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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완주 송광사 가는 길]'민중 예술' 품은 사찰…그곳엔 숨겨진 보물이야기가 있다

흙으로 빚어 만든 사천왕상 조선 사천왕 중 가장 빼어나 / 나라에 우환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기이한 불상

▲ 완주 송광사 사천왕상.

절의 들목에 벚꽃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절이 어디냐고 물을 때 나는 자신 있게 ‘송광사’라고 얘기한다. 그러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남 순천에 있는 조계산 송광사를 떠올리고 낙안읍성과 선암사를 들먹일 것이다. 그러면서 전주 인근에 이름이 같은 송광사, 송광사가 있다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절도 있었느냐고 반문하기 일쑤다.

 

도시 근교에 있으면서 금산사나 선운사 또는 내소사와 실상사에 가려 그윽하게 숨어있는 절 송광사는 전주에서 진안 가는 길 옆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종남산 아래에 있다.

 

신라 경문왕 7년 도의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하고 그 뒤 폐허가 되었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선사(普照禪師)가 다시 세웠다고 하는데 송광사의 내력을 기록한‘송광사 개창비’에는 이러한 내용의 쓰여 져 있다.

 

옛날 고려의 보조국사가 전주의 종남산을 지나다가 한 신령스런 샘물을 마시고는 기이하게 여기어 장차 절을 짓고자 하였다. 마침내 사방에 돌을 쌓아 메워두고 승평부(지금의 순천시)의 조계산 골짜기로 옮겨가 송광사를 짓고 머물렀다. 뒷날 의발을 전하면서 그 문도들에게 이르기를 “종남산의 돌을 메워둔 곳은 후일 반드시 덕이 높은 스님이 도량을 열어 길이 번창하는 터전이 되리라 했다.”

 

그러나 수백 년이 지나도록 도량이 열리지 못했으니 실로 기다리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스님 등이 서로 마음으로 맹세하되 보조스님의 뜻을 이루고자 정성을 다해 오연하니 뭇사람들이 그림자 좇듯 하였다. 이에 천계(天啓) 임술년(1622) 터를 보고 방위를 가려 땅을 가르고 풀과 나무를 베어내며 산과 바위를 깎아 가람을 이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때 절이 창건된 것이 아니고 조선 초기에 창건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로는 보조국사가 이 절을 창건한 것이 아니라 고려 때의 지눌이 창건했다고 한다. 그 뒤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광해군 14년 운전, 승령, 덕림 등이 전주에 사는 이극용의 희사로 절을 중창하고 벽암대사를 초청하여 50일 동안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그때 전국에서 수천 명이 모여들어 시주를 하였으므로 인조 14년(1636)에 이르기까지 큰 공사를 벌려 대가람을 이룩하였고 인조 임금으로부터 선종 대가람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선종 대가람으로 시호를 받다

 

그 당시 대웅전은 부여 무량사의 대웅전처럼 이층 건물이었고 일주문은 남쪽 3km, 만수교 앞 나들이라는 곳에 설치되었었다고 한다. 그 뒤의 절의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남아있는 절 건물은 철종 8년에 지어진 대웅전(보물 제 1243호)과 천왕문(보물 제 1255호), 십자각이라고 부르고 있는 송광사 종루(보물 제1244호)와 더불어 명부전, 응진전, 약사전, 관음전, 칠성각, 금강문, 일주문 등이 있다.

 

매표소 앞에 차를 세우자 눈앞에 나타나는 일주문은 통도사나 가까운 곳 변산에 개암사의 육중한 기둥들과는 달리 가냘프기 짝이 없어 “지붕이 하늘에 떠있는 듯하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금강문을 넘어서면 사천왕문에 이른다. 흙으로 빚어 만든 이 사천왕상은 4m가 넘는 거대한 것이지만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광목천왕이 쓰고 있는 보관의 뒷면 끝자락에 “순치 기축 육년 칠월 일필”이라는 먹 글씨가 남아있어 1649년에 이 사천왕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송광사 사천왕상 때문에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던 소조사천왕상의 기준을 얻게 된 것이다.

