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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아무 일없이 지낸 보통의 하루

며칠 전 서울역에서 케이트엑스 열차를 기다리다가 역내에서 먹잇감을 찾는 연회색 비둘기 두 마리를 보았다. 한 남자가 빵 부스러기를 던지자 비둘기 두 마리가 푸드덕거리며 달려든다. 빵 부스러기를 쪼아 먹은 비둘기들은 다른 먹잇감이 없나 하고 두리번거린다. 비둘기가 몸집이 아무리 작아도 빵 부스러기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역 구내를 영역으로 삼은 비둘기 두 마리를 바라보며 먹고 사는 일의 고달픔에 생각이 미친다. 한강변에서 비둘기 떼에게 먹이를 주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했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었다고 나를 호통을 친 이들은 한강변의 낚싯꾼들이다. 그들은 비둘기가 낚싯줄을 엉키게 한다고 짜증을 내며 항의를 했다. 천적이 없는 탓에 개체 수가 부쩍 증가한 비둘기들은 현대도시의 골칫거리다. 사람들이 비둘기를 혐오 동물로 낙인찍힌 지 오래다. 어디에서나 미움을 받는 비둘기의 처지는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비둘기에게 밀려난 자의 슬픔이란 감정을 헤아릴 만한 사리분별이 있을 거라고 믿지는 않는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경고를 들을 때 난감해진다. 이내 비둘기를 도시로 불러들인 장본인은 사람들이 아닌가 라고, 나는 의구심을 품은 채 반문한다. 비둘기가 굶어 죽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닌가? 영문도 모른 채 찍힌 혐오 낙인과 가혹한 처우에 동의하지 않지만 내게는 비둘기와 사람이 공존할 방안을 내놓을 지혜가 없다. 지혜가 모자란 나는 자주 시집을 읽는다. 시집에서 뜻밖의 지혜를 발견할 수가 있는 까닭이다. 칠레 남부에서 태어난 시인 니카르노 파라의 시집에서 “각각의 새는 진정 날아다니는 묘지다”란 싯구가 기억에 남는다. 새들이 공중의 묘지라면 사람은 걷는 묘지라고 할 테다. 한 번 태어난 새는 죽고, 피어난 꽃들은 시든다. 시집을 읽으며 사람이 근심과 갈애의 총애를 받는 존재라면 장미꽃들은 미와 덧없는 시듦의 총애를 받는 존재라는 기특한 생각을 떠올린다. 오늘의 하늘은 청명했다. 김밥 한 줄을 싸들고 공원이라도 가고 싶었으나 치과 예약이 있어서 포기했다. 치과에 가서 치석을 제거하고, 손님 없는 동네 카페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다가 돌아온다. 휴대폰 기종을 새로 바꾸고, 실손 보험을 들라는 권유를 받아들였다. 내일이란 미지의 사건과 사고를 품은 심연이다. 아침에 출근한 사람이 저녁에 주검으로 돌아온다. 현대 세계의 악덕 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뜻밖의 사태가 우리를 당혹하게 만든다. 이런 변고에 대응을 해야 하는 까닭에 보험업이 그토록 번창하는 것이다. 가을빛은 유순하고, 햇볕은 따사롭다. 동네 느티나무의 단풍 든 잎은 며칠 전까지 노랗다가 지금은 온통 주황색이다. 가을이 깊어진 게 실감난다. 오늘은 별 일이 없던 보통의 하루다. 그 하루를 보내며 딸들은 빨리 자라고 우리는 늙는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딸은 태평양 건너 먼 곳에 가 있고, 나는 가을이면 억새와 산국이 피는 한국에 산다. “인간의 삶이란 먼 곳의 몸짓”(니카르노 파라)이라면 누구의 삶도 그저 먼 곳의 몸짓에 지나지 않으리라. 어제나 오늘의 삶이란 다만 먼 곳에의 몸짓일 뿐이다. 비둘기는 구박덩어리인 채로 도심 공원이나 역 근처를 떠돌며 먹이를 구하는데 여념이 없을 테다. 활엽수의 낙엽은 비처럼 쏟아진다. 고개를 들면 기러기 떼는 먼 하늘에서 끼룩끼룩 울며 나는데, 가을의 공기에서는 군밤 냄새가 떠돈다. 누군가 코를 킁킁거리며 그 냄새를 맡는다. 우리는 숭고함도 비범함도 없는 보통의 날들을 보내며 새로운 내일을 맞는다. 쇠락, 재와 무, 묘비명을 남길 내일을 앞두고, 아, 오늘은 기쁨도 고통도 없는 하루를 보냈구나, 한다. 나는 비염이 도져 재채기를 몇 번 했을 뿐 가을은 덧없음으로 왔다가 조용히 사라진다. 당신은 잘 있는가? 어디에 있든 부디 잘 사시라. 심심하게 보낸 가을의 하루를 먼 옛날인 듯 아득하게 돌아보며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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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30 18:21

[금요칼럼] 징검다리.1

내가 태어난 마을은 아주 작은 마을이다. 마을 앞과 뒤와 옆은 산으로 삥 둘러싸여 있고 그 좁은 계곡 사이로 어여쁜 강물이 흘러와서 흘러간다. 강물 속에는 크고 작은 바위와 돌들이 놓여 있고, 어른 키를 넘는 깊은 물과 아이들의 무릎도 넘지 않은 깊이의 물이 있다. 그 강물 속에는 물고기가 산다. 새우, 피라미, 임실 각시붕어, 쉬리, 은어, 붕어, 쏘가리, 메기, 뱀장어, 물 종개, 돌고기, 꺽지, 동사리, 피리, 자라, 잉어, 누치, 참마자, 모래무지, 조개, 다슬기, 징검이라고 하는 앞 발이 길고 몸이 큰 강물 새우, 물 새우, 모래밭에 사는 내장이 보이는 흰 모래색 새우, 참게 그리고 작은 물벌레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기들이 봄여름 가을 겨울 강물 속에서 살아간다. 강물로 눈이 오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아침 햇살이 부서지고 나비가 날고 초승달과 상현달과 보름달이 강을 건너며 달빛이 부서져 흘러간다. 별빛이 강물에 찰랑거리고 해지면 물고기들은 물을 차고 힘차게 뛰어올라 벌레들을 차 간다. 그 강에 강물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징검다리는 마을의 중간에 놓여 있었다. 마을이 길어서 ‘긴 뫼’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한쪽 마을 끝 윤환이네 집과 다른 한쪽 끝 한수 형님에 집, 중간에 징검다리가 놓여 있어서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어서 마을 인심의 큰 균형을 잡고 있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앞산이고 산은 7부 능선까지 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70도가 넘는 경사진 밭이 대부분이다. 징검다리는 우리 마을의 유일한 축조물이었다. 달뜨면 징검다리에서 부서진 강물이 가장 반짝였다. 봄여름 가을 겨울 강물을 건너가고 건너오는 마을 사람들과 마을은 시정이 넘치는 풍경이었다. 징검다리는 봄이 되어 소들이 강을 건너고 여름이면 징검다리가 물에 잠겨 사람들이 발을 강물에 적시며 강물을 건넜다. 가을이면 강 건너 밭에서 거둔 곡식을 가져 날랐다. 붉은 감을 인 어머니들, 고추를 망태 가득 담아 짊어진 아이들, 겨울이면 동네 사람들은 징검다리 위로 섶다리를 놓았다. 징검다리가 잠긴 채 물이 얼기 때문이었고, 겨울에는 비가 오지 않아 섶다리가 온전하게 봄을 맞이했다. 사람들이 나무를 해 짊어지고 섶다리를 건너다녔다. 봄이 되어 많은 비가 내리면 섶다리는 떠내려가버렸다. 사람들은 서운해 하지 않았다. 가을이 오면 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섶다리를 놓으면 되니까. 한겨울 강바람 몰아치고 강물이 얼면 어머니들은 얼음을 깨고 흘러가는 강물에 빨래를 했다. 강바람을 타고 마을로 실려 오는 어머니들의 빨래를 두드리는 방망이 소리는 춥고, 또 춥고, 또 추웠다. 하얗게 언 강, 지금도 징검돌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빨래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은 내게 그림처럼 박혀 있다. 산을 때리던 빨래 두드리는 방망이 소리와 함께 말이다. 다시 봄이 오면 아이들이 징검다리에서 고기를 낚았다. 고기를 낡은 낚싯대를 빙빙 돌리면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낚싯줄 끝의 물고기들, 그 아름다운 빛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내 가슴 어딘가를 찔러주던 그 빛. 나는 언제쯤 그 징검다리에 나갔을까. 어머니의 배 속에 들어앉은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어머니 배속에서 나와 처음 어머니 등에 업혀 징검다리에 나갔을 때 나는 무엇을 보았을까. 아침이었을까. 해 저물 때였을까. 내가 가을에 태어났으니, 아마 늦가을 어느 때였는지 모른다. 어머니가 빨래를 했는지, 배추를 씻었는지는 모른다. 나는 어머니 등 너머로 흘러오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듬해 봄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나를 업고 징검돌 위에 앉아 빨래를 할 때 내 발이 강물에 닿았을 것이다. 아! 그때 나는 어땠을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내가 더 자라자, 어머니는 나를 자기 옆에 있는 넓적한 바위 위에 눕혀놓고 빨래를 했을 것이다. 내가 더 자라 앉을 줄 알게 될 때쯤 어머니는 나를 자기 옆 얕은 강물에 앉혀놓고 볼일을 보았을 것이다. 벌거벗은 어여쁜 내 몸을 강물이 감고 돌았겠지. 내 몸 주위로 작은 고기들이 다가와 내가 손을 뻗어 잡으려 하면 고기들이 도망을 갔다가 또 돌아와 살을 콕콕 쪼았겠지. 내가 손을 휘저어 물을 치면 물방울들이 눈부시게 튀어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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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23 17:38

