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맥 잇겠다는 큰 뜻 아들과 내분으로 무너져 역사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 / 동고산성서 연꽃무늬 와당 민가서 주춧돌 발견하기도...중노송동 일대 관심 가져야
삼한, 즉,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한 신라가 융성기를 지나 쇠퇴해지자 여러 지역에서 영웅들이 나타났다. 그 중에 한 사람이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다.
견훤은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아차마을 갈전2리에서 가난한 농부인 아자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광주 북촌에서 태어났다는 설과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전설을 지닌 견훤은 청년시절 군인의 길을 택했고, 마침내 892년 견훤은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견훤은 북원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양길에게 비장이라는 벼슬을 내렸으며, 900년 완산주(지금의 전주성)에 무혈 입성하여 도읍을 정하게 되었다.
전주성 밖을 나와 열렬히 환호하는 백제 유민을 향하여 견훤은 크게 외쳤다. “내가 삼국의 시작을 상고해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난 후에 혁거세가 흥기한 고로 진한과 변한이 이것을 따라서 일어났다. 이때에 백제는 나라를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668~669)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따라 장군 소정방을 보내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의 김유신이 권토하여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처럼 비겁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나는 지금 감히 도읍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백제의 사무친 숙분을 풀려온 것뿐이다.”(삼국사기 제 50권 열전 제 10 견훤)
견훤은 나라 이름을 당당하게 백제의 맥을 잇는다는 뜻으로 ‘백제’라고 선포하였다. ‘후백제’란 이름은 후세에 역사가들이 전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지었던 이름일 뿐이다. 그리고 견훤은 대왕을 칭하면서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반포하였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인 후 당나라 연호를 사용했던 것과 달리 자주적인 연호를 쓰게 된 것이다. 정개란 연호에는 ‘바르게 열고, 바르게 시작하고, 바르게 깨우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견훤은 신라보다 일렀던 백제의 역사를 재정립하겠다는 일종의 ‘역사 바로 잡기’와 더불어 의자왕의 숙분을 푸는 것을 당면 과제로 내세웠다. 견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백제에 의한 국토 통일을 내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견훤은 비참하게 몰락한 백제 왕조를 부활하기 위해 힘찬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며,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구원하고 한 세상을 건지겠다는 미륵의 나라 건설을 피력한 것이었다.
△중국의 오월과 교류를 맺다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한 견훤은, 내적으로는 호족들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그들을 포섭하면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한편 호족들의 견제와 통제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아 호족의 영내에 관리와 군대를 파견하였다. 동시에 호족의 자제들을 상경시켜 볼모로 붙잡아 두었던 것이다. 국방상의 요충지에는 중앙군을 파견하였는데, 현지 호족 세력들의 지원 없이도 둔전(屯田)을 통해 그 주둔이 가능하게 하였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견훤이 백제의 옛 땅을 남김없이 차지했는데 그의 재력의 부유함과 갑병(甲兵)의 막강함은 족히 신라와 고려보다 뛰어나서 먼저 드러났다”고 적고 있다. 견훤은 그의 해상 세력을 바탕으로 옛 백제의 외교를 복원하는 데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견훤은 그와 더불어 중국의 오월국(吳越國)과 후당(後唐)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신의 존재를 남중국에 알림으로써 그 위상을 높이는 한편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려는 의지를 과시했던 것이다. 이는 또한 신라를 고립시키려는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다.
견훤은 그 후 중국의 후당 및 묘하 부근의 거란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는데 그것에 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남아있다.
“거란의 사신 사고와 마돌 등 35인이 예물을 가지고 찾아오니 견훤이 장군 최견으로 하여금 마돌 등을 동반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항해하여 북쪽으로 가다가 바람을 만나 당나라 등주(登州)에 이르러 죄다 학살되었다.”
