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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사람이 살만한 곳 부안 우반동] 아름다운 포구와 절경의 산수…유유자적한 삶을 찾다

혁명가 허균·실학자 유형원이 살았던 곳 / 태조 이성계도 자연 벗삼아 글·무예 익혀 / 인근에 곰소항, 내소사 등 또 다른 볼거리

   
▲ 우동저수지. 이곳에 도로를 만들면서 마을 뒷산 산허리가 크게 잘렸고 계곡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기암괴석들이 물에 잠겨버렸다.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가 있을 것이다. 세상을 잊고 유유자적하면서 살고 싶은 곳, 그런 곳이 나에겐 유난히 많다. 그것은 나라 곳곳을 수십 년 간 떠돌아다니며 섭렵했기에 가능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온 천하를 내 집이라고 여기기 때문인데, 그 중에 한 곳이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이다.

 

우동리는 본래 부안군 임하면 지역으로 우반동의 동쪽에 있으므로 우동 또는 동편이라고 하였는데, 만화동 동쪽에 있는 계룡산에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하며, 우동에서 성계안으로 가는 고개인 버디재는 옥녀봉(421)이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이므로 이곳은 베틀의 버디(바디)라고 한다.

 

우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인 성곗골은 선계사(仙啓寺)라는 절터가 있었다. 그 절터에는 8미터쯤 되는 돌탑이 서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춧돌만 흩어져 있다. 이 절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팔도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공부를 할 때, 아름다운 변산이 보이는 이곳에 암자를 짓고서 두 사람의 선생을 모시고 글과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동국여지지〉에는 이곳의 수려한 풍경이 잘 소개되어 있다.

 

“변산(邊山)의 동남쪽에 있는 우반동은 산으로 빙 둘러 싸여 있으며, 가운데에는 평평한 들판이 있다. 소나무와 회나무가 온 산에 가득하고 봄마다 복사꽃이 시내를 따라 만발한다.”

 

또한 조선중기의 문신인 권극중은 변산의 우반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찬탄하는 글을 남겼다.

 

“변산의 남쪽에 우반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아름다운 포구와 산수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비운의 혁명가이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공주목사에서 파면 된 뒤에 이곳 우반동에 왔다. 그는 김청(金淸)이라는 사람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우반동의 골짜기에 지은 정사암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 때 ‘정사암중수기’라는 글을 지으면서 우반동의 수려한 경치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선계폭포와 태조 이성계가 칼로 내리쳤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

“해변을 따라서 좁다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가서 골짜기로 들어서니 시냇물이 옥구슬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덤불속으로 쏟아진다. 시내를 따라 채 몇 리도 가지 않아서 곧 산으로 막혔던 시야가 툭 트이면서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들이 마치 봉황과 난새가 날아오르는 듯 치솟아 있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동쪽 등성이에는 소나무 만 그루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나는 세 사람과 함께 곧장 거처할 곳으로 나아가니 동서로 언덕 셋이 있는데, 가운데가 가장 반반하게 감아 돌고 대나무 수백그루가 있어 울창하고 푸르러 상기도 인가의 폐호임을 알 수 있었다. 남으로는 드넓은 대해가 바라보이는데 금수도(金水島)가 그 가운데 있으며, 서쪽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서림사(西林寺)가 있는데, 승려 몇이 살고 있었다. 계곡 동쪽을 거슬러 올라가서 옛 당산나무를 지나 소위 정사암이라는데에 이른다.

 

암자는 겨우 방이 네 칸이고, 깎아지른 듯한 바위 언덕에다 지어놓았는데, 앞에는 맑은 못이 굽어보이고 세 봉우리가 마주 서 있다. 나는 폭포가 푸른 절벽에서 쏟아지는데, 마치 흰 무지개처럼 성대하였다.

 

시내로 내려와 물을 마시며 우리 네 사람은 머리를 풀고 옷을 벗은 후 못가의 바위위에 걸터앉았다. 가을꽃이 막 피기 시작하였고 단풍잎이 반쯤 붉게 물들었다. 저녁노을이 서산에 걸리고 하늘 그림자가 물위에 드리워졌다. 물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를 읊고 나니 문득 속세를 벗어난 기분이었다.(중략)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다행이 건강할 때 관직을 사퇴함으로써, 오랜 계획을 성취하고 또한 은둔처를 얻어 이 몸을 편케 할 수 있으니, 하늘이 나에 대한 보답도 역시 풍성하다고 여겼다. 소위 관직이 무슨 물건이기에 사람을 감히 조롱한단 말인가“

   
▲ 반계선생 유적지. 실학자 유형원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의 실학 사상을 펼쳐 보인 반계수록을 저술했다.

