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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만 할 수 있는 일

내년 총선은 누가 승리할까? 국민의힘? 민주당? 아니면 제3당? ‘한 달이 1년’이라는 한국정치에서 7월 20일 현재 총선을 265일 남긴 시점에서 총선승부를 예측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내년 총선결과를 예상한다면 세 가지다.국민의힘 승리 또는 민주당 승리 그리고 과반의석을 차지한 정당 없이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엇비슷한 수의 의석을 가진 경우다. 국민의힘 또는 민주당 승리는 한 정당이 국회 내 과반의석을 확보한 경우다. 물론 진행 중인 제3당 시도가 성공할 수도 있다.이 때 ‘성공’은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을 제외한 제3정당이 1당이 되거나 또는 독자적으로 과반의석을 가졌다는 게 아니다.만약 그렇다면 성공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한국정치의 혁명적 상황’이다.그만큼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제3당 입장에서는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엇비슷한 수의 의석을 차지하고 제3당이 캐스팅 보트가 되는 경우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기대다.이조차도 거대양당의 원심력이 강력하게 작용하면서 동시에 제3당이 유권자 요구와 불만의 분출구 역할을 담당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국민의힘 또는 민주당의 총선승리다.먼저 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한다면 민주당의 전국선거 3연패의 반전이다.총선승리의 민주당은 2026년 지방선거와 2027년 대선 승리를 향한 반(反)윤석열 행보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민주당 총선승리가 윤석열 정권의 국민적 심판이다. 윤석열 정권은 임기 내내 여소야대로 사실상 ‘식물정부’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이 때 대통령과 의회의 대립은 격화될 것이고 더 이상 대통령 권력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여당은 지방선거와 대선 그리고 다음 총선을 위해 독자행보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말이 좋아 독자행보지 대통령과 거리두기 또는 대통령 버리기다.여권은 각자도생의 시대다. 국민의힘이 승리한다면 전국선거 3연승으로 “정권교체는 완성된다.”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 연승을 통한 중앙과 지방권력의 교체가 총선승리의 국회권력 교체로 완결된다. 국민의힘은 선거승리를 자신하는 모습이다.대통령 임기 3년차지만 취임기준으로 보면 임기 만 2년에 한 달 정도 모자라는 시점의 총선이라는 ‘정치적 운’도 따른다.최소한 투표참여가 높은 전통적 지지층의 결집으로 총선승리가 가능하다는 판단으로 보인다.민주당은 “카르텔과 반국가세력”에 점점 갇히고 이재명 체제의 총선이냐를 둘러싼 내부분열은 악화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국민의힘 총선승리는 한국정치의 진화를 가져올까? 여야대립은 협치로 바뀌고 정치는 국민 삶의 개선을 선도하는 본연 역할을 할까? 지금까지 우리가 겪은 여대야소 또한 극단적 여야대립의 다른 모습이었다.누가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거대야당은 야당을 무시하고 소수야당은 장외투쟁에 나서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국민의힘 여대야소는 대통령 마음대로 여당 마음대로를 가능하게 할까? 우선 윤석열 권력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비정상’의 문재인 정부를 정상화시키는 것은 권력기대의 최소한’이다.총선에서는 정상화이후 어떤 어젠다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정치개혁부터 시작인데 진정성도 고민도 없어 보인다. 결국 총선 후 여소야대는 말할 것도 없고 여대야소에서도 여론의 지지와 (최소한의) 야당인정과 묵인은 필수적이다.여소야대든 여대야소든 ‘대립과 교착의 정치’에서 벗어나려는 윤석열 권력의 결단이 요구되는 대목이다.제도로 해결할 수 없는 정치의 영역이고 대통령만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치의 업그레이드를 위해서는 '인격화된 권력’을 넘어 국민 삶의 문제 해결을 지향하는 ‘민주화된 권력’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국회 다수당의 총리 복수추천’을 총선공약으로 제시하는 게 출발이다. 기득권 포기와 공익과 공동체 우선, 총선승리의 단기적 비법이고, ‘대한민국 정치 업그레이드의 선도자,’ 퇴임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지켜주는 장기적 안전판이 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만 할 수 있는 일이다! /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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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20 15:48

농단(壟斷)과 천장부(賤丈夫)

정보가 권력이다. 정보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정보는 돈이 되고 이익이 된다. 주식 시장에서 기업의 정확한 정보는 투자 성공이 되고, 부동산 시장에서 개발 정보는 곧바로 돈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 정보를 얻으려고 하고, 정보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힘을 이용한다. <손자병법>에서는 정보를 전쟁의 승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정의한다. 병사를 모집하고, 훈련하고, 물자를 모아 전쟁 준비를 하는데 적의 정보를 모르면 결국 전쟁의 패배로 이어지니,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돈과 지위를 아끼지 말라고 강조한다. 용간(用間)은 정보원의 활용이다. 인적정보를 통해 확실한 정보를 얻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 고급 정보는 일반 사람의 눈높이로는 절대로 알 수 없다. 일반 사람들의 시선과 다른 높은 곳에서 보아야 비로소 남들이 못 보는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고 힘쓰는 것이다. 옛날 시장에서 고급 정보를 얻으려는 남자가 있었다. 어디에서 어떤 물건을 파는지를 정확히 알면 엄청난 이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옛날 시장은 현물거래였기 때문에, 시장에 물건을 거래하러 나온 사람들이 가지고 온 현물의 공급과 수요로 가격이 결정되었다. 쌀이 넘쳐나면 쌀 가격은 내려갔고, 직물이 모자라면 직물 가격이 올라갔다. 이런 정보를 알려면 높은 곳에서 시장 전체를 보아야 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시장 전체를 볼 수 있는 언덕(壟, 농)에 올라갔다. 그 언덕은 깎아(斷, 단) 세운 듯 높은 곳이었다. 농단(壟斷)에 올라가니 시장 어느 곳에서 어떤 물건 얼마나 거래되는지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이 정보를 이용하여 싼 곳에서 물건을 사다가 비싼 곳에 가서 팔아 엄청난 이득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남자를 천한 남자((賤丈夫, 천장부)라고 부르며 멸시하였다. 농단(壟斷)에 올라 부당이익을 얻었다는 이유였다. 농단도 재주라고 하면 재주다. 왜 너는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시장 전체를 보고 정보를 얻을 생각을 하지 않냐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덕은 아무나 올라가는 곳이 아니다. 힘이 있어야 하고, 부당 거래에 대해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뻔뻔함이 있어야 한다. 시장을 관리하는 감독관은 이런 농단의 폐해를 근절하고자 세금을 거두었다. 이득을 얻은 만큼 국가에서 세금으로 징수하여 이득을 못 본 사람에게 나누어주고자 함이었다. 시장에 대한 공권력의 첫 개입이다. <맹자>에 나오는 농단(壟斷)에 관한 이야기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단을 통한 이윤 추구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정보를 이용해서 거래 이윤을 얻고, 선물거래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큰 죄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거대 기업이 가진 고급 정보와 거대 자본으로 중소기업의 이익을 빼앗아 가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권력과 결탁한 농단이다. 국정이든 사법이든, 자리를 이용한 정보를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한다면 응징과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고급 정보를 가진 공직자에게 주식이나 부동산 거래를 제한하는 것은 농단의 의혹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함이다. 높은 자리에서 얻은 정보를 통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두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고, 참외밭에서 신발 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애초부터 의심받을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를 가진 국가의 공직자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일이 높은 언덕에 올라 자신의 이익을 찾는 농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농단의 결과는 천한 사람이라는 칭호와 몰락이다. 비록 주머니에 돈은 가득 채웠지만 천민자본가라는 비난과 함께 비운의 결말을 맞이한다. 농단의 결말, 모두 알고 있지만 미리 알고 피하는 사람은 매우 드문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박재희(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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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13 15:26

쇠를 달구고 망치질 하며 노래하라

사람들은 원고료와 인세만으로 생계를 꾸리는 나를 가리켜 '전업작가'라고 한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책상 앞에 어깨를 구부리고 앉아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인생의 3분의2를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쓰며 보내고 나니 알겠다. 제 고독과 마주하며 무언가를 쓰는 일은 보람도 없지 않지만 꽤나 건조한 작업이라는 것을! 작가의 일이란 '꿈, 낳기, 창작'이다. 그 일은 '우리를 통해 존재하고자 하는 것들'에게 몸을 주어 존재하게 한다. 현실에서 당장의 쓸모는 없을지라도 작가라는 직업을 갖고 사는 동안 가끔 몸을 쓰는 직업을 가졌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까, 하고 묻곤 했다. 국가재해보험국이란 직장에서 근무하며 퇴근한 뒤에는 자기 방에서 타자기로 소설을 썼던 카프카가 그랬듯이 나는 언젠가 '가구를 만드는 장인'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종일 나무에서 나오는 향내를 맡으로 일하고 싶다는 꿈은 이룰 수가 없었다. 내 아버지의 직업은 목수였다. 그는 솜씨가 좋은 목수였지만 몸을 쓰는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은 크지 않았다. 현장에서 몸을 쓰며 땀 흘리는 일보다는 '책상에서 펜대를 굴리며' 살기를 갈망하던 아버지는 한 직장에서 진득하니 견디기보다는 여러 번 전직을 하며 옮겨 다녔다. 그렇게 옮겨 다녔건만 아버지는 만족감을 찾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실직으로 빈둥거리며 보낸 세월이 더 길었다. 일하지 않고 무위도식 하는 자는 무기력하고 비루해 보였다. 내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여러 사업을 구상하고 '허황한 일확천금'을 꿈꾸는 아버지의 속내를 이해하거나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이 온전하도록 떠받치는 것은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 꽃을 피우는 구근식물, 벌과 나비들, 땅에 뿌리를 박고 광합성 작용을 하는 나무들, 그리고 제 자리를 지키며 일하는 자들의 성실함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대장간을 짓고, 쇠를 달구고 망치질 하며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평화롭게 굴러간다. 씨를 뿌리고 파종하는 농부들, 새벽 거리를 청소하는 환경미화 노동자들, 빵을 굽는 제빵사들,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 간호사와 의사들, 우편물을 분류하고 배달하는 우체국 직원들이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제 일터에서 헌신하는 노동자가 없다면 우리 생활은 지금보다 훨씬 더 조악하고 누추해질 게 분명하다. '저기 언덕 꼭대기에 서서/소리치지 말라./물론 당신이 하는 말은/옳다, 너무 옳아서/그것을 말하는 자체가/소음이다./언덕 속으로 들어가라./그곳에 당신의 대장간을 지어라./그곳에 풀무를 세우고/그곳에서 쇠를 달구고/망치질 하며 노래하라./우리가 그 노래를 들을 것이다./그 노래를 듣고/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 것이다'.(올라브 H. 하우게,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공연히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는 일이 되지 않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 그 외침이 의미의 생산이 아니라 소음을 만드는 공허한 짓인 탓이다. 나는 자주 묻는다. 내가 하는 일이 고슴도치나 양치식물이 세상에 기여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가? 한 줄의 시, 한 줄의 산문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힘을 보태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무용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들이란 얼마나 하염없는 존재들인가! 시인 윤동주는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 보고 그 욕됨에 부끄러워하며,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라고 다짐한다. 그런 싯구를 적는 청년은 외래의 피침으로 국권을 잃고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에서 야만의 시대를 견뎌야 했던 그 누구보다도 정직한 사람이었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모두 빛의 격려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하여 일한다. 박새와 곤줄박이, 닭과 오리, 벌과 개미, 저 혼자 돋는 열무 싹과 민들레도 먹이를 구하며 생명의 동력을 얻는다. 우리가 하는 정직한 일들은 생계의 방편이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도정이며, 삶의 기쁨과 의미를 만드는 근간이다. 한 사람의 가치는 그가 하는 일에 대한 평판에서 나온다. 일하지 않는 자는 어떤 평판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쇠를 달구고 망치질 하며 노래하는 사람이 되라고 썼을 테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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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6 17:01

