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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레거시?!

한 주 앞으로 다가온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관심사항은 두 가지,김기현 후보가 결선 없이 당선되느냐 그리고 친윤계가 최고위원 5명 중 4명을 확보하느냐다. 최고위원 5명 중 4명이 사퇴하면 비대위 전환이 가능한 게 주류에게는 ‘최후의 안전장치’가 된다. 1월 중순부터 2월말까지 국힘 지지층을 상대로 한 32개 조사결과를 보면 첫째,안철수 후보는 1월 25일 ‘나경원 불출마’ 직후 김기현 후보에 앞서며 지지율 최고점을 찍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한다.2월 초가 분기점인데 “윤안연대 표현은 무례,국정운영의 방해꾼이자 적,공산주의자 신영복 존경하는 사람 그리고 안철수 당 대표되면 윤 대통령 탈당”여파의 영향으로 해석된다. 둘째,여론조사는 1 라운드 김기현 승리 가능성을 시사한다.2월 초 이후 김기현 지지율은 30% 중반대에서 45%까지 접근하는데 국힘 지지층의 40% 초반 지지율은 50%를 훨씬 넘는 당원투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경험론과 최근 당원구성의 변화로 알 수 없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그렇다면 김기현의 국힘 전당대회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우선 정당의 공천이나 당직선거가 점점 개방화되는 추세의 반전이다.‘당원투표 70% + 여론조사 30%’ 방식은 2006년 강재섭 대표선출 때 도입된 이후 2021년 이준석 대표선출 때까지 사용된다.‘당원 100%’ 방식은 2003년 중앙당과 지구당이 인구비례에 따라 각각 50%씩 추천한 당원 23만의 선거인단 투표이후 처음이다.2003년 이전 대의원 투표에서 선거인단 투표로 바뀐 것 또한 정당 구성원의 참여확대였다. 당원 아닌 시민들이 여론조사든 직접참여든 처음으로 정당의 당직선거에 참여한 곳은 보수정당이다.2004년 박근혜 대표선출 때인데 민주당은 2012년 한명숙 대표선출 때에야 비로소 시민을 참여시킨다.박 대표는 여론조사였고 한 대표는 선거인단 방식이었다.2004년 당시 한나라당은 노무현 탄핵 후폭풍의 역대급 총선패배를 앞둔 상황에서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게 시민참여로 알려져 있다. ‘당정 일체론’에 대통령의 ‘명예 당대표론’ 논란도 있다.민주화 이후 한국정치는 ‘입법부 vs. 행정부의 관계’가 아니라 ‘정부여당 vs. 야당’ 대립구도의 악순환이다.따라서 “(집권)당과 (대통령이) 혼연일체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은 아니다.2021년 당시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청와대에 여당 의원들이 휘둘리는 것을 바꾸겠다.”고까지 했다. 민주화 이후 집권당과 대통령 관계는 크게 ‘대권-당권 통합형’과 ‘대권-당권 분리형’으로 나눌 수 있다.이승만 대통령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가 통합형으로 이 때 집권당은 “여의도 출장소”로 전락한다.통합형은 ‘정부 주도 또는 지배형’이고 분리형은 ‘정당 주도 또는 지배형’이다. “대통령이 당을 장악해 의회를 지배하는 것은 유신잔재”라며 집권당과 대통령의 분리를 선언한 대통령은 노무현이 처음이다.이후 ‘대권-당권 분리형’의 ‘정당 주도 또는 지배형’이 한국정치의 규범이지만 통합형의 속성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게 현실이다.공천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어느 날은 신의 섭리에 따른 구세주로 찬양받다가 다음날은 단지 쓰러진 신상처럼 저주를 받는다.”고 한다.특히 “제왕적 대통령”은 내각제와 달리 선거이후 정부운영에 있어서 정당(그리고 의회)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갖고 있다.대통령이 “현대판 군주”가 되는 상황에서 집권당은 취약해진다. 따라서 집권당이 대통령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집권당이 ‘사인적(私人的) 대통령’의 민주적 책임성 부재를 극복하는 데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집권당의 역할확대는 결국 집단적 책임성의 강화다.정치적 책임의 주체를 개인에서 조직으로,사인적 책임에서 집단적 책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대통령의 정당인식이 핵심인데 특히 대통령의 개인적 특성이 결정적이다. 개방화와 견제와 균형 그리고 분권이라는 시대적 요구의 반전이 김기현 레거시일까? 김기현의 행보를 주목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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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02 18:01

개학(開學)과 재학(再學)

학생들이 있는 집집마다 개학 준비로 분주하다. 중국에서 방학을 방가(放暇)라고 해서, 휴가(休假)의 뜻이 강하다면, 한국에서의 방학(放學)은 학교 밖에서 풀어놓고(放) 스스로 배우는(學) 배움의 연장이다. 한국인에게 배움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우선순위다. 전쟁 통에도 피난지에서 천막을 쳐놓고 배웠고, 공장 끝나고 야학을 하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돈이 없어도 배워야 하고, 병이 들어도 배워야 하고, 나이 들어도 배워야 한다. 코로나 전염병도 배움을 멈출 수 없으며, 어떤 이유든 배움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며, 배움을 지속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인간의 모습이다. 오죽하면 죽고 나서도 후손들에게 자신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제사를 지낼 때 배우다(學) 살다간(生) 사람이라 써 달라고 하였을까?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 ‘평생 배우며 사셨던 우리 집의 어르신 나타나세요!’ 죽어서도 자식들에게 성공한 사람도, 돈 많은 사람도 아닌 평생 배우며 살았던 우리 아버지로 기억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유교 경전의 대표자인 <논어> 첫 구절은 배움의 기쁨(悅)에 대한 선언이다. 명품을 줄서서 사고, 새 차를 사는 기쁨도 있지만, 중독성이 강하고, 더 큰 물질적 욕망을 동반하기 때문에 소모적이고 일시적인 기쁨이다. 배움을 통해 꽉 막혔던 내 생각의 둑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생각과 만나 신세계를 만나는 기쁨은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열(喜悅)이다. 거기에 배움을 함께하는 친구(朋)가 있다면 열락(悅樂)의 인생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배움을 좋아하는 호학(好學)이나 모르는 것을 묻기 좋아하는 호문(好問)은 인간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 나보다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下) 사람에게 내가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恥)하지 않고 묻는 것은 성숙한 사람의 미덕이다. 인간은 배움을 통해 상승의 날개를 달고(下學上達) 저 먼 세상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배움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동하는 가장 효율적인 이동 수단이다. 한국인에게 배움은 책 속의 지식만은 아니었다. 집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 사람 공경하고, 신의를 지키며 일처리 잘하고,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학교 문턱에 가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이미 배움을 이룬 사람이라고 여겼다. 학력은 높지만 도리를 모르고 인성이 안 된 사람은 헛배웠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배움은 지식으로서의 축적이 아니라 내 삶에 반영되어야 한다. 학습은 배움(學)이 습(習)이 되어 내 삶에 구동되어야 하는 것이다. 배우고 그저 귓가에 스치는 바람처럼 배움을 흘려보낸다면 나에게 배움은 어떤 작용도 하지 않는다. 하나라도 배웠다면 어떻게 실천하고 내 삶에 반영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배움은 다섯 가지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넓게 배우고(博學, 박학), 깊이 묻고(審問, 심문), 신중하게 생각하고(愼思, 신사). 명확하게 판단하고(明辯, 명변), 독실하게 실천(篤行, 독행)하는 과정은 배움을 더욱 단단하게 하는 과정이다. 김장독을 제대로 묻으려면 넓게 파야하고, 깊게 묻어야 하고, 생각하고 파묻어야 하고, 제대로 독을 놓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학생들은 개학(開學)하고 어른들은 재학(再學)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밀쳐놓았던 책을 다시 꺼내고, 나의 삶을 치열하게 질문하여 부족한 것은 묻고(問), 넘치는 것은 깊이 묻어(埋) 버려야 한다. 이제 배움은 출세나 과시의 도구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일에 온전히 사용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 되어야 한다. 배움을 갖고 태어난 생이지지(生而知之)가 아니라면, 열심히 배워서 깨우치는 학이지지(學而知之)는 되어야 한다. 그것도 안 된다면 열심히 반복해서 깨우치는 곤이지지(困而知之)도 마다할 이유는 없다. 배움이 중지된 삶은 정신적인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다. 꽃이 피고(開花), 배움이 열리는(開學) 때에 마음의 문을 열어(開心) 나의 수준을 높여 더 좋은 삶으로 나아가는 개선(開善)하기 딱 좋은 때이다. 다시(再) 공부(學)하자!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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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23 17:46

