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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촌놈의 한 살이

신형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신형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필자의 고향은 장류와 장수의 고장, 순창 하고도 쌍치다. 쌍치중학교가 1970년이 되어서야 개교했으므로 필자는 중학교 진학을 위해 순창읍내로 유학해야만 했다.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도 경음과 격음이 동시에 들어 있는 고향을 밝히는 것이 죽도록 창피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동급생들에 비해 몸집도 작고 갑작스러운 도회지 생활에 잔뜩 주눅 들어있던 필자는 이름 대신 집요하게 ‘쌍치쌍치’라고 불러대는 친구들이 섭섭하고 또 분해서 외톨이로 지내며 공부에만 몰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렇게 시작된 유학생활은 대학원까지 죽 이어지게 된다. 고교시절엔 힘들어진 집안사정 때문에 수업료를 못 내 출석정지를 당하곤 했었다. 종국에는 감사하게도 선생님들께서 몰래 내주셨는데 사춘기 소년으로서 엄청 창피한 일이었다. 대학입학 이후로는 부모님으로부터 단 한 푼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7남매의 중간인 내 밑으로도 학업 중이던 동생이 셋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입학한 것은 1973년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을 필두로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서 많은 기술인이 필요했으므로, 요즘처럼 취업용 스펙을 갖추기 위해 애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2학년을 마칠 때 쯤 무위도식하던 대학생활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그 돌파구로 군(軍)에 지원하였다. 그 때만 해도 북한공비가 출몰하던 고향에는 비상사태에 지역주민을 신속히 무장하여 대응하는 데 필요한 무기를 보관하는 소위 ‘분산무기고’가 세 군데나 설치되어 있었고, 필자는 3학년 여름 운 좋게도 이 무기고 경비병으로 차출되어 고향에서 편히 국방의무를 마칠 수 있었다.

고향에서의 군생활은 내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느 농촌처럼 필자의 고향에서도 길을 내거나 우물을 파는 마을공동의 일은 ‘울력’을 통해 수행하였고, 농사일은 ‘품앗이’를 통해 해결했으므로 모든 걸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이었다. 시골사람들이 도시인에 비해 의리를 중시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높은 것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골의 정서에 길들여진 탓이리라 믿는다. 그렇게 서로 도우며 오순도순 살던 고향사람들이 그해 닥친 30년만의 가뭄 속에 모내기 논물을 두고 심하게 싸우는 일을 목도하며, 극한상황에서 무너지는 인간의 나약함에 마음 아팠고, 가난에 허덕이는 부모님이나 고향사람들을 돕기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고 작심하게 되었다. 농촌의 희로애락을 담은 시작(詩作)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필자는 유학만 다녀오면 돈벼락을 맞는 줄 알았다. 그래서 복학 후 용맹정진한 끝에 4학년 재학 중 국비유학생에 선발되었고, 이 덕분에 미국의 마음에 드는 대학원을 골라 유학할 수 있었다. 순조롭게 학위를 마치고 박사후 연수중이던 1985년 한국원자력연구원에 ‘해외유치과학자’로 초빙되어 국책사업에 참여하였고 사업이 마무리 된 1988년 봄, 마침 고향 인근 대학에 좋은 기회를 얻어 30년 남짓 교육자로서 아이들과 재밌게 보냈다. 지금은 대학을 휴직하고 연구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던 대덕연구단지에 돌아와 연구자로서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

돌이켜보면 필자는 중학교를 빼곤 줄곧 국공립학교를 다녔고 대학원마저 국비로 유학한데다가, 봉직한 직장도 국공립대학과 연구소였으니 필자만큼 국가의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도 없을 듯하다.

50년 전 고향을 등지고 전주로 서울로 또 지구 반대편까지 고향에서 한껏 멀어졌다가, 35년 전 귀국하여 서울 살다가 대전 찍고 이제 전주에 살고 있으니, 부디 공직생활을 큰 탈 없이 마치고 낙향함으로써 순창촌놈의 한 살이가 순조롭게 마무리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신형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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