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유난히 추워서 오매불망 기다린 봄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있다. 그것도 4월 둘째 주 주말에 안가면 몸이 쑤시고 몸살이 나는 곳, 그곳에 가면 우선 기부터 막힌다. 꿈에서도 생시에서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저절로 경탄이 나오는 그런 장소를 만날 때가 더러 있다.
이 때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저절로 시인이 되고 어린이가 되고, 신선이 되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야말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라는 것을 갈파한 괴테는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至高)의 것은 경탄(驚歎)이다. 인간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려고 하지만, 그것은 헛된 일이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처음 본 어린애가 거기에 비친 물상(物像)들이 신기로워서 그 뒤에 무엇이 있는가하여 뒤집어 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연둣빛으로 물드는 강이 있고, 흐르는 강물소리가 가슴팍을 적시고 지나가는 강변을 따라가다가 보면 어느덧 시간이 멈춘 자리, 말 그대로 ‘무릉도원‘이 펼쳐지는 곳, 무주 금강길이다.
잠두마을 앞 길, 무릉도원으로 가는 그 길은 금강 변에 큰 소나무가 있어서 대소리라고 부르는 부남면 유평에서부터 시작한다. 버드나무가 많고 들이 넓어 유평이라는 이름이 붙은 마을에서 다리를 건너면,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세상의 모든 근심이 씻은 듯 달아난다. 비단결 같은 강 길을 따라가다 다리를 건너면 부남면 소재지고 그곳에 부남 파출소가 있다.
지리산 자락인 산청군 시천면 산천재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남명 조식 선생의 좌우명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배움만 못하고 오히려 죄악이 된다.”
그래서 가끔씩 배운 것을 실천하는데,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라고 쓰여 진 파출소에 들어가 식수도 얻어 마시고, 운이 좋은 날은 커피까지 한 잔씩 얻어 마신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파출소 직원들은 현장에서 대민 봉사를 하고 우리들은 경찰들의 고마움을 가슴 깊숙이 체험한다.
우리 땅 걷기 도반의 미인계로 커피를 얻어 마시고 지나가는 주민에게 “여기서 잠두마을까지는 얼마나 걸릴 까요”라고 물었다. “한 십오 분 걸릴 거예요” 이 얼마나 무모한 낭만인가. 차로 십오 분이면 갈 거리를 우리들은 세 시간은 족히 걸어야 잠두마을에 도착할 것이다.
비단강이라고 이름 지어진 금강 상류인 무주에서 만나는 금강 벼룻길과 잠두마을 옛길은 구절양장(九折羊腸)이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 길로 구불구불 흐르는 금강의 속내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길이다. 부남면사무소에서 635번 지방도를 따라가다가 보면 대소교에 이르고 그곳에서부터 밤소 마을로 가는 길이 시작된다.
좌측으로는 푸른빛 비단처럼 펼쳐진 금강이 흐르고, 비탈진 길과 논두렁 길, 그리고 과수원 길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이다. 더구나 누런 황토빛 땅과 강 건너 펼쳐진 길이 마치 한 폭의 잘 그린 산수화 같다. 그런 길이 1.8㎞쯤 이어지고, 강 옆 언덕에 자리한 사과밭이 끝나는 곳에서 금강 벼룻길이 시작된다.
이 근처 사람들이 ‘보뚝길’이라고 부르는 이 길은 왼쪽은 깎아지른 산이고, 오른쪽은 호수같이 맑지만 무서움을 느낄 정도로 좁은 낭떠러지 길로 밤소마을까지는 약 1.5㎞ 정도 이어지는 길이다. 가을이면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밟고 가는 맛이 남다르고 복사꽃이나 진달래 피는 봄이면 물위에 드리운 그 꽃 그림자를 바라보며 걷는 길이 어찌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지, 마치 삼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 갈 것처럼 황홀하면서도 아름다운 길이다. 벼랑을 깎아 만든 길을 걷다가 보면 옛 사람들의 그 신산스런 삶이 동화처럼 아련하게 떠오르고, 이 땅에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어찌 그리도 감사한 일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걷다가 보면 어디를 보건 다 절경이다. 벼랑길이 끝나고 수풀 속으로 들어서면 예쁜 금낭화 군락지가 나타난다. 꽃 한 송이를 따서 뒤 따라 오는 사람에게 귀고리를 선사한다. 길이 끝날 무렵 시집살이에 지친 한 여인의 슬픈 사연이 서린 각시바위를 깎아서 낸 동굴길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천천히 울창한 숲길을 지나면 밤소마을에 이른다.