[금요칼럼] 지방자치를 헌법에 보장해야 주민주권시대 열려

한국의 지방자치가 부활한지 올해가 30주년이다. 그동안 지방자치제는 중앙정치의 혼란과 불안을 최소화시키는 제도적 장치로서 지방정국의 안정을 통해 평화적 정권교체와 민주체제를 지키는 버팀목이 됐다. 그러나 지난 30년 지방자치가 제기한 낭비와 비능률, 권한과 책임의 불일치, 부작용과 폐해는 지방자치의 무용론과 축소론까지 불거질 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여기에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따라서, 지방자치의 제도와 시스템이 올바른 길을 찾도록 전면적인 자치개혁이 필요하다. 지방자치의 기본원리는 독립성과 자율성이지만 주워지는 권한만큼 책임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권한과 책임의 주체는 일원화돼야 한다. 이 원리는 자치경찰제와 교육자치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끔찍했던 이태원 참사와 청주 오송지하도 참사, 경북 산불을 비롯한 재해·재난사고, 그리고 묻지마 폭력·살인사건으로 지역안전과 치안이 구멍난 것도 자치경찰제도의 결함이 큰 원인 중 하나다. 잇따른 교사폭행과 자살로 학교교실이 붕괴 위기를 맞은 근본 원인에도 교육감 직선제를 비롯한 교육자치제도결함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지방행정, 지역치안과 소방 및 지방교육이 지방자치의 큰 틀 속에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지 못한 채 그 권한과 책임이 제각기 분산돼 있으니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결국, 지역의 문제를 지방자치제가 지방중심, 주민중심, 현장중시로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지방자치에 대한 주민들의 무관심과 부정적 인식의 주 요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방자치의 근간을 흔드는 뿌리깊은 중앙집권의 유혹을 뿌리치고 지방분권적 국가운영의 틀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현행 헌법을 대폭 개정해서 지방에 자율성을 대폭 부여하되 그 책임성을 일원화시키는 개혁이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에 필수적인 전제가 헌법개정이다. 헌법은 국가의 모든 구성원이 따라야 하는 국가공동체의 강제적인 최고가치 규범이다. 때문에 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을 개정해야 하위 법령 등의 개혁과 개정이 가능해 진다. 현행 헌법상 지방자치 조문은 제117조와 제118조 단 두 조문으로 중앙집권적 분산체제라는 과도기적 행태만을 보장할 뿐, 주민주권시대에 걸맞는 지방자치를 실시하는데에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더욱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아닌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라는 중앙종속적인 용어의 사용으로 중앙과 지방 간의 관계는 태생적으로 왜곡돼 있기 때문에 헌법개정 시 지방자치단체는 지방정부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획일적 지방자치제도를 지양하고, 지역특색에 맞는 다양한 지방자치제도를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헌법을 개정해서 자치입법권, 자치조직권, 자치행정권, 자치재정권의 4대 자치권을 반드시 보장해야 한다. 그 밖에도 지방자치단체의 종류, 기관구성 형태의 선택권, 특별지방자치단체 설치 시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구역변경 시 주민의견 청취, 중앙과 지방 간 사무처리 원칙, 지방의회의 권한 그리고 주민의 위상과 참여 등이 헌법에 명시돼야 한다. 그래야만 주민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들에게 관련된 지역의 공동문제에 관해 주민의 자주관리가 존중되는 풀뿌리 지방민주주의가 확실하게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기로에 선 한국지방자치가 바른길을 가기 위해서 지방자치의 정신과 권한을 헌법적으로 보장해 줘야 한다. 대한민국이 주민주권시대 민주주의의 발전과 국가와 지역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성숙한 지방자치가 전제돼야 하고, 이를 위한 첫 단추가 헌법개정이다. 따라서, 헌법개정을 위한 충분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위해 정치권과 지방4단체 그리고 전문가들과 언론이 앞장서야 할 중대한 시점에 서있다. 지금이 헌법을 개정할 절호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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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16 18:45

[금요칼럼] 기러기 찬서리 묻은 발가락 배에 붙이고 날 때

가을이 온다는 것은 잃었던 식욕이 돌아온다는 뜻이다. 만산홍엽 다 진 뒤 잿빛이 덮은 산과 들에 찬 서리 내릴 때 잠잠하던 식욕이 폭발한다. 외할머니나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 해준 온갖 음식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도 이맘때다. 아쉬운 건 두 분 음식을 더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먹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는다. 뭔가를 먹을 때 미각의 쾌락을 경험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사는 게 따분하다면 먹는 걸 좋아하지 않을 사람일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믿는다. 동네 상가에 단골 작은 반찬가게가 있다. 세탁소와 피자집과 빵집 사이에 ‘작은 부엌’이란 반찬가게가 끼여 있다. 문을 열면 이런저런 반찬이 투명한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환한 불빛 아래 가지런히 진열된 반찬들은 정갈하고 먹음직스럽다. 예순 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반찬가게를 꾸리는데, 이 아주머니의 손맛이 좋다는 소문이 나서 장사가 잘 되는 편이다. 나는 아주머니 손맛뿐만 아니라 좋은 재료를 쓰고 손님에게 항상 친절한 덕분일 거라고 짐작한다. 정월 보름엔 오곡밥을, 동지엔 동지팥죽을 ‘작은 부엌’에서 사다 먹는다. 여름엔 오이냉국을, 가을엔 아욱국을 사다 먹고, 추석엔 갈비찜, 송편, 잡채, 대구전 따위를 먹는다. 명절 때마다 ‘작은 부엌’에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 까닭은 시간과 수고를 절약할 뿐만 아니라 집에서 만든 음식보다 맛도 좋기 때문이다. ‘작은 부엌’에서 만드는 반찬 가짓수가 많지만 그 중 가장 좋아하는 건 고등어 김치찜이다. 김장김치와 고등어를 함께 푹 익혀낸 찜 요리다. 단맛이 배인 가을무도 넓적하게 썰어 넣고 중불에서 익히는데, 무가 물렁해질 때까지 졸여야 간이 골고루 밴다. 김치와 고등어의 조화도 기막히지만 달착지근한 가을무를 씹는 식감도 고등어 김치찜의 풍미를 더한다. 맨밥에는 열 반찬보다 고등어 김치찜 하나면 족하다. 딱히 반찬이 마땅치 않으면 아내에게 연락해 “들어올 때 ‘작은 부엌’에서 고등어 김치찜을 부탁해!”라고 이른다. 뭘 먹고 싶다는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는 아내는 고등어 김치찜을 내려놓으며 “이게 그렇게 맛있어? 자주 먹어도 안 질려?”라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고등어 김치찜을 고급 음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등어 김치찜은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비싸지 않으니 서민 음식이라고 할 만하다. 이것은 누구나 큰 부담없이 먹을 만한 음식이다. 묵은 김치의 신 맛과 고등어의 무미한 맛은 합이 좋다. 이 음식의 베이스는 김치의 숙성된 맛이다. 김치가 맛없다면 고등어 김치찜이 맛있을 수 없다. 고등어 살은 수분이 적어 퍽퍽한 식감이다. 이 퍽퍽함을 김치의 신맛이 감싸며 어느 정도는 중화시키는 것이다. 고등어 김치찜이 맛있는 건 땅과 바다에서 나온 재료 궁합의 덕이다. 묵은 김치와 큰 멸치 한 줌을 군용깡통 속 돼지 굳은기름, 즉 돈지(豚脂, 월남에 파병된 장병들이 돌아올며 가져온 것이라 했다)를 수저로 듬뿍 떠 넣고 푹 익혀낸 음식과 어른이 되어 먹은 고등어 김치찜 맛이 겹쳐진다. 돼지기름이 녹아 배어 들어 고소하고 신 김치 맛이 얼마나 혀에 감칠 맛나게 달라붙던지! 고등어 김치찜은 밥도둑이다. 미뢰를 자극하는 김치의 깊은 신맛에 이끌려 연신 수저질을 하다보면 밥 한 공기사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임진강 너머 북쪽에서 기러기 떼 찬서리 묻은 발가락 배에 붙이고 날아온다. 가을비 그친 대기는 파랗고 은행나무 아래 길바닥엔 노란 은행잎이 수북하게 쌓였다. ‘작은 부엌’ 아주머니의 고등어 김치찜을 먹을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며 혀 밑에 단침이 괸다. 이것의 맛을 굳이 말하자면 늦가을의 맛이고, 세월의 더께가 만든 맛이다. 분명 어른이 좋아할 만한 맛이다. 어른이란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웬만큼은 겪은 사람들이 아닐까. 따라서 어른의 맛이란 산 세월이 짧으면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긴 세월의 맛일 테다. 날이 쌀쌀해지는 늦가을, 고등어 김치찜을 먹고 나서는 작년보다 더 선량한 사람이 될 것을 조용히 다짐한다.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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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9 18:05

[금요칼럼] 나의 ‘오늘’ 아침

4시 넘어 깼다. 누워서 잠든 몸을 깨우는 가벼운 운동을 한다. 일어나 인터넷을 켜고 신문들을 검색한다. 나는 인터뷰 기사를 좋아한다. 신문들의 기획 기사들은 AI에 대한 특집이 많다. 그림 전시 기사들과 그림에 이야기들도 많다. 정치 기사를 외면하지 않는다. 연예 기사를 읽는다. 어떤 영화가 만들어지는지 검색해서 예고편을 본다. 넷플릭스. 디즈니랜드, 티빙에서 어떤 시리즈물이 만들어지는지를 검색한다. ‘케데헌’에 대한 기사들을 챙긴다. 축구 기사를 찾아 명장면 영상을 본다. 마지막으로 우리 지역에서 나오는 신문을 꼼꼼하게 본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들어가 새로 나온 책들을 둘러보고 사야 할 책들을 사진 찍어 둔다. 요즘은 물리(物理) 분야와 철학 쪽의 책으로 눈길이 간다. 새로 나온 시집들은 검색해서 리뷰를 통해 새 시집들의 시 몇 편을 읽는다. 새 시집들의 리뷰는 시인의 말과 시집 속의 시 몇 편을 소개해 주어서 좋다. 번역 시집들을 리뷰도 꼼꼼하게 읽는다. 그러면서 사야 할지 소개된 시만 읽어도 될지를 결정한다. 모든 시 앞에 나는 설렌다. 책 순례가 끝나면 어제의 일기를 아침에 쓴다. 일기는 생각을 쓰기보다 세세한 일상을 쓴다. 자잘한 이야기들 속에 내 삶의 현장이 날카롭게 나타난다. 일기 쓰기가 끝나면 잠이 깨어 뒤척일 때 생각났던 내 일상의 첫 문장을 써 모은다. 이제 그동안 써 놓은 내 시를 읽고 손 볼 차례다. 나는 새로 낼 두 권의 시집을 늘 보관한다. 내년에 낼 시집은 2년 전부터 써 놓은 시들이다. 2년 정도 두고 익혀 가며 새 시집을 집중적으로 가다듬는다. 세계가 급변한다. 현실은 냉혹하다. 내가 써 놓은 시를 보기 전에 반듯이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읽고, 새로 나온 시집들을 읽고 내시를 보는 것이다. 견주어 보는 건 아니다. 세계를 내 시에 모은다. 나는 인터넷 신문을 아홉 개 정도 검색하는데, 어느 특정의 신문만 보지 않는다. 5시 반 넘으면 새들이 운다. 새들의 울음을 듣고 나는 우리 마을 새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해 낸다. 나는 그 새들의 태도와 자세와 표정을 안다. 파랑새는 늦은 봄, 우리 마을에 나타나 까치 집을 빼앗아 알을 낳고 새끼를 길러 간다. 꾀꼬리는 아름다운 몸을 가진 새다. 봄에 오면 새잎 핀 우리 집 뒷산에서 짝을 짖는 사랑놀이를 한다. 온갖 아양과 아첨을 떨어 가며 아름다운 비행 쇼를 선보인다. 솟구치고 곤두박질치다 밤나무 가지에 내려앉아 머리를 맞대고 부빈다. 그리고 둘이 집을 짓는다. 꾀꼬리들은 이렇게 운다. ‘덕치 조 서방 3년 묵은(먹은) 술값 내놔“ 옛날에 덕치면( 덕치면은 내가 사는 면이다)에 조 서방이 살았단다. 덕치면에는 술집에 많았다. 전주 객사에서 잠을 잔 관리들이 자기 부임지를 갈 때 임실군 강진면 갈담에서 잤다. 갈담에는 관리들이 자는 객사가 있었다. 갈담에서 순창을 가는 길은 번잡한 길목이었다. 덕치면에 ’중원리‘ 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는 엄청난 술집이 있었다. 중원은 일반인들이 잠자는 ’객잔‘이었다. 그래서 ’중원‘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 많은 술집 중에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3년이나 술을 외상으로 먹다가 옆집에 어떤 여인이 술집을 개업하자 그 술집을 옮겨버렸다. 배신당한 여인이 죽어 꾀꼬리가 되어’ 덕치 조 서방 3년 먹은 술값 내놔‘라고, 운다. 지금까지 외상값을 갚지 않았는지, 꾀꼬리는 지금도 그렇게 울다가, 마을에 까마귀가 나타나면 까마귀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꾀꼬리들이 까마귀를 공격하면 물까치들이 또 떼로 나타나 까마귀를 협공한다. 파란 하늘에서 새까맣고 샛노란 새들의 싸움은 구경거리다. 결국 까마귀는 꾀꼬리에 쫓겨 산을 넘어 도망간다. 꾀꼬리들은 멀리까지 따라가며 공격한다. 그렇게 까마귀가 꾀꼬리들에게 당한 이튿날이면 어디선가 까마귀들이 떼로 마을에 나타나 큰 소리로 까악! 까악! 울며 새까맣게 지나간다. 그럴 때 마을의 숲은 잠잠하다. 푸른 하늘에 까만색 옷을 입은 큰 새들의 시위는 나도 두렵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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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25 17:51