봄날엔 그 노래를 듣는다

벌써 도타워진 햇볕과 청명한 날은 추위로 웅크렸던 날에 대한 보상이다. 그래서 봄이 온다는 소식은 기껍다. 곧 한파를 견딘 산수유와 생강나무에 노란 꽃이 피고, 느릅나무와 버드나무 가지에는 연초록 새순이 돋을 게다. 아침에는 껍질 째 사등분으로 쪼갠 사과에 곁들여 호밀빵과 견과류를 챙겨 먹었다. 포만의 행복은 없지만 한 끼로 부족하지 않다. 봄기운을 더 느끼려면 둔덕이나 빈 밭에서 나온 냉이나 달래를 넣은 된장찌개와 머위나 두릅 같은 나물을 된장이나 액젓과 버무려 들깨가루를 넣어 곁들여 먹어야 한다. 입안에 퍼지는 흙냄새는 기력이 쇠해진 사람이 묵은 병마저 떨치고 일으켜 세울 만한 봄의 보약이다. 아직 조춘(早春)의 바람 끝은 차다. 이맘때 유독 알러지가 심해진다. 연신 재채기를 하고 콧물이 흐른다. 항히스타민 류의 약을 한두 알 먹지만 효과는 일시적이다. 약의 내성을 피하려면 몸의 면역력을 높일 수밖에 없다. 우리보다 한 세기를 먼저 살다 간 젊은 시인은 '바람이 부는데/내 괴로움엔 이유가 없다'(윤동주, '바람이 불어')라고 노래한다. 바람이 일깨운 괴로움엔 이유가 없다고 했다. 눈 녹은 물이 종일 흐르는 하천에는 일찍 겨울잠에서 깬 산개구리들이 모여 우는데, 어짜자고 어쩌자고 바람은 우리 안의 괴로움을 일깨우는 것일까. 낮엔 겨우내 덜컹이던 낡은 부엌문 문짝의 헐거워진 경첩의 나사못을 죄고 못이 빠진 판자에는 새로 못을 박는다. 봄볕 아래 낮잠을 자던 고양이들이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한다. 허기로 출출해져 서둘러 잔치국수를 끓여 한 그릇을 비우고 약수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양지에 의자를 내놓고 무릎에 담요를 덮은 채 책을 읽었다. 책을 얼마나 읽었을까. 봄날의 낮은 까치 꽁지만큼이나 짧다. 누가 서편 하늘에 낡은 피를 한 양동이나 쏟았나? 어느새 뉘엿뉘엿 지는 해는 핏물인 듯 붉은 석양에 잠겨 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다. 춥다고 실내에 웅크려 있던 아이들이 운동장에 나와 소리를 지르며 캐치볼을 하다가 돌아간 뒤 저녁답의 땅거미가 내려온다. 살아 있다는 것은 망각과 상실의 세월을 산다는 뜻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십여 년이 지났다. 어머니 애창곡은 옛노래 '봄날은 간다'였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그 노래 말고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어머니의 노래에 울컥했는데, 노래에 어머니의 온갖 슬픔과 시름이 다 녹아 있었던 탓이다. 앙가슴에 쌓인 회한의 내역도 아득해져 이젠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그 아득함에 맞물려 홍콩 영화 전성시대의 배우 장국영이 출연한 영화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다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어머니의 봄날은 짧았다. 발 없는 새 같이 산 어머니가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신 것은 이른 봄이다. 침상에 누운 어머니의 핏기 없이 하얀 발이 이불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그 발을 무심코 쓰다듬었는데 얼음처럼 차가워서 섬뜩했다. 어머니가 임종을 맞는 순간 여동생 셋이 일제히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오열했다. 2월 하순께 장례를 치르고 납골당에 모신 뒤 돌아왔다. 며칠 동안 어머니의 빈자리는 텅 빈 채로 허전했다.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고 혼자 있는데, 새벽마다 부엌에서 성경을 읽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시름없는 천국을 꿈꾸며 고된 생의 날들을 견디셨던 것일까. 아버지는 거듭된 사업 실패로 노동의 의욕을 잃은 채 오랜 세월 바깥 활동을 접고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어머니가 무기력한 아버지를 대신해 식솔을 챙기셨다. 초등학교 졸업 학벌에 기술도 익힌 게 없으니, 어머니가 감당할 노동은 남들이 다 기피하는 하찮고 궂은일뿐이었다. 이제는 어머니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빈다. 젊은 날엔 봄도, 봄꽃에도 태무심하다가 나이 들어 봄꽃의 화사함을 알아보고 감탄하게 되었다. 부쩍 부고 소식이 잦은 봄날, 병과 죽음은 이렇듯 흔한데, 어쩌자고 어쩌자고 봄꽃은 마구 피어나는가? 담주엔 열일 제쳐놓고 봄 바다를 보러 떠나자. 눈이 시리고 가슴 탁 트일 때까지 통영의 쪽빛 바다를 보자. 중앙시장통 허름한 식당에서 도다리쑥국을 사먹고, 박경리 문학관도 둘러보자. 이튿날을 쌍계사로 건너가 대웅전 부처도 만나고 뒤뜰을 살뜰하게 돌아본 뒤 하동에서 재첩국수 한 그릇을 먹은 뒤 상행 열차로 돌아오자.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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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16 15:04

비효율의 효율

인간의 생애가 기적적으로 길어진 것을 감안하더라도 꼬바기 반평생을 흘려보낸 지금에야 깨달았으니, 나에게 ‘효율’이란 얄궂게도 효율을 가장 깎아먹는 구호였다. 동선과 시간을 생각해서 효율적으로 일하기는 나에게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목표였다. 예를 들어 나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은 잡동사니들을 담아둔 주방 서랍 세 개를 정리하자. 먼저 커피 한잔 마시고.’ 물을 끓이려고 보면 주전자는 싱크대의 가장 더러운 설거지거리들 아래에 파묻혀있다. 그 다음 단계는 이렇게 된다. ‘설거지 먼저 해야겠군.’ 하지만 커다란 곰솥을 보자 벌써 맥이 풀린다. ‘곰솥이 싱크대를 온통 차지하고 있으니 먼저 저것부터 씻어서 높은 수납장에 올려놔야겠다. 그런데 곰솥을 넣기 전에 냉동실의 우거지로 국을 끓일 생각이었는데. 국끓일 재료를 다듬으려면 시간이 또 많이 걸리겠네. 이러다가는 서랍 정리를 또 미루고 말겠는걸. 그러려면 아무래도 서랍 정리를 먼저 시작해야겠어. 그런데 내 커피는? 아, 주전자, 아, 우거지국. 해야할 일이 너무 많구나.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내려면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할텐데.’ 이러다보면 머리가 온통 뒤죽박죽이 된 채 아침밥을 기다리는 고양이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넋을 놓고 마는 것이다. 나처럼 일머리가 없는 사람은 효율 따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시작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그걸 깨닫는 데에 반평생이 걸렸다. 무작정 세 개의 서랍을 비우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다. 서랍 세 개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 주방은 온통 발디딜 틈 없이 가득 차버렸다. 싱크대의 곰솥에는 눈을 질끈 감고 주전자만 건져내서 일단 물을 끓인다. 혁명이라도 일어난듯한 부엌바닥을 요령있게 비집으며 나는 커피를 한잔 타는 것까지 성공했다. 원두커피 생각이 간절하지만 이런 날은 더운물만 부으면 되는 달달한 믹스커피 한모금을 마시며 머리 속을 정리하는게 좋다. ‘다 됐어. 이제 이것들을 서랍에 도로 넣고, 사용하지 않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들은 버리면 돼. 해야할 일은 겨우 그것 뿐.’ 놀랍게도 겨우 그것 뿐이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빈 수납장과 종량제봉투를 채우는 것, 내가 할 일의 양이 시각적으로 구체화되자 왠지 마음이 정돈되었다. 원두커피를 포기하고 믹스커피로 대신하는 것은 모든 것이 완벽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을 상징한다. 우거지국은 포기하고 일단 곰솥을 씻어서 넣는다. 높은 수납장에 올려놓을 물건을 한번에 모아서 한번에 올렸으면 효율적이었겠지만, 나는 오늘 사다리에 다섯 번쯤 올라갔다. 실은 정확히 세어보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했지만 나는 몇 번의 비효율적인 움직임을 포함해 끈기 있게 물건들을 정리했다. “이번에도 효율적으로 일하지 못했군. 순서를 좀 더 생각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 따위는 좀 전에 지나간 호랑이에게 물려 보내기로 한다. 실은 효율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져 오히려 손이 느려질 뿐이다. 과정의 비루함을 곱씹을 필요 없다. 똑같은 일을 두 번 할수도 있고 세 번 할 수도 있다. 하루를 꼬박 씨름한 끝에 두 개의 종량제 봉투를 채우고 세 개의 서랍을 정리했다. 그거면 됐다. 토끼해를 훌륭하게 시작했다. 내 친구에게 들은 어린시절의 일화가 있다. 고된 노동으로 자녀를 키우던 어머니는 퇴근해서 아이들을 보면 딱히 무엇이다 할 것 없는 칭찬을 하곤 했다. “내새끼들, 뭐라도 한다잉.” 제각각 그림을 그리고, 만화책을 보고, 라디오 음악을 듣고 있던 아이들은 별 생각이 없다가도 그 말에 왠지 힘이 났다. 필요한 일을 하는가, 효율적으로 하는가 하는 것은 어머니의 기준에 없었다. 그저 ‘뭐라도 하는 것’으로 어머니는 만족했고, 이것저것 하다보면 일머리가 생겨났다. 아이들은 씩씩하게 제 일을 하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효율적으로 일하라는 주문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도달하는 선불형 야단이다. 어머니의 지혜를 따라, 뭐라도 하는게 낫다. 하다 보면 언젠가는 빠르게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효율부터 외치지 말고, 두서없이 일할 시간을 주자. 먼저 나 자신에게부터.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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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09 16:28

