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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평생 사람다운 세상을 그리워했던 시인

정양 선생님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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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시인, 전북작가회의/ 사진=전북일보 DB

 

한국 시단의 거대한 산이자 그늘이신 정양 선생님이 2025년 5월 31일 영면에 드셨다. 유신독재 시절에는 「끝」이라는 시를 쓴 뒤 절필했고, 참담했던 5공 시절에는 동료 문인들과 무크지 '민족문학'을 기획했으며, 전북작가회의 중심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시인. 이제 우리는 사람다운 세상을 한평생 그리워한 시인을 배웅해야 한다. 

  정양 선생님의 시(詩)가 한국 현대시의 정점이라는 데 이견은 없을 듯하다. 시에 접목된 사회 현상이며 자연, 소소한 일상까지 아우르는 언어의 결은 곡진하고 쓰라리고 정답다. 개인의 슬픔과 한계, 그리움에서 시가 촉발되었을지라도 선생님의 시편들에는 시대의 불순한 징후를 비껴감이 없고, 광복 후 80년 가깝도록 독립기념일이 없는 참담한 역사- 무덤조차 없이 떠도는 혼백들을 접하는 시의 촉수는 역사적 통찰력으로 웅숭깊게 발현된다. 

 정양 선생님의 시 속에는 “오래도록 자신을 감싸왔던 눈물의 기억들을 오늘에 비추어 보려는 온고(溫故)의 시선이 있고, 가파른 현실과 맞서 그것을 증언하려는 선 굵은 감계(鑑戒)의 목소리”가 있다는, 제8회 구상문학상 심사평(2016년)은 탁견이다. 이 심사평은 수상 시집 『헛디디며 헛짚으며』(2016, 모악)에만 닿는 게 아니라 선생의 첫시집 『까마귀떼』(1980, 은애)부터 최근의 시집 『암시랑토앙케』(2023, 몰개)에 이르기까지 총 아홉 권의 시집에 발현된 시정신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집들 속에는 “사실과 행위의 인간적 형상화를 토대로 시는 진정성을 획득하며 시의 상상력 또한 여기에 근거한다는 점, 사회현실을 비껴가는 문학주의가 시의 자리를 좁힐지도 모른다는 점, 부조리한 현실 논리에 갇혀 살지 않으려면 속된 것을 일절 끊어버리는 삶의 태도가 더 단단해야 한다는 점” 등도 시의 밑그림으로 자리 잡았다. 

  정양 선생님의 대표시로 평가받는 「내 살던 뒤안에」에 형상화된 언어 수사는 눈부시다. 집 뒤안에 “감꽃들이/ 새소리처럼 깔려 있”고 구렁이에 놀란 아이들의 손가락질 사이로 “새소리가 감꽃처럼 털리”는, 구렁이 몸에서 “햇빛이 치잉칭 풀리”는 경이로운 활력은 언어미학이란 말 한참 위에서 빛을 뿜는다. 6‧25전쟁 초에 행방불명된 아버지가 돌아온다고 점쟁이가 예언한 그날 집에 들어온 구렁이, 시에 접목된 비일상적인 삶의 정서적 충격과 경이감을 뚫고 한 편의 시가 역사처럼 생명력을 얻는다. 

  서사성을 가진 시편들에는 토박이말의 촉수가 씨앗처럼 반짝인다. 소외라는 언어가 생기기 전부터 소외되었던 전북의 입말을 아끼고, 그 입말에 간직된 소리 맵시를 아끼듯 말씨와 거기에 얽힌 삶의 행위를 토박이말로 승화한 것이다. 전북의 토박이 말씨에 엉긴 음색이며 거기에 활달하게 반응하는 행위는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시편에 재현된 주인공들은 동학혁명과 일제와 해방공간과 동족상잔의 떼죽음과 보릿고개와 이승만 독재, 5・16쿠데타 이후 장기간의 군부독재와 광주항쟁까지를 통과한 증언자들이다. 불행한 역사 속에서도 끝끝내 살아낸 주인공들의 언행은 야물고 알차다. 삶의 내력에 똬리 튼 억장 막히는 사연을 생략해 버렸다는 듯 걸림새 없이 줄줄 쏟아지는 입말에는 가난하고 못 배워서 기죽었을 틈도 엿보이지 않는다. 말하는 도중에 입똥내가 튀기도 했을 능청맞고 천연덕스러운 말씨 속에는 모두 아름답게 살기를, 모두 존중받기를 원하는 시인의 오랜 그리움이 배어 있다. 

  이제 기쁨도 슬픔도 미움도 없는 곳에서 선생님께서 편안하시기를 소망한다, 사랑도 이별도 분단도 빨갱이도 소외도 절망도 없는 그 아름다운 곳에서 “지옥이 있다면 천민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작금의 인간 세상이 지옥”이라시던 말씀도 내려놓고 부디 자유로우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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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시인 별세 #모두 아름답게 살기를 원한다 #이병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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