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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성 60년을 맞으며

이병렬 우석대 명예교수
이병렬 우석대 명예교수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경자년에 설립한 해성 60년을 회고해 본다. 1960년 2월 19일에 해성중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한국천주교 전주교구에서는 1960년대 말 성심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해성’학교의 명칭을 살려 성심학교와 모체를 같이하고, 같은 전통을 잇는 남매 격의 남성 교육 기관을 계획했다고 한다. 학교 설립을 추진한 것은 외국 신부이지만 한국에 완전히 귀속하여 전주교구 김현배 주교 명을 받게 된 신부들이다. 그들 모임인 SAM회 회원과 벨기에 출신 고마르신부가 전동성당 강당에서 해성중학교를 설립한다는 계획아래 벨기에서 회원을 모아 재원을 마련했다. 그러던 중 설립 책임자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하재홍 신부로 바뀌었다. 고마르신부는 당시 주교비서였다.

1960년 4월 11일 중학교 개교와 함께 마땅한 학교 건물이 없던 그때, 전동성당 앞 본당신부의 거소가 있던 빨간 지붕으로된 강당 칸을 막아서 해성중학교 교사로 쓰기로 하면서 학생 두 학급 70명을 모집했다. 처음에는 학생모집이 잘 안돼  3차 모집을 한 끝에야 겨우 채울 수 있었다. 교사도 부족하여 성심여자중·고등학교 교사들이 당시 성당 쪽 골목에 샛문처럼 나 있던 교문으로 다니며 어렵게 강의를 했다.

그러던 중 1960년 8월 1일 순교자 치명터인 ‘숲정이’로서 천주교 전주교구가 신앙적인 조상들의 거룩한 치명을 기념하기에 긴요한 곳인 전주시 진북동 905-7번지에 7개 교실을 신축하기 시작하였다. 교구와 벨기에 ·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 등 유럽 가톨릭 단체의 적극적인 협조로 재원을 조달하여 1961년 3월 30일 신축교사 7교실을 1차 준공했고, 4월 4일 전동성당 강당에서 더부살이하던 학교를 진북동 숲정이 성지 신축교사로 이전했다.

그 이후 1964년 2월 10일 오스트리아에서 보내주기로 한 경제적 지원이 여의치 않자 힘차게 출발한 전주해성공업고등학교를 인문계 고등학교로 학칙을 변경하라는 인가가 났다. 3월 7일 중학교 5회 240명, 고등학교 2회 180명이 입학했다. 그때 인문계 고등학교로 전환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20년까지 중학교는 58회, 졸업생 20,664명, 고등학교는 55회, 졸업생 18,181명이 배출되었다.

지난 30여년의 진북동 시대를 마감하고 지금의 삼천동 시대를 열게 된 것이 1992년 10월이다. 이런 역사를 반영하듯 교가도 진북동 시대와 삼천동 시대의 가사가 조금 다르다. 삼천동 시대에는 “순교의 피로 다진 거룩한 이곳”이라고 부르지 않고 “순교의 피로 다진 거룩한 전당”이라고 부릅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모두 이 교가를 같이 쓰다가 2001년 중학교 학교체제를 남녀공학으로 바꾸면서 중학교 1절 첫줄 “대한 남아야”를 “대한의 희망”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설립 60년을 맞은 해성학교는 “성실과 실력”을 교훈으로 “바른 가치관을 정립하는 인성교육의 강화, 창의력을 배양하는 다양한 교육과정 운영, 지식기반사회에 대응하는 역량의 배양,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 함양”을 교육목표로 삼고 있다. 설립 60년을 계기로 설립 100년을 기약하며 한국에서 제일가는 교육의 전당으로 거듭나길 모든 해성가족과 함께 기원한다.

/이병렬 우석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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