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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구신이 고개의 추억] 임실장 가던 길…그 애틋한 그리움의 풍경

▲ 원촌에서 바라 본 덕태산.

고향길서 본 '임실 17km' 이정표, 까마득히 잊었던 어린시절 떠올라

아버지 사업 실패로 가세는 기울고 어머니는 행상 시작 가족 생계유지

등짐 지며 다녔던 40리 넘는 고갯길 힘들었지만 그래도 추억 새록새록

 

오랜만에 고향에 갔다. 진안군 백운면의 소재지 백암리 원촌에서 어린 시절 몇 년을 보낸 나에게 원촌은 갈 때마다 새로운 상념을 불러 일으켰다.

 

원촌은 어떤 일이건 한 번도 성공을 해보지 못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벌인 사업이라고 할 막걸리 집을 열었던 곳이다. 원촌은 조선시대에 백암원이 있었던 곳이며, 옛날 원님이 부임 할 때 이 마을에 숙소를 정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아버지가 술집, 즉 주점을 열었던 집은 주조장 집에 달린 긴 집 중 가운데 집이었다. 백운에서 하나밖에 없는 주조장 옆에 이발소집이 있었고, 바로 그 옆이 바로 우리 집이며 그 아랫집이 주조장 안집이었다.

 

술집은 너 댓 사람이 나무 의자에 앉아서 술을 마실 정도의 홀과 국수며 고기를 삶아내는 주방의 역할을 하는 부엌, 그리고 술이 한 섬 쯤은 들어갈 수 있는 항아리와 대여섯 말이 들어갈 항아리 그리고 약간의 사발과 주전자가 고작이었다.

 

이사를 가서야 알았지만 우리가 살 집은 아버지가 산 집도 아니고 주조장집 주인과 친구 사이였던 아버지가 술집을 연다는 조건으로 세들어 사는 집이었다.

 

아버지가 차린 주막이 그런대로 잘 되는 날은 5일과 10일에 열리는 장날 뿐 이었다. 장날이 되면 아버지는 부산했다. 언변이 좋고 사람 사귀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신 아버지에게는 백운 면민 모두가 친구나 다름없었다.

 

△아버지와 노름판

 

장날이면 의례히 우리 집은 노름판(도박판)으로 변형되기가 일쑤였다. 날이 저물어 가는 오후 다섯 시 쯤 되면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판 한 번 돌릴까?” 하면 아버지는 사람들을 큰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신 후 지금도 눈에 선한 국방색의 엷은 담요를 꺼내놓으셨다.

 

그 때부터 노름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눈에 선한 담배연기 자욱한 그 방, 그런 날이면 호롱불이 사라지고 두개의 밝은 호야등이 켜졌다. 멀리서 보아도 사람들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화투 패를 돌리는 사람의 손놀림이 부산 할수록 판돈도 커진다. 한숨과 탄성이 교차하면서 돈을 잃고 빠지는 사람들과 다시 교차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미닫이문도 없는 바로 윗방에서 동생과 누운 채로 그 소음에 귀 기울이지 않으려 애써 보지만 기찻길 옆 오막살이처럼 계속 들리는 소음, 그러다 한판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우리 집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 40리가 넘는 임실장을 가기위해 지나야 했던 구신이재.

그날 돈을 딴 사람은 소리 소문도 없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잃은 사람들은 퀭한 눈동자로 비실비실 일어나 우리 집 큰 방을 힘도 없이 걸어 나갔다. 어떤 날은 새벽이 다 왔는데도 그 새벽을 잃어버리고 술그릇인 사기그릇이 날라 가고 멱살잡이를 하고,

 