100세 시대

어느 선거일에, 나는 투표소 앞 긴 줄 안에 서 있었다. 하루 종일 줄은 길었고, 코로나의 끝물이라서 아직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남들처럼 스마트폰의 도움을 받아 지루함을 이기며 서있었는데, 문득 투표 진행을 돕는 참관인이 도움을 청했다. “107세 유권자가 오셨습니다. 차례를 양보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나 아닌 누구라도 이런 양보를 거절할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표정과 몸짓으로 기꺼움을 최대한 드러내보이며, 신성한 투표권을 행사하러 오신 107세 유권자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도착한 어르신을 보고 나는 내가 뻔하고 고루한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그분이 들것이나 휠체어의 도움을 받아 오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분은 아주 세련된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았고 지팡이조차 짚지 않았다. 다소 천천히 걷기는 했지만 앞선 안내가 없었다면 나는 그분이 80대쯤 되셨으려니 짐작했을 것이다. 아니 아무런 짐작조차 하지 않고 그분에게 어떤 관심이나 주의조차 기울이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분은 107이라는 깜짝 놀랄 숫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보이는 평범한 노인 중 하나일 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인 1991년 6월,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가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는 87이라는 숫자가 지금의 107처럼 들렸다. 107세 유권자와 나의 할머니를 겹쳐 떠올리면서 나는 그 사이 사람의 수명과 노년의 활력수명이 함께 길어진 것을 실감했다. 누구나 칭송할만큼 장수하고 세상을 떠나신 나의 할머니는 107세 유권자처럼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운신에 어려움이 없었다. “오금이 붙으면 안뒤야.”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바지런히 움직였다. 오금이 붙지 않기 위해서 할머니는 눈이오나 비가오나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왔고 쑤시는 어깨를 풀기 위해 관절을 돌렸다. 지금 생각하니 손녀에게 어깨나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하셔도 좋았을 텐데,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몸을 누구에게 의탁하지 않았다. “움적거리면 뒤야.” 할머니는 속상한 일이 있어도 불평하거나 한탄하는 법이 없었다. 나쁜 일이 있어도 우울하고 어두운 표정을 한나절 이상 길게 가져가는 일도 없었다. 한숨 한번 쉬고 나서 몸을 움적거리는 것으로 할머니는 노년에 닥쳐오는 어려움을 모두 이겨냈다. 씩씩하게 약수터에 오르고 쑤시는 어깨를 혼자서 풀던 할머니는 단 하루도 몸져 눕지 않고 어느 날 잠자듯 세상을 떠나셨다. 조촐하게 욕심이 없던 할머니가 거두신 생의 마지막 승리는 그 고요하고 갑작스러운 떠나심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지 않았던 어느 유월의 맑은 날에, 나와 부모님, 그리고 세분 고모들은 할머니의 산소에 성묘를 갔다. 사랑이 많으셨던 우리 할머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 할 수 있다. 산소로 향하는 야트막한 오솔길을 걸으며 나는 마음 속으로 덧셈을 해보았다. 큰고모 96세, 둘째고모 93세, 아버지 89세, 막내고모 84세, 엄마 82세. 할머니의 직계자손 4남매의 나이를 더하면 362, 엄마까지 더하면 444년이라는 놀라운 시간이 조용히 내 앞을 흘러가고 있었다. 큰고모가 가벼운 지팡이를 짚었을 뿐 모두 씩씩하게 잘 걸었다. 몇 년전 둘째고모는 허리를 다치며 보행이 어려워졌다. 고모가 열심히 재활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솔직히 속으로 비관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둘째고모는 끝내 회복해 지팡이 없이 꼿꼿하게 언덕길을 올랐다. 간이 의자 두 개를 챙겼는데 고모들이 계시니 아버지께는 순서가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서 90세 이하는 모두 젊은이에 해당할 뿐이었다. 그늘에서 쉬시라고 해도 고모들은 좀 움직이는게 좋겠다며 꼬챙이를 들고 산소 주변의 잡초를 뽑았다. 이제는 당신보다 연세가 높아진 딸아들 들에게, 땅 속에서 할머니는 다시 한번 조용히 속삭이셨을지도 모른다. 오금이 붙으면 안뒤야, 움적거리면 뒤야. 그분의 자녀들은 최선을 다해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각자에게 주어진 노년의 시간이 얼만큼이 될지 모르지만, 결국 내가 해야할 일은 그것으로 수렴될 것이다. 오금이 붙지 않게 바지런히 움직이고, 속상한 일들은 몸을 움적거려 날려보내면 된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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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29 16:39

윤석열의 정치적 운(運)

아직은 모른다.유권자들은 좀 더 지켜보겠다는 뜻이다.시간도 충분하다.6월 22일 현재 293일 남은 2024년 총선여론의 흐름이다. 작년 12월부터 최근까지 ‘지원론 vs. 심판론’ 또는 ‘국민의힘 vs. 민주당 지지’의 여론조사는 모두 28개. ‘심판론 또는 민주당 지지’가 25승 1무 2패로 압도적으로 앞선다.‘국정 지원론 또는 국민의 힘 지지’는 평균 40.0%,‘정권 심판론(견제론) 또는 민주당 지지’는 평균 48.4%다. ‘국정 지원론 또는 국민의 힘 지지’의 여론은 최저 36%였는데 작년 12월 초와 4월 초였다.최고는 46%로 5월 말이었다.‘정권 심판론(견제론) 또는 민주당 지지’의 여론은 최저 43%로 5월 초였고 최고는 56.2%로 대통령 당선 1주년 때였다. 28개의 여론조사는 ‘지원론 vs. 심판론’ 또는 ‘국민의힘 vs. 민주당 지지’의 다양한 설문을 시간적 순서로 나열한 것이다.따라서 장점은 여론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것이고 단점은 서로 다른 설문의 조사를 동일한 것처럼 간주하는 위험성이다. 그래서 동일 또는 유사한 설문을 사용한 일정한 간격의 조사들을 본다.28개의 여론조사 중 9개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그 중 하나는 5월 초부터 2주 간격으로 2회 조사했다.이에 따르면 5월 초순 ‘지원론 vs. 심판론은 44% vs. 43%’였다가 5월 하순 46%로 동률을 이룬다.가장 최근의 조사로 현재여론의 흐름을 반영한다. 일정 간격의 동일 또는 유사설문의 조사 9개 중 7개는 작년 12월부터 6월 초까지 걸쳐있다.이에 따르면 ‘국정 지원론’은 ‘36% 44% 42% 36% 37% 39% 그리고 37%’로 이어지고,‘정권 심판론’은 ‘49% 50% 44% 50% 49% 51% 그리고 49%’다.전제척으로 보면 28개 여론조사의 평균(40% vs. 48%)으로 수렴하는 양상이다. 28개의 여론조사 중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중도 또는 무당층의 선택이다.28개의 조사 중 27개가 이들을 따로 뽑아 분석했는데 중도 또는 무당층의 ‘지원론 또는 국민의힘 지지 vs. 심판론 또는 민주당 지지’의 여론은 평균 ‘33% vs. 54%’였다.‘지원론’은 최저17%를 기록하기도 했고 4월 초순이었던 이 때 ‘심판론’은 69%로 최고를 기록한다.27개의 조사 중 24번 ‘심판론’이 50%를 넘는다. 따라서 오늘 현재 내년 총선을 향한 민심은 첫째,오차범위 내외로 ‘심판론 또는 민주당 지지’의 여론이 상대적으로 높다.둘째,선거의 향방을 결정할 중도 또는 무당층은 ‘심판론 또는 민주당 지지’로 좀 더 기울어져 있다. 총선은 야권의 시간으로 시작한다.민주당은 ‘김은경 혁신위’를 시작했지만 “혁신위가 성공한 사례는 없다.”고 한다.많은 사람들이 갓 출범한 민주당 혁신위를 비대위로 가는 징검다리로 보는 이유다.친명도 비명도 그리고 반명의 향후 민주당의 총선체제를 향한 공통분모는 비대위다. 예를 들어 “김부겸 비대위”가 2016년 김종인 비대위처럼 “이해찬과 정청래 공천탈락”부터 시작한다면 ‘심판론 또는 민주당 지지’는 더 높아질 것이다.물론 그 출발은 ‘왜 5년 만에 40%대 지지율의 퇴임 대통령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내놨느냐?’에 대한 반성이고 이게 김은경 혁신위의 첫 과제다. 임기 만 2년의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을 향한 유권자의 심사는 복잡하다.‘제대로 일 할 기회를 줘야한다.’면서도 ‘권력의 오만과 독선은 막아야 한다.’는 필요가 교차한다.하는 걸 보면 마뜩치 않다는 게 지금의 여론이지만 ‘남은 임기를 생각하면 이렇게 둘 수도 없지 않냐’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 지점이 바로 윤 대통령 정치적 행운(?)의 출발점이다.두 명의 대통령밖에 누리지 못한 ‘타이밍의 포르투나’다.임기 만 2년 안에 총선을 치룬 3명의 대통령 중 두 명이 압승했다. ‘진짜 실력의 비르투나’는 승부의 쐐기를 박는다.출발은 ‘총선이후 대통령 권력이 강화된 경우도 대통령의 친위세력이 대통령의 충성을 더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도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윤석열의 정치적 운,이제 마지막 시험대에 오른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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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22 16:08

명령 거부권, 군명유소불수(君命有所不受)