‘윤석열의 정치와 권력’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정치개혁은 사라졌다.’대통령의 중대선거구제 언급으로 선거제도 개편이 잠깐 주목받긴 했지만 지금은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나경원과 유승민은 출마하느냐? 김기현은 결선 없이 당선 되느냐?’ 그리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구속되느냐? 그 이후 민주당은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하다. 엊그제 ‘초당적 정치개혁 의원모임’이 출범했다.정치개혁을 주제로 한 의원모임은 ‘화해와 전진 포럼’ 이후 21년만이고 100명이 넘는 여야의원이 참여한다.국회의장은 “2월 말까지 정개특위가 복수안을 만들고 3월에는 전원위원회를 주 2회 이상 열겠다.”는 계획이다.총선 1년 전인 4월 10일이 시한이다. 작년 7월 여야합의로 구성된 정치개혁특별위원회도 “연동형 비례대표제 개선”을 목표로 한다.현재 20여 개에 가까운 관련 법안이 제출되어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폐지에 강조점을 둔 반면 야당 의원들은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추가하며 적게는 3인에서 10인까지의 중대선거구제를 주장한다.유권자가 정당추천 후보를 직접 선정하는 개방형 비례대표제와 지역구와 비례제의 비중을 1:1로 한 법안도 있다. 대안은 다양하고 상상력의 영역이다.소선거구제를 하면서 권역별 비례제를 할 수도 있고 중대선거구제를 하면서 전국단일 비례제를 할 수도 있다.권역별 비례제를 연동형으로 하면서 소선거구제나 중대선거구제와도 결합시킬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두 가지가 중요하다.하나는 왜 선거제도를 개선 하느냐인데,인구와 지역대표성을 가능한 높이자는 것이 핵심이다.둘째는 ‘제도적 친화력’인데 선거제도가 다른 정치제도(정부형태나 대통령 선출방식 등)는 물론 정치문화나 관행 등과 서로 긍정적 영향을 주고받아 시너지를 내야한다 후자가 중요하다.중대선거구제는 ‘승자독식의 양당 혐오정치’에서 ‘공유와 타협의 다당제 정치’를 향한 대안의 하나로 볼 수는 있다.어떤 식으로든 비례성과 대표성이 강화된 국회의원 선거제도에 결선투표까지 더해진 대통령 선거는 국회와 정치권에 ‘문제해결의 다원주의 연합정치’를 제도적으로 강제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강화된 국회권한과 기능에 따라 일단은 ‘총리 추천제’에서 출발하여 최종적으로는 ‘총리 선출제’까지 이른다면 증오와 배제와 독점의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벗어나 ‘합의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결국 비례성과 대표성의 선거제도 개혁에서 출발하여 대통령 결선투표가 더해지고 국회의 총리추천에서 시작하여 국가원수의 직선 대통령과 원내 다수파 총리의 행정부 구성으로 완성되는 게 정치개혁의 완결이다.개헌은 정치개혁의 공식적 완료다. 정치개혁의 종합적 이해와 이에 따른 제도설계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리당략과 기득권의 포기’다.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없다면 포기는 불가능하다. 이게 가능한 사람은 현재 우리 정치권에 대통령 한 사람밖에 없다.윤 대통령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대통령 선거 한 번으로 자신의 정치인생을 장식한다.과거의 빚도 없고 미래의 정치적 부채도 없다.공동체의 기여밖에 없다. 윤 대통령의 중대선거구제 제안은 계획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개헌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던 것을 보면 대통령의 언급이 개헌까지 포함한 종합적인 정치개혁의 차원에서 검토된 것도 아닌 듯하다.지난 대선 때도 국민의힘은 정치개혁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이슈를 제기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승자독식과 지역대결 구도에 따른 양당 중심의 대립과 교착의 정치를 마감해야 한다는 과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고,이에 따라 국회의원 선거구제 개편을 시작으로 개헌으로 완결되는 정치개혁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한다면 ‘윤석열의 권력과 정치’가 한국정치에 남길 족적은 뚜렷하다.‘정치개혁의 대통령’이다. ‘나경원 사태’는 ‘어젠다 없는 정치인의 한계’를 보여준다.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 없는 권력과 정치는 실패한다.그들의 실패가 아니라 대한민국 공동체의 불행이다.‘시대정신과 역사적 책무의 인식이 출발점이다.윤석열 권력과 정치’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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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02 16:15

인생의 맛

코로나에 걸려 미각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무지 살맛이 안 났다고 한다. 냄새도 못 맡고, 맛도 모르니 사는 맛이 안 났었다는 것이다. 음식의 맛을 못 느끼는 병을 미각장애 또는 미맹(味盲)이라고 한다. 맛에 깜깜(盲)하다는 것이다. 맛을 못 느끼는 병을 미맹이라고 한다면 인생의 맛을 못 느끼는 병을 생맹(生盲)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삶(生)의 맛에 깜깜하다는 의미다. 어느 날 갑자기 살맛이 안 나고, 재미있는 일도 없고, 사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면 생맹 증상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삶의 맛을 느끼는 센서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정신적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 같은 이름도 생소한 병리 현상은 사는 맛에 이상이 생겨서 나타난 것이다. 건강한 자아에 균형이 깨지고, 재미와 의미의 맛을 느끼는 센서에 비상등이 켜진 것이다. 인생 사는 재미와 의미를 모르겠다고 자주 말하고 있는 나를 만난다면 심각하게 치료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중용(中庸)>은 균형 잡힌 인생을 사는 법을 설명하고 있는 고전이다. 균형 잡힌 인생의 극치는 인생의 맛(味)을 알고(知) 사는 것이다. 사는 재미(在味)와 의미(意味)를 음미(吟味)하며 사는 인생이 맛있는 인생이다. <중용(中庸)>에서는 맛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리 상태를 ‘지미(知味)’의 센서에 이상이 생겼다고 정의한다. ‘사람들은 모두 음식을 먹지만(人莫不飮食也, 인막불음식야), 제대로 맛을 알고(知味) 먹는 사람이 드물다(鮮能知味也, 선능지미야).’ 사람들이 자기중심을 잃고 불균형과 편향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세태에 대하여 공자는 맛을 모르는 병에 걸렸다고 정의하고 있다. 음식을 먹으면서 맛을 모르고 먹는 것이나, 인생을 살면서 삶의 맛을 음미하지 못하며 사는 것이나, 같은 병이라는 것이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은 항상 넘쳐서 맛을 모르고,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은 항상 모자라서 맛을 모른다. 성공한 사람은 교만해서 맛을 모르고, 실패한 사람은 우울해서 모른다. 인생의 맛을 알고 산다는 것은 학력과 성공 여부와 상관이 없는 일이다. 감정의 불균형(中和), 자기 불신(愼獨), 현실적 판단의 부재(時中), 현실의 부정(自得), 지속성의 결여(能久), 선택의 부적절(擇善) 등 다양한 문제들이 맛을 못 느끼며 사는 인생의 원인이라고 <중용>에서는 열거하고 있다. 인생의 맛을 음미하지 못하는 생맹은 돈과 지위와 상관없이 나타난다. 자식을 좋은 대학 보내는 일에 인생을 걸었던 부모가 막상 목표를 이루고 나면 허탈하여 걸리기도 한다. 그토록 원하던 성공은 이루었는데 막상 돌이켜 보면 재미와 의미 없이 살아 온 인생이 후회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목표만 이루면 인생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그곳에 이르렀다고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다. 우울함의 근원은 결국 맛을 모르고 살았던 나의 삶에서 시작된 것이고, 소진된 인생의 에너지는 의미 없이 목표를 향해 뛰어온 결과다. 그때 비록 작지만 소중했던 시간에 재미와 의미를 느끼지 못한 결과가 지미(知味)의 기능을 고장 나게 한 것이다. 하늘은 인간을 이 세상에 살게 함에 재미와 의미를 모두 느끼며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었지만 모든 인간이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살아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지금 하는 일이 재미있고 의미도 있다면 무조건 해도 좋다. 그러나 도무지 재미도 의미도 만들어 낼 수 없다면 그만두는 것이 좋다. 재미는 현재(在) 좋아서 하는 것이고, 의미는 힘들어도 선(善)해서 하는 것이다. 편한 일을 한다고 재미있는 것은 아니고, 돈을 많이 번다고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삶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때 재미와 의미를 얻을 수 있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만 음식을 먹지 않고, 음식의 맛을 느끼며 배를 채운다면 한 수 위다. 성공하기 위하여 인생을 사는 것보다, 인생의 재미와 의미를 느끼며 목표를 달성한다면 높은 수준의 성공이다. 재미없는 일상과 의미 없는 인생으로 하나뿐인 삶을 낭비하지 말자. 고장 난 지미(知味) 센서를 복구하여 맛있는 인생을 사는 나를 만나자. 하늘(天)은 나에게 맛있게 살라는 명(命)을 내려 이 땅에 보냈으니까. 그 천명을 잊지 말고 한 해를 살아보자.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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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26 14:07

