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물 자신의 처지를 빗대 보기도 한다. 낙엽은 자손 번식을 위한 한 해의 흔적이고, 노인은 자손을 위한 마지막 일생의 모습이다. 오랜 세월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나무는 생존전략으로 낙엽을 선택했다. 노인은 자기 의도와 무관한 조물주와 세월이 만들어낸 합작이다.
나뭇잎은 떨어지기까지 순서가 정해져 있지만 노인의 죽는 순서는 없다고 한다. 낙엽은 성장호르몬 분비가 일찍 끝나는 곳부터 낙엽이 진다고 한다. 그래서 아래쪽 가지 안쪽에서 시작하여 위쪽 가지로 이어져 떨어진다. 그런데 노인은 성장호르몬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개인의 건강과 관계있는 종합적 함수관계에 달려있다. 이렇게 낙엽은 생의 끝을 표시하지만, 노인은 삶의 훈장을 표시한다. 낙엽과 노인은 극대 극의 가치관을 표상하기도 한다.
폴란드는 외세의 침입에 망명정부를 유지할 때 국가재정이 파탄되어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고 천박하고 음울한 정서를 표현한 시구도 있다. 인간 삶을 문자 없이 구비전승으로 계승 유지하며 살았던 아프리카는 “노인이 사라지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노인과 낙엽은 겉 이미지는 같아도 속 이미지는 천차만별이다.
갑자기 낙엽에 대한 동정심이 생긴다. 겨울 없는 상하의 계절 아프리카 등지에는 낙엽이 거의 없다. 나무가 움직일 수 있다면 낙엽을 생각지 않았을 텐데 마음만 있지 한 걸음도 뗄 수 없으니, 어미나무가 뿌려놓은 씨앗을 이듬해 봄 새싹이 움틀 때까지 자기는 춥지만, 나뭇잎을 모두 다 털어내어 이불로 덮어주고 밑거름으로 내려주었다.
낙엽은 한 걸음도 뗄 수 없는 추운 겨울에 어미나무도 살고 자손들도 함께 살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나무는 한자리에서 수 세기 동안 남의 힘 빌리지 않고 자급자족으로 자손을 번창시키면서 우리의 강토를 지켜왔다.
어쩌면 낙엽은 그동안 통한의 눈물 껍데기가 말라서 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보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불평 없이 살아온 나무에 비교한다면 기껏해야 좁쌀만큼 베풀며 살아온 인간들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노인 철학으로 낙엽과 저울질하고 있다.
낙엽은 자손을 위해서 마지막까지 헌신하면서 밑거름이 되어 생을 마감하고 있다.
노인 대부분도 낙엽처럼 한평생 자손을 위해 희생으로 삶을 마감하기도 하지만, 혹자는 자손과 사회를 숨겨가며 짐을 지워 놓기도 한다. 참으로 낙엽만도 못한 노인이다. 그러면서도 낙엽을 짓밟고 지나갈 수 있을까? 자기의 그림자는 본인은 잘 보이지 않고 주위 사람들 눈에는 뚜렷이 잘 보인다. 나도 허심탄회하게 낙엽처럼 살았는지 낙엽에게 물어보고 싶다.
겨울이면 싸락눈이 내려 오르던 길 멈추고 내려오면 산비탈 어느 집 솟대 위에 앉은 기러기 등에도 싸락눈이 소복하다. 낙엽이 얼어 살짝만 밟아도 바스락거린다. 낙엽이 데굴데굴 굴러가면서 그래도 한마디 한다. "노인님, 당신도 언제인가는 땅에 묻히고 그 위를 내가 덮어줄 테니까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오." 어느 피붙이보다도 임종을 지켜줄 친구인 것 같다. 나 닮은 것 같은 늙고 쓸모없는 것이라고 미워했던 낙엽으르 보며 반성을 한다.
낙엽은 나에게 살아 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 깨우쳐준다. 낙엽은 나에게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남은 시간들을 좀더 의식하며 살아야겠다.
구연식 수필가는 조선대학교 법정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교직의 길에 들어서서 41년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10년 군산여자고등학교에서 정년 한 뒤에는 대안학교인 익산 무궁화학교 교장으로 일했으며 수필집<그리움을 담아서>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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