△그대의 집은 곧 나의 집이니

 

허균은 이곳 우반동에 있는 집인 ‘산월헌(山月軒)’을 두고 기(記)를 남겼는데 그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이곳 우반동 부근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부안의 봉산을 몹시 기꺼워하여 그 산 기슭에 오두막이나 짓고 살려고 했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산 가운데 골짜기가 있어 우반(愚磻)이라 하는데, 거기가 가장 살만하다 하였으나, 역시 가서 보지는 못하고 한갓 심신만 그리로 향할 뿐이었다.

 

무신년 (선조 41년.1608) 가을에 관직에서 해임되자, 가족들을 다 데리고 부안으로 가서 소위 우반이란 곳으로 나아갔다. 경치 좋은 언덕을 선택하여 나무를 베어 몇 칸의 집을 짓고 평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더니, 일이 미처 마무리되기도 전에 당시의 여론이 나를 조정에 용납하치 않을 뿐 아니라 시골에 사는 것도 허용하지 않으려 하여, 무리가 모여 함께 헐뜯어 대었다.

 

“태평세상을 만났는데도 도원(桃源)의 뜻을 품었으니 너무도 옳지 않다.” 하여 마침내 나를 끌어다가 북쪽으로 가게 했다. 그 승지(勝地)를 돌아다보면 마치 천상에 격해 있는 것 같으니, 아아, 명이란 어찌하랴.

 

그가 짓고 살고자 했던 곳에 지은 구인기라는 사람이 집을 짓고 허균에게 가(記)를 부탁하며 쓴 글을 보면 그 일대가 마치 손에 잡힐 듯이 들여다보인다.

   
▲ 굴바우.

“그 거처에 몇 칸의 집을 지었는데, 지형은 탁 트여 밝고 깊숙하였으며, 서쪽으로는 봉산이 바라 뵈는데, 아침 구름과 저녁 안개가 삼킬락 말락 밝을락 말락 하여 책상머리에 교태를 부리고, 남으로는 두승(斗升). 소요(逍遙)등 여러 산이 눈 아래에서 빙 둘러 떠받치고 있으며, 큰 바다가 그 남쪽을 지나는데 파도가 거세게 일어 하늘까지 닿을 지경이고, 밀물이 포구에 들면 마치 영서(靈胥. 물의 신)가 흰 수레에 백마를 몰고 오는 것 같지요, 나는 그 가운데 종일토록 기대어 누웠다가 매번 달이 떠오르는 것을 기다려 숲속을 산책하면서 그림자를 끌고 배회하는데, 서늘하여 마치 얼음 항아리나 은궐(銀闕. 신선이 사는 곳)에 들어 간 듯 하여 몸과 마음이 모두 상쾌하지요. 그러므로 나는 이를 몹시 즐거워하여 그 집에 편액을 산월(山月)이라고 달았소.”

 

허균은 다음과 같이 그 글에 답했다.

 

“내가 거처하고 싶었던 곳인데, 그대가 먼저 살게 되었으니 그곳을 몹시 즐거워하는 것이 나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인즉 내가 어찌 그 글 못함을 사양하겠소, 더구나 바라보니 경치가 아름답고 풍연이 곱다는 것은 내가 비록 그대의 집에 오르지 않더라도 이미 십중팔구는 대략 알고 있소, 은사(恩赦)가 내린 후에 응당 곧바로 옛 골짜기로 향해 가서 그대와 함께 화산의 반쪽을 나누어 갖고 나의 목숨을 바칠 것인즉, 그대의 집은 곧 나의 집이니 어찌 감히 즐거운 말을 만들어 집을 호사시키지 않을 리가 있겠소.”

