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수 전북과미래연구소장 · 후백제시민연대공동대표
 
   ‘역사문화권’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마한, 탐라 등 6개가 지정되며 후백제가 제외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후백제는 어떠한 나라인가. 48년간(889년 ~ 936년) 존속하며 완산(전주와 완주)을 도읍지로 산성을 쌓고 커다란 왕궁을 지어 고대사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지 않았는가. 전주는 조선왕조 발상지일 뿐만 아니라 900년부터 37년 동안 후백제의 왕도(王都)였기 때문에 천년고도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후백제의 한국역사에서의 위치는 어떠한가?
첫째로 신라후기 고대사에서 중세로의 전환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당시 호족이 득세하며 봉건적 지방분권이 촉진되어 중세사로 넘어가는 과도기 그 중심적 역할을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담당했다. 특히 후백제의 견훤왕은 둔전제(중국조조 실시, 전방조달 농지경작)를 실시하고 합덕지 방죽을 축조하는 등 농업생산을 증대하며 생활을 크게 개선하였다.
둘째, 외세(당)를 끌어들여 대륙을 잃고 불완전하게 통일된 한반도가 후백제를 통하여 당 역사문화권에서 벗어나고 외교의 다변화가 촉진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후백제는 오.월,거란,왜와 교류하고 한류의 뿌리가 된 완산(전주)권 고유 문화와 정신사를 승계하였다. 견훤은 마한과 백제 계승을 내세워 국호를 백제(百濟)라 하고 세상을 바르게 열어보자는 뜻으로 연호를 정개(正開)라 하였다. 전주는 고려를 멸한 조선 건국의 본향 도시의 토대를 다지게 된다.
셋째, 신라말 골품제의 폐해와 부패 향락과 권력 쟁탈로 왕이 살해되는 어수선한 정국으로 전제 왕권과 귀족의 통치정신인 교종(조화와 통합 중시)불교가 퇴화되었다. 대신 민중중심의 선종(불성 깨달음 중시)불교로 전환 계기가 되며, 견훤은 미륵불 신앙으로 정신사 변화를 주도하였다. 변혁의 중심에 후백제가 있었다.
넷째, 후백제는 미니통일로 왜곡된 사대사관에 희생된 ‘역사 바로세우기’의 대상인 백제의 후왕국이다. 작년 말 국립전주박물관에서 ‘견훤(甄萱), 새로운 시대를 열다’라는 기획전이 개최되고, 이어 금년 3월말에 상주박물관에서 ‘역사에서 신화가 된 견훤’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이 이어져 큰 관심을 끌었다. 영호남 교류라는 역사적 당위성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백제의 역사유적으로 도성, 궁성, 왕릉, 사찰유적과 불교문화유산, 청자·도자문화, 해양문화, 대외교류 등 고대국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유적,유물들이 전라남북도와 충청 전역에서 속속 발굴되었고 발굴 중에 있다.
지난 5월, 전주시민들이 모여서 후백제 역사정립과 역사인식 확산을 위해 <후백제시민연대> 라는 시민단체를 출범시키고 6월에는 ‘후백제와 견훤 ’이란 주제로 학술세미나 및 시민 대토론회를 성대히 개최하였다. 후백제시민연대는 7월에는 인봉리와 기자촌일대 왕궁추정 유적지를 답사한 바있다. 앞으로 동고사 남고사등 전주권뿐 아니라 부안, 김제 등 후백제-해양진출권 루트, 순천만 일대등 견훤 초기활약지역, 상주 가은일대의 견훤의 소년, 청년기 유적을 답사하며 그때마다 다양한 정보,정책등을 나누고 국민과 정부에게 알리고자 한다. 후백제시민연대>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한국사에 다이네믹한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새로운 민족문화·관광의 시대를 열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올해 정기국회 때 개정을 통하여 후백제가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포함되길 기대한다. /한봉수 전북과미래연구소장·후백제시민연대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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