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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異端)

정통과 이단이 만나는 곳에 갈등과 폭력이 일어난다. 정통의 입장에서 이단(異端)은 정통과 다른(異, 이) 끝(端, 단)에 서 있는 사람들이고, 이단의 입장에서 정통은 바르고(正) 전통(統, 통)이라는 착각에 빠져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영국 사우스포트에서 시작되어 영국 전역으로 확산한 백인 극우주의자들의 이슬람 난민 추방 시위도 정통과 이단이라는 충돌이다. 르완다 기독교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17살 영국 청년이 어린이 댄스 교실에 흉기를 들고 난입하여 어린아이 3명을 숨지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문제는 그 청년이 이슬람 난민이라는 가짜뉴스였다. 가짜뉴스는 순식간에 소셜미디어 엑스를 통해 펴졌고, 영국 전역에서 백인 극우주의자들의 난민 추방 폭력으로 이어졌다. 경찰차가 불타고, 유색인종의 차를 부수는 장면이 TV에서 연일 방송되었다. 마침 영국에 머물던 필자에게도 시위가 벌어지는 지역은 가지 말라는 메시지가 왔고 집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시위대가 목표로 삼은 런던 월섬스토(Walthamstow) 지역이나 시내 중심의 시위 예상 지역에 수만 명의 폭력 반대 시민들이 운집하여 더 큰 사건으로 번지지 않았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정통과 이단 논쟁이 있다, 기독교는 정통이고 이슬람은 이단, 백인은 정통이고 유색인종은 이단, 영국인은 정통이고 난민들은 이단이라는 이분법적 생각이다. 파키스탄이나 인도 등지에서 영국으로 들어온 무슬림 난민, 이민자들은 이번 폭동을 주도한 영국 백인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이단이다. 자기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고, 기독교 윤리에 대항하는 이단 집단이다. 여자들은 모두 히잡을 쓰고 다니고, 자기들만의 상권을 형성하여 거래하고, 아이를 많이 낳아 영국의 복지를 독식하는 용서할 수 없는 이단이라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자리와 주택은 부족하고, 주택가격과 물가는 치솟고, 도둑과 폭력으로 안전이 위협당하고 있는 영국에서, 그 원인은 모두 이민자, 난민, 이슬람, 무슬림에 있다는 생각이 보수 백인들의 감정을 폭발시킨 것이다. 지금은 영국 정부의 강력한 처벌과 시민들의 반대 시위로 잠잠해졌지만, 이 소강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 필자가 영국에서 직접 목격한 정통과 이단의 갈등이 한국에서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25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인들이 꺼리는 일을 하고 있다. 농어촌에서 부족한 노동 인력이나 건설, 식당, 요양원에 이르기까지 외국인이 없으면 도저히 유지하지 못할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최근에는 필리핀에서 가사 관리 돌봄 인력이 들어와 어린아이와 노인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외국인에 대한 시각 역시 정통과 이단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단에 대한 한국인의 차별과 멸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경제가 침체하고 실업률이 높아지면 한국인이라는 정통의 갑옷을 입고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단을 향해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잠재된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 공자가 살던 시대에도 이단에 대한 문제가 심각했다. 외부에서 들어 온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경계와 멸시가 존재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이단이라고 공격한다면(攻乎異端, 공호이단), 그 피해는 고스란히 공격한 사람에게 돌아올 것이다(斯害也已, 사해야이).” 이단에 대한 공격은 그 피해가 고스란히 공격한 자에게 돌아올 것이란 공자의 경고다. 정통과 이단은 영원하지 않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이단과 정통은 자리를 바꾼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단을 공격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돌아올 것이라는 공자의 경고를 귀 기울여 들을 때이다. /박재희(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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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5 15:33

인간은 음악과 함께 성장한다

생각해보면, 나란 사람은 음악과 함께 성장했다. 음악을 벗 삼은 덕분에 모난 인격도 조금은 둥글어 졌을 테다. 내 젊은 시절, 서울엔 ‘르네쌍스’, ‘필하모니’, ‘크로이체’ 같은 음악감상실이 버티고 있었다. 나는 자주 그 음악강상실을 찾아가 고전음악을 들었다. 다들 팝이나 포크송, 혹은 유행가에 휩쓸릴 때 꼿꼿이 고전음악에 심취했다. 처음엔 쥬페의 ‘경기병 서곡’이나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같은 표제 음악을 듣다가 바흐나 파가니니 등의 기악곡에 빠졌다. 그러다가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말러 등이 창조한 교향곡의 세계에 입성하면서 음악이 무지를 깨부수는 절대의 미와 순수한 기쁨, 숭고함을 품었다는 걸 확신했다. 며칠 전 한 라디오 방송에 초대 손님으로 나갔다. 구성작가와 통화를 하던 중 방송 중 듣고 싶은 세 곡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사라 본(Sarah Vaughan)의 ‘썸머타임’, 리 오스카(Lee Oskar)의 ‘샌프란시스코 베이(San Francisco Bay)’,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를 여름에 들으면 좋은 곡으로 골랐다. 세 곡 다 내가 아끼고 즐겨 들으며 남에게도 추천하는 곡이다. ‘썸머타임’은 누구나 다 알만큼 유명한 재즈 보컬 명곡이다. 본디 미국의 작곡가 조지 거쉰의 가극 ‘포기와 베스(Porgy ane Bess)’ 중 1막에서 자장가로 소개되었다. ‘썸머타임’을 들을 때 나는 행복한 슬픔을 맛본다. 여름밤에 보채는 아이를 품에 안은 엄마는 혼자 흥얼거린다. 강에서는 물고기가 뛰고 목화는 잘 자랐단다. 네 아빠는 부자이고, 네 엄마는 멋지지. 우리가 너를 지켜줄 테니, 아가야 울지 말거라. 시골 외할머니에게 맡겨진 탓에 엄마의 감미로운 자장가를 듣지 못한 채 자란 나는 이 곡을 들으면 숨이 막히도록 슬퍼진다. 이 결핍은 채워지지 않은 채 나란 존재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다. 30대의 어느 날, 한 카페에서 리 오스카의 연주곡을 들었다. 뱃고동 소리, 갈매기의 끼룩거림, 자동차의 경적이 어우러진 화사한 여름 항구 풍경이 떠오르는 전주만 듣고 단박에 반했다. 음반 매장에서 CD인지 음반인지를 구해서 헤아릴 수도 없이 들었다. 여름 저녁 햇볕 냄새가 밴 면 셔츠를 입고 여름의 정취가 물씬 나는 이 곡을 들으며 나는 덧없는 행복에 빠진다. 나중에 이 연주곡이 한 광고의 배경 음악으로 이 곡이 쓰이면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음악이 주는 기쁨은 무엇인가? 몇 달 전 내가 겪은 일이다. 2022년 6월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열린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 ‘크레센도’를 극장에서 관람했다. 18세 청년 임윤찬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했는데, 그걸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연주는 어디에서도 듣지 못한 것이었는데, 기절할 만큼 아름다워 놀랐던 것이다. 그는 피아노 건반을 누른 게 아니라 내 영혼을 눌러 깊은 무의식이 솟아오르게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주책없이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건 벅찬 환희와 함께 나란 존재가 순정해지는 드문 경험 탓이다. 내 음악 취향이 넓어진 건 30대를 지나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같이 고전음악만을 고수하던 나는 재즈나 비틀즈, 스모키, 딥퍼플, 사이먼 앤 가펑클, 빌리 조엘 같은 이들의 노래에도 마음의 문을 열었다. 조용필이나 최백호, 배호 같은 이들이 부른 가요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게 되었는데, 이런 취향의 변화는 세상을 알 만큼 나이를 먹으면서 얻은 범속한 트임 결과일 테다. 늦게나마 다른 장르의 음악에도 또 다른 기쁨과 아름다움이 오롯했다는 걸 깨치고, 취향의 협량함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퍽 다행이다. 음악은 무릎이 꺾인 나를 일으켜 세운 참다운 벗이다. 음악의 위로가 없었다면 인생은 얼마나 쓸쓸했을까? 그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재앙이다. 음악은 내 평생 감미로운 피난처였으니 세상이 어둡고 삭막할지라도 나는 그걸 능히 이겨낼 수 있었을 테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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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8 18:38

