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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 감독과 윤석열 대통령

가을 야구시즌이다. 하위팀에 업셋 당하거나 포스트시즌 문턱에서 탈락한 팀들은 “감독 나가”시위대와 만난다. 이숭용 감독은 사상 최초의 5위 결정전에서 3-1로 앞서다 8회말 3점 홈런 한방으로 3-4 역전패 당했다. 그때는 9월 ‘41타수 1피안타’ 기록의 마무리 투수를 기용하지 않았다. 최종결정은 감독이었고 김광현 기용은 결국 5분 만에 패배로 돌아온 ‘시즌 마지막 승부수’였다. 냉혹한 승부 세계의 예외는 없다. 리더십 심판의 주기는 더 빨라졌고 팬들의 눈높이는 더 높아졌다. 윤석열 대통령의 평가도 마찬가지다. 그의 권력은 더 조급해지고 더 높아진 국민 수준에 맞추고 있을까? 최근 악화일로의 ‘김건희 리스크’는 임계점이 멀지 않았음을 상징한다. ‘매직’과 ‘뚝심’의 감독도 있다. 준플레이오프 명승부를 펼친 염경엽 감독과 이강철 감독이다. 두 감독의 공통점은 정체성이다. 뚜렷한 자신만의 ‘색깔 있는 야구’다. 그들은 자신의 야구 철학과 소신 그리고 개인과 팀 특징과 강점의 극대화를 통해 ‘이기는 야구’를 추구한다. ‘염경엽표 야구’는 공격야구다.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도루 실패가 게임의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되었음에도 그는 “같은 상황이 또 온다면 또 뛰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뚝심의 공격야구다. “3 타자가 다 초구치고 죽어도 뭐라 안해요”라며 포스트시즌 최초 3 타자 연속 초구 아웃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내가 하던 야구를 하는 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준플레이오프 1차전 패배에도 2차전에 동일한 라인업을 들고 나왔다.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도 염 감독은 모든 경기에 똑같은 타순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강철 야구는 직관과 집중력이다.특히 그의 투수 교체 타이밍은 “예술의 경지”라는 평가를 듣는다.이 감독의 직감과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집중력이 핵심이다.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이 감독은 ‘10게임 1할3푼의 타자’를 기용했고 그는 선제 투런 홈런으로 화답했다.“오늘 훈련 때 괜찮아 보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승엽 감독은 정체성 혼란의 위기 속에 있다. 그는 ‘번트왕 된 홈런왕’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팀은 올 시즌 리그 2위의 희생번트를 기록했다. 작전 야구의 스몰 볼이다.여기에 불펜 과부하의 ‘혹사 논란’까지 뒤따른다. 올해 이 감독은 ‘와일드카드 업셋의 첫 희생양’이 되었다. 시즌 상대전적에서 12승 4패로 압도했던 팀에 ‘18 이닝 무득점’을 기록하며 2연패를 당했다. 포스트시즌에서 그는 3전 전패다. 팀의 ‘사상 최초의 7 시즌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은 막강한 공격력을 바탕으로 가능했다. 이승엽 감독의 팀은 전통적으로 강공 중심의 ‘빅 볼’야구다. 이 감독이 2년 연속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지만 “감독 나가” 시위를 만난 이유는 분명하다. 정체성 논란이다. 여기에 결과까지 안 좋으니 설상가상이다.정체성이 흔들리는 팀은 암흑기에 들어선 게 지금까지의 경험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할까! 2022년 3월 사람들이 왜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는지 알고 있을까! 그는 대한민국 공동체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윤 대통령의 정체성은 ‘상식과 공정’이었지만 지금 대통령의 정체성은 위기의 한복판에 있다.자신의 존재 이유와 역할의 미션을 잃어버린 정체성 혼란의 권력은 모두에게 위험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깡으로 지금의 성취를 이룬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깡으로 벼랑 끝에 선 승부가 가능했고 그는 결국 승리했다. 윤 대통령은 깡을 스스로에게 제대로 써야하는 상황으로 몰린다.예상보다 쎄고 기대보다 높은 강력한 처방이 불가피하다.가족과 부부의 논란은 결국 대통령의 문제로 대통령만 해결할 수 있다. ‘부부의 세계’ 이후 대통령의 승부수는 남은 임기다.지금까지의 실점을 일거에 만회하고 나아가 역전까지 바라볼 수 있는 대통령만의 무기다.대통령의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5개 팀은 내년 시즌 준비에 바로 들어간다.미래는 준비와 반성부터 시작이다.11월 9일 임기 반환점을 앞둔 대통령도 마찬가지다.임기 후반의 국정쇄신을 향한 성찰과 대안모색의 시간이 윤 대통령에게 필요하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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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10 17:30

추석의 추억

매년 추석이 다가오면 버스터미널, 기차역, 도로 위에는 들뜬 얼굴로 고향을 향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려진다. 필자도 명절이 되면 서울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느라 급하게 이동하는 귀경객 중 하나였다.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었고 다섯 식구가 한차를 타고 재미있는 가족여행쯤으로 생각하고 출발했지만 대여섯 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고 고향에 도착할 때가 되면 모두가 지쳐서 아무말도 못하는 상태가 되곤 했다. 오랜 시간 운전을 하고 부모님 댁에 도착하면 몸은 파김치가 된 듯 피곤하지만, 부모님의 얼굴을 뵈면 다시 기운을 얻었다. 매년 아들 가족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던 부모님, 특히 어머니께서는 항상 ‘바쁘고 힘든데 왜 고생하며 올라왔느냐’고 걱정스러운 말만 반복하셨지만, 마음속으로는 기다리던 아들 내외와 손주를 만나게 되어 기쁜 모습이 역력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피난을 오신 부모님께 명절은 가족 전체가 모이는 특별한 날이였다. 아들 가족이 오기 전 어머니께서 많은 시간을 들여 준비하신 녹두전, 큼지막한 만두 등이 차려진 푸짐한 밥상이 매년 추석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렇게 정성스럽게 준비하신 요리를 게눈감추듯 짧은 시간에 먹고 일어설 때면 어린 시절 철없는 아들로 돌아간 듯했다. 고생하는 어머니와 아내를 생각해 설거지라도 도우려고 고무장갑을 끼면 아들을 밀어내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아들 손에 물이 묻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가 엿보였다. 부모님 댁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문을 나서는 우리를 배웅하면서 당신의 시야에서 안보일 때까지 손을 흔드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주 찾아 뵙고 인사드려야겠다.’라고 매번 결심하지만 실천으로 옮겨지진 못했다.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해외 출장을 떠나기 전, 병원에 입원중이시던 어머니의 얼굴을 뵙고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드렸을 때였다. 어머니께서 큰 소리로 ‘거럼, 잘 다녀오게.’라고 황해도 사투리로 대답해 주실 때의 표정에서 명절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흔드시던 어머니의 모습과 표정이 느껴졌다. 병원에서의 만남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만남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고,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머니의 소천 소식을 듣고 대전으로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라는 고사성어처럼 시간은 절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매년 명절마다 부모님을 뵈러 올라가고 내려오기를 반복하면서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라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던 것이 송구하다. 북한에서 피난을 내려오시면서 겪으셨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외울 지경이 되었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들어드리지 못한 것,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드리지 못한 것 등 잘해드린 기억보다 못해 드린 기억들만 생각나면서 내 마음에선 ‘어머니 죄송합니다. 감사해요, 어머니’라고 뒤늦게나마 마음속으로 되뇌이곤 한다. 이제는 내가 그 시절의 어머니 나이가 되어서 추석을 맞아 집에 방문하는 자녀와 손주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내가 준비한 추석 밥상을 맞으며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서 떠들며 웃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이 귀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전에 어머니에게 드리지 못했던 감사의 말을 자녀들에게라도 해야겠다. ‘너희들이 있어서 행복하다. 잘 살아주니 고맙구나’ 하는 진심 어린 말을 지금, 바로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시간은 우릴 기다려 주지 않기에 추석 명절이 지난 지금이라도 휴대폰을 꺼내어 전화를 한 번 더 걸어 ‘고맙다’ 또는 ‘사랑한다’라는 표현을 해보자. 지금의 전화 한 통이 먼 훗날 뼈아픈 후회가 되지 않을 테고 따뜻한 말 한마디에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가족들을 떠올린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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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26 14:53

산전수전(山戰水戰)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장군은 애초부터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륜과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의대 정원 확대 정책으로 촉발된 의료계 파행은 이제 시간이 지날수록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추석 기간에는 ‘중추가절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인사 대신에 아프지 말라는 인사가 유행하였다. 지금 겪고 있는 의료계 파행이 해결된다고 해도 그 시간 동안 고통받는 사람은 국민이다. 애초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능숙하고 유능한 장군이 나서서 이 문제를 지휘했어야 했다. ‘산전(山戰)에서는 내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기동하여 상대를 압도해야 한다. 수전(水戰)에서는 상대가 물을 건널 때 기습하여 승기를 잡아야 한다. 택전(澤戰)에서는 내가 가진 무기와 군장을 포기하더라도 늪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육전(陸戰)에서는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후퇴 경로를 확보해야 한다.’ <손자병법> <행군(行軍)> 편에 나오는 ‘산전수전택전육전(山戰水戰澤戰陸戰)’을 모두 겪은 장군의 군대 운영에 관한 내용이다. 산전(山戰)의 핵심은 나의 의도와 생각을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다. 높은 산악지역을 이동할 때는 적에게 노출되기가 쉽다. 나의 실체를 숨기기 위해서 능선을 피하고 계곡(谷)으로 이동로를 선택해야 한다. 의사 정원을 늘려 국민 의료 복지 수준을 높인다는 목표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정부의 의도를 모두 드러내고 노출한 데 있다.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나의 명분만 강조한 것은 결코 현명한 정책이 아니다. 2000명이란 선언적 숫자까지 정해 놓고 전투에 임한 관계기관은 산전을 겪어보지 못한 리더라고 할 수밖에 없다. 수전(水戰)의 핵심은 상대의 빈틈을 찾아 공격하라는 것이다. 상대가 강물을 건너는 데 집중하고 있을 때를 놓치지 않고 기습하여 승기를 잡아야 한다. 강물을 반쯤 건넜을 때 기습하면(半濟而擊之, 반제이격지) 쉽게 이길 수 있다. 상대가 전열을 정비하여 정식으로 싸우기 전에 이미 싸움은 끝났어야 한다. 전쟁은 싸워서 이기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승리의 조건을 만들어 놓고 확인하러 들어가는 것이다. 수전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상대와 정면 승부에 집착한다. 택전(澤戰)의 핵심은 전투에서 곤경에 빠졌을 때 명분을 버리고 빨리 늪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늪에 빠지는데도 불구하고 명분 찾고 자존심을 찾는다면 생존은 점점 더 멀어진다. 줄 것은 주고 버릴 것은 버려야 늪에서 나올 수 있다. 전쟁의 목적은 승리이지 자존심이 아니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으로 응급실 기능이 마비되고 의료가 파행되었다면 늪에 빠진 것이다. 늪에 빠진 상황에서 내가 포기할 것은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 충분한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의료 개혁 정책에 대해 의사들에게 사과하고 처음부터 다시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며 자존심과 명분만 세우다가 결국 환자들의 고통은 배가되고 의료체계는 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육전(陸戰)의 핵심은 출구전략이다. 평지에서 싸울 때는 불리할 때 언제든지 빠질 수 있는 탈출 경로가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들어가는 일보다 빠지는 일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주식과 부동산을 투자할 때 과감하게 손절하고 빠지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전쟁에서 승패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패배를 인정하는 일도 전략이다, 훗날을 도모하는 권토중래의 용기가 필요하다. 지도자는 외골수나 한 분야에만 정통한 전문가가 아니다. 산전수전택전육전 모두 겪어보고, 공중전까지 겪어본 사람이 조직을 이끌어야 한다. 명분, 자존심, 뚝심, 고집이란 덫에서 벗어나야 국민이 행복하다. 진격과 후퇴의 결정은 오로지 국민의 안정(保民, 보민)과 국가의 안위(保國, 보국)가 우선이다. 그래야 국민이 믿고 지지할 것이다. /박재희 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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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19 15:53