그리고 견훤은 일본과도 긴밀한 외교적 접촉을 가졌다. 견훤은 인재 등용에도 힘썼는데 그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 최승우였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3년 만에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면서 명성을 떨쳤던 최승우는 6두품 출신으로서 출세가 막혀 있었다. 하지만 최승우는 출세보다는 사회 개혁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큰 세력을 형성하며 삼한 통일을 염원했던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를 쳐들어가 경애왕을 징치하고 돌아오던 중에 팔공산에서 왕건과 맞붙어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였다. 그 뒤 신라와 고려의 세력보다 더 큰 세력을 형성했던 후백제였지만 아들과의 내분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김동인은 〈견훤〉이라는 중편 소설에서 후백제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가던 그 당시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날 밤 견훤왕은 밤새도록 소리 없이 울었다. 이미 정한 운명이었지만 눈앞에 이르니 가슴이 저리었다. 더욱이 자기 평생 공을 다 들여서 쌓은 탑이 지금 무너지는데 자기가 그것을 붙드는 데 일호(一毫)의 힘도 가할 수 없고, 도리어 무너뜨리는 편에 붙어서 방관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 더욱이 애달팠다. 베개에서 물을 차낼 수가 있도록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누가 견훤의 그 비통한 심사를 알 수가 있으랴.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마흔 몇 해에 걸쳐 백제의 맥을 잇겠다고 궁예와 왕건이 이끄는 후고구려와 맞붙어 싸웠던 그의 큰 뜻은 사라지고 말았다.
견훤은 그 후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로 “수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지금의 논산시 연산면에 있던 절 황산사에서 죽고 말았다. 그가 죽을 때 “하늘이 나를 보내면서, 어찌하여 왕건이 뒤따르게 하였던고 (…) 한 땅에 두 마리 용은 살 수 없느니라”라고 길게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그의 무덤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전주 땅을 바라보며 남아 있는데, 그 당시 항간에는 아래와 같은 참요가 유행하였다고 한다.
가련토다. 완산 애기
애비 잃고 눈물 흘리네.
〈삼국사기〉전체 50권의 맨 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신라의 국운이 쇠퇴하고 정치가 어지러워 하늘이 돕지 아니하고 백성들은 갈 곳이 없었다. 이에 군도(群盜)들이 틈을 타서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 털처럼 되었으나, 그중에서 가장 악독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였지만 도리어 종국(宗國)을 원수로 삼고 그 전본(전복)을 도모하였으며 심지어 선조의 화상(畵像)까지 베기에 이르렀으니 그 무도함이 극심하였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으로부터 일어나 녹을 먹으면서 불측한 마음을 품고 나라의 위태한 틈을 기화로 하여 도성과 성읍을 침략하고 임금과 신화를 살육하기를 마치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하였으니, 실로 천하의 으뜸 가는 악인이며 백성들의 큰 원수였다. 그러므로 궁예는 자기 부하에게 버림을 당하였고, 견훤은 제 자식에게 화를 당하였다. 이는 모두 제 자신이 저지른 것이니 또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항우(項羽)와 이밀(李密)과 같은 특출한 재주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발흥(勃興)을 대적하지 못하거늘, 더군다나 궁예와 견훤과 같은 흉악한 자가 어찌 우리 태조와 더불어 서로 상대할 수 있으랴? 다만 태조에게 백성들을 몰아다 주는 자가 되었을 뿐이다.”
견훤 백제는 결국 스스로의 내분에 의해 무너진 것이지 왕건이 거느린 고려 군사의 힘으로 멸망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백제의 맥을 이었던 견훤, 즉 후백제는 전라도 지역에서 오늘날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물왕말에는 백제 왕궁의 석축만 남아
육당 최남선이 1925년에 발표한 국토순례기 〈심춘순례〉에서 후백제의 도읍지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반태산 밑 철로 밑으로 논두렁처럼 울묵줄묵하게 약간 일자로 남아있는 것이 후백제의 성터라고 한다. 대개는 마한 이래의 옛 자리를 그대로 써 내려온 것일 듯 하여 거의 없어지고 겨우 남은 몇 줌 흙이 몹시 남의 마음을 잡아당긴다. 저 고려 태조 같은 이도 여러 번 혼이 나서 통삼(統三)의 자신이 하염없이 무너지려 함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그토록 절대하던 후백제의 근거지의 떨어진 자취가 시방 저 흙덩이이다. 그나마 없었다면 행인의 조상하는 눈물을 받을 후백제 때 물건이랄 것이 무엇이었을른지.”