홍명보와 한동훈

좋은 성적을 내면 ‘홍명보 논란’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그는 “용서를 받는 방법은 대표팀의 성장과 발전을 이루는 것뿐”이라고 말한다.홍 감독은 “내 인생의 마지막 도전”으로 자신에겐 “대한민국 축구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본 감독 중 최악”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피노키홍”으로 전락했다.“홍명보의 부정출발”이라고 한다.면접 없는 ‘부탁’으로 선임되었다고도 한다.“미리 써놓은 각본”에 따른 “동문 짬짜미”의혹으로까지 이어진다. 감독선임을 주관하는 전력강화위원 중 한 사람은 “홍 감독 선임은 절차 안에서 이뤄진 게 아니다.몰랐다.”고 한다.박지성은 “진실은 내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 하고 이영표는 “축구인은 행정에서 사라져야한다.”며 “실수가 반복되면 그게 실력”이라고 꼬집는다. 홍명보 기자회견 이후에도 “감독사퇴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팀 리더십의 신뢰와 권위를 이미 상실했다는 게 근거다. “오해일 뿐 특혜는 없다.”는 게 축구협회의 입장이지만 ‘홍명보 논란’은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지난 5개월 동안 그들은 “외국인 감독을 후보에 두고 협상 중이다.”나아가 “외국인 감독을 중심으로 후보군을 한 자릿수로 압축했다.”고 말해왔다. 논란의 핵심은 감독선임 원칙과 절차제로 시스템과 프로세스의 붕괴다.리더십 선임과정의 정당성 투명성 공정성 모두 문제가 되었다.과정과 결 과 모두의 실패는 결국 한국축구의 퇴보로 나타난다. “양궁협회를 보고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1988년부터 올림픽 10연패의 여자양궁이다.“올림픽보다 국내 선발전이 더 어렵다.”는 경쟁력 중심의 선수선발이 세계정상의 출발점이다.선수 선발은 물론 운영과 관련하여 뒷말이 없는 이유다.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은 “협회가 선수명단을 제안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히딩크 감독이 “인맥축구”와 “위계축구”를 몰아낸 성과가 월드컵 4강이다.“의리축구”논란의 2014년 월드컵 때의 당사자가 바로 홍 감독이었다. 양궁협회는 국내 단일종목 스포츠 단체 중 가장 오랜 기간 후원을 받는다.그들은 ‘지원하되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다고 한다.‘공정성과 투명성만 볼 뿐 운영에 간여하지 않는다.’나아가 그들은 ‘양궁이 우리사회에 무엇을 어떻게 기여할지 고민’한다고 한다.존재 의의를 넘어선 공동체 기여의 수준이 다르다는 평가다. 축구와 양궁의 대비는 뚜렷하다.사람에 의존하는 개인화된 리더십과 절차와 과정의 시스템과 제도화의 다른 결과로 보인다.SNS 언급에서도 ‘긍정의 정의선과 부정의 정몽규’라고한다. ‘홍명보 논란’은 피할 수 있었다.축구협회가 ‘현재 대표팀에 필요한 감독 리더십의 조건을 제시하고 이에 가장 부합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었으면 되는 일이었다. 한국축구는 올 1월 아시안컵 4강에서 탈락했다.손흥민을 중심으로 한 역대급 선수구성으로 64년만의 우승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한 수 아래로 여겨지던 요르단과의 4강전에서는 유효슈팅을 하나도 기록하지 못한 졸전이었다.당시 대표팀은 “오합지졸 사분오열 콩가루 집안”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슈퍼스타 출신의 관리형 감독이 필요하다.’고 하면 된다.‘전술가보다 보스형 리더가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이다.스타 플레이어의 대표 선수들을 하나로 묶어 개인 역량을 극대화시킬 적임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홍명보 감독은 ‘원팀 원스피릿 원골’을 강조한다.“대표팀에서는 축구지식보다 통솔력이 더 중요하다.”면 “초반부터 국내 감독 중에 홍명보였다.”는 주장이 가능하고 사람들의 공감도 얻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홍명보 논란’은 축구협회 리더십의 실패다.‘현재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하며 이에 가장 적합한 리더십의 조건이 무엇’인지는 100% 그들의 몫이다. 그들은 자신도 없었고 당당하지도 못했다.변명과 회피로 일관했다.한국 축구가 계속해서 나아지고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위한 리더십의 고민은 없어 보였던 것이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메시지는 분명하다.‘미래 변화와 혁신의 리더십이 필요한 때’라는 상황 인식과 한동훈 리더십의 선택이다.출발은 신뢰와 능력의 위기에 빠진 윤석열 정권에 대한 평가와 ‘극복의 차별화’ 요구다 “국민께 제일 걱정 끼치는 게 축구협회와 국민의힘 전당대회”라는데 한동훈 대표는 자신의 미션을 이해할까! 그의 “국민 눈높이,미래의 유능 그리고 외연확장”을 통한 공공선은 무엇일까? /박명호(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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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1 15:50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현관문을 나섰다. 마을은 아직 조용하다. 비가 왔다. 우산을 폈다. 비가 잘 온다. 착실하게 온다. 마음이 착해진다. 우산 위에 빗소리와 오동나무, 가죽죽나무, 고욤나무, 오갈피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각각 다르게 일정하다. 바람이 없다. 빗소리가 마을을 불안하게 하거나 위협적이지 않았다. 꾀꼬리가 아무 일 없는 소리로 노래한다. 참새들이 마당 잔디에서 무엇인가를 물어간다. 할미새가 지붕 끝으로 날아와 앉았다. 자태가 곱다. 파랑새 새끼들 다 길렀는지 나는 연습시킨다. 집 앞에서 종길이 아재를 만났다. 이른 아침인데 벌써 논에 갔다 오신다. 고라니와 멧돼지 방지를 위해 논 가에 둘러놓은 전선 줄 전기를 차단하고 오신다. “생각보다 비가 적게 왔네요.” 그랬더니, “말보다 적게 왔고 만.” 하신다. 종길이 아재가 집 앞 콩밭에 들어서며, “어젯밤에 또 고라니란 놈들이 왔다 갔고 만, 이놈들은 꼭 콩 새순을 똑똑 따먹는 당게” 하신다. 강가로 나갔다. 돌아가신 당숙모네 밭에 이장이 콩을 심어놓았다. 이장 부인이 콩밭 풀을 매다 말았다. 다른 급한 일이 생겼었나 보다. 뽑아 모아둔 풀과 호미가 비 맞는다. 이장이 우리동네 농사를 다 짓다시피 한다. 옥수수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도 토닥토닥 차분하다. 강가에 섰다. 물이 조금 불었다. 물이 다리를 넘어간다. 어제 온 비와 보태졌다. 붉덩물이다. 어디서 갑자기 소낙비가 왔나 보다. 강 건너를 보았다. 칡넝쿨들이 묵은 밭 감나무를 타고 올라가 감싸버렸다. 감나무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 큰 돌들이 물에 잠겨 물살을 일으킨다. 오늘도 마을을 한 바퀴 돌기로 한다. 마을 제일 끝집인 양식이네 집을 지났다. 양식이는 아직 출근 전이다. 전주 누나네 집 식당 일을 돕는다. 현수네 집에는 불이 켜져 있다. 텔레비전 소리가 새어나온다. 현수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거동이 불편했는데, 어제는 회관까지 걸어오셨다. 집 안에서 새어나온 목소리가 정상이 되셨다. 현수네 집 위 이장네 집도 불이 켜져 있다. 이장 말소리가 들린다. 일 나갈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재호네 집 앞을 지났다. 찬수네 빈집터에 풀이 우북하다. 찬수네 집 앞 논을 메꾸어 찬수 여동생이 새로 집을 짓고 있다. 집이 다 되어간다. 오래 묵은 태환이 형 빈 집터를 지났다. 태주네 어머니는 딸네 집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빈집으로 오래 있어서 마당에 풀이 많이 자랐다. 마당 가 죽은 대추나무에 참새들이 앉아 있다. 태금이네 빈 집 마당 풀이 자라고 했다. 주성이 네 집도 고요하고, 점순네 집도 고요하다. 마당에서 흰 개가 자기 집에서 나를 내다보고 있다. 마을회관도 정자도 아직 조용하다. 정자 마루에 부채와 파리채와 물병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사람들이 페트병에 물을 넣어 목침처럼 베고 낮잠을 잔다. 리모델링 하는 만조 형님네 집을 지나 우리 집 앞을 지났다. 우리 집 담에 능소화꽃이 땅에 떨어져 비를 맞는다. 집 앞 텃밭에 참깨꽃이 희게 피었다. 밭 가에 옥수수가 내 키를 넘게 자랐다. 곧 옥수수를 따겠다. 판조 형님에 집 부엌 쪽문에 불이 환하다. 창문 너머로 텔레비전 사극 속 격노하는 왕 앞에 도열한 장수들 얼굴이 심각하다. 종현이네 집 마당에 웬 승용차가 있다. 누가 왔을까? 못 보던 차다. 당숙모가 안 계신 당숙모네 집은 적막하다. 오래 묵은 세곤이네 빈집 담에 담쟁이넝쿨이 무성하다. 마당에는 개망초꽃이 빗속에 모여 희디희다. 현미네 집 앞에 차가 있다. 출근 전이다. 한수 형님네 집, 종길이 아재네 집을 바라보고, 다시 마을 큰길로 나왔다. 바람이 일었다. 마을 앞 커다란 느티나무 밑을 지날 때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크다. 강물이 출렁인다. 옥수수잎과 참깨꽃이 심하게 흔들린다.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고 새들이 조용하다. 그때다. 후두두 굵은 빗방울이 얼굴을 때린다. 집으로 뛰었다. 먼 곳에서 천둥이 으르렁거린다. 나라에 큰비가 온다고 한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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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5 17:00

‘피니싱웰(Finishing-well)’, 멋진 마무리란

지난주, 필자가 존경하던 선배 두 분이 돌아가셨다. 그분들과 웃고,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다시는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수년 전만 해도 친구 부모님들의 장례식 조문이 더 많았지만 이제는 주변 선배들의 부고 소식이 더 많으니 새삼 ‘피니싱웰(Finishing-well)’에 대해 생각해 본다. 90년 가까운 생애 동안 세계환경의 격변, 삶의 변화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다가 돌아가신 한 선배의 모습을 거듭 떠올려보는 요즘이다. 필자가 있는 대학의 전임 총장이었던 고(故) 존 엔디컷(John E. Endicott)박사의 삶은 수많은 도전과 변화가 담긴 한 편의 영화 같다. 군인에서 대학교수, 낯선 타국의 대학 총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환경 변화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도전과 용기로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ROTC생활과 학업을 병행하였고 졸업 후 공군 소위로 임관하여 군 복무를 시작하였다. 일본, 하와이, 베트남 등 전쟁터에 투입되는 등 군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방 최고공로훈장을 받았다. 전역 후 1986년 국방부 산하 국가전략 연구소장 등을 역임한 후, 조지아 공과대학교(Georgia Tech.)에서 교수로서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다. 국제전략기술정책센터 소장 겸 샘넌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며 군에서 경험한 이론과 실무를 토대로 국가 방위전략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였고, ‘동북아시아 비핵화구역(LNWFZ-NEA)’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런 공로로 두 번의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70을 넘긴 나이에는 낯설고 물선 한국 땅에서 대학 총장(2009년 취임)으로 세 번째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고 당시로는 참신한 글로벌 대학의 모델을 실현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100%로 진행되는 영어수업과 다양한 국가의 학생, 교수 선발 등 다문화 환경을 경험할 수 있는 국제경영대학 모델을 구축하여 AACSB(국제경영대학발전협의회) 인증을 받는 등 안정적으로 대학을 운영하였다. 국제대학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과학기술을 융합한 새로운 단과대학을 설립하였는데 그동안의 공로에 대한 업적으로 본인의 이름으로 명명된 ‘엔디컷국제대학’을 생애 가장 큰 명예로 여기고 2021년 퇴직하여 고향인 조지아주로 돌아갔다. 평생동안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고(故) 엔디컷 총장의 삶에서 나는 많은 배울 점을 보았다. 첫 번째는 도전정신이다. 30년 가까운 군 생활 이후에도 연구소장, 대학교수, 심지어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환경에서의 대학총장까지 다양한 변화에 망설임 없는 도전으로 임하면서 나이가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개척정신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는 주변과 협업해 나아가는 열린 마음이다. 군 생활 중에 여러 파견국가에서 임무를 수행하면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수용하는 유연성을 키웠으며 이해관계가 얽힌 동북아의 비핵화 문제 등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현명하게 해결했다. 또 낯선 한국 땅에서 총장으로서 대학을 경영하며 다양한 문화를 가진 학생, 교직원들과 직접 대화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하였다. 한번 만난 사람들을 잊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모습은 인연을 맺은 모든 이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리더의 본보기와 같은 자세였다. 세 번째는 낙관적인 삶의 태도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쟁터, 두 번의 큰 수술, 타국의 낯선 문화환경 등 삶의 고비 앞에서도 그는 늘 낙관적이었다. 작년 미국 출장 중 그를 만났다. 부쩍 야위어 보여 물어보니,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내를 간호하느라 살이 빠졌다. 오히려 아내 덕에 다이어트가 되었고 그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받은 도움을 이제야 갚는다고,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잘한 일이 아내를 만난 일.’이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그와의 마지막 만남은 힘듦 속에서도 긍정과 감사를 선택해 왔던 그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했다. 가까운 선배, 친구들의 부음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울적한 마음에 빠져들지만, 그때마다 마음을 추스르고 힘을 내본다. 도전정신, 따뜻한 마음과 열린 자세, 낙관적인 삶의 태도로 아흔 평생을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던 엔디컷 총장의 모습에서 필자도 어떻게 피니싱웰(Finishing-well)해서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아름다운 여운을 남길지 고민해본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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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8 15:21

미연(未然)에 방지(防止)