내 인생사용법

가끔 인생 뭐 별거 있나,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이런 생각은 주로 잠 안 오는 밤에 찾아온다. 물거품처럼 사라진 소규모 인생 계획들, 커피 삼천사백스물 세 잔, 후추와 소금 약간, 대통령 여럿, 쓰라렸던 백수 시절, 21그램도 채 안 되는 키스와 연애, 그리고 무수한 실패. 그게 특별할 것 없던 내 인생사용법이었다. 아들이 생기면 아이에게 야구 글로브를 사주고 둘이 캐치볼을 해야지, 했지만 그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사느라 바빴던 탓이라는 변명은 비겁하다. 거위처럼 어기적거리며 변명이나 늘어놓는 인생은 비루하다. 나이 드니, 그토록 혼란에 감싸였던 인생의 전모가 또렷하게 보인다. 시간이 완전함을 가늠하는 인생의 시험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인생 처음의 시련은 벌에 쏘인 것이다. 설마 여섯 살에 통렬한 아픔 속에서 인생이 녹록치 않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아니다. 벌 쏘인 턱이 금세 부풀고, 마치 불에 덴 듯 따끔거렸다. 외손자를 들쳐 업은 외할머니는 찐 옥수수를 물려주며 달랬다. 벌에 쏘인 그 선연한 통증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요즘 들어 내가 여섯 살이었을 때 엄마라고 알았던 외할머니 얼굴을 자주 떠올린다. 평생 시 쓰기에 매달렸다. 열다섯 살 때 김소월 시집을 읽고 그 운율을 흉내내어 시를 적었다. 학생잡지 '학원'에 뽑혀서 활자화된 시를 길거리에서 여러 번 읽었다. 그 어린 시절 내가 쉰 해 동안이나 시를 미련스럽게 붙잡고 있으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시를 환대하고 정중하게 대했다. 시를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이라 여기고, 급류 같은 사나운 세월을 시라는 난간을 붙잡은 채 건너왔다. 시가 아니라 다른 일을 그토록 열심히 팠더라면 삶은 지금보다 더 나았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스물일곱 살에 출판사에 사표를 내고 창업을 했다. 1인 출판사였다. 혼자 책상에 엎드려 코를 박고 기획과 원고 교정, 표지 디자인을 다 처리하고 인쇄소며 제본소를 쫓아다니며 제작 감리를 봤다. 운 좋게도 창업 직후에 낸 책이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두며 직원을 두어 명 뽑고 사무실을 넓혀 이사를 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책들을 맘껏 펴내는 동안 출판사는 번창해서 직원이 서른 명으로 늘고, 창업 십년 만에 강남에 사옥을 지었다. 그게 내가 일군 사업의 정점이자 전성기였다. 필화사건으로 구속되고, 두 달 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나서 출판사 폐업을 결심했다. 열다섯 해 동안 출판편집자로 책 만들며 보낸 세월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인생 후반부엔 제주도에서 작은 서점이나 꾸리며 살고 싶었다. 은둔 거사로 살며 멀 데서 온 젊은 벗들과 담소하고 오후엔 바닷가나 걷고 싶었다.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차선으로 시골에서 영농후계자로 살려는 야무진 꿈을 꾸며 경기도 남단에 집을 지었다. 봄, 가을마다 물안개가 집과 마당을 삼키는 시골에서 나는 처절하게 외로웠다. 낮엔 나무시장에서 사온 유실수와 관상수를 부지런히 심고, 밤엔 안성시립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으며 물안개와 고독을 견뎠다. 가끔 벗들이 들고 온 붉은 포도주나 동네 슈퍼에서 사온 좁쌀막걸리를 한잔씩 마셨다. 어둠 속에서 고라니나 너구리가 집 마당을 서성거리다 기척없이 사라졌다. 그 동물들은 야생이었다. 십오 년 뒤 영농후계자라는 난망한 꿈을 접고 시골을 떴다. 돌아보니 인생이란 미친 엄마가 품고 다니는 태아 같다. 우연이라는 날개를 달고 붕붕거리는 애처로운 인생아! 잘 사는 일이란 무엇인가? 곰곰 생각해보니 진실의 환한 빛 속에서 사랑하고 슬퍼하며 사는 것, 바람에 펄럭이며 마르는 빨래를 지켜보는 시간을 갖는 것, '일하는 육체와 창조하는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평생 읽는 자이자 쓰는 자로 살았다. 내 인생사용법에 실수와 오류가 없었다고 우길 수는 없다. 그러나 엉터리로 살지 않았다는 자부심조차 없는 건 아니다. 내 귀는 바흐를 듣고, 내 눈은 권진규의 '붉은 가사를 걸친 자소상'을 보았다. 청년 시절 추앙하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인 지중해 크레타 섬을 찾아가 그의 돌무덤 위에 붉은 꽃 몇 송이를 바쳤다. 내 인생 추는 갈망과 현실 사이 한 가운데에서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균형을 이룬다. 그게 내 인생사용법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근거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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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19 16:17

