피웠다. 정성스레 공을 들이는 모녀를 뒤로 하고 극락전을 나와서 우화루 계단을 내려 설 때 폭포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내게 이렇게 속삭였는지도 모른다. 가지 말아라가을에 다시 나는 화암사에 오리라. 불명산의 모든 나뭇잎들이 색색으로 물들었을 때 또는 더 늦어 그 잎 새들이 한잎 두잎 떨어져 내릴 때 우화루에서 나무로 만든 여닫이문을 열어젖히리라. 그리고 옷깃 여민 채 시간 속에서 시간을 묻고, 길에서 길을 물으며 흐르는 세월 속을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눈시울 적시며 바라보리라.● 건축학도 필수 답사처 극락전- 유연한 아름다움 빼어난 하앙식 건축물이 절의 극락전(極樂殿)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물이었다가 국보(국보 제 316호)로 승격되었다. 중국 남조시대에 유행하던 하앙식(下昻式) 건축물로 지어진 우리나라에 유일의 목조 건축물이라서 건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수 답사처이기도 하다.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맞배지붕이고 중앙문은 네 짝으로 된 분합문이며 오른쪽과 왼쪽문은 세 짝으로 된 분합문으로 되어있다.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조선조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극락전은 남쪽을 향하여 지어져 있다. 1m 정도의 높은 기단위에 세웠고, 전면은 처마를 앞으로 길게 빼내기 위하여 하앙을 얹은 후 이중에 서까래를 가공한 것인데, 하앙이란 하앙부재를 지렛대와 같이 이용하여 외부처마를 일반 구조보다 훨씬 길게 내밀 수 있으며, 특히 건물의 높이를 올려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하앙식 건축물은 비바람을 막아 주면서도 그 유연한 아름다움이 빼어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와 같은 하앙식 건축물 구조의 실례가 많이 남아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현존 양식을 찾지 못하다가 1976년 학계에 처음 보고되면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졌다. 그 때 해방 이후 목조건축물 문화재계의 최대의 발견이라는 찬사가 나오면서 국내외 전문가들의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극락전 후면의 처마는 하앙식이 가공되지 않았는데 문의 전면에는 양측의 세 짝 가운데 칸에는 분합문이 되어 있다. 또한 빗살무늬 문살로 짜여 진 좌우측에는 외짝의 출입문이 나있다.극락전의 기둥은 배흘림 기둥으로 처리되어 있다. 내부에는 가운데에 양목이 얹어져 천정의 높이가 전후 면에서 크게 좁혀진 형국이다. 극락전의 내부 닫집에 비상하는 용의 형태가 인상적이고 비천상이 특이한 형태로 걸려있다. 극락전에는 후불탱화와 불좌대 및 업경대, 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이 있다. 임진왜란 때 종이 소실된 후 광해군 시절 호영(虎英)스님이 주조하였는데, 종각을 세우고 종소리로 중생을 깨우치도록 한다는 뜻으로 종 이름을 자명종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이 절의 특이한 점은 해총스님의 제자들이 직접 흙을 빚어 만든 기와가 6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한 조각 흠도 없이 얹혀 져 있다. 옛 사람들이 절을 지었던 정성과 기술은 정말로 지극한 불심이 아니고서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경외감도 주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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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02 23:02

[② 남원 교룡산성에 남은 역사의 흔적] 최제우, 남원 은적암서 머물며 동학사상 이론화

겨우 한 가닥 길을 찾아 걷고 걸어서 험한 물을 건넜다. 산 밖에 다시 산이 나타나고 물밖에 또 물을 건넜다. 다행히 물 밖의 물을 건너고 간신히 산 밖의 산을 넘어서 바야흐로 넓은 들에 이르자 비로소 큰 길이 있음을 깨달았네.조선 후기에 동학을 창시한 경주 사람 수운 최제우(崔濟愚)가 쓴 시 한 편이다. 이 시(詩)는 인간의 삶을 짧고 간결하게 노래한 시라고 볼 수 있다.최제우가 살았던 그 시대는 암흑의 시대였다. 그가 펴고자 했던 사상은 국가적으로 보면 이단이었다. 그 시대에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한울님이 있다고 설파한 그의 사상은 얼마나 불온한 것이었던가. 수운 최제우의 자취가 진하게 남아 있는 곳이 남원의 진산인 교룡산이다.△교룡산성 안의 선국사 은적암교룡산의 중턱을 띠처럼 휘감고 잘 다듬어진 작은 돌로 담장처럼 쌓여진 교룡산성은 〈남원지(南原誌)〉에 의하면 백제 때에 축성된 것이라 한다. 