시간당 100mm 이상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장마철 각종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기상청은 200년 만에 한번 정도 발생할 수 있는 강수량이라고 발표했다. 승강기 침수와 산사태로 인명사고가 발생하고, 도로가 침수되고 비닐하우스가 무너지는 등 장마철 피해는 미연(未然)에 방지할 수는 없었을까? 일방통행로를 잘못 인식하고 진입하여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교통사고로 안타까운 사망사건이 발생하였다. 미연에 방지할 수는 없었을까? 아동학대 혐의로 고소당하여 진실 공방을 하고 있는 축구아카데미 대표, 명품 백 알선 수수에 대한 공방으로 촉발된 정치권 싸움, 음주운전 사고 후 뺑소니로 구속되어 재판받는 연예인, 눈뜨면 벌어지는 각종 사건 사고를 보며 미연에 방지할 수는 없을까를 질문해 본다. 미연에 방지할 수만 있었다면 그런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란 안타까움 때문이다. 미연(未然)은 아직까지 일이 터져서 그렇게(然) 되지 않았다(未)는 뜻이다. 미연에 방지하라는 이야기는 아직까지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때 미리 조치를 취하여 일의 발생을 막는다는 것이다. 하수는 사고가 터져도 해결하지 못하고, 중수는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해결하고, 고수는 사고가 나기 전에 해결하여 사고 자체를 막는다. 미연에 방지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고수다.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편작(扁鵲)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의술을 갖고 있었던 명의였다. 편작에게는 형제가 셋이 있었는데 모두 의술에 능통했다고 한다. 형제 중에 누가 제일 의술이 뛰어나냐는 질문에 편작은 큰형이라고 대답하였다. 큰형은 병이 나기 전에 미리 알아차려서 미연에 예방하니 의술이 가장 뛰어나고, 둘째형은 병이 드러나기 시작할 때 치료를 해주고, 자신은 환자의 병세가 깊어 고통을 호소할 때 비로소 치료하기 때문에 가장 수준이 낮다는 것이다. 자신이 명의라고 세상 사람들에 알려져 있는 것은 병이 나서 고치는 것만 보고 그러는 것이니 진짜 고수는 병이 나기 전에 미연에 치료하는 큰형이라는 것이다. 편작은 이미 발생한 병만 고치는 하수라면 편작의 큰형은 예방의학을 실천한 미연의 고수였던 것이다. 중국 원(元)나라 좌극명(左克明)이 편집한 <고악부(古樂府)>에는 군자의 능력을 ‘미연(未然)에 방지(防止)’라고 정의한다. 일이 터지기 전에 미리 조심하고 조치하여 예방한다는 것이다. ‘군자는 일이 터지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사람이다(君子防未然, 군자방미연). 군자는 남들의 의혹을 살만 일을 하지 않는다(不處嫌疑間, 불처혐의간).’ 오이 밭에서는 신발 끈 매지 말고, 자두나무 밑에서는 모자를 만지지 말아야 도둑질 한다는 혐의를 미연에 방지 할 수 있다. 고위층 인사들은 남의 의심이나 의혹을 살 행동은 해서는 안 된다. 사건이 터지고 혐의를 받기 전에 미연에 조심해야 한다. 명품 백을 그냥 준다고 덥석 받고, 법인카드를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고,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난다면 미연의 방지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기미를 읽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기미(幾微)는 일이 발생하기 전에 나타나는 미세한(微, 미) 조짐(幾, 기)이다. 어떤 일이 발생하기 전에 반드시 조짐이 있다. 사고가 자주 나는 도로에는 사고의 기미가 있고, 침수가 자주 되는 도로에는 침수의 기미가 있다. 기미를 알고 미연에 방지하면 큰 사고를 막을 수 있다. 하인리히 법칙에 의하면 어떤 큰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는 작은 사건과 조짐이 선행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큰 사고는 예정된 사고이며, 큰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작은 사고와 기미가 선행한다는 것이다. 고수는 기미를 미리 읽고 일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얼마 전 받은 건강검진에서 몇 가지 나쁜 징후의 수치가 나타났다. 큰 병나서 고생하기 전에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건강관리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는 다짐을 해 본다. 병나고 나서 병원 찾는 것은 하수이기 때문이다. /박재희 (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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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1 15:13

우리는 희망의 불씨를 보았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열린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는 여느 해와 달리 인파가 몰렸다. 전시장에 입장하려는 인파가 통로를 메운 채 이동하는 광경은 진풍경이었다. 전시장 입장에만 한 시간 넘게 소요되었다. 출판사 부스마다 저자 강연을 마련하고, 전문가가 나서서 책 추천도 하고, 저자 서명 같은 행사 등으로 독자의 관심을 끈다. 출판사 부스를 순례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벅찬 감정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닐 테다. 이토록 많은 독자들을 마주하며 고무된 한 출판인은 출판사는 좋은 책 내는 데만 집중하면 된다, 면서 자신감을 내비쳤다. 우리나라 성인 독서율이 낮다고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해마다 수천군데의 출판사에서 8만여 종의 신간을 쏟아내는데, 1년 동안 책을 1권도 안 읽는 우리나라 성인은 10명 중 6명이라고 한다. 책을 읽지 않으면 가용 어휘의 양이 줄고, 복잡한 사유를 할 능력이 사라지며, 뇌의 인지 능력도 감소된다. 왜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가? 시간이 없다, 책값이 비싸다, 좋은 책이 드물다, 같은 다양한 이유를 댄다. 책을 멀리 하는 사정도 제각각이다. 우리에게 ‘읽는 뇌’의 경이로운 여정을 알린 이는 인지신경과학자인 매리언 울프라는 사람이다. 울프는 독서가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반복적인 독서 경험을 통해 읽는 능력, 즉 공감하고 이해하는 문해력, 추론, 사색과 성찰을 위한 지력을 키워야만 한다는 뜻이다. 독서란 학습과 훈련을 통해 체득해야만 하는 생존 기술 중 하나다. 독서는 인지적 프로세스 전체를 포괄하는 활동이고, 뇌에 생물학적, 지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촉매제다. 인류는 독서 능력을 체득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인류는 책 읽는 능력을 갖춘 뒤 놀라울 지력을 갖춘 존재로 진화한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독서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그 발명품을 통해 인간은 뇌 조직을 재편성했고 그렇게 재편성된 뇌는 인간의 사고 능력을 확장했으며 그것이 결국 인지 발달을 바꿔놓았다’.(매리언 울프 ‘프루스트와 오징어’) 내 뇌가 읽기 능력을 갖춘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에 출현한 지 30만년이 흘렀다. 30만년의 끄트머리에서 문자가 나오고 책이 나올 때까지 인류는 문자나 책 없는 살았다. 인류가 점토판, 거북의 등껍질, 바위, 양피지, 파피루스, 죽간 등에 문자롤 기록한 건 겨우 6천년 전이고, 책은 그보다 한참 뒤에 출현한다. 원시인의 뇌에는 독서를 할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수세기에 걸쳐 책과 친해지는 과정을 거치고 읽는 학습을 반복하면서 인류의 뇌에는 책을 읽는 회로와 배선이 만들어졌다. 문자를 발명해내 읽기에의 걸음마를 시작한 수메르인 이후 쿠덴베르크 활자가 발명된 하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읽는 뇌’를 만드는데 장구한 세월을 보낸다. 인류는 진화 과정을 거치며 뇌에는 큰 혁신과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책 읽는 뇌의 시대에서 이미 디지털 뇌로 전환하는 징후들이 나타난다. ‘매일 디지털 화면이 제공하는 무수히 많은 정보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폭발적인 정보에서 또 다른 정보로 이동한다’.(매리언 울프 ‘프루스트와 오징어’) 책을 읽고 사색하는 대신 디지털 기기에서 검색하며 정보를 손에 넣는 동안 우리의 뇌에서는 깊은 독서와 사색 능력을 강제로 삭제당하는 중이다. 책이란 문자로 엮인 생각의 뭉치, 사유의 덩어리, 혹은 서사의 집적체이다. 인류는 책과 친해지고 ‘읽는 뇌’를 도약대 삼아 놀라운 진화상의 성과를 거둔다. 인류가 책과 담을 쌓고 멀어진 뒤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바뀔까? 그 미래가 낙관적일 것 같지는 않다. 진짜 위기는 위기가 위기임을 모르는 데서 시작한다. 출판업은 지식을 생산하고 그 역량의 키우는 산업이다. 지금 출판업은 위기다! 만년 적자에 빠진 출판업의 위기는 서점과 인쇄소의 연쇄 도산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 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을 찾은 젊은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룬 건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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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4 15:13

국민의힘 전당대회 ‘보수 재구성의 출발점’ 될까?

국민의힘이 차기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의 후보자 등록을 마감했다.대표경선에는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 한동훈 후보가 나섰고 4명을 뽑는 최고위원에는 모두 10명이 후보신청을 했는데 현역의원이 4명 원외에서 6명이 지원했다.최고위원 4명 중 한 명은 여성 몫인데 후보자 중 유일한 여성후보는 이미 당선이 확정된 셈이라고 한다. 청년 청년최고위원 한 자리에도 11명의 후보자가 몰렸다.10명이 신청한 최고위원 경선과 함께 전당대회 선관위가 예비경선의 컷오프 적용 여부와 경선 참여인원 등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어서 본선 경쟁 참여자 수는 다소 줄어들 수 있어 보인다. 본선 진출자들은 7월 23일 치러지는 전당대회까지 전국 권역별 합동연설회를 갖는데 다음달 7일 광주·전북·전남·전주 지역 당원들을 대상으로 첫 대회전을 치른다.이어서 10일 부산·울산·경남,12일 대구·경북,15일 대전·세종·충북·충남,17일 서울·인천·경기·강원 순으로 합동연설회가 차례로 진행된다고 한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첫 번째 관심은 ‘어대한(어차피 대표는 한동훈)’이 계속되느냐다.후보등록 전까지의 여론흐름은 ‘1강 2중 1약’이었다.조사에 따라 다르지만 국민의힘 지지층 또는 보수층에서 한동훈 지지여론이 압도적이다.대부분의 조사에서 찬성과 지지가 최소한 절반이상이고 높게는 70% 전후까지 육박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한동훈의 출마와 이재명의 연임’에 대한 여론이 당내외로 엇갈린다는 점이다.두 사람 모두 당원과 핵심 지지층의 높은 지지를 받지만 당 밖으로 나가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재명 연임’에 대한 찬반여론이 지지층과 당 밖으로 나뉘는 것은 이중적 해석의 대상이다.이재명 지지층의 계속된 결속력 강화와 동시에 당내 민주주의와 다양성에 대해 대다수 사람들이 갖는 위기의식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한동훈 지지’에 대해 지지층과 당 밖 여론이 엇갈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그에 대한 국민의힘 지지층과 보수층의 미래 기대와 아쉬움의 표현이다.그들은 한동훈이 보수의 미래라고 기대한다.물론 한동훈이 지난 총선패배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도 않지만 총선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가 할 수 있는(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해보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그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후보등록 후 첫 여론조사가 분기점이다.특히 ‘1강 2중 1약의 구도가 지속 되느냐,여전히 압도적 1위냐,누가 2위냐,2위의 앞뒤 격차는 얼마냐’가 핵심이다. 초점은 한동훈의 ‘수평적 당정관계 구축과 대법원장 추천의 채 상병 특검추진’ vs.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의 ‘당정 소통강화와 선 수사 후 특검’이 갖는 여론의 영향력이다.한마디로 ‘한동훈이냐 vs. 아니냐’의 첫 시험대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두 번째 관심은 결선투표 여부다.1차 투표에서 대표경선의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5일 후 7월 28일 결선투표가 진행 된다.후보 등록 후 여론흐름을 봐야겠지만 결선투표로 간다면 승부를 예측할 수 없을 수도 있다. “1강” 입장에서 결선투표는 부담스럽다.결선에서 승리하더라도 여권 내 리더십의 타격은 불가피하다.채 상병 특검 등 현안과 관련한 입장 차이는 당정관계의 재정립은 물론 ‘무(無)당적 대통령의 국정운영이라는 한국정치의 새로운 실험,’ 나아가 그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한다. 결선투표의 쟁점은 ‘윤석열이냐 vs. 아니냐’다.‘한동훈이냐 아니냐’의 1차 투표가 ‘한동훈의 기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묻는 것이라면,결선투표는 국민의힘 지지층과 보수층에 ‘윤석열의 평가’를 묻는다. 대통령 지지율은 ‘윤석열 평가’의 한 표현이다.전국지표조사(NBS)애 따르면 대통령 국정운영의 긍정평가는 27% 부정평가는 64%로 4월 총선이후 뚜렷한 변화 없이 비슷한 수준이다.다른 조사에서도 대통령 지지율은 20% 후반 또는 30% 초반의 박스권이다. 한동훈이 ‘윤석열 극복의 차별화’로 승부수를 던진 상황에서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의 선택’은 무엇일까? 그들은 자신의 색깔과 정체성을 무엇으로 규정하며 스스로 보수의 대안과 미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결국 영남의 선택이다.영남 보수와 수도권 보수분화의 시작일까? 한 달 앞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보수 재구성의 시작이 될까?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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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7 17:35

