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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고래가 싸우는 세계, 한국의 길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 승리하고 영국 국민이 브렉시트를 선택했을 때였다. 그 순간 나는 세계가 어딘가 불안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변화가 새로운 세계 질서로 굳어지고 있는 시점에 서 있는 듯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하나의 이상을 세웠다.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힘과 군사력이 곧바로 침략의 정당성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만들자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2026년의 세계는 그 약속이 힘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의 선출된 지도자를 납치했고 이스라엘은 이란 지도자를 암살했다. 러시아는 여전히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략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행동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던 국제 규범과 질서는 더 이상 강력한 억제력이 되지 못하는 듯하다. 심지어 서방 국가들조차 그 규범에 묶어 두지 않을 뿐더러 많은 나라는 그저 무력하게 이를 지켜보기만 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무슨 일이 가능할까. 그린란드의 합병일까 캐나다나 쿠바에 대한 공격일까 혹은 김정은을 납치하는 일일까. 지금의 국제 환경에서는 그 어떤 일도 완전히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갈등은 한국과 멀리 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만약 강대국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국가 지도자를 제거해도 된다고 느끼기 시작한다면 그 파장은 곧바로 동아시아로 이어질 수도 있다. 대만 문제 역시 그 가능성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한국 속담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있다. 세계가 다시 군비 경쟁의 시대로 접어들고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갈등을 한국과 무관한 먼 나라 이야기로 넘겨버릴 수는 없다. 오늘날의 세계는 서로 깊이 연결된 글로벌 사회다. 전쟁과 갈등은 순식간에 확대돼 결국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대에 한국의 외교는 매우 섬세한 균형을 요구받는다. 미국과 중국 모두 한국에게는 중요한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일본과 유럽연합이 최근 서로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략적으로 접근한다면 이러한 관계 변화는 한국 외교에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줄 가능성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이 동맹과 파트너십의 구조를 다시 한번 차분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미국은 더 이상 우리가 과거에 믿어왔던 것처럼 선의의 ‘큰형’ 혹은 보호자 역할을 한다고 보기 어려워졌다. 지난 1년 동안 트럼프가 보여준 강압적이고 협박에 가까운 외교 방식은 많은 나라에 동맹이 항상 조화로운 관계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줬다. 실제로 캐나다와 유럽연합은 인도와 남미의 메르코수르 국가들과 새로운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국제법은 점점 더 가볍게 취급되고 있다.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라는 이상은 이제 과거의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최근 한국 사회가 보여준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언과 그 이후 이어진 정치적·사회적 위기 속에서도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지켜냈다. 한국은 아직 비교적 젊은 민주주의 국가다. 그러나 시민들은 법치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많은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들보다 더 큰 용기와 책임감을 보여줬다. 최근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이란과의 불공정한 싸움에서 이미 땅에 쓰러진 상대를 계속 때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으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과연 이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고 싶은 가치인가. 만약 그 답이 “아니오”라면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미국이 여전히 세계의 지도 국가로서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거대한 힘의 논리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가치와 원칙을 지키는 길일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처럼 때로는 작은 존재도 거대한 힘에 맞서 승리할 수 있다. 어쩌면 작은 새우가 고래에게 옳은 것을 위해 일어서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거대한 목소리를 내는 포퓰리스트와 독재자를 흉내 내는 지도자들 뒤에 그저 조용히 줄 서 있기보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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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3.19 16:46

[금요칼럼] 아직도 아파트인가

만약 지금 당신의 수중에 10억 원의 투자금이 있다면 어디에 투자할 생각인가? 이른바 서울 요지의 똘똘한 아파트 한 채인가, 아니면 경제적 해자를 갖춘 글로벌 기업의 지분인가? 곰곰이 생각한다면 이 질문은 단순히 투자처 선택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우리 사회가 그리고 구성원들이 지향하는 바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부동산은 소유의 경제학이고, 주식은 참여의 경제다.” 부동산 투자는 입지를 선점하고 가격 상승을 기다리는 게임이며, 감나무 밑에 자리를 깔고 누워 땡감이 달콤한 홍시로 변해 떨어지기만 바라는 게임이다. 반면 주식은 참여의 적극적인 경제적 행위다. 미래를 주도할 메가 트렌드를 탐색하고, 파괴적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을 찾고 분석하며 그들의 성과에 동참하려는 적극적인 게임이다. 우리는 불패의 신화라고 믿고 싶겠지만 과거 장기간에 걸친 부동산 자산의 가치 상승은 순전히 인구통계학적 수요에 기댄 결과일 뿐이다. 과거와 다른 아니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달라져야 할, 유망 자산의 향방은 강력한 정부의 의지와 정책 드라이브를 만나 짧은 동요 끝에 자침의 방위는 명백히 부동산이 아닌 다른 곳을 가리킨 채 멈췄다.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부동산 공화국’이었다. 낮은 보유세, 장기보유특별공제, 갭 투자 같은 높은 레버리지 활용은 아파트를 가장 효율적인 부의 축적 수단으로 유지해왔다. 집값 상승은 근로 소득의 상승률을 압도했고, 자산 격차는 콘크리트 위에서 점점 더 극적으로 벌어졌다. 가계 자산의 70% 이상이 부동산에 묶여 있는 구조는 한국 경제성장률이 어디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바람의 방향이 달라지고 있다.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재개 논의, 초고가 주택 부담 강화, 장기보유특별공제 손질은 부동산을 ‘들고 있으면 가치가 상승하는 수익형 자산’에서 ‘보유할수록 비용이 발생하는 손실형 자산’이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경고음은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다. 과거의 공식이 미래에도 통한다는 보장은 없다. 고령화 시대를 목전에 둔 지금 예상되는 폐해는 더 심각하다. 현금유입은 없는데 보유세라는 현금지출은 지속된다. 자칫 가계의 국민연금을 매년 보유세로 탕진할 수도 있다. 반면 자본시장은 구조적인 변화를 맞고 있다. 보유세 제로, 제한적 자본이득 과세, 상법 개정을 통한 소액주주 권리 강화는 기업의 이익을 보다 투명하게, 보다 많이 주주에게 환원하도록 압박한다. 자사주 소각 확대, 소액주주 권리 강화, 이사회 책임 제고 등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오래된 오명의 꼬리표를 떼어낼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다. 신뢰가 쌓이면 자본은 움직인다. 이미 일본 금융시장이 이를 증명했다. 2012년 초 8,400~8,500선에 머물던 니케이225 지수는 기업지배구조 개혁과 주주환원 정책을 거치며 2026년 2월 27일 58,850포인트로 마감했다. 14년 만에 약 7배 상승이다.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및 소각, ROE 중심 기업 경영이 기업의 체질을 바꾸자 시장은 냉정하게 재평가로 화답했다. 정책은 방향을 제시했고, 자본은 그 방향으로 이동했다. 세제와 상법은 국가의 경제 철학이다. 한국 역시 토지 보유에 따른 자본이득보다 기업의 성장과 혁신에 참여하는 자본을 우대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 물론 안락한 주거는 모든 이의 삶의 기반이므로 실거주는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투자의 대상이라면 질문과 답은 달라져야 한다. 정책과 제도의 흐름이 어디를 향하는지 읽어야 한다. 자본은 감정이 아니라 세후 수익률과 성장 가능성을 따라 움직인다. 보유 부담이 높아지는 자산과,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주주환원을 강화하는 자산 사이에서 선택의 기준은 점점 명확해진다. 다시 묻는다. 아직도 아파트인가. 아니면 경제적 해자를 갖춘 기업의 성장에 동참할 것인가. 부의 지도는 이미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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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3.12 19:52

[금요칼럼] 국가 균형발전은 교육으로부터

국가 균형발전은 단순한 지역 지원 정책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성장 구조를 다시 설계하는 국가 전략이다. 수도권 집중의 효율을 넘어 각 지역의 산업·환경·지리적 특성을 연결해 국가 전체의 회복력을 높여야 하는 시대다. 이러한 전환의 중심에는 언제나 ‘교육’이 놓여 있다. 근대사를 돌아보면 교육은 국가 흥망을 좌우해 왔다. 독일은 체계적 직업교육을 통해 산업 경쟁력을 강화했고, 일본은 근대적 공교육 제도를 정비하며 국가 체질을 바꾸었다. 우리 역시 해방 이후 문해 교육과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통해 산업화를 이뤄냈다. 공자가 말한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기쁨”은 개인의 수양을 넘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플라톤이 지적했듯, 국가의 방향은 교육의 방향과 맞닿아 있다. 오늘날 정부가 추진하는 디지털 전환, 인공지능 인재 양성, 첨단산업 육성, 지역혁신 중심 대학체계 강화 정책 역시 이러한 맥락에 있다. 그러나 산업단지와 연구 인프라 확충만으로는 균형발전이 완성되지 않는다. 모든 지역 전략 사업에는 교육·훈련 프로그램이 구조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시설을 세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설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발전시킬 사람을 길러내는 일이다. AI와 자동화 기술은 제조·조선·건설·물류 산업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단순 기능 중심 교육은 한계에 직면했다. 데이터 이해력, 현장 문제 해결 능력, 안전 관리 역량을 갖춘 실무형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 독일의 이원화 직업교육처럼 기업과 교육기관이 함께 과정 설계에 참여하고, 현장 실습을 병행하는 체계는 참고할 만하다. 성인 재교육과 전환 교육을 제도화해 산업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오랜 기간 현장에서 경험을 축적한 인적 자산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직업 군인은 인력 운용상 비교적 이른 나이에 전역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위기관리와 조직 운영 경험을 갖춘 인력으로 평가된다. 이는 특정 조직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인적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순환·재배치할 것인가의 과제다. 지역 안전, 재난 대응, 산업 안전 교육 등 분야에서 일정 역할을 모색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각 분야의 경험을 재교육과 연계해 지역사회에 환류시키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한편 균형발전 정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는 윤리와 신뢰를 쌓는 체계가 병행돼야 한다. 국가사업이 특정 집단이나 지역 카르텔의 이해관계에 좌우된다는 인식이 형성되면 정책의 정당성은 크게 약화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업 기획·선정·평가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이해충돌 방지와 공공윤리 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 지역 대학과 연계한 공공 리더십·윤리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예산 집행자와 참여 기관이 정기적으로 교육을 받는 구조도 필요하다. 핀란드가 공교육을 통해 시민 신뢰 문화를 축적해 온 사례는 시사점이 크다. 제도적 장치와 함께 시민의 정책 이해도를 높이는 교육이 병행될 때 사회적 신뢰는 강화된다. 균형발전은 단순한 예산 배분이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 설계라는 인식이 확산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시민 대상 예산 이해 교육과 정책 참여 프로그램 확대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는 반복하는 것을 통해 우리가 된다”고 했다. 균형발전 역시 반복 학습과 점검을 통해 완성된다. 자격증 취득에서 끝나는 형식적 교육이 아니라, 실습과 단계별 숙련 인증, 윤리 교육을 포함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결국 균형발전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다. 산업 정책, 안전 정책, 행정 정책 속에 교육과 신뢰 구축 시스템을 내재화할 때 대한민국은 지속 가능한 성장축을 확보할 수 있다. 교육이 곧 균형발전의 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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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3.05 18:44

[금요칼럼]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보훈용어 이대로 괜찮을까?