[금요칼럼]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은 '5극 3특' 성공의 초석

국민주권시대를 표방한 이재명 정부에서 자치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의 밑그림으로 제시한 것이 '5극 3특'의 국가균형성장 전략이다. 이에 따라 지방자치 부활 30주년을 맞고있는 시점에서 지방자치와 분권 및 지역균형발전은 중대한 전환기에 놓여 있다. 즉, 5극(수도권, 충청권, 대경권, 동남권, 호남권의 초광역특별자치단체)과 3특(제주, 강원, 전북의 특별자치도)의 신 균형상장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역대 정부에서 추진됐던 '5+2 광역경제권', '56개 지역행복생활권', '4+3 광역특화발전' 전략들과 어떻게 다른지 국민들에게 설득력있게 보여줌으로써 이해와 공감을 받아야 한다. 또한, 초광역권으로 포함될 지자체들이 초광역 정책과 사업들을 어떻게 상생, 협력적으로 추진할지, 그래서 주민들의 체감적인 성과를 어떻게 낼 것인지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대안과 전략을 마련하느냐가 그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이재명 정부에서는 지자체 각각의 자립역량과 초광역내 지자체 간 협상력이 지역경쟁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30년의 지방자치 성과를 결산해 보면, 우선 주민이 지역주인으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확립한 점, 그리고 지방정국의 안정을 통해 중앙정국의 혼란과 불안을 최소화시키는 가운데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뤘다는 점이 대표적인 성과다. 지방자치의 틀이 정립됐기 때문에 국민주권론과 정치발전이 현실화된 것이다. 그 밖에도 지방이 주도하는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지역발전이 가능해지고, 주민참여가 확대돼 주민중심의 행정이 되어가는 점도 큰 수확이다. 반면에, 지방자치가 성년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획일적인 자치제도, 미흡한 자치권과 자치역량, 주민들의 지방자치에 대한 무관심과 불신은 지금도 해결되지 못한 과제들이다. 특히, 지자체간 협력을 하지 못해 나타난 지방경쟁력 저하와 함께 중복행정으로 인한 낭비와 비효율은 심각하다. 한국의 지방자치제는 광역과 기초단위로 나뉜 2층제 구조다. 그런데 우리의 광역단위는 인구 면에서 그 규모가 지극히 적은 편이다. 광역지자체의 평균인구는 약 300만 명에 불과하고 그것도 수도권을 빼면 170만 명에 불과하다. 때문에 글로벌한 지역경쟁력을 갖추기가 불가능하다. 외국은 이미 1000만 명 내지 1억 명 규모의 메가시티와 광역연합 등 초광역권을 구축해서 지자체 간 연대와 협력으로 경제, 교통, 환경, 복지, 고용, 재해·재난 문제 등을 공동으로 해결해 가고 있다. 한국은 여전히 작고 인위적인 행정단위 속에서 지자체마다 각기 폐쇄적인 정책과 사업을 추진해 오다 보니 돈은 많이 들지만, 주민들의 실생활과 일치하지 않은 지방자치를 되풀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재명 정부에서는 중앙주도의 하향적 자치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의 방식은 이제 주민중심의 상향적 방식으로 바꿀 계획이다. 지역균형성장은 더 이상 중앙정부 중심, 지방 줄세우기, 하드웨어 중심, 그리고 주민들의 공감대 형성없이 추진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기본전제다. 따라서, '5극 3특'의 국가균형성장정책들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우선 지방이 주도하되 중앙은 총괄·조정·지원·평가 중심의 상호 역할분담이 이뤄져야 한다. 둘째, 관 주도가 아닌 민·관 협력 내지 민간 주도로 전환해 나가야 한다. 셋째, 지자체 간 '선 협력, 후 통합'의 원칙 하에 다양한 연대와 협력의 접근방식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넷째, 지역균형성장의 기여도가 큰 사업 내지 주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정책부터 우선 선정·추진해야 할 것이다. 국민주권시대의 개막은 자치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의 기반조성이 그 성공의 초석이 될 것이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은 '5극 3특'을 핵심으로 한 국가균형성장이 반드시 정착할 수 있도록 주민중심, 지방주도, 현장중시의 후속 정책연구와 구체적 대안 제시에 주력할 계획이다. 육동일 한국지방행정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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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18 18:16

[금요칼럼] 내 세금 쓰면서 나와 멀어지는 양당을 언제까지 봐야 하나!

한국 정당은 ‘자산 부자’다.작년 기준으로 보면 민주당은 ‘67억 건물과 125억 토지’를 보유한다.‘예금과 현금으로 450억 8919만원에 부동산 임대료 수입이 2억 5천만 원’이다 국민의힘은 ‘215억 건물과 642억 토지’를 갖고 있다.‘예금과 현금으로 72억 601만원에 11억 4000만원의 임대료 수입’도 있다.모두 여의도 소재 부동산의 공시지가 기준이다. ‘이중 지급’의 결과다.경상과 선거 보조금에 선거비용 보전까지 추가된다.2024년 4분기 경상보조금이 ‘민주당 54억 국민의힘 52억’이다. 경상보조금은 선거가 있든 없든 정당에 지급되지만 선거 때는 보조금이 추가된다.작년 총선 때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각각 189억과 177억’의 선거보조금을 받았다. 양당은 선거비용도 전부를 세금으로 보전 받는다.선거보조금도 받고 선거비용도 돌려받는 것이다.선관위도 바로 잡자는 입장이지만 ‘양당 협치’는 요지부동이다. 최근 선거에서 ‘민주당은 평균 158억 국민의힘은 평균 147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고 한다.“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으로 선거를 치를수록 정당은 부자가 된다. 양당의 자산(대출) 증식(청산) 속도는 기네스북 수준(?)이다.2015년 민주당의 재산 총액은 77억 8500만원이고 건물도 없었지만 10년 만에 657억 3100만원으로 8.4배 늘었다.10년 전 445억 4600만원이었던 국민의힘은 지금 1198억 5400만원으로 2.7배 늘었다. 민주당은 2016년 193억 원에 현재 당사를 매입하는데 이때 123억 원을 은행에서 빌렸다.국민의힘도 2020년 480억 원에 당사를 구입하면서 320억 원을 은행 대출로 마련했다.양당 모두 5년 안쪽으로 은행 빚을 전액 청산했다.‘조물주 바로 밑이라는 건물주’ 양당이다. 재원은 국민 세금과 당비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현금”이다.민주당은 지난해 342억5800만원 국민의힘은 205억2700만원의 당비를 걷었다.여기에 국고보조금으로 양당은 각각 438억1000만원과 411억5200만원을 받았다. 양당의 세금 의존은 구조적이다.양당 재정 수입의 절반이 넘는다.2024년 기준 더불어민주당은 56.1% 국민의힘은 66.8%를 국고보조금에 의존한다. 한국 정당은 ‘당원 부자’다.민주당은 2024년 전당대회 기준 ‘권리당원 약 122만 명 국민의힘은 책임당원 약 82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2017년과 비교하면 민주당 권리당원은‘25.6만→150.4만’,국민의힘 책임당원은 ‘37.8만→91.8만’으로 늘었다는 추정도 있다. 세계적 추세와 반대다.‘대규모 전통적 당원의 쇠퇴’와 ‘느슨한 참여의 확장’이 대부분이다.양당의 당원 수 폭증을 매우 이례적으로 보게 되는 까닭이다. 2023년 선관위 자료에 따르면 민주당 전체 당원은 512만 3000명이다.2014년 243만 당원에서 두 배가 넘게 증가했다.국민의힘은 444만 9000명으로 2014년 270만 8000명에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히틀러의 나치당(900만)에 비유될 수의 당원 수로 대한민국 인구의 20%가 양당 당원이다.주요 선진국의 10배가 넘는다.영국과 독일이 2% 일본이 1% 내외다.중국(7%)보다도 3배 가량 높다. ‘건물주와 당원부자의 정당’ 특히 ‘국민 혈세로 운영되는 정당’은 위험하다.세금 의존이 커질수록 정당은 ‘국가화’되어 당내 경쟁을 제한·안정화하려는 ‘카르텔 정당’화 위험이 커진다는 게 정설이다. “개딸과 태극기 부대”의 강성 지지층을 향한 구애가 과열되는 모순이 발생하는 근본 배경이다.“강성 당원들에게 찍히면 경선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니 “그들이 좋아할 센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말이다. ‘정청래 당선’과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선명성 경쟁’은 구조화된 부자 정당 카르텔의 완성을 상징한다.상식을 벗어난 강성 지지층 중심의 극단화된 정치는 민주주의 후퇴의 지름길이다 국민 혈세로 운영비의 절반 이상을 충당하면서도 양당은 당직 선거에서 유권자 의사를 무시한다.민주당은 ‘권리당원과 대의원 70%+국민여론 30%’ 국민의힘은 ‘책임당원 80%+국민여론 20%’로 지도부를 구성한다.권리당원과 책임당원도 ‘양당 공식 당원’의 1/5과 1/4 수준에 불과하다. 양당은 공적 자금으로 운영하면서 의사결정은 소수가 독점하는 ‘사유화된 공기업’이다.국민 혈세를 쓴다면 국민에게 책임을 져야한다. ‘주주 자본주의’의 ‘혈세 민주주의’가 필요하다.정당 재정의 공공성에 상응하는 시민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싫으면 받지 않으면 된다.’당원과 지지층 우선이라면 당비와 후원금으로 운영하라! ‘보조금 비중만큼의 시민참여’는 ‘당심-민심 괴리의 완충판’이자 ‘공적 기구로서 정당에게 부여된 국민 책임실현의 가교’다.내 세금이 제대로 쓰이길 원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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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11 18:46

