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부터 널리 알려진 명소 / 한여름에도 6도…피부병 등 치료
여름에 떠오르는 과일이 수박과 참외다. 보리 수확을 끝내고 난 뒤인 장마 무렵에 나오는 복숭아도 여름 과일의 대명사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여름의 대명사는 무엇일까? 과일보다 현실감 있게 떠오르는 것이 보리밥일 것이다. 지금은 건강식품의 대명사가 되어 오히려 잘사는 사람들이 즐겨먹는 보리밥을 유독 여름철에 신물나게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십대 중반을 넘어선 사람들 대부분이 여름날에 대한 추억 한 두 가지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아버님은 굉장한 미식가였던 듯 싶다. 어느 계절의 어느 때에 가면 그 냇가에 진짜 팔뚝만한 장어가 올라오는가를 알고 있었고, 미꾸라지가 많이 있는 둠벙도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그리움이 머무는 마을
어느 산에 능이버섯이나 송이가 많이 나오는지를 잘 알고 있어서 송이를 바작 하나에 가득 따가지고 오시는 걸 본 적도 있었다. 또 어느 산에 씨알 굵은 더덕과 통통하면서도 윤기 자르르 흐르는 참두릅이 많이 나는지 등등, 산에서 나는 것뿐만이 아니라 가을철의 별미인 추어탕의 재료인 미꾸라지는 물론이고 깊은 밤에 물고기 잡는 것까지 훤하게 꿰뚫고 계셨다. 아버님이 중반을 넘어선 여름철 점심 무렵에 항상 심부름 시키는 것이 있었다.
“익산 바우 밑에 가서 주전자에 물 떠와라.”
아버님이 말하는 익산바우는 내가 다니던 백운초등학교 운동장 아래에 있는 바위로 그 밑에는 여름철에 손이 닿으면 손이 시릴 정도로 찬물이 나오는 샘이 있었다. 주전자 가득 샘물을 떠 가지고 가면 아버님은 그때만 맛볼 수 있는 맛있는 물건을 준비해두고 계시다가 내놓곤 했다. 그게 바로 그해 고추밭에서 처음 따온 첫물의 빨간 고추였다. 처음엔 바라만보아도 매울 것 같은 빨간 고추를 어떻게 먹을까 걱정이 앞섰는데, 막 떠온 시원한 샘물에 보리밥을 말아서 한 숟갈 먹고 고추장이나 된장을 찍어 한입 베어 물면 그 생각이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맵기는커녕 달착지근하면서도 상큼하면서 은근한 그 맛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왜 이 글의 서두를 찬물과 빨간 고추로 시작하느냐 하면, 우리 선조들도 나름대로 더운 여름을 지내기 위해 보양식을 즐겼고, 피서철을 무사히 지내기 위해서 시원한 물이나 바람이 시원한 곳을 찾아다녔었다. 그 중 나라 안에 유명한 곳이 밀양의 얼음골과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 있는 풍혈냉천이다.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 양화마을 앞 대두산(459m) 밑에 있는 이 풍혈냉천은 조선시대 때부터 널리 알려져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풍혈은 바위 사이에서 찬바람이 나오는 구멍이며 냉천은 삼복더위에도 손을 넣고 1분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차갑다. 이 냉천에 개구리가 뛰어들면 즉사했다고도 하고 이 냉천에서 목욕하면 웬만한 피부병 정도는 쉽게 낫고 무좀에도 특효가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풍혈과 냉천이 발견된 것은 1780년께로 당시 자연적인 지질의 변화로 한쪽에는 사람 체온보다 높은 온천이 두 군데 솟아나고 한쪽에는 찬바람이 나오는 구멍 2개와 삼복에도 찬물이 나오는 냉천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 당시 성수면 양화리의 대두산 기슭에서 나온 온천물은 성분이 좋아서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소문이 널리 퍼져 나병환자들이 떼를 지어 찾아와 완치를 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목욕을 하고 간 뒤에는 수질이 나뼈져 온천으로서의 가치가 자꾸 없어져 갔다. 그 무렵 힘센 장사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불결한 온천이라고 흥분하여 큰 바위를 들어 온천을 매몰시켜 버리고 주위에 있던 버드나무와 음식을 해먹던 솥과 다른 기물도 다 파괴했다고 한다.