성의 둘레는 3200미터에 달하며 높이는 4.5미터쯤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4대문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서남북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동문인 홍예문(虹霓門)만 옛 모습대로 남아 있다. 교룡산성 안에 있어 산성절이라고도 부르는 선국사의 본래 이름은 용천사(龍泉寺)이다. 용천사가 선국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 분명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선국사가 한창 번성했던 시절에는 승려들만 300여 명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대웅전과 칠성각요사채, 그리고 지리산이 한눈에 조망되는 보제루(普濟樓)만 쓸쓸하게 남아 있다. 선국사의 작은 암자인 은적암에서 새로운 도약을 위해 8개 월 여를 머물렀던 사람이 최제우였다. 최제우는 1824년 경주 현곡리에서 근암(近庵) 최옥과 청주 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도언(道彦)이며 호는 수운(水雲) 또는 수운재(水雲齋)라 했다. 최제우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고 인물이 훤칠해서 주변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보따리 장사를 택했다. 그 이유는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였다. 최제우는 그의 나이 스물하나가 되던 1844년에서 1854년까지 전국을 돌아다녔다. 당시 돌아다니던 곳 중에 삼각산과 금강산, 그리고 남원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아마도 경기도,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 일대를 돌아다닌 것으로 보인다. 최제우는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 난국을 어떻게 풀 것인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지만 대부분 공맹의 도를 말하거나 진인(眞人)이 나타나 세상을 구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는 불교와 유교, 그리고 바다를 건너온 천주교까지 섭렵했지만 그것들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큰 고민에 빠진 최제우는 1854년 봄 스스로 해답을 찾기로 결심한다. 어지러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참다운 진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최제우는 나라 곳곳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서른한 살이 되던 해 처자를 데리고 울산으로 갔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일은 어긋나기만 했고 뜻한 바는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아버지가 글을 가르치던 용담정에 돌아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유유자적하기로 결심했다.△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그러던 중 1860년 4월 5일. 조카의 생일에 참석했다가 한기가 몹시 나 집에 돌아왔는데, 그 날 최제우는 상제의 음성을 들었다. 훗날 최제우는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황홀한 경지 속에서 한울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회상했다. 나의 신성한 부적을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너에게 무궁무진한 도를 내릴 것이니, 이를 닦고 다듬어서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라. 너로 하여 이 세상을 빛내게 하리라,최제우는 한울님의 말씀을 듣고 정신이 맑아짐을 느꼈고 신비한 빛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이 체험을 계기로 최제우는 이 세상을 구하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됐다. 최제우는 그 뒤 수심정기(守心正氣), 즉 한울님의 마음을 잃지 않고 도의 기운을 기르는 데 열중한 그는 〈용담가龍潭歌〉, 〈처사가(處士歌)〉, 〈교훈가(敎訓歌)〉, 〈안심가(安心歌)〉 등의 가사를 연이어 지은 뒤 다음해에는 13자 주문을 지었다. 최제우는 사람이 곧 한울이다라는 인내천 사상과 인간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교리를 폈다. 부하고 귀한 사람이 지나간 때에는 빈천으로 되고 빈하고 천한 사람이 다가올 때에는 부귀가 된다. △관의 감시를 피해 은적암으로 은둔하다도를 깨우친 최제우는 동학을 널리 펴려 했지만 이내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추로지향(芻魯之鄕: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이르는 말)을 자처하는 영남의 사대부들이 동학을 비난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빗발쳤다. 