이제 곧 삼일절이다. 이날이 되면 거리 곳곳에 태극기가 내걸리고, 아마도 어느 기념식장에선가는 추모(追慕)의 대상으로 순국선열(殉國先烈)과 함께 호국영령(護國英靈)이 불릴 것이다. 그런데 삼일절에 호국영령을 추모해도 되는 걸까?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알고 쓴 것은 맞을까? 사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은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익은 말이지만, 말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공무원도 예외는 아니다. 참고로 서울지방보훈청이 2019년에 펴낸 ‘알기 쉬운 보훈행정용어집’을 보면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순국한 사람”을 뜻하고, 호국영령은 “전쟁터에서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키다 희생된 분들의 영혼”을 뜻하는 말이다. 즉, 순국선열은 삼일절의 추모 대상이고, 호국영령은 육이오기념일의 추모 대상인 셈이다. 이처럼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은 역사적 맥락에 따라 말뜻과 지시 대상이 다르다. 사전적인 의미를 살펴봐도 삼일절은 “국권 회복을 위해 민족자존의 기치를 드높였던 선열들의 위업을 기리고 1919년의 3·1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민족의 단결과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제정한 국경일”로 되어 있다. 즉, 삼일절은 순국선열을 기리는 날인 것이다. 따라서 삼일절 기념식장에서 호국영령을 언급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말뜻을 몰라서 언급하게 된다면 부끄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뉴스 빅데이터 분석시스템인 ‘빅카인즈(BIGKinds)’에서 1990년 1월 1일부터 2025년 12월 31일까지 ‘삼일절’과 ‘육이오전쟁일’, ‘현충일’이 포함된 기사의 연관어를 검색하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의미에 맞지 않게 사용되는 사례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일절 관련 기사에 호국영령이 등장하는가 하면, 육이오전쟁기념일 관련 기사에 순국선열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의 원인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말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어를 교양인의 언어로 착각하는 비정상적인 언어관에서 비롯된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고, 상대가 내 말의 뜻을 오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자기중심적인 언어습관에서 비롯된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말을 쓰면 품위 있어 보인다는 잘못된 생각이 오히려 소통을 가로막는 셈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순국선열’을 ‘독립유공자’로, ‘호국영령’을 ‘전쟁유공자’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어떨까? 자신의 지식을 과시할 목적이 아니라면, 말뜻을 이해하기 쉬운 말을 놔두고 굳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독립유공자’라는 말은 누구나 그 뜻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고, ‘전쟁유공자’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어려운 한자어에 기대지 않고도 충분히 깊은 추모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이와 더불어 지난 2017년 국민의례 규정을 개정하여 행사 성격상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외에 묵념의 대상을 임의로 추가할 수 없도록 했는데, 이 규정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희생된 민주화 유공자, 그리고 화재 현장이나 재난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소방관·경찰관 등 공무 중에 순직한 공무원도 공식적인 묵념의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 그들 모두 우리가 마땅히 기억하고 추모해야 할 국가유공자이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한 희생이 전쟁터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 추모의 언어도 특정한 방식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 추모의 범위를 넓히는 것은 과거를 더 넓게 이해하는 일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가 어떤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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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2.26 19:42

[금요칼럼] ‘외국인 밀집 지역’ 토론에 없었던 것

새해 들어 한국 방송에서 <더 로직>이라는 예능 형식의 토론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논리학자로서 반가운 마음에 시청하다가 “외국인 밀집 거주 지역은 치안 특별 지역으로 지정해야 한다.”라는 논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인권 차원에서 ‘까임 방지권’이 있는 외국인을 ‘감히’ 논제로 삼았기 때문은 아니다. 특정 주제를 토론으로 삼지 말자는 것은 민주적인 토론의 정신에 어긋난다. 그보다 이 논제는 외국인 밀집 거주 지역은 치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시작하는데, 막상 그 전제는 문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이 프로는 위 논제를 제시하면서 “외국인 밀집 거주 지역 중 일부 지역에서는 언어, 문화 차이, 환경 변화 등으로 인하여 치안에 대한 불안감이 제기되기도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외국인 밀집 거주 지역에 대한 불안감이 정말로 있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근거가 있는가? 복합 질문의 오류라는 게 있다. 논리학 교과서에는 “너는 아직도 마누라를 때리니?”가 대표적 예로 실린다. 이 질문에 “응.”이라 대답하면 예전에도 지금도 마누라를 때린다는 것을 인정한다. “아니.”라고 대답해도 예전에는 때렸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이 질문은 “너는 예전에 마누라를 때렸니?”라는 질문과 “너는 지금도 마누라를 때리니?”라는 두 질문이 복합되어 있는데,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질문한 오류이다. “외국인 밀집 거주 지역은 치안 특별 지역으로 지정해야 한다.”라는 논제도 마찬가지다. 외국인 밀집 거주 지역은 치안 불안감이 있다는 논제와 그래서 치안 특별지역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논제가 복합되어 있는데 그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 논제를 가지고 토론하면 찬성을 해도 반대를 해도 외국인 밀집 지역의 치안 불안감을 인정하게 된다. 찬성을 하면 당연히 그렇고, 반대를 해도 치안 특별 지역에만 반대한 것이지 외국인의 치안 불안감은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물어야 할 핵심 질문인 “외국인 밀집 거주 지역이 실제로 다른 지역보다 치안이 불안한가?”는 건너뛰어 버린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의 범죄율은 내국인의 범죄율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방송에서 이런 통계를 반대쪽 토론자들이 지적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위 논제가 프레임이 되는 순간 통계는 무의미해진다. ‘외국인=치안 위협’이라는 연결 자체가 기정사실화되고, 토론 자체가 그 편견을 반복 재생산하는 장치가 되어 버린다. 외국인 밀집 지역을 ‘문제 지역’으로 낙인찍는 이 방식은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존재해 온 지역감정이 특정 지역을 프레임에 가두는 지역 혐오와 정확히 같은 구조다. 치안 불안감은 정말로 치안이 나쁘지 않더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공영 방송이라면 그 불안감이 실체가 있는 것인지, 혐오에 의해 생긴 것인지 분석해야 한다. 정당한 토론이라면 실체가 있음을 증명할 책임은 그것을 주장하는 쪽에 있다. 더 나아가 설령 범죄율이 정말 높더라도, 그것이 외국인 때문인지, 원래부터 범죄율이 높은 동네였기 때문인지, 사회·경제적 요인은 무엇인지 과학적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유도 심문처럼 교묘하게 숨기고 논제로 삼는 것은 토론으로서도 방송으로서도 공정하지 않다. 예능 프로일 뿐인데,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덤벼든다고 말할지 모른다. 오히려 예능 형식의 방송이라는 게 더 문제다. 이런 구조적 편견이 ‘재미있는 토론’으로 포장되어 대중에게 소비되면 그 효과가 무시 못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능은 논리보다 재미와 갈등을 우선시하고, 시청자들은 비판적 거리를 두지 않고 소비하기 쉽다. 무겁지 않은 포맷 속에서 편견은 더 자연스럽게, 더 광범위하게 확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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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2.19 19:04

[금요칼럼] 우리는 이제 누구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

2026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국은 이미 롤러코스터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코스피와 코스닥은 급등락을 반복하고 있고, 윤석열 전 대통령과 그의 배우자에 대한 재판은 첫 결과들을 내놓기 시작했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다시 새로운 관세 부과를 시사하고 있다. 세계 정치와 변화의 거센 흐름 속에서 작은 한반도 국가는 그 파도에 떠밀리고 있는듯하다. 결코 쉽지 않은 시기다. 그러나 이러한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바로 사상 최저 출산율로 인한 노동력 공백과 급속한 고령화가 초래할 재정 부담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와 관련해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자주 거론되는 방안 중 하나가 더 많은 외국인을 한국 사회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지난 2년간 법무부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이민정책과 다문화 관련 사안에 대한 자문을 맡아왔다. 그 과정에서 보다 조화로운 다문화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 그리고 한국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한국에 오는 이민자들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에 대해 다양한 전문가들과 논의를 이어왔다. 한국은 오랜 세월 외부로부터 이민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한 나라가 아니었다. 전쟁과 박해, 더 나은 삶을 찾아 많은 한국인들이 해외로 떠났고 현재 전 세계에는 약 700만 명이 넘는 재외 동포가 살고 있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한국에 와서 정착하고자 하는 외국인은 많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시선을 받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현재 한국인 구의 약 5%가 외국 출생자이며 이 비율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적 성공과 소프트파워의 확장은 다양한 배경의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공부하고, 일하며, 정착하기를 원하게 만들었다. 급격한 변화는 수 세기 동안 비교적 단일한 사회구조를 유지해 온 한국에 부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이민 문제를 이야기할 때 한국 사회 곳곳에서 두려움이나 반감이 함께 감지된다. AI와 로봇의 시대에 과연 더 많은 외국인이 필요한가, 이민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게 될 것인가, 유럽에서 보아온 갈등이 반복되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들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 자체는 충분히 타당하며 곧바로 혐오로 치부되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도와 정책의 언어로 전환하는 일이다. 나는 기술발전이 제조업, 농업, 어업, 건설업 등에서 줄어드는 노동력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육체노동은 이미 인기 있는 선택지가 아니며 일부 분야에서 장인 정신을 기반으로 한 회복이 가능하더라도 노동력 공백은 계속될 것이다. 한국은 결국 더 많은 외국인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구조적 변화에 대한 대응의 문제다. 이 흐름은 단지 육체노동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 세대는 일자리와 삶의 파트너, 더 나은 삶을 찾아 국경을 넘는 이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역시 세계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정책과 동맹은 바뀔 수 있지만 오늘날 사람의 이동 자체를 막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이 선택은 단기적인 여론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수십 년간 한국 사회의 형태를 결정짓는 방향의 문제다. 불가피한 변화를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어떻게 관리하고 함께 살아갈 것인가. 다문화주의는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계하고 운영하느냐의 문제다. 미국과 독일을 비롯해 50개가 넘는 민족과 수 백 개의 언어가 공존하는 중국까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들 대부분은 다문화사회다. 애플, 아마존, 테슬라, 엔비디아와 같은 글로벌기업들 역시 이민자 혹은 이민자의 자녀들에 의해 창립되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이러한 사회들은 성장과 활력만큼이나 동시에 갈등과 긴장이라는 현실을 함께 안고 있다. 변화는 언제나 불편함과 긴장을 동반한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거부가 반복될수록 사회적 균열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삶은 본질적으로 변화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사계절이 분명한 이 땅에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새로운 것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은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러운 과정이 따르더라도, 변화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글로벌하고 코스모폴리탄한 한국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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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2.12 18:25

