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고산성길~천경대~만경대~억경대 밟는 곳마다 천년역사의 숨결 오롯이 / 관성묘·남고사 등 문화유적의 보고 전주 전경 한눈에…탁 트인 조망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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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고산성 길목에서 내려다 본 문화유적지. | ||
우리나라의 대표적 산성인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소식에 기쁨이 앞서면서도 서운한 것은 그 무슨 연유인지,
몇 년 전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에 초청을 받아 남한산성에서 강연을 했던 적이 있다. 셀 수도 없이 답사한 남한산성을 그들과 함께 답사하며 줄곧 떠올랐던 곳이 남고산성이었다. 전주를 굽어보는 남고산성을 전주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답사했을까를 생각하면 못내 가슴이 아파지지만 어쩌겠는가?
아직도 우리 지역의 대표적 산성인 남고산성이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은 보여주면 안 될 알 수 없는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고산성(南固山城)은 전주시 동서학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축산성으로 사적 제 294호로 지정되어 있다. 둘레는 3,024m로 현재 성문지와 장대지(將臺址)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있다. 일명 견훤산성(甄萱山城) 혹은 고덕산성(高德山城)이라고도 불리는 남고산성은 고덕산의 서북쪽 골짜기를 에워싼 포곡형(包谷形) 산성이다.
그렇다면 성을 쌓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모든 성곽은 원래 맹수나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흙·나무·벽돌 등으로 높이 쌓아올린 담장과 같은 장애물을 말한다. 또한 성곽(城郭)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성과 외성의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성(城)’은 내성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곽은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축조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기원전 1~2세기 경부터 이러한 시설물들이 나타났다.
〈사기(史記)〉를 보면 한(漢)이 위씨 조선(衛氏朝鮮)을 공격하는 부분에 위씨 조선의 도심인 왕검성(王儉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성곽을 쌓는 기술은 곧 국가발전의 척도로 여겨질 만큼 국가 차원에서 중요시 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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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은 정몽주가 만경대 바위벽에 새긴 시. | ||
삼국시대에는 세 나라 모두가 국가 차원에서 국가의 중요인물을 책임자로 내세운 다음 15세 이상의 남녀를 징집하여 성을 쌓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국가에 성을 쌓는 전담부서를 두어 성을 축조하였다.
성곽은 대체로 성곽을 축성한 재료가 무엇이냐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는데 나무를 땅에 가로 세로로 단단하게 엮어 방어시설을 설치한 성이 목책성(木柵城)이고 흙으로 쌓은 성은 토성(土城)이다. 돌로 쌓은 석성(石城)과 흙과 돌을 함께 사용하여 축조한 토석혼축성, 벽돌로 쌓은 전축성(傳築城) 등으로 분류되며 성곽이 축조된 지형에 따라 산성(山城), 평지성(平地城), 평산성(平山城), 장성(長城)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남고산성은 901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전주부윤 이정란이 이곳에 입보(入保)하여 왜군을 막을 때 수축하였다. 그 뒤 1811년(순조 11)에 관찰사 이상황이 중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박윤수가 관찰사로 부임한뒤 완성한 것이다. 숙종 때 완주소양의 위봉산성에 이어 진(鎭)이 설치되었고, 성내에는 진장(鎭將)이 머무르는 관청과 창고·화약고 등이 있었다. 남북에 장대(將臺)가 있으며, 문은 동쪽과 서쪽에 있었다. 서쪽에는 암문(暗門)이 하나 있었고,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포루(砲樓)가 있었으며, 특히 천경대·만경대와 같은 절벽이 있는 자연적 요새를 이용하였다. 남아있는 북문지는 석축만 남아있는데, 너비 3.4m, 높이 1.2m이며, 세 봉우리에는 각각 10㎡의 장대지가 있다. 성내에는 연못이 네 군데나 있었고, 우물이 25개나 되었으며, 영조 때의 기록에 의하면 둘레 2,693보(步), 여장 1,946척이고 성 안에 민가 100여 채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성내에는 남고사와 관성묘가 있고 조선후기의 명필로 알려져 있는 창암 이삼만의 글씨로 남고진의 내력을 기록한 남고진사적비(南固鎭事蹟碑)가 남아있다.