가을의 숲길에서

달궈진 오븐 속 같던 여름의 열기가 사라지니, 입맛을 찾고 숙면을 취한다. 아침마다 한결 쾌적한 공기 속에서 기지개를 켜면 가슴에 밝은 기분과 낙관적인 희망이 깃든다. 교하의 가로수인 벚나무 잎은 벌써 반쯤 단풍이 들었다. 요즘 교하도서관 뒤편에서 중앙공원을 잇는 숲길을 걷다가 빽빽한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들 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만날 때 홀로 큰 감동을 받는다. 숲길 바닥에는 도토리가 뒹굴고, 내 부주의한 발밑에서 밟힌 도토리는 여지없이 으깨진다. 여름이 끝나자 빛과 그림자의 존재감은 옅어진다.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의 발 아래 그림자가 지고, 땅에 단단한 몸통으로 서 있는 나무 아래에도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들이 암시하고 일러주는 철학적 진실은 무엇인가? 낙엽이 활엽수의 그림자라면 재는 장작불의 그림자가 아닐까? 그림자란 음의 세계가 빚은 빛의 주검이고 잔류물! 그림자와 실체의 운명은 늘 하나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죽음은 생명이 제 안에 드리운 그림자일 것이다. 나무들은 빛으로 광합성을 하며 성장한다. 빛이 없다면 나무는 자랄 수 없다. 나무들이 태양의 열기를 차단하는 까닭에 숲속 공기는 바깥보다 시원하다. 숲속에서 공생하는 나무들은 사회화된 존재다. 나무는 수직으로 서고 땅속 뿌리는 복잡하게 엉켜 있다. 나무들은 뿌리는 뿌리대로, 줄기와 가지는 그것대로 엮이고 얽힌 채로 공생한다. 숨 쉬고 바스락거리며 수런거리는 나무들. 우리는 나무들이 잎맥과 미립자를 가진, 호흡하고 제 나름의 신경계를 가진 생명 개체라는 엄연한 사실을 자주 잊는다. 따져보면 인류는 숲의 자식들이다. 우리 선조는 숲의 열매와 씨앗, 뿌리를 채취해 식량으로 삼고, 숲에서 안전한 잠자리를 마련했다. 숲은 우리 삶의 터전이고, 의문의 여지없이 우리 운명의 강략한 원소 중 하나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류는 숲의 부양을 통해 제 생명의 필요와 욕망을 충족하며 공생하는 지혜를 발휘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인류가 숲의 피부양 가족의 일원이란 점에서 우리는 한 형제인 것이다.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조응’이란 책에서 ‘인간 몸의 상당 부분은 나무 형상의 공기다. 따라서 이 나무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모습을 보여준다. 뻗어나간 나뭇가지의 구조는 폐, 둥글게 얽힌 뿌리는 입, 우거진 숲 지붕의 형태는 숨이다’라고 쓴다. 나무들은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고 말을 건넨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듣지 못한다. 나무는 인간을 속속들이 알지만 우리는 나무를 알지 못한다. 인간의 무지몽매함 탓에 제 형제를 베고 제재소에서 몸통을 자르며 쓸모가 덜한 뿌리와 잔가지를 불태운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인간은 숲을 토벌하고 빈 땅을 공동 거주지나 경작지로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제 양육자인 어머니 숲을 살해한 사태는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과 무지로 빚어진 잔혹한 일이다. 인간은 한 점의 죄의식도 없이 지구 자원을 마구 퍼 쓰고, 다른 동물의 피해를 끼치며 지구 생태계를 망가뜨렸다. 펜데믹 초기 엄격한 봉쇄 조치와 이동을 제한하자 자연은 놀라운 회복력을 보였다. 대기와 물이 깨끗해지고, 야생동물이 자주 도심에 출몰했다. 인간이 활동을 멈추자 자연 생태계와 동물 서식지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인간이 지구 생태계의 유해종이라는 낙인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이 오명을 벗으려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동료 인간에게 더 두터운 이타적 우정을 쌓고, 숲과 우리가 생명 공동체 안에서 공존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오늘도 고즈넉하고 조용한 숲속 오솔길을 걸으며 디지털 기기의 소음과 번잡함에서 풀려나며 홀가분한 자유를 만끽하며 사색에 몰입한다. 산책하는 내내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은 잦아들고 대신 고요와 기쁨이 찾아든다. 고요가 빚은 사색 속에서 우리의 무의식에 각인된 정체성이 수목 인간이라는 걸 말하는 게 아닐까 라고, 나는 혼자 생각해 보는 것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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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12 14:48

대통령이 위험하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세다. 8월 초부터 30% 전후에서 내림세를 보이며 ‘주별 평균 33% 31% 30% 29%’로 이어진다. 4월 총선 직후의 주별 평균 28%에 접근한다. 윤 대통령 취임부터 8월 하순까지 총 1,076개의 여론조사 결과를 주별로 보면 일정한 흐름이 보인다. 1,076개 중 면접조사가 356개 ARS가 720개로 120주 동안 주별로 평균 9개의 여론 조사가 있었다. ‘대통령 국정운영의 긍정(부정)평가’로 측정되는 지지율은 윤 대통령 취임 직후에서 지방선거까지 주별 평균 50%를 넘었다가 바로 30%대로 추락 한다. 대통령 지지율은 최근까지 2022년 말과 2023년 초 그리고 작년 6월 잠시 주별 평균 40% 언저리까지 올랐던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30% 초반에 머문다. 최근 대통령 지지율의 하락세는 주요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조사 기관마다 최저치 기록에 육박하는 모양새다.갤럽 기준으로 보면 지난주 대통령 지지율은 5월 마지막 주 21%이어 두 번째로 낮은 지지율 23%를 기록한다.3월 마지막 주 30% 중반까지 올랐던 지지율은 이후 20% 중반에서 횡보한다. 갤럽 조사도 1076개 조사의 주별 평균흐름과 유사하다.대통령 지지율은 2022년 6월 평균 49% 7월 평균 32%였지만 8월 이후 20%대로 하락한다.2023년 대통령 지지율은 30% 초중반까지 오르지만 2024년 4월 총선 후 계속 20%대다. 갤럽조사는 대통령의 국정브리핑의 여론을 반영하지 않았다.조사는 국정브리핑 있었던 날까지 이뤄졌는데 여론에 영향을 일부 미쳤다 하더라도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리얼미터 조사결과를 보면 대통령의 국정브리핑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 것으로 해석된다. 이 조사에서도 대통령 지지율은 8월 중순 이후 계속 하락하다 이번에 반올림으로 간신히 30%를 기록한다. 같은 조사의 2년 만의 최저치로 30%가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주 전국지표조사(NBS)가 주목된다.여기에서도 대통령 지지율은 하락세로 ‘30% 29% 27% 흐름’이다.윤석열 정부의 국정운영 방향성이 “올바른 방향”이라는 응답이 줄어드는 양상도 같은 맥락이다. 주별 평균이든 최근 조사든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윤석열 지지층의 붕괴’다.보수층과 영남 그리고 70대 이상의 일부가 지지를 철회하면서 대통령의 핵심 지지그룹이 해체되는 양상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지지자의 57%,70대 이상에서 50%의 지지”를 받는다.특히 충청 지지세의 약화가 주목되는데 ‘대통령 지지율 20% 하향 돌파의 관건’이다. 최근 윤 대통령 지지율의 하락세는 ‘구조적 요인과 상황변수의 복합적 결과’다. 민생과 체감 경기의 어려움이 더 악화되는 양상이다.특히 자영업자의 고통이 심각하다. “응급실 뺑뺑이”로 상징되는 의료대란은 돌발 변수다.지금 ‘응급실 위기’를 진화할 수 있느냐가 의료개혁의 아킬레스건이 된 상황이다. 의료계 곳곳에서 “정부 발표와 다르다.”는 아우성이 이어졌다. 하지만 정부는 “응급실 붕괴 상황 아니다.”라며 맞섰다가 결국 “현장의 어려움을 인정한다.” 대통령실의 입장은 확고하다.“지지율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나가겠다.”고 말한다.“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국민의 생명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고 있다.”면서 “문제는 대국민 홍보”라고 믿는다. 핵심은 대통령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비정상적인 국회”고 “소설 같지도 않은 계엄령설”을 퍼트리는 야당이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개혁은 험난한 과정으로 쉬운 길을 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정치적으로 실천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대통령의 국회 개원식 불참은 “감정적 거부감”이다.대부분의 신문으로부터 “도를 넘었다,”“납득하기 어렵다,”“이해하기 어렵다,”“협량하다”는 비판을 받는다.대통령이 과연 정치와 대한민국 공동체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의심이다. ‘마이웨이의 독선 리더십’은 지지했던 사람들을 하나 둘 떠나가게 하고 지금 지지하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샐러리맨이 되어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하는 여당의원들의 비겁함도 사람들을 화나게 한다. “여의도 장총찬”은 “국민감정 못 따라가는 정치인은 역사의 간신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대통령과 여당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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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5 15:59