[금요칼럼] 겨울나무를 바라보며

진보 대통령이 뜻밖에도 보수 정당의 인사를 장관 후보자를 내세우며 그 청문회가 큰 주목을 받았다. 최고 학벌과 화려한 인맥을 뒷배 삼아 국회의원직에 올랐던 그이는 국회 청문회에서 제 흠결을 뾰족하게 따져 묻는 의원에게 항변을 했다. “의원님, 인생이 그렇게 계획대로 안 되지 않습니까?” 그이의 드러난 처신들은 고개를 내저을 만큼 삿되고 지저분했다. 편법과 반칙을 일삼으며 개인 영달을 꾀하며 부를 쌓은 그이의 누추한 인생 역정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결국 낙마했다. 아무 흠결을 남기지 않고 대쪽같이 바르게 한 생애를 사는 건 어려운 일이다. 살다보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나쁜 일에 연루되기도 하고 오점이나 얼룩이 생긴다. 내 주변에서도 제 안의 세속적 욕망과 미성숙한 처신으로 낭패를 당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나 역시 마흔 중반에 큰 위기를 맞았다. 빗나간 선택과 탐욕으로 생활이 피폐하고 문란해졌을 때가 있었다. 나는 시골로 낙향해서 그 시절을 묵묵히 견뎌냈다. 시골집 아래에는 너른 저수지가 있었다. 겨울철이 지나면 저수지 주변에 군락을 이룬 버드나무 가지에 연초록 물이 올라와 볼만 했건만 나는 잘 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의 굴레에서 의기소침한 채 웅크렸다. 삶의 원칙이 무너지면서 방향을 잃고 헤매던 그때 삶의 지침서로 삼은 책이 노자의 ‘도덕경’이다. 그걸 옆에 끼고 읽을 때 ‘상선약수’(上善若水)나 ‘대직약굴’(大直若屈), ‘광이불요’(光而不耀) 등등 주옥 같은 구절에서 내 마음의 금(琴)이 맑은 소리를 냈다. 물처럼 자연의 순리에 맞춰 살고, 곧음을 뽐내지 않고 구부러진 듯 처세를 하며, 빛나되 번쩍거리지 않으려고 마음 속 결의를 다지곤 했다. 젊었을 땐 젊음이 영원히 지속되리라 착각했다. 지각이 모자랐던 탓에 빚어진 일이었다. 젊음이 사라진 뒤 천금 같은 젊음을 낭비한 걸 깊이 자책했다. 무른 것은 부서지기 쉽고, 미약한 것은 흩어진다는 것도 미처 알지 못했다. 늙은 뒤에야 근력이 약해지고 뼈의 밀도는 떨어지며, 기억력도 나빠지고, 인생의 가능성도 사라진다는 실감을 했다. 노년기란 불가피하게 혹한 속 겨울나무의 처지와 같다는 걸 깨닫는다. 젊었을 때 겨울나무를 보며 이런 시를 끼적였다. ‘잠시 들렀다 가는 길입니다/외롭고 지친 발길을 멈추고 바라보는/빈 벌판//빨리 지는 겨울 저녁 해거름/속에/말없이 서 있는/흠 없는/혼 하나//당분간 폐업합니다 이 들끓는 영혼을/잎사귀를 떼어 버릴 때/마음도 떼어 버리고/문패도 내렸습니다//그림자/하나/길게 끄을고/깡마른 체구로 서 있습니다’.(졸시, ‘겨울나무’ 전문) 겨울나무는 제 잎을 다 떨군 채 해거름 속에 말없이 서 있다. 잎을 다 떨구고 겨울을 나는 나무는 무욕한 존재의 표상으로 삼을 만하다. 나이 들어서 먼저 지켜야 할 것은 제 안의 욕심을 비우는 일이다. 청춘의 시기는 인격이 무른 탓에 치기에 빠져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그런 탓에 인생에 후회와 번민이 많아진다. 나는 봄여름의 청년기와 장년기의 가을을 지나 어느덧 겨울로 성큼 들어섰다. 젊었을 땐 과오와 실패도 너그럽게 용서받았다. 하지만 장년기에는 그 결과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면제받기 힘들다. 어른이란 제 선택과 행위들에 책임을 질 만큼 충분히 사리분별이 있는 존재라고 여겨지는 까닭이다. 헐벗은 겨울나무를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라고 자문한다. 그 물음은 한번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거듭해서 제 내면의 청문회에 스스로를 세우고 따져 물어야 한다. 지저분한 행적의 세목들이 드러나 망신을 당하고 낙마한 장관 지명자는 그런 물음을 통한 자기 검증에 소홀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이의 인생은 탐욕이 자기 삶을 존중하는 태도를 삼켜버린 사례일 테다. 그이가 변명 삼아 내놓은 말 중, 인생이 늘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말에 한 점의 진실이 없지 않지만 그게 누추한 제 과거에 대한 면죄부일 수는 없다. 누구도 제가 과거에 저지른 과오, 실책, 탐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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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2.05 18:14

[금요칼럼]국가 균형발전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축 된다

2026년도 신년사에서 대통령은 수도권 중심의 성장 구조를 넘어 지역이 스스로 성장 동력이 되는 국가 균형발전의 전환을 강조했다. 이는 단순히 지역 격차를 완화하겠다는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의 성장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수도권 집중이 효율의 상징이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지역의 다양성과 특성이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 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복합적 위기의 국면에 서 있다. 인공지능과 반도체를 둘러싼 첨단기술 경쟁은 국가 간 격차를 빠르게 벌리고 있으며,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보호무역 강화는 경제 전반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여기에 국제 질서의 변화와 안보 환경의 불안정성은 상시적인 긴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기술, 경제, 외교, 안보가 분리되지 않은 채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적 도전의 시대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국가 균형발전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특정 지역에 과도하게 의존한 성장 구조는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으며, 다양한 지역이 각자의 강점을 바탕으로 역할을 분담할 때 국가 전체의 회복력도 강화된다. 균형발전은 분배의 논리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전략이다. 각 지역은 이미 저마다의 고유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수도권은 첨단 연구와 금융, 문화 산업의 중심지로서 혁신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고, 중부권은 제조와 물류, 교통의 결절점으로 국가 산업의 기반을 안정적으로 떠받칠 수 있다. 호남권은 농생명과 신재생에너지, 대경권은 기계·부품과 첨단 소재 산업을 중심으로 특화 발전이 가능하다. 강원과 제주, 전북 등은 환경과 관광, 미래형 산업을 결합한 새로운 성장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 균형발전 구상 속에서 남부권 해양수도는 하나의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조선과 해양산업, 수산업, 항만과 물류, 해양 에너지와 방위 산업이 집적된 남부권은 해양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산업과 해양안보, 환경을 함께 아우르는 발전 모델을 보여준다. 특히 이 지역에는 주요 해군 작전기지와 정비·교육 인프라 등 국가 해군 전략자산이 집중되어 있어 민간 해양산업과 국가 안보 역량이 유기적으로 결합될 수 있다. 해양수도 구상은 단순한 산업 집적을 넘어 해양을 매개로 한 국가 역량의 입체적 결합을 의미한다. 해양력은 단순한 군사력의 다른 표현이 아니다. 미국 등 해양 선진국들이 보여주듯, 해군력을 기반으로 조선 기술과 해양플랜트 산업, 항만 운영 능력, 친환경 해양 정책이 유기적으로 결합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해군은 해양력의 중심 축이며, 산업과 기술, 환경 정책은 그 위에 구축되는 국가 역량이다. 남부권 해양수도는 이러한 해양력의 복합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그러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해양력은 특정 지역에 국한된 전략이 아니라 해양력을 매개로 유기적으로 결합될 경우, 국가 균형발전이 특정 지역의 사례를 넘어, 국가 전략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국가 균형발전의 핵심은 획일화가 아니라 연결이다. 지역마다 다른 산업과 인재, 자산을 국가 차원에서 유기적으로 연계하고, 중앙과 지방이 역할을 분담할 때 대한민국은 새로운 성장 경로를 확보할 수 있다. 지방은 더 이상 지원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 전략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책임과 권한이 함께 주어져야 한다. 신년사가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위기를 돌파하는 해법은 한 곳에 몰아주는 성장이 아니라, 전국이 함께 성장하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지금 바로 국가 균형발전은 대한민국이 위기의 시대를 넘어 새로운 도약으로 나아가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성장축이다. △박천억 고문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미래안보, 전략기술을 전공했다. 해군대학장을 거쳐 준장으로 전역한 이후 SK 오션플랜트 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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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29 18:52