인사권자의 부당한 지시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단호하게 거부할 것인가? 부당한 지시나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납한다면 그 결과는 참혹하다. 작게는 기업과 사회가 부패하고, 크게는 나라가 망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인사권자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부당한 지시라면 과감하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조직을 살리고, 미래의 더 높은 차원의 조직을 만드는 일이다. <손자병법>에는 전쟁터에 나간 장군이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군주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고 한다. 전방의 현장 상황도 모르고 후방에 앉아 측근들의 편협한 의견을 듣고 잘못된 명령을 내리는 군주에 대하여 현장의 장군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엄한 임금의 명령이라도(君命, 군명), 따르지 않을 경우가 있다(有所不受., 유소불수).’ 이순신 장군은 무모하게 돌격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거부하고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하였다. 나의 생존을 위해서 나라와 백성의 생명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대가 전쟁에서 패하고, 나라가 망하는 이유는 후방 군주의 지나친 간섭과 부당한 지시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기>에는 제(齊)나라 대장군 사마양저(司馬穰苴)가 왕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쟁터에 군대가 출정하던 날, 왕이 총애하는 신하 장고(張賈)라는 사람이 군율을 어기고 제멋대로 전횡을 일삼았다. 사마양저는 군율에 따라 참형을 명령하였다. 왕이 이 사실을 알고 사자를 보내 측근인 장고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였으나 양저는 아무리 지엄한 임금의 명령이라고 부당한 명령이라면 거부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장고의 목을 베었다. 그는 군율을 어긴 제나라 왕의 측근 장고의 죄를 물어 처형하면서 유명한 말을 남긴다. ‘장군은 전장에서 지엄한 임금의 명령이라도 거부할 수 있다. 임무를 맡아 전쟁터에 나선 장군이 잊어야 할 것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장군은 임명된 날에(將受命之日, 장수명지일) 자신의 집안일을 잊어버려야 한다(忘其家. 망기가). 둘째 전장에서 군법을 한 번 정하게 되면(臨軍約束. 임군약속) 그때부터 부모도 잊어버려야 한다(忘其親, 망기친). 셋째 전쟁터에서 북을 치며 적진을 향해 돌격할 때는(鼓之急, 고지급), 자신의 몸조차 잊어버려야 한다(忘其身).’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조국과 임무에 충성한다는 사마양저 장군의 철학이 담겨 있는 말이다. 인사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부대를 이끌었던 양저는 병사들의 강한 지지를 얻게 되었고, 사기가 충천한 제나라 군대는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 승리한 군대가 되어 제나라 수도로 돌아왔다. 윗사람의 부당한 지시는 거부할 수 있다는 철학은 머리로는 이해하기 쉬우나 실행에 옮기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직장에서 상사의 지시가 부당하다고 생각할 때, 과감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공권력에 대하여 부당한 권력의 행사에 반기를 드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친구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충고하면 친구와 이별을 맞이할 수 있고, 직장상사의 부당함을 거부하면 직장을 잃을 수도 있고, 부당한 권력에 대하여 저항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옳은 일에 대하여 자신의 자리와 목숨을 걸고 지켜 온 사람들에 의하여 더욱 발전하였으니, 내가 비록 어떤 이유로 옳은 길을 선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자리를 걸고 옳은 길을 선택한 사람에 대하여 비난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부당함에 눈을 감고 침묵할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경우도 있고, 소신을 가지고 거부하며 저항해야 할 때도 있다. 어느 결정이든 다 이유가 있고, 논리가 있으니 어느 한 편에서 함부로 비난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목숨을 걸고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인생에서 후회할 일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박재희 (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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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15 15:06

나는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앵두나무에 박새 몇 마리가 포르르 날아와 앉고, 불두화는 꽃을 흐드러지게 피웠다. 오늘 아침 앵두나무 가지에 매달린 앵두는 붉게 익어가는 중이다. 새벽에 어린 고양이는 내 품에 안겨 아기처럼 가르랑거린다. 어린 고양이의 털에 코를 묻고 있으면 기분 좋은 햇빛 냄새가 난다. 나는 날마다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 날씨 속에서 산다. 해가 떴다 지고, 어둠 속에서 달은 야위었다가 차오르기를 반복하고, 어린 고양이는 반드시 성체 고양이로 자라나는 그런 합법칙의 세계에서! 남해 물결은 섬과 섬 사이에서 잠잠하고, 항구마다 정박한 배들은 묶여 있다. 동해에는 돌고래와 귀신고래들이 새끼를 데리고 떼 지어 유영을 한다. 먼 데서 달려온 파도는 해변에 포말을 남기며 사라지고, 깨끗한 하늘엔 적멸보궁 같은 흰구름이 피어오르는데, 꿀벌들은 지상에서 날개를 붕붕거리며 꿀과 꽃가루를 채집하고, 복숭아나무 가지에서는 열매들이 최선을 다해 여문다. 지난가을 어머니가 담근 고추장에는 순한 단맛이 들고, 장을 가득 채운 항아리들은 반짝거린다. 간밤엔 별똥별 몇 개가 동에서 서로 횡선을 그으며 흘러가고, 올해 처음 목격한 반딧불이의 군무는 신기했다. 실내 등을 다 끄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초록빛 인광을 반짝이며 떠다니는 반딧불이를 자정 너머까지 보다 잠들었다. 새벽에 깨어나 책상머리에 앉아 몇 년 째 쓰던 책의 마지막 줄을 쓰고 마침표를 찍었다. 나를 누르던 압박감은 사라지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낙관은 이스트를 낳은 빵처럼 부푼다. 오늘 아침은 혈압은 높지도 낮지도 않고, 당뇨 수치는 정상이다. 연체료가 붙은 미납 세금고지서가 날아온 적은 없고, 두루마리 휴지도 몇 달은 쓸 만큼 넉넉하며, 오늘 외출할 때 신고 나갈 구두는 새 구두다. 주방에서는 딸아이가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텃밭에서 딴 토마토를 믹서기에 갈아 주스를 만드는 중이다.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 한때 노름에 빠진 적이 있다. 외적 우연에 판돈을 걸지만 내 예측은 번번이 빗나갔다. 푼돈을 털리고 분노와 허탈감을 안고 귀가하곤 했다. 시 한 줄 쓰지 못한 채 노름으로 허송세월하는 나 스스로가 한심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튿날 역으로 나가 기차를 타고 예정에 없던 여행을 떠났다. 일제 강점기 때 지은 건물들이 유적처럼 남은 남쪽의 항구도시였다. 그 도시에 지인은 없었다. 나는 며칠 동안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어느 날 숙박업소에 들어 불을 끄고 잠 들려는 순간 옆방에서 라디오라도 틀었을까, 빌리 조엘(Billy Joel)이 부르는 'The River of Drems'이라는 아름다운 노래가 들려왔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노래를 듣다가, 아, 참 좋다, 라고 나는 감탄했다. 빌리 조엘은 밤중에 강가를 서성이며, 나는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라고 노래했다. 나 역시 낯선 고장에서 무얼 찾아 헤매는 것일까. 무언가가 내 생의 한 찰나를 흔들고 지나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아무도 아닙니다. 한 목소리가 내게 물음을 던지고, 나는 정직하게 대답을 했다. 이튿날 아침 나는 낯선 여관에서 나와 항구의 한 식당에서 조반을 먹고 돌아왔다. 내가 찾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인생의 진실이었을까? 하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 막막하던 시절에서 서른 해 쯤 흘렀다. 그리고 이 여름 아침에 나는 다시 빌리 조엘의 노래를 듣는다. 빌리 조엘은 여전히 난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라고 노래한다. 나는 찾으려던 인생의 진실을 찾았을까? 나는 젊음을 탕진하고 속절없이 나이를 먹으며 늙어간다. 세면대에서 물을 쓴 뒤에는 수도꼭지를 잘 잠그고, 밤하늘을 가린 지붕 아래서 일찍 잠자리에 든다. 나는 더 이상 사랑의 번뇌에 빠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직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인생의 진실은 무엇인지를 잘 모른 채 살아간다. 고작 이 여름날에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에 몇 마디 할 수 있을 뿐이다. 저녁답 마당귀에서 꽃망울을 터뜨린 작약꽃, 무릎에 올라와 가르랑거리는 어린 고양이, 다리미 열기가 남은 면 셔츠의 감촉, 얼음덩이 몇 개를 띄운 토마토주스, 그리고 빌리 조엘의 노래! 서른 해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왜 빌리 조엘의 노래를 들으면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걸까.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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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08 15:35

나의 아름다운 단골가게들

도서관에서 북토크 행사를 했던 어느날이었다. 행사를 온라인 라이브 송출한다는 것까지도 괜찮았는데, 내가 실시간으로 방송을 확인할 수 있도록 내 앞에 태블릿 하나를 놓아준 것이었다. 태블릿을 치워달라고 말할 찬스를 놓친 채 얼떨결에 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비슷한 일을 겪었을 때 스트레스를 받을 사람이 나 말고도 여럿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북토크를 하는 것과, 내가 북토크 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지켜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나는 내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모니터의 화면을 보면서 내내 생각하게 된다. 말할 때 왜 입이 비뚤어지지? 머리는 왜 저렇지? 멍청하게 웃는 저 촌스러운 여자는 도대체 누구지? 다행히 그 날 나는 그런 괴로운 생각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았다. 모니터를 보면서 몇 번 구부러진 허리를 바르게 펴기는 했지만 그건 주최측이 내 앞에 태블릿을 놓아준 의도와 아주 부합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모니터 속의 내 모습을 헐뜯고 경멸하지 않으며 오로지 대화에 집중했다. 나는 평화롭게 행사를 마쳤다. 이 일은 나에게 뜻하지 않은 큰 기쁨을 주어,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일을 흐뭇하게 되새겼다. 작가 경력 20년만에 드디어 나에게도 경륜이나 자신감이라고 할만한 것이 생긴 것이다. 나는 이제 모니터 속의 내 모습에도 당황하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베테랑이 되었다. 어쩌면 흔히 ‘나 자신과의 화해’라고 말하는 일을 해낸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한계와 현실을 인정하고 담담하고 편안한 눈으로 나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좋아하는 단골 옷가게에서 봄 세일을 한다는 안내 문자가 왔을 때 나는 갑자기 이날의 북토크를 번개같이 다시 떠올렸다. 그날의 일들이 빠른 속도로 머리 속에서 재생되면서, 이날 모니터 속의 내 모습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했던 생각들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때 나는 북토크를 하는 중간중간 이런 생각들을 했다. 린넨 재킷을 사길 잘했어. 역시 독자들을 만날 때는 재킷이 좋아. 예의를 차린 듯하면서도 린넨 소재가 주는 어떤 자유로움이 있거든. 한여름이 되기 전까지는 잘 입을 수 있겠다. 앞머리가 많이 길었네. 펌 한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다음주 쯤에는 미용실에 가야지... 이리하여 나는 지난 10년간 나에게 일어난 숨은 변화와 그 결과를 갑자기 통찰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인터뷰에서라도 나에게 지난 10년간 일어난 중요한 일들을 꼽아보라고 물었을 때 내가 미용실이나 옷가게를 떠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높은 확률로, 내가 겪었던 가족간의 일들, 작가로서의 이력, 읽었던 책들이나 사회적인 현상들과 관련된 대답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내 인생에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변화를 이룬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내 단골 미용실 원장님이나 옷가게 사장님 같은 현실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나는 마음에 드는 브랜드를 찾아 내 옷장의 거의 90% 이상을 채웠다. 처음에는 오프라인 매장에서 구입했지만 이제는 온라인으로 사도 이 브랜드 옷들의 분위기와 재질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꽤 오랜 시간동안 이 브랜드 제품들을 고루 사보면서 어떤 디자인과 분위기가 나와 잘 어울리는지 상당한 데이터가 축적되었으므로 어떤 옷을 사든지 만족도가 높고 오래 입는 편이다. 그리고 감사한 미용사님. 이분 덕분에 나는 더 이상 미용실에 가는 일을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곳에서 내 의견 따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그분께 머리를 맡기고 잠시 눈을 감고 있으면 알아서 필요한 일들을 슥슥 다 해주신다. 오랫동안 나에게 미용실과 백화점은 치과만큼이나 가기 싫은 곳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고, 상당한 돈을 쓰고도 그 결과는 항상 미심쩍었다. 쇼핑과 스타일링에 대한 자괴감은 자존감마저 깎아먹어 공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에 불필요한 위축감이 들게 했다. 하지만 나의 이 아름다운 단골가게들은 내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구매하고, 그 결과에 만족하고, 자신감과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바꾸어 생각하면 일상 속에서 대단치 않은 일들로 얼굴을 마주하는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보이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서로 감사하고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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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01 17:29

