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하는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과 박태원의 「천변 풍경」이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 70년대 영화 〈바보들의 행진〉과 〈별들의 고향〉까지. 미래유산이란 우리가 지금 보고 사용하던 것을 후대에 남기고 싶은 가치를 말함이리라. 고궁이나 종묘 같이 거창한 공간 말고 장충동의 체육관과 족발골목 그리고 문학작품까지 포함시키는 작업이 진행 중인 것.
완주~익산~김제~군산으로 이어져
전주가 쉬고 있을 리 없다. 한옥마을 말고도 서학동 예술인마을이 미래유산으로 지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도 깨끼나 두루마기 한복을 만들고 과거 미군 군복을 줄여 검은 물을 들인 ‘스모루’바지와 양키시장에서 흘러온 청바지를 수선하던 풍남문주변 ‘청바지골목’이나 김남주 시인과 신영복 선생의 청춘을 가둔 전주교도소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좁은 골목과 하얀 페인트의 ‘큰집’ 역시 백성들의 삶의 애환이 깃들어 있음에 보존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리라.
완주 익산 김제 군산을 아우르는 미래유산이 있다. 이름하여 ‘대간선수로’다. 한 때 나이아가라 폭포라 불리며 유원지였던 대아댐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산면 어우보 취수구에서 갈라져 해지는 옥구저수지가 그 종착점이니 장장 80킬로미터에 이르는 수로가 그것.
5년 뒤면 만들어진지 100년이 되는 엄청난 사이즈의 이 인공수로는 현재도 농업용수와 음용수 그리고 공업용수로 사용되고 있다. 시멘트 콘트리트로 노출되어 있는데 삼례 독주항처럼 넓은 곳은 폭이 20미터, 목천포를 기역자로 돌아 전군도로와 나란히 달리는 8미터 정도의 좁은 물길은 보는 이 없이 무심히 흘러간다.
걸어보자. 밥을 벌어다 주던 물길에 이야기가 있으니. 거북이 등이 된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밤을 세워 물꼬를 트고 큰물에 배수를 하며 쌀농사를 짓던 백성들의 보릿고개 눈물이 있으니 말이다.
강점기 시절, 대아댐 건설과 만경강직강공사 또 이 인공수로의 건설은 당시 최대의 SOC사업이었다. 중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건설에 몸 바친 현장노동자들의 사진과 자료는 농어촌공사가 잘 보존하고 있다.
대간선수로의 물은 근대 수리시설이나 도작문화의 역사에 그치는 게 아니다. 삼례를 지나 신흥정수장으로 흘러들어가는 물만도 하루 7만 톤에 이른다. 기나긴 수로를 타고 각 가정의 수도꼭지에 배달되는 물로 익산시민들은 커피물을 끓이고 밥을 짓는데 사용한다. 오늘 저녁에도 말이다.
오래된 것에는 유지 보수비용이 많이 든다. 완주공단과 수로 주위 논에서의 농약 오염 등 관리와 감독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곳 상류지점의 물을 파이프로 가두는 논의가 있는 것으로 안다. 결론은 아니다. 청계천도 오픈했고 노송천도 복개를 걷으려는 계획이 있는데, 그 물길 덮으면 안 된다. 작가들은 이 물길의 시절을 작품으로 남기고 감독은 다큐멘터리로 기록해야 한다.
'쌀의 고장' 문화정체성 바탕
대간선수로를 전북의 미래유산으로 선정하고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이 동네가 쌀의 고장이라는 문화정체성을 바탕으로 한다. 정체성 같이 거룩한 입장 말고 ‘그 눈동자 그 입술’로 지켜보던 전북사람들이 만든 영화 〈피아골〉이나 〈선화공주〉, 센베이의 풍년제과, 결혼예물을 준비하던 국수 이창호가 살던 시계점 또 풍남문 타종소리까지 당연히 미래유산이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지 않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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