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돈 들이지 말고 분수에 맞게 짓고 무작정 시골 동경한 별장 신중해야 / 소박한 집이라도 마음을 달리하면 살아가는데 여유와 낙, 찾아오는 법
강연을 하다가 가끔씩 청중에게 질문을 할 때가 있다. “훗날 시골에 별장을 짓고 살고 싶은 분이 있습니까?” 대개 열에 서너 명은 별장을 짓겠다고 한다. 나라 안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잘 지은 별장들이 사람들이 살지 않아 풀만 우거진 폐가가 된 것이 부지기수다.
도시에 길이 든 사람들이 무작정 시골을 동경하여 별장을 짓고 잠시 살다가 보면 싫증을 느낀다. 금세 번잡과 소음이 그리운 탓이다. 그런데 집이 팔리지 않는다. 그래서 버려두고 간 집들이다.
조촐한 집을 짓고 살거나 아니면 시골집을 임대해서 살다가 시골 생활이 적성에 맞으면 분수에 맞게 짓고 살면 될 것인데,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 큰 돈 들여 지은 결과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이 추구한 집은 어떤 집들일까?
“홍귀달洪貴達의 집이 남산 밑에 집이 있었다. 그 언덕에다가 초가로 정자를 만드니 세로와 가로가 겨우 두어 발(丈)이었다. 허백당虛白堂이라 이름을 써 붙이고 매양 퇴근하면 복건을 쓰고 여장을 짚고 그 안에서 읊조리며 마치 세상을 잊은 것 같았다. 파직된 뒤로는 더욱 세상일에 관계하지 않았다. 그의 한 시 구절에는 “산비 솔바람에도 역시 시끄러움을 싫어하노라”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친구들이 그의 풍채를 흠모하여 모여드는 이가 많아 즐거이 상대하여 술상을 벌려놓고 회포를 풀며 시를 읊었다.
보는 사람들은 그가 정승을 지낸 귀인인줄 몰랐다. 평생에 남과 눈 한 번 흘긴 일이 없으나 다만 국사에 대해 말할 것이 있으면 침묵하지 않았다. 자제들이 때로, “왜 좀 참으셔서 집안 식구들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그는, “내가 역대 조정에서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또 이미 늙었으니 지금 죽은들 무엇이 아까우냐.” 고 말하며 끝내 고치지 않았다.“ 〈연려실기술〉 ‘연산’ 조 ‘고사본말’에 실린 글이다.
그 당시 세상에 떠도는 소문이 있었다. 한양의 남산에 9만9천9백99칸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호화주택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소문은 팔도에 떠돌았다. 그래서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그 집을 구경하고자 남산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 그 집을 발견하고선 실망이 컸다. 왜냐하면 그 집이 판서를 지낸 홍귀달의 집인데, 허백당虛白堂이란 당호가 붙은 단칸 초막이었기 때문이다.
홍귀달은 그 단칸방에서 9만9천9백99칸에서 할 수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여겼고, 그의 생각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던 것이다.
허백당 옆에다 단칸 헛가리를 짓고서 적암適菴이라고 이름 짓고서 살고 있는 역관譯官 조신曹伸에게 홍귀달이 적암부適菴賦를 지어 보냈다. 그 글을 받은 조신이 웃으며 지었다는 시가 일품이다.
아, 나는 가는 곳마다 자적自適 하네
몸이 천하므로 작은 벼슬도 영광이요,
집이 가난하므로 박봉이라도 만족,
거처하는 곳은 무릎이나 들이면 그만이요,
음식은 산해진미가 아니라도 배부르면 좋고,
술은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그만두고,
혼자면 자작自酌, 둘이면 대작對酌
시는 잘 지어 무엇 하리, 내 뜻이나 말할 뿐,
글도 탐독이 아닌 노곤하면 자고마니,
이것이 모두 나의 자적이로세.
그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중종 때 학자인 김정국金正國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 나게 재물을 모으고 있다는 가까운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 속에 청빈하게 살았던 그의 집 풍경이 들어 있다.