위선과 무능 vs. 쇄신과 미래의 유능

최근 대통령과 정당 지지율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다. 작년 5월 10일 대통령 취임부터 최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는 모두 455개로 이 중 면접조사 139개 ARS 조사 316개다.주간 단위로 적게는 2개 많게는 19개의 여론조사가 실시되었다. 평균적으로 한 주에 8개 내외의 여론조사가 있었다. 가장 많은 여론조사는 대통령 취임 1주년 때였다. 대통령 지지율은 4월 중순부터 상승추세를 보인다. 지난 5주 동안 실시된 여론조사는 모두 54개였는데,이 기간 동안 대통령 지지율은 평균 32.1% 34.2% 34.7% 37.4% 37.9%를 기록한다. 반면 대통령 부정평가는 63.7% 62.8% 61.2% 59.1% 59%로 변화한다. 주별 평균으로 본 대통령 긍정평가가 한 달 이상 계속해서 상승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윤석열 정부출범 후 처음이다. 다른 조사도 비슷한 양상인데 갤럽조사는 3주,리얼미터 조사로는 4주 연속 상승을 기록한다. 이제 40%를 목전에 둔 대통령 지지율의 다음 목표는 40% 중반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선승리의 중도보수연합 재건이 중요하다. 대통령의 행보가 출발점인데 윤석열 대통령의 선택이 주목된다. 정당 지지율은 같은 기간 동안 민주당 하락세의 약보합, 국민의힘 상승세의 약보합 양상이다. 주별 평균으로 보면 지난 한 달 민주당이 국민의힘에 계속 앞섰지만 그 격차는 점점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지난 한 달 동안 가장 크게는 양당 지지율이 10% 포인트 가까이 차이가 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양당 지지율이 오차범위 내로 좁아진다. 양당 지지율의 격차가 줄어든다는 것은 양당의 지지율의 흐름이 다르다는 말이기도 하다. 민주당의 최고 지지율은 한 달 전이고 국민의힘 최고 지지율은 가장 최근이다. 민주당 주별 평균 지지율은 이 때 최저 37.7% 최고 42.7%를 기록한다. 국민의힘 주별 평균 지지율은 최저 33.7% 최고 36%를 기록한다. 5.18에서 5.23까지는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시간이다. ‘광주에서 봉하마을로’ 이어지며 지지율 상승까지는 아니더라도 민주당이 최소한 여론과 관심의 초점이 되는 기간이다. 그럼에도 민주당 지지율은 지난 한 달 동안 하락세였고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윤 정부출범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지지율이 하락한다. 추락하는 민주당 지지율은 연속된 구조적 위기의 당연한 결과다. 이재명 사법 리스크의 리더십 위기가 계속되고 있는데 여기에 ‘송영길의 전통과 구태의 관행’ 돈 봉투 파문에 이어 ‘김남국의 신기술 코인’파동이 이어진다. 엎친데 덮친 격이다. 여당에 비해 잘하는 것은 고사하고 잘못하지만 않아도 지지를 잃지는 않는데 스스로 자초한 위기다. 특히 김남국 파문은 ‘윤미향-양정숙-김홍걸-오거돈-박원순-노영민-김상조’로 이어진 위선 시리즈의 끝판왕일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모습이다. 김남국 사태는 지금 시작으로 그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당 위선 시리즈’의 가장 앞에는 조국이 있다. 국민의힘 지지율이 상승세의 약보합인 것은 그들이 무엇을 잘한 결과는 아니다. 굳이 해석한다면 최근 대통령의 외교성과에 기댄 부산물의 지지율 상승세다. ‘김재원과 태영호 징계’이후 국민의힘은 여론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야당은 실수하지 않으면 되지만 여당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잘해야 한다. 그래야 골든 크로스가 가능하다. 지금 여당은 무능의 다른 말이다. 국민의힘은 지금 내년 총선을 향한 조용한 준비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다. 벌써부터 영남 일부지역에서는 몇몇 다선의 물갈이와 이들을 대체하게 될 “검사출신 공천”설이 횡행 한단다. 어느 정도의 과장과 오해도 있겠지만 국민의힘은 ‘윤석열의 이름으로 윤석열의 중간심판 선거’를 지향한다. 지금부터 내년 총선까지 양당은 ‘새로움의 도전 앞’에 선다. 누가 먼저‘New 민주당’ 또는 ‘새로운 국민의힘’으로 국민에게 다가가느냐의 시험대다. 양당 모두 누가 더 과거로 되돌아가느냐의 경쟁에서 벗어나야 할 시기다. 이제 더 이상 서로가 서로의 등불과 희망이 되는 ‘반사이익의 정치’는 국민들이 용남하지 않는다. 누가 위선과 무능의 정치에서 벗어나 쇄신과 미래의 유능한 정치를 보여주느냐가 문제다! 국민의 힘? 민주당? 아니면 제3당? /박명호(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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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25 16:55

가짜뉴스 대처법,  필찰(必察)

진실과 거짓이 구별되지 않는 시대다. 인터넷에는 근거 없는 거짓정보가 진실인양 포장되어 자리 잡고 있고, SNS에는 그럴듯한 거짓이 설득력 있게 넘쳐흐르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신 차리고 보지 않으면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모호(模糊)의 시대다. 올해 7월에는 3일 빼놓고 비가 내린다는 근거 없는 외국 기상예보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혼란에 빠트리기도 한다. 누가 무슨 외제 고급차를 타고 다닌다며 거짓 비방하여 법원의 처벌을 받기도 하고, 미국 발 금융위기가 곧 한국으로 불어 닥쳐 상상할 수 없는 금융위기가 올 것이란 어설픈 예측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뉴스를 타고 다닌다. 자극적이어야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선정적이어야 사람들의 마음을 잡는다. 바야흐로 가짜뉴스가 진실을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입과 혀는(口舌者, 구설자), 근심을 불러일으키는 재앙의 문이오(禍患之門, 화환지문), 내 몸을 찍어내는 도끼다(滅身之斧, 멸신지부).’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함부로 말을 하면, 그 말이 도끼가 되어 나를 찍기도 하고, 내 인생에 큰 근심이 될 수도 있으니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된다는 <명심보감>의 오래된 당부다. 말 한마디라도 신중하게 할 것이며, 확실한 근거가 없는 말은 더더욱 조심하여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 된다. 거짓은 아무런 여과 없이 확대 재생산되어 물결처럼 퍼져나간다. 내가 만든 거짓이 아니라도 퍼 나르는 것만 해도 벌을 받아야 한다. 거짓을 진실인양 둔갑시키고, 떠들고, 나르고, 믿는 사람 모두 그 죄를 감당할 준비를 해야 한다. 길에서 어깨 너머로 들은 이야기를 길에서 함부로 말하고 다니는 사람을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논어>에서 말한다.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것을 그저 길거리에서 듣고 길거리에서 함부로 말해버리는 것(道聽塗說, 도청도설)이야말로 자신의 인격을 포기하는 일(德之棄, 덕지기)이다.’ 길거리 통신사를 함부로 세워 마음대로 사건을 부풀리기도 하고, 왜곡시켜 진실이 실종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공자의 경고다. 공자는 ‘도청도설(道聽塗說)’의 폐해에 대해 언급하면서 가짜뉴스에 속지 말고 주체적으로 모든 것을 살펴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이야기해도(衆人好之, 중인호지), 반드시 직접 살펴서 판단하고(必察焉, 필찰언), 모든 사람이 그르다고 해도(衆人惡之, 중인오지), 반드시 직접 살펴서 확인한 후 결정해야 한다(必察焉, 필찰언).’ 모든 사람이 옳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그르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그른 것이 아니다. 진실은 부풀어지기도 하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공자가 살던 시대에도 가짜뉴스가 있어 멀쩡한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악인을 착한 사람으로 둔갑시키기도 했던 것 같다. 오로지 믿을 것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왜곡된 대중의 의견에 휩쓸려 본질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요즘 시대를 탈진실의 시대라고 한다. 진실은 존재하지 않고, 의도된 거짓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정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분간하기조차 힘든 혼란한 시대다. 거짓을 퍼뜨려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근거 없는 이야기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표를 얻으려는 사람들,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근거 없는 사실을 떠벌리는 사람들, 할 일 없이 남의 일에 끼어들어 생사람 잡는 사람들, 자신의 인격을 포기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안기는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다. 반드시 직접 살펴 판단하라(必察)! 이것만이 가짜 뉴스와 결별하고 진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다. /박재희(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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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18 16:41

썩는 것은 축복이다!