내 얼굴 표정

앞산에서 꾀꼬리 한 마리가 울고 있다. 저 울음소리는 무엇인가 정겨운 갈망이 느껴진다. 마을 뒷산에서도 꾀꼬리 한 마리가 앞산 꾀꼬리와 같은 소리로 운다. 울음을 주고받다가, 앞산 꾀꼬리가 내 머리 위를 지나 뒷산으로 노랗게 날아간다. 그때다. 뒷산에서 울던 꾀꼬리가 밤나무 숲에서 나오더니, 둘이 만나 이장네 집 지붕을 넘어 남산으로 날아간다. 새들은 표정이 없다. 몸짓이나 소리로 뜻을 전한다. 강 건너 밭으로 갔다. 고추밭 사이로 걸어갔다. 밭 끝에는 아내가 재작년에 심어놓은 어린 단감나무가 있다. 아내가 감나무가 죽었는지 잘 사는지 궁금해할 때마다, 가보겠다, 가보겠다, 해놓고 또 잊어버리며 한 봄 한여름이 다 갔다. 어린 감나무 두 그루 제법 의젓하다. 길어 나간 새 가지에 감을 몇 개씩 달고 있다. 잎이 두껍고 윤기가 난다. 작년 겨울의 추위로 감나무들이 많이 죽었는데, 어린 감나무 감 얼굴이 볼수록 야무지다. 곧 붉어질 것이다. 자연의 얼굴은 무궁하다. 마루에 앉아 있는데, 뒷산 당산나무에서 꾀꼬리가 운다. 두 마리가 같은 나뭇가지에서 운다. 명랑하다. 아까 그 꾀꼬린가? 꾀꼬리 두 마리는 우리집 가까이 있는 오래된 감나무로 날아와 앉아 자기들끼리 뭐라고 하다가 밤나무 가지로 날아가 앉고, 앉았는가 싶으면 또 다른 나무로 날아가 앉기를 반복한다. 즐거운 놀이다. 밤송이가 주먹처럼 굵어지고 있는 밤나무 숲에서 우는 꾀꼬리의 일은 ‘자연 선택’이다. 자연 선택은 복잡할수록 아름답다고, 그 한계는 없다고 찰스 다윈은 말한다. 방에 들어와 컴퓨터를 켜고 신문을 9개 정도를 클릭해서 본다. 사설, 칼럼, 기획 기사, 건축, 그림 전시 기사, AI 기사, 연예, 영화, 축구 명장면, 인구문제, 지역소식, 정치평론가들의 글이나, 정치인들의 인터뷰 기사들을 챙겨 읽는다. 좋은 글은 복사해 따로 저장해둔다. (이건 내 하루 시작 루틴이다.) 내가 제일 관심이 있게 보는 것은 정치인의 말이다. 정치인의 언어 동원능력과 선택한 그 언어 개념의 범위, 어휘 사용 기술은 그 사람의 정치적인 역량과 능력, 인간성을 가늠하는 잣대다. 그 사람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시대를 읽는 정치 철학과 신념이, 어디까지인지 짐작하게 한다. 정치인들이 입고 있는 옷, 머리 모양, 안경, 얼굴 표정, 걷고 서 있는 자세, 눈빛, 손짓은 그 사람의 정치력 확장 가능성을 믿게 해준다. 이제 일기를 쓰고 내가 써놓은 시를 검토할 차례다. 일기를 쓰려고 화면을 펼치다가 우연히 이런 밑도 끝도 없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페리클레스(BC 495(?)~BC 429)라는 그리스 정치가가 기원전 413년에 전몰자들을 추도하는 장례식 연설문이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의 정치체제는 이웃나라의 관행과 전혀 다릅니다. 남의 것을 본뜬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남들이 우리의 체제를 본뜹니다. 몇몇 사람이 통치의 책임을 맡는 게 아니라 모두 골고루 나누어 맡으므로, 이를 데모크라티아(민주주의)라고 부릅니다. 개인끼리 다툼이 있으면 모두에게 평등하게 법으로 해결하며, 출신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에 따라 공직자를 선출합니다. 이 나라에 뭔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서 인생을 헛되이 살고 끝나는 일이 없습니다. (⋯⋯) 우리는 전 헬라스(그리스)의 모범입니다.” 출처_ 네이버에서 함규진의 –세계 인물사- 마치 ‘백범일지‘에서 김구 선생님이 우리 소원’을 말하는 것처럼 온화한 표정과 말투가 느껴진다. 자기 진영에 갇힌 철 지난 낡은 말이나, 아는 것 없어 보이는 거친 언사로 남의 흠이나 헐뜯는 거친 말이 아닌, 시대를 ‘정리’한 ‘시대의 말’, 품격 있는 ‘정치적’인 정치인의 말을 우린 기다린다. 우리 인류가 가장 잘 선택한 말 중에 ‘민주주의’라는 말과 ‘정치’라는 말을 대체할 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자연 선택이 아닌 인간의 선택인 ‘정치인들의 정치적인 표정’은 그 시대를 사는 공동체의 ‘표정’을 결정짓는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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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9 16:41

먼저 내민 손, 따뜻한 공동체 만들기의 마중물

더위를 피하려고 아내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고 휴가를 떠나지 않아도 가족들과 함께 식사할 때면 새삼 행복한 기분이 들곤 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즐거움을 느낄 거라는 필자의 생각과는 달리 주위에는 조금은 이상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곤 한다. 마주 앉아서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핸드폰만 보고 있는 커플, 식사하는 부모와 대화는커녕 SNS에만 몰두하고 있는 자녀들의 모습 등이다. 디지털 사회로 접어들면서 스마트폰과 SNS의 과도한 사용이 개인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48억 명이 하루에 2시간 이상 SNS를 사용하고 있으며, ‘세대별 SNS 이용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이용률이 1~2%씩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부작용이 생겨나고 있다. 대화가 단절된 커플과 가족처럼 개인주의 성향이 만연하면서 타인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는 무미건조한 사회로 변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소외로 인한 두려움,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인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가족, 이웃, 동료들과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며 격려해주는 '따뜻한 공동체 회복'이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공동체 형성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누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답은 간단하다. 나부터 열린 마음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관심을 가지는 '먼저 손을 내밀어 따뜻한 관계를 회복하는 공동체 형성'이 중요하다. 오래전의 일이다. 필자가 휴직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는 정신없이 바쁜 시기였다. 어느 교포 부부가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아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자녀에 관한 문제였다. 얼굴은 한국인이지만 독일에서 나고 자랐기에 한국어보다 독일어가 익숙해 자연스레 부모와 대화가 단절됨은 물론, 학교에서는 외국인이라는 차별을 겪고 있는데 그 원인을 모두 부모에게 돌리며 불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부부의 부탁으로 필자는 프로그램을 짜서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을 만나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부모에게 퍼부었던 불평의 방향을 나에게 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아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지만, 독일에 있는 동안 매주 만나면서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논문을 제출하고 귀국하여, 한 학기 강의를 마친 후 그해 겨울방학에 논문심사를 받기 위해 다시 독일로 향하였다. 그런데 도착해서 만난 아이들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밝게 웃는 모습, 어색하지만 부모와 한국어로 대화하는 모습,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만난 선생님을 반기는 표정이었다. 아이들을 보면서 ‘나의 작은 노력이 아이들이 이렇게 변하게 했구나’하는 생각에 매우 기뻤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시기에 필자도 타인에게 큰 도움을 받았었다. 같은 연구실의 독일인 동료가 논문 마무리로 쩔쩔매는 필자를 보고 안타까워하며 함께 내용을 상의하고 독일어를 교정해주는 등 먼저 손을 내밀어 필자를 도와주었던 것이었다. 그 결과 박사 논문은 심사위원 전체 동의를 받아 외국 유학생에게는 매우 어려운 등급인 ‘최우수’ 논문으로 평정되었다. 필자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겪었던 이 경험은 먼저 마음을 열고 타인을 위해 노력하면 그들에게 변화가 생길 뿐만 아니라 다른 이웃을 통해 도움을 받는 「따뜻한 관계의 선순환」을 불러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SNS의 사용빈도가 높아짐에 따라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친구, 이웃들과의 소통은 점점 어려워지며 ‘나는 남에게 도움을 받지도 주지도 않으며 혼자 살아가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듯하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살아가다 보면 ‘그때 왜 내가 먼저 손을 내밀지 못했었나?’하고 후회는 적이 생각보다 많다. 여러분도 지금부터 고개를 들고 주변을 바라보며 먼저 손을 내밀어 보기를 바란다. 아마도 그 손길이 우리 사회를 따뜻하고 행복한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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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2 16:06

이단(異端)

정통과 이단이 만나는 곳에 갈등과 폭력이 일어난다. 정통의 입장에서 이단(異端)은 정통과 다른(異, 이) 끝(端, 단)에 서 있는 사람들이고, 이단의 입장에서 정통은 바르고(正) 전통(統, 통)이라는 착각에 빠져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영국 사우스포트에서 시작되어 영국 전역으로 확산한 백인 극우주의자들의 이슬람 난민 추방 시위도 정통과 이단이라는 충돌이다. 르완다 기독교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17살 영국 청년이 어린이 댄스 교실에 흉기를 들고 난입하여 어린아이 3명을 숨지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문제는 그 청년이 이슬람 난민이라는 가짜뉴스였다. 가짜뉴스는 순식간에 소셜미디어 엑스를 통해 펴졌고, 영국 전역에서 백인 극우주의자들의 난민 추방 폭력으로 이어졌다. 경찰차가 불타고, 유색인종의 차를 부수는 장면이 TV에서 연일 방송되었다. 마침 영국에 머물던 필자에게도 시위가 벌어지는 지역은 가지 말라는 메시지가 왔고 집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시위대가 목표로 삼은 런던 월섬스토(Walthamstow) 지역이나 시내 중심의 시위 예상 지역에 수만 명의 폭력 반대 시민들이 운집하여 더 큰 사건으로 번지지 않았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정통과 이단 논쟁이 있다, 기독교는 정통이고 이슬람은 이단, 백인은 정통이고 유색인종은 이단, 영국인은 정통이고 난민들은 이단이라는 이분법적 생각이다. 파키스탄이나 인도 등지에서 영국으로 들어온 무슬림 난민, 이민자들은 이번 폭동을 주도한 영국 백인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이단이다. 자기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고, 기독교 윤리에 대항하는 이단 집단이다. 여자들은 모두 히잡을 쓰고 다니고, 자기들만의 상권을 형성하여 거래하고, 아이를 많이 낳아 영국의 복지를 독식하는 용서할 수 없는 이단이라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자리와 주택은 부족하고, 주택가격과 물가는 치솟고, 도둑과 폭력으로 안전이 위협당하고 있는 영국에서, 그 원인은 모두 이민자, 난민, 이슬람, 무슬림에 있다는 생각이 보수 백인들의 감정을 폭발시킨 것이다. 지금은 영국 정부의 강력한 처벌과 시민들의 반대 시위로 잠잠해졌지만, 이 소강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 필자가 영국에서 직접 목격한 정통과 이단의 갈등이 한국에서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25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인들이 꺼리는 일을 하고 있다. 농어촌에서 부족한 노동 인력이나 건설, 식당, 요양원에 이르기까지 외국인이 없으면 도저히 유지하지 못할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최근에는 필리핀에서 가사 관리 돌봄 인력이 들어와 어린아이와 노인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외국인에 대한 시각 역시 정통과 이단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단에 대한 한국인의 차별과 멸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경제가 침체하고 실업률이 높아지면 한국인이라는 정통의 갑옷을 입고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단을 향해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잠재된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 공자가 살던 시대에도 이단에 대한 문제가 심각했다. 외부에서 들어 온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경계와 멸시가 존재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이단이라고 공격한다면(攻乎異端, 공호이단), 그 피해는 고스란히 공격한 사람에게 돌아올 것이다(斯害也已, 사해야이).” 이단에 대한 공격은 그 피해가 고스란히 공격한 자에게 돌아올 것이란 공자의 경고다. 정통과 이단은 영원하지 않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이단과 정통은 자리를 바꾼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단을 공격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돌아올 것이라는 공자의 경고를 귀 기울여 들을 때이다. /박재희(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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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5 15:33