토끼처럼 다정하게

새해를 알리는 신문에는 맨몸 마라톤이나 바다수영 같은 힘찬 사진이 오르곤한다.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딘가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만날 수는 없는, 청룡 주작 봉황 현무 같은 상상속 동물들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가까운 친구가 새해 첫날 아침 제주도 바다에 뛰어든 사진을 보내왔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믿을 수 없는 친구의 모습을 여러번 보았다. 양력으로는 새해를 맞이했지만 아직 설날이 오지 않아 임인년이다. 호랑이와 토끼 사이의 이 날들은 한해를 돌아보고 맞이하기 적합한 때다. 나의 2022년은 거창하지 않으나 오목조목 잘 놀았던 좋은 한 해였다. 봄에는 친구들과 ktx를 타고 청주, 공주, 대전 등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녔다. 숲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나누는 이야기는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보다 훨씬 밀도가 촘촘하다. 밀린 근황을 나누며 숲길을 한시간 쯤 걷고 나서 도토리묵과 청국장 같은 옛날 음식을 먹었다. 누가 충청도 음식이 맛없다고 했는가! 가까운 곳에 아름답고 좋은 곳이 이렇게 많이 있는데 그동안 멀고 화려한 것들에 눈이 멀어 누리지 않았을 뿐임을 깨달았다. 여름에는 대학 동창들과 속초로 여행을 떠났다. 우리 입학 30주년이라고 거창한 계획들을 세우다가 코로나 때문에 대폭 축소해서 가까운 속초에 펜션을 잡아 1박 놀고 오기로 했다. 여섯 친구들이 SUV의 맨 뒷자리까지 채우고 떠나며 우리에게 MT라는 배타적인 추억의 영역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90년대 히트곡들을 틀어놓고 우리가 젊었던 날, 휴대폰도 없던 선사시대에 기타를 메고 떠나 종일 노래를 부르고 허름한 숙소에서 코펠에 밥을 지었던 오래된 기억들을 소환했다. 우리는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철부지이기도 했다. 연말에는 깜짝 선물처럼 중학교 동창들과 35년만에 재회하며 우리를 다시 이어준 SNS의 위력에 감사했다. 단발머리 소녀들이었던 우리는 직업도 사는 곳도 모두 달라진, 그러나 웃는 얼굴은 옛날과 똑같은 중년 여성들이 되어 다시 만났다. 우리에겐 '동네'라는 추억의 영역이 보장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시절 중딩들의 핫플이었던 떡볶이집, 만화가게, 약과공장 등의 안부를 확인하며 시간을 잊은 하루를 보내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토끼는 다산의 동물이고 가족을 상징하지만 나는 오늘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친구는 가족과는 또 다른 사랑의 영역이다. 가족이 배타적이고 결속력이 강하다면 친구는 열려있고 느슨한 관계다. 그 느슨함이 꽉 조인 생활 속에 긴장을 풀게 하는 무엇이 된다. 결혼과 출산이 극도로 드물어진 요즘 가족의 범위는 확장되기 어렵고 한번 상실하면 다시 충원하기도 매우 어렵다. 반면에 친구는 확대와 축소가 자연스럽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하룻저녁만에 가까워지기도 하고, 이런저런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절친이라도 뜸해지기도 한다. 오래 못 보던 친구라도 다시 만났을 때 오랜만이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하고 의자를 권하면 끝이다. 그 모든 것이 유연하고 자연스럽다. 조지 베일런트는 <행복의 조건>에서 1938년 시작돼 무려 70년간 이루어진 행복에 관한 종단연구를 소개한다. 이 연구에서는 하버드 법대 졸업생 집단, 아이큐 150 이상의 고지능 여성집단, 보스턴 슬럼가 출신 청소년 집단의 인생을 수십년간 추적해 인간이 노년에 느끼는 행복감을 결정지은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분석하는데 이 연구에 의하면 우리가 흔히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강이나 직업, 재산, 가족은 뜻밖에도 행복의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노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행복과 가장 유의미하게 연관되는 결정적 요인은 친밀한 인간관계, 즉 친구의 힘이었다. 젊은 날에는 일과 가족, 여행과 건강 같은 것들이 우리를 감싸고 보호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팔다리의 힘을 잃고 가족도 먼저 보내고 돈도 더 이상의 기쁨을 주지 않을 때 인간의 곁에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사랑하고 교감할 수 있는 근원적 능력이다. 친구를 만나 잡담과 근황을 나누는 일은 소소하지만 핵심적인 행복의 근원이며 통장보다 더 중요한 노후대비이다. 호랑이의 기운을 잠시 내려놓고, 토끼들처럼 소소한 다정을 나누는 새해를 맞이해야겠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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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12 17:36

‘정치하는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회복세다.작년 11월 넷째 주부터 주별 평균 지지율 흐름을 보면 33%-37%-37%-39% 그리고 41%의 오름세가 12월 마지막 주까지 이어진다.새해 초 조사들도 대부분 40% 초반의 대통령 지지율이다.반대로 대통령 국정운영의 부정평가는 63%-60% -59%-57%-57%로 낮아지는 추세다. 반전이다.작년 5월 10일 대통령 취임이후 12월 27일까지 조사일 기준으로 실시된 여론조사는 모두 222개(면접조사 63개 ARS 159)다.대통령 지지율이 주별 평균으로 50%를 넘은 것은 취임이후 딱 5주차까지였다.이후 대통령 지지율은 주별 평균으로 40%대를 3주 동안 기록한 다음 11월 넷째 주까지 주별 평균으로 30% 초반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8월 첫 주와 둘째 주는 2주 연속으로 주별 평균이 30% 아래로 떨어지기까지 한다. 문제는 반전 회복세의 대통령 지지율이 내년 4월 총선까지 이어지느냐다.대통령 임기 중의 총선은 대통령의 중간평가로 대통령 지지율이 여당의 총선승부를 결정한다.대통령 취임일로부터 멀어지는 선거일수록 대통령과 여당에는 불리하다. 내년 총선은 대통령 당선(3월 9일)과 취임(5월 10일)의 중간인 4월 10일로 만 2년의 윤석열 권력심판이다.한 조사에 따르면 “국정 안정론(44%)”과 “국정 견제론(46%)”이 팽팽하다.중도층은 “야당후보 지지(48%)”가 “여당후보 지지(37%)”에 앞선다. 경제상황은 대통령 지지율의 기초인데 무척 나쁘다.작년 한국경제는 역대 최대 규모의 수출을 기록했지만 동시에 무역적자 또한 역대 최대치였다.최근 3개월 연속으로 ‘대한민국 경제의 희망’ 수출도 하락세다.‘고물가 고금리 고환율의 3고현상’은 올해도 이어지고 성장률은 1%대라고한다.소상공인의 56%는 경영환경이 작년보다 더 어려울 것으로 예상한다. 현재로서는 올 하반기 세계경제 개선에 따른 회복세를 기대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경제와 민생악화는 사회적 양극화를 더욱 가속화 시킬 것이다.따라서 ‘공동체 지키기의 정치’가 필요하다.사회적 낙오자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하고 실패자를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 확대가 요구된다. 올해는 대통령 임기 3년차에 치러지는 중간평가의 총선을 향한 ‘대통령의 시간’이다.윤석열의 이름으로 총선을 치르고 그에게 책임을 묻는 총선이다.‘윤석열 어젠다(Agenda)’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구체적 계획으로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윤석열 대통령은 ‘노동, 교육 그리고 연금의 3대 개혁과제’를 제시했는데 3대 개혁에서 어떤 성과를 실질적으로 보여주느냐가 핵심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노동조합 부패에 엄격한 법 집행해야 한다.”라는 주장에 55%가 동의했다고 한다.일부는 윤 대통령이 파업사태 등에 원칙적 입장을 견지한 것이 지지율 회복세로 이어졌다고 해석한다.“노조 부패척결”기조가 대통령의 지지층 결집과 지지율 상승이라는 것이다.윤 대통령 지지이유의 대부분이 “결단력”과 “공정과 정의”가 꼽힌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윤석열의 색깔’을 지키는 게 핵심이다.‘계획된 것인지 우발적인지’ 알 수 없지만 새해 초 대통령이 언급한 선거구제 개편의 정치개혁까지 가능하면 ‘윤의 정치’는 보다 확실해진다.당장 여당 내 반발 또는 불안감을 어떻게 관리할지 관심이다.“윤심”의 전당대회를 앞두고 대통령과 여당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최근 “민심에서는 유승민,당심에서는 나경원 선두”의 전당대회 판세다.“자칭 타칭” 친윤 후보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양상이다.나경원 출마여부가 첫 번째 분수령일 텐데 “윤심”은 끝까지 전략적 모호성과 함께해야한다.내년 총선은 대통령의 중간평가이고 적어도 그때까지 여당은 대통령의 권력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대통령의 정치력이 핵심이다.‘공동체 지키기의 정치’도,‘윤석열 어젠다’의 구체적 성과창출도 그리고 ‘윤석열 색깔의 정치’도 그의 정치력에 달렸다.‘정치하는 대통령 윤석열’을 기대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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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05 14:16

측은지심(惻隱之心)

