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창조하라”라고 말하며 사회적 관습이나 타인의 기대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며 나아가는 능동적인 삶의 태도를 강조했다. 이랑고랑 은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개인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고 능동적인 주체의 성장을 독려해 왔다. 본 칼럼에 소개되는 김제시 광활면 용평마을에서 진행된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는 ‘어르신들의 예술 경험이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를 깊이 생각해보게 한다.
얼마 전, 1932년생 곽귀선 어르신이 예술가들과의 절연을 선언하셨다. 미술 수업 중, “내가 죽으면 내 그림 보고 그려. 사람은 죽으면 영원히 가는데, 그림은 여기 있구나.” 라는 명언을 남기신 지 일주일 만이었다. 어르신 댁으로 모시러 갔을 때, 어르신은 침대에 뒤돌아 누워 수업에 참여할 의지가 없어 보이셨다. 그림 도구를 챙겨 집에서 혼자 그려보려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아 밤을 꼬박 새우셨다고 한다. 그림은 마음 저편에서 그려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려 놓은 두 장의 그림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 무엇을 그릴까 생각하는 일이 고통스러워 이제는 예술가 선생님들조차 보고 싶지 않으시다고 했다.
흰 도화지의 공포, 예술가가 느끼는 창작의 고통까지 경험하는 어르신을 보며, 필자는 미술 경험이 노인의 주체성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근본적인 물음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르신들이 그림 앞에서 느끼는 혼란과 절망감에 대해 우리는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술 수업을 계기로 흰 도화지를 만났을 때,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나는 시대를 잘못 태어나 그림에 재능 있는 줄 몰랐다.”라는 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는 못 그린다.”, “따라 그릴 밑그림이 없냐.”라고 말하신다. 예쁘게 그리는 결과를 상상하며 예술가의 스타일을 배워 그림 그리기를 빨리 익히고 싶은 참여자의 욕구(needs)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함께 교육하는 예술가에게 어르신들의 그림에 최소한의 개입만 할 것을 당부한다. 잘 그린 그림은 형태를 정확히 그리는 그림보다 작은 것 하나를 그려 넣더라도 표현된 내가 있는 그림이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어떻게 그려야 할지, 어떤 색을 쓸지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는 불확실한 상황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기 서사가 담긴 독자적인 양식이 구축된다.
때문에 수업에 꼬박 참여하는 1938년생 박점순 어르신도 손이 떨려서 그림 선이 삐툴빼뚤하다며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시지만 점순 어르신의 그림에는 어르신의 일상이 담겨 있다. 십자가의 좌우 대칭이 안 맞다며 자를 찾으실 때에는 “어르신, 자대고 그린 그림은 멋이 없어요. 지금 이 그림은 어르신 밖에 못 그려요.”라며 만류한다. 선생님을 잘못 만나 아흔이 넘어 손이 떨리는 한계를 이겨내고 그림을 그리는 어르신들은 ‘보는 것’에서 인식하는 단계로 넘어가 일상을 다시 보는 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그림에 담아내고 있다.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세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첫째, 어떤 것을 창조하거나 기여하는 것, 둘째는 경험적 가치를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사랑을 경험하는 것, 셋째, 피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기이다. 오늘도 자신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고요한 밤을 견디는 어르신의 손끝에서 한 사람의 서사가 피어오르기를 기다린다.
황유진 이랑고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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