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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전북의 산하, 긴 장정을 시작하며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 읽는 것과 같아 세상 본연 모습 보일 것

   
▲ 지리산둘레길. 길에서 만나는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 잇고 보듬는 300여km의 장거리 도보길이다.

걷는 게 대세다. 그냥 걷는 것도 좋지만,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호흡하면 걷는 길은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전북일보가‘신정일과 함께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을 기획했다. 우리나라 대표적 문화사학자이자 우리 땅 구석구석을 걸어온 신 씨를 통해 또다른 길의 세계를 만나는 자리다.

 

‘운명이거니’ 하며 걸었다. 이 땅의 강과, 산 그리고 5000년 역사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옛길(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을 걷고 또 걸었다. 걷다가 만난 사물이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길은 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주었다.

 

다산 정약용이 지은 〈소요원기(逍遙園記)〉에 나오는 글처럼 “세상의 길속에서 ’어정‘거리고, 글 속에서 ’어정‘거리다가 보니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무엇보다 걸으려는 욕망을 잃지 말자. 매일 같이 나는 걸으면서 행복한 상태가 되고, 걸음을 통해 모든 질병으로부터 벗어난다. 나는 걷는 동안 가장 좋은 생각들을 떠올렸다.” 덴마크의 철학자인 키르케고르의 말이다. 독일의 철학자인 니체도 말했다. “걷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은 믿지 말라.”

 

그랬다. 그렇게 머릿속에서만 빙빙 맴돌며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글들이 전체를 걸고 결사적으로 걷기 시작하자, 하나둘씩 그 실체를 드러냈다. 그때야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피력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 그처럼 방구석에 갇혀 있어 세상구경이란 공휴일에나 겨우 하고, 그것도 망원경을 통해서 보듯 멀찌감치 떨어져서나 보는 것이니 그래 가지고야 어찌 중생을 지도할 수 있겠습니까?”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바꾸어 말한다면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산천을 또한 유람하는 것과 같다. 견문이 넓어야 안목이 넓다는 것, 이것 역시 고금의 진리다.

 

길은 수없이 많은 책들이 펼쳐진 도서관이며, 역사의 유물들이 진열된 박물관이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걷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 째가 건강이다.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行補가 낫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약이라도 맛있는 음식이 낫고, 음식보다 더 좋은 것을 걷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다산 정약용 역시 ‘걷는 것은 청복淸福, 즉 ‘맑은 즐거움이다.’라고 극찬을 했는데, 경치가 좋고 공기가 맑은 곳을 한 사나흘 정도 걸으면 5십만 원짜리 보약 한재 먹는 것보다 더 낫다.

 

두 번째가 마음을 다스리는데 걷기처럼 좋은 운동이 없기 때문이다. 루소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 한 발 한 발 걸으면서 여러 가지 사물을 만나게 되고, 결국은 내가 나를 만나는 것이 걷기의 매력이다.

 

세 번째는 아무래도 빠르게 빠르게만 익숙해진 세상에서 느리게 걸으며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리라. 하루나 이틀 도보답사와 달리 열흘에서 보름까지 장거리 도보답사는 여러 가지 재미난 현상을 겪게 된다. 영남대로를 열나흘에 걸쳐 걸어갈 때의 일이다. 엿새를 지나면서부터 꿈을 꾸면 길을 걷고 길을 묻는 꿈만 꾸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오전에는 도란도란 이야기라도 나누며 걷지만 오후에는 서로 싸운 사람처럼 혼자서 가고, 쉴 때에도 혼자서 먼 산을 보며 쉬게 된다.

 

불경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것이 바로 장거리 도보답사다. 길을 걷다가 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길 위에선 나그네는 큰 것보다 작고 사소한 것에 감동한다.

   
▲ 남원 운봉.

수안보 근처 삼거리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정차해 있던 노년의 트럭 운전사가 우리를 한참 눈 여겨 보고 있더니 차에서 내려와 “혹시 바나나 먹을 겁니까?”하며 바나나 두 개를 건네주었다. “어디나 조선의 인심은 남아 있구나!” 하다가 달리 생각해보니, “우리가 얼마나 한심하고 처량하게 보였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건네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그네는 쉴 때 가장 처량한 자세로 쉬어야 뭐든 얻어먹을 수 있다는 값진 진리(?)를 다시 한 번 터득한 순간이었다.

 

“여행은 고생을 겪어야 하고 수많은 갈림길을 지나야 한다.” 이백의 글이다. “나그네에게 유일한 즐거움이 있나니 그것은 참고 견디는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독일의 작가인 헤세였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인생 길 자체가 말 그대로 고행(苦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 길을 나서는 것은 그 어떤 것에 비할 바 없는 즐거움이다.

 

왜, 무엇 때문에 이처럼 걷기가 열풍이 불었을까? 그 해답이 박지원이 지은 〈연암집〉 ‘창애에게 보내는 답장’에 실려 있다.