인간은 음악과 함께 성장한다

생각해보면, 나란 사람은 음악과 함께 성장했다. 음악을 벗 삼은 덕분에 모난 인격도 조금은 둥글어 졌을 테다. 내 젊은 시절, 서울엔 ‘르네쌍스’, ‘필하모니’, ‘크로이체’ 같은 음악감상실이 버티고 있었다. 나는 자주 그 음악강상실을 찾아가 고전음악을 들었다. 다들 팝이나 포크송, 혹은 유행가에 휩쓸릴 때 꼿꼿이 고전음악에 심취했다. 처음엔 쥬페의 ‘경기병 서곡’이나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같은 표제 음악을 듣다가 바흐나 파가니니 등의 기악곡에 빠졌다. 그러다가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말러 등이 창조한 교향곡의 세계에 입성하면서 음악이 무지를 깨부수는 절대의 미와 순수한 기쁨, 숭고함을 품었다는 걸 확신했다. 며칠 전 한 라디오 방송에 초대 손님으로 나갔다. 구성작가와 통화를 하던 중 방송 중 듣고 싶은 세 곡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사라 본(Sarah Vaughan)의 ‘썸머타임’, 리 오스카(Lee Oskar)의 ‘샌프란시스코 베이(San Francisco Bay)’,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를 여름에 들으면 좋은 곡으로 골랐다. 세 곡 다 내가 아끼고 즐겨 들으며 남에게도 추천하는 곡이다. ‘썸머타임’은 누구나 다 알만큼 유명한 재즈 보컬 명곡이다. 본디 미국의 작곡가 조지 거쉰의 가극 ‘포기와 베스(Porgy ane Bess)’ 중 1막에서 자장가로 소개되었다. ‘썸머타임’을 들을 때 나는 행복한 슬픔을 맛본다. 여름밤에 보채는 아이를 품에 안은 엄마는 혼자 흥얼거린다. 강에서는 물고기가 뛰고 목화는 잘 자랐단다. 네 아빠는 부자이고, 네 엄마는 멋지지. 우리가 너를 지켜줄 테니, 아가야 울지 말거라. 시골 외할머니에게 맡겨진 탓에 엄마의 감미로운 자장가를 듣지 못한 채 자란 나는 이 곡을 들으면 숨이 막히도록 슬퍼진다. 이 결핍은 채워지지 않은 채 나란 존재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다. 30대의 어느 날, 한 카페에서 리 오스카의 연주곡을 들었다. 뱃고동 소리, 갈매기의 끼룩거림, 자동차의 경적이 어우러진 화사한 여름 항구 풍경이 떠오르는 전주만 듣고 단박에 반했다. 음반 매장에서 CD인지 음반인지를 구해서 헤아릴 수도 없이 들었다. 여름 저녁 햇볕 냄새가 밴 면 셔츠를 입고 여름의 정취가 물씬 나는 이 곡을 들으며 나는 덧없는 행복에 빠진다. 나중에 이 연주곡이 한 광고의 배경 음악으로 이 곡이 쓰이면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음악이 주는 기쁨은 무엇인가? 몇 달 전 내가 겪은 일이다. 2022년 6월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열린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 ‘크레센도’를 극장에서 관람했다. 18세 청년 임윤찬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했는데, 그걸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연주는 어디에서도 듣지 못한 것이었는데, 기절할 만큼 아름다워 놀랐던 것이다. 그는 피아노 건반을 누른 게 아니라 내 영혼을 눌러 깊은 무의식이 솟아오르게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주책없이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건 벅찬 환희와 함께 나란 존재가 순정해지는 드문 경험 탓이다. 내 음악 취향이 넓어진 건 30대를 지나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같이 고전음악만을 고수하던 나는 재즈나 비틀즈, 스모키, 딥퍼플, 사이먼 앤 가펑클, 빌리 조엘 같은 이들의 노래에도 마음의 문을 열었다. 조용필이나 최백호, 배호 같은 이들이 부른 가요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게 되었는데, 이런 취향의 변화는 세상을 알 만큼 나이를 먹으면서 얻은 범속한 트임 결과일 테다. 늦게나마 다른 장르의 음악에도 또 다른 기쁨과 아름다움이 오롯했다는 걸 깨치고, 취향의 협량함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퍽 다행이다. 음악은 무릎이 꺾인 나를 일으켜 세운 참다운 벗이다. 음악의 위로가 없었다면 인생은 얼마나 쓸쓸했을까? 그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재앙이다. 음악은 내 평생 감미로운 피난처였으니 세상이 어둡고 삭막할지라도 나는 그걸 능히 이겨낼 수 있었을 테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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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8 18:38

홍명보와 한동훈

좋은 성적을 내면 ‘홍명보 논란’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그는 “용서를 받는 방법은 대표팀의 성장과 발전을 이루는 것뿐”이라고 말한다.홍 감독은 “내 인생의 마지막 도전”으로 자신에겐 “대한민국 축구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본 감독 중 최악”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피노키홍”으로 전락했다.“홍명보의 부정출발”이라고 한다.면접 없는 ‘부탁’으로 선임되었다고도 한다.“미리 써놓은 각본”에 따른 “동문 짬짜미”의혹으로까지 이어진다. 감독선임을 주관하는 전력강화위원 중 한 사람은 “홍 감독 선임은 절차 안에서 이뤄진 게 아니다.몰랐다.”고 한다.박지성은 “진실은 내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 하고 이영표는 “축구인은 행정에서 사라져야한다.”며 “실수가 반복되면 그게 실력”이라고 꼬집는다. 홍명보 기자회견 이후에도 “감독사퇴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팀 리더십의 신뢰와 권위를 이미 상실했다는 게 근거다. “오해일 뿐 특혜는 없다.”는 게 축구협회의 입장이지만 ‘홍명보 논란’은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지난 5개월 동안 그들은 “외국인 감독을 후보에 두고 협상 중이다.”나아가 “외국인 감독을 중심으로 후보군을 한 자릿수로 압축했다.”고 말해왔다. 논란의 핵심은 감독선임 원칙과 절차제로 시스템과 프로세스의 붕괴다.리더십 선임과정의 정당성 투명성 공정성 모두 문제가 되었다.과정과 결 과 모두의 실패는 결국 한국축구의 퇴보로 나타난다. “양궁협회를 보고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1988년부터 올림픽 10연패의 여자양궁이다.“올림픽보다 국내 선발전이 더 어렵다.”는 경쟁력 중심의 선수선발이 세계정상의 출발점이다.선수 선발은 물론 운영과 관련하여 뒷말이 없는 이유다.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은 “협회가 선수명단을 제안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히딩크 감독이 “인맥축구”와 “위계축구”를 몰아낸 성과가 월드컵 4강이다.“의리축구”논란의 2014년 월드컵 때의 당사자가 바로 홍 감독이었다. 양궁협회는 국내 단일종목 스포츠 단체 중 가장 오랜 기간 후원을 받는다.그들은 ‘지원하되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다고 한다.‘공정성과 투명성만 볼 뿐 운영에 간여하지 않는다.’나아가 그들은 ‘양궁이 우리사회에 무엇을 어떻게 기여할지 고민’한다고 한다.존재 의의를 넘어선 공동체 기여의 수준이 다르다는 평가다. 축구와 양궁의 대비는 뚜렷하다.사람에 의존하는 개인화된 리더십과 절차와 과정의 시스템과 제도화의 다른 결과로 보인다.SNS 언급에서도 ‘긍정의 정의선과 부정의 정몽규’라고한다. ‘홍명보 논란’은 피할 수 있었다.축구협회가 ‘현재 대표팀에 필요한 감독 리더십의 조건을 제시하고 이에 가장 부합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었으면 되는 일이었다. 한국축구는 올 1월 아시안컵 4강에서 탈락했다.손흥민을 중심으로 한 역대급 선수구성으로 64년만의 우승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한 수 아래로 여겨지던 요르단과의 4강전에서는 유효슈팅을 하나도 기록하지 못한 졸전이었다.당시 대표팀은 “오합지졸 사분오열 콩가루 집안”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슈퍼스타 출신의 관리형 감독이 필요하다.’고 하면 된다.‘전술가보다 보스형 리더가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이다.스타 플레이어의 대표 선수들을 하나로 묶어 개인 역량을 극대화시킬 적임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홍명보 감독은 ‘원팀 원스피릿 원골’을 강조한다.“대표팀에서는 축구지식보다 통솔력이 더 중요하다.”면 “초반부터 국내 감독 중에 홍명보였다.”는 주장이 가능하고 사람들의 공감도 얻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홍명보 논란’은 축구협회 리더십의 실패다.‘현재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하며 이에 가장 적합한 리더십의 조건이 무엇’인지는 100% 그들의 몫이다. 그들은 자신도 없었고 당당하지도 못했다.변명과 회피로 일관했다.한국 축구가 계속해서 나아지고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위한 리더십의 고민은 없어 보였던 것이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메시지는 분명하다.‘미래 변화와 혁신의 리더십이 필요한 때’라는 상황 인식과 한동훈 리더십의 선택이다.출발은 신뢰와 능력의 위기에 빠진 윤석열 정권에 대한 평가와 ‘극복의 차별화’ 요구다 “국민께 제일 걱정 끼치는 게 축구협회와 국민의힘 전당대회”라는데 한동훈 대표는 자신의 미션을 이해할까! 그의 “국민 눈높이,미래의 유능 그리고 외연확장”을 통한 공공선은 무엇일까? /박명호(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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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1 15:50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현관문을 나섰다. 마을은 아직 조용하다. 비가 왔다. 우산을 폈다. 비가 잘 온다. 착실하게 온다. 마음이 착해진다. 우산 위에 빗소리와 오동나무, 가죽죽나무, 고욤나무, 오갈피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각각 다르게 일정하다. 바람이 없다. 빗소리가 마을을 불안하게 하거나 위협적이지 않았다. 꾀꼬리가 아무 일 없는 소리로 노래한다. 참새들이 마당 잔디에서 무엇인가를 물어간다. 할미새가 지붕 끝으로 날아와 앉았다. 자태가 곱다. 파랑새 새끼들 다 길렀는지 나는 연습시킨다. 집 앞에서 종길이 아재를 만났다. 이른 아침인데 벌써 논에 갔다 오신다. 고라니와 멧돼지 방지를 위해 논 가에 둘러놓은 전선 줄 전기를 차단하고 오신다. “생각보다 비가 적게 왔네요.” 그랬더니, “말보다 적게 왔고 만.” 하신다. 종길이 아재가 집 앞 콩밭에 들어서며, “어젯밤에 또 고라니란 놈들이 왔다 갔고 만, 이놈들은 꼭 콩 새순을 똑똑 따먹는 당게” 하신다. 강가로 나갔다. 돌아가신 당숙모네 밭에 이장이 콩을 심어놓았다. 이장 부인이 콩밭 풀을 매다 말았다. 다른 급한 일이 생겼었나 보다. 뽑아 모아둔 풀과 호미가 비 맞는다. 이장이 우리동네 농사를 다 짓다시피 한다. 옥수수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도 토닥토닥 차분하다. 강가에 섰다. 물이 조금 불었다. 물이 다리를 넘어간다. 어제 온 비와 보태졌다. 붉덩물이다. 어디서 갑자기 소낙비가 왔나 보다. 강 건너를 보았다. 칡넝쿨들이 묵은 밭 감나무를 타고 올라가 감싸버렸다. 감나무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 큰 돌들이 물에 잠겨 물살을 일으킨다. 오늘도 마을을 한 바퀴 돌기로 한다. 마을 제일 끝집인 양식이네 집을 지났다. 양식이는 아직 출근 전이다. 전주 누나네 집 식당 일을 돕는다. 현수네 집에는 불이 켜져 있다. 텔레비전 소리가 새어나온다. 현수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거동이 불편했는데, 어제는 회관까지 걸어오셨다. 집 안에서 새어나온 목소리가 정상이 되셨다. 현수네 집 위 이장네 집도 불이 켜져 있다. 이장 말소리가 들린다. 일 나갈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재호네 집 앞을 지났다. 찬수네 빈집터에 풀이 우북하다. 찬수네 집 앞 논을 메꾸어 찬수 여동생이 새로 집을 짓고 있다. 집이 다 되어간다. 오래 묵은 태환이 형 빈 집터를 지났다. 태주네 어머니는 딸네 집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빈집으로 오래 있어서 마당에 풀이 많이 자랐다. 마당 가 죽은 대추나무에 참새들이 앉아 있다. 태금이네 빈 집 마당 풀이 자라고 했다. 주성이 네 집도 고요하고, 점순네 집도 고요하다. 마당에서 흰 개가 자기 집에서 나를 내다보고 있다. 마을회관도 정자도 아직 조용하다. 정자 마루에 부채와 파리채와 물병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사람들이 페트병에 물을 넣어 목침처럼 베고 낮잠을 잔다. 리모델링 하는 만조 형님네 집을 지나 우리 집 앞을 지났다. 우리 집 담에 능소화꽃이 땅에 떨어져 비를 맞는다. 집 앞 텃밭에 참깨꽃이 희게 피었다. 밭 가에 옥수수가 내 키를 넘게 자랐다. 곧 옥수수를 따겠다. 판조 형님에 집 부엌 쪽문에 불이 환하다. 창문 너머로 텔레비전 사극 속 격노하는 왕 앞에 도열한 장수들 얼굴이 심각하다. 종현이네 집 마당에 웬 승용차가 있다. 누가 왔을까? 못 보던 차다. 당숙모가 안 계신 당숙모네 집은 적막하다. 오래 묵은 세곤이네 빈집 담에 담쟁이넝쿨이 무성하다. 마당에는 개망초꽃이 빗속에 모여 희디희다. 현미네 집 앞에 차가 있다. 출근 전이다. 한수 형님네 집, 종길이 아재네 집을 바라보고, 다시 마을 큰길로 나왔다. 바람이 일었다. 마을 앞 커다란 느티나무 밑을 지날 때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크다. 강물이 출렁인다. 옥수수잎과 참깨꽃이 심하게 흔들린다.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고 새들이 조용하다. 그때다. 후두두 굵은 빗방울이 얼굴을 때린다. 집으로 뛰었다. 먼 곳에서 천둥이 으르렁거린다. 나라에 큰비가 온다고 한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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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5 17:00