[금요칼럼] ​‘클린 칩(Clean Chip)’을 묻는 시대, 피지컬 AI의 심장은 한국이다

​2026년, 반도체 시장의 승자는 이미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이제 세계는 성능과 가격 경쟁을 넘어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묻는다.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반도체는 단순한 부품을 넘어 안보 자산이 되었고, ‘신뢰’는 시장에서 통용되는 새로운 가치이자 통화가 되었다. 이 거대한 지각변동의 중심에 대한민국이 서 있다. ​미국의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 강화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현미경처럼 검증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등장한 개념이 바로 ‘클린 칩(Clean Chip)’, 즉 신뢰 기반 반도체다. 아무리 싸고 빨라도 출처와 공정, 보안의 무결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세계 시장에 설 수 없다. 한국은 이 엄격한 기준을 통과하며 기술력 위에 ‘믿을 수 있는 파트너’라는 독보적 평판을 더했다. 이것은 단순한 브랜드 이미지가 아니라, 국가적 생존과 직결된 강력한 진입장벽이다. ​AI 산업의 폭발적 성장 속에서 한국 기업들의 위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SK하이닉스는 HBM 시장 점유율 60%를 넘기며 독주 체제를 굳혔고, HBM4 시대로 접어들며 글로벌 고객사들은 한국을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고 있다. 삼성전자 역시 설계부터 패키징까지 아우르는 ‘턴키(Turn-key)’ 전략으로 파운드리와 메모리의 시너지를 극대화하며 강력한 반등을 시작했다. ​하지만 진짜 승부처는 가상 세계를 넘어 실제 물리 공간에서 작동하는 ‘피지컬 AI(Physical AI)’ 시대로의 이동에 있다. 로봇, 자율주행, 스마트 공장, 국방·의료기기 등 물리적 실체를 가진 AI가 핵심 산업이 되면서, 소프트웨어만큼이나 이를 구현할 정밀 부품과 전력 시스템, 그리고 대규모 통합 제조 인프라가 필수적이 되었다. AI가 ‘두뇌’라면, 이를 움직일 ‘몸체’가 필요한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는 한국 자동차와 조선 산업의 수준 높은 제조 기술이 피지컬 AI의 핵심 토대가 될 것이라 분석한다. 수만 개의 부품을 정밀하게 통합하는 자동차 시스템 산업과, 초대형 구조물에 첨단 제어 기술을 집약하는 조선업의 노하우는 로봇과 스마트 공장의 현실화를 가능케 하는 근육이다. 한국은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부터 정밀기계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생태계를 한 나라 안에 갖춘 유일한 국가다. 부품-소재-장비-완제품이 최단 거리에서 연결되는 이 구조는 설계 변경과 양산 전환의 속도를 결정짓는 피지컬 AI 개발의 결정적 병기다. ​최근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현대차와 삼성전자를 직접 만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 칩이라는 ‘뇌’만으로는 미래가 완성되지 않는다. 그 칩이 실제 자동차와 로봇에 들어가 유기적으로 작동하려면 세계 최고의 제조 파트너가 필요하다. 젠슨 황이 한국에서 찾은 것은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피지컬 AI를 함께 현실로 만들 강력한 ‘제조 동맹’이었다. ​신뢰 인프라와 제조 인프라의 결합은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더욱 독보적으로 만든다. 삼성의 미국 테일러 공장은 이제 단순한 해외 공장이 아닌 안보 인프라로 평가받고 있으며, 유럽과 중동은 기술력과 중립성을 갖춘 한국 기업을 전략적 파트너로 택하고 있다. 물론 공급망 분절화와 거점 생산에 따른 ‘지정학적 인플레이션’으로 비용 부담은 커졌으나, 이는 역설적으로 더 높은 진입 장벽이 되어 살아남은 우리 기업의 지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글로벌 경제가 블록화되는 지금, 미국과 안보 동맹을 유지하며 첨단 제조 역량을 갖춘 나라는 사실상 한국뿐이다. 2025년 반도체 수출 1,734억 달러라는 사상 최고치 기록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 자동차, 조선, 로봇 등 피지컬 AI 산업이 더해지면 한국 제조업의 성장 스토리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될 것이다. ​이 흐름은 단순한 경기 회복이 아니다. ‘신뢰와 제조 역량을 자본으로 전환하는 구조적 성장’이다. 2026년, 투자자와 정책 결정자는 성능이나 유행보다 신뢰와 제조 인프라를 동시에 갖춘 기업과 산업을 보아야 한다. 피지컬 AI 시대, 한국 제조업 환경이 세계에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이유와 한국 증시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중장기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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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22 18:30

[금요칼럼] 누구를 위한 행정대통합인가

2026년 새해 벽두부터 주목받고 있는 국민적 관심사의 하나는 행정대통합이다. 5극 3특(5개의 광역경제권과 3개 특별자치권) 체제로 대표되는 행정대통합은 이재명 정부의 국정과제이기도 하다. 대전·충남 행정대통합은 민주당의 특별법 발의와 특별추진위원회를 설립할 정도로 추진 속도가 매우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지방소멸 위기를 해소하고, 수도권과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권역별 행정대통합이 꼭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축소사회, 인구감소, 초고령사회, 지방소멸, 지역양극화 등 한국 사회의 숱한 위기를 해소하고 완화하기 위한 해결책이라는 인상을 주기 충분하다. 필자 역시 당면한 한국 사회 위기를 해결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런데 행정대통합의 설계와 추진 과정을 보면서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우선 수도권과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행정대통합을 해야 한다는 명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경쟁이란 기본적인 여건 자체가 유사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며, 공정한 경기를 전제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 실제 상황은 이를 반대로 증명하고 있다. 수도권 집중 관련 자료에 의하면, 인구의 약 51%, 국내 500대 기업 본사 중 약 80%에 달하는 385곳, 331개 종합병원 중 수도권 소재 병원 수(상위 16개 상급병원 중 15개)나 전체 병상의 40% 이상 수도권 소재, 영화관 수 역시 51.6%가 수도권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조건과 기반은 혹 어찌하여 행정대통합을 한다 하더라도 수도권과 공정한 경쟁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지방소멸 위기 완화 역시 행정대통합으로 발생할 수 있는 통합 지역 내의 지역 간 불균형과 특정 지역으로의 편중 문제(시작도 전에 통합시의 본청 소재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 양상 등)에 대한 구체적인 복안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지역 주민들의 삶에 어떤 구체적인 영향을 미쳐 ‘나의 삶’을 향상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아무도 답하지 않고 있다. 작금의 상황에서 이러한 행정대통합을 반기고 있는 이들 대부분은 지역 내 이해관계가 있거나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소수의 기득권으로 보인다. 행정대통합으로 얻을 수 있는 혜택과 이득을 선점하려는 이들에게는 이번 기회가 매우 반가울 수 있겠지만, 지역 주민들 대부분에게는 불편한 행정체계 개편이 불과한 껍데기뿐인 ‘대통합’이 될 것이다. 지방소멸 위기와 지역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내용과 대안이 제시되어야 할 필요성이 해당 지역 주민인 이유이다. 정책 입안자의 말 한마디나 추진위원회의 준비 과정 및 해당 지역 행정관료들의 이해관계와 지역 기득권의 유불리에 매몰되지 않고, 대한민국 미래를 위한 필수적인 ‘행정대통합’과 ‘지역경쟁력’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행정대통합 자체가 목적이 아닌 잘 준비된 과정과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은 자명하다. 행정대통합이라는 수단이 목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몇 가지를 전제로 할 필요가 있다. 첫째, 지역 주민들이 원하는 행정대통합의 실체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지역의 이해관계자들이 모두 참여하여 지역의 대의와 공익을 위한 구체적인 방향과 세부 정책에 대한 의견을 모으고, 이를 최대한 반영해야 한다. 둘째, 단순한 ‘인구 합치기’나 행정대통합이 아니라 대통합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가능한 세부 계획을 영역별로 수립해야 한다. 외형적인 대통합이 아니라 지역에 맞는 실질적인 대통합의 구체적 영역과 특성을 앞에 놓고 이를 중심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 셋째, 수도권과의 경쟁이 목표가 아니라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이 향상하는 방법의 대통합 과정과 준비이어야 한다. 학벌이 존재하고, 지역 간 격차와 불평등이 심화한 작금의 상황에서 단순한 순위 경쟁은 의미 없는 몸부림과 변화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을 이해하고 더 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행정대통합을 고대해 본다. △김종법 교수는 현재 대전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정치사상·정당과 선거·문화정치학이 주 연구 분야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EU센터 HK사업단 연구교수, 한양대 국가전략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대전발전연구원·대전세종연구원 자문위원, 코레일 정보공개심의위원회 심의위원 등 조직경영 및 공공자문 분야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현재 한국정치연구회 회장과 국회 헌법개정 및 정치제도개선 자문위원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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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15 18:41

[금요칼럼] 하나 마나 한 말

‘동어반복’이라는 철학 개념이 있다.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를 뜻한다.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하니 뭔가 긍정적인 의미로 들리지만 그 반대이다. 누군가가 “아저씨는 남자다.”라고 한다고 해 보자. 그 아저씨에 대해 주는 정보가 아무것도 없다. ‘아저씨’라는 말의 정의에 이미 ‘남자’라는 뜻이 들어 있으므로, 아저씨가 무슨 말인지 안다면 남자라는 것은 이미 알기 때문이다. 꼭 정의된 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경우에도 필연적으로 참이 되는 때가 있다. “지금 비가 온다.”고 하면 실제로 비가 오는지에 따라 참이 되기도 하고 거짓이 되기도 하니 필연적으로 참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는다.”라고 하면 실제로 비가 오는지와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참이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우산을 가지고 나갈지 말지 결정하는 데는 아무 쓸모가 없다. 동어반복을 영어로는 ‘토톨로지(tautology)’라고 한다. 토톨로지는 동어반복을 뜻하기도 하지만 ‘하나 마나 한 말’이라는 뜻도 있다. 아저씨는 남자이고, 지금 비가 오거나 오지 않고, 모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하나 마나 한 말이다. 정치인들은 동어반복의 달인이다. 일본의 현 방위대신이기도 한 고이즈미 신지로 의원이 특히 이것으로 유명하다. 고이즈미라는 이름이 낯익을 텐데,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아들이다. 고이즈미 의원은 “바뀌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합니다.”라거나 “경기가 좋아지면 반드시 불경기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와 같은 ‘어록’을 남겼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듣고 나면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다. 정치인들이 이렇게 구체적인 내용 없는 뻔한 말을 하는 것은 논란을 피하고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헛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고이지미 의원의 말은 그래도 극우 망언을 일삼은 아버지 총리보다는 낫다고 해야 할까? 흥미로운 것은 동어반복처럼 보이지만 동어반복이 아닌 명제도 있고, 반대로 동어반복처럼 안 보이지만 실은 동어반복인 명제도 있다는 점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이 있다. 겉으로는 같은 말이 반복되므로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 같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당연히 맞는 말을 한다는 생각으로 상대방의 제안대로 한다. 그러나 잘 알겠지만 이 말은 실제로는 불법이나 부정을 눈감아주면서 서로 이득을 보자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참인 명제는 아니다. 거꾸로 뭔가 내용이 있는 말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하나 마나 한 말인 경우도 많다. “우리는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습니다.”라는 정치인의 말을 생각해 보자. 듣기에는 구체적인 약속 같다. 그러나 정치인이 하는 일이 국민의 말을 듣는 것 아닌가? 결국 정치인이 정치를 하겠다는 말밖에 안 된다. 고이즈미 의원처럼 노골적이지 않다뿐이지 결국 하나 마나 한 말이다. 언론의 칼럼에서도 동어반복은 흔하다. 어떤 칼럼니스트가 “앞으로의 세상은 변화에 적응하는 사람이 성공할 것이다.”라고 쓴다면? 뭔가 있어 보이는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공의 정의를 변화 적응 능력으로 본다면 이 역시 동어반복이다. 한 기업인이 “성공하려면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면 역시 마찬가지다. 성공하는 사람의 습관이란 결국 성공으로 이어지는 습관이니 같은 말을 할 뿐이다. 문제는 이런 말들이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어서 쉽게 알아채기 어렵다는 점이다. 동어반복은 명제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형식 때문에 참이 된다. 간단한 예는 금방 알아볼 수 있지만, 복잡하게 표현되면 마치 의미 있는 통찰처럼 들린다. 하지만 껍데기를 벗겨내면 “성공은 성공이다.”라는 빈껍데기만 남는다. 새 해를 맞아 새로운 칼럼을 연재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 칼럼에서 하나 마나 한 말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게 시간을 내어 칼럼을 읽는 사람에게 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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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08 18:07