바로 건너편에 봉길마을이 있다. 마을이 금강 상류에 둘러 싸여 있어 마치 봉황의 집처럼 보인다고 해서 봉길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이곳을 지나면서 바로 이곳에 집 한 채 짓고 살았으면 했는데, 아직도 나는 이 근처에 바늘하나 꽂을 땅조차 마련하지 못했으니, 내세에서나 이 소원을 이루게 될는지.
한치교를 지나며 바라본 금강은 연둣빛으로 온통 물이 들었고 그 아래 범상치 않은 바위가 대문바위다. 군산 하구둑까지 흘러가는 천리길 금강은 저 대문바위 곁을 안 거치면 갈 수가 없기 때문에 붙은 이름인 모양이다.
느티나무 잎들이 하나 둘씩 푸르러가고 문득 산허리로 하얀 구름이 서둘러 올라가듯이 우리들 역시 강을 따라 내려가야 할 것이다. 상굴교를 지나며 강가에 늘어선 미루나무 아래를 흐르는 강물빛은 더욱 푸르다. 굴바우가 있으므로 굴바우라고 불리어 굴암리라고 지어진 상굴암 하굴암을 지나며 강은 드넓고, 새터마을을 벗어나자 멀리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로 차들은 질주한다.
술암교 아래로 강물은 유장하게 흐르고 건너편에 기암괴석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다리를 건너면 잠두마을로 가는 길이고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옛 시절 신작로를 따라 우거진 숲길이다. 그 길이 서두에 말했던 무릉도원길이다.
잠두마을 옛길(2㎞)은 잠두2교에서 시작해 잠두1교에서 끝난다. 잠두1·2교를 잇는 37번 국도가 뚫리기 전까지 이 길은 무주와 금산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강은 이곳에서 더없이 아름답다. 누가 이 길을 알아서 이렇게 복사꽃 만발한 채 흩날리는 날,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 털어버리고 걸을 수 있겠는가.
가당천, 상류천, 남대천 모두가 이곳에서 금강에 합류하기 때문에 여러 굽이가 된 강물이 마치 꿈틀거리는 용과 같다하여 이름조차 용포인 이곳에서 강은 저렇듯 한갓 진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강 건너 저편 마을은 모양이 누에머리같이 보인다하여 누구머리 혹은 잠두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저 마을에는 어떤 사람이 살다가 갔으며,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을까? 저 멀리 낮게 놓인 저 다리는 어떤 사람들이 다녔던 다리일까? 그리고 그 위에 크게 더 크게 겹겹이 놓인 저 다리로 쌩쌩 거리며 가는 자동차들은 어디로 가는 차들일까?
생각하며 바라보는 이 강변 길, 그런데 이 강변이 야생복사꽃으로 온통 불이 붙었다. 내가 수십여 년간 이 나라 이 땅을 떠돌아다녔어도 복숭아과수원이 아니면서 이렇게 강이고 길이고, 산이고 온통 복사꽃이 별천지처럼 펼쳐진 곳은 본적이 없다.
그뿐인가, 길가에 심어진 벚꽃이 만개해 한 점 소리 없이 꽃잎이 지고 꽃 잎 하나 날려도 봄이 가는데, 만점 꽃잎이 가슴을 휘젓고 지나가기도 하는 강변이다. 조팝나무 꽃과 곧 이어 피어날 찔레꽃, 가을이면 온통 단풍잎이 강물까지 빨갛게 물들이는 이 강변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면 다시 찾고 다시 찾은 곳이 바로 잠두마을 건너편의 강변길이다.
복사꽃 피는 정경을 사랑했던 이백은 그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 절창 한 편을 남겼다.