[금요칼럼] 흐느끼는 돌과 ‘먼 곳’에 대하여

사람은 참 이상하기도 하지. 죽어본 적도 없는데, 죽음을 아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시간의 흐름을 타고 생성과 변형이 반복하는 격류에 휩쓸린다. 우리는 좋든 싫든 우주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 삶이라는 것에 동참한다. 이 소용돌이는 영원히 지속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언젠가 죽고, 나의 죽음으로 격류는 끝난다. 왜냐하면 온 것은 가고 시작한 것은 끝나는 게 생명 세계의 보편 원리이니까. 우리 중 태어나는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람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제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난다. 이 태어남에 내적 필연성은 없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파먹으며 산다. 그 생명 우주에 초대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이 명쾌한 진리를 꿰뚫어보고 “인간은 참 이상하다. 죽어본 적이 없는데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인간은 참 이상하다. 아무것도 허락하지도, 아무것도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태어난다. 그리고 언젠가 죽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느 해 여름 서해안의 해변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다. 평범한 돌이었다. 그것을 책과 필기구가 있는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배고픔도 모르고 자라지도 않는 돌을 오래 두고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읽고 쓰는 중에도 틈틈이 돌에게 눈길을 준다. 이 돌은 어디에서 왔는가? 돌을 쥐면 손에 퍼진 수용체 감감 속에서 그것이 둥글고 표면이 매끄럽다는 걸 알 수 있다. 돌 표면의 매끄러움이 시간의 유구한 흐름 속에서 마모와 변형을 거듭한 결과임을 증언한다. 돌은 저 먼 태고에 큰 바위에서 쪼개진 파편이었을 테다. 돌은 비바람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성된 것인데, 이 돌에 윤곽과 형태를 부여한 것은 자연의 시간일 테다. 시간은 돌의 형태를 빚는 조각가다. 돌은 자연과 시간이 낳은 잔여물이다. 수동의 완고함으로 빚어진 돌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는다. 이것에서는 비와 바람, 대지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돌이 굴러다닌 편력의 경로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마음은 어떤 복잡성과 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돌에게는 백지 같은 순수함 밖에 없다. 이 돌을 마음이라고 하자. 돌은 아무 의지도 없는 무생물이고 죽음의 항구적 형태로 굳어진 물질이다. 비누처럼 쉬이 닳지 않는 돌은 우주의 침묵과 고요하게 조응할 뿐이다. 태어나지도 않을 뿐더러 영원히 죽지도 않는 이 침묵의 고형물을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은 내가 시간의 포획 속에서 죽는 존재인 까닭이다. 어느 날 책상 위에 놓인 돌이 운다. 심장도 마음도 없는 돌이 흐느끼다니! 그건 참 이상한 일이다. 그날 낮엔 붉은 동백꽃이 피어났는데, 돌이 흐느끼는 밤엔 하얀 꽃잎 같은 눈이 펄펄 날렸다. 한밤중에 쓰던 걸 멈추고 돌의 흐느낌에 고요히 귀를 기울이는 오, 죽음을 보는 자다. 즉물성과 침묵의 세계에 갇힌 동물은 죽음을 보지 못한다. 오직 생각하는 존재들만 죽음을 엿본다. 돌은 죽음을 모르고 따라서 울지 못한다. 울지 못하는 돌이 흐느끼며 울다니! 바닷가에서 주워온 돌을 책상에 올려두고 바라본다. 모든 생물이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세계의 자명함이다. 마치 샘물이 바다로 흘러가듯이 우리는 운명처럼 세계를 만난다. 산 자들의 꿈과 갈망의 푸른 힘으로 꽃이 피고 지며 계절은 순환한다.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과 세상과 작별하는 사람은 동일한 존재다. 죽는 사람은 죽음 그 자체로 돌아간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렇게 노래한다. “죽음에 이른 사람이 보는 건 이미 죽음이 아니라 ‘먼 곳’이다.”(두이노의 비가-제8 비가) 나는 책상에 놓인 말하지 않는 돌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돌의 지속되는 침묵이 저토록 숭고할 리는 없을 테다. 짧고 비천하지만 찬란한 생명을 가진 개체 중 하나인 나도 언젠가 죽음의 덫이 없는 자유로운 세계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자로 다시 태어나 살 수 있을까?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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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4 18:38

[금요칼럼] 공부가 무서울 때가 있다

공부가 무엇일까? 공부는 왜 하는가?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하는 것이 공부일까? 공부는 꼭 학교에서 책을 가지고 선생님에게 배워야 할까. 공부해서 어디 다가 어떻게 써먹을까? 공부를 많이 한다는 말은? 공부를 많이 했다는 말은? 공부를 잘한다는 말은? 공부가 꼴등이라는 말은? 일등이 있고 꼴등이 있다. 일등은 좋은 사람이고 꼴등은 안 좋은 사람일까. 좋은 대학이란? 일류 대학이란? 그런 데서 공부하면 무엇이 좋을까? 공부는 학교에 다닐 때만 하는 것인가? 공부 잘하면 어떤 사람이 될까? 공부 잘하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할까?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과 학교 공부 안 한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공부! 공부! 공부! 우리 아이들은 지금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과 집에서 무슨 공부 하고 있을까? 지금 우리 아이는 공부하면서 어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데 진짜 공부를 하면 좋은 사람이 될까? 행복한 사람이 될까? 책을 한 페이지도 안보고, 글자도 모르는 우리 마을 사람들도 있다. 그분들은 잘 못 산 것일까? 공부를 안 하면 무식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말일까? 공부하면 시험을 보는데, 지금 그 정답이 정말 정답일까. 세상에 정답이 하나밖에 없는 것일까? 사람들이 어떤 한가지 삶의 문제에 대한 정답 하나로 살아야 할까?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모두 좋은 일을 하며 살까. 그 공부대로 살까? 공부를 잘하면 부자로 살고, 공부를 못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한다. 공부를 안 하면 어른들이, 너는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느냐고 묻는다. 진짜로, 공부는 뭘까? 사람이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지금 우리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지금 우리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공부를 잘해서 국민이 내 세금인 나랏돈으로 나랏일을 관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그들을 높은 사람이라고 한다. 모두 공부 잘할 사람들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공부만 잘하면 뭐 한다냐? 사람이 되어야지. 여기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일류 대학에서 많은 공부를 잘한 사람이 차지한 자리는 모두 좋은 자리라고 한다. 공무원들이다. 공무란 무엇일까. 그러니까 그렇게 좋은 대학을 나오고 공부를 잘해서 높은 자리 있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학교 다니지 않고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지식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며 오랫동안 살았다. 저렇게나 공부를 잘해서 저렇게 높은 자리에 간 사람들이 무슨 돈 욕심이 있어 자기 욕심 챙기겠어. 다 알아서 배운 대로 우리들을 위해 밤낮으로 일하겠지. 그렇게 국민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게 의지했다. 설마 그렇게나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저렇게 좋은 자리에 앉아 나쁜 짓 하겠어. 저런 높은(?) 사람이, 체면이 있지, 그런 못된 짓을 하겠어, 그렇게 생각했다. 대통령, 장관들, 국회의원들,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들 교수 경찰들, 장군들, 기자님들, 도지가 군수 경찰서장 교육감 교육장 교장, 교감 선생님, 면장 공공기관장님들 모두 좋은 대학을 나오고 또 많이 배운 사람이 설마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짓이야, 하겠어. 그러면 사람도 아니지. 그렇게 믿고 살다 보니, 아니었다.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이들이 우리의 공금을 얼마나 사적으로 사용하는지 다 알고 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도 뻔뻔스럽게 대 놓고 나쁜 짓을 한다. 현 정부에서는 서울 대학을 열 개를 만든다고 한다. 서울 대학 열 개를 만들면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이 열 배로 늘어날 텐데, 공부 잘하는 그 사람들이 나랏일과 나랏돈을 쓰는 것에 대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열 배로 늘어나서 나라 걱정 없는 국민이 열 배로 늘어나게 될까. 아무 생각 말고 공부 잘해서 출세만 하면 돈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이 참담한 반사회적인 생태 지형을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하다. 놀라운 것은 공교육이란, 공공의 이익을 앞에 둔다는 것을,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도, 그 어디에서도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곳이 없이‘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열심히 하는 공부가 무섭습니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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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28 17:52

[금요칼럼] 사랑과 도움의 선순환

‘사랑은 나눌수록 커지고, 나눔은 돌아올 때 진짜가 된다.’ 예전에 한 선배가 해준 말이다. 그저 멋진 말이라 여겼지만, 나이가 들어 과거를 돌아볼 때 그 의미가 마음 깊이 와닿는 장면들이 있다. 그중 한 장면이 떠오른다. 독일 유학 중이던 당시, 동료들이 부르던 필자의 별명은 하우스마이스터(House Meister), 커피마이스터(Coffee Meister)였다. 이른 아침 연구실 문을 열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문을 닫고 돌아가는 ‘건물관리인’의 모습, 아침마다 연구실 동료들 간에 ‘누가 커피를 내릴 것인가?’에 대한 보이지 않는 긴장감 속에서 잠을 이겨내야 하는 필자가 아침에 출근하여 곧바로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지켜본 주변 동료들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논문을 마무리할 즈음엔 거의 밤을 새우며 작업에 몰두했고, 새벽에 동이 트고 나서 몇 시간 지난 후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료들을 보며 겨우 정신을 차리곤 했다. 한참 분주한 시간을 보내던 필자는 다니던 한인교회로부터 뜻밖의 부탁을 받게 되면서 고생의 강도가 2배로 불어났던 기억이 난다. 당시 교포사회에서 2세 자녀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으면서 부모와 불화를 겪는 가정이 많았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우등생으로 부모님의 자랑거리였던 자녀가 고학년에 접어들면서 백인사회에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원인을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 돌리고 원망하는 자녀들이 꽤 있었다. 이 청소년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멘토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논문 마무리라는 큰 숙제가 있는 필자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독일어로 글을 쓰거나 전공과 관련한 내용을 설명하는 것쯤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지만, 독일어가 모국어인 교포 2세들에게 자연스레 감정을 이입하여 상담하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1~2시간씩 그들을 만나 어려움을 듣고 가슴으로 상대방을 품는 일은 학위 논문을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들과 만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독일의 어두운 저녁 날씨처럼 우울했다. 귀국을 앞둔 상황에서 청소년 중 누구도 변한 모습이 보이지 않아 내심 아쉬웠다. 하지만 한국에서 한 학기 강의를 마치고 최종 논문 심사를 위해 다시 독일에 방문하였을 때 아이들은 많이 성장하고 변해있었다. 어떻게 보면 등 떠밀리다시피 한 봉사였지만 그 시간만큼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했고 그 진심이 통해서였는지 아이들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후일에는 그들 중 아프리카 오지에 의료봉사를 떠나거나 후진국 자원봉사로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논문과 청소년들을 돌봐주는 두 가지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필자를 곁에서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본 연구실 동료들이 필자가 학위 논문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연구실 동료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되돌려 받았구나!’라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내가 보여준 작은 사랑이 또 다른 도움으로 되돌아왔던 ‘사랑과 도움의 선순환’을 경험한 순간이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 사이에는 세계에서 가장 염도가 높아 생물이 살 수 없는 ‘사해’가 있다. 산맥에서 흘러 내려온 물은 갈릴리 호수에 생명체를 자라게 하고, 멋진 경관을 연출한다. 그 물은 요단강을 타고 사해로 흐르지만, 사해에 이르러서는 더 흐르지 않고 갇혀버려 생명체가 살 수 없게 된다. ‘사랑과 도움’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내가 사랑과 도움을 받고 나에게서 끝이 나면 생명이 살 수 없는 짠물, 썩은 물처럼 되지만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 맑은 물로 선순환이 될 때, 나도 살고 상대도 살리는 생명수가 된다. 필자가 젊은 시절 겪었던 ‘사랑과 도움의 선순환’의 경험, 흐르지 못하고 갇힌 사해에서 생명체가 존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주변 사람들과의 짧은 인사, 커피 한잔과 함께하는 가벼운 대화가 따뜻한 정을 나누는 시발점이 된다. 그렇게 시작된 이웃에 대한 작은 관심이 타인에게 작은 울림이 되고, 언젠간 나에게 축복으로 돌아올 것이다. 오늘도 ‘사랑과 도움의 선순환’이 나로부터 시작되기를 기대해본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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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21 19:03