결국 경주 관아에서 최제우를 불러다 활동을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최제우는 울분에 찬 마음을 안고 그 해 12월 전라도로 피신하게 된다. 울산과 고성을 거쳐 여수를 지나고 구례를 거쳐 경주를 떠난 지 2개월만인 12월 15일경 남원에 이르렀다. 남원에 도착한 최제우가 처음 만난 사람은 광한루 밑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서형칠(徐亨七)이었다. 그를 찾아간 것은 경주를 떠날 때 약종상을 하던 최자원(崔子元)으로부터 받아온 귀한 약재를 팔기 위해서였다. 이때 양형숙(梁亨淑), 양국삼(梁局三), 서공서, 이경구(李敬九), 양득삼(梁得三) 등이 최제우를 만나 동학에 입문했다. 이것이 남접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난 후 서형칠이 최제우를 교룡산성의 조용한 암자인 덕밀암으로 모셨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에서는 그 당시의 상황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법경을 외워 소원을 축원하며 새벽 불공을 드렸다. 송구영신의 회포와 감회를 금치 못하면서 외로운 등불 아래서 한밤을 지샜다.선국사 대웅전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은적암 터 가는 길, 덕밀암터 가는 길이라는 나무 팻말이 표시되어 있고, 능선 아래 대나무숲에 쌓여 있는 은적암터에 이른다. 최제우는 이곳 덕밀암에서 6개월을 지내며 암자의 이름을 은적암(隱蹟庵)이라 고쳐 불렀다. 고향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 스산한 타향의 서러움, 그리운 친지들과 처자들을 생각하며 보낸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겠는가?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서는 이 기간 동안 힘써서 〈도수사(道修詞)〉를 짓고 〈동학론(東學論)〉과 〈권학가(勸學歌)〉를 지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861년 2월 경, 최제우는 이곳 은적암에서 〈칼노래〉 즉 검가를 지었다. 칼 노래는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 중에 혁명적인 노래의 핵심이 되었는데, 최제우는 묘고봉(妙高峰)에 올이 노래를 부르면서 칼춤을 추었다고 한다.시호시호 이내시호 부재패지 시호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 만년의 시호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비켜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대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혀 있네, 만고망장 어디 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최제우는 선국사 근처의 대밭 속에서 또는 그 뒤를 이어 동학을 밝히는 〈논학문(論學文)〉 등을 집필하였다. 동학이라는 이름은 최제우가 은적암에서 지은 〈논학문〉에서 처음 비롯된 것이다.최제우는 자신이 창시한 도의 이름을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서학에 비견하여 동학이라 지은 뒤 동학이라 지은 이유를 이렇게 풀이했다. 우리는 동방에서 나서 동방에서 산다. 도는 천도라 하여도 학은 동학이다. 땅이 동서로 나뉘어져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서를 동이라 하고 동을 서라 부를 수 있겠는가?(중략) 우리 도는 이곳에서 받아 이곳에서 넓힌 것이기 때문에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최제우는 그 뒤 6월 경주로 떠나기 전까지 이곳 은적암에서 〈수덕문(修德文)〉과 〈몽중노소문답가〉를 지었다. 그 뒤 최제우는 남원 생활을 접고 6월 하순에 길을 떠나 7월 초순 경주에 도착했다.고향으로 돌아온 최제우는 동학의 단위 조직인 접을 만들면서 동학을 전파하다가 1863년 12월 10일 새벽, 구미산 자락 용담골에서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가던 최제우는 여러 가지 복잡한 국내외 상황 때문에 대구로 되돌아왔고, 1864년 3월 10일 대구 장대에서 유교의 가르침을 어지럽히고 나라의 정치를 문란케 했다는 죄목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그때 남원에서 지은 〈칼노래〉가 죽음을 당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동학의 두목 최제우는 삿된 방술로써 사람을 고치고 병을 낫게 한다고 사칭했으며 주문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속였고 칼 노래로써 국가의 정사를 모반했으니 좌도난정률(左道亂政律)에 따라 처형함이 마땅하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최제우의 목을 아무리 칼로 내리쳐도 목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다. 