[금요칼럼] 선호투표제를 시범실시 하는 몇 가지 방법들

6월 3일 지방선거가 5개월 앞이다. 계엄과 탄핵 그리고 조기 대선과 새 정부의 출범이라는 1년에 한 번 있을뻔한 대형 정치 이벤트의 연속에 가렸을 뿐이다. 국회 정치개혁특위가 역대급으로 지각 출범한 이유다. 정개특위가 당장 처리해야 할 과제는 지방선거의 광역의원 선거구 획정이다.이게 확정되어야 기초의원 선거구가 정리된다. 작년 10월 헌법재판소는 전북 장수군이 도내 선거구 평균 인구 대비 –57%로 인구 편차 기준을 벗어났다며 2월 19일까지 시정토록 판결했다. 장수군은 인구 2만 명으로 5만 이하 기초자치단체가 전국에 50개가 넘는다. ‘하나의 자치군에 최소 1명 의원 보장’의 관행이 ‘유권자의 선거권과 평등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표의 등가성’이 우선이다. 인구 밀집의 도시 특히 수도권과 인구 소멸의 농산어촌의 인구 대표성과 지역 대표성의 충돌이다. 선거구 조정을 넘어 선거제도 개혁 나아가 정치 리더십 구성의 거버넌스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 필요한 까닭이다. 핵심은 ‘승자독식의 단순다수+소선거구제’다. 대량 사표 발생이 불가피한 선거제도다. 득표율-의석률의 비례성은 악화되고 대표성은 당연히 왜곡된다. 거대 양당은‘적대적 공생의 카르텔’속에서 반사이익을 챙기며 각자 양극단으로 치닫는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습이다.정치 양극화와 갈등 조정 실패의 정치가 바로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로부터 출발한다.사표 양산-비레성과 대표성의 붕괴-양당 독점 구조 강화-각당의 에코 챔버 속 극단화의 악순환이다. 선호투표제와 중대선거구제의 결합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이다. ‘정치의 가장 위대한 발견’으로 불리는 선호투표제는 유권자가 후보자 전원에게 선호 순위를 부여하는 투표 방식이다. 소선거구제와 결합하면 대안투표제 또는 즉석 결선투표제고 중대선거구제와 함께하면 단기이양식투표제다. 과반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최하위 득표자를 탈락시키고 그 표를 차순위 후보에게 이양하여 사표를 최소화하고 정치적 다양성을 높이며 당선자의 정치적 정당성을 제고한다. 선호투표제의 어려움은 투개표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과 비용이 상대적으로 많이 든다는 점이다. 유권자 이해가 어려워 무효표 발생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점진적 확대 적용이 필요하다. 첫째, 정당의 당내 경선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2002년 민주당 노무현 대선후보 선출 때 사용되었다. 양당의 ‘당원 1인 1표’와 ‘당심 70%’ 논란은 핵심 지지층에 휘둘리기 쉬운 구조다. 중도 이탈과 본선 경쟁력 약화는 당연한 결과다. 선호투표제는 조직표의 위력을 약화시키고 광범한 지지를 받는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높인다. 정책적 연대와 중도 지향의 포용적 캠페인으로 정치적 다양성과 당내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양당 지도부의 의지가 결정한다. 둘째, 교육감 선거부터의 적용이다. 교육감 선거는 공식적으로 정당 공천이 아니지만 사실상 진영 대결의 선거다. ‘깜깜이 선거’고 ‘로또 선거’로도 불린다. 후보 난립으로 과반 이하의 낮은 득표율 당선이 속출하여 교육자치의 대표성 위기는 깊어진다. 선호투표제는 후보 단일화 과정의 잡음과 혼란을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부수적 효과도 있다. 셋째, 헌재 판결로 선거구 조정이 불가피해진 농어촌 복합 선거구와 일부 기초의회 선거구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하는 방안이다. 전북 장수군을 중심으로 한 적용도 가능하고 제주도나 세종시 같은 특별자치도에서 우선 시행할 수도 있다. 넷째, 대통령 선거의 결선투표제 도입 논의에 앞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먼저 테스트하는 기회로도 선호투표제는 필요하다. 한번의 투표로 결선투표의 효과를 낼 수 있는‘즉석 결선투표’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양극화를 완화하고 통합과 문제해결의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양당의 텃밭 지역부터 각자 시도해 보는 방법도 있다. 한 달 반 정도의 시간이 남은 정개특위 최악의 선택은 문제가 된 선거구를 중심으로 한 농산어촌의 한정된 유예 또는 소규모 특례 적용 등‘부분적 보완’이다. 결국 소선거구 중심의 현행 제도를 기본적으로 유지하며 비례대표 확대 등의 일부 조정이다. 이를 위해 지방의원 정수를 확대할 수도 있다. 문제는 미몽책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표의 등가성’이 우선되는 상황에서 농산어촌의 의석 축소 압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구 편차 기준 완화와 별도 보정 의석 등은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다. 선호투표제 시범 실시는 승자독식에 기반한 야수의 정치를 끝내고 숙의와 타협과 합의 정치의 선진 민주주의를 향한 출발점이다. 6월 지방선거의 선호투표제 실험은 한국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정개특위를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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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01 17:09

[금요칼럼] 한 해의 끝에 서서

임진강에 혼자 나가 일몰의 빛으로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보다 돌아왔다. 강물은 유구한 세월을 흘러도 그 흐름을 멈추는 법이 없다. 공자는 강물 앞에서 “강물이여, 강물이여!”라고 탄성을 질렀다. 계절의 순환에는 오차가 없어 동백과 모란꽃이 피었다 지고 여름엔 배롱나무 붉은 꽃이 피었다가 졌다. 내장산엔 단풍구경에 나선 이들로 북적였다. 우리를 둘러싼 큰 테두리인 정치의 지각 변동이 어느 해보다 컸다. 한밤중 계엄으로 나라가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졌지만 곧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루어진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내 소소한 일상에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새벽에 고양이들 밥그릇에 사료를 채워준 뒤 나도 유기농 우유를 마시고 아무도 깨지 않은 새벽의 고요 속에서 책을 읽었다. 나는 고요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누구도 제 행복을 빚는 게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과잉의 정보들이 만드는 소음 속에서 제 불행을 제조해내는데 열을 올린다. 고요가 삶의 평화를 빚는 유일한 조건이라면 ‘정보는 그 자체로 소음’(한병철)인 까닭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고요를 사랑한다. 동네 소택지에는 들에 자생하는 까마중이 자라나 까만 열매를 맺었다.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까마중 열매를 바라보았는데, 어린 시절 이후 까마중 열매를 본 게 신기했다. 부지런한 이들은 소택지에 텃밭을 만들어 고구마와 감자를 심거나 토란이나 땅콩 같은 뿌리 식물을 심어 수확을 했다. 도시에 나와 살게 된 이후 종달새 노래를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것은 쓸쓸한 일이었다. 지척인 고향으로 돌아가리란 기대는 난망한 일이 되었다. 우리 마음 깊은데 자리한 고향은 사라지고 그것은 상상의 지리부도에만 존재할 테다. 올해 유독 폭우가 잦아 여기저기에서 물난리를 겪었는데, 예외적으로 강릉은 오랜 가뭄으로 저수지가 말라붙어 비상급수가 실시되었다. 올해는 결혼이 늘고 신생아 수도 늘었다고 한다. 인구 소멸을 걱정하는 나라로서는 퍽 다행한 일이다. 다들 AI의 광풍 속에서 혁신의 시대가 올 거라고 했다. 과연 누구를 위한 혁신일까? 글로벌 금융과 상품 시장은 더 커지고, 무역은 자국 우선주의와 관세 장벽으로 새 판이 짜이는 게 불가피했다. 소상공인들은 불황에 한숨을 내쉬고 문 닫는 가게들이 많았다. 어떤 이들이 병상에서 한 해를 보냈다. 시름시름 앓다가 건강을 되찾은 이가 있는가 하면 숨을 거둔 이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죽고 사는 건 인간의 의지 밖의 일인 까닭이다. 가난에 처했으면서도 늠름하던 한 시인은 죽기 전 자식들에게 이런 시를 남겼다. ‘내 가난한 아들딸들아./가난함에 행여 주눅 들지 말라./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백금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김관식 ‘병상록’) 가난에 주눅들지 말라! 우리를 일으키는 건 안락이 아니라 우환이다. 불의 단련 속에서 보검이 나오고, 시련의 담금질에서 삶은 단단해진다. 등이 휠 정도로 사는 게 버거울 때 이 싯구를 읽으며 힘을 낸다. 무더위에 지쳐 낮잠만 자던 고양이들은 가을이 오자 식탐을 부리더니 살이 올랐다. 늦가을 오후, 상처한 고교 동창이 세상을 뜬 아내를 향한 그리움을 날과 올로 엮어 시집을 묶었다고 찾아왔다.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비전향장기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올해 시 몇 편을 내놓고 책 두어 권을 더 썼다. 날마다 나서는 산책에서 기쁨을 누리고, 새 책을 꾸역꾸역 읽는데서 보람을 찾았다. 섣달에는 수술을 하고 입원해 링거 줄을 여러 가닥 매달고 있다가 퇴원했다. 언제 가봐도 병원에는 아픈 사람들이 넘쳐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올해도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가장 밝은 빛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나오고, 오늘은 내일의 가능성에서 더욱 빛난다. 한 해가 저무는 지금, 내 안에 일렁이는 설렘과 희망은 곧 누리에 충만할 새해 첫 해의 무량한 빛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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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25 17:33