[금요칼럼] 여름의 복판에서 바다를 노래하다

요즘 부쩍 자주 어린 시절이 꿈에 비친다. 내가 나이든 탓일까, 혹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 탓일까. 이런 꿈을 자주 꾸는 까닭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꿈은 아무 의미 맥락도 없이 뒤죽박죽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이미 새벽이 와 있다. 내륙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나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시골 학교 운동장에서 혼자 땅따먹기나 하며 권태를 견뎠다. 나는 농업 기반으로 살림을 꾸리는 내륙인의 농담과 수수께끼, 그들만의 습속과 도덕관념을 체화하며 성장한다. 바다 근처에서 살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꿈을 품었지만 나는 내륙에서 나고 자랐다.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실존의 불가피한 조건이었다. 질풍노도였던 사춘기에는 바다를 동경했다. 바다, 나로부터 멀리 있는 바다는 미지의 그 무엇이고, 결핍의 대상이었다. 바다를 실물로 처음 영접한 건 17세때다. 그 여름 태풍이 몰아치던 동해안의 포구인 죽변항 앞 바다를 보았다. 방파제에서 본 바다는 집채만한 파도로 세상을 뒤집을 듯한 태세로 포효하며 사납게 일렁거렸다. 그것은 무서운 바다였다. 태풍이 지나간 뒤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놀랐다. 나는 일망무제의 고요를 품고 있는 바다의 표변에 몸서리를 쳤다. 저 바다, 저 무서운 바다, 저 변화무쌍한 바다! 배들을 난파시키고, 숱한 항해자들을 집어 삼키고도 어린애처럼 순진한 얼굴로 떠 있는 바다! 바다는 잠잠하거나 사납게 일렁이지만 약탈자가 아니다. 바다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바다는 스스로 그러함으로 인류에게 교역과 소통의 길을 열어주며 많은 기회를 베풀었다. 그 바다를 윽박지르고 도발한 것은 늘 탐욕스런 인간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바다는 상상력의 보고다. 바다는 모든 좋은 걸 무상으로 주었다. 나는 바다에서 분노와 열정을, 좌초의 쓰라림과 회생의 기쁨을, 우정과 사랑을 배웠다. 내륙인으로 성장했지만 나는 바다에서 인생의 덕목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중요한 계기 때마다 나는 바다에서 숙고하고 결단하는 지혜를 얻었다. 그리고 바다에 관한 많은 시를 써냈다. 바다는 내게 삶 자체다. 우리는 저마다 실존의 바다에 닻을 내린 채로 삶을 꾸린다. 바다에서의 나날은 예측하기 어렵다. 여러 가지 이유로 바다가 변화무쌍한 탓이다. 허만 멜빌의 ‘모비 딕’은 거대한 흰 고래를 쫓는 에이허브라는 사내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바다에 관한 매혹적인 서사시다. ‘물줄기다! 고래가 물을 뿜고 있다! 는 덮인 산처럼 하얀 혹이다!’. 분노에 눈이 먼 에이허브는 일곱 곳의 바다를 누비며 흰 고래를 쫓는데, 흰 고래는 바다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저마다의 바다에서 하얀 고래를 쫓는다. 하얀 고래는 우리 꿈과 사랑이고, 우리 그토록 열망한 성공이자 명망이며, 삶의 보람과 고귀함의 집약체일 테다. 어쩌면 그건 우리를 유혹한 신기루였는지도 모른다. 에이허브 선장이 쫓던 흰 고래는 궁극의 추구이자 의미의 표상이다. 살아보니, 흰 고래가 없었다면 에이허브의 삶은 무의미로 전락한다. 살아보니, 사람의 가슴마다 흰 고래가 살아 있다. 그것은 일종의 성배다. 그 성배를 찾으려고 우리는 평생을 실존의 바다에서 헤맨다. 나는 무슨 흰 고래를 좇았던가? 살아보니, 알겠다. 예측이 불가능하고 길들일 수 없다는 점에서 흰 고래는 인생의 모험 그 자체인 것을! 평생 내륙인이었지만 스무 살 때 ‘바다사냥’이란 장시를 써서 내놓은 자로 감히 바다의 발명자라는 자부심을 품었다. 휘트먼에게 풀잎이 있고 보들레르에게 파리가 있었다면 나에겐 바다가 있었다. 지금 바다는 플라스틱 쓰레기 등으로 오염되고 기후변화로 몸살을 앓는 중이다. 인류가 일으킨 재앙의 피해자들은 고스란히 바다 생물들의 몫이다. 영원을 품은 저 바다, 뭇 생명의 태초를 품은 저 바다. 늘 새롭게 변화하며 숨 쉬는 저 바다가 살아야만 인간도 살 수 있다. 나는 폴 발레리처럼 노래한다, 저기 바다가 있다, 살아봐야겠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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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07 18:21

[금요칼럼] 8월 아침

일어나자마자 고양이에게 갔다. 고양이가 똥 쌌다. 3일 동안 똥을 싸지 않아서 걱정이었다. 안심했다. 부채 들고 날 파리 쫓으며 마을 길을 걸었다. 날 파리들은 떼로 까맣게 날아들어 눈동자 속을 파고든다. 경기네 집 둘레 벽 등이 훤하다. 불을 켜놓고 출타했나 보다. 집 주위 벽을 살펴보았다. 스위치를 못 찾았다. 논에 벼들이 꽉 차 간다. 볏 잎마다 끝에 이슬이 달려있다. 잘도 자란다. 볏 잎에 거미집들이 하얗다. 벼 논에 거미집들을 보고 안심하였다. 물꼬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저 명랑한 물소리도 나를 달래주는 소리다. 할미새가 길에서 날아올라 전깃줄에 앉아 꽁지를 까분다. 비둘기, 참새, 개개비, 꾀꼬리. 파랑새, 직박구리, 돼지빠뀌, 어치, 붉은 머리 오목눈이, 까치, 박새, 물까치는 나의 산책 친구들이다. 호반새는 우리 마을과 먼 산속에서 멀리 운다. 강변 자갈밭으로 걸었다. 큰물이 지나간 자갈밭은 자갈돌들이 물살에 뒹굴고 씻겨 희고 깨끗하다. 자갈들은 밟으면 몸이 뒤뚱거린다. 신경을 써서 몸의 균형을 잡는다. 강 건너 복두 농막에 갔다. 복두, 잔가? 하고 불렀다. 복두가 느리게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안개 속에 서서 이야기하였다. 자두 이야기했다. 아직 덜 익었다고 한다. 내가 경기 집에 불이 켜져 있다고 하자, 여수 놀러 갔단다. 경기에게 바로 전화한다. 내가 벌써 일어났을까? 그랬는데, 경기가 전화를 받는 모양이다. 집 둘레 전등불 스위치는 현관에 있다고 한다. 오늘 온단다. 자두가 익으면 아무 때나 와서 따먹으란다. 복두는 작은 텃밭에 오이, 가지, 고추, 옥수수, 방울토마토, 취나물도 키운다. 잘 자랐다. 복두는 나와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나보다 한 살 아래다. 당숙 아들이다. 당숙은 큰 소나기가 와도 절대 뛰거나 빨리 걷지 않으셨다. 평생 마을 길을 걷는 속도를 변동하지 않고 같은 속도를 유지 하셨다. 밤이면 강 건너 복두 농막에 불빛이 환해서 앞산이 정답다. 참새들이 떼로 전깃줄에 앉아 있다가 흩어진다. 참새들이 떼로 모이는 것은, 그해 새끼들을 다 길렀다는 뜻이다. 새끼들을 데리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닌다. 참새는 걷지 않고 뛴다. 참새에게서는 어쩐지 문명에 시달린 몸짓이 느껴진다. 참새들이 길가에서 풀씨를 따 먹는다. 풀대들이 작아서 올라가 앉지 못한다. 훌쩍 뛰어 풀씨를 물고 땅으로 내려오면 풀이 휘어진다. 풀을 발로 잡고 풀씨를 따 먹다가 풀을 놓아주면 휘어져 있던 풀들이 벌떡 일어서서 낭창낭창 흔들린다. 흔들리다가 멈추면 참새들은 또 풀쩍 뛰어올라 풀을 잡아당겨 발로 누르고 풀씨를 따 먹는다. 그 일을 반복한다. 강아지풀이다. 즐거운 놀이 같다. 새들은 꺾어질 풀이나 나뭇가지에 앉지 않는다. 철새들은 새끼들을 데리고 멀리 높이 나는 힘을 기른다. 어떤 새는 날다가 공중에 멈춰 발발발 떨고 있다. 웃긴다. 파랑새만 아직, 빼앗은 까치 집에서 새끼를 기르고 있다. 새들은 자세에서 표정이 나온다. 호박꽃이 핀다. 호박꽃은 해가 뜨기 시작하면 꽃을 닫아 버린다. 옥수수는 넘어지고 참깨꽃은 핀다. 강물이 많이 빠졌다. 시멘트 다리 주위에 고기 떼들이 물살을 튕겨 일으키며 논다. 내가 다가가자. 새까맣게 흩어지며 재빠르게 도망간다. 물고기들을 저렇게 떼로 놀다가 흩어지는 것을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다. 불거지들이 얕은 물 속 자갈밭에서 등을 물 위로 내놓고 정신 없이 놀다가 자기도 모르게 땅 위로 훌쩍 뛰어올라 마른 자갈밭에서 훌훌 뛰다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었다. 짝짓기 철이 되면 불거지들의 몸은 화려한 무지개색을 갖추고 뽐낸다. 몸이 울긋불긋 아름다운 ‘임실 납자루’는 어디로 갔을까. 강변 자갈들이 달빛에 하얗게 빛나던 옛날 일이다. 주황색 조끼에 진초록 슈트를 잘 받쳐 입은 물총새가 잔 고기떼들이 물 위로 뛰어오르는 것을 노리고 돌 위에 앉아 있다. 이웃집에서 재채기 소리가 담을 넘어 크게 들린다. 자연은 이런저런 현상을 통해 해마다 다른 말을 한다. 자연은 꾸준히 자기들의 변화를 강변하고 사람들은 자연의 그 물음에 응하다가 외면하는 일을 반복하며 지구의 일을 크게 키운다. 매미가 울다 그쳤다. 해뜨기 전우는 매미는 맴맴맴 하고 우는 참매미다. 일찍 일어나 밭도 매고 논도 매라고 맴 맴 맴 운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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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31 18:10

[금요칼럼] 개기일식이 주는 삶의 지혜

올해는 유난히 무더위가 일찍 시작된 느낌이다. 한밤중에도 뜨거운 열기가 식지 않아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다. 어젯밤도 더위를 참지 못해 뒤척거리다 침대에서 일어나 찬물을 마시고 집 안을 서성거리다 소파에 앉았다. 다시 잠을 청하려다 문득 지난날에 대한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상당히 힘든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억은 희미해지고 아름답고 좋은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그 시절을 힘들게 했던 어려운 일들, 그 일을 마주치면서 겪은 심적인 갈등,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미래에 대한 걱정은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힘들었던 유학 시절이 떠올랐다. 논문이 좀처럼 진척되지 않아 막막함과 불안함 속에 지내던 시기였다. 며칠씩 밤을 지새우며 내용을 고민하고 작성했지만, 지도교수님과의 면담을 거치며 공들여 쓴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지워지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과연 내가 이 공부를 마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깊어졌다. 그러던 어느 주말, 머리를 식힐 겸 가족과 함께 교외 호숫가에 다녀왔다. 유난히 오리를 좋아하는 두 딸과 함께 오리들이 한가로이 떠다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너희는 참 평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물속을 바라보니, 물 위에 조용히 떠 있는 듯 보이던 오리들이 사실은 물 아래에서 쉼 없이 다리를 움직이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애씀이 있다는 것, 성과라는 것이 결코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닌 여러 과정과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자신감이 바닥까지 내려갔던 당시엔 박사학위를 끝내지 못하고 귀국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컸지만, 그것은 성취의 과정이었고 그만큼의 애씀과 준비가 필요했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 교수님의 냉정하지만 날카롭고 세심한 지도, 주변 동료들의 도움, 가족의 응원이 결국 나를 성장시킨 동력이었다. 끝내 그 시간을 견뎌 학위를 끝내고 전공 분야의 학자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고 그 후에도 여러 번의 힘든 고개를 넘어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인생의 자산으로 남아있다. 얼마 전 ‘개기일식과 삶’의 비유에 대한 말을 들으면서 자연이 주는 교훈을 얻었다. 개기일식은 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를 지나며 태양을 잠시 가리는 현상으로서 잠깐 동안 하늘은 캄캄해지고 태양이 사라진 듯한 상황이 되어 버린다. 오죽하면 옛날 사람들은 세기의 종말을 보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실제로 태양은 달보다 400배 크고, 방출되는 에너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렬함에도 우리는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려서 태양의 존재가 없어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개기일식은 오래가지 못한다. 몇 분이 지나면 다시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고 밝은 대낮이 돌아온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달의 모습은 희미해지다 못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난관이 태양을 가리는 달의 모습과 같아 보이는 것이 아닐까?’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생각을 정리해보는 ‘개기일식의 지혜’가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어려운 시기마다 내 곁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는 좋은 사람들의 도움과 격려, 응원하는 가족, 동료들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득 ‘은혜’라는 제목의 노래가 떠오른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돌이켜보면 위의 가사가 가슴에 와닿고 머리가 끄덕여진다. 내 삶에는 개기일식과 같은 순간이 있었고 지금 내 앞을 가리는 일들로 그 뒤에 감춰진 빛을 보지 못하고 힘들어하면서 ‘왜 나만 혼자 고생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 삶을 지탱해주는 크신 은혜와 좋은 분들과의 사귐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고 건강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개기일식이 주는 삶의 지혜’는 지금의 어려운 문제 뒤에는 밝고 힘찬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 혹시 그 문제가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무더위를 식혀주는 소나기처럼 시간이 지나면 말끔하게 해결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해준다. 그와 함께 햇볕처럼 따뜻한 정감을 나눌 수 있는 ‘좋은 분’들이 내 곁에 있음을 기억하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살아가야겠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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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24 17:42