1911년 발간된 ‘완산지’에는 남고산성이 완성되고 진이 설치된 시기가 1813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천경대에서 산성 안을 내려다보니 관성묘가 보인다. 암문은 성의 구석지고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만들어 놓은 비밀 문이다. 정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지만 평시에는 성벽과 다름없이 막아 두었다가 전시에는 적의 눈을 피해 구원요청을 하거나 적을 기습하는 전술상 통로라고 볼 수 있다.
크기도 작아 문루도 양쪽으로 여는 형태이기보다는 한쪽으로 여닫는 구조가 많은데 작은 우마차 정도가 지나갈 정도라고 한다.
남고산성을 따라가는 길은 고덕산으로 가는 등산로이다. 이규보의 기(記)에, 고덕산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보덕(普德)의 자는 지법(智法)인데 고구려 반룡산의 연복사에 거하였다. 하루는 갑자기 제자에게 말하기를, ‘고구려는 도교만을 숭상하고 불법을 존숭하지 않으니 이 나라는 반드시 오래지 못하리라. 몸이 편히 피란할 곳이 어디 있을까’하니, 제자 명덕이 말하기를, ‘전주의 고달산이 안주하여 움직이지 아니할 곳입니다.’하였다. 보장왕 26년 정묘 3월 3일에 제자가 문을 열고 나가보니 집은 이미 고달산에 옮겨져 있었으니, 반룡산으로부터 1천여 리나 떨어진 곳이다. 명덕의 말이, ‘이 산이 비록 뛰어나긴 했으나 샘물이 말라 있다. 내 만약 스승께서 옮겨오실 것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반룡산의 샘도 옮겨왔을 것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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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산객들이 남고산성 성곽을 밟으며 호젓하게 걷고 있다. | ||
역사 속에서 고구려의 불교가 백제의 땅으로 망명해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고덕산은 그들이 내려와 지었다는 경복사터를 품에 안은 채 저만치 있고 남측성벽 끝 포루가 있던 곳에서 고덕산으로 가는 길과 억경대 가는 길이 나뉜다.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는 고덕산으로 향하는 산악자전거 일행들이 힘겹게 페달을 밟으며 지나간다. 그 아랫부분에서 남고산성은 제 북장대에 이르고 건너편에 치명자산이라 불리는 승암산이 보이며 그 산 너머 기린봉이 있으며 후백제를 창업한 견훤의 별궁터라고 알려진 동고산성이 있다.
억만 가지가 보인다고 하는 억경대에 올라서면 빼곡이 들어선 아파트 숲 건너로 완산칠봉이 보이고 더 멀리 황방산이 흐릿하게 펼쳐져 있다. 이곳 억경대에서 곧바로 내려가면 좁은목 약수터가 있는데 지금은 남원으로 순천으로 가는 길이 사통팔달로 뚫려 있다. 하지만 옛날이야 전주천변에 작은 길이 나 있었을 것이다. 내려가는 성벽 길은 가파르고 성 안쪽 남고사에서 목탁소리 들린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되어 있는 남고사지의 본래 터에 세워진 남고사는 보덕화상의 수제자였던 명덕화상이 창건하였다. 원래는 남고연국사라고 하였으나 뒷날 남고사라고 하였다가 다시 남고사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고사는 고려시대까지는 교종계열의 사찰로 내려오다가 세종 때 모든 종파의 불교가 교(敎) 선(禪) 양종으로 통합되어 48개의 사찰만 공인하게 되었을 때 탈락된 뒤 사세가 크게 위축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선종이 주류를 이루게 되자 선종계의 사찰이 되었다. 남고사터는 현재 대웅전과 요사채 그리고 사천왕문이 있으며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우측에 약사여래불을 봉안되어 있다. 전주 팔경 중의 하나인 남고사에서 들리는 저녁 종소리를 언제쯤 듣게 될까?
