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영전서 대구까지 30번 국도
허균과 매창의 연서(戀書)를 떠올리며 내소사와 개암사가 있는 내변산의 속살을 먼발치로 바라본다. 왕포, 격포, 고사포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다 동진 나루가 보이면 부안의 절경도 멀어져 간다. 태인에 들어서면 동학혁명 때 태인전투가 벌어졌던 성황산과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 선생이 태산군수로 부임해 풍월을 읊었다는 피향정이 길손을 맞는다. 태인 지역은 칠보와 더불어 유무형 문화재가 즐비하다. 조선 시대 최초로 지방에서 출판이 이루어지고 판매됐던 태인방각본은 지식문화의 상징이다. 또한 한국 가사문학의 효시인 정극인의 〈상춘곡〉과 무성서원, 고현향약 등이 있는 이 곳은 학문의 고장으로 표현될 만큼 문화콘텐츠가 풍부하다.
구절재를 지나면 옥정호가 보인다. 진안 데미샘에서 발원한 물이 천을 이루고 제법 몸을 부풀려 섬진강이 되어 느리게 흘러가다 한숨 자고 머무른 곳이 옥정호다. 옥정호 아래쪽에 있는 섬진강댐은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이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주력부대인 남부군의 주무대였던 회문산을 옆에 끼고 강진과 청웅을 지나면 임실 사선대가 나온다. 마령으로 들어서면 천하의 명산 마이산이 하늘과 경계를 이루며 불끈 솟아 있는데 영험한 기운이 느껴진다. 백운지역은 전형적인 산촌으로 마을마다 아름드리 노거수가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수차를 이용한 물레방앗간도 있었다. 백운면 소재지에서 국밥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고 진안 상전에 들어서면 용담호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상전벽해란 용담호를 두고 한 말인 듯싶다.
덕유산과 나제통문을 지나 전라북도 최동단 무주 무풍에 이르면 이곳이 경상도인지 전라도인지 헷갈린다. 행정구역은 무주인데 주민들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지역감정이란 애초부터 없는 듯하다. 가을에 가면 옥수수가 지천이다. 대덕산을 넘으면 전북과 경계인 경남 김천이다. 한적한 길을 따라 상주를 거쳐 대구에 이르게 되면 30번 국도는 긴 여정을 마친다.
이처럼 30번 국도는 자연 풍광과 문화를 꾸밈없이 보여주는 길이다. 호수가 있고 문화유적이 있고 바다가 있는 종합자연세트의 길이다. 길의 확장은 시간을 단축하는 편리함도 있지만 주변 마을과 아름다운 풍경, 문화를 지우는 파괴의 역할도 한다.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문화가 있고 마을이 있고 사람이 있다. 그러나 좁은 국토에 사방팔방으로 도로가 개설되다 보니 자연은 누더기가 되고 전통문화도 길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길 따라 가면 문화·마을·사람 있어
이렇게 개발돼 콘크리트가 땅을 점령하다 보면 머지않아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 관광지가 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길의 확장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물동량이 많고 지역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해야 되지만 전통문화의 보존과 자연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길이라면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할 것이다. 전라북도는 산업화의 그늘로 상대적으로 낙후지역으로 밀려나 있었지만 역으로 생각한다면 발전 가능성이 열려 있는 황금의 땅이다. 산업화가 남긴 후유증은 삶의 질로 나타난다. 상대적 박탈감으로 소외됐던 변방이 주목받는 이유이다. 그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30번 국도를 따라가 보자. 바다와 산, 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풍경과 문화유산이 즐비하고, 무엇보다 오순도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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