[금요칼럼] 시대와의 불화 겪는 한국정당

정당은 “민주주의의 생명선”이다. 정당 없는 대의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 없다. 작년 총선은 1987년 이후 무소속 당선자가 한명도 없는 첫 총선이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소속이 300석 중 283석이다. 2022년 지방선거의 광역의원 872석 중 양당이 862석을 차지한다. 정당은 권력의 성패를 결정한다. ‘윤석열 권력의 실패’는 여당의 기능부전에서부터 출발했다. “삼권분립은 이제 막을 내려야 될 시대”라는 언급은 ‘이재명 권력의 민주당’을 상징한다. 개인화된 정당과 권력종속의 여당은 ‘정당과 정치 그리고 권력의 연쇄 실패로 이어지는 필요조건’이다. 당내 민주주의와 다양성의 붕괴는 ‘정당 좌절’의 전조 증상이다. ‘이재명의 민주당이 윤석열의 여당보다 나을지’우려하는 이유다. ‘정당의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당의 제자리 찾기’가 핵심이다. 정당 특히 집권 여당의 제 역할 회복 없이 한국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은 담보되지 않는다. 정당의 연구는 다양한데 첫째, 조직 차원에서 정당의 구조와 운영방식을 분석한다. 한국의 정당은 “간부정당,카르텔 정당 그리고 선거전문가 정당”이다. 둘째, 기능적 차원으로 정당의 역할과 기능을 분석한다. “포괄정당”이 대표적이다. 셋째, 체계의 차원으로 정당 간 상호작용과 정당 체계의 특성을 분석한다. “경쟁적 정당체계,양당제와 다당제”등으로 분류하는데 한국정당은 포괄정당으로 다당제의 경쟁적 양당제다. 최근 정당연구의 방법론적 측면에서 거시적+미시적 접근의 융합이 등장한다. 정당의 역사적 맥락과 구조적 요인을 분석하는 거시적 입장과 개별 정당의 조직과 행태를 분석하는 미시적 접근의 결합이다. 연구의 적실성을 높이려는 노력이다. 전통적 정당연구의 제도와 구조중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도 있다. 정당의 내부 문화와 조직 행태에 주목하는 ‘정당 문화론적 접근’이다. 한 정당의 문화가 그 정당의 행태에 미치는 영향이 결정적이다. 예를 들면 정당 엘리트와 당원 수준의 조직 문화와 행태를 설명하고 계파와 이념적 분화 등을 설명한다. 정당 민주주의 또는 당내 민주주의도 다양성과 함께 중요한 관심 대상이다. ‘당직과 공직후보 선출과정의 민주성과 당내 의사결정구조의 성격 그리고 당내외 계파갈등의 양상’ 등이 초점이다. 정당 내부의 파벌구조와 문화적 역학 그리고 정당 지도부의 성향과 배경 등이 정당의 조직문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도 마찬가지다. 정당 내부의 비공식적 규범과 조직 관행 등이 새롭게 주목받는다. ‘스페인 포데모스와 이탈리아 5성운동’을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두 정당의 후보자 선출과정은 정당의 조직 문화와 관계있다.’고 한다.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은 근본적으로 다른 조직 구조와 문화를 가진다. ‘이데올로기 중심의 운동체로서 교리적 순수성을 중시하는 비즈니스 문화의 공화당’과 ‘이익집단 연합체로서 수평적 연대와 내부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문화의 민주당’이다. 한국의 정당 문화연구는 아직까지 간접적이다. ‘당원 충원방식과 조직 효용성 분석’은 공개된 당원 수와 실제 유효당원 사이의 큰 차이를 발견한다. 당원 충원이 주로 선거 입후보자를 매개로 한 동원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정당의 당내 민주주의 연구에 따르면 정당 엘리트의 의사결정과정의 주도성이 관찰된다. 진보정당에서조차도 ‘권위주의적 운동문화가 정당 내부로 이전되어 당원 주도형 제도가 사문화’되었다고 한다. 성 평등 차원에서 한국정당의 조직문화 분석도 있다. 정당 사무처의 남성 중심적 조직 문화가 여성 당직자의 정치 세력화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여성 당직자들이 남성 중심적인 정당 조직문화로 인해 부서배치 차별과 인맥 형성 소외 등을 경험하는 것을 확인한다. 한국정당의 조직 문화와 행태는 첬째, 중앙당 중심의 위계적·집중적 구조로 정당의 주요 의사결정은 당 지도부와 국회의원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둘째,당 보다는 ‘후보자 개인’에게 충성하는 인물 중심적 문화와 당원의 수동적 참여다. 당의 신뢰와 충직함 보다는 ‘공천권’이라는 교환 관계를 매개로 한 인물 중심의 충성 문화가 지배적이다. 셋째, 한국정당은 남성 중심적 인사구조와 계파 문화로 여성·청년·소수자 당직자들의 문화적 소속감과 의사결정 참여가 제한적이다. ‘빠른 추격자’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하는 대한민국 공동체는 정당이 시대변화와 그 흐름에 적응하기를 요구한다. ‘자율과 책임의 극대화와 다양성 제고’가 시대의 방향이다. 정치적 책임감과 공동체 우선의 공적 마인드는 전제조건이다. 과연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시대와의 불화를 넘어 설 수 있을까!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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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17 18:37

[금요칼럼] 여름과 후무사 자두와 연애

무슨 자문회의를 하러 서울에 나갔다 마치고 돌아온다. 나는 서울에 나갔다가 폭염에 화들짝 놀란다. 올여름 일사광은 비명이 나올 만큼 뜨겁다. 공중이 하얀 화염에 정령된 듯한 이 폭염은 열탕 지옥이다. 공중에서 새가 폭염에 기절해서 갑자기 추락할 수도 있겠다. 건설 현장에 나갔던 외국인 노동자와 땡볕에서 밭일을 하던 노인이 온열병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전해졌다. 어쩌다 한반도가 열탕에 갇히게 되었을까? 내 스물 살의 여름도 더웠다. 여름이니 더운 게 당연하고 여겼다. 하지만 그 시절의 더위는 올여름 같이 사납지는 않았다. 가정교사인 나는 여름 오후 4시에 폭염에 갇힌 거리를 지나 가여중생의 집으로 간다. 아이는 수학과 영어 공부는 싫어하지만 피아노를 잘 진다. 아이는 나 들으라고 피아노 연습곡을 치는데 검은 머릿결에서 햇빛이 빛난다. 월말에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월급을 받는다. 그는 염전의 사장이고 나이가 많다. 딸은 늦둥이인 셈이다. 그는 월급을 주며 늦둥이 딸이 공부를 열심히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렇다고 애매하게 대답한다. 서창에 해가 기운 뒤 버스정류장에서 퇴근하는 애인의 기다린다. 애인은 저녁 7시쯤에 도착한다. 우리는 칼국수를 먹은 뒤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를 걷는다. 나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월광’이라는 음반을 사러 음반가게를 간다. 또 다른 날엔 애인과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영화는 알랭 드롱이 나오는 ‘태양은 가득히’다. 푸른 바다에서 요트를 운전하는 알랭 드롱이 너무 잘 생겨서 질투가 날 지경이다. 애인은 비가 오면 반바지를 입고 빨간 장화를 신었다. 애인은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우리는 영화를 본 뒤 칼국수를 먹고 돌아와 집으로 돌아간다. 스무 살에 시작한 우리의 연애는 스물한 살에 끝났다. 왜 헤어졌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더위에 늘어진 플라타너스의 잎들과 먼지가 떠다니는 버스정류장 일대의 여름 저녁 풍경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여름 저녁 7시에 더는 버스정류장에서 나가지 않게 되면서 내 여름은 시시해졌다. 나는 여름비와 붉은 배롱나무 꽃을, 제주 협재 바다를, 후무사 자두와 복숭아를 사랑한다. 여름비는 온수 같이 따뜻하다. 빨간 장화를 신은 애인은 내 앞에서 환하게 웃는다. 그 웃음으로 내 마음과 세상의 명도는 얼마쯤은 더 높아졌을 테다. 길바닥에 도랑을 이룬 빗물을 보며, 그 웃음을 만져볼 수 없구나, 생각하니 쓸쓸해진다. 장마가 끝나면 여름의 파란하늘에는 흰구름이 뭉개뭉개 피어오른다. 나는 샐러드를 씹어 먹는 어린 사자처럼 기분이 좋아져 시립도서관을 간다. 참고열람실에 구석 자리에서 양자역학에 관한 책을 읽는다. 비 그친 여름밤에 맹꽁이들이 운다. 축축한 공기가 떠다니는 여름밤에 후무사 자두를 먹는다. 후무사 자두는 달고 시다. 그 달고 신 것을 먹고 달고 신 맛이 나는 시를 쓴다. 스무 살에 후무사 자두 세 개를 먹고 쓴 시에서는 후무사 자두향이 난다. 손에 묻은 후무사 자두향 냄새를 맡을 때 내 기분의 고도는 낮아진다. 언젠가 후무사 자두를 먹을 수 없겠지. 두꺼운 절망이 얇게 펴지면 우울로 변한다. 맹꽁이들이 맹렬하게 울어대는 여름밤에 나는 조금 우울하다. 여름은 아스팔트의 아스콘을 끈적이도록 만드는 태양의 계절, 비온 뒤 맹꽁이가 맹렬하게 울어대는 계절, 달고 신 후무사 자두를 먹고 달고 신 맛이 나는 시를 쓰던 계절, 흰구름 아래서 사자가 샐러드를 아삭아삭 씹어 먹는 계절, 스무 살의 청년들이 도서관 복도에서 서성이는 계절이다. 수많은 여름들이 지나갔다. 숱한 이들이 내게로 왔다가 떠나갔다. 나는 그 여름들의 과거이자 미래다. 나는 폭염을 견디면서도 여전히 여름을 사랑하지만 이제 여름이 마냥 즐겁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여름의 기대, 여름의 소슬한 꿈은 물거품처럼 꺼졌다. 그렇건만 새로운 여름이 돌아올 때마다 첫 연애의 기억과 함께 죽었던 연애세포가 오롯하게 살아난다. 여름에 만나서 여름에 헤어진 애인은 어디선가 이 폭염을 견디며 잘 살고 있겠지, 하고 생각한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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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10 18:52

