恨·슬픔, 오롯이 배어 있는 사자암 / 왕궁저수지 우리나라 지도 보는 듯 / 석탑 등 곳곳에 찬란한 백제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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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륵사지 전경. | ||
호남평야를 바라보고 우뚝 서 있는 평지돌출의 산이 있다. 그 산이 익산의 미륵산이다.
미륵산, 미륵의 나라를 염원했던 사람들이 이 산 아래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미륵사라는 큰 절을 지었다. 모든 사람들이 갈망했던 미륵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 세상에는 계두성(鷄頭城)이라는 커다란 도시가 생길 것이다. 동서의 길이는 12유순(由旬:1유순은 40리 정도)이고 남북은 7유순인데, 그 나라는 땅이 기름지고 풍족하여 많은 인구와 높은 문명으로 거리가 번성할 것이다. 향기로운 비를 내려 거리를 윤택하게 하고 낮이면 도시를 화창하게 하리라. (중략) 저때에 염부제(인간 세계의 총칭. 현세의 뜻)의 땅 넓이는 동서남북이 10만 유순이나 될 것이며 산과 개울과 절벽은 저절로 무너져서 다 없어지고, 4대해(大海)의 물은 각각 동서남북으로 나누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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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시대 미륵사지 모습. | ||
대지는 평탄하고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며, 곡식이 풍족하고 인구가 번창하고 갖가지 보배가 수없이 많으며, 마을과 마을이 잇달아 닭이 우는 소리가 서로 들리느니라. 아름답지 못한 꽃과 맛이 없는 과실나무는 다 말라서 없어지고, 추하고 악한 것 또한 스스로 다 없어져서, 달고 맛좋은 과실과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만 자라느니라.“
글만 읽어도 행복한 마음에 웃음꽃이 피는 미륵의 세상을 염원하며 지어진 미륵산 자락의 사자암은 전북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미륵산의 남쪽 중턱에 있는 사찰로서 금산사의 말사이다.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백제의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있었던 사찰이다. 이 절에는 법력이 높았던 지명법사가 있어서 서동이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았고 뒷날 서동은 선화공주를 얻은 뒤 그가 가지고 있던 보물을 신라 궁중으로 보내기 위해 지명법사에게 신라로 수송할 계획을 물었다고 한다. 이때 법사는 신통력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 놓으니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보내주었다. 진평왕은 신비로운 조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사위인 서동을 존경하였고, 늘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기 때문에 서동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서린 사찰이다. 그러나 지명이 머물렀던 사자사가 오늘날의 사자암인지는 분명치 않다.
사자사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용화산 위에 있다. 두 바위가 벽처럼 솟아 있다, 내려다보면 땅이 보이지 않는다. 돌길이 갈퀴처럼 걸려 있는데, 길을 따라 올라가면 바로 지명법사가 거주하는 곳이다.”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 지명법사는 보이지 않지만 암벽에는 ‘사자동천(獅子洞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옛날의 그 정경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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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년에 복원된 동 석탑. | ||
이 사자암에는 지은 지 오래지 않은 대웅전과 새로 황토로 지은 요사 채, 그리고 작은 삼층석탑이 세월 속에 마모된 채로 서있고 윤흥길의 작품‘에미’에서 어머니가 불공을 드리러 갔던 절로서 한과 슬픔이 오롯이 배어 있는 절이다.
한편 이절 가까운 곳에 있었다던 오금사(五金寺)에 대한 글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보덕성(報德城)남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薯童)’이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감자를 캐던 땅에서 갑자기 오금(五金)을 얻었다. 뒤에 그는 임금이 되어 그 땅에 절을 짓고 오금사라 하였다. ”
천천히 오르면서 굽어본 미륵산 아래로 삼례, 전주의 너른 들판이 눈앞에 펼쳐지고, 그때 나는 보았다.
