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독서 모임에서 내 시편을 해설해 달라는 강의 요청이 왔다. 고마웠다. 세간에 알려진 유명한 시가 아니라 야인의 숨소리 같다는 내 시를 해설해 달라니. 작품을 몇 편 추리는데 문득 누렁이와 빼빼가 떠올랐다.
누렁이가 새끼를 열두 마리나 낳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틀 뒤 빼빼가 새끼 아홉 마리를 또 낳았다. 신통방통한 일이었다. 똥개가 새끼를 이렇게나 많이 낳다니.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 실제로 생기자 우리 가족은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스물넷이던 그해 봄, 개가 잘 되면 집안이 일어선다고 치성드리던 어머니 치맛자락에 치렁치렁 새벽빛이 매달려 있었다.
누렁이와 빼빼는 새끼를 혀로 핥아서 키웠다. 눈도 못 뜨고 낑낑대는 어린 목숨들의 요모조모를 짬짬이 혀로 핥았고 새끼가 구물구물해도 배곯은 놈에게 먼저 젖을 물렸다. 마릿수는 줄었지만 누렁이와 빼빼는 그 뒤로도 새끼 여러 배를 낳았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마당 화덕에 걸린 큰솥에 미역을 넣고 녀석들 밥을 펄펄 끓였다. 배란기가 오면 대문에 동네 수컷들이 모여들어 주둥이를 킁킁댔다. 어머니는 망설임 없이 덩치 큰 수컷만을 마당에 끌어들였는데 녀석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씨알 굵은 새끼들을 잘도 낳았다. 밤하늘을 빠개 먹듯 번갯불이 내리꽂히며 장대비가 좍좍 쏟아지던 밤, 녀석들 집을 살핀 적이 있는데 내가 다가서니 되레 내 손등을 살갑게 핥았다. 새끼를 낳았을 때마다 제 쌀강아지들을 장에다 몽땅 팔아버린 내가 밉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누렁이와 빼빼의 정은 한결같았다. 낯선 이가 대문께 얼쩡거리면 컹컹 짖어 빈집이 아님을 알렸고, 한 번도 내게서 등을 돌리지 않았다.
시 몇 편을 추리는데 까맣게 잊어먹은 누렁이와 빼빼가 왜 떠올랐는지…. 야인의 숨소리 같다는 내 시를 읽은 사람은 드물다. 시집을 네 권씩이나 냈어도 내 시를 평(評)한 사람은 더 드물다. 남들 시보다 빼어나지 못한 데다 언어의 쓰임새도 문명적 색감을 물고 광휘를 내뿜는 날렵한 섬광과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농경문화 속에 버무려진 삶의 모양새 일부를 전북의 토박이말과 막말이 섞인 입똥내 튀는 말씨로 끌어낸 게 내 시의 주된 밑그림이므로. 하지만 소통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언어에 선행하는 사람다움의 행위를 돋을볕처럼 붓끝에 벼리고자 골을 뺐을지언정 현대성을 앞세워 시행 앞뒤의 맥락을 고의로 훼손하지 않았으니. 그러자 누렁이와 빼빼가 또 떠오른다. 뭔가가 못마땅한 눈치다.
까불지 말라는 것 같다. 남들 일할 때 나도 일하고 남들 쉴 때 나도 쉬는 세상- 이 꿈에 등을 보이지 않았다면, 젊은 시인들 시가 왜 앞뒤 내용을 고의로 왜곡하고 몽환적 관념에 빠진 것도 모자라 돌연 유령까지 출현시키는지 고민해봤냐는 항의로 읽힌다. 이쯤 되면 누렁이와 빼빼는 똥개가 아니라 내 시의 또 다른 현실이자 도반(道伴)이 아닐까. 그렇다면 녀석들은 문득 떠오른 게 아니라 나를 일부러 찾아온 게 틀림없다. 내 주변을 오래 맴돌았음이 분명하다. 아아, 까맣게 잊어먹은 옛정이 시의 정혈에 눈도 못 뜨고 낑낑대는 내 목숨의 요모조모를 혀로 핥아대다니. 난해하다고 자폐적이라고 비판받을망정 서정시의 오랜 질서를 거절하는 젊은 순정을 시의 문법으로 모시라고 나를 말똥말똥 바라보는 누렁이와 빼빼라니! 독서 모임에 가져갈 시편을 추리다 말고 나는 코가 시리다. 순정 한 잔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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