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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신간회 사건과 이리사람 임혁근(林赫根)

원도연 원광대 디지털콘텐츠공학과 교수
원도연 원광대 디지털콘텐츠공학과 교수

1920년대의 이리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도시였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일본인들, 중국인 토목 기술자들과 고향에서 밀려난 가난한 조선의 청춘들이 전국 각지에서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신도시 이리는 학연, 지연, 혈연에 얽매이지 않는 기회의 땅이었다. 그것은 곧 익명성의 도시라는 뜻이었고 그 도시적 분위기는 독립운동가들 특히 사회주의자들에게 사상과 운동의 옥토였다.

이 뜨거웠던 시절에 이리 사람 임혁근(林赫根)은 이리기독교청년토론회의 연사로 처음 등장했다. 1922년 3월이었고 그의 나이 23살이었다. 임혁근은 1922년 동아일보 기자의 신분으로 청년회를 통한 조직활동과 사상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리고 1927년 6월 28일 그의 일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하루를 맞이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간회 익산지부 설립이었다. 신간회는 당시 민족주의외 사회주의 진영의 연합으로 구성된 최대의 항일 사회운동단체였다. 이리·익산의 사회주의 운동단체들은 일제히 조직을 해체하고 신간회 설립에 집중했다. 임혁근은 익산 사회주의 운동의 대표로 신간회 운동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유독 익산 신간회 설립을 강경하게 저지했다. 문제가 된 것은 익산 신간회 준비위원회의 격문이었다. “… 우리 신간회 운동은 우리 전 민족운동사상 새 기원을 긋는데 있고 기미운동과 병칭(竝稱)할만한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2천만 민중이여, 신간회를 피와 땀으로 강하게 지지하라. …” 익산 신간회의 격문은 강렬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배헌, 임영택, 임혁근 3인은 일경에 체포되어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1928년 2월 21일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전북의 각 단체들은 연합회의를 열고 10여명의 대표가 강경역까지 마중을 나갔으며, 이리역 앞에는 수천명의 인파들이 모여 “출옥동지 만세!”를 외치며 이리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2월에 출옥한 그는 4월에 다시 중외일보 기자가 되었는데 5월의 전북기자대회와 깊은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전북기자대회는 일제의 강경한 저지 속에 반쪽짜리로 치러졌고 임혁근은 다시 검거되었다가 풀려났다.

그해 6월 한달여 만에 또다시 체포된 임혁근은 결국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1934년 35살의 나이로 옥사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항일운동에 대한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상은 공식기록으로 본 임혁근의 일대기다. 그가 수형카드에 남긴 2장의 사진은 1920년대에 가장 위태롭고 뜨겁게 살았던 한 운동가의 운명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임혁근 뿐만 아니라 제헌의회 의원까지 지낸 배헌에 대한 기록과 발자취도, 임혁근과 함께 위태로운 세월을 싸워나갔던 임종환에 대해서도 우리는 너무나 무지하다. 올해는 3.1운동 101주년이다. 100년전 기미년의 뜨거운 항쟁을 이어받아 투쟁의 최전선에 나섰다가 누군가는 순국했고 누군가는 평생을 숨어 살아야했다. 임혁근, 임종환, 임영택, 배헌 등등 이리·익산에서 두려움 없이 일제와 맞서 싸워던 선배들을 이대로 역사 속에 묻어두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원도연 원광대 디지털콘텐츠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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