돛대봉 용각봉 문필봉 계절별로 이름도 다양 / 암마이봉 돌탑에 얽힌 신령스런 이야기 많아
유독 어린 시절을 떠 올리면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절절하게 떠오른다. “기쁨에 대한 추억은 이제 기쁨이 아니지만, 슬픔에 대한 추억은 언제까지나 슬픔이다”고 노래한 발레리의 시 구절과 같이 슬픔이 사람의 근원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지난 시절을 회상하다 보면 빙그레 웃음을 머금게 하는 일들도 더러 있다. 그 중 하나가 초가을 길가에 코스모스가 하늘거릴 때의 일이다. 학교 가는 길, 흰 메리야스를 입고 가는 아이들의 어깨 죽지에 꽃분홍색 코스모스를 손가락에 끼워서 딱 소리가 나게 두들기면 그 빨간 꽃망울이 선명하게 묻어났는데. 그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던지,
그보다 더 가슴 설레는 일은 가을 소풍을 가기 전 날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만 해도 가까운 곳으로 소풍을 갔었다.
고학년인 4학년이 되자 소풍가는 장소가 진안의 마이산으로 바뀌었다. 내가 살던 백운면의 백운초등학교에서 마이산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다. 새벽밥을 먹고 학교에 도착해서 평장리 지나 송림재를 넘어 마이산에 이르면 열한시 반쯤은 되었다. 마이산 탑사근처에서 점심을 먹을 때 보면 칠성 사이다나 비과 두어 개에 계란 삶은 것 한 개쯤 가져온 아이면 잘 사는 집 아이가 가져오는 진수성찬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보물찾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보물찾기는 항상 내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다른 애들이 두서너 개씩을 찾는 동인 나는 항상 언저리만 맴돌아서 그랬는지 한 장도 못 찾아서, 다른 아이들이 그 보물종이를 보여주며 공책도 타고 연필도 타는 동안 나는 그저 그 아이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은수사의 절 어귀에 있던 청실배나무에서 배 하나를 주워 먹고서 땀을 뻘뻘 흘리며 누가 먼저 올라가는지, 시합을 하는 것처럼 암마이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와 곧바로 가야 어둡기 전 전에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 어린 시절 내가 가을마다 소풍이라는 이름으로 한번 씩 찾았던 그 마이산이 어느 날부터 사람들에게 명산으로 알려져 장날처럼 북적거리고 있다. 나 역시 마이산이 백두대간 속에 호남정맥이 지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어린 시절 추억의 요람이라는 사실이 채색되면서 그때부터 마이산은 내가 보았고 들었던 마이산이 아니었다.
△기기묘묘한 생김새, 곳곳에 전설
두 봉우리가 우뚝 솟아, 하늘에 꽂혀 있는 듯한 마이산은 진안군 진안읍과 마령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2003년 10월 명승지 12호로 지정된 해발 667m의 마이산은 자웅의 두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으며 용암동문이라 새긴 암벽 사이를 들어서면 기암괴석이 뒤엉켜 기기묘묘한 형상을 연출하며 절경을 펼쳐놓고 있다. 이곳 마이산은 옛 신라 때에는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에는 용출산,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속금산이라 부르다가 태종 때에 이르러 마이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산의 특징과 매력은 누가 뭐래도 그 생김새가 기기묘묘한 형태로 갖가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동쪽에 있는 봉우리를 숫마이봉, 서쪽에 있는 봉우리를 암마이봉이라 부르는데 숫마이봉 중턱에는 화암굴이 있고, 이 굴속에는 맑은 약수가 솟아올라 이 약수를 마시면 옥동자를 잉태한다는 전설이 있다. 서쪽의 암마이봉 절벽 아래에는 120여 기의 돌탑을 쌓은 유명한 마이탑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탑사는 조선 후기에 이갑룡이라는 처사가 발원하여 전국 명산의 돌을 몇 개씩 날라다 이곳의 작은 바윗돌과 함께 쌓아 만든 탑이라고 한다. 이름이 이경의(李敬議) 자(字)는 갑룡(甲龍) 호(號)는 석정(石亭)인 그는 임실 둔덕 태생으로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묘 옆에 움막을 치고 3년간 시묘를 했다.