국민의힘 전당대회 ‘보수 재구성의 출발점’ 될까?

국민의힘이 차기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의 후보자 등록을 마감했다.대표경선에는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 한동훈 후보가 나섰고 4명을 뽑는 최고위원에는 모두 10명이 후보신청을 했는데 현역의원이 4명 원외에서 6명이 지원했다.최고위원 4명 중 한 명은 여성 몫인데 후보자 중 유일한 여성후보는 이미 당선이 확정된 셈이라고 한다. 청년 청년최고위원 한 자리에도 11명의 후보자가 몰렸다.10명이 신청한 최고위원 경선과 함께 전당대회 선관위가 예비경선의 컷오프 적용 여부와 경선 참여인원 등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어서 본선 경쟁 참여자 수는 다소 줄어들 수 있어 보인다. 본선 진출자들은 7월 23일 치러지는 전당대회까지 전국 권역별 합동연설회를 갖는데 다음달 7일 광주·전북·전남·전주 지역 당원들을 대상으로 첫 대회전을 치른다.이어서 10일 부산·울산·경남,12일 대구·경북,15일 대전·세종·충북·충남,17일 서울·인천·경기·강원 순으로 합동연설회가 차례로 진행된다고 한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첫 번째 관심은 ‘어대한(어차피 대표는 한동훈)’이 계속되느냐다.후보등록 전까지의 여론흐름은 ‘1강 2중 1약’이었다.조사에 따라 다르지만 국민의힘 지지층 또는 보수층에서 한동훈 지지여론이 압도적이다.대부분의 조사에서 찬성과 지지가 최소한 절반이상이고 높게는 70% 전후까지 육박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한동훈의 출마와 이재명의 연임’에 대한 여론이 당내외로 엇갈린다는 점이다.두 사람 모두 당원과 핵심 지지층의 높은 지지를 받지만 당 밖으로 나가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재명 연임’에 대한 찬반여론이 지지층과 당 밖으로 나뉘는 것은 이중적 해석의 대상이다.이재명 지지층의 계속된 결속력 강화와 동시에 당내 민주주의와 다양성에 대해 대다수 사람들이 갖는 위기의식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한동훈 지지’에 대해 지지층과 당 밖 여론이 엇갈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그에 대한 국민의힘 지지층과 보수층의 미래 기대와 아쉬움의 표현이다.그들은 한동훈이 보수의 미래라고 기대한다.물론 한동훈이 지난 총선패배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도 않지만 총선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가 할 수 있는(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해보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그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후보등록 후 첫 여론조사가 분기점이다.특히 ‘1강 2중 1약의 구도가 지속 되느냐,여전히 압도적 1위냐,누가 2위냐,2위의 앞뒤 격차는 얼마냐’가 핵심이다. 초점은 한동훈의 ‘수평적 당정관계 구축과 대법원장 추천의 채 상병 특검추진’ vs.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의 ‘당정 소통강화와 선 수사 후 특검’이 갖는 여론의 영향력이다.한마디로 ‘한동훈이냐 vs. 아니냐’의 첫 시험대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두 번째 관심은 결선투표 여부다.1차 투표에서 대표경선의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5일 후 7월 28일 결선투표가 진행 된다.후보 등록 후 여론흐름을 봐야겠지만 결선투표로 간다면 승부를 예측할 수 없을 수도 있다. “1강” 입장에서 결선투표는 부담스럽다.결선에서 승리하더라도 여권 내 리더십의 타격은 불가피하다.채 상병 특검 등 현안과 관련한 입장 차이는 당정관계의 재정립은 물론 ‘무(無)당적 대통령의 국정운영이라는 한국정치의 새로운 실험,’ 나아가 그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한다. 결선투표의 쟁점은 ‘윤석열이냐 vs. 아니냐’다.‘한동훈이냐 아니냐’의 1차 투표가 ‘한동훈의 기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묻는 것이라면,결선투표는 국민의힘 지지층과 보수층에 ‘윤석열의 평가’를 묻는다. 대통령 지지율은 ‘윤석열 평가’의 한 표현이다.전국지표조사(NBS)애 따르면 대통령 국정운영의 긍정평가는 27% 부정평가는 64%로 4월 총선이후 뚜렷한 변화 없이 비슷한 수준이다.다른 조사에서도 대통령 지지율은 20% 후반 또는 30% 초반의 박스권이다. 한동훈이 ‘윤석열 극복의 차별화’로 승부수를 던진 상황에서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의 선택’은 무엇일까? 그들은 자신의 색깔과 정체성을 무엇으로 규정하며 스스로 보수의 대안과 미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결국 영남의 선택이다.영남 보수와 수도권 보수분화의 시작일까? 한 달 앞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보수 재구성의 시작이 될까?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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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7 17:26

그렇게 된 나의 인생

해진다. 나는 걸어서 마을 밖으로 나간다. 마을에서 떨어진 길가 모정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 인사를 하며 어디 사느냐고, 물었다. 이웃 마을에 사는데 선생님 제자라고 해서 놀랐다. 그냐? 하며, 반갑게 악수하였다. 자기 이름을 말하며 수줍어한다. 제자 아버지는 허리가 몹시 굽었었다. 짧은 머리에 유순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어떤 때는, 영화 속의 동학농민군들이나 흑백사진 속 독립군 단체 사진 얼굴처럼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은 공동의 신념이 얼굴에 스쳐 갈 때도 있었다. 달구지로 나무도 해 나르고 보리도 벼도 실어 날랐다. 나는 그 어른이 어쩐지 좋았다. 제자는 시내버스 운전한단다. 정년이 6년 남았단다. 내가 아버님을 속으로 좋아했다고 말했다. 제자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봤다. 사회적인 공분을 살만한 일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온 선량한 시민의 얼굴이다. 우리 집에 한 번 들려라. 아버지 사진이 나온 책이 있다고, 했다. 조금 걸어갔더니, 다른 제자가 비닐하우스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저 제자 아들도 가르쳤다. 그때 내가 가르쳤던 아이를 닮은 아이가 있어서 사진 찍어 준다고 했더니, 길로 쪼르르 뛰어 올라왔다. 이름을 물었더니 이름을 말하고는, 아버지가 힘들게 지었단다. 내가 웃었다. 아이는 2학년이다. 자기는 공부를 아주 열심히 잘한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누구냐고 물었다. 네 아버지와 네 큰 형을 가르쳤다고 했다. 어디 가냐고 했다. 저기, 간다고 했다. 비가 온다고 했냐고 내게 물었다. 모르지만 비는 올 것 같지는 않다고 하늘을 보며 말했다.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어디 가냐고 또 물었다. 우리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내용은 별로 없다. 오랜만에 2학년 학동과 몸짓 손짓 발 짓을 해가며 큰 소리로 떠들며 이야기했다. 둘이 크게 웃기도 했다. 막힌 데 없이 이어지는 유쾌하고 활발한 담소(?)다. 나는 2학년을 20여 년 가르쳤다. 그럼, 나는 이제 그냥 가보겠다고 했다. 또 어디까지 가냐고 했다. 그러다가 아, 아까 말했지, 하며 할아버지는 어디 사냐고 했다. 저기 산다고 우리 마을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언제 놀러 오라고 했다. 그런다고 하는 아이에게 나, 이제 가도 되냐고 확실하게 물었다. 어디까지 가냐고 또 물었다. 귀여워서 또 사진을 찍었다. 두 손가락을 펴서 브이 자를 만들어 눈에 대고 이이이, 하고 억지로 웃다가 진짜로 히히 웃었다. 앞니가 모두 빠졌다. 그때 아이 아버지가 선생님, 그 녀석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으니 그만 가시라고 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바쁘신 분이다. 그만 보내 드려라. 그럼 간다고 하고 빨리 걸어갔다. 돌아오면서 보니, 아이가 아버지 트랙터에 타고 있다가 큰 소리로 지금 아버지가 창고 만든다고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했다. 아이 형이 생각났다. 이 아이 형은 미니포크레인도 운전할 줄 알았었다. 아버지의 잔심부름은 다 하였다. 나는 하교할 때 아이에게 주려고 이따금 아이스케키를 사 들고 가기도 했다. 빈손으로 만난 어느 날 돈도 2천 원 준 기억이 난다. 그럼 나가볼게, 안녕! 근데 할아버지 집이 어디예요. 아까 말했어도 또 저기 저쪽 산 아래 있어. 언제 놀러 와, 그랬더니, 큰 소리로 우리 형 알아요, 한다. 내가 형을 가르쳤다고 나도 크게 말했다. 그럼, 이제 진짜로 가볼게. 오늘 정말 반가웠어. 잘 있어. 날이 어두워졌다. 강둑길 풀밭에 밤바람이 불었다. 이것은 나의 인생! 오다가 뒤돌아보았다. 아이가 크게 손을 흔든다. 이 길은 나의 길이다. 초등학교 6년 선생으로 31년 나는 이 강물을 거스르고 때로 따르며 순응과 거역을 배우고 자유를 얻는다. 지금도 나는 이 길을 걷는다. 나는 이렇게 이 길에서 하얗게 늙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다. 자다 깼다 새벽이다. 창가에 달이 떠 있어서 놀랐다. 달이 나를 보고 있다. 좋아하였다. 아까 본 아이 생각이 났다. 나는 조각달 오목한 곳을 가만히 베고 잔다. 새는 소쩍새, 밤에 새가 운다. 나는 저 새 소리로 내게 주어진 삶을 괴로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고쳐 눕고, 다시 잔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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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0 17:27