[금요칼럼] 잘 지나 간 시인의 하루

아침 일찍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30분 걷고 집에 와서 아침을 먹을 까 하다가 어제 읽었던 단편 소설을 다시 한번 읽기로 했다. 어제 읽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책 줄거리가 드문드문해서 다시 읽었다.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 창밖에서 새가 울었다. 처음 울음을 시작할 때는 낮은음으로 시작해서 점점 높은 음으로 울어가다가 아주 높은 음에서는 일정한 음으로 울다 그치고 울다 쉬며 반복해서 울었다. 높은음으로 길게 울 때는 슬프기도 했다. 책을 읽다가 책 내용 속으로 새소리가 찾아들면 내용을 놓치곤 했다. 줄거리가 잘 이어지지 않을 때는 줄거리가 끊긴 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 줄거리를 이었다. 도대체 어떤 새가 저리 예쁜 소리를 낼까, 궁금해서 책을 들고 창가로 가서 여기저기 뒷산 밤나무 숲속을 찾았지만, 새우는 소리는 또렷한데, 새는 찾지 못했다. 책을 다 읽고 아침밥을 대신해서 먹는 누룽지를 끓이고, 쌀을 씻어 밥하고, 집 뒤 안 살구를 두 개를 따 씻어 먹었는데, 익지 않아 떨떠름한 맛이 입안 가득 찼다. 냄비에 누룽지가 자글자글 물 닳아지는 소리를 냈다. 얼른 달려가 식혀서 먹었다. 그사이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새는 그치지 않고 울었다. 부엌문을 살며시 열고 서서 뒷산 커다란 느티나무에서 새를 찾아보았다. 그때 새 울음소리가 문득 그쳤다. 문 여는 소리 때문인가, 가만히 서 있었다. 새가 울지 않았다. 저 새에게 분명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설거지하는데, 이번에는 까마귀 움을 소리 물까치 울음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다른 쪽 문을 열고 나가 보았다. 까마귀기가 전깃줄에 까맣게 앉아 있었다. 그 주위를 맴돌며 물까치와 꾀꼬리들이 까마귀를 공격하고 있었다. 물까지와 꾀꼬리의 집중 공격과 까마귀의 필사적인 방어를 겸한 공격은 격렬했다. 까마귀 한 마리에 꾀꼬리가 세 마리, 물까치 대여섯 마리였다. 싸움은 길고, 공방전은 치열했다. 새들이 공격하는 동안에도 까마귀는 전깃줄을 떠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새들의 공격이 더 치열해지자 견디지 못한 까마귀가 진지인 전깃줄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새들은 함성을 지르며 까마귀를 쫓았다. 푸른 하늘에 새들의 공중전은 볼만했다. 까마귀는 회문산 멀리 사라지고 꾀꼬리와 물까치는 마을로 귀환해서 흩어졌다. 싸움이 끝났다. 한숨 돌린 나는 댐의 방류로 불어난 큰 강물을 뒷짐 지고 서서 구경하였다. 큰물일수록 소리를 감추고 묵묵하게 흐른다. 오후에는 새로 나온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 소설집을 읽었다. 두어 편은 어느 잡지에서 읽은 글이지만 다시 읽었다. 본 영화를 다시 볼 때처럼 기억나지 않은 새로운 장면들 때문에 글은 새로 읽혔다. 김애란의 소설집을 다 읽고 ‘문지’의 ‘소설보다 봄’ 속의 성해나의 단편 ‘스무드’를 읽었다. 선이 굵직굵직하고 이야기가 힘차게 뻗어 나갔다. 글발이 흐르는 강물처럼 출렁이고 꿈틀거린다. 밥 먹기 전에 읽은 단편은 김지연의 ‘무덤을 보살 피다’ 였다. 무더위가 일찍 시작되었다. 벌써 뙤약볕이다. 올 날씨가 심상치 않다. 이렇게 더울 때는 주로 소설을 읽는다. 책을 읽을수록 읽을 책이 자꾸 새로 나타난다. 그것이 좋다. 아직도 책을 읽을 힘과 글을 쓸 힘이 내게 비축된 긴장을 느낀다. 대통령은 부지런히 여기저기 다니며 나랏일을 하고, 자주 웃고, 아무 밥집이나 들어가 편하게 밥 잘 드시고, 국회에서 선배님을 만나 악수하며 어깨도 툭 친다. 별로 웃기지는 않지만, 뼈 없는 농담도 해서 대통령 본인도 속 편하게 웃고 착한 우리 국민 맘 편하게 해서 좋은 거 같다. 남 탓 별로 안 하고, 나라 일하면서 큰소리 밖으로 새어 나가게 하지 않고도 공무를 보는 이들을 은근히 긴장시킨다. 취임한 지 한 달 되었는데, 오래된 대통령처럼 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익숙해지고 있는 것도 같다. 크게 속상한 일들도 큰 소리 나지 않게 순리대로 잘 풀리길 바란다. 내버려 두어도 시간이 흐르면 일이 저절로 해결되게 하는 정치의 기술도 있다. 나는 오늘 우리나라 시인으로 우리 마을과 함께 하루해가 잘 넘어갔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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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03 19:25

[금요칼럼] 종소리가 외치는 삶의 우선순위

지난달, 모교에서 고위정책 과정의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KTX와 광역버스, 시내버스 등 대중교통으로 여유 있게 움직이다 보니 예상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강의 장소에 도착했다. 여유 시간에 옛 추억이 어려있는 모교의 복도를 천천히 걷다 보니 장래를 위해 고군분투하던 학생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복도 한쪽에는 옛 스승들의 젊은 시절 사진이 걸려 있었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편이 뭉클해졌다. 70년대 초,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국토계획과 환경정책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학자들이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남성, 여성의 평균수명은 각각 80.6세, 86.4세이다. 인생 2라운드를 사는 필자도 새삼 ‘세월이 참 빠르구나’ 생각을 하면서 ‘무엇이 진짜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 곰곰이 숙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체코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천문시계 ‘사도들의 행진’을 본 적이 있다. 매시 정각이면 성 비투스 대성당 앞에 있는 시계탑에서 인형들이 나오는데 관광객들은 이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든다. 그 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4개의 조각상이다.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조각상이 종을 울리는 줄을 당기면, 그 옆에 있는 ‘탐욕’, ‘허영’, ‘쾌락’을 상징하는 세 조각상이 나와서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장면이다. 죽음을 경고하는 종소리에 아랑곳없이 자신의 욕심에 집착하는 모습이 필자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우리도 시계탑에 있는 네 개의 조각상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 건강, 의미 있는 삶, 가치 있는 행동 등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뒤로 미루고 당장 눈앞에 있는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종소리는 ‘너의 삶의 우선순위를 정리해라.’라는 충고의 말처럼 필자의 가슴을 두드렸다. 일단, 내게 주어진 귀한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적절히 관리하며 의미 있게 사용하는 지혜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을 건강한 생각으로 시작하고 작은 일이라도 시간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집중하고 난 후 휴식하며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고 싶다. 똑같이 주어지는 24시간이지만 ‘오늘 하루를 잘 보냈어!’하는 뿌듯한 마음으로 잠들고 싶다. 또, 내 주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 지금까지는 나 중심의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아내, 가족, 친구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배려해야 할 시간이 왔다. ‘내가 좋으면 그들도 좋은 것’이라는 일방적 행동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제라도 알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마지막으로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히 정리하는 일이다. 읽지 않는 책, 입지 않는 옷, 무의미한 교제 등 욕망으로 끌어안고 있던 짐들을 하나하나 덜어내야겠다. 정작 필요하지 않지만 언젠가 쓰겠지 하고 쟁여놓았던 물건, 언젠가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했던 관계, 나의 경직된 프레임으로 만들어 놓은 고민들. 훌훌 버려야 진정 자유롭고 가벼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남은 하루는 의미 없게 낭비하는 1년보다 훨씬 귀하다.’ 세상을 먼저 떠난 친구가 필자에게 해준 말이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지금도 가슴 깊이 남아 있다. 삶의 끝이 언제일지 아무도 알 수 없기에 매일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오늘을 의미 있게 살아가고 싶다. 오랜만에 방문한 모교에서의 기억은 필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마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한자리에서 마주한 듯한 시간이었고, 그 속에서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프라하 천문시계 조각상처럼 내게 들리는 종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일상을 돌이켜보며 정돈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매일의 일상을 보내면서 유한한 인생임을 자각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정돈하는 그 시간. 즉, ‘삶의 우선순위’를 정돈하며 지혜롭게 살아가는 나 자신이 되고자 한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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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26 18:33

[금요칼럼] 이재명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하다

내년 6월 3일 지방선거 결과는 어떨까? 오늘 시점에서 보면 ‘민주당 승리 예측’이다. ‘대통령 후광효과’로 선거가 취임일에 가까울수록 여당에 유리하다. 2018년 지방선거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1년 즈음으로 당시 그의 지지율은 80%를 넘었다. 선거 전날 ‘북미정상회담’은 민주당 압승의 확인이다. 2022년 지방선거는 대통령 취임 22일 만으로 ‘허니문 효과’다. 윤석열 대통령 재임 중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시기가 이 때다. 2018년과 2022년 지선 모두 ‘대선의 연장전’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지방선거 결과는 ‘양대 정당독점과 반복되는 특정정당의 쏠림’이다. 2022년 지방선거의 광역의원 872석 대부분을 국민의힘(540석/62%)과 민주당(322석/37%)이 독점한다. 양당의 독점은 자신의 텃밭 지배로부터 출발한다. 국민의힘은 영남권에서 민주당은 호남에서 광역의회 의석의 90%이상을 차지한다. 대구는 32석 중 31석 광주는 23석 중 22석이다. 양당은 교대로 ‘특정 정당 쏠림의 정치적 행운’을 누린다. 2018년 광역단체장 기준 ‘민주당(14) vs. 자유한국당(2)’은 2022년 ‘국민의힘(12) vs. 민주당(5)’로 바뀐다. 기초단체장도 2018년 ‘151 vs. 53’은 2022년 ‘63 vs. 145’로 역전된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서울시 의회 110석 중 102석을 얻는다.지역구 선거는 ‘97 vs. 3’으로 비례 포함 6석의 당시 자유한국당은 교섭단체도 구성못했다.경기도 의회도 민주당은 142석 중 135석으로 압도한다.자유한국당 4석 정의당 2석 바른미래당 1석이었다. 2022년 지방선거는 정확하게 반대다. 국민의힘은 서울시 의회 112석 중 76석을 차지하며 12년 만에 과반의석을 확보한다.경기도 의회도 민주당 압도에서 양당은 지역구와 비례대표에서 각각 1석씩 더 얻으며 여야 동수 의회가 된다. 강원도 의회도 특정 정당 쏠림 현상이 엇갈린다.2014년 당시 새누리당(37/44석) 2018년은 사상 처음으로 민주당(35/46석) 그리고 2022년에는 다시 국민의힘(43/49석)이 압도적 의석을 갖는다. ‘소선거구+단순다수 선거제도의 승자독식 구조’의 당연한 결과로 결국 ‘양대 정당으로의 수렴’이다. 정당별 득표율과 의석수의 괴리도 심각하다. 2018년 지방선거 서울시 의회선거에서 당시 민주당은 51%의 득표율로 93% 의석을 독점한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25%를 득표하지만 의석은 5%에 불과하다. 당시 바른미래당(12%)과 정의당(10%)은 각각 1석씩 얻는데 그친다. 민주당 지지표와 바른미래당 지지표 1표의 가치가 23배 이상 차이다. ‘소선거구+단순다수제’의 대량 사표발생을 완화하자는 비례대표도 역할을 못한다. 전체의 10%에 불과하다.OECD 34개국 중 1등만 당선되는 제도를 채택하는 나라는 7개국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를 시행한다. 결과는 정치적 양극화와 거대 양당 중심의 지방정치의 대립구조 고착화다. 소수 의견은 배제되며 정치적 대표성도 악화된다. 지방의회의 견제와 균형 기능 상실도 당연하다. 텃밭의 양당 독점과 엇갈리는 특정 정당으로의 쏠림현상은 지방선거의 무투표 당선 급증으로 이어진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무투표 당선자는 508명으로 2002년 이후 최다다. 군소정당이 발붙일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지방자치와 지방정치 그리고 풀뿌리 민주주의의 질 저하가 우려되는 이유다. 대안은 첫째,지역정당이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지역정당을 허용하지 않는 유일한 국가다. 특히 ‘중앙당을 수도에 두도록 규정’한 것은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의 시대와 맞지 않는다. ‘지방 없는 지방자치’다. 지방자치가 발전한 나라일수록 지역정당이 활발하다. 우리도 “직접행동영등포당은 문래동의 공공공지 문제,은평민들레당은 불광천 생태하천 복원,과천시민정치당은 지식정보타운 중학교 신설 문제” 같은 구체적인 지역 현안에 집중하게 하자! 지역정당은 ‘공천이 당선이고 공천권을 가진 중앙 정치인이 모든 권력을 휘두르는 지역’과 ‘중앙정치의 대리전’에서 벗어나는 출발점이다. 의제 정당의 활성화는 정치적 소수자의 대표성 강화와 정책혁신을 통한 주민 삶의 질 개선에 기여한다. 둘째, 광역의회 중대선거구제다. 지역정당과 지방의회의 정치적 다원성은 지방의회의 견제 기능을 강화시킨다.협치의 필요성을 높이고 정책경쟁을 유인한다. 셋째, 광역단체장 결선투표제다. 원내 8개 정당 의원 11명이 공동발의에 참여한 천하람 법안이 대표적이다. 중대선거구제와 결선투표제는 지방정치의 다양화와 다당제 정치의 실험장이 될 것이다. ‘지방 있는 지방자치’가 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통령 결선투표 도입을 통한 민주적 정당성 강화와 사회적 갈등 최소화’를 약속한다. 민주당과 이 대통령의 정치적 진정성을 확인하는 계기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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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19 19:16