또한 1943년에 간행된 〈전주부사 (全州府史)〉에 의하면 “전주역 동편 반태산(현 중노송동 2가 사무소앞 무랑말)의 구릉지는 후백제 견훤왕의 궁터로 보아도 큰 잘못이 없으며, 또 승암산 동남방 성황사에 소재한 산곡의 성터가 같은 왕궁에 인접한 산성으로 보인다.”거나 조선 총독부 도서관의 조사관 오기야마 히데오(적산수웅·荻山秀雄)가 조사한 바대로 “반태산 일대 민가를 조사한 결과 후백제 왕궁의 건축 초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각이 진 석재와 대형 댓돌이 1만여 개가 현존하고 있다”라는 기록도 있다. 그런 기록들을 토대로 오랫동안 답사를 계속한 결과 오래 전에 KBS와 답사 도중 민가에서 당시의 주춧돌 세 개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후백제의 도읍지가 정확하게 어디였는지에 대해 제대로 된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왕궁터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물왕말 일대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고 있다.
나라 곳곳에서 소설 속 인물들까지도 부활되고 있으며 각 지역마다 잊혀 진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과는 아예 대조적이다.
어디 그뿐인가? 견훤이 태어났다는 문경시 가은읍 아차리에는 견훤을 모신 사당이 만들어졌고, 논산시 연무읍에는 전해오던 견훤묘라고 해서 ‘전 견훤 묘’라고 표시되어 있던 것을 ‘당당히’견훤묘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도 전라북도와 전주시는 아직까지 후백제의 궁궐터를 비정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1980년에 발굴을 마친 동고산성에선 ‘전주성’이라는 글씨가 찍힌 연꽃무늬 와당이 발견되었고, 남고산성에는 “후백제 견훤이 쌓은 산성으로 추정된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김제 금산사 들목에 있는 견훤이 축조했다는 홍예문이라는 견훤성문이나 그가 3개월여 유폐되었던 금산사에도 견훤에 대한 문구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미국 켄자스 대학의 허스트 3세 교수는 〈선인, 악인, 추인〉이라는 논문 중 ‘고려 왕조 창건기 인물들의 특성’이라는 글에서 견훤을 다음과 같이 변호하고 있다.
“견훤 역시 ‘악인’이라는 이미지로부터 상당히 회복될 필요가 있다. 그는 쇠퇴하는 힘에 대항하여 맹렬히 공격한 한반도 남서부 지역 인물(?)로서, 아직도 천명을 보유하고 있던 신라 왕조와 함께 상당한 군사적·도덕적 힘을 지니고 있던 백제인이었다. 견훤의 왕국은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존재하였으며 더구나 번성했었다. 다만 지지한 사람들과 지지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러나 나는 그도 역시 상당한 지도력과 군사적 자질을 소유하였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운명의 뒤틀림이 없었더라면 10세기 한국은 견훤에 의해 통일되었을지도 모른다. 옛 백제의 중심 지역으로부터 한반도를 통일하는 새 왕조 창건을 합법화하기 위하여 백제 계승자로서의 역사를 선전했을 왕조가 생겨났을 수도 있었다”라고 말하며 견훤 백제의 패망을 아쉬워했다.
그렇다. 한 때 전주는 견훤이라는 사람이 세운 한 나라의 수도로 나라 안에 몇 안 되는 도읍지였다. 견훤은 기울어져 가는 통일 신라 말에 태어나 백제의 부활을 위해 백제라는 나라를 열었었다.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 미륵의 나라를 열고자 했었고, 삼한을 통일하여 더 큰 세상을 꿈꾸었던 그는 집안의 내분으로 역사의 승자가 아닌 패자로 낙인찍힌 채 역사의 뒤안길로 숨어들고 말았다.
언제쯤 후백제가 전라도의 역사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이 나라의 역사의 전면에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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