경상감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자 최제우가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맑은 물 한 그릇을 가져오라. 그렇게 최제우가 청수(淸水)를 마신 다음에야 순조롭게 형이 집행됐다. 이 때문에 천도교에서는 지금까지도 청수가 교주의 맑은 피를 뜻하고 있다. 그 때 최제우의 나이 41세였으니 깨달음을 얻고 동학을 전파한 지 햇수로 불과 4년만이었다. 최제우가 은적암에서 숨어 지낸 8 개월이 남접(南接)의 시작이 되었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당시 김개남이 집강소를 설치했던 곳이 선국사였다.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수운이 은적암서 만난 송월당 스님 "이미 물든 종이는 건지려면 찢어질 뿐이니"수운이 이곳에 머물러 있자 남원지역에 사는 많은 유생들과 스님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와 문답을 나누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송월당(松月堂)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스님이었다.수운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서, 수운과 담론을 즐기기 위해서 찾아 온 노스님은 수운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선생은 불도(佛道)를 연구하십니까? 수운이 답하기를 예, 나는 불도를 좋아합니다.그러면 어찌하여 중이 되지 않으셨소? 중이 아니고서도 불도를 깨닫는 것이 좋지 않소?그러면 유도(儒道)를 좋아하십니까? 나는 유도를 좋아는 하지만 유생(儒生)은 아닙니다. 그러면 선도(仙圖)를 좋아합니까? 선도를 하지는 않지만 좋아는 하지요. 그러면 무엇이란 말씀입니까?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이, 아무것이나 다 좋아한다 하니 그 말의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수운이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두 팔 중에 어느 팔을 배척하고 어느 팔을 사랑하는지요?노승은 그때서야 그 말의 뜻을 깨닫고서, 예 알겠습니다. 선생은 몸 사랑하는 분이시군요! 하였고 수운은 그의 말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오직 우주의 원리인 한울님의 도(道), 바로 그 천도(天道)를 좋아할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노스님은 감복하여 한참 동안 말을 잊고 있었다.훗날 제자들이 수운에게 물었다. 은적암 노승에게 왜 도를 전하지 않으셨습니까?수운의 대답은 이러했다. 이미 물든 종이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못하나니, 노승은 이미 물든 종이라. 건지려면 찢어질 뿐이니 그대로 두는 것이 도리어 옳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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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25 23:02

[프롤로그] 전북의 산하, 긴 장정을 시작하며

걷는 게 대세다. 그냥 걷는 것도 좋지만,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호흡하면 걷는 길은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전북일보가신정일과 함께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을 기획했다. 우리나라 대표적 문화사학자이자 우리 땅 구석구석을 걸어온 신 씨를 통해 또다른 길의 세계를 만나는 자리다.운명이거니 하며 걸었다. 이 땅의 강과, 산 그리고 5000년 역사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옛길(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을 걷고 또 걸었다. 걷다가 만난 사물이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길은 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주었다. 다산 정약용이 지은 〈소요원기(逍遙園記)〉에 나오는 글처럼 세상의 길속에서 어정거리고, 글 속에서 어정거리다가 보니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무엇보다 걸으려는 욕망을 잃지 말자. 매일 같이 나는 걸으면서 행복한 상태가 되고, 걸음을 통해 모든 질병으로부터 벗어난다. 나는 걷는 동안 가장 좋은 생각들을 떠올렸다. 덴마크의 철학자인 키르케고르의 말이다. 독일의 철학자인 니체도 말했다. 걷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은 믿지 말라. 그랬다. 그렇게 머릿속에서만 빙빙 맴돌며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글들이 전체를 걸고 결사적으로 걷기 시작하자, 하나둘씩 그 실체를 드러냈다. 