△풍혈과 냉천
그 뒤로 온천은 땅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 온천을 찾아내어 일확천금을 벌어 보겠다는 사람이 간간이 드나들어 온천이 있던 장소를 찾아내려 했으나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1943년 3월 전주에 사는 박성근이라는 사람이 온천을 다시 발굴하려는 큰 꿈을 품고 인부 300여 명을 동원 많은 경비를 들여 탐색하였다. 하지만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장소를 찾아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근처의 땅을 모조리 들추어 파헤치다시피 하여 온천이었던 곳으로 추측되는 부근에서 물길의 자취와 버드나무 솥 등을 발견하였고 이제 온천을 막아버린 바위덩이만 찾아내어 그 바위만 들어내면 온천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막바지 작업을 진행했으나 갑자기 박성근씨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그해 세상을 뜨자 온천발굴사업은 또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그 뒤 찬바람이 나왔던 두 개의 냉혈 밑에서 2개의 냉천을 발견하였으나 지금은 지형이 변화되어 1개소는 없어져 버리고 찬바람 나오는 풍혈 1개소와 찬물 나오는 냉천 1개소만 남아 있는데 요즈음 여름철이면 피서객이 급증하여 줄을 이어 몰려들고 있다.
풍혈은 삼복더위라 할지라도 온도가 6℃를 유지하고 있으며 자유당 때 굴이 무너지기 전만 하더라도 한 여름에 고드름이 매달린 것을 볼 수 있었으며 일본이 2차대전 막바지에는 여기에다 대규모의 한천공장을 세웠었고 또한 잠종저장소로도 사용되었다 한다.
냉천은 석간수로서 3℃의 온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으며 물에 함유된 성분이 또한 여러 가지라 위장병에도 좋고 피부병에 효과가 크고 특히 난치의 병으로 알려진 무좀도 치료가 된다하여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 때가 아마도 9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무당이면서 〈무당〉이라는 소설을 썼던 정강우 선생이 풍혈냉천을 사고 싶다고 해서 이곳의 주인인 전태수 옹을 만났었다, 그 때 제시했던 금액이 1억이었던가, 2억이었던가는 몰라도 두어 번 찾아갔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새 십몇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이제 정강우 선생도, 전태수옹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세월이 무상한가, 사람의 한 생애가 무상한가!
밀양의 얼음골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이 냉천에는 여름마다 그 시원한 바람을 쏘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고 하는데, 옛날 같지는 않다. 바로 근처에 회봉 온천을 개발한다고 떠들썩했지만 아직까지도 설왕설래만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실시되면서 유행처럼 번지는 것이 온천개발과 골프장 건설일 것이다. 나라는 주먹만한데 지역 유지들이나 자치단체장들을 만나게 되면 미국의 무슨 주는 골프장이 2000개가 넘는다느니 일본 만해도 우리나라보다 골프장이 몇 배나 많다느니 하면서 골프장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또한 “우리나라 온천이 온천은 무슨 온천 순전히 물 타가지고 온천이라는 말만 붙이고 있으면서”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온천만 만들어 놓으면 황금알을 낳는 것처럼 설치고 있으니, 1년이 가도 온천 한번 안가보고 골프채도 잡아보지 않은 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온천이고 골프장이고 다 망하고 말 것인데….
△그림 같은 그 반룡마을
풍혈냉천에서 아름다운 섬진강 길을 타박타박 내려오다 강 건너를 바라보면 대나무 숲 사이 빈집이 몇 채 보인다. 새로 만든 다리 아래로 손만 뻗으면 닿을 듯하게 낮게 드리운 옛 다리 아래에 푸른 강물이 넘실거리고 그 다리를 건너면 강가에 바짝 붙어 서 있는 느티나무가 평화롭게 보이는 마을이 성수산(491.4미터) 아래 용포리의 반룡마을이다.