[금요칼럼] 여기는 딴 나라 같다

앞산 산 밑에 농막을 짓고 사는 사촌 동생 복두가 서울에서 가져온 누룽지 가져가라고 전화 왔다. 복두는 나보다 한 살 아래, 초등학교 입학해서 졸업 때까지 같은 반이었다. 서울에서 살다가 몇 해 전 앞산 밭에 농막을 짓고 이따금 와서 기거한다. 밤이 되어 앞산 밑 강 언덕에 불이 켜지면 산이 눈을 뜨는 것 같다. 이따금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를 크게 틀어 놓는다. 아침밥 먹었는데, 앞집에서 복국 끓여 놓았다고 먹으러 오란다. 복국 먹고 있는데, 복두가 누룽지 가져가라고 또 전화한다. 강을 건너갔다. 눈이 날린다. 눈발이 몇 개 얼굴에 차다. 검정비닐 봉지에 든 누룽지를 들고 타박타박 강을 건너왔다. 오리들이 강에서 놀고 있어서 사진을 찍었다. 며칠 사이에 청둥오리들이 많이도 불어났다. 금 새 100마리도 더 떼를 지어 하루 종일 마을 앞 강에서 먹이를 찾아 먹고 바위 위에 앉아 머리를 날개 위에 꼬아 얹어 놓고 한 발로 서서 쉰다. 오리들이 먹이를 찾기 위해 머리를 강물 속에 처박고 궁댕이와 노란 발을 허공 속에 버둥거리는 모습은 매우 웃기고 아주 평화로워 보인다. 오리는 힘들겠지만, 나는 그렇다. 강물 속에는 봄여름 가을까지 자란 다슬기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오리는 다슬기를 까먹지 않고 통째로 삼킨다. 책을 보고 있는데( 나는 요즘 유발 하라리의 ‘21세기 스물한 가지 제언’을 읽고 ‘넥서스’를 읽고 있다.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저서인 ‘사피엔스’와 ‘호모테우스’ 다시 읽어야겠다고 벼른다. )앞집에서 또 방어 회 먹자고 해서 양껏 배부르게 먹었다. 이틀 전에 김장 마늘을 깠다. 오늘은 파를 다듬었다. 해는 지고 어두운데 딸이 순창 읍내로 치킨 사러 가자고 한다. 날이 추웠다. 달리는 차 창에 눈발이 날아왔다. 닭집 앞에 차를 세우고 치킨을 기다렸다. 사람들이 닭집 홀에 앉아 맥주를 마신다. 퇴근 후 사람들이 한가하게 술을 마시는 풍경을 정말 오랫만에 보았다. 함께 평화롭고 서로 다정하고 여럿이 정다워 보인다. 읍내, 그러면 어쩐지 정답다. 정다운 모습들을 치킨이 나올 때까지 차 안에서 바라보았다. 무어라 심각하게 말하고, 또 허리를 뒤로 제 끼고 웃고, 손뼉을 치며 모두 웃는다. 삶의 내일이 불안하고, 또 기다려진다. 큰 도시 삶같이 어마어마한 희망은 없을 것 같은 간소한 읍내의 하루가 이렇게 눈발 속에 잠겨 있다. 집이 있고, 집에는 식구들이 기다린다. 그것 또한 삶의, 하루의 안심이다. 닭집 여자 주인이 닭을 가지고 온다. 얼른 차장을 열고 받았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치킨집 여자 사장님이 나를 보더니, “어머! 시인, 그분 아니세요” 한다. 내가 네 맞다, 고 했다. 좋아하셨다. 딸이 운전하면서, 아빠가 그분이구나. 했다. 웃었다. 눈발이 아까보다 세차졌다. 순창에서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때 우리 모두 가난하고 가난하였다. 자취하는 나를 도와준 친구가 둘 있었다. 종해와 운행이다. 종해는 어머니와 누님하고 살았다. 추운 겨울 자기 집에 데려가 이불 속에 묻어 놓은 따듯한 밥을 주었고, 운행이는 시계 집 아들이었는데, 중학교 네네, 소풍 때마다 도시락을 싸 왔다. 운행이가 어느 날 자기 집에 나를 데려갔다. 고운 얼굴의 운행이 어머님이 나더러 “니가, 용택이구나,” 하며 나를 바라보며 웃으셨다. 나의 생활권은 지금도 순창이다. 시장을 보러, 마트에 무엇인가를 사러, 가고, 찻집도, 외식도 병원도 순창으로 간다. 내 삶의 일상은 모두 순창으로 해결된다. 집에 일이 없는 날은 아내는 책을 보러 순창에 간다. 거리를 다니다 보면 어디서 본 듯한, 어쩐지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 스친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살며 눈에 익었던 그 이들의 자손이거나, 아니면 어쩌다 스친 그 때 읍내에 살던 사람들의 얼굴을 닮은 후손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사는 이 작은 고을은 일상은 딴 나라 같다. 닭튀김은 맛이었다. 격동의 1년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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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18 17:56

[금요칼럼] 전환기에 놓인 한국의 지방자치

새 정부가 출범한 지 6개월이 지난 지금 지방자치와 분권은 중대한 전환기에 놓여 있다. 지방자치가 부활한 1995년과 현재 대한민국을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국민 개인당 국민소득은 1만 2565불에서 3만 7000불로 3배 이상 급상승했다. 수출액도 1억 2500만불에서 6억 8039억불로 5배 이상 증가했다. 평균수명은 73.5세에서 83.5세로 10년 이상 늘어났다. 그야말로 경제 선진국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이 분석한 지방자치 30년 평가 보고서에서도 지난 30년 동안의 생활상의 변화를 76개 지표로 분석한 결과, 주민의 삶의 질은 크게 향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치제도, 자치역량, 참여구조에서 큰 제도적 진전이 있었다는 평가다. 그러나 긍정적인 성과 못지않게 한계점과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을 동시에 제기하고 있다. 국민 삶의 질 향상은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세대 간, 계층 간 큰 괴리 속에 그 격차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지방자치가 30년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이 획일적인 제도하에 실시됨으로써 그 긍정적인 성과를 극대화 시키고 있지 못함과 더불어 주민중심의 맞춤형 지역정책이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가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즉 제도의 외향적 확산은 분명하나 실질적 자율성, 책임성, 효과성은 제한적으로 나타났다. 국민인식 조사의 결과, 지방자치 제도의 구비는 지방자치에 대한 주민 인식 개선과 참여기반 확대에 기여했으나 지역 간 불균형과 주민 간 성과체감 격차가 여전이 구조적으로 고착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조례는 법령의 범위안에서만 제정될 수 밖에 없는 자치입법권의 제한, 자치사무의 비중도 지난 30년 간 3% 정도 증가에 그쳐 36.7%에 머물고 있으며, 재정자립도 또한 1995년 63.5%에서 48.6%까지 오히려 후퇴하고 있어서 무늬만 지방자치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지방의 자율성 강화라는 측면에서의 지방분권의 확대는 정주·산업여건·생활권 기반의 균형발전과는 병행되지 못한 채 그 격차만 심화된 문제점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게 되었다. 결국, 제도적 결함과 시행상의 착오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는 지역의 주민을 주인으로 자리매김해 줌과 동시에 주민의 자치의식과 함께 민주시민의식의 성숙을 통해 비상계엄 등 중앙정국의 혼란과 불안 속에서도 지방정국의 안정을 통해 평화적 정권교체를 비롯한 민주주의 회복력을 보여준 커다란 성과를 국민들에게 안겨주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2026년 병오년은 혁신·확장·돌파를 통해 새 틀을 다시 짜는 역사적 대전환의 시기가 될 것이다. 한국의 지방자치는 이제 양적 전환기에서 질적 성숙기로 접어든 전환기에 놓임에 따라 그 이행의 성공여부는 우리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있다. 한국의 지방자치제가 성공적인 대전환의 단초는 주민중심, 지방주도, 현장중시로 주민이 실제로 체감하는 성과를 냄으로써 주민의 신뢰와 지지를 얻는 것이다. 이를 위해 향후의 지방자치는 제도적이고 획일적 분권을 넘어 생활기반 중심의 실질적이고 맞춤형 분권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방이 지역이 처한 여건에 따라 산업·공간·인구정책을 종합적이고 자율적으로 추진하도록 그 권한을 대폭 부여해 줘야 한다. 둘째, 지자체 간 인위적으로 설정된 행정구역 속에서 폐쇄적인 행정을 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지자체 간 광역적 내지 초광역적 연대와 협력을 모색해야 지역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지금은 다양한 협력의 추진이 통합의 선행조건으로 절실한 시점이다. 넷째, 2026년은 열 번째 지방선거와 함께 민선9기가 새로 출범하는 중대한 시기다. 민선9기는 지역자원을 총 동원해서 지역의 문제들을 맞춤형 지역정책과 전략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최적의 혁신적 행정방식과 특화된 산업구조 및 지속가능한 협력모델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2026년의 희망찬 새해부터 국민이 주인인 나라, 국민 모두 행복한 대한민국의 국가비전이 지방자치의 완성을 통해 반드시 실현되기 위해서 국민 모두가 손잡고 힘차게 미래로 달려 나가야 할 것이다. 지방자치가 살아야 지방이 살고, 지방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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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11 19:08

[금요칼럼]선호투표제 내년 지방선거부터 실시하자!