그때야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피력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아, 그처럼 방구석에 갇혀 있어 세상구경이란 공휴일에나 겨우 하고, 그것도 망원경을 통해서 보듯 멀찌감치 떨어져서나 보는 것이니 그래 가지고야 어찌 중생을 지도할 수 있겠습니까?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바꾸어 말한다면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산천을 또한 유람하는 것과 같다. 견문이 넓어야 안목이 넓다는 것, 이것 역시 고금의 진리다. 길은 수없이 많은 책들이 펼쳐진 도서관이며, 역사의 유물들이 진열된 박물관이다.그렇다면 현대인들이 걷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 째가 건강이다.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行補가 낫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약이라도 맛있는 음식이 낫고, 음식보다 더 좋은 것을 걷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다산 정약용 역시 걷는 것은 청복淸福, 즉 맑은 즐거움이다.라고 극찬을 했는데, 경치가 좋고 공기가 맑은 곳을 한 사나흘 정도 걸으면 5십만 원짜리 보약 한재 먹는 것보다 더 낫다.두 번째가 마음을 다스리는데 걷기처럼 좋은 운동이 없기 때문이다. 루소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 한 발 한 발 걸으면서 여러 가지 사물을 만나게 되고, 결국은 내가 나를 만나는 것이 걷기의 매력이다.세 번째는 아무래도 빠르게 빠르게만 익숙해진 세상에서 느리게 걸으며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리라. 하루나 이틀 도보답사와 달리 열흘에서 보름까지 장거리 도보답사는 여러 가지 재미난 현상을 겪게 된다. 영남대로를 열나흘에 걸쳐 걸어갈 때의 일이다. 엿새를 지나면서부터 꿈을 꾸면 길을 걷고 길을 묻는 꿈만 꾸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오전에는 도란도란 이야기라도 나누며 걷지만 오후에는 서로 싸운 사람처럼 혼자서 가고, 쉴 때에도 혼자서 먼 산을 보며 쉬게 된다. 불경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것이 바로 장거리 도보답사다. 길을 걷다가 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길 위에선 나그네는 큰 것보다 작고 사소한 것에 감동한다.수안보 근처 삼거리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정차해 있던 노년의 트럭 운전사가 우리를 한참 눈 여겨 보고 있더니 차에서 내려와 혹시 바나나 먹을 겁니까?하며 바나나 두 개를 건네주었다. 어디나 조선의 인심은 남아 있구나! 하다가 달리 생각해보니, 우리가 얼마나 한심하고 처량하게 보였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건네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그네는 쉴 때 가장 처량한 자세로 쉬어야 뭐든 얻어먹을 수 있다는 값진 진리(?)를 다시 한 번 터득한 순간이었다.여행은 고생을 겪어야 하고 수많은 갈림길을 지나야 한다. 이백의 글이다. 나그네에게 유일한 즐거움이 있나니 그것은 참고 견디는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독일의 작가인 헤세였다.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인생 길 자체가 말 그대로 고행(苦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 길을 나서는 것은 그 어떤 것에 비할 바 없는 즐거움이다. 왜, 무엇 때문에 이처럼 걷기가 열풍이 불었을까? 그 해답이 박지원이 지은 〈연암집〉 창애에게 보내는 답장에 실려 있다.화담 서경덕이 길에 나섰다가 우는 사람을 만나서 물었다. 왜 울고 있는가? 그 사람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가 다섯 살 때부터 눈앞을 보지 못한 것이 벌써 20년째입니다. 아침나절에 집을 나왔다가 갑자기 눈이 떠져서 천지만물을 환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뻐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골목은 여러 갈래요. 대문도 비슷비슷해서 우리 집이 어딘지 알 수가 없어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화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대의 집을 잘 찾아가도록 알려주겠네. 다시 그대의 눈을 감으면 곧 돌아갈 수 있을 것이네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이 눈을 감고서 지팡이를 두드리며 걸음을 걷자 곧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빛과 형체가 거꾸로 되고 슬픔과 기쁨이 작용을 하는 까닭이다. 