아버지가 노름을 잘 했는지 못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다만 머리가 영리하거나 재주가 있는 것과 화투를 잘 치는 것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이 지금의 내 생각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화투판을 벌였으면 주인인 아버지는 고리를 뜯기만 하면 무조건 남는 장사였다. 그런데 돈에 눈이 멀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순진해서 그랬는지 기어이 화투판에 끼어들어 방 빌려주고 돈을 잃는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물론 훈수를 두고 개평이나 뜯는 것이 다혈질이셨던 아버지 체질상 안 맞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노름판에서 돈을 챙기는 사람은 개평이나 고리를 뜯는 사람들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꼭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노름판에 들어가 그날 장사한 것 까지 다 날리고 마는 아버지의 심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린 내가 뭐라 할 수도 없고, 나는 동생과 함께 마치 불을 땐 오소리 굴속 같이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문득 따스한 물이 옷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아서 일어났다. 불을 켜고 보니 누군가 내 곁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알고 보니 술에 취한 성근이 양반이 노름을 하다가 돈을 다 잃고 자던 중, 무심결에 오줌을 누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어나 그분을 밀치고, 동생도 저만치 밀쳐 내고 수건으로 닦고 또 닦았다. 마치 내가 싼 오줌인 것처럼 미움이 아닌 부끄러움으로,

 

그런 날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곤한 잠에 빠져 있는 동생과 달리 내 잠은 멀리 달아나고, 모래성 같은 꿈만 꾸었다. 언제쯤 이 매캐하고 소란스런, 지옥과 같은 이 공간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진안 백운면 원촌 전경.

어쩌다 그 때와 그 집을 생각해보면 매캐한 담배 연기 속에 충혈 된 눈빛들, 그리고 한숨과 탄식이 뒤범벅이던 풍경 속으로 활활 타고 있던 호야 불이 눈앞에 선하다. 슬픔이 되고 절망이 되어 흩어져 갔던 사람들과, 그 불빛은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가 어느 날 어느 순간에 불쑥 튀어 나온다. 아! 사라져 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운 것들이여!

 

△구신이 고개를 넘어가던 추억

 

이런 저런 생각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나에게 임실 17km라고 적힌 이정표가 섬광처럼 눈에 띄었다. 그 순간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서 까마득히 사라졌던 한 시절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동창을 지나 구신리를 거쳐 대운이재를 넘어 임실로 걸어갔던 그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고개 같은 고개인 대운이재를 맨 처음 한 발 한 발 걸어서 넘었던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해였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때의 나에게 제일 부러웠던 것은 친구들이 입고 있던 중학교 교복이었다. 마치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중학교에 간 아이들은 활기에 차 있었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나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은 그들의 까만 교복만 보고도 괜히 주눅이 들어 그들을 피하곤 했다.

 

그 무렵 우리집안의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어 말이 아니었다. 평생에 걸쳐 한 번도 성공이란 것을 해보지 못하고 실패의 연속이었던 아버지를 오래전부터 믿지 못한 어머니는 6~7년 전부터 옷을 떼어다 파는 행상을 시작했다.

 

그 당시 어머니는 임실군 성수면과 관촌면 일대, 그리고 진안 성수면 일대를 다니며 옷가지를 파는 행상을 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옷가지를 팔고 받아온 쌀, 콩, 보리, 서숙이라 부르는 조 등을 백운에서 임실까지 예닐곱 말씩 이고 가서는 팔고는 했다. 그 이유는 버스 값을 아끼기 위해서였기도 하지만 임실장에 가던 길가 마을인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에 맡겨놓은 곡식을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도 어머니의 길동무 또는 짐꾼이 되어 백운 소재지인 원촌에서 임실읍 까지 17킬로미터를 몇 번이고 오고 갔던 것이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하던 나이에 그것도 친구들은 중학교에 갔는데, 곡식 너댓 말을 무겁게 등에다 지고 40리가 넘는 길을 간다. 어쩔 도리가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내가 그때 어머니와 절충했던 것이 이른 새벽에 떠나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아침 일찍 깨워 달라”고 잠이 들었지만 아침 일찍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난다는 중압감에 잠이 제대로 오기나 하는가. 이리 저리 보채는 나에게 새벽은 어김없이 오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얘야 어서 일어나야지 벌써 새벽닭이 울었단다.” 그래 무심한 새벽닭은 ‘어서 일어나라’ 꼬리를 물며 울어대고” 그래도 못들은 척 하고 누어있으면 다시 나를 깨우는 소리. 가만히 문을 열고 나 서면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무리들,

 

5일이 장이라서 전날 술을 많이 마신 아버지는 아직도 깊은 한 밤중이고, 동생들은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눈을 부비며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주섬주섬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을 몇 수저 뜨는 둥 만 둥 하고 너 말 쯤 되는 곡식을 멜빵을 해서 메면 어깨가 무지근했다.