“내가 20년을 빈곤하게 사는 동안, 두어 칸 집에 두어 이랑 전답을 갈고, 겨울 솜옷과 여름 베옷이 각기 두 벌 있었으나 눕고서도 남은 땅이 있고 신변에는 여벌 옷이 있었으며, 주발 밑바닥에 남은 밥이 있었소, 이 세 가지 남은 것을 가지고 한 세상 편하게 지냈던 것이요. 비록 넓은 집 천 칸과 옥 같은 곡식 만 섬과 비단옷 백 벌을 보아도 썩은 쥐와 같이 여겼고, 이 한 몸이 살아가는데 여유와 낙이 있었소.
없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서책 한 시렁, 거문고 하나, 벗 한 사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개 하나, 바람을 들일 창 하나, 차 다릴 화로 하나, 햇볕 쬐일 마루 한 쪽, 늙은 몸을 부축할 지팡이 하나, 봄 경치를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면 족한 것이요, 이 열 가지는 비록 번거롭기는 하지만 하나도 빠질 수는 없는 것들이요, 늙바탕을 보내는 데에 있어 이외에 더 무엇을 구할 것이요, 분주하고 고단한 중에도 매양 열 가지 재미가 생각나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오.“
하지만 당시의 사대부들이 소박한 집만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홍길동전을 지은 개혁 사상가 허균(許筠)이 1607년 정월 평양에 가 있던 화가 이정(李楨)에게 보낸 글을 보면 그 당시 사대부들이 꿈꾸었던 집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큰 비단 한 묶음과 갖가지 모양의 금빛과 푸른빛의 채단을 짐 종에게 함께 부쳐 서경으로 보내네. 모름지기 산을 뒤에 두르고 시내를 앞에 둔 집을 그려주시게. 온갖 꽃과 대나무 천 그루를 심어두고, 가운데로는 남쪽으로 마루를 터주게. 그 앞뜰을 넓게 하여 패랭이꽃과 금선화를 심어놓고, 괴석과 해묵은 화분을 늘어놓아 주시게. 동편의 안방에는 휘장을 걷고 도서 천 권을 진열하여야 하네. 구리병에는 공작새의 꼬리 깃털을 꽃아 놓고, 비자나무 탁자 위에는 박산향로를 얹어놓아 주게. 서쪽 방에는 창을 내어 애첩이 나물국을 끓여 손수 동동주를 걸러 신선로에 따르는 모습을 그려주게.
나는 방 한가운데서 보료에 기대어 누워 책을 읽고 있고, 자네와 다른 한 벗은 양 옆에서 즐겁게 웃는데, 두건과 비단신을 갖춰 신고 도복을 입고 있되 허리띠는 두르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야 하네, 발 밖에서는 한 올 향연이 일어나야겠지. 그리고 학 두 마리는 바위의 이끼를 쪼고 있고, 산동은 빗자루를 들고 떨어진 꽃잎을 쓸고 있어야겠네.“
그러나 허균은 그가 의도했던 그림을 받지 못하였다. 이정이 그의 편지를 받은 며칠 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시의 사대부들은 비록 실제로는 호화로운 집을 짓고 살지는 않았지만, 상상 속에서는 남부러울 것 없는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다.
한편 정약용은 “호수와 산 사이에 집을 지으니 물가와 묏부리의 아름다움이 양편으로 둘러 얼비친다. 대나무와 꽃과 바위도 무리지어 싸여 누각과 울타리에 둘러 있다”(「캄캄한 방에서 그림 보는 이야기」)고 상상 속의 집을 묘사하고 있다.
18세기의 문인 이용휴(李用休)가 짓고자 했던 집은 우리 이웃집 풍경처럼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집이다.
“나는 일찍이 한 가지 상상을 한 적이 있다. 깊은 산 중 인적 끊긴 골짜기가 아닌 도성 안에 외지고 조용한 곳을 골라 몇 칸 집을 짓는다. 방안에 거문고와 서책, 술동이와 바둑판을 놓아두고, 석벽을 담으로 삼고, 약간의 땅을 개간하여 아름다운 나무를 심어 멋진 새를 부른다. 그 나머지에는 남새밭을 가꿔 채소를 심고 그것을 캐서 술 안주를 삼는다. 또 콩 시렁과 포도나무 시렁을 만들어 서늘한 바람을 쏘인다. 처마 밑에는 꽃과 수석을 놓는다.”
대부분의 사대부들과는 달리 이용휴는 고향 근처나 경치 좋은 먼 곳으로 가지 않고 도성 근처에 자리를 잡고자 했다.