이것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지팡이를 두드려 걸음을 걷는 대로 가는 것은 우리들의 분수를 지키는 이치(理致)이며 우리들이 잃어버린 집을 찾아가는 증거이다.이 시대는 모든 사람이 집을 나와서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므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자동차를 타기 시작하며 걷는 방법을 잊었고, 잊음과 동시에 생긴 부작용을 깨달은 현대인들이 길로 나와서 걷기 시작한 것이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세상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신약성서〉 마태복음 15장 14절에 나오는 글이다. 모두가 소경이 되려다가 가까스로 빠져 나와서 걷고 또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개발과 속도에 지친 현대인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레저문화가 생겨났다. 그 첫 번째가 마라톤이었다. 세계적으로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에 제일 유행하는 운동이 마라톤이고 1만 5000달러에서 3만 달러 시대에 가장 유행하는 운동이 걷기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흐름을 바라보면 그 통계가 맞다.마라톤이 전국적으로 유행하고 등산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다가 어느 사이 걷기로 선회한 것이 불과 몇 년 전부터다.수많은 사람들이 외국에 알려진 길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과 일본의 에도시대의 옛길을 걷기 위해 나섰다. 2007년부터는 〈제주올레〉와 〈지리산 둘레길〉이 개통되었고, 온 나라 사람들이 걷기 열풍에 휩싸였다. 각 지역에서 특색 있는 길을 만들기 시작한 것도 그 이후다. 문체부, 환경부, 산림청 등 정부부처에서 길을 만들기 시작했고, 자치단체에서도 저마다 특색 있는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모악산 마실길〉 〈강화 나들길〉 〈변산 마실 길〉 〈소백산 자락길〉 〈고창 질마재 길〉 〈전주 천년고도 옛길〉 등이 언론과 방송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자치단체마다 새로운 길 만들기, 길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옛길을 공부하며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우리가 살고 있는 전라북도에도 그런 옛길들이 많이 있다. 삼남대로와 통영대로 등 옛길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문화유산과 역사유산이 산재한 길들이 곳곳에 있다. 고즈넉하면서도 아름다운 옛길과 이 땅에 족적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 지면을 빌어 매주 선보일 것이다.인간은 걸을 수 있을 만큼만 존재 한다고 말한 프랑스 철학자인 사르트르의 음미하면서.△신정일씨는신정일우리땅걷기이사장(60)은현대판 김정호현대판 이중환현대판 신 삿갓걷기 도사길 위의 철학자길 위의 시인향토사학자 영혼이 자유로운 프리랜서 등 여러 별명을 갖고 있다. 그 스스로는방외지사(方外之士, 儒家의 입장에서 유가 밖에 있는 사람)가 자신에게 맞는 별칭으로 여긴다. 혼자서 세상을 바라보고 혼자서 나름대로 공부법을 세웠고, 수많은 책을 읽고 세상을 편력하면서 공부를 하다 보니 창의적이거나 독창적인 생각을 하게 됐단다.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였기에 오로지책과 길, 그리고 자연에서 세상의 이치를 배워 자신의 진정한 스승은 곧 자연이자 책이라는 설명이다.한국의 10대 강 도보답사와 400여개 의 산들을 오르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 쓰는 택리지〉 〈조선을 뒤흔든 최대의 역모사건〉 〈느리게 걷는 사람〉 등 60여권의 저서를 냈다. 그는 최근 펴낸 자선적인 책을 통해 사람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봐야 진정한 삶을 깨닫게 될까라고 노래한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과 같은 물음을 가끔씩 자신에게 던지겠다는 말로, 길 위의 철학자생활을 계속할 것임을 각오로 다졌다. 30년간 우리 땅 걷기를 계속해오는 그는 올 환갑을 맞았지만, 지금도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올 서해안을 걷고 있다. 연초 목포에서 출발해 고창까지 걸었다. 통일이 되는 것을 전제로 2016년까지 신의주까지 북상하는 계획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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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18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