계엄과 탄핵 그리고 대선의 1년이다.한 해에 한 번 있을까 싶은 정치 사건의 연속이었고 그 여파로 민주주의 위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지난 1년은 정치 실패의 가장 나쁜 결과다.정치의 실패는‘갈등 조정 능력의 상실과 소통 단절 그리고 양극화의 극단화’를 말한다.대한민국 공동체 공론장의 완전한 붕괴로 여야는 각자의 에코 챔버(echo chamber)속에서만 목소리를 계속 높인다.여야가 정책 경쟁보다는 진영 논리와 반사이익의 정치에 몰두한다. 1년은“위로부터의 민주주의의 위기”다.‘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들이 민주주의의 후퇴와 역행’을 가져왔기 때문이다.오히려 그들이 민주주의의 규범과 제도를 서서히 약화시키고 결국 파괴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최근“완벽한 민주주의”로 평가 받아온 우리 민주주의의 퇴행이자 최근 전 세계적인 독재화 경향의 한국적 결과다.민주주의는 언제나 위태롭고 그래서 시민의 비판과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다. 정치의 실패는 정당 실패의 산물이다.정당의‘게이트키퍼(문지기) 기능 부전과 당내 민주주의 붕괴 그리고 정책 능력의 상실’등이 정치 실패의 입구이자 필요 조건이다.정당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당이 민주주의 역진을 가속화 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공동체 붕괴는 물론 헌정 위기와 위임 민주주의의 권력 실패’로 이어지는 정치 실패의 출발점이 바로 정당의 실패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정치적 양극화의 주범이자 동시에 수혜자다.이념적 양극화는‘회피와 배제’의 정서적 양극화로 악화됐다.양당의 여론 여과 기능은 사라지고 소수의 강경론이 의사결정을 주도하며 결국 정당은 시민 대표성을 상실한다. 민주당의“1인 1표제”와 국민의힘의 “당심 70% 경선 룰”논란은 정당 회복과 정상화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당원 주권주의’와‘당원 권한 강화’를 각각 명분으로 하지만 속내는 소수의 강성 당심을 더 강조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대표성 약화와 정당성 위협 그리고 중도적 민심 이탈의 우려가 제기되는 까닭이다. 그 끝은 민주당과 국민의힘 양당이 정당 실패를 넘어 좀비 정당이 되는 것이다.좀비 정당은“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질적 기능과 영향력을 상실한 정당”이다.형식적으로는 민주적 절차를 유지하지만 실제로는 시민의 이익을 대표하지 못하며 정책 경쟁력도 상실하여 결국 공동체 통합 기능도 수행하지 못하는 정당이다. 정당이 시민사회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현상은 카르텔 정당으로도 설명된다.민주당과 국민의힘은“적대적 공생의 카르텔”의 극단화된 경우다.양당이 겉으로는 서로 공격하면서도 양당 모두 기존 정치 질서의 유지에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는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라는‘적대적 공존의 카르텔’구조를 유지하게 하는 원동력은 정치자금과 정당법이다.둘 다 입법 사항으로 양당이 결정하고 언제나 만장일치다.양당 전체 정치자금의 절반 이상은 우리가 낸 세금이다.‘중앙당은 수도에 둔다.’는 정당법은 지역 기반 신생 정당의 진입을 원천 차단한다. 정치 복원이 정당 회복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좀비 정당의 적대적 카르텔 구조가 해체되지 않는 한 정당의 정상화는 불가능하다.따라서 정치자금과 정당법으로 지탱되는 양당 독점 카르텔 정치 구조의 핵심인‘단순다수+소선거구제 선거제도’개혁이 결정적이다.국회 구성 자체가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적대적 공존의 양당 카르텔 독점 정치의 반대편은 다당제 정치다.정당이 획득한 득표율만큼 의석으로 전환되는 선거제도를 통해 비레성과 대표성 강화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2024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지역구 득표율 50.6%로 161석(63.4%)을 차지했고 국민의힘은 득표율45.1%로 90석(35.4%)을 얻는다.득표율과 의석률 간의 심각한 괴리다. 이재명 대통령의‘국민 주권주의’가 가장 먼저 적용되어야 할 대목이다.그의 국정과제 개헌 완성도 선거제도 개혁에서 시작해야 성공이 보장된다.‘이재명 진정성’의 시험대다. 내년 6월 3일 지방선거를 치른다.전북 순창군 관련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광역의원 선거제도 개선 필요성과 기초의회 중대선거구제의 특례실시 종료 등 광범하고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한데 국회는 아직 정치개혁특위조차 구성하지 못했다.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은 시도의원 선거구의 광역화를 불가피하게 하고,기초의원 중대선거구 실험은 실패했다남은 대안 중 선호투표제가 합리적이다. 좀비 정당들의 적대적 공존 카르텔 구조의 해체가 정치와 권력 그리고 공동체 성공의 지름길이다.다당제 정치의 실험을 지역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현실적이다.내년 지방선거에서 선호투표제를 시범 실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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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04 19:05

[금요칼럼] 한 편의 시가 품은 인생 서사

인류사는 실패의 여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실패의 여정은 인생 서사라는 외피를 쓰고 나타난다. 실패는 우리 안으로 침잠해서 머물며 우리 의지를 꺾고 부러뜨린다. 우리는 실패에 꺾이지 않을 도리는 없는데, 그건 인간에겐 실패할 시간이 유한하고 실패에겐 시간이 무한으로 주어지는 까닭이다. 인간 대부분은 크고 작은 실패를 겪으며 그것에 길들여진다. 그것에 길들여지며 자연스럽게 스톡홀름 신드롬 같이 실패에 친화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겪어보니, 인생에서 실패란 일상범백사 중 하나다. 우리는 패배를 반복하며 실패로 얼룩진 인생 서사를 빚는다. 우리 실패의 대부분은 예정된 것이지만 실패에서 딱히 배울 건 없다. 실패가 개인에게 상징 자산일 수는 있지만 실패가 스승이란 말은 믿을 수 없는 헛소리다. 지난주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치러진 특별한 북 콘서트에 참여했다. 광화문 글판에 35년간 게시된 아름다운 시편들 중 독자 2만2천500여 명이 최고의 시를 뽑았는데, 졸시(拙詩) ‘대추 한 알’이 선정되었다. 마침 계절이 대추 수확철이라 그런 행운을 잡은 것일까? 문인과 독자 300명이 한데 어우러진 자리에서 기념패와 ‘대추 한 알’이 표지에 실린 기념도서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를 받았다. 애초 시가 실린 ‘붉디붉은 호랑이’(2005, 애지)는 절판된 지 오래이고, 현재 전문은 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난다)에서 볼 수 있다. 급류처럼 흐른 시간 속에서 갈팡질팡 하는 사이 아이들은 제멋대로 자라나서 품 안을 떠났다. 환몽처럼 지나간 시절을 돌아보며, 모란과 작약을 키우듯 자식들을 살뜰하게 키우지 못한 내 처지를 관조한 끝에 탄식을 내뱉을 뿐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빚은 소동이 전 휘몰아치던 어수선한 해를 보낸 그 이듬해 8월 말, 서울살림을 접고 시골로 이사를 단행한다. 내 나이 마흔 중반이었다. 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야트막한 언덕바지에 트럭 백여 대 분량의 마사토를 쌓고 다진 뒤 작은 전원주택을 지었다. 농협 융자금으로 지은 이 집이 인생 후반기의 새로운 사림 터전이 될 터였다. 닷새마다 서는 안성 장마당의 나무시장에 나가 유실수를 사다 주변에 꾸역꾸역 심었다. 나는 실패에 꺾인 채 변방으로 밀려난 방외인, 실패의 하염없는 부역자이자 패배자에 지나지 않는다. 한동안 그런 궁색한 처지에서 유실수를 구해다 심는 마음에는 인생 서사를 새로 쓰려는 열망 한 줌이 있었음을 숨기고 싶지는 않다. 적적한 시골 살이에 그럭저럭 적응하며 노자와 장자를 끼고 살며 심경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느꼈다. 그 변화의 중심에 굳이 이기려고 들지 않는 한결 어질고 유순해진 마음이 있었다. 마음은 담담하게 슬퍼할뿐, 언제든 나를 이기려 드는 것들에게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랬더니 내 삶에 번잡과 소동이 줄고 나중엔 놀랄 만큼 주변이 고요해졌다. ‘저게 저절로 붉어 질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저게 저 혼자 둥굴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저 안에 땡볕 두어 달/저 안에 초승달 몇 낱’.(졸시 ‘대추 한 알’ 전문) 몇 해 지나 감나무, 배나무, 복숭아나무, 앵두나무, 대추나무, 보리수 따위 유실수에 드문드문 열매가 달렸다. 그건 자연이 만드는 찬란한 마술 같았다. 2003년 가을 어느 날 대추나무에 매달린 붉고 둥글게 익은 열매 일곱 여덟 알을 눈으로 헤아리며 찰나에 스친 이미지와 감동을 붙잡아 시에 담았다. 시는 찰나에 오는 것을 포획한다. 시는 내 상상력이 빚은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운 좋게 붙잡을 따름이다. 고작 여덟 줄 시가 세상에 나아가 이토록 오래 읽힐 줄은 감히 예측하지 못 했다. 스물 몇 해가 지나 다시 읽으니, 이 시에는 내 인생 편력과 견딤의 세월이 남긴 오롯한 진실 몇 개가 들어 있다. 부러진 뼈가 살갗을 꿰뚫고 불거져 나오듯이 진실은 숨길 수가 없다. 나는 늦된 사람이라 이 깨침도 아주 늦게 도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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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27 17:57

[금요칼럼] 이 가을의 끝자락

아침에 안개가 마을에 가득하다. 가을 아침 안개가 짙은 날이면 그날 날씨는 좋다. 햇살이 맑고 강하고 바람이 좋아 회관 마당에 가을 곡식 널기 좋은 날이다. 아침 산책은 마을만 한 바퀴 돌기로 한다. 마을 위쪽 길로 걸었다. 집 앞 텃밭에 큰 집 형수가 서리태를 털고 있다. 콩대를 걷어 높이 쌓아 놓고 콩을 털고 있어서 형수님은 보이지 않고, 콩대 두드리는 소리가 타닥타닥 들렸다. 콩대 너머로 머리만 보인다. 종길이 아재 네 집 마당에 불이 켜져 있다. 딸이 와서 어제부터 조금 이른 김장을 하고 있다. 이른 아침인데 사람 말소리가 집안에서 들린다. 마을에 사람 말소리가, 그것도 젊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마을 어딘가에서 들리면 반갑다. 종길이 아재 집 앞을 지나 강변 차도로 내려갔다. 안개 때문에 마을 앞 강 건너 복두 농막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선가 오리들이 소리를 꽥꽥 소리가 들린다. 오리들은 새벽에 일어나 먹이를 찾는다. 징검다리 쪽에서 희미하게 오리들의 모습이 보인다. 올해 마을 앞 강에 오리들이 80여 마리가 날아와 마을 앞 강물을 활기차고 또 평화롭다. 머리를 강물 속에 집어넣고 궁둥이를 하늘로 쳐들고 빨간 발과 짧은 꽁지로 허공 속을 버둥거리며 먹이를 찾는다. 오리들의 부리는 갈수록 험하게 금이 가고 헐어간다. 오리가 모여 먹이를 찾는 그 부근에는 학이 두어 마리가 고개를 쑥 빼고 돌멩이 위에 앉아 있다. 오리들이 주둥이로 물속 자갈들을 뒤적여 다슬기와 고기를 잡을 때, 도망가는 고기들을 노린다. 그 부근에 물총새도 학과 오리에 쫓기는 물고기들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마을 앞 강변엔 강둑공사가 한창이다. 공사판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 인부들이 하얀 헬멧을 쓰고 모여 서서 무슨 구호를 크게 외친다. 아침마다 보는 풍경이다. 인부들의 안전한 하루의 일과를 다짐하는 구호일 것이다. 마을 끝 강 건너에는 점순 부부가 살고 희수 부부가 농막을 짓고 이따금 내려온다. 다시 마을 길로 들어섰다. 양식이는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전주 누나네 식당으로 출근한다. 양식이 집을 지나 빈집 하나를 만난다. 올해 이 집에 사는 현선이가 생을 마감하였다. 아들이 죽자, 어머니는 딸네 집으로 가서 집이 비었다. 떨어진 은행잎이 마당에 노랗다. 현선이네 집을 지난다. 바로 종우네 집이다. 종우는 서울에서 살다가 올해 귀향했다. 마을 뒤 산 넘어 산을 개간하였다. 종우네 집 앞에 경기네 집이다. 경기도 올해 귀촌했다. 처가 땅에 집을 짓고 부부가 산다. 부지런한 부부는 온갖 과수와 채소를 텃밭에 가꾼다. 종우와 경기 부부는 마을의 활력이 되어 가고 있다. 이따금 경기네 집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이 보이고 큰 소리로 웃는 소리가 마을을 살린다. 마을 사람들 모두 좋아한다. 경기네 집 지나면 종호네 집이다. 빈집 마당에 마른 풀들이 키가 넘게 자라서 말라 쓰러졌다. 한 집 건너 주성이 엄마가 혼자 살다 몸이 아파 병원 가셨다. 아마 집으로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것 같아 마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회관 마당이다. 모든 곡식을 마무리한 회관 마당은 이제 서리태만 남았다. 작은 마을이어서 많은 농사는 짓지 않았지만 그래도 곡식은 종류별로 모두 이 마당에서 마무리되어 더러 팔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회관을 지나면 우리 집안의 큰집이다. 형수님 혼자 사시다가 딸과 사위가 집을 고쳐 들어와 산다. 도시에서 일을 하고 머물기도 하지만, 거의 이 집에 와서 산다. 우리 마을 사람이 되어 간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집으로 돌아왔다. 내게 하루의 시작은 이렇게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시작된다. 우리 마을 사람들의 하루하루 일상은 이웃 마을이나 고을이나 나라에 해가 되고 나라를 어지럽힐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칠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제는 마을 노인회에서 순창으로 자장면을 먹으러 갔었다. 지난 1년 동안 살아 온 노고가 따듯하게 위로 되었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한 마을의 가장 큰 큰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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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20 19:00