천천히 내려간 남고사로 오르는 길이 있고 성벽 옆에 남고진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조금 가파른 돌계단 길을 오르면 만경대에 이른다. 전주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 뵈는 봉우리인 만경대에는 동포루가 있었던 곳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만경대=고덕산 북록(北麓)에 있다. 돌 봉우리가 우뚝 솟아 마치 층운(層雲)을 이룬 듯이 보이는데,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사면으로 수목이 울창하며 석벽은 그림 같이 아름답다. 서쪽으로 군산도(群山島)를 바라보며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한다. 동남쪽으로는 태산(太山)을 지고 있는데 기상이 천태만상이다.“천인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올라오니 품은 감회 이길 길이 없구나. 청산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니 부여국이요, 황엽이 휘날리니 백제성이라. 9월 높은 바람은 나그네를 슬프게 하고, 백년 호기는 서생을 그르치게 하누나. 하늘 가로 해가 져서 푸른 구름이 모이니, 고개 들어 하염없이 옥경(玉京)을 바라보네”. 포은 정몽주의 시다.
포은이 이 시를 남긴 이유를 전주사람들은 아래와 같이 알고 있다. 고려 말에 이성계 장군이 지금의 남원시 운봉면 황산에서 왜구들을 크게 물리친 일이 있었다. 그 전투가 유명한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이다.
왜구들을 무찌른 이성계가 전주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오목대에서 전승의 기념으로 큰 잔치를 베풀면서 고려를 엎고 조선을 개국할 뜻을 피력했다고 한다. 이때 종사관으로 함께 참석했던 정몽주가 말을 달려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당시 서울인 개경을 바라보며 지은 시가 지금도 바위벽에 그대로 남아 있어 보는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이성계가 양광, 전라 경상도로 순찰사가 되어 왜구를 무질렀던 때가 1380년이었는데 정몽주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성계가 무사했을 리가 있었겠는가?
다만 나라가 자꾸 황혼녘에 접어드는 것을 느낀 정몽주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생각하며 지은 시가 조선시대에 또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인 결과일 것이다.
만경대의 바위벽에는 ‘만경대’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고 바로 아랫부분에 포은 정몽주의 시가 새겨져 있어 700여 년 전의 그 날을 생각게 할 따름이다. 만경대에서 남문 터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기 이를 데 없고 서암문터에는 지대석 두어개 남은 위에 새로 쌓여진 돌들이 생경하게 있을 뿐이다. 산성별장 이신문의 영세불망비가 망부석처럼 서있고 여정은 관성묘(關聖廟)로 향한다.
옛날 관성묘 부근에 남고진 관아가 있었고 개울 건너에 화약고가 있었다고 한다. 관성묘 입구에는 하마비가 서있다. ‘대소인원을 막론하고 이곳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하마비를 지나 돌 계단길을 오른다. 관성묘는 중국 촉한의 장군이었던 관우를 무신으로 받들어 제사하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친 데에는 관우의 덕이 컸기 때문이라고 여겨 임진왜란 중에 관성묘가 많이 세워졌는데, 조선후기에 그 폐해가 너무 심했다.
숙종 때 태어나 영조 때까지 살았던 남유용이 지은 〈뇌연집〉에 그 당시의 상황이 실려 있다.
“명나라 장수들이 관우묘를 짓고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한 것인데, 요사이는 어리석은 지아비나 아낙네들이 어제보다 더 많은 피륙과 돈을 바치니 이는 오히려 관우를 욕보이는 것이다. 관우묘를 찾는 이들이여, 모름지기 자숙할지어다.”
남고산성 안에 있는 관성묘는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과 산성별장 이신문의 발기로 1895년에 건립되었다. 서울에 두 곳, 경주와 남원 등 다섯 곳에만 남아 있다.
천천히 걸어서 당도한 충경사는 이정란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전주에서 7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남고산성과 만경대 등에 복병을 배치 고바야가의 침입을 막았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충경공(忠景公)이라는 시호를 얻었던 인물로 대동사상을 주창했던 조선시대 혁명가 정여립과 인척관계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미움을 받아 한직으로만 내몰렸던 그는 전주성 수호의 영웅으로 남아있고 정여립은 신원도 되지 못한 채 역사 속에 묻혀있을 뿐이다.
전주에 살면서도 남고산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전주에 산재한 역사문화유산을 많이 찾고 사랑하는 것이 전주 사랑의 지름길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 남고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을 만들어 남고산성을 보존하고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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