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금요칼럼] 고래가 싸우는 세계, 한국의 길

안톤 숄츠 독일 저널리스트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 승리하고 영국 국민이 브렉시트를 선택했을 때였다. 그 순간 나는 세계가 어딘가 불안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변화가 새로운 세계 질서로 굳어지고 있는 시점에 서 있는 듯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하나의 이상을 세웠다.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힘과 군사력이 곧바로 침략의 정당성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만들자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2026년의 세계는 그 약속이 힘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의 선출된 지도자를 납치했고 이스라엘은 이란 지도자를 암살했다. 러시아는 여전히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략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행동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던 국제 규범과 질서는 더 이상 강력한 억제력이 되지 못하는 듯하다. 심지어 서방 국가들조차 그 규범에 묶어 두지 않을 뿐더러 많은 나라는 그저 무력하게 이를 지켜보기만 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무슨 일이 가능할까. 그린란드의 합병일까 캐나다나 쿠바에 대한 공격일까 혹은 김정은을 납치하는 일일까. 지금의 국제 환경에서는 그 어떤 일도 완전히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갈등은 한국과 멀리 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만약 강대국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국가 지도자를 제거해도 된다고 느끼기 시작한다면 그 파장은 곧바로 동아시아로 이어질 수도 있다. 대만 문제 역시 그 가능성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한국 속담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있다. 세계가 다시 군비 경쟁의 시대로 접어들고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갈등을 한국과 무관한 먼 나라 이야기로 넘겨버릴 수는 없다. 오늘날의 세계는 서로 깊이 연결된 글로벌 사회다. 전쟁과 갈등은 순식간에 확대돼 결국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대에 한국의 외교는 매우 섬세한 균형을 요구받는다. 미국과 중국 모두 한국에게는 중요한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일본과 유럽연합이 최근 서로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략적으로 접근한다면 이러한 관계 변화는 한국 외교에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줄 가능성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이 동맹과 파트너십의 구조를 다시 한번 차분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미국은 더 이상 우리가 과거에 믿어왔던 것처럼 선의의 ‘큰형’ 혹은 보호자 역할을 한다고 보기 어려워졌다.

지난 1년 동안 트럼프가 보여준 강압적이고 협박에 가까운 외교 방식은 많은 나라에 동맹이 항상 조화로운 관계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줬다. 실제로 캐나다와 유럽연합은 인도와 남미의 메르코수르 국가들과 새로운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국제법은 점점 더 가볍게 취급되고 있다.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라는 이상은 이제 과거의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최근 한국 사회가 보여준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언과 그 이후 이어진 정치적·사회적 위기 속에서도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지켜냈다.

한국은 아직 비교적 젊은 민주주의 국가다. 그러나 시민들은 법치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많은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들보다 더 큰 용기와 책임감을 보여줬다.

최근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이란과의 불공정한 싸움에서 이미 땅에 쓰러진 상대를 계속 때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으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과연 이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고 싶은 가치인가.

만약 그 답이 “아니오”라면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미국이 여전히 세계의 지도 국가로서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거대한 힘의 논리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가치와 원칙을 지키는 길일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처럼 때로는 작은 존재도 거대한 힘에 맞서 승리할 수 있다. 어쩌면 작은 새우가 고래에게 옳은 것을 위해 일어서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거대한 목소리를 내는 포퓰리스트와 독재자를 흉내 내는 지도자들 뒤에 그저 조용히 줄 서 있기보다 말이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100
최신뉴스

진안[진안군 시급 현안] 전 연령층 ‘진안형 기본소득 시범사업 본격화’ 최우선 꼽아

장수[장수군 시급 현안] “인구감소 대응·정주여건 개선 가장 시급”

순창[순창군 시급 현안] 인구소멸 대응과 정주여건 개선

임실[임실군 시급 현안] 주민소득 증대 등 민생경제 회복 최우선

무주[무주군 시급 현안] 민생경제 회복과 지방소멸지역 탈출 1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