그러나 대동법 시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김육金堉은 사람들이 누대와 정자를 짓는 것까지도 좋지 않게 보았다. 그것들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허황된 면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집은 띠풀을 엮어서 지은 초가집이었다. 또 집의 “안쪽에 있는 당을 ‘공극당’이라 이름 짓고 그 바깥쪽의 정자를 ‘구루정?樓亭’이라”고 하였는데 초가의 지방이 낮아 머리를 부딪치지 일쑤여서 “반드시 허리를 구부린 다음에야 움직일 수가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모든 사대부들이 김육처럼 소박한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더러는 개성이 넘치는 집이나 정원을 짓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중국의 사대부들 중 문인들은 어떠한 집을 지었을까? 여산초당원廬山草堂園을 짓고 살았던 당나라 때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그가 짓고 살았던 초당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초당은 세 칸에 기둥이 두개이고 방이 두개... 나무는 쪼개기만 하였고 붉은 칠은 하지 아니하였다. 담은 흙손으로만 칠 하였고, 석회는 바르지 아니하였다” 그가 말한 초당처럼 다산 정약용도 유배지인 강진의 다산에서 초당을 짓고서 공부에만 열중했는데 지금 그 곳에 가면 다산와당만 있지 초당은 찾아볼 길이 없다.“ 백거이는 “대 나무 숲에 거문고 하나에 술 한 병만 있으면 된다.”고 하였다.
공자 역시 그의 제자인 안회가 청빈하게 살면서도 자족하며 사는 것을 보고 글 한 편을 지었다.
“어질도다. 회여, 한 그릇 밥과 한 표주박물로 누추한 마을에 살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는데 , 안회는 그 즐거움이 변하지 않으니. 어질도다. 회여.”
위의 글은 온갖 가난 속에서도 배움을 좋아하고 진리에 안주해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경지에 오른 제자를 공자가 칭송한 글이다.
한편 명明나라 말기의 지사 황주성黃周星은 장취원기將就園記라는 글을 지었다. 그 글의 내용은 경치가 좋은 산 속에다 장원將園과 취원就園이라는 그럴듯한 장원을 마련하여 온갖 건물과 나무, 꽃, 시내, 언덕을 배치한 뒤 그곳에서 여유 있는 나날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글을 읽은 조선의 사대부들 글이 가진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다고 한다.
내 유년을 지켜보았던 진안의 고향집은 측면 2칸에 정면 3칸이었다. 본채에는 방이 골방까지 세 개에 마루, 그리고 제일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큰 방은 할머니가 기거하는 방이자 겨울에는 삼을 삼든지 사람들이 모여 공동의 일을 하는 공간이고, 마루 옆에 있는 세 명만 누워도 꽉 찰만큼 작은 방이 부모님이 기거했던 방이다. 그 방에서 어머니는 나와 두 동생을 낳았다고 했다. 마루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견고하긴 했지만 항상 삐걱대기 일쑤였다.
본채 뒤가 바로 뒤 안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장독대와 함께 본채에 달린 광이 있었다. 광에는 꿀이며 감이며 곶감과 아편(그 시절은 아편이 담방 약으로 필요했다.) 등, 집에서 가장 귀중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들어 있었고 장독대 옆에 늙은 대추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기둥들이 하나같이 못생긴 나무들이었다. “못 생긴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라는 속담을 따라서 그랬는지, 집만 보아도 실감나게 가난한 집의 전형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아주 해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안성 청룡사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나, 서산 개심사 심검당의 기둥처럼 자연 그대로의 나무인데다 그 S자로 구부러진 나무들이 우리 집 본채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들이었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에도 나는 가끔씩 이런 생각을 했었다. “산에 가면 그렇게 쭉 뻗은 소나무들이 많은데, 어쩌면 저렇게 구부러지고 구부러진 못난 소나무들을 수소문해 모아 가지고 집을 지었을까” 사실 집을 짓는 것도 곧은 나무로 짓는 게 쉽지, 구부러진 나무로 짓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집이 남아 있다면 그런 건축사적 특징만 가지고도 지방문화재로 등록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아아, 나는 호도껍질 속에 갇혀 있어도 내 자신을 끝없는 천지의 왕이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야.”
셰익스피어가 지은 〈햄릿〉 제 2막 2장에 실린 글과 같이 작은 집을 짓고 자족하는 삶을 살았던 옛 사람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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