본래 진안군 이서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을 단행하면서 상회리, 하회리, 포동리, 용회리를 병합하여 용포와 포동의 이름을 합해서 용포리라고 지은 반룡마을은 용회리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놓은 다리와 새로 놓은 다리가 마을로 이어져 있는 그림속의 한적한 풍경 속으로 강이 흐르는 반룡마을 앞을 흐르는 강은 넓고도 넓었는데, 지금은 그 옛 다리는 이미 추억이 되고 말았다. 물막이 댐이 생기기 전만해도 반룡 북쪽에는 형기쏘가 있었고, 남쪽에는 할미쏘가 있어서 깊은 수심을 자랑했다고 한다. 반룡 북쪽에는 마당처럼 넓은 마당바위가 있었다는데, 물이 들어차면서 어디고 간에 쏘가 되어 그 이름을 가진 쏘는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반룡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는 옛날에 샘이 있었다고 해서 새암골이고, 새암골 옆에 있는 골짜기는 바랑골이다. 반룡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는 공군이 골이며, 새암골 동북쪽에 있는 터는 바우배기터이다. 운중반룡(雲中盤龍), 초중반사(草中蟠巳)의 명당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반룡마을 앞에서 섬진강은 휘감아 돌고 성수산자락에 서산터지라는 절터와 은선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반룡리의 서남쪽에는 옛날 도적이 많았기 때문에 작은 저골이고 반룡 서남쪽에는 용아가리 앞에 있는 개구리 같이 생겼다는 구적바우가 있으며, 반룡 동쪽에 있는 골짜기인 초번통골은 전에 초빈(初殯)을 하였던 곳이다.
반룡 마을 뒤쪽으로 해서 산을 넘어가면 성수면 소재지인 외궁에 닿는데 그 고개 이름이 반룡재이다. 하지만 2차선 포장도로인 그 고개를 넘지 않아도 관촌에서 방수리를 거쳐 마령으로 이어지는 길이 뚫려서 전주에서 가는 것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이 되었다.
명나라 때 사람인 오종선이 지은 〈소창청기(小窓淸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며, 시내는 흐르고 돌은 서 있으며, 꽃은 새를 맞아 웃고, 골짜기는 나무꾼의 노래에 메아리치니, 온갖 자연정경은 스스로 고요한데, 사람의 마음만 스스로 소란하다.”
또한 송나라 때 문인 소동파는 〈소문공충 공집〉에서 “강과 산, 바람과 달을 본래 일정한 주인이 없고, 오직 한가로운 사람이 바로 그 주인이다”고 하면서 한가함 속에서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중환보다 후세에 태어났던 독일의 시인 휠덜린(1770-1843)은 “자연이 그대를 앗아 가기 전에 그대를 자연에게 맡겨라”라고 하였다.
내가 자연이 되고 자연 속에 동화되어 살고 싶은 곳 중의 한 곳이 물 맑고 아름답기로 소문난 섬진강이 더 넓혀지기 전에 펼쳐놓은 그림 같은 마을이 반룡마을이었다. 그래서 섬진강을 걷던 길에 이 마을 이장 집을 찾아가 내가 살고자 하는 지점을 가리키며 저 곳에 땅이 나오면 연락을 해달라고 했었다. 하지만 내 행색이 초라하기 때문에 돈이 없을 것 같아 그랬는지, 아니면 지도를 들고 수상쩍게 걸어가는 것이 미심쩍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한 번도 전화가 걸려온 적이 없었다.
이 마을의 어디쯤이던 터를 잡고 살고자 한지 여러 해를 보냈으면서도, 나는 그 마을에 바늘하나 꽃을 땅도 마련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 꿈을 접고 누군가가 내 펼치지 못한 꿈이며 정성을 가득 담은 집을 짓고서 나를 초청해서 하룻밤 재워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찾아가 다리를 건너면 반겨 맞는 느티나무 아래 앉아서 흐르는 강물을 망연히 서서 바라볼 때가 있다,
그 때 내 가슴 속으로 살며시 들어오는 글이 소로우의 〈월든〉 의 한 구절이다.
“시간은 내가 낚시질하는 강을 흐르는 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강물을 마신다. 그러나 물을 마실 때는 모래 바닥을 보고 이 강이 얼마나 얕은 가를 깨닫는다. 시간의 얕은 물은 흘러가 버리지만 영원은 남는다. 나는 더 깊은 물을 들이키고 싶다. 별들이 조약돌처럼 깔린 하늘의 강에서 낚시를 하고 싶다. 나는 셈을 전혀 할 줄 모른다. 알파벳의 첫 글자도 모른다. 나는 태어났던 그 날처럼 현명하지 못함을 항상 아쉬워한다.”
이렇게 시간이라는 이름의 강물이 유장하게 흘러가는데, 그 시간 속의 나그네들은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시간에 쫓겨서 시간 속에 서서히 매몰되고 있으니….
아, 만물이 오고 만물이 가는 우주순환의 이치는 그 무엇이라는 말인가?·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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