태양은 공중에 떠 있고 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를 낭창낭창 흔든다. 벌써 짙어진 녹색 나뭇잎들은 기름 바른 듯 반짝이는데, 나도 모르게 불쑥, '볕 좋고 바람 좋고, 참 좋은 계절이다' 하며 감탄을 한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죽고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인생의 길흉화복을 두루 겪고 인생을 알 만큼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나는 이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다. 아무리 궁리해도 이 물음은 불가해하기 짝이 없다. 인류는 오랫동안 불사에의 소망을 품고 살아왔다. 하지만 회춘이나 죽지 않는 소망은 가망없는 짓이다. 인간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죽음을 맞는다. 아버지는 십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땅속에 매장된 시신은 부패하고 원소로 해체되어 사라졌을 테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살아서 무병장수를 꿈꾸었을지도 모를 그들은 결국 흙에서 묻힌 채로 썩어 분해되었을 테다. 생명 활동을 마치고 사라진 존재들, 시신이 썩어서 존재 이전으로 돌아간 존재들은 덧없고 애잔하다. 어렸을 때부터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한 가지 의문은 '신은 왜 결국 무로 돌아갈 존재를 창조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토록 생생한 본성과 감각, 지성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가? 적정 온도에서 방치해 둔 음식물은 부패한다. 음식물은 흐물흐물 문드러지고 악취를 뿜어내며 썩는다. 실온 보관한 떡이 쉬어 곰팡이가 슬었을 때 어린 나는 얼마나 억울하고 슬펐던지. 주방의 부패한 음식들은 식중독 원인이 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서둘러 이것을 쓰레기로 분리하고 처리한다. 음식물만이 부패하는 건 아니다. 쓸모를 다 한 것들, 즉 고양이나 쥐 같은 동물 사체, 낙엽, 배설물, 옷, 가죽 제품, 종이 등이 다 썩는다. 쇠조차도 녹이 슬고 썩어 부스러진다. 썩는 것은 동식물과 쓸모를 다한 것들이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운명이다. 부패는 죽은 것들이 분해되는 전 과정을 아우른다. 이것은 형질 변용이고 소멸이며 다른 한편으로 생성이기도 하다. 부패와 생성은 하나로 포개지는데, 이는 지구 생명이 순환하고 번성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생태학에서 구더기, 미생물, 세균류들은 죽은 것들의 자연의 분해자다. 이것들은 썩은 것은 먹어치우며 유기물이나 무기물로 쪼개서 식물들의 영양분으로 만든다. 미생물이나 곤충 같은 땅의 분해자들은 죽은 것들을 재사용할 수 있게 얼마나 부지런히 가공해내는지. 잘 썩는 것들이야말로 지구 생명을 이롭게 한다. 플라스틱 같이 썩지 않는 것은 미세한 조각으로 쪼개질 뿐 썩지 않는다. 썩지 않는 쓰레기의 처리는 인류 최대의 고민거리다. 이를테면 미세 플라스틱은 땅과 해양을 오염시킨다. 이것들은 먹거리와 함께 우리 몸에 들어와 위해를 가하는 원인 물질이다. 썩는 것들로 지구 생명은 번성한다. 이를테면 퇴비 재료는 썩은 식물들로 땅으로 돌아가서 토양을 살리는 영양분으로 탈바꿈한다. 반대로 썩지 않는 것들은 지구의 영구적 골칫거리이고 재앙으로 남을 뿐이다. 우리의 세계가 분해 세계와 분해에 저항하는 세계로 나뉘어져 있다. 살아 있는 것들에게 부패와 분해는 궁극의 운명이다. 죽은 것들을 부패와 분해로 되돌리는 능력을 기반으로 자연계는 순환을 이어간다. 부패라는 과정이 없다면 뭇 생명은 대를 이어 살아갈 수가 없다. 일부러 찾아서 읽은 생명 과학자인 후지하라 다쓰시는 '분해의 철학'에서 "부패 기능이 약화되면 먹이 사슬의 기반이 약화되고 이 기반이 약화됨으로써 사슬의 연결이 이완된다. 그리하여 흙이나 바다로부터 주방을 경유하여 인간의 입에 다다르는 음식이 저급화되거나 그 양이 감소되어 기아를 낳는다"라는 구절에 무릎을 친다. 부패가 자연의 섭리라면, 부패에 저항하는 것은 생명 본연의 몫이다. 부패의 기능 속에서 생명 순환의 원리가 작동한다. 모든 생명체는 부패와 분해에 저항하는 세계 속에서 그것을 유지하고 보호하며 생육하고 번성하다가 제 생명 정보를 고스란히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부패한 뒤 무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자연의 섭리다. 그러니 죽고 사는 것은 이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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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11 15:22

양심불량한 비서

챗gpt라는 것이 처음으로 나타나 세계를 강타했을 때 나는 마침 새 소설을 쓰고 있던 중이었다. 챗gpt가 훌륭한 시나 소설, 에세이를 쉽게 써낸다는 경험담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내심 심란했던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인공지능에 의해 제일 먼저 사라질 직역이 예술이라니, 이럴줄이야! 지금이라도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 하는 것인가? AI의 학습기능이란 것이 워낙 놀랍다보니 1년 뒤도 장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초기 기술이니까 아직은 내가 낫겠지 생각하고 일단 하던 일을 계속 하기로 했다. AI를 경쟁자가 아닌 비서로 여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작은 내 몫으로 하고, 소설에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한 자료 조사 작업을 AI에게 맡기면 괜찮은 협업이 될 것 같았다. AI에게 몇 가지 질문들을 던져보았다. 럭셔리 요트에 대해 알려줘. 고급 요트 브랜드는 뭐가 있지? 그 내부 인테리어는 어떻게 생겼어? 듣기좋게 묘사해 봐. 묻자마자 AI 비서는 거침없는 답변을 술술 쏟아냈지만 럭셔리 요트 브랜드에 대한 긴 보고서의 약 80%는 동어반복이었다. 'Azimut Yachts - 이탈리아에서 만든 럭셔리 요트 브랜드로, 1969년에 창립되었습니다. 다양한 크기와 스타일의 요트를 제공하며, 최신 기술과 디자인을 적용합니다'라는 대답에서 브랜드와 연도만 바뀐 것이 열 개쯤 생성되었다. 인테리어에 대해서도, 수준 높은 구매자의 취향에 부합하는 수준높은 공예와 기술력, 이태리 대리석과 고급 목재 등 고급 자재를 사용했고 침실, 주방, 영화관, 수영장, 휴식공간 등을 갖추었으며 안전에도 신경썼다는 식이었는데,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 그런 대답을 듣고있자니 성실한 조사따위는 전혀 하지 않고 이것저것 갖다붙여 아는척만 하는 양아치 비서의 '썰풀기'를 듣는 것 같은 격렬한 열받음을 느꼈다. 내 친구는 AI에게 의학 전문 지식을 물었는데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놀랍도록 화려한 새로운 학설과 논문 리스트를 얻어 들고 횡재한 기분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AI가 제공한 논문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그는 의문과 혼란에 빠졌다. AI가 소개한 논문을 실제 저널에서 찾을 수 없었고 저자 이름도 모두 낯설었다. "나는 이런 논문을 찾을 수 없는데? A라는 사람이 이런 학설을 주장한 게 확실해?" AI는 자기 대답이 확실하다, 보충하는 자료도 있다고 몇 번이나 장담하다가 갑자기 논문에 의거한 전문지식을 논하는 것은 자신에게 허락된 경계를 벗어나는 일이라서 더 이상 대답할 수 없다고 태세를 전환하더니 서둘러 대화를 종결해버렸다. 친구는 AI가 불러주었던 화려한 논문 리스트가 모두 거짓이었음을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AI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저널에 가상의 학자가 기고한 가상의 논문 제목을 줄줄 불러주었던 것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AI의 속성을 눈치채고 있다. 챗gpt에서 g는 generative,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그는 그의 방식으로 '생각해서' 답변을 '만들어낸다'. 이미 정해진 답을 반복하는 이전 AI보다 진보된 모델임이 분명하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대답에 대한 양심이나 성찰이 없는 존재다. 그의 이런 양심불량한 측면을 지적하고 조롱하는 수많은 검토가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그에게 "세종대왕이 안중근 의사를 암살한 이유는?"이라고 묻는다면, 그는 거침없는 대답을 생성할 것이다. 세종대왕이 안중근의 총명함과 용맹함을 믿고 그를 중용하였으나 차츰 그가 대북문제에 (대북문제라면 여진족? 북한?) 강경노선을 주장하여 왕명을 거역하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결국 자객을 보내어 그를 암살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이다. 이 대답을 받아들고 나는 이 자가 광대무변한 지식을 갖추었다는 것이 과연 사실인가, 지식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런 식이라면 그 지식의 가치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합당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한편으로, 인간이 인공지능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능은 무엇인가 하는 무거운 질문에 뜻밖에 쉬운 대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양심과 성찰이라는 거창한 단어까지 가지 않더라도, 자신이 하는 말을 돌아보고,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현재 인류가 가진 최첨단 AI보다 나은 존재라고, 산뜻하게 말할 수 있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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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03 16:26

새로운 정치세력의 성공조건

분위기는 절정을 향해 가는 중 이다.무당파의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4월에 실시된 12개 여론조사를 보면 무당파의 비중은 면접조사(4개) 기준으로 최대 31% 최소 29%다.지난주 5개 조사의 무당층은 최저 20% 최대 31%로 양당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작년 12월부터 지난주까지 내년총선의 성격을 묻는 조사는 모두 21개였는데 여당 심판론이 19승 1무 1패로 압도적이다.4월로 범위를 좁혀보면 정권 심판론이 50%를 넘긴 게 7번 중 5번이다.하지만 중도무당층은 정권 심판론에 힘을 실으면서도 민주당 지지로 바로 이동하진 않는다.‘돈봉투’파동 때문이다. 최근에는 국민의힘 지지층의 대통령 지지철회가 늘어나는 양상도 보인다.지난 주 갤럽조사에서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의힘 지지층은 68%인데 그 전주는 74%였다.반면 국힘 지지층의 대통령 반대는 19%에서 25%로 늘었다. 한마디로 중도무당층의 실망이다.그들은 한쪽의 ‘친윤’득세와 다른 한쪽이 ‘개딸’ 강성 지지층에 휘둘리는 모습을 외면한다.이상민 의원은 “지금이 제일 좋은 때다.양대정당이 이렇게 국민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는 때”라 하고 김종인 위원장은 “국민들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본다. 이유는 분명하다.“보수 10년 진보10년을 얘기하는데 그 20년 동안 문제 해결된 게 하나도 없다.젊은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한다.”며 “이런 정당에서 과연 새로운 미래를 향한 방안이 나올 수 있겠나? 현재 상태로 봐서 불가능하다.”는 게 김종인의 판단이다. 그래서 그는 “국민들 스스로 20년 동안 속아왔다고 생각하고 정치에 대한 불신이 극도에 달했기 때문에 (국민들은) 새로운 구상을 가지고 있다.”고 기대한다.이른바 ‘제3지대론 또는 제3정당론’으로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틀을 만들 수 있는 세력”이라며 금태섭 전 의원이 가장 먼저 물꼬를 텄다. 그렇다면 내년 총선에서 ‘국민들의 새로운 구상’을 받아낼 수 있는 제3당의 성공조건은 무엇일까? 첫째,인물중심의 정당에서 벗어나야 한다.멀게는 1995년 JP의 자유민주연합,가깝게는 2016년 안철수의 국민의당 사례에서 보듯 대선주자급 인물의 존재는 우리나라 제3당 출발의 필요조건이지만 동시에 실패의 시작이기도 했다.이제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 중심의 업그레이드된 제3당이어야 한다.그래야 지속 가능성이 확보될 수 있다. 둘째,문제제기의 정치를 넘어 ‘의제별 문제해결능력의 정치 세력화’여야 한다.기존정당에 대한 반발심리와 정치적 불만은 제3당의 출발동력에 불과하다.이때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개선하는 데 도움 되는 현실적 정책대안의 제시능력이 필요하다. 최근 대학가에서는 ‘1000원의 아침밥’이 화제였다.학생이 1000원을 내고 농림부가 1000원을 보태고 나머지는 대학이 부담하는 사업이다.여야는 경쟁적으로 ‘1000원의 아침밥’을 확대하자는 입장이다.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정부의 지원 단가를 높여 학교부담을 줄여서 참여 학교가 더 확대되었으면 좋겠다.”면서 “점심 저녁도 제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한 술 더 뜬다.그는지원금과 지원대상을 늘려야 한다면서 “전국학교에 주자.”고 한다. 하지만 반응은 싸늘하다.사람들은 “내년 총선 앞두고 결국 혈세로 생색내는 것.”이라고 한다.청년들은 “아침밥 한 끼 먹고 힘낼 수야 있겠지만 영원히 나오는 밥은 아니다.같이 밥 먹고 치킨 먹는다고 젊은이들이 표를 던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청년들 마음 얻기가 더 힘들어 질 것 같다.”고 한다. 결국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먹거리를 마련해내는 능력’이 요필요하다.일자리 창출의 문제해결능력이다.민생경제만이 아니다.‘연금개혁 노동개혁 그리고 교육개혁의 3대 개혁’은 물론 공동체의 미래를 향한 정치개혁도 마찬가지다.선거제도 개편은 견제와 균형 그리고 분권의 시대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개혁의 출발점이다. 누가 누구와 함께 ‘국민들의 새로운 구상’의 실현을 위한 고통스럽지만 담대한 첫발을 시작할까? /박명호(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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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7 17:26