[금요칼럼] 6월의 장미꽃은 흐드러지고

우리 시름을 덜어주던 모란과 작약꽃이 지고 나니, 이웃집 담에 걸린 6월의 장미꽃이 보기 좋게 흐드러졌다. 붉은 장미꽃은 눈에 시리도록 탐스럽고 아름답다. 이 계절에도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는다. 죽고 사는 일은 사람으로 태어난 자가 불가피하게 겪는 숙명이니 이걸로 누군가와 드잡이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5월에 손아래 누이가 세상을 떴다. 한 배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태어난 오남매 중 손아래 누이가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조카의 연락을 받고 요양병원에 있던 누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누이는 편안해보였는데, 놀란 것은 누이가 외할머니와 판박이처럼 닮아서다. 병상에 누운 외할머니가 일어나 잘 왔다고 내 등이라도 두드릴 것만 같았다. 누이는 이태 전 암 선고를 받았다. 그동안 힘들게 투병을 하다가 내게 유서라고 할 만한 쪽지를 남기고 떠났다. 오빠, 나 먼저 가. 오빠는 천천히 있다가 와. 누이는 그렇게 적었다. 죽음을 앞두고 볼펜을 쥘 힘조차 없었을 텐데 온몸을 쥐어짜 몇 자를 적었을 테다. 그 쪽지를 조카에게 건네받아 읽을 때는 눈물을 꾹 참았는데, 육개장 국물을 플라스틱 수저로 뜨다가 눈물 몇 방울이 후두두 벌건 국물로 떨어졌다. 나는 살아 있음으로 육개장 국물이 짠지 싱거운 지도 모른 채 겨우 목구멍으로 넘겼다. 누이의 장례 뒤 새벽에 오줌을 누러 일어났다가 고요한 거실에 나와 앉아 있었다. 아내와 고양이 두 마리가 곤한 잠에 빠져 있는 시각에 나는 잠이 오지 않았음으로 거실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새벽이 오기 전 창밖은 어두컴컴했다. 누이가 떠나고 그 부재의 현전을 실감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시각이었다. 산 자는 어떻게든 살지만 죽은 자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누이의 장례식장에서 먹은 육개장 국물의 맛을 떠올리려 했으나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서럽고 애달프지 않은 죽음이 있을까마는 육친을 떠나보내는 것은 더 큰 상실감을 갖게 한다. 부모님 중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안성에 와 있던 어머니가 그 뒤를 이어 떠났다. 어머니 장례식장에서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내 가슴이 메말라 슬픔 한 조각도 없었던가? 퉁곡하 듯 울음을 토해낸 것은 장례 끝나고 보름쯤 지났을 때다. 이승에서 맺은 인연이 다했구나, 하는 자각이 스친 찰나 내 안에서 걷잡을 수 없이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나는 한밤중 시골집 부엌에서 혼자 앉아서 통곡을 쏟아냈다. 우리는 죽음을 직접 겪지는 않지만 그것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한다. 죽음이란 생리적인 운동과 활동을 멈추고 무존재로 돌아가는 일이다. 살아서는 겪을 수 없는 일, 누구나 단 한 번만 겪을 수 있는 실존적 사건, 살아 있음에 반대되는 것, 그 확실성이 죽음이다. 삶은 몸을 갖고 온갖 슬픔과 근심을 끌어안고 느끼는 것이다. 배고프면 밥을 찾아 먹고, 슬프면 눈물을 흘리는 게 삶이다. 동양 철학자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큰 걱정거리가 있는 까닭은 내가 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몸을 갖고 있지 않다면 나에게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는가(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도덕경경 13장) 오후 산책을 마친 뒤 붉은 줄장미 피어 있는 집을 지나쳐 돌아온다. 목덜미에 닿은 햇볕이 따갑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어머니를 여윈 슬픔에 잠겨 있던 롤랑 바르트는 나날의 소회를 일기에 적었다. 그 일기를 묶은 책이 ‘애도일기’다. 스쳐 읽은 것 중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 순수한 슬픔, 외롭다거나 삶을 새로 꾸미겠다거나 하는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슬픔.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벌어지고 파인 고랑.’ 왔던 것은 가고 간 것은 돌아온다. 누이가 떠나고 내 안에도 순수한 슬픔이 고인 고랑이 생겼다. 누이여, 그대 있는 곳에도 6월의 붉은 장미가 활짝 피고, 장미꽃 향기를 품은 바람도 부는가? 그대 돌아간 간 곳에서 모든 근심을 다 내려놓고 평안을 누리시게. 필경 나고 죽는 것은 하늘의 도를 따르는 것!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는 마시게.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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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12 18:36

[금요칼럼] 대통령

이따금, 문득, 때로 내가 살고 있는지, 살아 있는지, 이게 사는 것인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지. 지금 이게 꿈속은 아닌지, 내가 나의 삶을 의심하며 내게 묻기도 하고, 나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내게 묻기도 한다. 내 하루하루가 초라하고 괴롭고 슬퍼지지는 않는지, 그럭저럭 그래도, 잘못 디딘 곳이 많고 볼품없고 허술한 곳이 많기는 하지만, 사람 사는 것이, 그저 그런 거지 그저 이런 거지 이러면 되지 스스로 위안도 하며, 일어나 세수도 하고 이빨도 닦고, 물도 마시고 어질러 놓은 책도 챙기고, 거실도 정리하고, 밖에 나가 앞 산도 한번 보고, 뒷산도 돌아다 보고, 물도 보고, 숨도 몰아쉬며, 아침이구나, 또 하루를 시작하였다. 참새가 벌써 새끼를 기르나, 마당 가 감나무 잎 사이에 푸른 벌레를 물고 나를 경계한다. 까치가 앉아 있는 느티나무도 본다. 어? 오늘 아침에는 꾀꼬리가 날아와 나무 꼭대기에서 바람으로 가만 가만 노랗게 그네를 타는구나, 집 밖으로 걸어 나가 마늘 밭 가를 어슬렁거리고,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본다. 찔레 꽃은 벌써 지고 없구나. 나는 지금, 쓸쓸한가? 한가한가? 나의 시에 대한 나의 고민과 외로움과 괴로움은 정당한가. 세상에 대한 나의 말과 글은, 그 행색이 초라하지는 않은지, 내 걸음걸이는 가난하지 않고 내 얼굴 표현은 정당하고, 내 말은 저문 나무같이 아름다운가? 내가 이렇게 살자고 제법 그럴듯한 말로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간섭하고 불편하게 하고, 힘든 데다 더 힘든 말을 보태지는 않은지, 불안과 적개심은 조성하지는 않는지, 마을을 돌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 앞에 샘과 뒷산 감나무를 보고 새소리들을 들으며, 그렇게 생각하였다. 나의 시가 바람처럼, 기억나지 않은 어느 날 날씨처럼 새소리처럼 햇살처럼 없었던 것처럼 자국 없이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내 생이 풀잎이나 나뭇잎을 가만히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한 점 같이 서서히 사라지면 그만이겠다.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고 앞산의 진초록은 해마다 지치지 않고 저리 진저리를 치며 푸르러질 것이다. 숨 막히던 진초록이 지나갔다, 여기까지 산은 얼마나 요동쳤는가. 그러면서 초록은 동색이 되어 성하(盛夏)의 입구에 의연하게 섰다. 올해 새로 길어 난 마당 가 감나무 가지를 뼘으로 재어보니, 30센티미터는 더 자랐다. 감꽃이 피었구나. 꽃진 다음으로 감이 커갈 것이다. 놀랍다. ‘자연은 건너뛰지 않는다’ 나는 평생을 어머님과 아버님이 사시던 집에 살게 되었다. 부모님이 사시고 내가 태어나 자라 사는 집이 아니었으면 이런저런 일 속에서 사는 내 마음이 더 편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할 때도 더러 있다. 살아 온 많은 것들을 잊고 잃어버리고 사니까. 나의 삶은 고향을 멀리 두고 이따금 그리워하며 사는 일상이 아니다. 회한이 더 짙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내 삶을 내 주머니에 우겨서 넣고, 만지작거리며 날이면 날마다 강가로 걸어 나간다. 바람이 부는구나. 몇천 만개의 나뭇잎을 흔들고 몇천 만개도 넘는 바람이 앞산에 불어오는구나. 오늘은 강 건너 숲에서 새들이 많이도 우짖는다. 새들아 오늘 만은 우리를 위해 울어다오. 강가에 서 있다가 삶이 이래도 된다고, 어쩌겠냐고, 가보자고, 오늘도 강을 건너가 보자며, 그러자며 강을 건너간다. 그냥, 사는 게 이렇게 호젓하게, 삶은, 삶이 이렇게 구석구석 살아지는구나. 그래, 이렇게 사는 것이 사는 것일 수도 있겠다. 강을 건너면 산이다. 산을 올려다본다. 그 위에 구름이다. 구름은 흐른다. 때로 나를 고요하게 들여다보고, 후회하고 나를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며 세상에 나의 잘못을 인정하며, 때로는 못난 나를 스스로 위로하다, 다시 걷는다. 걷는 것이 나는 좋다. 지금을 버리고 다음을 딛고 그다음 새 땅을 디디면 또 새 땅이 온다. 나는 우리들의 일상에서 대통령이 있는 듯 없는 듯 잘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아니라 멋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정말 ‘멋진 사람’ 말이다. 나는 이 나라 백성이다. 때로는 나도 나라를 생각하며 잠 못 이룬 적은 있었지만, 대통령을 생각하며 ‘그런’ 적은 없었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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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0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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