 

소설가 최명희는 대하소설 〈혼불〉에서 이 송광사 사천왕을 도환의 입을 빌려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소승이 보기에는 완주 송광사 사천왕이, 흙으로 빚은 조선 사천왕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조형으로서, 높이 삼십척의 위용도 웅장하고, 그 신체 각 부위 균형이며, 전체 조화가 놀랍도록 알맞게 어우러져 큰 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천왕문을 지나면 넓 다란 뜰이 나타나고 그 너머에 대웅전이 우람한 실체를 드러낸다.

 

● 대웅전 천장에는 비천무가 춤을 추고…

▲ 보물 제 1243호 송광사 대웅전.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인 송광사 대웅전은 절이 창건될 당시 지어졌고 1857년 중건되었다.

 

대웅전 천장 가운데 3칸은 우물반차를 치고 나머지는 경사진 빗천장을 꾸몄다. 불상 위 천장에는 운궁 형 보개를 씌웠고 우물천장에는 칸마다 돌출된 용, 하늘을 나는 동자, 반자틀에 붙인 게, 거북, 자라 등 여러 물고기 등이 장식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가는 자라와 새끼를 등에 업고 네 활개를 치는 거북이 보인다.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빗천장에 천장화로 그려진 비천도일 것이고 그것을 전문가들은 송광사가 민중예술을 끌어안았던 사찰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벽화들은 천상계에 있으며 춤사위와 악기를 연주하는 형태의 민화풍의 불화로 대다수의 많은 사찰들이 주악비천도 1,2점이 그려져 있지만 이처럼 11점이 대웅전 천장에 그려져 있는 경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대웅전 천장에서 부처님께 춤사위와 음악으로 공양을 올리는 듯한 형태의 주악비천도를 보고 다른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전라도 지방이 춤사위의 본고장이며 그 실체적 입증자료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사람도 있다. 곱게 가리마를 탄 단정한 머리 모양새와 화려한 복장을 한 여인네가 빗끈 횡적을 연주하며 하늘을 나는 그림인 비천횡적주악도를 시작으로 머리는 비스듬하게 기울인 채 오른손으로 악기의 목 부분을 잡고 현을 튕기며 당비파를 연주하는 비천당비파주악도, 매우 역동적으로 박력 있게 춤을 추며 날아가는 모습인 비천비상무, 전립 같은 모자를 쓴 무당처럼 보이는 여인네가 장구의 허리부분을 가볍게 거머쥐고 춤추는 그림인 비천장고무, 천도복숭아 두 개를 머리에 받쳐 들고 나는 형상의 천도현정무 전립을 쓴 무당이 울긋불긋한 화려한 색깔의 치렁치렁한 옷차림 새로 활달한 춤사위를 선보이는 비천무장무. 한 명의 무당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하늘을 향해 북을 치며 멋들어지게 춤을 추는 비천타고무, 머리에 연꽃장식의 모자를 쓴 스님이 바라를 연주하는 비천바라무, 하늘을 향해 나발을 치켜들고 힘차게 연주하는 모습인 비천나발주악도, 머리에 고깔을 쓰지않고 승무를 추고 있는 비천승무도, 무당이 신 칼을 들고 춤을 추는 모습의 비천신칼무가 대웅전을 빛내고 있다. 비천장고무를 추는 여인네만큼만 되면 여자친구를 삼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같이 간 도반의 말대로 바라볼수록 비천주악도는 한 점 한 점 여러 가지 생각들을 일깨워준다.

 