문여하사서벽산(問余何事栖碧山)/ 소이부답신자한(笑而不答心自閑)/ 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왜, 산에 사느냐기에/ 그저 빙긋이/ 웃을 수 밖에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분명 여기는/ 별천지인 것을
‘산에 사는 마음을 속된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고/ 빙그레 웃음으로 답하고서/ 흐르는 물에 복사꽃을 띄운다’라는 시 구절처럼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그 아름다움의 진면목을 볼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지극한 곳에 이르지 못하면 아무리 곁에 있어도 볼 수가 없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복사꽃 피는 길은 이리저리 휘돌아가고, 강물은 소리도 없이 흐른다. 이러한 곳에 터를 잡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마음이 자유로울까? 내가 훗날 도시를 떠나 전원으로 돌아온다면 이러한 곳에 터를 잡고 ‘세상을 잊은 사람’처럼 살아보리라 마음먹는다.
하지만 그것 역시 어쩌면 내 마음속에 다짐으로 끝날지도 모르겠다. 가다가 뒤돌아보면 산은 분홍빛으로 활활 타오르고, 강에는 세 개의 다리가 ‘다리 박물관’처럼 놓여 있고 그 아래를 흐르는 강물 소리에 장욱(張旭)의 ‘복사꽃은 온종일 물 따라 흐르는데’라는 시 한편이 떠오른다.
들녘 저만치 안개 속에 다리 둥실 걸렸는데
시냇가 서쪽 바위에서 뱃사공에게 물어 보네
복사꽃 온종일 물 따라 흐르는데
맑은 시내 어디쯤에 도화동(桃花洞)이 있는냐고?
도화동이 어디가 있느냐고? 묻는 시인에게 지금 이곳이 도화동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옛 사람은 이미 간곳이 없고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소리와 연 푸른 빛으로 갈아입은 버드나무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언제 처음 놓았는지도 모르는 다리가 불어 오른 강물에 금세라도 잠길 듯 놓여 있고, 바로 그 위를 잠두1교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인 잠두교가 지난다.
강물이 다리 아래를 흘러 바다로 가듯이 우리들의 인생도 쉬지 않고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하니 문득 옛 이야기 두 편이 떠오른다.
자가 목지(牧之)인 당나라 말기의 시인 두목이 절강성에서 어느 소녀를 만났다.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두목은 10년 후 그 소녀를 아내로 삼겠다고 약속하였다. 두목은 장안에서 관료생활을 하다 보니 찾아갈 겨를을 얻지 못해 14년 만에 호주의 관리로 부임하여 그 소녀를 찾았다. 그 소녀는 그가 오기 3년 전에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자식까지 두고 있었다. 그 사실을 접하고 절망한 두목이 지은 시가 ‘탄화(歎花)’다.
스스로 봄을 찾아 나섬이 늦은 것을
슬퍼하며 봄꽃 빨리 핌을 한탄한들 무엇하리.
광풍에 붉고 아름다운 꽃잎 떨어지고
푸른 잎은 그림자를 치우며 과실만이 가지에 가득하네.
두목은 꽃이 피고 지고 열매를 맺는 자연에 빗대어 그의 사랑이 결실도 맺기 전에 다른 사랑으로 전이해 간 것을 노래했다. 당나라 중기의 시인 최호도 그와 비슷한 경우를 겪었다. 최호가 청명절에 답청(踏靑)을 나섰다 복사꽃이 만발한 어느 집에서 처녀를 만나 물을 청해 마시고, 그 다음 해 청명절에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복사꽃은 지난해처럼 만발했으나 그 처녀는 간 곳이 없었다. 그때의 애잔함을 시로 표현한 것이 ‘인면도화(人面桃花)’다.
지난해 오늘의 이 문안에는
그 사람 얼굴과 도화 꽃이 서로 어우러져 붉었는데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고
도화꽃만 의구히 봄바람에 웃고 있네.
머물러 있는 것이 무엇이며 기다리지 못하고 가는 것은 또 무엇인지 계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길을 따라 걷다 ‘돌아보니 봄바람에 하나같이 꽃’이라는 시 구절과 ‘미인은 간곳없고 도화만이 휘날리더라’라는 최호의 시 한 소절이 가슴 속을 아릿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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