이 엄동설한에 그 고양이는 어디에서 긴 밤을 떨며 견디고 있을까? 문득 아침마다 밥 먹으러 오는 길고양이 걱정이 든다. 어느 날 학당 앞에서 배고픈 표정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어, 먹이를 사서 몇 번 주었을 뿐인데, 이 추위에 얼어 죽지는 않았을까 괜한 걱정이 드는 것은 무슨 마음일까? 나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그 고양이가 오늘밤을 무사히 견뎌내고 아침에 먹이를 먹으러 와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무엇일까? 공자는 그것을 사랑(愛)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면 그가 살기를 바란다(愛之欲其生, 애지욕기생).’ <논어>의 짤막한 이 구절은 인생을 살면서 자주 가슴 떨리게 하는 구절이다. 사랑은 아끼는 마음이다. 아끼는 대상은 잘 살아 있기를 바란다. 내가 타고 다니는 차가 상처 없이 잘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그 차를 아끼기 때문이다. 내 자식, 부모형제가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다. 그런데 고양이는 나와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내가 키우는 고양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에게 다가와 꼬리를 흔들어 대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그 고양이가 이 추운 겨울을 잘 보내고 살아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나와 인과 관계가 있듯 없든, 인간이라면 타자의 불행에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고, 타자의 불행에 대하여 차마 참지 못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유교의 마음 이론이다. 안 보이는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고, 보이는 타자의 불행에 대한 슬픔이 불인지심(不忍之心)이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박노해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면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측은지심과 불인지심이 느껴진다. 측은(惻隱)은 내가 모르는 이(隱)에 대한 슬픔(惻)이다. 불인(不忍)은 내 눈앞에 벌어지는 불행을 참지(忍) 못함(不)이다. 나와 관련 없는 존재의 아픔을 공감하고, 내 눈앞에 불행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 인간은 여전히 아름다운 존재다. 낮에 본 장터의 거지들의 안녕을 걱정하고, 나와 전혀 관련 없는 뒷산에 노루와 토끼의 생사를 염려하는 할머니의 그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할머니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뉴스가 하나 들려왔다. 워싱턴 D.C에서 출발하여 나이아가라 폭포로 가던 한국 여행객들이 버펄로 시 부근에서 폭설을 만나 타고 가던 밴이 눈 속에 고립되었다. 눈 치우는 삽을 빌리러 간 집에서 40대 부부가 한국 여행객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나누고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 부부는 일면식 없는 이방인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들의 음식을 나누고, 안식처를 내주었다. 내 집 앞에서 눈에 고립되어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사람들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는 불인지심과, 그들의 고통을 측은하게 여기는 측은지심을 발휘한 것이다. 나의 선행이 널리 알려져 명예를 얻고자 함도 아니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였다고 훗날의 비판을 면하고자 함도 아니었다. 그저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잘 살아주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마음을 그대로 실천한 것뿐이었다. 몸이 불편하여 대중교통을 편하게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 졸지에 사랑하는 가족을 사고로 잃고 힘들어 하는 가족들, 안전을 위하여 좀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요구하는 노동자들, 가족과 미래를 위하여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이 잘 살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마음이 절실한 시대다. 어린 시절 우리의 배를 토닥이며 들려주시던 측은과 불인의 마음 자장가, 그 자장가 소리가 다시 우리 사회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 해가 저물고 새 해가 오면, 그 전설이 현실이 되고, 그 자장가가 애창가가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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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29 13:50

늦게 찾아온 그리움

자고 일어나니, 간밤에 폭설이 내렸는지 천지간이 하얗다. 키가 큰 전나무 가지마다 쌓인 눈이 소담하다. 전나무 너머 너른 회색빛 하늘 아래 먼 산도 순백이다. 고요가 켜켜이 쌓인 날에는 턴테이블에 즐겨듣는 음반을 찾아 올리자. 오늘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자. 음악이 주는 환희와 위안에 기대어 스스로에게 조금 더 관대해지자. 음악의 무아지경 속에서 마음의 격랑은 잦아들고 가슴은 기쁨으로 벅차오른다. 폭설이 내린 날에도 생명 가진 것들은 몸을 움직여 먹이를 찾느라 바쁘다. 먹고 사는 일은 사람이나 담비와 족제비들, 말과 황소들, 뭇 조류에게도 생명의 숭고한 업이다. 산수유나무 가지에 달린 빨간 열매를 쪼으러 곤줄박이 몇 마리가 날아든다. 곤줄박이가 산수유 열매를 쪼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일하러 나간 어머니를 종일 기다리던 어린 날의 저녁들, 붉은 피에 잠긴 황혼이 사라지고 어둠 내린 마당을 가로질러 오신 어머니가 부엌에서 서둘러 쌀보다 보리가 많은 밥을 안치던 섣달그믐을 떠올린다. 마당엔 차가운 어둠이 차오르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린 하늘엔 별 한 점도 안 보였다. 저녁밥을 기다리다 지친 소년이 깜빡 잠이 들면 어머니는 기어코 흔들어 깨운다. 소년은 잠이 덜 깨어 비몽사몽 중이다. 그런 소년이 한밤중 밥상 앞에서 목구멍으로 넘기던 밥은 꺼끌꺼끌 했다. 가난은 조금도 자랑스럽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남루와 모욕을 견디고 살 만큼 용기를 준 것은 어머니다. 오, 열이 펄펄 끓던 소년의 이마에 차가운 손을 얹던 어머니, 나를 변함없이 사랑해주세요! 계절은 삐걱거리는 거룻배처럼 흘러가고, 당신 가슴 속 숨은 비탄과 환희는 감히 짐작조차 못하던 소년은 늙어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졌어요. 자식을 위해 늦은 저녁밥을 짓고, 구호물자로 받아온 우유를 데우던 어머니는 지금 이 세상에 안 계시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겐 날마다 뜨는 태양이다. 그 태양이 사라진 세상은 텅 비고 어둠은 고집 센 바위처럼 여린 마음을 짓누른다. 나는 행복했던가? 눈 덮인 겨울 마가목 열매는 붉고, 태양계에 속한 행성은 제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돈다. 그런 세상에 사는 동안 나는 아주 불행하지는 않았다. 내 안에서 죽음과 무가 자라난다. 나이 들어 허리가 굽을 때 우리 안의 짐승들은 살이 쪄서 뚱뚱해진다. 그런 불행쯤은 견딜 만했다. 봄엔 모란과 작약 꽃이 피고 여름밤엔 반딧불이가 꽁무니에 푸른 인광을 단 채 군무를 추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자기 몫의 감자도 심지 않고, 대리석으로 마을을 건설하는 업적을 남기지 않아도 우리 낡고 해진 옷을 꿰매고 떨어진 단추를 달아주던 어머니가 살아 계셨으니까. 오후에도 폭설에 덮인 세상은 여전히 고요하다. 돌이켜보면 좀 먹은 옷감 같이 헐벗은 내 영혼을 위로해준 건 어머니, 바다, 음악들이다. 어머니는 안 계시고, 바다는 저 멀리 있다. 그런 오후엔 잔치국수 한 그릇으로 출출한 배를 채우고, 행복에 겨워 가르릉거리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음악을 듣자. 오, 살아 있는 동안 당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라. 어머니가 세상을 등진 뒤라면 편지 몇 줄이라도 쓰자. 그 편지를 부칠 데가 마땅치 않더라도 괜찮다. 어머니가 계신 천국의 주소를 아는 자식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 우리 피난처이자 안식처인 어머니가 이 세상에 안 계신 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들짐승처럼 세상을 헤매던 자식을 안아줄 어머니가 안 계시다면 우리는 탄식을 하고 말겠지. 적막이 늙은 개처럼 짖는 밤에 우리는 흙이라도 한 줌 삼키는 심정으로 어머니를 그리워하겠지. 어머니, 무릎에 앉아 새처럼 종알거리던 소년은 늙었어요. 이게 믿어지시나요? 어머니도 믿지 못하실 거예요. 어머니, 어디에 계시든지 자식들의 때늦은 탄식과 그리움을 기억해주세요. 저희에게 부디 시련과 고난을 견딜 용기를 주시고, 죽음의 휘둘림에 의연하게 맞설 담대함을 갖게 해주세요. 어머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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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22 13:55