나이 들어 하는 공부의 즐거움

이른 아침,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대학 캠퍼스로 출근하는 것은 교수 생활을 해 온 나의 고유한 즐거움이다. 아침 등굣길, 젊은 학생들 사이로 배낭을 메고 활기차게 걸어가는 나이 지긋한 분들의 모습이 눈에 띄면, ‘정년을 앞둔 교수님들이 아침 일찍부터 수업 준비를 하시려고 일찍 출근하는구나!’라는 생각에 저절로 흐뭇해진다. 그런데 며칠 후 교내 행사에 참여하니 학생 대표석에 (교수라고 착각했던)그 분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후 사석에서 그 분에게 만학의 이유를 물으니 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자신의 딸을 조금 더 정성스럽게 보살펴주기 위해 대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껴 입학하게 되었고, 지금은 공부가 재밌고 행복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과 교수들이 수업시간, 시험 등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어린 학생들에게 모범이 된다는 말을 전해 들으며 새삼 마음이 따뜻해졌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목표를 위해 공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은퇴 후 본인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 위해 늦은 나이에 새로운 공부를 시작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한 또 다른 모델이 필자 주변에 있다. 연구소에서 평생 연구직으로 종사하며 나름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아온 분이 은퇴즈음, 평소 소망이었던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원문소설을 읽고 소화하고 싶다는 목표를 세우고, 60대에 영문학과에 편입하여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대학 생활 동안 젊은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었고 졸업 후 대학원까지 진학하였다.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면서 직접 아일랜드에 가보고, 소설의 배경이었던 더블린을 방문하여 작가의 하숙집, 애용하던 카페, 서점에 가서 작가와 시간을 초월한 공감대를 느끼는 경험을 통해 생애 최고의 성취감과 행복을 느꼈다고 말했다. 일본은 이미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재취업, 고령자 창업, 재교육 등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퇴직자 스스로 은퇴 이후를 새롭게 개척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추세다. 우리나라 역시 기대수명은 점점 증가하는 반면, 퇴직연령은 평균 50세 머물러있어 은퇴 후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일상에 치여 못했던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런 사회변화를 고려하면 (지역)대학이 지역사회와의 상생을 위해 해야 하는 역할은 분명하다. 은퇴 후 공부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구체화시키고 지원하는 역할을 지역 교육기관(대학)이 수행해 나가야한다. 우선은, 본인이 꿈꾸고 진짜로 해보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려는 도전이 필요하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공부를 시작해 보려는 도전과 ‘할 수 있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미 젊은 학생들이 있는 밝고 활기찬 캠퍼스에 발을 디뎌 성공적인 대학 생활을 하고 본보기가 되고 있는 분들처럼 본인의 목표를 향해 적극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음으로, 늦은 나이에 공부하려는 분들이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지역대학, 고등교육기관, 지자체 등에서 좀 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평생교육 체계 내에서 조금 더 나아가 마이크로디그리(Micro Degree) 형태의 성인학습자 교육을 통한 소단위 이수 등 수요자의 요구에 맞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퇴직자들의 전문적인 경험과 노하우를 학생, 지역주민들에게 환원하고 봉사할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서로가 함께 공부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필자도 젊지 않은 나이에 변화를 위해 용기를 내고 실천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100세 시대, 인생 절반 이상을 살아온 시점에서 조용히 내 마음의 소리를 한 번 들어봐도 좋을 것이다. 떠밀려 주변의 잣대와 의무로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을 마무리하고 진짜 하고 싶었던 나만의 공부를 찾아서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나이 들어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만끽하다 보면 생이 주는 또 다른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새로운 꿈을 찾아 캠퍼스를 누비는 만학도를 만나면 가장 따뜻하고 반가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싶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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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3 15:10

태평성대를 위한 교태(交泰) 혁명

요즘 석천학당 학생들과 주역 공부에 푹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낸다. ‘모든 것은 변화하며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주역 철학은 상처 나지 않고 온전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인생은 기대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가온 상황을 정확히 인정하고(時, 시), 바라보고(觀, 관), 결정(彖, 단)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질문과 대답은 모두 나의 몫이다. 주역은 나에게 묻고 내가 답하는 학문이다. 세상에 나만큼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 없기에 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엄중하고 현명한 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역의 11번째 괘, ‘지천태(地天泰)’ 괘를 뽑았다. 태(泰)는 평안하고 태평하다는 뜻으로 사람 이름이나 지명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 한자어이기도 하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편안하다는(國泰民安, 국태민안), 태안(泰安)은 인류 역사의 꿈이었다.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은 주역의 태괘(泰卦)에서 유래한다. 하늘(天)과 땅(地)이 서로 자리를 바꿔 교차(交, 교)하여 태평한 세상을 만든다는 뜻으로, 최초 만들어졌던 세종 때에는 왕과 신하들이 정사를 의논하고 연회를 베풀던 장소였다. 하늘은 자신을 낮추고 내려가고(來, 래), 땅은 하늘 위에 올라가(往, 왕) 존중받는 지천(地天)의 세상이 태평성대다. 강자가 약자를 섬기고, 권력이 개인을 보호하고, 갑이 을에게 양보하는 세상이 교태(交泰)의 세상이다. 강자와 약자가 대립하지 않고 소통하니 같은 꿈을 꿀 수 있다. 기업이 교태하면 경쟁력이 강화되고, 가정이 교태하면 만사가 형통하다. 교태는 역할을 바꾸는(交) 혁명이다. 대한민국의 다음 혁명은 교태혁명이다. 정치인은 나라에 헌신하고, 의사는 환자를 섬기고, 경영자는 노동자를 존중하고,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고, 국가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실질적 혁명이 교태혁명이다. 교태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공약이 필요하다. 첫째,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주장을 하는 거친(荒, 황) 집단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고 과감하게 포용(包, 포)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모두가 ‘맞다’라고 해도, 과감하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집단이 있어야 그 사회는 건강하다. 비록 말은 거칠고, 표현은 서투르지만 사회의 면역력을 높이고 건강하게 하는 교태백신이다. 둘째 과감한 개혁이다. 강물(河, 하)을 맨몸으로(馮, 빙) 건널 수 있는 용기로 혁신과 개혁을 지속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태평성대에는 개혁의 주장이 힘을 잃는다. 평화와 안정이 영원할 것이란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태평의 시대는 언제든 불통의 시대로 바뀐다. 다만 시간이 문제다. 익숙하고 편한 것과 결별하는 용기가 있어야 그 시간을 늦출 수 있다. 지속적인 개혁이 필요한 이유다. 셋째 소외계층의 보호이다. 세상은 강자들만의 세상이 아니다. 약자들도 보호받고 인정받아야 한다. 소외된(遐, 하) 사람들을 버리지(遺, 유) 않고 챙겨주는 대동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홀아비, 과부, 고아, 노총각 노처녀(鰥寡孤獨, 환과고독)는 맹자가 강조하는 사회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다. 요양병원에서, 고독한 병실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좁은 방에서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을 사회가 잊지 않고 배려해주는 세상이 교태의 세상이다. 넷째 사적 이익집단의 해체(亡, 망)다. 집단 이익을 위해 패거리(朋, 붕)를 조장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다. 학연과 지연, 업연(業緣)으로 얽힌 사적 이익 집단은 세상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과감한 이익집단의 해체, 교태혁명을 완수하는 방점이다. 땅은 계속해서 평평하게 이어지지 않고(無平不陂, 무평불피), 세상사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無往不復, 무왕불복). 태평성대도 때가 되면 불통의 시대를 만나고, 화려한 궁궐도 결국 폐허의 성(隍城, 황성)이 된다. 황성옛터에서 지나간 영광을 추억하며 넋두리하기 전에 교태혁명을 과감하게 수행해야 할 이유다. /박재희(인문학 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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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6 15:34

딸애들처럼 웃자라서 내 품을 떠나는 여름의 날들

모란과 작약의 계절이 지나면 곧 수국꽃 피는 계절이다. 수국꽃은 여름을 여는 신호와 같다. 벌써 이마가 데일 듯 한낮 땡볕은 뜨겁고, 머잖아 향기로운 여름 과일들이 쏟아져나올 테다. 기억 속 여름의 한 풍경. 때죽나무 위에서 매미가 맹렬하게 울어댄다. 화단에는 키 작은 맨드라미가 있고, 껑충 자란 해바라기도 우두커니 서 있다. 어른들이 집을 비워 나 혼자 종일 심심했다. 뽕나무로 올라가 오디를 따먹었다. 까맣게 잘 익어 달콤새콤했다. 오디를 욕심껏 움켜쥐었던 손은 금세 보랏빛으로 물들고, 셔츠 자락도 보랏빛 범벅이 되었다. 옷을 더럽혔다고 어머니가 꾸중을 하실 게 분명했다. 밤늦게 지쳐서 돌아오신 어머니는 내 옷을 보고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린 시절의 동네에는 철공소가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면 용접봉에서 쉭쉭 소리를 내며 튀어나온 파란 불꽃이 뱀의 갈라진 혀처럼 허공을 핥았다. 모루 위에는 제물처럼 달궈진 쇠가 올려져 있는데, 망치가 모루 위의 쇠를 두드리면 나는 쇳소리가 천둥소리 같이 퍼졌다. 세상의 강철들을 연마하는 모루와 망치들. 한여름의 철공소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거기엔 모루와 망치의 합창, 후끈한 열기와 땀방울들이 있었다. 나는 심부름을 나왔다가 용접봉에서 나오는 파란 불꽃에 매혹되어 철공소 앞을 떠나지 못했다. 여름의 철공소와 함께 나는 미처 가보지 못한 먼 고장을 꿈꾸곤 했다. 거기 번잡한 도시들, 낯선 기름과 향신료 냄새들이 후각을 찌르는 시장, 귀에 선 말로 소통하는 사람들과 맛보지 못한 열대과일도 풍성할 테다. 여름은 나무들의 전성기다. 수목들은 무성하고, 식물 특유의 방향이 공중에 가득 떠돈다. 녹색 잎잎은 기름을 바른 듯 반짝거린다. 바람이 불면 챙캉챙캉 쇳소리를 내는 녹색 잎들, 활엽의 나무들이 일제히 내뿜는 산소, 나무들이 드리우는 그늘들. 여름의 모든 것이 다 좋다. 여름의 나무 그늘에서 여름을 노래하는 시를 읽는 것도 좋다. '올여름의 할 일은/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김경인 '여름의 할 일') 같은 싱그러운 싯구를 찾아 읽는 기쁨을 누린다. '태양이 내리쬐는 넓은 해변들//하얀 더위/푸른 강물//다시, 말라붙은 노란 야자나무들//여름에 잠자는 집에서/8월 내내 꾸벅 졸며//내가 붙잡았던 날들,/내가 잃어버린 날들//딸애들처럼 웃자라서/내 팔을 빠져나가는 날들'(데릭 월컷 '한여름, 토바고'). 오, 딸애들처럼 웃자라서 팔을 빠져나가는 여름의 날이라니! 여름이 없었다면 이토록 많은 여름의 시들은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테다. 지중해 크레타 섬에서 어느 해 여름을 보낸 적이 있다. 그곳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이고 작가의 무덤이 있다. 올리브와 무화과가 무르익는 계절에 그 섬을 찾아갔다. 끼니때가 되면 해변가 식당을 찾아가 오징어 튀김과 해산물, 갓 구운 신선한 빵, 짭짤한 올리브 열매, 올리브유를 듬뿍 뿌린 양파와 양상추, 체다치즈를 곁들인 요리를 먹었다. 바다에서 쾌적한 바람이 불어왔다. 배부르게 먹고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다가 숙소로 돌아오던 그 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은 아니었을까? 여름은 파란 바다와 흰 모래가 빛나는 계절, 긴 셔츠와 반바지의 계절이다. 여름은 여름이라서 모든 게 좋았다. 여름 저녁엔 식구들과 찐 옥수수·복숭아를 먹는 일, 비 오는 날엔 쇼팽의 피아노곡에 귀를 기울이는 것, 서른 몇 해 전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고성(古城)에서 가곡을 부르며 향수로 눈시울이 적시던 찰나,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겪은 열일곱 살 여자애와의 첫 키스가 찾아온다. 다시 여름이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마구 뛴다. 세월이 더 흐르면 나는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죽는 이유를, 여름이 항상 좋았던 까닭을. 하지만 나는 모르는 것 투성이인 채로 살아간다. 아는 것은 여름의 빛들이 내 인생을 스쳐간 영화(榮華)의 기억을 불러온다는 사실뿐이다. 여름의 빛은 짧게 머물다가 사라진다. 지나간 것은 아무 것도 되돌릴 수 없다. 변성기 무렵 내 목소리는 거위 소리 같았다. 음치는 내 인생의 불운. 부모들이 돌아가신 뒤 나는 더 이상 가곡을 부르지 않는다. 오, 인생의 모든 여름들이여, 그 짧은 여름의 빛이여!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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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30 16:38

