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우리나라가 위기를 벗어나 새로운 희망, 새로운 실천을 시작하기를 바란다. 경제위기, 국론 분열 위기, 남북관계 위기, 외교 주권 위기, 안보 주권 위기, 지방소멸 위기, 인구 위기 등 모든 분야가 혼돈의 수준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나라 위기의 본질은 “나라줏대”(국가정체성)가 흔들리는 것이다. 나라줏대의 위기를 가져온 첫째 원인은 나라의 이념이 혼돈상태라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추구하는 이념은 대체로 민주주의라고 알고 있다. 헌법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고 하였다. 임시정부로부터의 법통은 자유민주주의의 질서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임시정부로부터의 법통에 대해 논란을 거듭하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개념논쟁으로 혼란스럽다. 헌법전문에서 애매하게 읽히는 첫 문장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이다. 이 문장도 나라의 줏대를 흐리게 하는 부분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라는 두리뭉실한 표현이 아니라 “단군의 건국”부터라고 똑똑히 쓰고, “홍익인간”의 이념을 내세우는 것이 옳다. 그리고 그 이념의 실천 범주로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 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둘째 원인은 “역사 줏대”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단기 4356년이다. 우리나라 역사가 단군의 건국으로부터 오늘의 대한민국까지 달려오는 역사의 줄기를 바르게 세워야 한다. 식민 지배에 저항했던 투쟁이 대한민국 역사의 출발이 아니라 단군 조선에 기원을 둔 역사의 맥(脈)을 살려야 한다. 역사의 맥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념 대립을 표방한 정치 패거리 다툼으로 나라가 멍들고 있다.
셋째 원인은 우리 말의 줏대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말이 아니라 영어나 외래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공공연하게 된 현실이다. 사물의 이름을 자기 나라말로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의 줏대가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화적 작업이다. 변화가 빠른 현대 사회인 만큼 새로운 사물과 사건,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이 매일매일 수없이 나타난다. 이들을 외국인이 이름 붙인 것을 그대로 받아 쓰는 것은 지적인 식민상태가 되는 길이다. 상점뿐만 아니라 관공서 명칭과 간판도 영어로 된 것이 많다. 젊은 가수들의 대중가요 가사도 영어 반 우리말 반이다. 영어나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지 않고 베껴 쓰는 것은 문화종속이다. 이것은 줏대를 갖춘 사상적 작업을 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한 마디로 사상과 역사와 언어의 위기다. 인문학 위기의 본질이 바로 이것이다. 사상과 역사와 언어를 통해서 자기를 성찰하는 태도가 인문학이다. 자기를 성찰하는 것은 ‘모든 것의 근본과 전체과정’을 알아내게 하는 일이다. ‘나’와 사회. 나라와 민족, 정치와 경제. 우주와 자연의 근본을 알아내려고 힘쓰면 새로운 사실, 새로운 방법과 길, 새로운 관계, 새로운 문제들을 찾아내게 된다. 여기에서 과학·기술도 발전하고, 정치·경제도 더 높은 단계로 뛰어오를 수 있다.
현실적으로 나라줏대를 세우고 실현하는 일차적인 방법은 ‘민족’에 대해 거듭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민족문제를 말하면 쇄국적인 국수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분위기도 문제다. 또 민족의식을 말하면 과거 지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군사독재 시절에 ‘민족중흥’이라는 이념을 정권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하였던 상처 때문에 민족의 이념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또 북한이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호를 말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줏대가 살아나는 뿌리가 민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계묘년 새해부터 단기 연호를 함께 쓰는 운동을 해 보자.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모든 정책에 대하여 홍익인간이라는 이념에 맞는 것인가를 토론하는 절차를 만들어 보자. 그리고 우리말 쓰기 운동을 해 보자. 우리말 상호를 짓고 아름다운 한글 간판 달기 운동을 해 보자. 한글을 새긴 윗옷 입기 운동도 해 보자. 이 작은 민족운동이 정치·경제·외교·안보의 한풍(韓風)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김도종 전 원광대 총장
△원광대학교 제12대 김도종 총장은 인문학·인문정신문화진흥심의위원회 위원장, 대한철학회 회장, 전북창조경제혁신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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