김장을 담그며

어릴 때 나는 왠지 김장 담는 모습을 보면 ‘저 사람들은 진정한 어른이다’라고 혼자 속으로 존경심을 가지곤 했다. 초겨울이면 리어카에 실린 배추 더미가 이집 저집 마당으로 들어가고 동네 여기저기서 김장을 담갔다. 산더미같은 배추와 다라이에 담긴 고춧가루 양념, 고무장갑을 끼고 목에 수건을 둘렀지만 추위로 코가 빨개진 여자 어른들. 고른 두께로 곱게 썰린 무채와 비린내가 나는 젓갈, 알싸한 마늘과 생강. 노란 배춧속과 붉은 고춧가루와 푸른 쪽파가 이루는 선명한 색채의 대비. 그것은 정말이지 오감을 자극하는 현장이었다. 부드럽게 절여진 배추 사이사이 김장양념을 채워서 장독에 차곡차곡 쌓으면 1년치 식탁을 책임질 김장이 되었다. 나는 가끔 절인배추에 빨간 양념을 바르는 과정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어린아이의 부드러운 피부에 매운 양념이 닿으면 안된다고, 어른들은 재미삼아 한두번 발라보게 한 후 서둘러 나를 부엌에서 쫓아냈다. 어린 내가 보기에 김장은 고된 노동과 섬세한 기술이 필요한 삶의 현장이었고 사람이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의 성대한 기준 중 하나는 김장을 담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김장을 담근 이웃들이 한번 맛이나 보라며 접시에 담은 김치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김장철이면 삶은 돼지고기와 생굴과 갓 담은 김치가 저녁 상에 자주 올랐다. 나는 삶은 돼지고기를 조금 먹었을 뿐 굴도 날김치도 먹지 않았으므로 내 입장에서는 김장철이면 오히려 먹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만은 즐겼다. 김치와 함께 부침개나 내가 먹을만한 것들이 따라오는 일도 있었고, 집집마다 김치의 맛과 모양이 조금씩 다른 것도 흥미로웠다. 옆집에서 온 김치 갈피에서 조그만 새끼 조기가 통째로 발견된 날 우리 가족들은 한참 웃었다. 우리는 김장김치에 해물을 많이 넣지 않았으므로 그 작은 생선을 김치와 함께 으적으적 씹어 먹어치울 자신은 아무도 없었고 양념을 씻어내고 프라이팬에 굽는 것이 어떻겠냐는 우스개가 저녁식탁을 오갔다. 김치 갈피를 헤치며 여기도! 여기도! 하고 작은 생선들을 찾아냈던 그 저녁은 어린 나에게 특별히 흥겨웠던 날이었다. 자라서 직업을 가지고,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키우고, 거울에서 흰머리와 주름살을 어렵지않게 만나게 된 이후로도 나의 어른 되기는 완성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집안일에 익숙해져갔지만 김장만은 쉽게 도전하지 못했다. 해마다 양가 어른들이 보내주시는 김장김치가 넉넉해 김치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고 김치 소비가 많지도 않았다. 어쩌다 배추나 무가 생기면 배추전 무전을 부쳐 먹었다. 하지만 5년전 어느날 텃밭에 취미를 붙인 친구가 배추 세 통과 무 두 통을 선물로 주자 전을 부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분량인 것이 한눈에도 확실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인터넷을 뒤져 초보용 김장 레시피를 검색했고 시장에서 젓갈과 고춧가루를 사왔다. 밤새도록 비장하게 배추를 절였고, 그렇게 얼떨결에 우리집의 김장이 시작되었다. 덜 절여진 배추가 김치뚜껑을 열고 살아 나왔다느니, 김장이 물러져서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다느니 하는 초보김장괴담은 일어나지 않았다. 첫해부터 맛있는 김치가 담가져서 내가 가장 놀랐다. 겨울이 다 가기도 전에 김장김치를 다 먹어치워서 새로 담그기까지 했다. 실은 첫해 김장이 가장 맛있었고 다음 해부터는 첫해의 기적적인 맛이 재현되지 않았다. 레시피를 바꾸지도 않았는데, 첫해 김장의 비결이 뭐였을까? 아마 고소한 텃밭 배추의 위력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따름이다. 이듬해부터 텃밭 배추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맛있는 김장이 만들어졌다. 자식은 평생 어린애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던 부모님도, 내가 김장을 담기 시작하자 갑자기 나를 동등한 어른으로 존중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해마다 배추 여섯 통으로 김장을 담고 있다. 올해는 배추값이 내 김장 역사상 가장 쌌던 해였다. 김치통 하나를 가득 채우면 끝나는 소량 김장이지만 우리 세 식구 1년 먹기는 충분하고, 이웃들에게 한쪽씩 먹어보라고 돌리는 재미는 충분히 누릴 수 있다. 김치를 주고 김치를 받는 재미있는 거래가 일어나기도 한다. 내 김치도 맛있지만 이웃들의 김치는 더 맛있다. 굴과 갓 담은 김치와 삶은 돼지고기로 이 계절의 정찬을 즐기며, 성냥갑 같은 아파트 살이에도 소소하게 남은 이웃간의 정을 기쁘게 누린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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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15 14:10

여야의 리더십을 주목한다

최근 여야 리더십이 주목받는다. 여권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과 인식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며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의 자격기준과 선출방식 등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제1야당 민주당에서는 이번 주 취임 100일을 넘긴 ‘이재명 대표 사법 리스크’가 현실화되면서 파장이 이어지는 양상이다.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3월 초순이 유력해 보인다.정진석 비대위 임기가 3월 13일까지라는 게 일단 기준 시점이다. 그 전이냐 그 후냐 정도가 쟁점인데 비대위 체제를 가능한 빨리 정상화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맞다. 문제는 누가 차기 당 대표로 적합 하느냐는 것이다.“수도권에서 대처가 가능하며 (상식·공정·정의의 미래) MZ세대에 인기가 있어야 하고 안정적으로 공천을 할 수 있는 대표”여야 한다고 하자, 한 쪽에셔는 “수도권 출신 당 대표론은 지역감정을 부추긴다.”고 비판한다. “거론되는 당권주자 중에서 당 대표를 뽑느냐,좀 늦더라도 새로 사람을 찾아서 하느냐 이런 문제도 정리가 안 됐다.”는 언급은 “한동훈 차출설”에 다시 불을 붙였다.“ 대통령이 그런 말씀을 하셨을 리 없다.”고 반박하고 한 장관 본인이 직접 “중요한 일 많아 장관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한다. “한동훈 차출설”은 결국 대통령에게 부담이다.물론 대통령은 한동훈 논란에 불쾌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윤심이 한동훈에게 있다는 것을 띄워서 국민과 당원의 반응을 보려했다.”는 해석은 지나친 상상력의 산물일 수 있지만,“관저 갔다 와야지 (당 대표에) 낙점이 된다.”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의도하지 않은 메시지를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7:3 당원투표와 여론조사 비율을 9:1로 바꾸자는 주장은 “수양버들 당 대표”를 향한 구체적 실행수단이라고 해석한다. “당 대표는 우리 당원들이 뽑는 것”이라고 하자 “특정후보를 배제하거나 지지하기 위한 룰 변경 오해”를 받는다고 한다. 정당들이 국민세금 받는 만큼 가능한 민심을 반영해야 하고 당원만으로 하려면 정당의 국고보조는 반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국민의힘 차기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2024년 총선승리다.“의회 권력교체 없이는 진정한 정권교체의 완성이라 볼 수 없다.”는 말이 정답이다. 총선승리를 향한 베스트 리더십 조합의 창출이 정진석 비대위의 역할이다. 윤 대통령은 집권당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그래야 짧게는 총선승리를 통한 윤석열 권력 임기후반의 안정과 보장이 가능하고 길게는 보수가치의 연속성과 지속성을 위한 토대확보가 가능하다. 그게 윤 대통령의 역사적 역할이다. “77.77%”의 역대 최고 득표율로 당선된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위상이 위협받고 있다. 대표취임 전인 8월 4주차와 12월 첫 주차의 민주당 지지율을 비교하면 3% 포인트 떨어졌다. 국민의힘 지지율에 큰 변화가 없었고 무당파가 같은 기간에 3% 포인트 늘어난 것을 보면 민주당 지지율 하락이 뚜렷하다. 8월 중순 대통령 취임 100일 이후 지속되고 있는 ‘30% 대통령 지지와 60% 대통령 반대’라는 최근 여론흐름에 따른 민주당 반사이익조차 없었다는 말이다. 특히 핵심 지지층에서의 지지율 하락은 민주당으로서 아쉬운 대목이다.20대와 40대는 지난 100일 동안 민주당 지지율이 9% 포인트 하락했다.30대에서도 7% 포인트 하락했다. 진보층에서도 7% 포인트 지지가 빠진 것을 보면 결국 민주당 지지율 하락은 40대와 진보층의 이탈이 결정적이다. 여야 리더십 논란은 2024 총선을 향한 승부의 시작이다. 국민의힘은 “여의도 출장소”나 “체질적 충성여당”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권력을 선도하는 집권당이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다. 민주당은 “이재명 방탄”과 “분당 가능성”의 우려에서 벗어나 “유능한 대안야당”으로 거듭 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다. 여야의 리더십을 주목하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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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08 14:06