[금요칼럼] 자치경찰제의 성공은 경찰의 의지와 선택에 달려

“현 경찰조직은 국가경찰, 수사경찰, 자치경찰 삼원화 체제다. 그런데 분리만 됐을 뿐 실질화하지는 못했다. 경찰법상 명시된 지휘·감독권을 경찰 스스로 행사하지 못하는 형편이어서 자치경찰사무는 있지만, 자치경찰은 없다. 현 자치경잘제는 국민의 안전과 치안만족고 제고를 위해 반드시 재설계되어야 한다.” 지난 10월 27일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자치경찰제 전면시행을 촉구하는 정책세미나에서 전문가들이 내놓은 주장이다. 이 날, 전국 18개 시도자치경찰위원장협의회에서는 이재명 정부의 자치경찰제 실질화 이행을 강력 촉구하는 공동 건의문도 채택했다. 이재명 정부가 123대 국정과제를 확정하면서 경찰의 중립성 확보와 민주적 통제 강화를 위한 실행과제로 자치경찰제 시범 실시 후, 전면 시행을 제시했기 때문에 큰 기대 속에 나온 결과다. 지난 2006년부터 제주도를 대상으로 자치경찰제를 시범 실시한지도 곧 10년이 된다. 2021년 7월 1일부터 자치경찰제가 전국적으로 시행된 지도 벌써 4년이 지나고 있다. 하지만, 제도의 정착은 요원할 뿐더러 여전히 국가경찰 중심의 일원형 제도, 국가경찰과 자치경찰 간의 불균형적인 권한배분, 많은 경찰관들의 제도운영 의지와 역량 등에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자치경찰제란 지방분권의 이념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에 경찰권을 부여하고 경찰의 설치·유지·운영에 관한 책임을 지방자치단체가 담당케 하는 제도다. 이론적으로 볼 때, 자치경찰제가 제대로 정착되면 지역주민들에게 맞춤형 그리고 지역밀착형 치안서비스 제공이 가능해짐으로써 친근한 경찰상이 확립되고 지역치안에 대한 주민만족도가 향상된다. 또한, 자치단체의 종합행정성이 제고되고, 치안역량이 대폭 강화되기 때문에 지방자치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과 신뢰가 높아질 것이라는 순기능이 있다. 그렇다면 경찰자치제가 실시된 지 4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그 기대가 어느 정도 충족되었을까. 자치경찰제의 실시가 전혀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서울시 등 여러 곳의 자치경찰위가 추진한 어린이 안전 지킴이, 시니어 방범대, 반려견 순찰대 등 지역주민이 치안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모델이 전국에 확산됨으로써 호의적인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지난 기간 자치경찰제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국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온 국민들을 참담하게 만든 2022년 10월의 이태원 사고와 2023년 7월 오송 지하차도 참사 사고, 같은 해 4월 국민들의 가슴을 시리게 만든 배승아 양 음주운전 사망 사고 등을 통해 국민들은 자치경찰제 시행 이후에 발생한 각종 안전·재난 관련 사고들에서 경찰의 달라진 모습을 피부로 체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안전과 각 지역의 재난사고에 책임이 모두 경찰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자치경찰제가 본 취지에 맞게 제대로 작동되는 동시에 지방행정, 소방행정, 교육청 등의 관련 부처들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야만 철저한 예방과 신속한 구조 및 사후복구가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자치경찰제에 대한 개혁의 에너지가 충만한 지금, 이 개혁을 또 미루면 권력의 충견이라는 오명을 떨쳐내지 못한 채, 경찰은 국민의 품속에서 자리잡을 수가 없을 것이다. 경찰들도 자치경찰제를 통해 권력의 족쇄에서 벗어나 지역안전과 치안수요에 적극 부응하는 새 경찰상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국민과 지역주민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회복해 가야 한다. 자치경찰제의 성공은 전적으로 경찰의 의지와 선택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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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13 18:29

[금요칼럼]선호투표제가 대안이다

내년 지방선거 광역의원 선거제도의 변화가 불가피하다.지난달 헌법재판소의 광역의원 선거구 획정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 때문이다.‘표의 등가성 실현’이 쟁점으로 “하나의 자치구 시·군에 최소 1명 이상의 시·도 의원을 보장하는 취지보다 지방의회 의원의 지역 대표성을 고려할 필요가 더 크다.”는 의미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헌재가 헌법불합치로 판단한 ‘인구편차의 상하 50% 기준’에 해당된 전북 장수군과 같은 경우가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우리나라의 급격한 고령화와 인구감소의 지방소멸이 가져온 결과다. 전북 장수군 인구는 2만 명을 약간 넘는다.올해 기준으로 인구 5만 이하의 자치구는 전국에 50곳 이상으로 알려진다.인천과 부산에도 각각 1개씩 있고 특히 군 단위 지역이 심각하다.‘전남 11개 강원도 10개 경북과 경남 각각 8개 전북 7개 충북 6개 충남 4개’다. 현재의 ‘단순다수+소선거구의 광역의원 선거제도는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갖는다.대량의 사표가 불가피 하며 지역 대표성과 표의 등가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전자는 선거제도의 구조적 문제이고 후자는 한국적 특수성이다. “24%만 득표해도 당선되는 선거”라고 불릴 정도로 광역의원 당선자의 60% 이상이 과반 미만의 득표로 당선된다고 한다.평균적으로 45%~55%의 유권자 의사가 의석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셈이다.정당 득표율과 의석률의 왜곡은 물론 비례성과 대표성의 위기이기도 하다. 국회는 내년 2월까지 제도개혁을 완성해야 한다.다양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국회 계류 중인데 .“지역정당,중대선거구제,결선투표제와 선호투표제,전국통일기호제 페지”등이 대표적이다. 선거제도로 좁혀보면 중대선거구제는 실패 가능성이 높다.2022년 기초의회의 중대선거구제 실험 결과 때문이다.전국 30개 지역구의 기초의원 중대선거구 당선자 109명 중 소수정당 후보는 4%에 불과하고 96%는 거대양당이 독점했다. 결국 선거구의 크기를 단순히 늘리는 것은 근본적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따라서 유권자의 투표 방식 자체의 변경을 고려해야 할 시점이다. “정치의 가장 위대한 발견”으로 불리는 선호투표제가 가장 현실적 대안이다.소선거구제의 고질적 문제와 지역소멸의 한국적 특수성 그리고 중대선거구제의 거대양당 독점 등을 동시에 (막거나) 최소화할 수 있는 1타 3피의 선거제도가 선호투표제다. 선호투표제는 “유권자가 후보자들에게 순위를 매겨 한 번만 투표 하고,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최저 득표자를 탈락시키며 표를 재분배해 결국 가장 많은 선호를 받은 후보를 뽑는 방식”이다.‘소수의 존재와 목소리가 다수결의 폭정에 의해 억압받는 다수결의 역설과 비례성+대표성 위기의 동시해결’을 위한 오랜 노력의 결과가 선호투표제다. 선호투표제의 ‘과반수 당선자의 비례성과 대표성 확보와 사표의 최소화’는 다양한 정치적 효과를 동반한다.일반적으로 선호투표제는 네가티브 경쟁의 완화와 중도 지향형 캠페인을 유도하며 정치적 다양성의 확대를 기대한다. 호주는 1918년부터 선호투표제를 사용한 최초의 국가이고 아일랜드도 1921년부터 시행 중이다.두 나라의 공통된 효과는 선호투표제가 거대정당들로 하여금 새로운 사회적 의제에 주목하고 중도 통합적 요구에 더 민감하도록 유도하는 ‘완화 장치’로 기능했다는 점이다. 2021년 첫 선호투표제 선거의 뉴욕시 의회는 여성의원 수가 과반을 넘었고 유색인종 후보가 2/3이상 당선되어 ‘역사상 가장 다양한 의회 구성’으로 평가된다.이번 주 실시된 2025년 선거에서도 역대급 투표참여를 기록한다. 선호투표제는 한국 민주주의의 심화와 발전을 위한 제도개혁의 핵심으로 주목된다.선거제도 개혁의 가장 중요한 목적-‘비례성과 대표성의 강화’-에 가장 잘 부응하는 선거제도다.다당제 실현과 사표의 최소화 그리고 지방의회의 다양성 증진이 가능하다. 이재명 대통령과 여당의 역할과 책임이 결정적이다.한국 민주주의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치 리더십의 역할이다.이 대통령의 ‘국민주권주의’와 정 대표의 ‘당원주권주의’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시험대다.우리는 이 대통령의 “표의 등가성이 보장되는 선거제 개혁”의 실현을 기대한다. 민주당은 2002년 대선후보경선에서 우리나라 정당사상 처음으로 선호투표제를 실시한 경험이 있다.2024년 6월 당헌·당규 개정은 내년 지방선거부터 선호투표제 또는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기로 했다.‘(즉시) 결선투표’는 선호투표제의 다른 이름이다. 뉴욕시의 선호투표제는 2009년부터 시작된 논의와 준비로 12년 만에 마무리 된다.기존과 다른 투개표방식을 필요로 하고 점진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이 시민의 압도적 지지와 성공을 이끌어낸다는 게 경험의 결과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선호투표제의 시범실시가 필요한 이유다.선호투표제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한 종합적 정치개혁의 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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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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