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나는 서점으로 달려가 책에게서 위로를 받았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내 안에 남겨진 무언가를 보물찾기 하듯 책을 뒤적거렸다. 사랑에 깊이 빠졌을 때에는 책 안에서 사랑의 지도를 더듬었으며 목숨을 던지고 싶은 절망의 순간에도 책을 읽으며 희망의 날갯짓을 찾았다.” (윤소희 ‘서점을 헤매다’)
헤어나오고 싶지 않은 '읽기' 중독
세상의 여러 중독 중에서 헤어 나오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아마도 사랑과 책일 것이다. 읽을 때마다 낯선 세계가 시작되어 한없는 환상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점에서 그것은 같은 마법을 지녔다. 맺었다 풀기가 쉽지 않고 배타적 독점의 특성이 강한 사랑과 달리 책은 어느 페이지에서 멈추든 너그럽게 우리를 보내준다. 읽는 자에 따라 한없이 깊은 우물이었다가 가볍게 건너 뛸 수 있는 개울이 되기도 한다. 사랑의 목록은 함부로 전시할 수도 없고 목록만으로는 전모를 짐작하기 어려우나 누군가의 책장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어떤 존재이며 무엇에 매혹되는가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이의 서가를 훔쳐보는 짜릿함은 매우 독특한 관음이라 생각한다. 책의 가장 위험한 중독성은 아직 읽지 않은 책에 있다. 언젠가, 하고 염두에 두었으나 미처 읽지 못했던 책을, 그 실물의 무게와 표지를 만지며 감각하고, 빠르게 몇 문장을 읽어내려갈 때의 아찔함이란 아직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애인을 갈망할 때와 닮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와 나와 사이에 놓인 시공을 압축하고 들이밀며, 때로 돌아서고, 등을 졌으나 뒷모습으로 온통 그를 바라보고, 그가 나에게 가하는 기습적인 폭력에 덜덜 떨다가 후드득 온몸을 적시는 쾌감에 진저리를 치게 되는 것이다. 나를 향해 포획의 그물을 던지는 매혹의 문장들을 예감하고 미리 전율하는 것에 그 중독성의 핵심이 있다.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라는 프란츠 카프카의 말은 읽는 자의 전 존재를 흔드는 한 권의 책에 대한 서늘한 비유다. 그런 흔들림을 자청하지 않는 자, 책을 읽지 않은 자의 세계란 얼마나 지루한 얼음의 세계랴.
책을 읽으며 한 문장이 거듭 새롭게 밀려오는 경이를 발견하는 쾌락의 맞은 페이지에 자신이 직접 글을 쓸 때의 희열이 자리한다. 나의 시간과 환상을 빚어낸 책을 손에 쥐는 순간, 나는 전혀 다른 존재로 비상한다. 산다는 일이 이처럼 읽고, 쓰는 것이 끝없이 자리를 바꾸며 무수한 파문을 이어가는 꿈과 쾌락의 연속임을 실감할 때 우리는 내 하나의 일생이라는 유한성을 넘어 수많은 타인들의 시간 속에서 공존하고 영생하는 것이리라. 읽고 읽히며 전승되는 이 불멸이야말로 책이 건네는 쾌락 중에 최상일 것이다.
자신이 직접 글을 쓸 때의 희열
“간혹 작가는 삶이 어둡고 불행하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글을 쓰면서 간신히 현실의 불행을 이겨내며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 작가가 글을 쓸 때의 희열이 대체불가능한 종류이며 / 글에 관한 생각만으로도 뇌 속에서 희열의 호르몬이 솟구친다는 것을 / 그러므로 호흡의 매 순간마다 글이 작가의 존재와 더욱더 얽히고 / 잠 속에서도 무의식 속에서도 찰랑거리며 /호수처럼 무수한 겹의 파문으로 번져가고 영원한 거울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 그리하여 생이 많아진다는 것을 / 생의 순간이, 작가의 자아가 무수하게 중첩되고 증폭된다는 것을 / 그러므로 작가는, 가장 솔직한 의미에서, 쾌락의 한가운데서 살아간다는 것을 /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배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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