‘피니싱웰(Finishing-well)’, 멋진 마무리란

지난주, 필자가 존경하던 선배 두 분이 돌아가셨다. 그분들과 웃고,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다시는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수년 전만 해도 친구 부모님들의 장례식 조문이 더 많았지만 이제는 주변 선배들의 부고 소식이 더 많으니 새삼 ‘피니싱웰(Finishing-well)’에 대해 생각해 본다. 90년 가까운 생애 동안 세계환경의 격변, 삶의 변화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다가 돌아가신 한 선배의 모습을 거듭 떠올려보는 요즘이다. 필자가 있는 대학의 전임 총장이었던 고(故) 존 엔디컷(John E. Endicott)박사의 삶은 수많은 도전과 변화가 담긴 한 편의 영화 같다. 군인에서 대학교수, 낯선 타국의 대학 총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환경 변화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도전과 용기로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ROTC생활과 학업을 병행하였고 졸업 후 공군 소위로 임관하여 군 복무를 시작하였다. 일본, 하와이, 베트남 등 전쟁터에 투입되는 등 군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방 최고공로훈장을 받았다. 전역 후 1986년 국방부 산하 국가전략 연구소장 등을 역임한 후, 조지아 공과대학교(Georgia Tech.)에서 교수로서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다. 국제전략기술정책센터 소장 겸 샘넌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며 군에서 경험한 이론과 실무를 토대로 국가 방위전략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였고, ‘동북아시아 비핵화구역(LNWFZ-NEA)’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런 공로로 두 번의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70을 넘긴 나이에는 낯설고 물선 한국 땅에서 대학 총장(2009년 취임)으로 세 번째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고 당시로는 참신한 글로벌 대학의 모델을 실현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100%로 진행되는 영어수업과 다양한 국가의 학생, 교수 선발 등 다문화 환경을 경험할 수 있는 국제경영대학 모델을 구축하여 AACSB(국제경영대학발전협의회) 인증을 받는 등 안정적으로 대학을 운영하였다. 국제대학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과학기술을 융합한 새로운 단과대학을 설립하였는데 그동안의 공로에 대한 업적으로 본인의 이름으로 명명된 ‘엔디컷국제대학’을 생애 가장 큰 명예로 여기고 2021년 퇴직하여 고향인 조지아주로 돌아갔다. 평생동안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고(故) 엔디컷 총장의 삶에서 나는 많은 배울 점을 보았다. 첫 번째는 도전정신이다. 30년 가까운 군 생활 이후에도 연구소장, 대학교수, 심지어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환경에서의 대학총장까지 다양한 변화에 망설임 없는 도전으로 임하면서 나이가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개척정신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는 주변과 협업해 나아가는 열린 마음이다. 군 생활 중에 여러 파견국가에서 임무를 수행하면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수용하는 유연성을 키웠으며 이해관계가 얽힌 동북아의 비핵화 문제 등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현명하게 해결했다. 또 낯선 한국 땅에서 총장으로서 대학을 경영하며 다양한 문화를 가진 학생, 교직원들과 직접 대화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하였다. 한번 만난 사람들을 잊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모습은 인연을 맺은 모든 이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리더의 본보기와 같은 자세였다. 세 번째는 낙관적인 삶의 태도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쟁터, 두 번의 큰 수술, 타국의 낯선 문화환경 등 삶의 고비 앞에서도 그는 늘 낙관적이었다. 작년 미국 출장 중 그를 만났다. 부쩍 야위어 보여 물어보니,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내를 간호하느라 살이 빠졌다. 오히려 아내 덕에 다이어트가 되었고 그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받은 도움을 이제야 갚는다고,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잘한 일이 아내를 만난 일.’이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그와의 마지막 만남은 힘듦 속에서도 긍정과 감사를 선택해 왔던 그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했다. 가까운 선배, 친구들의 부음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울적한 마음에 빠져들지만, 그때마다 마음을 추스르고 힘을 내본다. 도전정신, 따뜻한 마음과 열린 자세, 낙관적인 삶의 태도로 아흔 평생을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던 엔디컷 총장의 모습에서 필자도 어떻게 피니싱웰(Finishing-well)해서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아름다운 여운을 남길지 고민해본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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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8 15:21

미연(未然)에 방지(防止)

시간당 100mm 이상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장마철 각종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기상청은 200년 만에 한번 정도 발생할 수 있는 강수량이라고 발표했다. 승강기 침수와 산사태로 인명사고가 발생하고, 도로가 침수되고 비닐하우스가 무너지는 등 장마철 피해는 미연(未然)에 방지할 수는 없었을까? 일방통행로를 잘못 인식하고 진입하여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교통사고로 안타까운 사망사건이 발생하였다. 미연에 방지할 수는 없었을까? 아동학대 혐의로 고소당하여 진실 공방을 하고 있는 축구아카데미 대표, 명품 백 알선 수수에 대한 공방으로 촉발된 정치권 싸움, 음주운전 사고 후 뺑소니로 구속되어 재판받는 연예인, 눈뜨면 벌어지는 각종 사건 사고를 보며 미연에 방지할 수는 없을까를 질문해 본다. 미연에 방지할 수만 있었다면 그런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란 안타까움 때문이다. 미연(未然)은 아직까지 일이 터져서 그렇게(然) 되지 않았다(未)는 뜻이다. 미연에 방지하라는 이야기는 아직까지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때 미리 조치를 취하여 일의 발생을 막는다는 것이다. 하수는 사고가 터져도 해결하지 못하고, 중수는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해결하고, 고수는 사고가 나기 전에 해결하여 사고 자체를 막는다. 미연에 방지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고수다.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편작(扁鵲)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의술을 갖고 있었던 명의였다. 편작에게는 형제가 셋이 있었는데 모두 의술에 능통했다고 한다. 형제 중에 누가 제일 의술이 뛰어나냐는 질문에 편작은 큰형이라고 대답하였다. 큰형은 병이 나기 전에 미리 알아차려서 미연에 예방하니 의술이 가장 뛰어나고, 둘째형은 병이 드러나기 시작할 때 치료를 해주고, 자신은 환자의 병세가 깊어 고통을 호소할 때 비로소 치료하기 때문에 가장 수준이 낮다는 것이다. 자신이 명의라고 세상 사람들에 알려져 있는 것은 병이 나서 고치는 것만 보고 그러는 것이니 진짜 고수는 병이 나기 전에 미연에 치료하는 큰형이라는 것이다. 편작은 이미 발생한 병만 고치는 하수라면 편작의 큰형은 예방의학을 실천한 미연의 고수였던 것이다. 중국 원(元)나라 좌극명(左克明)이 편집한 <고악부(古樂府)>에는 군자의 능력을 ‘미연(未然)에 방지(防止)’라고 정의한다. 일이 터지기 전에 미리 조심하고 조치하여 예방한다는 것이다. ‘군자는 일이 터지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사람이다(君子防未然, 군자방미연). 군자는 남들의 의혹을 살만 일을 하지 않는다(不處嫌疑間, 불처혐의간).’ 오이 밭에서는 신발 끈 매지 말고, 자두나무 밑에서는 모자를 만지지 말아야 도둑질 한다는 혐의를 미연에 방지 할 수 있다. 고위층 인사들은 남의 의심이나 의혹을 살 행동은 해서는 안 된다. 사건이 터지고 혐의를 받기 전에 미연에 조심해야 한다. 명품 백을 그냥 준다고 덥석 받고, 법인카드를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고,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난다면 미연의 방지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기미를 읽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기미(幾微)는 일이 발생하기 전에 나타나는 미세한(微, 미) 조짐(幾, 기)이다. 어떤 일이 발생하기 전에 반드시 조짐이 있다. 사고가 자주 나는 도로에는 사고의 기미가 있고, 침수가 자주 되는 도로에는 침수의 기미가 있다. 기미를 알고 미연에 방지하면 큰 사고를 막을 수 있다. 하인리히 법칙에 의하면 어떤 큰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는 작은 사건과 조짐이 선행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큰 사고는 예정된 사고이며, 큰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작은 사고와 기미가 선행한다는 것이다. 고수는 기미를 미리 읽고 일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얼마 전 받은 건강검진에서 몇 가지 나쁜 징후의 수치가 나타났다. 큰 병나서 고생하기 전에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건강관리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는 다짐을 해 본다. 병나고 나서 병원 찾는 것은 하수이기 때문이다. /박재희 (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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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1 15:13