우리나라의 지도가 시대산(227m)자락에 펼쳐진 왕궁저수지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었다. 둑을 쌓고 만드는 과정에서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자연스레 땅의 형국이 우리나라를 저렇게 만들어 냈을 것이다. 최남단에 위치한 땅 끝 갈두리에서 부터 서산 간척지, 웅진반도 그리고 우리나라의 지도상에 호랑이 꼬리라고 이름 붙여진 장기곶에 이르기까지 나는 함께 산을 오르는 일행들을 불러 모아 국토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
길은 다시 미륵산으로 이어지고 조금 오르자 만나는 바위가 미륵산에서 가장 전망 좋은 곳으로 알려진 전망대 바위다.
가깝게 혹은 멀리 서방산, 종남산 너머 운장산이 펼쳐지고 건지, 완산, 황방산 자락의 전주가 한눈에 들어서며 모악산(794m)이 조망된다. 멀리는 마한의 땅이었고, 백제의 견훤이 후백제로 이어지다가 고려를 지나서는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관향으로 자리했던 곳이 이곳 전라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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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간지주. | ||
끝없는 상념을 접어둔 채 바위 난간에 기대고 서 있다가 다시 길을 재촉하여 10여분쯤 오르자 미륵산 정상이다.
호남평야가 산 아래에 펼쳐지고 날이 맑은 편인데도 서해바다는 보이지 않고 웅포. 용안 쪽으로 금강의 물줄기가 희미하게 보인다. 그리고 천호산 너머 대둔산이 포착되다가, 다시 눈을 돌리자 구름위에 보이는 연봉들 충남의 계룡산이다. 백제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죽은 계백은 황산벌판의 구석진 곳에 한 개의 무덤으로 남아있고 “가련토다. 완산애기 애비 잃고 눈물짓네.”라는 참요만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견훤은 연무읍 금곡리에 전주 땅을 바라보며 잠들어 있다. 56억 7000만년 후에 온다는 미륵의 세상이여, 과연 그날이 올 날은 언제이며, 꼭 오기나 하겠는가? 나는 의문점을 안고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하산 길은 사자암에서 갈라진 길을 택한다
우리국토 중 가장 넓은 평야 호남평야가 텅 빈 채로 나타나고 그 가운데 점점 히 박힌 사람 사는 마을들을 바라보며 내려가는 길에 산을 오르고 내려가는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길은 평탄하게 이어지고, 바윗길을 내려서면 냉정약수터에 이른다.‘금마지’에 의하면 이 물에 목욕을 하면 부스럼이 잘 낳고 미륵산의 정기를 받았기 때문에 정력수로 이름이 높다는 이물을 떠 담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이어 서 있다. 우리들 역시 목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그 물을 마셨지만 사자암 물이나 이 물이나 거기가 거기 아닐까?
찻길을 따라 내려서면 겨울도 푸르른 대 숲길이고 그 길을 벗어나면 나타나는 넓은 절터가 미륵사터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미륵사지에 얽힌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의 어머니가 서울의 남지란 연못에 집을 짓고 홀어미로 살더니 그 못의 용과 상관하여 그를 낳았는바, 아명은 서동이다. 그는 평소에 마를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그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서 서울로 와서 동리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 먹였더니 여러 아이들이 그에게 친하게 되어 따르게 되었다.
그는 동요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달래어 노래 부르게 하였다.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서 서동이를 밤이면 안고 돈다.“모든 관리들이 말썽을 피워 공주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서동은 선화공주를 만나 인심을 얻어 임금이 되었다. 하루는 왕이 선화부인(善花夫人)과 더불어 사자사(獅子寺)로 가고자 용화산 아래 밑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미륵불 셋이 못 속으로부터 나타났다. 왕이 수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리자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여기다가 꼭 큰절을 짓도록 하소서. 저의 진정 소원이외다.”왕이 이를 승낙하고 지명법사를 찾아가서 못을 메울 방법을 물었더니 법사가 귀신의 힘으로 하루 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리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미륵 불상 셋을 모실 전각과 함께 탑과 행랑채를 각각 세 곳에 짓고 미륵사라는 현판을 붙였다.