당심 vs. 민심

총선 후 양당 모두 양당 모두 리더십 교체가 논란의 대상이다.국민의힘은 새 지도부 구성을 앞두고 황우여 비대위를 출범했다.윤석열 대통령 취임 만 2년에 4번째 집권여당의 비상대책위원회다. 국민의힘 차기 당권경쟁은 경쟁적으로 보인다.‘나경원 유승민 윤상현의 출마’를 예상하지만 한동훈의 거취가 결정적이다.스스로의 결정이든 끌려나오는 것이든 그의 당권도전은 기정사실로 보는 분위기다. 민주당 리더십은 이재명 대표의 연임여부가 쟁점이다.이 대표가 재출마한다면 사실상 추대가 될 전망이 대부분이다. 양당 리더십 재편의 핵심 ‘한동훈의 출마와 이재명의 연임’에 대한 여론은 혼란스럽다.두 사람 모두 당원과 핵심 지지층의 높은 지지를 받지만 당 밖으로 나가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4월 하순 한 조사에 따르면 한동훈의 당권도전에 대해 유권자 10명 중 5명 이상(52%)는 반대한다.찬성은 43%.반면 국민의힘 지지층 또는 보수층에서는 58%가 그의 출마에 찬성한다. 한동훈의 당권도전에 대한 일반 국민의 여론과 국민의힘 지지층 또는 보수 유권자들의 생각이 엇갈리는 장면은 5월 초 조사에서도 확인된다.한동훈의 전당대회 출마에 대해 전체 유권자의 52%는 반대하고 찬성은 35%다.한 달 전 조사와 비교하면 반대는 비슷하고 찬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국민의힘 지지층은 정반대의 의견분포를 보인다.그들 중 56%는 한동훈의 전당대회 출마를 지지한다.그의 당권도전에 반대하는 국민의힘 지지층은 36%다.한달 전과 마찬가지로 국민의힘 지지층은 대체로 그의 전당대회 출마에 찬성한다.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당원 100% 경선으로 치러진다면 한동훈의 쉬운 승리가 점쳐지는 이유다.5월 조사에서 한동훈을 포함한 여러 출마 유력 후보들의 국민의힘 대표 적합도를 물은 결과도 앞선 여론동향과 유사하다. 국민의힘 대표로 한동훈을 적합하다고 보는 국민의힘 지지층은 48%에 이른다.‘원희룡(13%) 나경원(12%) 유승민(9%)’을 압도한다.한동훈(26%)은 전체 유권자 대상 조사에서도 유승민(28%)에 오차범위 내에서 뒤진다. 한편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연임여부에 대한 여론도 한동훈 당권도전의 여론 흐름과 비슷하다.4월 초 조사들에 따르면 일반 국민들은 이 대표의 연임에 대해 상대적으로 반대의견이 높다.‘찬성 46% vs. 반대 49%’ 또는 ‘찬성 43% vs. 반대 48%’다. 민주당 지지층 또는 진보적 유권자들의 생각은 정반대다.그들은 이 대표의 연임을 압도적으로 지지한다.‘찬성 61% vs. 반대 32%’ 또는 ‘찬성 68% vs. 반대 26%’다. 보수적 유권자들은 이재명 연임에 부정적이다.‘찬성 30% vs. 반대 68%’ 또는 ‘찬성 23% vs. 반대 74%’다.중도층은 일반 국민의 여론동향과 유사한데,‘찬성 40% vs 반대 45%’다. 5월 초 조사에서도 상황은 비슷한데 다른 게 있다면 일반 국민의 이 대표 연임에 대한 찬반의견이 접전양상으로 바뀐다.‘찬성 44% vs. 반대 45%.’한 달 전에는 오차범위 내외에서 반대의견이 상대적으로 높았지만 5월 초에는 찬반 비중이 붙었다. 민주당 지지자냐 아니냐의 간극은 한 달 전과 비교하면 더 벌어진다.민주당 지지층은 이 대표 연임에 대해 ‘찬성 83% 반대 12%,’무당층은 ‘찬성 25% 반대 47%’다. 국민의힘은 대표 선출절차를 논의해야 할 전당대회 준비위와 선관위를 꾸려야 하지만 속도를 내지 못한다고 한다.당원 아닌 일반 국민들의 의견을 어느 정도 어떻게 지도부 선출과정에 반영할지가 쟁점이다. 민주당은 “국회의장 후보,원내대표 당 지도부 경선 때 권리당원 의견 10% 이상 반영을 원칙으로 하는 10% 룰”을 넘어 “원내대표와 국회의장 후보 뽑을 때도 국회의원 50%+당원 50%를 적용하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양당 모두에게 당원과 지지층은 중요하다.민주당은 “당원이 100만 명 넘고 당비가 연간 180억”이라고 한다.규모는 다르겠지만 국민의힘도 엇비슷할 것이다. 작년 우리나라 정당들에 지급된 국고보조금은 모두 475억.민주당에 223억 국민의힘에 202억으로 국민 세금이다.2022년 양대 선거나 올해 총선처럼 선거가 있을 때 국고보조금은 통상시의 두 배에 이른다. 양당의 리더십에서 민심과 당심은 어떻게 얼마나 반영되어야 할까? 양자가 충돌한다면 무엇이 우선이어야 할까? 그들은 선택하고 유권자는 평가한다. 선택의 시간이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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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23 15:00

살구가 익을 무렵

순창으로 이발하러 갔다. 목욕탕 안에 이발소가 있다. 이른 아침이라 나이 든 사람들이 많다. 나이가 만들어가는 육체는 움직이는 동작이 불편하고 직립의 거동이 위태위태하다. 육체는 체념하는 중인데 왕년의 일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한 몸들은 외롭고 슬프고 짜증나고 성질난다. 이발하고 강천사로 물 받으러 갔다. 몸에 좋다는 이 물을 받아다가 먹은 지 2년쯤 되었다. 이 물을 마시고 건강해지거나 오래 살 생각은 없다. 물이 맛나서 이 물로 아내는 고추장 담고, 나는 봄 여름에 찬물로 마신다. 물 받으러 가는 길은 순창읍 가기 전에 오른쪽으로 낮은 두 고개를 넘어 몇몇 마을들을 지난다. 낮은 산굽이를 돌 때마다 아늑한 들끝 저 멀리 산아래에 마을들이 편안하게 앉아 있다. 낮은 고개 하나를 넘어 들길을 가는데, 저쪽 마을 앞 도로에 초등학교 3학년과 2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멀리서 왼손을 번쩍 들고 길을 건넌다. 내 차 때문에 저런 강한 경고 자세를 취하고 길을 건널 텐데, 그러나 내 차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서 나는 혼자 크게 웃을 뻔했다. 이 길은 차들의 왕래가 아주 뜸한 곳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학교와 집에서 단단히 교육 받은 대로 교통 도덕을 철두철미하게 준수한다. 나도 속도를 아주 줄였다. 길은 건넌 아이들이 상당히 높은 논두렁에 올라서 있다. 그 모습도 웃겼다. 아이들은 분홍색 잠바에다 짧은 치마를 입고 흰 스타킹 차림이다. 둘 다 가방 색까지 같다. 등교 차림이 주위 풍경에 약간 어색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앞뒤를 살핀 후 차를 멈추고 차창을 천천히 열었다. 나는 반갑고 명랑한 표정으로 “얘들아, 안녕!”하며 손을 흔들었다.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반가운 풍경이었다. 아이들이 서 있는 논두렁 풀잎에 이슬이 맺혀있다. 아이들이 딛고 지나간 이슬 털린 발자국이 두어 군데 보인다. 아이들 신발에 이슬이 묻어있을 것이다. 언니로 보이는 아이가 나를 향해 고개를 까닥하더니, 팔을 반 쯤 들어 두어 번 손을 흔들고, 동생은 언니 누구야, 하는 표정으로 언니를 올려다본다. “학교 잘 갔다 와“ 나는 다정하고 다감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아이들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가다가 백미러를 들여다보니, 아이들이 내 차를 바라보고 있다. 어떤 영화 장면처럼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고 크게 흔들어 주었다. 지난 봄 날 이 길 오른쪽 마을 2층 집 붉은 기와 지붕 위로 살구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아이들이 그 집에 사나? 언젠가 평양에 갔을 때 보았는데, 개선문 부근에 가로수가 살구나무였던 것 같다. 길가에 이발소가 있어서 유리창 너머로 이발 하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의자에 앉은 사람과 이발사, 이발사가 가위질을 하다가 고개를 살짝 돌려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이발사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때 가본 북쪽 어느 고원에 흰 감자꽃이 서늘할 때였으니,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아마 살구가 익을 무렵이었는지도 모른다. 갔던 길을 따라 집으로 왔다. 아이들 둘이 논두렁에 서 있던 단정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 길에서 학교 버스를 기다리는 학생을 처음 만나서 뭔가 그렇게 낯설고 인상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를 온 지 얼마 안 된 것은 분명해 보였었다. 몇 가지 이런저런 사연의 경우가 생각나기도 했다. 생각이 복잡하지는 않았다. 단정하게 잘 빗어 묶은 아이들의 머리를 보면 엄마 솜씨인 것 같기도 하다. 이상하게도 종일, 살구나무가 있는 가로수 길 평양의 이발소와 북쪽 어느 고원 너른 감자밭가에 서서 희고 고운 감자꽃을 바라보던 서늘한 생각과 논두렁에 낯선 듯 서 있던 아이들의 빈틈없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아이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약간 파리하다는, 생각이 났다. 논두렁에 서 있던 아이들과 평양의 거리와 감자꽃은 서로 이어지지 않은 풍경인데도 말이다. 이상하여, 오히려 아주 이상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그 무엇인가 어떤 중요한 어떤 것들을 버려둔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에, 나는 허전한 어떤 구석이 사라지지 않아 자꾸 허기가 찾아왔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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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16 15:57