 

“화담 서경덕이 길에 나섰다가 우는 사람을 만나서 물었다. “왜 울고 있는가?” 그 사람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가 다섯 살 때부터 눈앞을 보지 못한 것이 벌써 20년째입니다. 아침나절에 집을 나왔다가 갑자기 눈이 떠져서 천지만물을 환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뻐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골목은 여러 갈래요. 대문도 비슷비슷해서 우리 집이 어딘지 알 수가 없어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화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대의 집을 잘 찾아가도록 알려주겠네. 다시 그대의 눈을 감으면 곧 돌아갈 수 있을 것이네”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이 눈을 감고서 지팡이를 두드리며 걸음을 걷자 곧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빛과 형체가 거꾸로 되고 슬픔과 기쁨이 작용을 하는 까닭이다. 이것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지팡이를 두드려 걸음을 걷는 대로 가는 것은 우리들의 분수를 지키는 이치(理致)이며 우리들이 잃어버린 집을 찾아가는 증거이다.

 

이 시대는 모든 사람이 집을 나와서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므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자동차를 타기 시작하며 걷는 방법을 잊었고, 잊음과 동시에 생긴 부작용을 깨달은 현대인들이 길로 나와서 걷기 시작한 것이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세상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신약성서〉 마태복음 15장 14절에 나오는 글이다. 모두가 소경이 되려다가 가까스로 빠져 나와서 걷고 또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개발과 속도에 지친 현대인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레저문화가 생겨났다. 그 첫 번째가 마라톤이었다.

 

세계적으로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에 제일 유행하는 운동이 마라톤이고 1만 5000달러에서 3만 달러 시대에 가장 유행하는 운동이 걷기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흐름을 바라보면 그 통계가 맞다.

 

마라톤이 전국적으로 유행하고 등산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다가 어느 사이 걷기로 선회한 것이 불과 몇 년 전부터다.

 

수많은 사람들이 외국에 알려진 길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과 일본의 에도시대의 옛길을 걷기 위해 나섰다. 2007년부터는 〈제주올레〉와 〈지리산 둘레길〉이 개통되었고, 온 나라 사람들이 걷기 열풍에 휩싸였다. 각 지역에서 특색 있는 길을 만들기 시작한 것도 그 이후다.

 

문체부, 환경부, 산림청 등 정부부처에서 길을 만들기 시작했고, 자치단체에서도 저마다 특색 있는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모악산 마실길〉 〈강화 나들길〉 〈변산 마실 길〉 〈소백산 자락길〉 〈고창 질마재 길〉 〈전주 천년고도 옛길〉 등이 언론과 방송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자치단체마다 새로운 길 만들기, 길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옛길을 공부하며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전라북도에도 그런 옛길들이 많이 있다. 삼남대로와 통영대로 등 옛길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문화유산과 역사유산이 산재한 길들이 곳곳에 있다.

 

고즈넉하면서도 아름다운 옛길과 이 땅에 족적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 지면을 빌어 매주 선보일 것이다.

 

“인간은 걸을 수 있을 만큼만 존재 한다”고 말한 프랑스 철학자인 사르트르의 음미하면서….

 

△신정일씨는

   

신정일‘우리땅걷기’이사장(60)은‘현대판 김정호’‘현대판 이중환’‘현대판 신 삿갓’‘걷기 도사’‘길 위의 철학자’‘길 위의 시인’‘향토사학자’ ‘영혼이 자유로운 프리랜서’ 등 여러 별명을 갖고 있다. 그 스스로는‘방외지사’(方外之士, 儒家의 입장에서 유가 밖에 있는 사람)가 자신에게 맞는 별칭으로 여긴다.

 

혼자서 세상을 바라보고 혼자서 나름대로 공부법을 세웠고, 수많은 책을 읽고 세상을 편력하면서 공부를 하다 보니 창의적이거나 독창적인 생각을 하게 됐단다.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였기에 오로지‘책과 길’, 그리고 자연에서 세상의 이치를 배워 자신의 진정한 스승은 곧 자연이자 책이라는 설명이다.

 

한국의 10대 강 도보답사와 400여개 의 산들을 오르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 쓰는 택리지〉 〈조선을 뒤흔든 최대의 역모사건〉 〈느리게 걷는 사람〉 등 60여권의 저서를 냈다. 그는 최근 펴낸 자선적인 책을 통해 ‘사람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봐야 진정한 삶을 깨닫게 될까’라고 노래한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과 같은 물음을 가끔씩 자신에게 던지겠다는 말로, ‘길 위의 철학자’생활을 계속할 것임을 각오로 다졌다.

 

30년간 우리 땅 걷기를 계속해오는 그는 올 환갑을 맞았지만, 지금도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올 서해안을 걷고 있다. 연초 목포에서 출발해 고창까지 걸었다. 통일이 되는 것을 전제로 2016년까지 신의주까지 북상하는 계획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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