우리는 희망의 불씨를 보았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열린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는 여느 해와 달리 인파가 몰렸다. 전시장에 입장하려는 인파가 통로를 메운 채 이동하는 광경은 진풍경이었다. 전시장 입장에만 한 시간 넘게 소요되었다. 출판사 부스마다 저자 강연을 마련하고, 전문가가 나서서 책 추천도 하고, 저자 서명 같은 행사 등으로 독자의 관심을 끈다. 출판사 부스를 순례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벅찬 감정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닐 테다. 이토록 많은 독자들을 마주하며 고무된 한 출판인은 출판사는 좋은 책 내는 데만 집중하면 된다, 면서 자신감을 내비쳤다. 우리나라 성인 독서율이 낮다고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해마다 수천군데의 출판사에서 8만여 종의 신간을 쏟아내는데, 1년 동안 책을 1권도 안 읽는 우리나라 성인은 10명 중 6명이라고 한다. 책을 읽지 않으면 가용 어휘의 양이 줄고, 복잡한 사유를 할 능력이 사라지며, 뇌의 인지 능력도 감소된다. 왜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가? 시간이 없다, 책값이 비싸다, 좋은 책이 드물다, 같은 다양한 이유를 댄다. 책을 멀리 하는 사정도 제각각이다. 우리에게 ‘읽는 뇌’의 경이로운 여정을 알린 이는 인지신경과학자인 매리언 울프라는 사람이다. 울프는 독서가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반복적인 독서 경험을 통해 읽는 능력, 즉 공감하고 이해하는 문해력, 추론, 사색과 성찰을 위한 지력을 키워야만 한다는 뜻이다. 독서란 학습과 훈련을 통해 체득해야만 하는 생존 기술 중 하나다. 독서는 인지적 프로세스 전체를 포괄하는 활동이고, 뇌에 생물학적, 지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촉매제다. 인류는 독서 능력을 체득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인류는 책 읽는 능력을 갖춘 뒤 놀라울 지력을 갖춘 존재로 진화한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독서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그 발명품을 통해 인간은 뇌 조직을 재편성했고 그렇게 재편성된 뇌는 인간의 사고 능력을 확장했으며 그것이 결국 인지 발달을 바꿔놓았다’.(매리언 울프 ‘프루스트와 오징어’) 내 뇌가 읽기 능력을 갖춘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에 출현한 지 30만년이 흘렀다. 30만년의 끄트머리에서 문자가 나오고 책이 나올 때까지 인류는 문자나 책 없는 살았다. 인류가 점토판, 거북의 등껍질, 바위, 양피지, 파피루스, 죽간 등에 문자롤 기록한 건 겨우 6천년 전이고, 책은 그보다 한참 뒤에 출현한다. 원시인의 뇌에는 독서를 할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수세기에 걸쳐 책과 친해지는 과정을 거치고 읽는 학습을 반복하면서 인류의 뇌에는 책을 읽는 회로와 배선이 만들어졌다. 문자를 발명해내 읽기에의 걸음마를 시작한 수메르인 이후 쿠덴베르크 활자가 발명된 하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읽는 뇌’를 만드는데 장구한 세월을 보낸다. 인류는 진화 과정을 거치며 뇌에는 큰 혁신과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책 읽는 뇌의 시대에서 이미 디지털 뇌로 전환하는 징후들이 나타난다. ‘매일 디지털 화면이 제공하는 무수히 많은 정보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폭발적인 정보에서 또 다른 정보로 이동한다’.(매리언 울프 ‘프루스트와 오징어’) 책을 읽고 사색하는 대신 디지털 기기에서 검색하며 정보를 손에 넣는 동안 우리의 뇌에서는 깊은 독서와 사색 능력을 강제로 삭제당하는 중이다. 책이란 문자로 엮인 생각의 뭉치, 사유의 덩어리, 혹은 서사의 집적체이다. 인류는 책과 친해지고 ‘읽는 뇌’를 도약대 삼아 놀라운 진화상의 성과를 거둔다. 인류가 책과 담을 쌓고 멀어진 뒤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바뀔까? 그 미래가 낙관적일 것 같지는 않다. 진짜 위기는 위기가 위기임을 모르는 데서 시작한다. 출판업은 지식을 생산하고 그 역량의 키우는 산업이다. 지금 출판업은 위기다! 만년 적자에 빠진 출판업의 위기는 서점과 인쇄소의 연쇄 도산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 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을 찾은 젊은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룬 건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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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4 15:13

국민의힘 전당대회 ‘보수 재구성의 출발점’ 될까?

국민의힘이 차기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의 후보자 등록을 마감했다.대표경선에는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 한동훈 후보가 나섰고 4명을 뽑는 최고위원에는 모두 10명이 후보신청을 했는데 현역의원이 4명 원외에서 6명이 지원했다.최고위원 4명 중 한 명은 여성 몫인데 후보자 중 유일한 여성후보는 이미 당선이 확정된 셈이라고 한다. 청년 청년최고위원 한 자리에도 11명의 후보자가 몰렸다.10명이 신청한 최고위원 경선과 함께 전당대회 선관위가 예비경선의 컷오프 적용 여부와 경선 참여인원 등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어서 본선 경쟁 참여자 수는 다소 줄어들 수 있어 보인다. 본선 진출자들은 7월 23일 치러지는 전당대회까지 전국 권역별 합동연설회를 갖는데 다음달 7일 광주·전북·전남·전주 지역 당원들을 대상으로 첫 대회전을 치른다.이어서 10일 부산·울산·경남,12일 대구·경북,15일 대전·세종·충북·충남,17일 서울·인천·경기·강원 순으로 합동연설회가 차례로 진행된다고 한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첫 번째 관심은 ‘어대한(어차피 대표는 한동훈)’이 계속되느냐다.후보등록 전까지의 여론흐름은 ‘1강 2중 1약’이었다.조사에 따라 다르지만 국민의힘 지지층 또는 보수층에서 한동훈 지지여론이 압도적이다.대부분의 조사에서 찬성과 지지가 최소한 절반이상이고 높게는 70% 전후까지 육박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한동훈의 출마와 이재명의 연임’에 대한 여론이 당내외로 엇갈린다는 점이다.두 사람 모두 당원과 핵심 지지층의 높은 지지를 받지만 당 밖으로 나가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재명 연임’에 대한 찬반여론이 지지층과 당 밖으로 나뉘는 것은 이중적 해석의 대상이다.이재명 지지층의 계속된 결속력 강화와 동시에 당내 민주주의와 다양성에 대해 대다수 사람들이 갖는 위기의식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한동훈 지지’에 대해 지지층과 당 밖 여론이 엇갈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그에 대한 국민의힘 지지층과 보수층의 미래 기대와 아쉬움의 표현이다.그들은 한동훈이 보수의 미래라고 기대한다.물론 한동훈이 지난 총선패배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도 않지만 총선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가 할 수 있는(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해보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그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후보등록 후 첫 여론조사가 분기점이다.특히 ‘1강 2중 1약의 구도가 지속 되느냐,여전히 압도적 1위냐,누가 2위냐,2위의 앞뒤 격차는 얼마냐’가 핵심이다. 초점은 한동훈의 ‘수평적 당정관계 구축과 대법원장 추천의 채 상병 특검추진’ vs.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의 ‘당정 소통강화와 선 수사 후 특검’이 갖는 여론의 영향력이다.한마디로 ‘한동훈이냐 vs. 아니냐’의 첫 시험대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두 번째 관심은 결선투표 여부다.1차 투표에서 대표경선의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5일 후 7월 28일 결선투표가 진행 된다.후보 등록 후 여론흐름을 봐야겠지만 결선투표로 간다면 승부를 예측할 수 없을 수도 있다. “1강” 입장에서 결선투표는 부담스럽다.결선에서 승리하더라도 여권 내 리더십의 타격은 불가피하다.채 상병 특검 등 현안과 관련한 입장 차이는 당정관계의 재정립은 물론 ‘무(無)당적 대통령의 국정운영이라는 한국정치의 새로운 실험,’ 나아가 그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한다. 결선투표의 쟁점은 ‘윤석열이냐 vs. 아니냐’다.‘한동훈이냐 아니냐’의 1차 투표가 ‘한동훈의 기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묻는 것이라면,결선투표는 국민의힘 지지층과 보수층에 ‘윤석열의 평가’를 묻는다. 대통령 지지율은 ‘윤석열 평가’의 한 표현이다.전국지표조사(NBS)애 따르면 대통령 국정운영의 긍정평가는 27% 부정평가는 64%로 4월 총선이후 뚜렷한 변화 없이 비슷한 수준이다.다른 조사에서도 대통령 지지율은 20% 후반 또는 30% 초반의 박스권이다. 한동훈이 ‘윤석열 극복의 차별화’로 승부수를 던진 상황에서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의 선택’은 무엇일까? 그들은 자신의 색깔과 정체성을 무엇으로 규정하며 스스로 보수의 대안과 미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결국 영남의 선택이다.영남 보수와 수도권 보수분화의 시작일까? 한 달 앞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보수 재구성의 시작이 될까?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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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7 17:35

국민의힘 전당대회 ‘보수 재구성의 출발점’ 될까?