천천히 보아야 보이는 것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봄이 와서 들판에 꽃이 피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구다. 매년 꽃들이 만개할 즈음이면 학교도 새 학기를 맞아 수업과 행사 등으로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가곤 한다. 하지만 올 봄에는 그 계절의 아름다움을 자세하게 그리고 오래 볼 수 있었다. 10년 이상 필자를 괴롭히던 무릎 통증을 치료하고자 약 2개월 전에 수술을 받았다. 그 후 회복하는 동안 지팡이에 의지해 걷다보니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봄의 화사함, 마른 가지에 싹이 돋고 꽃이 피는 자연의 신비함, 캠퍼스에서 명랑하게 재잘거리는 학생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바쁘게 살아온 시간을 잠시 멈추고 나의 삶을 돌이켜보았다. 지금까지 앞만 보면서 달려오다 보니 무심히 지나쳤던 일, 중요하지만 우선순위에 밀렸던 일 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고, 주변의 따뜻한 봄날과 활기 있는 삶의 모습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 담장에 피어있는 라일락의 그윽한 향기를 맡다보니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교수가 생각이 났다. 그는 비교적 젊은 시절에 의과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방학이 되면 제자들과 함께 필리핀 무의촌으로 의료봉사를 나가곤 했다. 대학병원 특성상 여름휴가는 일주일 남짓했는데 그 황금 같은 휴가를 의료 봉사하는데 다 쓰고 돌아와서는 소진된 기력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여름휴가 기간 가족과 여행을 다녀온 필자를 매번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퇴직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 정기 건강검진에서 암이 발견되었고 치료를 위해 휴직 신청을 하였다. 그 해에는 해외 봉사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의료 봉사를 다녀왔다. 친구들은 그에게 ‘몸이 아프면 좀 쉬어야지, 왜 무리를 해서 해외 봉사를 다녀왔냐?’, ‘나이가 들면 자기 자신에게도 신경을 써야한다.’라는 걱정 어린 충고를 했지만 돌아오는 그의 대답은 비교적 간단하였다. ‘지금까지 여름방학이면 매년 가던 의료봉사여서 올해도 가야될 것 같아 조심하면서 다녀왔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이었다. ‘몸이 안 좋으면 이기적이고 소심한 마음으로 바뀌어서 하던 일도 소극적으로 대처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의연한 삶을 살 수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의 병은 치유되었고 정년퇴직 후, 신변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의료 활동을 위해 해외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에 대한 추억은 무릎통증 하나 때문에 소심하게 작아지는 나를 바라보면서 다시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잠깐 멈추어 생각해보니, 무릎 수술로 인해 일상생활이나 움직임 등에 다소 불편함이 있지만 오히려 바쁘게 살아왔던 과거보다 조금 더 여유가 생겼고,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들과 이웃, 봄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며 빙그레 웃을 수 있게 만들어준 전환점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과 마음이 약해지다 보니 자연스레 이기적으로 변하고 소심해지는 경향이 생기지만,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나에게 감동을 주었던 벗들의 귀한 모습을 생각해보고 다시 한 번 힘을 내봐야겠다고 다짐한다. 계절의 여왕인 5월, 하루가 다르게 초록이 짙어지고 라일락, 아카시아 꽃향기가 퍼지는 거리를 천천히 걸어보자. 바쁘게 지내왔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나와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걸어야 보이는 것’들을 느끼고 자신을 회복하는 따뜻한 봄날 을 맞이할 수 있는 5월이 되기를 바란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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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9 15:14

의료사태가 명현(瞑眩) 현상이라고?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선언을 기점으로 시작된 의료계 파행이 국민의 불편을 가중시키고 있다. 전공의들의 사표를 시작으로 의대교수들의 주 1회 휴진 등 의료계 집단행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그 피해는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다. 정부는 국민들의 의료 수혜 확대와 소외된 지방 의료의 복구를 위해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고, 의사들은 자신들을 이기주의 집단으로 몰고 가며 의논도 없이 밀어붙이는 일방적인 의료행정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정부와 의사들의 팽팽한 대립 국면 속에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못 받고 있는 국민들만 죽을 노릇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잘못되었는지 하나하나 따져서 풀지 않으면 의료 공백의 장기화로 대한민국의 의료는 파국을 맞이하며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질 것임에 분명하다. 이번 의료 사태를 주역(周易)의 관점에서 보면 불통과 반목이다. 불통의 괘는 비(否)괘이고, 갈등의 괘는 송(訟)괘이다. 불통의 비(否)는 하늘과 땅이 서로 반목하여 꽉 막혀 있는 형상이고 갈등의 송(訟)은 하늘과 물이 서로 등을 돌리며 소송하고 있는 형상이다. 불통은 인간사에서 가장 인간답지 않은 일이다(匪人, 비인). 하늘과 땅이 서로 소통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사는 중간(中, 중)에 그만두면 좋지만(吉, 길), 끝까지 계속하면(終, 종) 누구에게도 이롭지 못한 나쁜(凶, 흉) 일이다. 자기가 믿고 있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면 결국 파국은 끝나지 않는다. 꽉 막혀 있는(窒, 질) 형상이니 중간에 중재자를 두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상책이다. 혹자는 말한다.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고통도 필요하니 병을 낫기 위한 명현(瞑眩) 현상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명현(瞑眩)은 한의학에서 약을 투약한 후 병이 완전히 낫기 전에 있는 부작용을 말한다. 병이 치료가 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부작용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약으로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어지럼증이나 구토 같은 부작용 없을 수 없다는 논리다. 이번 의료사태도 더욱 발전된 대한민국 의료 체계를 위해서는 갈등이나 반목이라는 명현 현상을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문제는 명현 현상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힘없고 위중한 국민들이란 것이다. 건강하고 힘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길을 찾는다. 대통령과 장관이 아프면 의료계 파업이라도 치료를 못 받을 확률은 없다. 그러니 의료 파국의 심각성이 정책자들의 피부에 절실하게 와 닿을 리가 없다. 명현 현상 운운하며 한번은 겪어야할 부작용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일반 국민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다.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명현 현상은 검증된 의료 치료도 아니다. 유교 경전인 서경에 나오는 구절을 근거로 이야기되는 잘못된 믿음이다. ‘만약에 약을 먹고 명현의 부작용이 없다면(藥不瞑眩, 약불명현), 그 병은 낫지 못할 것이다(厥疾不瘳, 궐질불추)’. 이 말은 원래 <서경>에 나오는 말로 맹자가 인용해서 사용한 말이다. 좋은 약은 반드시 부작용이 있으니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어떤 과학적 근거를 찾아보아도 명현 현상이란 약리작용은 없다. 초유의 의료 비상사태를 맞이하여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아프지 않는 것뿐이라는 현실이 너무 서글프다. 아프지 않는 것이 어찌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명현 현상이니 참으라는 정부의 무대책은 더욱 어이가 없다. 애초부터 전략과 협상도 없이 의대 증원을 확정하여 발표했던 당사자들은 빠지고 의료 당사자인 국민들과 의사들과의 갈등만 깊어가게 만든 원인 제공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송사(訟)는 끝까지 가면 흉(凶)한 일이다. 불통(否, 비)과 송사(訟, 송)는 모두에게 이롭지 않은 안타까운(吝, 린) 일이다. /박재희(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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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2 16:44

어느 주말에 겪은 강연 소동

지난 주말 오후에 K시의 한 대형 쇼핑몰로 인문학 강연을 하러 갔다. 봄비 내리는 주말 오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강연 시각보다 이르게 도착할 수 있게 출발했다. 그런데, 대형 쇼핑몰 주차장은 인근은 차들로 넘쳐났다. 만원이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는 차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는 통에 주차에만 40여분을 소비했다. 지하 주차장 가까스로 주차를 하고 쇼핑몰 안 강연장을 찾는데 또 시간을 지체했다. 쇼핑몰 매장의 규모가 엄청났던 것이다. 인파로 바글거리는 주말 오후 그 광활한 소비 천국에서 나는 길을 잃고 헤맸다. 발걸음을 재촉해 강연장에 도착해서, 오, 맙소사! 내 앞에 눈을 의심케 하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넓은 강연장엔 청중 세 분이 평화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쇼핑 매장은 발 디딜 곳조차 없이 인파가 북적거렸는데, 강연장은 무인도처럼 적막했다. 여러 강연을 다녔지만 이런 굴욕을 당한 건 처음이다. 비명은 지르지는 않았지만 내 얼굴은 붉어졌다. 애초 이 강연이 마뜩치 않았다. 하지만 내 책을 참석자에게 구매해 무료로 나눔 한다는 꼬드김에 넘어가 강연 수락을 한 것이다. 출판사 영업부장님도 일부러 가족과 강연장을 찾았다가 몹시 실망한 눈치였다. 나는 태연하게 성심성의껏 강연을 했다. 강연장 앞자리에 차지하고 앉은 세 분은 강연을 조용히 경청하셨다. 세 분에게는 눈물 나올 정도로 고마웠다. 강연을 마치고 세 분의 책에 서명을 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조지 오웰의 한 말이 떠올랐다. “광장에 모인 인파를 흩어지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시를 읽어주는 것이다.” 시가 대중에게 어떤 대접을 받는가를 재치 있게 표현한 말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시나 인문학에 심드렁하다. 어머니는 나를 붙잡고 “그까짓 시는 뭐 하러 쓰나? 밥이 나오더냐 떡이 나오더냐? 그러다가 굶어 죽기 딱 좋으니라.”라고 꾸짖곤 했다. 어머니는 내가 ‘아주 짝에도 쓸모가 없는 시’ 따위를 쓰면서 사람 구실을 못할 걸 염려했던 것이다. 주말의 쇼핑몰은 붐볐지만 같은 장소의 강연장을 찾은 사람은 달랑 세 분이었다. 왜 사람들은 인문학 강연을 외면할까? 시나 인문학 강연이 쇼핑보다 덜 재미있을 뿐더러 무용하다, 라고 판단했을 테다. 사람들은 시나 인문학이 인간의 생물학적 필요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확증 편향을 갖고 있다. 각자의 생업에 매진하던 사람들이 주말 쇼핑몰 나들이에 나와서 가족들과 함께 쇼핑하고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것을, 나는 이해하고, 이해하고, 또 이해한다. 애초 볼거리와 놀거리로 가득 찬 쇼핑몰에서 뜬금없이 인문학 강연을 위해 모객을 한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가 아니었을까? 인문학의 홀대를 두고 실망할 필요는 없을 테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더 유용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인간이 꼭 쓸모 있는 것만 하고 살지는 않는다. 장자의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을 생각해 보라. 쓸모없음의 큰 쓸모를 찾아낸 동양의 현자가 퍼뜨린 천년된 거목의 우화는 2000년이 넘어서도 회자되고 있다. 장자의 거목은 얼마나 큰까? 꼭대기는 하늘에 닿고 나무 그늘에는 소 네 마리가 끄는 마차 천 대가 들어간다고 했으니, 그 크기는 상상으로만 가늠해 볼 수 있을 테다. 작은 쓸모라도 있으면 싹뚝 잘라 가버리니, 나무는 천년 동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도리가 없었으리라. 저 거목은 쓸모가 없었던 탓에 천년 동안 베임을 당하지 않은 채 자라날 수 있었다. 주말의 강연장에서 쓸모없는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고 생각하자. 사람들은 인문학을 무시하고 지나쳤다지만 먼 훗날 내가 강연에서 뿌린 것들이 싹을 튀우고 거목으로 자랄지도 모른다. 강연은 끝났지만 복잡해진 심경을 안은 채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 배도 고팠다. 강연장을 나와 근처 냉면집을 찾았다. 탈북민이 창업했다는 냉면집은 냉면이 맛있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나는 놋그릇 담겨 나온 슴슴한 냉면 국물을 들이켰다. 냉면 육수는 시원하고 면은 담백했다. 냉면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니, 주말 강연으로 생긴 소동이 남긴 복잡한 심경 따위는 씻은 듯 사라졌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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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25 18:26