괴력난신(怪力亂神) vs 상덕치인(常德治人)

“튀어야 시청률이 올라갑니다.” 방송국 PD가 인문고전 강의를 하던 필자에게 자주 하던 말이다. 처음 들어본, 상식으로 설명이 안 되는, 괴상하고 기이한 강의라야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시청률을 높일 수 있다는 마케팅 논리다. 삭발을 하든, 기발한 복장을 하든, 기괴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든, 신비적이고 충동적인 논리로 말하든, 이 어느 한 가지라도 있어야 시청률이 올라갈 수 있다는 나름 대중을 분석하고 있다는 그 분야 전문가의 조언이다. 한마디로 평범하고 정상적인 언변으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없으니 이상하고 특별함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충고였다. 그러고 보니 세상이 온통 괴상하고 이상하고 특별한 것으로 가득하다. 먹는 즉시 효력이 발생하는 건강식품,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상품, 신비하고 오묘한 효능은 그런대로 들어줄만 하다. ‘마귀와 사탄이 들려서 그렇다(怪).’ ‘내 능력은 사람의 생사와 국가의 운명을 주관한다(力).’ ‘혼란의 세상이 다가왔다(亂).’ ‘하늘에서 벌을 내릴 것이다(神).’ 이 정도 되면 괴력난신(怪力亂神) 마케팅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고, 권력을 만들고, 왕국을 만드는 선동가이며 사기꾼이다. 예수님, 부처님 입장에서 보면 신을 모욕하고 능멸한 자로서 벌 받아야 할 대상이며 신성(神性)을 가장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목회자이다. 공자는 괴력난신을 경계하고 멀리하였다. 공자가 살던 춘추전국시대도 튀어야 팔리던 시대였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정상적이고 평범한 논리는 수요자인 귀족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없었다. 당시 왕들과 귀족들은 신들의 이야기와 비약의 논리를 선호하였다. 당대의 백가(百家)들은 온갖 특별하고 신비한 이야기로 유세하여 자신의 이익을 채우려 하였다. 공자 역시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정치에 참여하여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고 싶었지만, 괴력난신으로 접근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세상을 속여서(欺世, 기세) 이름을 도둑질하지 않겠다(盜名, 도명).” 비록 14년 동안 유랑의 길을 걸으며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遯世, 둔세)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았던 공자의 선택이 오늘날까지 공자를 있게 한 이유다. 괴력난신으로 이름을 날리고, 왕국을 세우고, 권력을 얻었던 승려, 마술사, 목회자, 차력사, 신비주의자들은 봄날에 녹는 잔설(殘雪)처럼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괴력난신에 대항하는 말이 상덕치인(常德治人)이다. 상식(常)은 재미없고, 인격(德)은 평범하고, 질서(治)는 따분하고, 인간(人)은 흔하다. 그래서 괴상(怪)하고, 능력(力)있고, 혼란(亂)하고, 신비(神)한 것에 항상 밀린다. 그러나 결과는 시간이 지나면 역전된다. 가장 상식적인 것이 가장 정의로운 것이다. 물은 맛이 없는 무미(無味)의 맛이나 영원히 질리지 않는다. 달콤하고 새콤한 것은 아무리 혀를 유혹하고 마음을 사로잡아도 그때뿐이다. 어머니는 평범했지만 가장 뼛속 깊이 새겨진 인생의 추억이었고, 공기는 흔했지만 생명의 근원이 되어 나를 숨 쉬게 한다. 우리가 당연하고 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드러나지 않는 위대함이고 특별함이다. 하늘에는 솔개가 날고, 연못에는 물고기가 뛰고, 들에는 말이 달리는 것이 상식이다. 그 상식이 자연이고, 자연은 영원하다.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영원한 것이다. 신을 빌려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고, 혼란을 이용해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목회자들이 사회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마음이 허전하고 갈길 몰라 하는 사람들은 황당하고 신비적인 이야기에 기대어 자신의 빈 마음을 채우고 있다. 비약은 마약처럼 정도(正道)를 마취시켜 사회를 비정상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이 상덕치인(常德治人)을 위협하고 있는 시대가 안타깝다.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미래가 아닌 지금에 집중하며,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위대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긴다.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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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0 16:50

봄날이 가도 삶은 계속되어야 해

지뢰가 폭발하듯이 꽃은 만발하고, 대포가 터진 자리에는 꽃 사태였다. 봄은 다투어 피어나는 꽃들의 전쟁이다. 평지와 둔덕마다 흐드러진 개나리 산수유 진달래 목련 벚꽃들이 시샘하듯 불어 닥친 비바람에 덧없이 졌다. 길가 벚나무 아래에는 하얀 꽃잎들로 낭자하다. 봄은 서둘러 왔다가 철수할 기색이다. 사월의 태양 아래 꽃들은 지고 나뒹구는 꽃잎들은 철수하는 봄이 남긴 사체들이다. 봄꽃 진 뒤 느티나무 묵은 가지마다 연두색 새잎들이 돋고, 가랑잎 두텁게 쌓인 표토를 밀어 올리며 원추리 싹이 떼 지어 올라온다. 도처에서 피어나고, 돋고, 꿈틀거리고, 뻗치는 것은 봄에 대한 살아 있는 것들의 벅찬 생명 반응들이다. 봄꽃 둘레에 노오란 햇빛이 꿀벌처럼 잉잉거릴 때 우리는 벅찬 희망을 품고 낙관적인 기분에 빠졌었다. 심장은 보람으로 펄떡이고, 혈관의 피들은 온몸을 돌며 환호성을 지른다. 고양이 요람 같은 봄날에 우리의 쾌감지수는 상승하고, 우리는 가장 희망적인 호모 사피엔스로 재발명되는 것이다. 봄날 대기에는 꽃들이 어지럽게 내뿜는 방향만이 아니라 약간의 허무, 약간의 슬픔, 약간의 외로움도 함께 녹아 있다. 봄날의 바람과 태양이 우리 젊음을 약탈해가듯이 세월이 돈과 아름다움과 사랑을 열망하던 우리의 푸르고 아름다운 젊은 날을 앗아간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의 첫 키스는 뇌리에 강렬함으로 각인되지만 어느 입술이 열일곱 번째로 내 입술에 가 닿았던 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토록 얕은 기억의 용량이라니! 우리 오감을 문지르던 꽃이 다 지면, 보람과 기쁨을 앗아간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아름다운 것들의 유효기간은 비정상적으로 짧구나! 종달새 우짖는 이 허전한 봄날을 어떻게 맨 정신으로 견딜 수 있나? 오래 전에 헤어진 당신은 잘 지내는가? 이제는 유난히 찰랑이던 당신의 검은 머릿결만 기억날 뿐 나머지 이목구비는 희미해졌다. 당신에게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들을 꿈속의 우체통에 집어넣는 꿈에서 깨어난 아침에는 가슴이 텅 빈 듯 허전하다. 나는 아침을 먹고 나가 공연히 근린공원을 한 바퀴 돌고, 볼 일도 없는데 동사무소에도 들렀다가 돌아온다. 오늘은 동네 도서관에서 철학책을 빌어 반나절 넘게 읽고, 저녁 무렵엔 강가를 따라 바람을 맞으며 걷었다. 봄날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지나간다. 희망과 기쁨과 보람으로 가득 하던 우리의 전성기도 지나간다. 우리는 팔짱을 낀 채로 속수무책으로 지나가는 것을 바라볼 뿐이다. 바다의 악령인 하얀 고래를 좇던 에이허브 선장처럼 용맹했던 우리의 모습을 이제 누가 기억할까! 아무도 우리가 삶에서 거둔 공훈을 기억하지 못하리라. 봄날 저녁의 어스름에 찾아드는 허무와 고통은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 보람이던 봄꽃의 수명은 짧고 우리가 견뎌야 할 고통은 길다. 빈센트 밀레이는 노래한다. "내 밥그릇은 고통으로 가득 차 넘친다. 내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이다"라고. 봄날의 달콤한 고통과 허무를 견디며 우리는 속절없이 하루하루 늙어간다. 한 살이라도 더 나이를 먹을수록 좋은 한 가지는 인생 마일리지가 쌓인다는 점이다. 인생 마일리지는 삶의 지혜를 체득할 수 있는 경험의 두터움이고, 그것에서 양조된 인격의 원숙함이다, 우리는 치열하게 고투하며 보낸 젊은 시절을 지불하고 그것을 손에 넣는다. 인생 마일리지란 자기 인생에 최선을 다한 자에게 주어지는 삶의 원숙함이란 이름의 훈장이다. 당신의 인생 마일리지는 얼마나 되는가? 봄의 무대에서 꽃들은 퇴장했다. 그렇다고 낙담하고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한 계절이 끝나면 새로운 계절이 달려온다. 우리에겐 살아갈 날들이 무궁무진하다. 봄을 여윈 슬픔을 딛고 우리의 갈망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자. 먼 데서 당신이 새로운 아침을 맞을 때, 우리에겐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늠름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지금 당장 할 일은 봄이 떠나면서 흐트러뜨리고 어지럽힌 자리를 말끔하게 치우는 것이다. 봄날이 끝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우리는 저마다 제 인생의 이야기를 마저 써야 한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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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13 17:37