△탑사의 신비, 외국인도 감탄
그 후 전국의 명산을 전전하다 25세 때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을 주식으로 생식하며 수도를 하던 중에 신의 계시를 받아 탑을 쌓기 시작했다. 만불탑(萬佛塔)을 단석으로 쌓아 올린 것도 있고 기단을 원추형으로 단석으로 쌓아 올린 것도 있다.
이 지역에는 이갑룡 처사에 대한 신령스런 이야기도 많이 만들어졌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숫마이봉을 나막신을 신고서 오르내렸다고도 하고 어느 때는 명주 열여덟 필을 써서 서로 외면하고 있는 마이산 두 봉우리를 연결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기단을 쌓을 때에도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는 탑을 쌓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탑은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이갑룡 처사 혼자서 쌓은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힘을 모아 쌓은 것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그가 9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성스런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 35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돌탑들은 거센 폭풍우에도 넘어지는 일이 없으며 단위에 놓여있는 정화그릇은 겨울에 물을 갈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 표면으로부터 10~15cm의 고드름이 솟아오르는 신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탑이 쓰러지지 않는 것은 석질에 순인력(順引力)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숫 마이봉 남쪽 기슭에는 은수사가 자리 잡고 있고 맞은편에는 마이산과 비슷한 작은 마이산이 서있다.
한편 마이산은 흙이 하나도 없는 콘크리트 지질의 두 개의 커다란 역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산으로 그 모양이 흡사 말의 귀같이 생겼다고 하여 마이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흙 한줌 없는 이 산을 본 어떤 미국인이 “이 산을 쌓을 수 있는 기술은 물론이고 그 엄청난 양의 시멘트를 어떻게 충당했느냐”하며 혀를 내둘렀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져 온다.
△마이산 오르는 길
마이산을 오르는 길은 진안읍에서 사양골을 지나 마이산을 오르는 방법이 있고, 마령면 동촌리로 해서 마이산 탑사를 거쳐 암 마이봉으로 오르는 코스가 있다. 산악인들은 장비를 갖추면 숫마이 봉을 오를 수 있지만 대개의 일반인들은 암마이봉을 오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사이에 바위산인데도 암마이봉을 오르는 길이 제법 잘 나 있어서 초보자도 무리 없이 오를 수가 있다. 진안에 살면서도 이곳 마이산을 한 번도 오르지 않은 사람이 많지만 오랜만에 오르는 마이산을 그저 만만하게만 보았던 것이 아닐까 싶게 가파르다.
산은 자꾸 가파르고 먼데, 산들이 더욱 선명하게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흘린 땀을 오랜만에 소매 끝으로 닦는다. 후련하면서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살아나는 생각들 이 세상에 살면서 나는 얼마나 간절히 이 세상을 벗어나고자 했던가. 내가 흘린 땀 만큼 내가 세상을 사랑한 만큼 세상은 나를 몰아세운다고 속좁게 생각하지는 않았던가?
생각하며 오르는 사이 정상에 이른다. 진안군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산에서면 장수 영취산에서부터 비롯된 호남금남정맥이 장수 팔공산과 섬진강의 발원지산인 봉황산을 지나 성수산을 거쳐 마이산이 이어진 산금이 보이고, 덕태산 선각산. 운장산 부귀산이 보인다. 저기쯤이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이 몸을 나뉘는 주화산일 것이다.
해발 667m의 마이산은 자웅의 두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이 마이산이〈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마이산(馬耳山) : 현의 남쪽 7리에 돌산이 하나 있는데 봉우리 두 개가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용출봉(涌出峯)이라 이름하였다. 높이 솟은 봉우리 중에서 동쪽을 아버지, 서쪽을 어머니라 하는데 서로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이 마치 깎아서 만든 것 같다. 그 높이는 천 길이나 되고 꼭대기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사면이 준절(峻絶)하여 사람들이 오를 수 없고 오직 모봉(母峯)의 북쪽 언덕으로만 오를 수가 있다.”