보수의 ‘재(再)구성’이 필요하다

‘정권 심판론’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국민의힘 참패’라고 쓰고 ‘윤석열 심판’이라고 읽는다. “비정상적 국정기조,” “오만과 일방적 불통의 국정운영 그리고 독선적 ‘검사 리더십’”에 대한 국민적 평가다. 한 조사에 따르면 이번 총선대패의 책임이 ‘윤 대통령에게 있다.’는 의견이 유권자 10명 중 7명에 이른다.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유권자의 70%도 대통령 책임론에 동의한다. “대통령 부부가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이라는 말이다. 여론조사 꽃에 따르면 총선참패의 책임은 ‘윤 대통령 54% 김여사 10%’로 둘을 합하면 유권자 10명 중 최소 6명이 대통령 부부에게 책임을 묻는다. 대통령과 용산의 총선인식은 다르다. 국무회의 모두발언 형식으로 언급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대통령의 변화 의지가 없다.”로 본다. 비공개 자리에서 대통령이 “죄송하다.”고 해서 놀랐지만 취임 만 2년을 앞둔 대통령에게 ‘취임 100일 기자회견’이 전부라는 것도 ‘민주국가 지도자 중 거의 없는 일’이다. 용산은 총선결과를 “당의 선거운동이 평가를 받은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국정방향은 옳다. 다만 국정을 운영하는 스타일과 소통방식 등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근거는 2년 전 대선승리. 용산은 “국정방향은 지난 대선에서 응축된 국민의 총체적 의견이다. 그 뜻을 받아서 윤석열 정부가 집권 했고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거 때문에 국정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국정기조를 ‘유지’하면서 소통방식을 다양화하는 ‘정도의 변화’가 해답이 된다. 이재명 대표와의 만남에도 소극적이다. ‘달라진 윤석열’을 요구하는 선거결과에 부응하기 위해 총선 민심을 과연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인지 우려되는 이유다. 야권은 “도대체 답이 없다.”며 “역대급 심판에도 변하지 않고,” “국민이 몰라봐서 죄송”하다고 한다. 여권에서도 “국민은 불통이라 느끼고 민심을 외면한다고 생각할 듯하다.”는 의견이 있다.“ 국민적 사과와 태도 대전환 각오를 피력 했어야”한다는 아쉬움은 “범야권이 때론 강제적 힘으로 윤 대통령을 바른 길로 유도해야”한다는 주장에 주목하게 한다. 관건은 국민의힘이다. 대통령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면 변화를 유도하거나 최악의 경우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 ‘윤석열 리스크’가 총선결과지만 여당도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정의화 전 의장의 지적은 정확하다. 그는 “참패의 원인은 대통령의 불통 그리고 우리 당의 무능함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다.”라고 말한다. 정 전 의장은 ‘당은 더 유능해져야 한다.“며 이제 대통령만 쳐다보는 정당이 돼선 안 된다. 필요하다고 생각될 땐 직언하는 당이 돼주길 바란다.”고 당부한다. 국민의힘은 이번 총선에서 두 가지 ‘불명예 기록’을 세웠다.사상 ‘첫 여당 총선대패’와 보수정당 ‘첫 총선 3연패’ 기록이다. 2012년 총선의 152석에서 2016년 122석 2020년 103석 그리고 2024년 108석으로 쪼그라들었다.다음은 두 자리 수다. 인구구조의 변화는 총선 때마다 국민의힘 지지층의 축소를 말한다. 수도권 집중화와 함께 정치지형의 근본적 변화와 구조화의 가능성이다. 향후 ‘수도권과 고령화 유권자가 선거결과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이라는 말이다. 총선 참패의 책임자를 자처하며 참회하고 반성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게 지금 국민의힘이다. “영남 자민련”이나 “수포당(수도권을 포기한 정당)” 소리를 들어도 위기감은 물론 절박감도 없다. 그저 ‘월급 나오니(당선되었으니) 다행’인 샐러리맨들만 모아 놓아 “단일대오”만 부르짖는 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보수정당의 한 줄기가 끝났다.’새로운 시대에 맞는 보수정치로 새 출발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게 지금 당장 국민의힘이 해야 할 일이다. 첫째,리더십 진공상태는 당분간 그대로 둬도 된다.의원 각자가 자신의 생각과 믿음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면서 중론을 모아간다. 이때 리더십도 만들어진다. 둘째, 전당대회 룰 개선이다.정당은 민심의 바다에 떠 있는 존재다. 정당은 ‘왜 무슨 일을 하는 집단’인지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셋째, 총선대패의 백서를 만들어야 한다.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이 출발점이다. 넷째, ‘지금 체제가 지속 가능한지’에 대답하는 미래비전과 대안을 찾아야 한다. 보수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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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18 15:08

눈물이 사는 살구나무 언덕

새벽입니다. 늦게 자도 일찍 자도 나는 늘 이 시간 부근에서 눈이 떠집니다. 언젠가부터 나의 잠은 이런 자연이 되었습니다. 온 세상에 어둠이 가득합니다. 나는 손으로 어둠을 만져 봅니다. 어둠이 부드럽고 편안합니다. 어둠 속에서 눈이 맑아집니다. 내가, 내게 몸을 움직이자고 합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그때 문득 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나도 몰래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적개심’, 이 말이 왜 이때 불쑥 솟아났는지, 느닷없는 이 말이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생각들이, 우리의 역사 속의 기억과 상처들이, 훼손된 민족적 자존심과 인간의 존엄, 내 짧은 삶의 흔적들이 함께 섞이며 소용돌이가 되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나도 이 말이 시키는 대로 일을 저지르며 살았던 것입니다. 적개심으로 일어났던, 일어나고 있는, 일어날 일들이 생각나, 그 일들이 나의 현실이 되어 금방 내가 가난해졌습니다. 혐오, 증오, 적개심, 이런 삶의 끝에 다다른 막말들이 내 일상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때로 나는 ‘이 나라’가 싫어질 때가 다 있습니다. 내가 태어나 자라 살고 있는 이 작은 마을도 떠나지 못하고 사는 내가 우리나라를 두고 ‘이 나라’란 말이 내 입에서 나오다니, 내가 싫어지고, 싫어지고, 정말 싫어집니다. 선하고 따듯하고 다정다감한 말들이 사라진 자리에 적개심과 적대적이라는 말이 우리의 일상을 살벌하게 지배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공격과 방어와 모면으로 교육된 우리들이 자세와 표정에서는 정의도, 평화도, 포근한 공정과 아름다운 자유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내가 사는 우리나라를 ‘이 나라’라고 하는 절망적인 말을 하기 싫습니다. 이렇게 서로 부대끼며 사는 게 인생 아니냐고 하는 삶의 근본적인 질문이 지금은 통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따금 정의로운 바람을 맞이하러 사람이 살지 않은 우리 동네 서쪽 밤나무 숲으로 갑니다. 영혼이 사라져 버린 말들이 삭풍이 되어 밤나무 숲을 흔들며 지나갑니다. 나는 괴롭지요. 슬퍼요. 서로를 바라보며 주고받아야 할 말을 버린 저 앙상한 나무들의 숲이 싫어집니다. 직업으로 삶의 비교우위를 가려가며 이렇게나 차디찬 돌멩이들처럼 돌아서서 무심한 얼굴로 살아가다니, 내가 싫습니다. 말 같지 않지만, 우리는 지금 모두 ‘행복한 불행’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돈이 인간 위에 군림하며 인간의 얼굴을 섬뜩하게 조종합니다. 시대적인 사명을 다한 누추하고 낡은 정치가 그에 기대어 판을 만들고 부추기며 우리의 정신을 곤혹스럽게 합니다. 부러움은 존경도 사랑도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잘 못산 것은 아닙니다. 평생을 한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인간적인 가난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분들의 흠은 마을과 흙이 용인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도의 인간적인 잘못들입니다. 누가 크게 잘한 영웅적인 일도 기억에 없습니다. 그분들은 늘 끝에 가서 두 손 마주 잡고 웃습니다. 나라가 왜 있습니까. 사람들이 호랑이가 무서워서 모여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가난은 달콤한 인문적인 위로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나라의 일이듯이. 나라의 일은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게 아닌가요. 시골 마을에 사는 시인은 이 새벽, 미안하게도 찬란한 봄날이 괴롭습니다. 아이들이 싸우면 동네 어른들은 “냅둬라, 아이들은 싸워야 큰다”고 했습니다. 살다 보면 잘잘못이 드러나 싸우게 되지요. 싸워야 하지요. 싸우면서 내 잘못이 확실해지면 고치고 바꾸고 서로 맞추어 새로워지는 게 사람 사는 일 아닌가요. ‘혁신 이란 끝이 없는 착오들을 결론짓는’ 일입니다. 그게 정치지요. 사람의 얼굴, 우리의 얼굴은 지금 어떻게 생겼나요? 우리는 지금 무슨 짓을 하며 어떻게 살자는 것인지요. 나는 순진하게도, 바람이 불고 흰 구름 둥둥 떠가는 평화의 언덕 작은 마을 그 어디쯤, 눈물이 사는 어린 살구나무 곁에 누워 있습니다. 내가 심은 이 살구나무는 새로운 봄을 만나 저리나 곱게 화사한 꽃을 피우며 한 치도 어김없는 새 아침을 가져왔네요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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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1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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