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는 기억나질 않는다. 그렇지만 짧지만 강했던 두 문장은 명료하게 기억이 난다.
“살아야 할 이유보다
죽어야 할 이유가 더 많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무심코 본 ‘자살’이라는 시다. 이 글을 접하자마자 나는 머리를 심하게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루 평균 39.5명 스스로 목숨 끊어
자살을 결정하는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결정하는 이유가 다른 만큼 극단적 선택에 이르는 과정도 다양하다. 그렇다. 더군다나 죽음으로밖에 자신의 결백과 억울함을 표할 방법이 없다면 그 당사자는 그냥 돌팔매질을 맞을 것인가 아니면 죽음으로 저항할 것인가에서 고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도 사망원인통계’에 의하면 자살로 사망한 사람은 총 1만4427명으로 하루 평균 39.5명이 목숨을 끊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인구 10만 명 당 28.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의 평균 12.1명을 훨씬 초과하는 수준이다.
교통사고는 더디긴 하지만 각종 사고예방 프로그램을 통해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자살은 개인적 일탈행위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개선되고는 있지만 예산적, 제도적 지원이 아직은 부족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핀란드가 좋은 본보기가 될 듯하다. 1980년대 세계 1~2위의 자살률로 자살이 사회적 문제였던 핀란드는 국가가 직접 나서 자살 방지 프로그램을 수립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해 인구 10만 명당 30.3명이던 자살률을 2012년에는 17.3명으로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자살은 주변에서 도움을 주고 이끌어 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결과가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는 고칠 수 있는 ‘마음의 병’이라는게 전문가의 의견이다.
죽어야 할 이유가 더 많았던 이들이 살아있을 때 과연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했던가. 현대사회가 톱니바퀴 돌아가듯 빡빡하게, 어지럽다는 핑계로 우리는 ‘나’ 스스로를 감당하기도 벅차한다. 전쟁터에서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앞으로’를 외치는데 옆에서 전우가 쓰러지는게 보이질 않는 형국이다.
사회에서도 ‘내’가 포기하고 싶어지고, 도망가고 싶어질 때 그 옆으로 뛰어가는 동료를 애타게 불러보아도 이미 지난간 뒤다. 몇 번을 불러보다가 달라지는 것이 없으면 이제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하질 않는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고 쉽지 않지만 가만히 손을 내밀어주는 동료가 있다면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살’이란 말은 입에 담기도 무섭고, 슬프고, 답답한 단어이다. 더군다나 그 무섭고, 슬프고, 답답한 이 단어가 단어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상으로 보여진다면 어떨까.
극단적 행동하기 전 주변 둘러보자
남아있는 가족, 친구, 지인들은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처럼 빨려 들어갈 것이다. 이렇게 무언가에 두 발이 꽉 메어서 무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살생존자’라고 부른다고 한다. ‘자살 생존자’는 가까운 사람을 자살로 잃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고 그들은 또 다른 제2의 자살의 위험성에 노출된다고 한다.
아무쪼록 지금 이 순간 극단적인 행동을 할 생각을 하는 이가 있다면 주변의 사랑하는 이가 ‘자살 생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힘을 내서 나한테 연락했으면 좋겠다. 소주 한잔 따라주며 어깨를 도닥거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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