△김종직 감상기 시로 남겨
조선 태종(太宗)이 남행(南幸)하는 길에 산 아래에 이르러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馬耳山)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던 이 산을 두고 조선초기의 문신 김종직(金宗直)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기이한 봉우리가 하늘밖에 떨어지니, 쌍으로 쭈삣한 것이 말의 귀와 같거나, 높이는 몇 천 길인지 연기와 안개 속에 우뚝하도다. 우연히 임금의 행차하심을 입어 아름다운 이름이 만년에 전하네, 중원(中原)에도 또한 이 이름이 있으니 이름과 실제가 서로 비슷하도다, 천지 조화의 공교함은 끝이 없으니, 길이 천지가 혼돈했던 처음 일을 생각하도다. 내 이곳에 가을비 뒤에 오니, 푸른빛과 붉은빛이 비단처럼 엇갈렸네, 멀리 바라보노라고 고개를 돌리지 아니하니 문은 밤새도록 열어 둔 대로다. 어떻게 해서 신선의 녹옥장(綠玉杖)을 얻어 높이 걸어 진흙 찌꺼기 같은 이 세상을 벗어나 쇠석암에서 묵고 봉정에 올라 샘물을 웅켜서 선동(仙童)과 서로 상의하여 방촌(方寸) 숟갈의 약을 먹을 고.“
전설에 의하면 1억여년 전 마이산의 들머리가 호숫가 즉 선상지였다고 하며 4천만여 년에 걸친 지각변동으로 다른 지역보다 600여 미터 이상 솟아올라 산이 되었다고 한다.
산 전체가 수성암(水成岩)으로 이루어진 마이산을 두고 부부봉 또는 부부산으로도 부르며, 그에 얽힌 이야기도 전한다.
마이산의 명칭 역시 세월 속에서 여러 개의 이름으로 변해왔다. 조선시대의 태조악가에 있는 몽금척가사(夢金尺歌詞)에‘돗대’같다는 구절이 있어서 봄에는 돛대봉, 녹음 속에 우뚝 솟아난 사슴뿔인양 돋보이는 여름철에는 용각봉(龍角峯)이라 부른다. 온 산이 물드는 가을이면 빨갛게 타오르는 단풍이 멀리서 보면 마치 천리마 색깔 같아 마이산, 하얀 눈으로 덮인 두 봉우리가 두 자루의 붓끝과 같아 저절로 시 구절이 우러나오는 겨울의 산을 문필봉(文筆峯)이라 부른다.
이 산 의 중턱 쯤의 화암굴에서 이승異僧이 연화화암경蓮華華岩經을 얻었다고 하며 이 굴에서 떨어지는 물이 온수천의 물줄기가 되는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은수사에서 백일기도를 드릴 때 약수의 빛이 은빛과 같았다고 한다.
금당사는 금촌 동쪽에 있는 절로 신라 헌덕왕憲德王 6년에 혜감慧鑑이 창건하였고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다. 금촌 서쪽에 있는 나옹암은 고려 때 나옹스님아 수도를 하였다는 굴이며 금당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기도한 산
진안지(鎭安誌)에 의하면 이조시대 초기에는 속금산(束金山)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야사에 의하면 이씨조선을 세운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젊었을 때 명산 대천을 찾아 다니며 수양하고 기도를 드렸는데 하루는 꿈에 말의 귀와 같은 영봉에서 한 선인이 금척(金尺)을 가지고 삼한(三韓)의 강토를 재는 것을 본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말에 전라도 서해안에 노략질 해온 왜구들을 운봉 황산에서 맞아 싸워 왜장 아지발도를 한 대의 화살로 떨어뜨리고 승리하여 완산주를 두루 살피던 중 명산 마이산에 올랐다.
그런데 마이산의 형태가 지난날 자기가 꿈속에서 본 산과 흡사하게 닮은 것을 보고 속금산(束金山)이라 이름을 내리고 그때부터 새나라 세울 뜻을 확실히 작정하고 천지신명께 백일기도를 드렸다 한다.
태조 이성계는 나라를 창업할 뜻을 세우게 된 마이산이 명산임을 잊지 않고서 태자인 정안군(태종임금)을 시켜 속금산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마이산의 이산묘는 이성계가 임금에 오르기 전에 임실의 성수산에서 백일 기도를 드리던 중 마이산에 들어설 때 말을 매어 놓았던 자리이다. 단군과 태조 세종, 고종등의 위패를 모신 회덕전, 한말의 명신과 유학자를 모신 영모사, 그리고 한말의 의병장 33위를 모신 영광사로 이루어졌다.
오늘 나는 신비의 탑사가 있는 마이산에서 ‘산이 나인가,’ ‘내가 산인가’를 생각하며 이리저리 서성거렸던 것은 아닐까?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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