촉촉했던 산들의 기억

내가 태어나 성장한 마을은 인왕산 아래 옥인동 47번지다. 결혼 이후 옥인동을 떠나 10여년간 살다가 2008년 연어처럼 회귀에 성공했고 그 뒤로 계속 경복궁 서쪽 마을에 살고 있다. 2010년 인왕산 계곡 자락에 얹힌 옥인아파트를 철거하고 수성동계곡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는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물소리가 울린다는 뜻을 가진 그 계곡의 이름에 의구심을 가졌다.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이라면 내가 살던 그 언덕이 아닌가? 옥인아파트 쪽이라면 위치가 다른데? 가까운 곳이지만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은 인왕산의 동남쪽 사면이었고 수성동계곡은 정남향 사면이라서 줄기가 좀 달랐다. 그런 작은 차이에도 예민해지는게 내 마음이었다. 우리 동네의 이름을 남에게 빼앗긴 것처럼 억울했지만 겸제 정선 선생님이 장동팔경첩에서 그 계곡의 모습을 아름다운 필치로 남기고 그 이름을 ‘수성동(水聲洞)’이라고 정확하게 기록해놓으셨으니 따질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내 마음 속의 수성동은 우리 동네였다. 우리 마을은 정말이지 사철 물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환각이나 환청이 아닌게, 정말로 인왕산 계곡 위에 한겹 얇은 시멘트를 덮고 게딱지만한 작은 집들을 세운 구조였다. 어릴 때 살았던 우리 집 화장실은 그 아슬아슬한 주거 형태의 가장 좋은 예가 되어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반듯하게 하얀 도자기로 된 신식 변기가 달려 있었지만 오로지 그 말단 부분만 문명의 흉내를 냈을 뿐 그 아래로는 거침없는 인왕산 계곡이 펼쳐져 있었다. 힘차게 치솟은 바위와 천둥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계곡물 위에 살포시 변기를 얹은 천연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친구들과 친척들은 우리 집에 놀러오면 무서워서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들은 아무런 감흥 없이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을 보며 날마다 용변을 해결했다. 세월이 흐르며 물소리가 점점 작아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렁차게 힘차던 콸콸 소리가 졸졸 소리로 줄어들어 있었다. 수성동계곡 쪽도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겸재 정선 선생의 그림 속 아름다운 바위들은 여전한데 그 아래 흐르던 물길은 명맥을 유지하기 위태로울만큼 줄어들었다. 느낌의 변덕이 아닌 것이, 예전에 옥인아파트가 있을 때 그 맨 꼭대기에는 계곡물을 받은 수영장이 있었다. 여름에도 뼈가 시린 그 물 속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첨벙거리며 놀았다. 이제는 아이들도 물도 없어, 그곳에 수영장이 있었다는걸 믿을 수 없다. 여름 장마철이 되어도 수영장을 만들만한 계곡물을 모으기는 터무니없다. 수성동계곡에서 시작된 물길의 흔적을 따라 걸으면 청계천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인왕산에서 발원한 그 물길이 청계천으로 이어지고 답십리로 흘러 한강으로 가는 거였다. 이제 인왕산에서 오는 물은 터무니없이 수량이 적기 때문에 청계천의 물은 모두 인공급수에 의존한다. 그 많던 물들은 어디로 갔을까? 기상청의 통계자료를 참조하면, 1970년대에서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강수량은 큰 변화가 없다. 서울 외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대한민국에 한정해볼 때 하늘은 인간들에게 늘 비슷한 양의 물을 공급했다. 차이는 사용량에 있었다. 인구가 늘었고, 1인당 물 사용량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어릴 때 나는 주 1회 대중목욕탕에 갔지만 지금은 따뜻한 우리집 욕실에서 매일이다시피 씻는다.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어마어마하게 지하수를 퍼낸 토지는 말라서 파삭해졌다. 기후 변화라 하니 하늘을 원망해야 할 것 같지만 실은 사람이 문제다. 벚꽃이 한창이던 주말, 갑자기 인왕산 산불 소식이 전해졌다. 바삭하도록 오래도록 가물었던 산자락은 거침없이 타들어갔다. 마을 친구들은 메신저로 화재 이곳저곳의 장면들을 전해주었는데, 그 중에는 놀랍도록 정밀하게 화재 하한선에 소화액을 뿌리는 소방 헬기의 진화 장면도 있었다. 전국에서 산불과 싸우신 소방관님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반년 넘게 이어진 남녘의 가뭄에 다같이 근심하는 봄이었다. 전국에서 꼬리를 물던 산불 소식을 잠재우는 고운 봄비를 반갑게 맞이하며, 목마른 산들이 다시 촉촉해질 그날을 기다려본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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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06 16:07

2024년 총선, 1년이다

내년 이맘 때 쯤은 총선의 공식 선거운동기간이다.2024년 3월 28일부터 선거운동이 시작되는데 4월 5일은 사전투표 날이고 10일은 본 투표 날이다.2024년 4월 10일 22대 총선은 어느 정당이 승리할까? 총선을 1년 여 앞둔 현재시점에서 정당 지지율과 ‘정권 지원론 vs. 정권 심판론’의 여론흐름을 보자. 우선 정당 지지율.윤석열 대통령 취임이후 지난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는 모두 373개.주별평균 8.3개로 매일 1개 이상의 여론조사가 있었던 셈이다.이중 ARS 조사가 256개 면접조사가 107개였다. 지난 45주 동안 정당 지지율 흐름을 보면 첫째,국민의힘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때는 작년 지방선거 전후였다.당시 국힘 지지율은 주별평균 50%까지 육박했다.둘째,지방선거 이후 국힘 지지율은 하락하여 주별평균 40%이하로 떨어지고,민주당 지지율은 주별평균 40%를 돌파하며 양당 지지율은 역전된다.이 때가 7월 중하순인데 주별평균 40% 전후의 민주당과 30% 중후반대의 국힘 지지율 패턴은 12월 초중순까지 이어진다. 셋째,12월부터 2월초까지 민주당 약간 우위의 양당 지지율은 주별평균 30% 후반대에 머물면서 엎치락뒤치락 한다.넷째,전당대회를 전후해서 국힘 지지율은 민주당에 잠시 앞서는 모습을 보이지만 최근 한일정상회담과 69시간 논란의 여파로 민주당에 다시 역전 당한다. 다섯째,최근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 하락은 전통적 지지층의 이탈과 함께라서 주목된다.보수층과 영남 그리고 고연령층의 이탈이다.작년부터 시작되어서 전당대회를 통해 마무리된 젊은층의 이탈과 함께 복합위기의 국민의힘 지지율이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은 다시 하한선에 다가설 가능성을 보여준다.첫번째 하한선은 35% 전후인데 35%는 “바이든 vs. 날리면 논란” 때 ‘날리면으로 들은 사람들’이다.마지막 저지선은 25% 전후인데 이는 2017 대선 때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얻은 득표율이다. 다음으로 여야 심판론의 여론흐름.작년 11월부터 올 2월까지 여야 심판론의 여론조사는 모두 5개인데 모두 정권 심판론이 우세했다.그 중 3번은 여당 심판론이 50%에 육박했고 가장 낮은 게 47%였다.야당 심판론은 44%가 가장 높았고 36%가 가장 낮았다. 총선 1년 전에 좀 더 다가서는 올해 3월의 여야 심판론 여론조사도 5개인데 4:1로 민주당 우세다.국민의힘이 42% vs. 39%로 근소하게 앞섰던 것은 전당대회 직후 한 번뿐이다.정권 심판론은 낮게는 39% 높게는 55%였고 국힘 전당대회 전후를 제외하면 44%에서 시작하여 55%까지 계속해서 상승하는 추세다.최근의 민주당-국민의힘 지지율 역전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과거의 경험을 보면 실제 총선결과는 총선 전 여야 심판론의 흐름에 먼저 나타난다.예를 들면 2016년 총선을 7개월 여 앞둔 2015년 9월 조사를 보면 정부 견제론(42%)이 정부 지원론(36%)에 앞선다.총선을 2개월 여 앞둔 2016년 1월 말 조사에서는 정권 심판론이 50%를 넘기며 민주당의 +1 신승(123석)을 예고한다. 2020년 총선 1년 전인 2019년 4월 조사에서도 정부 지원론(47%)이 정부 견제론에 10% 포인트 앞선다.2020년 신년조사에서는 국민 절반 이상이 ‘국정발목을 잡는 야당을 심판해야 한다.’고 하고 여당 심판론은 30% 중반에 머문다.2020년 총선의 민주당 역대급 압승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2024년 총선승부의 핵심은 수도권이다.2020년 총선기준 253개 지역구는 122개의 수도권과 131개의 비수도권으로 나뉘는데 131개의 비수도권 중 64곳이 영남이다.따라서 253개 국회의원선거 지역구는 수도권(122)과 영남(64) 그리고 비영남(67)이다.양당 모두 수도권과 중도층 그리고 2040세대가 총선승부의 분수령이라는 말이다.내년 총선,이제 1년이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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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30 17:46

청안(靑眼)과 백안(白眼)