국민의힘이 차기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의 후보자 등록을 마감했다.대표경선에는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 한동훈 후보가 나섰고 4명을 뽑는 최고위원에는 모두 10명이 후보신청을 했는데 현역의원이 4명 원외에서 6명이 지원했다.최고위원 4명 중 한 명은 여성 몫인데 후보자 중 유일한 여성후보는 이미 당선이 확정된 셈이라고 한다. 청년 청년최고위원 한 자리에도 11명의 후보자가 몰렸다.10명이 신청한 최고위원 경선과 함께 전당대회 선관위가 예비경선의 컷오프 적용 여부와 경선 참여인원 등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어서 본선 경쟁 참여자 수는 다소 줄어들 수 있어 보인다. 본선 진출자들은 7월 23일 치러지는 전당대회까지 전국 권역별 합동연설회를 갖는데 다음달 7일 광주·전북·전남·전주 지역 당원들을 대상으로 첫 대회전을 치른다.이어서 10일 부산·울산·경남,12일 대구·경북,15일 대전·세종·충북·충남,17일 서울·인천·경기·강원 순으로 합동연설회가 차례로 진행된다고 한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첫 번째 관심은 ‘어대한(어차피 대표는 한동훈)’이 계속되느냐다.후보등록 전까지의 여론흐름은 ‘1강 2중 1약’이었다.조사에 따라 다르지만 국민의힘 지지층 또는 보수층에서 한동훈 지지여론이 압도적이다.대부분의 조사에서 찬성과 지지가 최소한 절반이상이고 높게는 70% 전후까지 육박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한동훈의 출마와 이재명의 연임’에 대한 여론이 당내외로 엇갈린다는 점이다.두 사람 모두 당원과 핵심 지지층의 높은 지지를 받지만 당 밖으로 나가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재명 연임’에 대한 찬반여론이 지지층과 당 밖으로 나뉘는 것은 이중적 해석의 대상이다.이재명 지지층의 계속된 결속력 강화와 동시에 당내 민주주의와 다양성에 대해 대다수 사람들이 갖는 위기의식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한동훈 지지’에 대해 지지층과 당 밖 여론이 엇갈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그에 대한 국민의힘 지지층과 보수층의 미래 기대와 아쉬움의 표현이다.그들은 한동훈이 보수의 미래라고 기대한다.물론 한동훈이 지난 총선패배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도 않지만 총선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가 할 수 있는(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해보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그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후보등록 후 첫 여론조사가 분기점이다.특히 ‘1강 2중 1약의 구도가 지속 되느냐,여전히 압도적 1위냐,누가 2위냐,2위의 앞뒤 격차는 얼마냐’가 핵심이다. 초점은 한동훈의 ‘수평적 당정관계 구축과 대법원장 추천의 채 상병 특검추진’ vs.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의 ‘당정 소통강화와 선 수사 후 특검’이 갖는 여론의 영향력이다.한마디로 ‘한동훈이냐 vs. 아니냐’의 첫 시험대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두 번째 관심은 결선투표 여부다.1차 투표에서 대표경선의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5일 후 7월 28일 결선투표가 진행 된다.후보 등록 후 여론흐름을 봐야겠지만 결선투표로 간다면 승부를 예측할 수 없을 수도 있다. “1강” 입장에서 결선투표는 부담스럽다.결선에서 승리하더라도 여권 내 리더십의 타격은 불가피하다.채 상병 특검 등 현안과 관련한 입장 차이는 당정관계의 재정립은 물론 ‘무(無)당적 대통령의 국정운영이라는 한국정치의 새로운 실험,’ 나아가 그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한다. 결선투표의 쟁점은 ‘윤석열이냐 vs. 아니냐’다.‘한동훈이냐 아니냐’의 1차 투표가 ‘한동훈의 기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묻는 것이라면,결선투표는 국민의힘 지지층과 보수층에 ‘윤석열의 평가’를 묻는다. 대통령 지지율은 ‘윤석열 평가’의 한 표현이다.전국지표조사(NBS)애 따르면 대통령 국정운영의 긍정평가는 27% 부정평가는 64%로 4월 총선이후 뚜렷한 변화 없이 비슷한 수준이다.다른 조사에서도 대통령 지지율은 20% 후반 또는 30% 초반의 박스권이다. 한동훈이 ‘윤석열 극복의 차별화’로 승부수를 던진 상황에서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의 선택’은 무엇일까? 그들은 자신의 색깔과 정체성을 무엇으로 규정하며 스스로 보수의 대안과 미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결국 영남의 선택이다.영남 보수와 수도권 보수분화의 시작일까? 한 달 앞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보수 재구성의 시작이 될까?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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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7 17:26

그렇게 된 나의 인생

해진다. 나는 걸어서 마을 밖으로 나간다. 마을에서 떨어진 길가 모정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 인사를 하며 어디 사느냐고, 물었다. 이웃 마을에 사는데 선생님 제자라고 해서 놀랐다. 그냐? 하며, 반갑게 악수하였다. 자기 이름을 말하며 수줍어한다. 제자 아버지는 허리가 몹시 굽었었다. 짧은 머리에 유순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어떤 때는, 영화 속의 동학농민군들이나 흑백사진 속 독립군 단체 사진 얼굴처럼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은 공동의 신념이 얼굴에 스쳐 갈 때도 있었다. 달구지로 나무도 해 나르고 보리도 벼도 실어 날랐다. 나는 그 어른이 어쩐지 좋았다. 제자는 시내버스 운전한단다. 정년이 6년 남았단다. 내가 아버님을 속으로 좋아했다고 말했다. 제자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봤다. 사회적인 공분을 살만한 일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온 선량한 시민의 얼굴이다. 우리 집에 한 번 들려라. 아버지 사진이 나온 책이 있다고, 했다. 조금 걸어갔더니, 다른 제자가 비닐하우스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저 제자 아들도 가르쳤다. 그때 내가 가르쳤던 아이를 닮은 아이가 있어서 사진 찍어 준다고 했더니, 길로 쪼르르 뛰어 올라왔다. 이름을 물었더니 이름을 말하고는, 아버지가 힘들게 지었단다. 내가 웃었다. 아이는 2학년이다. 자기는 공부를 아주 열심히 잘한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누구냐고 물었다. 네 아버지와 네 큰 형을 가르쳤다고 했다. 어디 가냐고 했다. 저기, 간다고 했다. 비가 온다고 했냐고 내게 물었다. 모르지만 비는 올 것 같지는 않다고 하늘을 보며 말했다.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어디 가냐고 또 물었다. 우리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내용은 별로 없다. 오랜만에 2학년 학동과 몸짓 손짓 발 짓을 해가며 큰 소리로 떠들며 이야기했다. 둘이 크게 웃기도 했다. 막힌 데 없이 이어지는 유쾌하고 활발한 담소(?)다. 나는 2학년을 20여 년 가르쳤다. 그럼, 나는 이제 그냥 가보겠다고 했다. 또 어디까지 가냐고 했다. 그러다가 아, 아까 말했지, 하며 할아버지는 어디 사냐고 했다. 저기 산다고 우리 마을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언제 놀러 오라고 했다. 그런다고 하는 아이에게 나, 이제 가도 되냐고 확실하게 물었다. 어디까지 가냐고 또 물었다. 귀여워서 또 사진을 찍었다. 두 손가락을 펴서 브이 자를 만들어 눈에 대고 이이이, 하고 억지로 웃다가 진짜로 히히 웃었다. 앞니가 모두 빠졌다. 그때 아이 아버지가 선생님, 그 녀석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으니 그만 가시라고 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바쁘신 분이다. 그만 보내 드려라. 그럼 간다고 하고 빨리 걸어갔다. 돌아오면서 보니, 아이가 아버지 트랙터에 타고 있다가 큰 소리로 지금 아버지가 창고 만든다고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했다. 아이 형이 생각났다. 이 아이 형은 미니포크레인도 운전할 줄 알았었다. 아버지의 잔심부름은 다 하였다. 나는 하교할 때 아이에게 주려고 이따금 아이스케키를 사 들고 가기도 했다. 빈손으로 만난 어느 날 돈도 2천 원 준 기억이 난다. 그럼 나가볼게, 안녕! 근데 할아버지 집이 어디예요. 아까 말했어도 또 저기 저쪽 산 아래 있어. 언제 놀러 와, 그랬더니, 큰 소리로 우리 형 알아요, 한다. 내가 형을 가르쳤다고 나도 크게 말했다. 그럼, 이제 진짜로 가볼게. 오늘 정말 반가웠어. 잘 있어. 날이 어두워졌다. 강둑길 풀밭에 밤바람이 불었다. 이것은 나의 인생! 오다가 뒤돌아보았다. 아이가 크게 손을 흔든다. 이 길은 나의 길이다. 초등학교 6년 선생으로 31년 나는 이 강물을 거스르고 때로 따르며 순응과 거역을 배우고 자유를 얻는다. 지금도 나는 이 길을 걷는다. 나는 이렇게 이 길에서 하얗게 늙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다. 자다 깼다 새벽이다. 창가에 달이 떠 있어서 놀랐다. 달이 나를 보고 있다. 좋아하였다. 아까 본 아이 생각이 났다. 나는 조각달 오목한 곳을 가만히 베고 잔다. 새는 소쩍새, 밤에 새가 운다. 나는 저 새 소리로 내게 주어진 삶을 괴로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고쳐 눕고, 다시 잔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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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0 17:27

나이 들어 하는 공부의 즐거움

이른 아침,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대학 캠퍼스로 출근하는 것은 교수 생활을 해 온 나의 고유한 즐거움이다. 아침 등굣길, 젊은 학생들 사이로 배낭을 메고 활기차게 걸어가는 나이 지긋한 분들의 모습이 눈에 띄면, ‘정년을 앞둔 교수님들이 아침 일찍부터 수업 준비를 하시려고 일찍 출근하는구나!’라는 생각에 저절로 흐뭇해진다. 그런데 며칠 후 교내 행사에 참여하니 학생 대표석에 (교수라고 착각했던)그 분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후 사석에서 그 분에게 만학의 이유를 물으니 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자신의 딸을 조금 더 정성스럽게 보살펴주기 위해 대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껴 입학하게 되었고, 지금은 공부가 재밌고 행복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과 교수들이 수업시간, 시험 등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어린 학생들에게 모범이 된다는 말을 전해 들으며 새삼 마음이 따뜻해졌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목표를 위해 공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은퇴 후 본인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 위해 늦은 나이에 새로운 공부를 시작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한 또 다른 모델이 필자 주변에 있다. 연구소에서 평생 연구직으로 종사하며 나름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아온 분이 은퇴즈음, 평소 소망이었던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원문소설을 읽고 소화하고 싶다는 목표를 세우고, 60대에 영문학과에 편입하여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대학 생활 동안 젊은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었고 졸업 후 대학원까지 진학하였다.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면서 직접 아일랜드에 가보고, 소설의 배경이었던 더블린을 방문하여 작가의 하숙집, 애용하던 카페, 서점에 가서 작가와 시간을 초월한 공감대를 느끼는 경험을 통해 생애 최고의 성취감과 행복을 느꼈다고 말했다. 일본은 이미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재취업, 고령자 창업, 재교육 등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퇴직자 스스로 은퇴 이후를 새롭게 개척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추세다. 우리나라 역시 기대수명은 점점 증가하는 반면, 퇴직연령은 평균 50세 머물러있어 은퇴 후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일상에 치여 못했던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런 사회변화를 고려하면 (지역)대학이 지역사회와의 상생을 위해 해야 하는 역할은 분명하다. 은퇴 후 공부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구체화시키고 지원하는 역할을 지역 교육기관(대학)이 수행해 나가야한다. 우선은, 본인이 꿈꾸고 진짜로 해보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려는 도전이 필요하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공부를 시작해 보려는 도전과 ‘할 수 있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미 젊은 학생들이 있는 밝고 활기찬 캠퍼스에 발을 디뎌 성공적인 대학 생활을 하고 본보기가 되고 있는 분들처럼 본인의 목표를 향해 적극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음으로, 늦은 나이에 공부하려는 분들이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지역대학, 고등교육기관, 지자체 등에서 좀 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평생교육 체계 내에서 조금 더 나아가 마이크로디그리(Micro Degree) 형태의 성인학습자 교육을 통한 소단위 이수 등 수요자의 요구에 맞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퇴직자들의 전문적인 경험과 노하우를 학생, 지역주민들에게 환원하고 봉사할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서로가 함께 공부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필자도 젊지 않은 나이에 변화를 위해 용기를 내고 실천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100세 시대, 인생 절반 이상을 살아온 시점에서 조용히 내 마음의 소리를 한 번 들어봐도 좋을 것이다. 떠밀려 주변의 잣대와 의무로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을 마무리하고 진짜 하고 싶었던 나만의 공부를 찾아서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나이 들어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만끽하다 보면 생이 주는 또 다른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새로운 꿈을 찾아 캠퍼스를 누비는 만학도를 만나면 가장 따뜻하고 반가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싶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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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3 15:10