 

유난히 작았던 열 서너 살짜리 소년이 너 댓 말쯤의 곡식을 등에 메고 허리를 구부린 채 길 위를 걷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인가? 옛 시절 창(倉)고가 있었던 동창리(東倉里)를 지나 섬진강의 최상류에 놓여 진 백운교를 건너 덕현리 원덕현 마을에 이른다. 그곳에서 숲이 울창한 구신이재를 넘어갈 때면 불쑥 도깨비가 나올 것 같기도 하고, 귀신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그 고개를 넘으면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에 닿는다. 어머니가 맡겨둔 곡식을 조금 더 찾아서 마을 뒤편으로 이어진 길을 가다가 보면 다시 대운이고개에 이른다.

▲ 대운이재. ‘지대가 하도 높아서 구름 위에 올라 앉은 것 같다’고 하여 지어진 대운마을이 있다.

진안군 백운면 남계리 오정 마을과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대운 마을 사이에 자리 잡은 대운이재고개는 이리저리로 구부러지고 나보다 두세 말을 더되게 머리에 이고 가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자꾸 가쁘다. 나도 힘들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도 없고 나는 언제쯤이면 이처럼 짐을 지고 이 고개를 넘지 않을까? 도무지 그 날이 올 것 같지도 않고 고개 마루를 넘어서 한참을 내려가면 대운 마을에 닿는다.

 

한글학회에서 나온 〈한국지명총람〉에 ‘지대가 하도 높아서 구름 위에 올라앉은 것 같다 함’이라고 기록된 대운 마을에서는 사람의 인기척을 듣고서 개들이 울어댄다. 대운 아랫자락에 있는 매바우마을을 지나 수천리에 이른다. 어머니는 거기쯤에서 보리개떡을 내 놓는다. 배가 고프면 짐을 지고 걸어가기가 쉽지 않으니 새참으로 싸 온 것이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할머니와 고모에게 당한 시집살이 얘기를 늘어놓는다. 사는 것이 힘이 들고 무엇보다 머리에 이고 가는 곡식의 무게가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설움이 복바쳐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어머니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 같지만 지금 이 현실을 잊기 위해 어젯밤에 읽다 만 소설 속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바로 그 아랫마을이 수철리(水鐵里)다. 나중에 알아본 결과 태조 이성계가 지리산에서 상이암으로 들어설 적에 만난 사람에게 “수천 리를 걸어 왔다”고 했다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한 수철리 마을을 지나 성수리에 이르면 날이 희뿌연 하게 밝아 왔다.

 

그곳에서도 임실읍까지는 제법 먼 거리다. 그 때 쯤이면 내 또래의 아이들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초등학교 아이들은 학교를 가는데 이방인처럼 나는 어깨가 빠지게 짐을 메고 어머니의 뒤를 따라 장을 가고 있으니, 그곳에서 임실읍 갈마리로 넘어가는 서낭댕이 고개를 넘어서 갈마리 거쳐 임실장에 닿으면 해는 중천에 뜨고 사십 리가 넘는 길을 등짐을 지고 걸어온 나의 몸은 이미 파김치가 되어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사주는 국밥 한 그릇을 먹고서 또 돌아갈 시간을 기다릴 때 눈부시게 떠 있는 햇살, 그 햇살이 얼마나 찬연한 슬픔이고 나를 주눅 들게 하였던지?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서 자판으로 그 추억을 두드릴 때 담헌 홍대용(洪大容)이 친구가 죽자 지은 제문(祭文)의 한 구절이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홀연히 떠올랐다.

 

“글자마다 눈물방울, 그대 와서 보는가?”

 

그런데 왜 내 기억 속에서 그처럼 아픔을 간직한 채 넘었던 그 고개에 대한 추억을 망각처럼 잊어버리고 있고 있었던 것일까? 그 의문점은 풀릴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토록 아프고 쓰린 추억은 세월의 흐름 속에 깊숙이 침잠되어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되살아나서 가슴을 들쑤시며 일어난다는 사실을 그날 임실 17km라고 쓰여 진 이정표를 보며 깨달았다.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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