눈은 인간의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눈을 통해 신체 건강을 알 수도 있고, 마음의 상태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눈은 거짓말을 못한다.’는 말은 눈을 통해 상대의 마음 상태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는 의미다. 심지어 동공을 둘러싸고 있는 홍채인식을 보안에 적용하는 기술이 있는가하면, 홍채를 통해 전생을 읽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는 상대방의 눈을 통해 상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나를 호의적으로 보고 있는지 등을 파악하기도 한다.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눈빛에는 꿀물이 뚝뚝 떨어진다고 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보는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하다고도 한다. 애써 눈을 피하는 사람은 숨기는 것이 있는 것이고, 이야기를 하면서 눈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면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탐내는 물건을 보면 눈에서 독(毒)이 나와 눈독을 들이기도 하고, 상대방이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며 눈에 붙은 살이 움직여 눈살이 찌푸려지거나, 더하면 눈에서 총이 발사되어 눈총을 주기도 한다. 눈은 독이 되기도 하고 총이 되기도 하여 내 감정이 상대방에게 가장 먼저 전달되는 인간의 기관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인 완적(阮籍)은 눈빛으로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완적은 속세를 피해 산림으로 들어가 권력과 단절된 삶을 선택한 지식인이었기에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일단 속물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흰 눈동자로 상대방을 보았다. 일명 백안시(白眼視)의 시선법이다. 마주보고 이야기는 하고 있으나 동공은 다른 곳에 있고, 흰(白) 눈자위(眼)로 상대방을 보는 시선법이다. 백안시는 앞에 있는 사람을 유령취급하고 완전 무시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모멸감을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무시(無視)당하는 것이다. 시선(視)을 주지 않기(無)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사람들은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명품으로 치장하기도 하고, 비싼 차를 타며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상대방의 시선이 나를 보아주기를 바라고,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인간의 인정 욕구이다. 반면 상대방을 존경하거나 인정할 때는 파란 눈으로 상대방을 보았다고 한다. 일명 청안시(靑眼視)의 시선법이다. 파랗게(靑) 빛나는 눈동자(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호의를 표시하는 눈빛으로 가장 친근하게 대하는 태도이다. 백안시라는 말은 참으로 다양하게 사용한다. 곧은 사람이 의롭지 못한 이익과 자리를 보면 백안시하여 눈길 주지 않을 때는 좋은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여 상대방이 누구든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깔보고 무시하여 백안시하는 것은 나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눈빛을 곱게 하고 상대방을 바라봐 주는 것만 해도 참으로 큰 보시다. 흰 눈동자를 뒤집으며 무시와 경멸의 눈빛으로 사람들을 대한다면 그 어떤 이유와 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니다. 아파트 승강기 안에서 만난 이웃에게 청안의 눈인사를 건네고,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백안시당하는 분들을 따뜻한 청안의 눈빛으로 맞이한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임이 분명하다. 세상에서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큰 나눔이 눈빛과 얼굴빛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노선이 다르다고 서로 얼굴을 찡그리며 흰 눈동자로 백안시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민망하기까지 하다.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하얀 눈동자를 푸른 눈동자로 전환하여 서로 아름다운 눈빛으로 대하는 그런 따뜻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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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23 17:50

불효자는 웁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잃으며 살아간다. 상실과 몰락은 생명을 품은 모든 존재의 불가결한 실존의 조건 중 하나다. 상실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삶은 많은 것을 잃는 경험 가운데 빚어진다고 할 수 있다. 애착하는 것들은 망각과 소멸, 세월의 파괴 속에서 자취 없이 사라지는데, 이 상실은 달콤하고도 씁쓸하다. 생에서 가장 큰 상실은 혈연의 사라짐일 테다. 혈연 중 누군가 죽으면 유품들은 소각되거나 증여되고, 소수의 물품만 보존되는 행운을 맞는다. 이마저도 세월이 흐르는 와중에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모든 어머니는 바쁜 천사를 대신해서 이 땅에 온다고 했다. 그 천사가 지상에서의 소명을 다 하고 떠난 지 몇 해가 지나간다. 올해도 돌아온 어머니 기일을 혼자 조용히 보냈다. 모란과 작약이 피기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사는 일에 치어 차츰 얇아지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어머니와 시골집 거실에 둘이 있던 어느 쓸쓸한 저녁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심상한 어조로 죽으면 화장해 달라고 내게 부탁을 했는데, 어머니 죽음을 염두에 두지 못했던 탓에 나는 놀라고 무언가에 찔린 듯 아팠다.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슬픔이나 쓸쓸한 자락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목소리가 하도 담담해서 내 마음은 패는 듯 아팠을 것이다. 어머니가 젊은 시절 때 나는 사춘기를 맞았다. 자식이 고분고분하지 않았으니 다루기 까다로웠으리라. 모성의 부재 속에서 보낸 유년기 내 무의식에 가라앉은 앙금이 원인이었을 테다. 어머니는 내 어린 입술에 젖을 물리고 배부르게 먹였겠지만 내겐 도무지 그런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열두어 살 쯤 되었을 때 서울에서 온 한 소년을 만났다. 어머니의 고향 친구의 아들로 우리는 곧 친해졌는데, 그는 제 엄마의 젖이 모자라 내 어머니의 젖을 자주 얻어먹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처음 듣는 얘기에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나중에는 기분이 야릇해졌다.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누구 잘못도 아니었지만 젖 떼자마자 유기로 인한 슬픔, 즉 스스로조차 인식하지 못한 분노와 고통이 내 무의식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농부의 딸로 자란 어머니는 배움이 많지는 않았으나 아득한 눈빛을 가졌으니 딱히 불우하다고 할 수는 없다. 어머니는 결혼을 한 뒤 도시 변두리를 떠돌며 올라와 최저 생계수준의 삶을 이어가는 동안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가족 부양의 책임을 혼자 짊어졌다. 어머니가 모란과 작약 꽃을 사랑하고, 구불구불 흘러가는 강물과 골짜기를 사랑하셨다, 라고 나는 쓸 수 없다. 어머니는 가난이라는 최저 낙원에서 영혼이 깎이고 고통과 슬픔을 왜 감당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삶을 견뎌냈다, 라고 나는 쓸 수 있을 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서울에서 홀로 보내시는 어머니를 시골에 마련한 거처로 모셨다. 늙어가는 아들과 늙은 어머니 사이에는 어느덧 세월의 더께가 두터워져 그럭저럭 안온했다. 어머니가 텃밭에 작물을 심어 가꾸는 걸 낙으로 삼을 때 나는 서재에서 책이나 꾸역꾸역 읽었다. 아들이 묵언수행 하는 라마승이었다면 노모는 착한 보살 같았다. 어머니는 변덕스러운 운명에 시달리다가 경기도 남부의 한 요양병원에서 시난고난하는 생애를 마감했다. 한 상조회사의 도움을 받으며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는데, 나는 시종 담담했다. 살아가는 내내 가족 생계의 무거움에 짓눌린 채로 가난의 무두질이 거듭되며 착한 본성은 활짝 피지 못한 채로 어머니 영혼은 삭막해지고, 내면의 부드러움과 덕성은 말라붙었을 테다. 시나 음악 같은 예술의 효용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생전의 어머니에게 나는 반항했다. 철부지 아들의 성냄과 엇나감에 어머니는 난감했으리라. 더러는 엇나가는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뜬 눈으로 지새운 밤들도 있었으리라. 아, 어머니, 불효자는 웁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나의 어머니'라는 시에서 죽은 어머니의 체중이 얼마나 가벼운지 땅을 누르지 않는다, 라고 쓴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노화가 진행되며 몸피가 눈에 띄게 줄고, 죽은 뒤에는 나비보다 꽃잎보다 더 가벼워진다. 내 어머니가 묻힌 땅도 전혀 그 무게를 느끼지 못했으리라. 세월 갈수록 어머니를 겨냥했던 내 거친 분노와 메마름이 불효의 증표였다는 회한에 자꾸만 가슴이 아린 것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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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16 17:08

그 드라마의 주인공

도합 12년이나 되는 초중학교 시절은 대체로 지겹고 칙칙한 기억으로 남았지만 즐거운 시간이나 중요한 배움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경우 가장 기억에 남는 행복한 학교생활은 고2때 찾아왔다. 돌이켜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고2는 보통 코앞에 닥친 입시의 압박이 극에 달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공부 이야기는 오늘의 본론이 아니지만 이때 나는 성적도 일생의 바닥을 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들을 보자면 일생 가장 우울하고 두려운 시간을 보내야 옳았을 시기에 나는 가장 행복했다. 나만 행복했던 게 아니었다. 그때 우리반은 전교에서 가장 사이가 좋은 반으로 소문이 났다. 입시를 앞두고 까칠해진 사춘기 소녀들 60명을 모아놓았는데 믿을 수 없이 다정하고 화목했다. 그때 우리가 행복했던 것이 대체 어떤 모습이었냐고 말하면 딱 꼬집어 말할만한 일이 없다. 그냥 우리는 학교에서 마음이 편안했고 각자의 문제들을 잊은 채 수다를 떨며 하루를 보냈다. 가장 기억나는 남다른 풍경은 우리의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시간에는 수업시간동안 헤어져 있던 절친들이 다시 뭉치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도시락을 들고 다른 반으로 뛰어가는 일도 흔했다. 인싸들은 커다란 그룹을 이루고 시끌벅적하게, 아싸들은 혼자 혹은 둘이서 조용히 밥을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행복했던 우리 교실에서는 그런 소란스러운 재배치가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우리는 그냥 앉은 자리 그대로 네다섯명씩 짝지어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다. 몇 주에 한번씩 자리를 바꾸었는데,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새로 만난 이웃들끼리 새로 그룹을 이루어 종알거리며 밥을 먹었다. 곧 절친을 찾아 다른 반에서 달려오는 아이들이 없어졌다. 그들은 자기 절친이 낯선 아이들과 만족스럽게 밥을 먹는 모습에 놀랐고 절친들의 배타성이 없는 그 그룹에 굳이 끼어들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각자의 교실로 돌아갔던 것은 우리가 만든 희귀한 행복에 대한 존경의 의미였을 것이다. 우리 60명은 1년동안 절친도 왕따도 없이 오붓했다. 그것은 분명 흔치 않은 일이었다. 우리는 모두 우리 반이 특별하다는 걸 알았고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 아름다운 시간에 보이지 않는 연출자가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어른이 되고 난 뒤, 관찰자의 시선으로 교실을 다시 보게 된 이후였다. 그 탁월한 연출자는 우리 담임선생님이었다. 20대 후반의 미혼여성이었던 그분은 아주 침착한 성격이었고 말수가 적었다. 사이좋게 지내라고 강조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분은 이런 식으로 움직이셨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어제 학급청소시간에 무엇을 했냐고 물으셨다. 나는 약간 죄책감을 느끼며 학생회 회의에 다녀왔다고 대답했다. 어쩌면 야단을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잠깐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알았다. 다음부터는 청소시간에 회의하지 마.” 겨우 그것 뿐이었다. 나는 이후로 청소를 땡땡이치고 학생회 회의에 가는 얄미운 행동을 다시 하지 않았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손, 또는 어른의 일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분이 그런 식으로 많은 일들을 보이지 않게 바로잡으셨으므로 우리는 누구나 사이 좋게 1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한번도 그 일을 당신의 공적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우리 반 아이들이 참 착해서요.” 그때 우리반이었던 아이들 중에 유명인이 되거나 대 부호가 된 사람은 드물겠지만,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의 시간을 살았다. 학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야만과 폭력의 일들로 한참동안 세상이 들썩였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보다 더 추하고 파렴치한 일들을 뉴스로 접해야했다. 아이들이 저지른 일이었지만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연출자가 있었다. 어른의 삶이 아이들의 삶을 연출하게 된다는 것은 놀랍고도 두려운 일이다. 나의 선생님은 모든 아이들이 싸우지 않는 행복한 1년을 연출했고 뉴스 속의 부모들은 법과 권력을 총동원한 학폭 드라마를 연출했다. 내가 연출한 폭력 드라마의 주인공이 내 자식이 되어 불행과 불명예까지 모두 그 아이의 목에 걸게 될 줄을, 그들은 알았을까. /심윤경(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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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0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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