태평성대를 위한 교태(交泰) 혁명

요즘 석천학당 학생들과 주역 공부에 푹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낸다. ‘모든 것은 변화하며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주역 철학은 상처 나지 않고 온전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인생은 기대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가온 상황을 정확히 인정하고(時, 시), 바라보고(觀, 관), 결정(彖, 단)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질문과 대답은 모두 나의 몫이다. 주역은 나에게 묻고 내가 답하는 학문이다. 세상에 나만큼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 없기에 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엄중하고 현명한 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역의 11번째 괘, ‘지천태(地天泰)’ 괘를 뽑았다. 태(泰)는 평안하고 태평하다는 뜻으로 사람 이름이나 지명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 한자어이기도 하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편안하다는(國泰民安, 국태민안), 태안(泰安)은 인류 역사의 꿈이었다.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은 주역의 태괘(泰卦)에서 유래한다. 하늘(天)과 땅(地)이 서로 자리를 바꿔 교차(交, 교)하여 태평한 세상을 만든다는 뜻으로, 최초 만들어졌던 세종 때에는 왕과 신하들이 정사를 의논하고 연회를 베풀던 장소였다. 하늘은 자신을 낮추고 내려가고(來, 래), 땅은 하늘 위에 올라가(往, 왕) 존중받는 지천(地天)의 세상이 태평성대다. 강자가 약자를 섬기고, 권력이 개인을 보호하고, 갑이 을에게 양보하는 세상이 교태(交泰)의 세상이다. 강자와 약자가 대립하지 않고 소통하니 같은 꿈을 꿀 수 있다. 기업이 교태하면 경쟁력이 강화되고, 가정이 교태하면 만사가 형통하다. 교태는 역할을 바꾸는(交) 혁명이다. 대한민국의 다음 혁명은 교태혁명이다. 정치인은 나라에 헌신하고, 의사는 환자를 섬기고, 경영자는 노동자를 존중하고,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고, 국가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실질적 혁명이 교태혁명이다. 교태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공약이 필요하다. 첫째,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주장을 하는 거친(荒, 황) 집단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고 과감하게 포용(包, 포)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모두가 ‘맞다’라고 해도, 과감하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집단이 있어야 그 사회는 건강하다. 비록 말은 거칠고, 표현은 서투르지만 사회의 면역력을 높이고 건강하게 하는 교태백신이다. 둘째 과감한 개혁이다. 강물(河, 하)을 맨몸으로(馮, 빙) 건널 수 있는 용기로 혁신과 개혁을 지속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태평성대에는 개혁의 주장이 힘을 잃는다. 평화와 안정이 영원할 것이란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태평의 시대는 언제든 불통의 시대로 바뀐다. 다만 시간이 문제다. 익숙하고 편한 것과 결별하는 용기가 있어야 그 시간을 늦출 수 있다. 지속적인 개혁이 필요한 이유다. 셋째 소외계층의 보호이다. 세상은 강자들만의 세상이 아니다. 약자들도 보호받고 인정받아야 한다. 소외된(遐, 하) 사람들을 버리지(遺, 유) 않고 챙겨주는 대동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홀아비, 과부, 고아, 노총각 노처녀(鰥寡孤獨, 환과고독)는 맹자가 강조하는 사회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다. 요양병원에서, 고독한 병실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좁은 방에서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을 사회가 잊지 않고 배려해주는 세상이 교태의 세상이다. 넷째 사적 이익집단의 해체(亡, 망)다. 집단 이익을 위해 패거리(朋, 붕)를 조장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다. 학연과 지연, 업연(業緣)으로 얽힌 사적 이익 집단은 세상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과감한 이익집단의 해체, 교태혁명을 완수하는 방점이다. 땅은 계속해서 평평하게 이어지지 않고(無平不陂, 무평불피), 세상사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無往不復, 무왕불복). 태평성대도 때가 되면 불통의 시대를 만나고, 화려한 궁궐도 결국 폐허의 성(隍城, 황성)이 된다. 황성옛터에서 지나간 영광을 추억하며 넋두리하기 전에 교태혁명을 과감하게 수행해야 할 이유다. /박재희(인문학 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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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6 15:34

딸애들처럼 웃자라서 내 품을 떠나는 여름의 날들

모란과 작약의 계절이 지나면 곧 수국꽃 피는 계절이다. 수국꽃은 여름을 여는 신호와 같다. 벌써 이마가 데일 듯 한낮 땡볕은 뜨겁고, 머잖아 향기로운 여름 과일들이 쏟아져나올 테다. 기억 속 여름의 한 풍경. 때죽나무 위에서 매미가 맹렬하게 울어댄다. 화단에는 키 작은 맨드라미가 있고, 껑충 자란 해바라기도 우두커니 서 있다. 어른들이 집을 비워 나 혼자 종일 심심했다. 뽕나무로 올라가 오디를 따먹었다. 까맣게 잘 익어 달콤새콤했다. 오디를 욕심껏 움켜쥐었던 손은 금세 보랏빛으로 물들고, 셔츠 자락도 보랏빛 범벅이 되었다. 옷을 더럽혔다고 어머니가 꾸중을 하실 게 분명했다. 밤늦게 지쳐서 돌아오신 어머니는 내 옷을 보고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린 시절의 동네에는 철공소가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면 용접봉에서 쉭쉭 소리를 내며 튀어나온 파란 불꽃이 뱀의 갈라진 혀처럼 허공을 핥았다. 모루 위에는 제물처럼 달궈진 쇠가 올려져 있는데, 망치가 모루 위의 쇠를 두드리면 나는 쇳소리가 천둥소리 같이 퍼졌다. 세상의 강철들을 연마하는 모루와 망치들. 한여름의 철공소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거기엔 모루와 망치의 합창, 후끈한 열기와 땀방울들이 있었다. 나는 심부름을 나왔다가 용접봉에서 나오는 파란 불꽃에 매혹되어 철공소 앞을 떠나지 못했다. 여름의 철공소와 함께 나는 미처 가보지 못한 먼 고장을 꿈꾸곤 했다. 거기 번잡한 도시들, 낯선 기름과 향신료 냄새들이 후각을 찌르는 시장, 귀에 선 말로 소통하는 사람들과 맛보지 못한 열대과일도 풍성할 테다. 여름은 나무들의 전성기다. 수목들은 무성하고, 식물 특유의 방향이 공중에 가득 떠돈다. 녹색 잎잎은 기름을 바른 듯 반짝거린다. 바람이 불면 챙캉챙캉 쇳소리를 내는 녹색 잎들, 활엽의 나무들이 일제히 내뿜는 산소, 나무들이 드리우는 그늘들. 여름의 모든 것이 다 좋다. 여름의 나무 그늘에서 여름을 노래하는 시를 읽는 것도 좋다. '올여름의 할 일은/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김경인 '여름의 할 일') 같은 싱그러운 싯구를 찾아 읽는 기쁨을 누린다. '태양이 내리쬐는 넓은 해변들//하얀 더위/푸른 강물//다시, 말라붙은 노란 야자나무들//여름에 잠자는 집에서/8월 내내 꾸벅 졸며//내가 붙잡았던 날들,/내가 잃어버린 날들//딸애들처럼 웃자라서/내 팔을 빠져나가는 날들'(데릭 월컷 '한여름, 토바고'). 오, 딸애들처럼 웃자라서 팔을 빠져나가는 여름의 날이라니! 여름이 없었다면 이토록 많은 여름의 시들은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테다. 지중해 크레타 섬에서 어느 해 여름을 보낸 적이 있다. 그곳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이고 작가의 무덤이 있다. 올리브와 무화과가 무르익는 계절에 그 섬을 찾아갔다. 끼니때가 되면 해변가 식당을 찾아가 오징어 튀김과 해산물, 갓 구운 신선한 빵, 짭짤한 올리브 열매, 올리브유를 듬뿍 뿌린 양파와 양상추, 체다치즈를 곁들인 요리를 먹었다. 바다에서 쾌적한 바람이 불어왔다. 배부르게 먹고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다가 숙소로 돌아오던 그 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은 아니었을까? 여름은 파란 바다와 흰 모래가 빛나는 계절, 긴 셔츠와 반바지의 계절이다. 여름은 여름이라서 모든 게 좋았다. 여름 저녁엔 식구들과 찐 옥수수·복숭아를 먹는 일, 비 오는 날엔 쇼팽의 피아노곡에 귀를 기울이는 것, 서른 몇 해 전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고성(古城)에서 가곡을 부르며 향수로 눈시울이 적시던 찰나,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겪은 열일곱 살 여자애와의 첫 키스가 찾아온다. 다시 여름이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마구 뛴다. 세월이 더 흐르면 나는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죽는 이유를, 여름이 항상 좋았던 까닭을. 하지만 나는 모르는 것 투성이인 채로 살아간다. 아는 것은 여름의 빛들이 내 인생을 스쳐간 영화(榮華)의 기억을 불러온다는 사실뿐이다. 여름의 빛은 짧게 머물다가 사라진다. 지나간 것은 아무 것도 되돌릴 수 없다. 변성기 무렵 내 목소리는 거위 소리 같았다. 음치는 내 인생의 불운. 부모들이 돌아가신 뒤 나는 더 이상 가곡을 부르지 않는다. 오, 인생의 모든 여름들이여, 그 짧은 여름의 빛이여!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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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3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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