〈삼국유사〉를 토대로 익산에서는 서동과 선화공주를 주제로 매년 축제를 열었다, 그런데, 미륵사지를 발굴하다가 석탑 조성의 내력을 밝힌 금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가 발견되면서 그것이 설화로 판명된 것이다.
미륵사를 창건 했다고 알려진 사람이 선화공주가 아니고, 백제 무왕의 왕비이자 백제 최고관직인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밝혀진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던 백제와 신라가 사돈 관계를 맺었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는데, 그 사리봉안기를 통해 그 의문점이 풀린 것이다. 그에 따라 미륵사는 백제의 독자적인 기술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커졌으며,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결혼 자체에도 의문을 던지게 된 것이다.
● 미륵사는 동양 최대 절터, 백제문화 집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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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륵사지 내부. | ||
지금도 동양 최대의 절터라고 하는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 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도로 발휘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처럼 백제의 전 국력을 집중하여 창건하였기 때문에 백제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동서로 172m 남북으로 148m에 이르는 미륵사터는 넓이가 2만 5000 평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로서, 국보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 9층 석탑인 서 석탑과 1993년에 복원된 동 석탑 그리고 당간지주가 있는데 다른 절과는 달리 2기가 있다.
하지만 미륵사가 어느 때 폐찰이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 정조 때 무장지역의 선비였던 강후전이 쓴 〈와유록(臥遊錄)〉에 의하면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에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100여 년 전에 부서 졌더라”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대다수의 절들이 임진, 정유재란 때에 불타버린 것과는 달리 다른 원인에 의해서 폐사가 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미륵사의 발굴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 절터에는 논밭과 민가가 들어서 있었고 절의 석축들 대부분이 민가의 담장이나 주춧돌로 사용되고 있었다. 발굴결과 일연스님이 기록한대로 가운데 목탑을 두고 동서로 두 개의 탑이 있었고 각 탑의 북쪽으로 금당이 하나씩 있었으며 각기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이는 탑, 금당, 강당, 승방이 일직선상에 하나씩 배치되는 일반적인 백제계 탑과는 매우 다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탑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 주로 목탑이 건립되었다. 그러던 도중에 이 익산지역의 질 좋은 화강암을 가지고 미륵사탑을 만들게 되는데 이 탑을 만들면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석탑발생의 시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미륵사탑은 신라시대에 경주 감은사탑으로 이어지고 다시 석가탑을 통하여 완벽하게 완성된다. 이 탑은 일제 무렵에 허물어져 가고 있던 것을 시멘트로 떠받쳤기 때문에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 그렇게라도 살리고 보수하지 않았더라면 국보11호로 지정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남아 있는 서 석탑과 남아있는 상륜부의 노반을 토대로 컴퓨터로 정밀하게 계산하여 복원한 동 석탑이 세워졌는데 처음 세워졌을 당시만 해도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볼수록 그런대로 어색하지 않음은 익숙해진 탓일까?
물론 천 삼백여년동안을 비바람과 세월의 무게로 얹어진 그 무게와 옛사람들의 지극한 불심이 만들어낸 서 석탑의 그 아름다움을 계산에 따라 기계로 잘라 만들어낸 동 석탑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지금은 서 석탑을 복원하느라 어수선한 미륵사지에서 9층으로 만들어진 동 석탑 사이사이에 끼어 넣은 옛 시절의 이끼 얹어진 석물들을 바라보며 그 옛날로 돌아가 보고 싶었다. 아 옛날이여! 그 날은 시간 속에 실제로 있었던 날들이었을까? 하는 생각 속으로 이태백의 〈춘야연도리원서〉가 그리움처럼 떠올랐다.
“무릇 천지는 만물이 쉬는 곳, 시간은 백대를 흘러가는 길손인데, 덧없는 삶은 꿈과 같으니, 즐거움인들 얼마나 될꼬…”.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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