대웅전에는 세분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가운데에 석가세존과 동쪽에 약사여래 서쪽에 아미타여래 삼존불로 모셔져 있는데 흙으로 만든 이 불상들은 석가세존이 5.5m이고 협시불은 5.2m의 거대한 불상들이다. 나라 안에 소조불로 가장 큰 이 불상은 워낙 크기 때문에 법당 안이 오히려 협소하다고 느낄 정도이다. 무량사처럼 2층 법당이 있으면 몰라도 1층 법당으로는 무리지 않을까 싶은 이 불상은 나라 안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고 알려져 있고 또 하나 이 불상이 도난을 입는 와중에서 복장유물이 수습이 되었으며 그때 세 불상에서 똑같은 내용의「불상조성기」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 “이 불상을 만드는 공력으로 주상 전하는 목숨이 만세토록 이어지고 왕비전하도 목숨을 그와 같이 누리시며 세자저하의 목숨을 천년토록 다함없고 속히 본국으로 돌아오시며 봉림대군께서는 복과 수명이 늘어나고 또한 환국하시기를…원하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억불숭유정책 속에서 대다수의 절들의 선비들의 놀이터가 되었던 시절 병자호란으로 인해 붙잡혀간 사도세자와 봉림대군을 속히 돌아오게 해달라는 의미에서 제작된 이 불상은 세월 속에 한 역할을 담당했었고 지금은 힘들고 어려운 이 땅에 민중들의 맺힌 한과 기원을 들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대웅전의 수미단 위에는 전패 또는 원패라고 불리는 조각이 아름다운 목패 세 개가 서있다. 왕과 왕비 그리고 왕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원 패로서 세 개 모두 2m가 넘고 구름 속에서 화염을 날리며 꿈틀거리는 용무늬가 복잡하게 조각된 앞면은 매우 절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웅전에서 바라보면 남서쪽에 송광사 종루가 있다. 우리나라 전통건축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십자각인데 십자각이라는 이름은 건물의 평면구성이 十자 모양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2개의 기둥을 사용하며 2층 누각 형태를 갖춘 건물이다. 이 십자각 내에는 1716년(숙종42)에 주조된 범종과 법고 목어 등이 있다.

 

△송광사에서 만났던 지원스님

▲ 십자각이라 부르는 송광사 종루.

오래 전에 송광사를 찾았던 적이 있다. 그때 만났던 스님이 주지로 재직하고 있던 지원 스님이었다.

 

비스듬하게 내어 걸린 대나무 문을 열고서 주지스님을 찾아간다. 흰 고무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있고 울안에는 여러 형태의 민속공예품들이 가지런히 널려있다.

 

조계종 총무원의 기획실장으로 올라갔다가 사직을 하고 내려온 지원스님은 문화스님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우리문화에 대한 전반적 애정이 깊은 스님이었다. 지원스님은 나보다도 더 열 받쳐서 문화관광부와 지역의 문화정철에 신랄한 비판을 토로했다. 그 중에 “소리축제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고 우리 것 즉 새로운 것만을 선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지요. 전통문화특구도 그렇습니다. 거창한 마스터플랜보다 실천적인 그러니까 개미시장처럼 골동품도 좋고 각자의 집에서 쓰고 있는 여러 물품들을 가지고 와서 물물 교환하는 그러한 형태도 생각해 봐야지요.”

▲ 송광사 나한전

그렇다. 그 지역마다 그 지역 아니면 안 되는 문화상품이나 먹거리로 승부해야 하는데 힘들여 기획해서 제안하면 그 제안은 소리도 없이 묻혀버리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디 그것뿐인가, 한지도 이곳 완주나 전주 일대의 한지가 나라 안에서 유명했는데, 지금은 원주나 다른 도시에 밀려서 그 맥을 빼앗기고 있으니,

 

나는 지원스님의 말을 들으며 나보다도 더 세상에 대해 분노하고 세상 깊숙한 곳에서 살면서 세상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구나하며 문득 김수영 시인의 ‘강가에서’라는 시를 떠올렸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小人이 돼간다

 

속돼간다 속 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그래 김수영 시인처럼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고, 생각 할수록 나 자신이 가여워지지만 ‘세상은 살아갈만하다’ 고 자위하면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다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온갖 풍경들은 마음의 상자 안에 차곡차곡 쟁여두고 돌아가야 하는데, 내가 돌아갈 나의 집은 고개 너머 저쪽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결 사이로 〈혼불〉의 한 구절이 들리는 듯 했다.

 

“서러운 세상의 애끓는 애愛, 오(惡). 욕(欲)과 희로애락(喜怒哀樂)굽이굽이 몸부림치며 우는 하소연, 지그시 듣고 계시는 것인가. 내 다 들어 주마. 내 다 들어 주마. 피 토하고 우는 사연, 내 다 들어주리니, ”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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