 

△유형원과 허균이 좋아했던 마을

 

허균이 그 뒤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 은거한 한 채 글만 썼더라면 다산보다 더 많은 저작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운명이란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라서 타의에 의해서 다시 벼슬길에 나아간 허균은 결국 반역죄로 비운의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으니,

 

이곳 변산의 우반동에 큰 흔적을 남긴 인물이 바로 조선 숙종 때의 실학자인 반계 유형원이다. 유형원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였다. 서울에서 살았던 그가 이곳으로 이곳에 살면서 학문을 연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 우반동에 집안의 농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관이 문화(文化)이고, 자는 덕부(德夫)이며 호는 반계(磻溪)인 유형원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7세에 〈서경(書經)〉과 ‘우공기주편(禹貢冀州編)’을 읽자 사람들이 매우 감탄하였다고 한다.

 

1653년(효종 4)에 부안현 우반동(愚磻洞)에 정착한 그는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심하면서 나라곳곳을 유람하였다. 1665년, 1666년 두 차례에 걸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농촌에서 농민을 지도하였다. 그는 구휼(救恤)을 위하여 양곡을 비치하게 하고, 큰 배 4, 5척과 마필(馬匹) 등을 비치하여 구급(救急)에 대비하게 하면서《반계수록(磻溪隨錄)》을 저술했다.

 

유형원의 사상은 훗날에 이익(李瀷)·홍대용(洪大容)·정약용(丁若鏞) 등에게 이어져 실학(實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선인만이 살 수 있는 곳

 

유형원의 조부인 유성민(柳成民)은 선대로부터 이어 내려온 우반동의 땅을 농장으로 만들어서 후손들이 이곳에 와서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게 하였다. 그 뒤에 유성민은 ‘우반동 김씨’라고 불리는 김씨들의 현조(顯祖)중의 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김홍원(金弘遠)에게 땅을 방매(放賣)하면서 매매문서를 작성해 주었다.

 

“대저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앞은 툭 트여 있으며, 조수가 흘러들어 포(浦)를 이룬다…. 기암괴석이 좌우로 늘어서 있는데 마치 두 손을 공손히 마주잡고 있거나 혹은 고개를 숙여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혹은 나오고 혹은 물러나 그 모습이 변화무쌍하다. 아침의 노을과 저녁의 노을이 자태를 드러내면 이곳은 진실로 선인(仙人)만이 살 곳이요, 속객(俗客)이 와서 머무를 곳은 아니다.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장천(長川)이 북에서 흘러나와 남으로 향하니 이로 말미암아 동서가 자연히 나뉘는데 이 장천이 또 하나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 때 매매문서에 실려 있는 글인데, 마치 그 당시의 풍경을 눈으로 보는듯하게 세밀히 묘사되어 있다.

 

이곳 우동리에는 유형원이 서당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는 서당이 있고, 서당골 북쪽 산 중턱에 있는 큰 바위가 있고 그 아래 큰 굴이 있다. 이곳에 불을 때면 그 연기가 산내면 해창으로 나온다고 한다. 그 당시 전화도 없던 시절인데 어떻게 몇 십 리 밖에서 불을 때는 걸 알고 연기가 나오는 것을 알았는지 모를 일이다.

 

이곳 우반동 주변의 경치를 우반십경이라고 지은 사람이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냈던 사암思菴 박순朴淳이다. 사포의 떠들썩한 상선, 죽도의 고기잡이 등불, 검무포, 수군의 저물녁의 호각소리, 수락사의 새벽종소리, 선계의 맑은 폭포, 배고개의 울창한 소나무 숲, 황암의 고색창연한 고적, 창굴암의 고승, 심원에 노니는 사슴, 어살 가득한 고기잡이었다. 옛 사람들이 보았던 우반동의 풍경은 사라진지 오래인데, 그 당시의 풍경으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우동리 당산제이다.

 

이 마을의 당산은 전형적인 솟대 당산으로서 오리솟대·오리수살대·오리살대 등으로 불리고 있으며 부안군 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행사이다.

 

이곳에서 내 변산으로 넘어가는 도로를 만들면서 마을 뒷산의 산허리가 크게 잘려나갔고, 우동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계곡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기암괴석들은 물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사라지고 훼손되기도 했지만 바로 근처에 아름다운 곰소항과 내소사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다. 마음만 먹으면 4·5키로미터 부근에 있는 내소사에 찾아가서 그 울울창창하게 늘어선 전나무 숲길을 거닐기도 하고 검을 현玄자와도 같은 가물가물한 내소사의 문살을 바라보기도 하며, 저물어가는 곰소항에서 하염없이 선운산 쪽으로 뻗어나간 줄포만을 바라보아도 좋은 곳이 우반동이다.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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