한파(寒波)를 마주하는 방법

한파(寒波)는 글자 그대로 차가운(寒:cold) 파도(波:wave)다. 겨울철 시베리아 고기압의 영향으로 급격하게 기온이 떨어져 갑작스러운 매서운 겨울 추위가 파도처럼 몰려올 때 한파 주의보나 한파 경보를 발령한다. 시골에서 한파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 수도관이 얼지 않게 하는 일이다. 계량기가 동파되지 않도록 이불로 싸고, 여기저기 바람 들어오는 구멍도 막아야 한다. 그런데 막상 영하 10도의 한파를 맞이해 보면 그냥저냥 견딜 만하다. 미리 준비를 철저히 해서인지, 아니면 매서운 추위가 올 것이라 마음의 채비를 단단히 해서인지 생각했던 만큼 차가운 파도가 아니다. 위기는 미리 알고 맞이하면 위기가 아니다. 아무런 준비와 예측 없이 맞이한 위기가 진짜 위기다. 위기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이고, 예상하지 못했을 때 그 피해가 커진다. 아열대 지역인 대만에서 영상 4도에 한파를 이기지 못하고 90명이 숨졌다는 소식도 있고, 인도나 홍콩에서 영상 기온의 추위에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는 뉴스도 들린다. 경험도 없고, 준비도 하지 않으면 작은 파도에도 쉽게 무너진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인생의 여정에도 한파가 있다. 그러나 예측한 대부분의 한파는 잘 견뎌낸다. 건강이나 재정적 어려움이 예측이 되었다면 이미 대비도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부지런히 건강을 체크하고 조심하면 그만큼 다가올 위기의 강도는 낮아진다. 불확실한 경제상황에 대비하여 비용을 줄이고 대비하면 경제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다. 그러나 예측하지 못하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시련의 파도를 아무런 대비 없이 마주하면 쉽게 넘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설마 이 정도에 내가 무너지겠어?’라는 자만과 안도가 파도의 크기를 더욱 키운다. 아무런 준비 없이 호언장담하며 맞이한 시련이기에 순식간에 붕괴를 만나게 된다. ‘조직이 혼란(亂)에 빠지는 것은 안정(治)되었다고 안심할 때 시작된다(亂生於治, 난생어치). 용기(勇)를 자랑하는 사람이 순간 겁쟁이(怯)로 변한다(怯生於勇, 겁생어용). 강(强)하다고 자만하는 사람이 약(弱)자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다(弱生於强, 약생어강).’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孫武)는 군대 조직이 무너지고, 병사들이 겁쟁이가 되어 나약해지는 위기를 맞이하는 이유를 자만이라고 정의한다. 완전하다고 생각했던 조직이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 몰락하는 것은 호언(豪言)과 장담(壯談)이다. 호탕하게 자신의 강함을 떠들어 댔기 때문에 아무런 대비도 없었고, 준비 없이 맞은 펀치 한 방에 손쓸 틈도 없이 무너지는 것이다. 어떤 위기에도 끄떡없다고 자신했던 조직의 몰락을 보면 허탈하기까지 하다. 그토록 강하고 용감했던 사람이 한 순간 겁쟁이가 되고 나약해 지는 것을 보면 강한 게 영원히 강한 것이 아니고, 센 게 영원히 센 것이 아니다. 치란(治亂)과 용겁(勇怯)과 강약(强弱)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잠깐의 방심과 자만 때문에 역전되고 뒤집어진다. 그것이 우주가 운동하는 반(反)의 방식이다. 그토록 강해 보였던 사람이 무너지면 한 순간에 나약한 겁쟁이도 될 수 있고, 그토록 강했던 조직이 한 순간 모래알처럼 부숴 질 수 있고, 그토록 정돈 되었던 조직이 한순간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을 섬뜩하게 한다. 잘 나가던 사람, 안정된 가정, 권력을 쥔 정당, 승승장구하던 기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망하는 것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잘나갈 때 더욱 조심해야 한다. 강할 때 더욱 경계해야 한다. 편안할 때 더욱 두려워해야 한다. 지금의 승리에 도취되면 영원히 승리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강한 자는 무너지고, 안정된 조직도 하루아침에 몰락할 것이다. 차가운 파도, 겨울 한파를 맞이하여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확실하다. 겸손하고, 준비하고, 대비하고,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그래야 한파(寒波)가 평범한 파도, 평파(平波)가 된다.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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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01 13:56

내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선택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 그토록 책에 탐닉한 것은 심오한 뜻이 있어서기보다는 책이 재미있어서였다. 책에서 나오는 교향(交響)의 장엄함 속에서 내 영혼은 더욱 깊고 굳세졌다고 믿는다. 청소년기에는 친구 집의 다락방에서 구한 책들을 읽고 ,전업 작가가 되어서 그 수입으로 생계를 해결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 20대 초에는 시립도서관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책을 읽었다. 내 인생의 선택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은 책과 함께 한 삶이다. 내 행복의 조건은 책, 의자, 햇빛이다. 그것에 더해 사랑하는 사람들, 숲, 바다, 음악, 대나무, 모란, 작약이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없다고 믿었다. 책에는 가보지 못한 세계, 낯선 장소와 풍경들, 미지의 시간들이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지적 모험을 시작한다. 누군가는 책읽기를 '눈이 하는 정신 나간 짓'이라지만 아무리 소박하게 보더라도 책읽기는 항상 그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우리는 책을 통해 세상과 '나'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구하고, 교양과 지식을 갖춘 지성인으로 성장한다. 책을 읽는 사람은 뇌의 시각 피질이 달라지고 문자나 문자 패턴, 단어 등 시각적 이미지를 떠맡는 뇌의 세포망이 채워져서 지적 자극을 효율적으로 신경회로에 전달하는 능력을 갖춘다. 또한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기쁨을 느끼고, 옳고 그름에 대한 윤리적 감각이 발달한다. 한 마디로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한다. 공자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좋아하고 즐기는 것으로 이른 봄 종달새 소리, 모란과 작약 꽃들, 여름 아침 연못의 수련,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벗들과의 담소, 여인의 환한 미소, 동지 팥죽, 흰눈 쌓인 겨울 아침의 햇빛 환한 것들을 꼽는다. 그밖에 고전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는 것, 벗과 바둑을 두는 것을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것들 중에서 으뜸은 책읽기다. 뼈가 약하고 살이 연할 때 나를 단련한 것은 책이고, 인생의 위기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도 책이다. 스스로 낙오자가 되어 시골로 내려와 쓸쓸한 살림을 꾸릴 때 힘과 용기를 준 것도 책이다. 평생을 책을 벗삼아 살았으니, 내가 읽은 책이 곧 내 우주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내게 다정함과 너그러움, 취향의 깨끗함, 미적 감수성, 올곧은 일에 늠름할 수 있는 용기가 손톱만큼이라도 있다면, 그건 다 책에서 얻은 것이다. 내 인생의 큰 위기는 마흔 무렵에 왔다. 구속과 이혼을 겪고 시골로 들어왔다. 벗들은 멀어지고 생계 대책은 막막했다. 종일 저수지 물이나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새벽마다 노자와 장자, 그리고 공자의 책을 읽었다. 그 책들을 끼고 살며 마음의 고요를 되찾았다. '마흔은 인생의 오후, 빛은 따뜻하고 그림자 길어져, 걸음을 느리게 잡아당기면 곧 펼쳐질 금빛 석양을 기대하면서 잠시 쉬어가도 좋은 시간. 아침부터 수고한 마음을 도닥거리고 어루만지면서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지 평온하고 지혜롭게 사유하라. 그런 이에게 오후는 길고 충만하다'.(졸저, '마흔의 서재') 격류로 시작한 내 인생의 강은 어느덧 흐름이 느린 넓은 하류에 닿았다. 세상을 크게 이롭게 한 바는 없지만 삶을 조촐하게 꾸려온 이의 자긍심마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스무 살에 등단해서 쉰 해 동안 시를 쓰고, 방송에 나가 책 얘기를 하며, 매체에 글들을 기고했다. 독자에서 편집자를 거쳐 저자로 살아오며 기쁜 일도 궂은일도 겪고, 여러 풍파를 견디고 넘어왔다. 그동안 책이 준 혜택은 일일이 꼽을 수 없을 만큼 무량하다. 책읽기 덕분에 내가 누구인지를 더 잘 인식하고, 영혼은 지식들과 융합하며 나는 사색하는 인간으로 성장했다. 나는 봉급과 수고에 매이지 않은 채 자유롭게 읽고 쓰며 밥벌이를 한 삶에 만족한다. 나는 '책읽는 인간'으로 일관하며 살아온 것을 기꺼워한다. 그걸 내 자존의 고갱이로 여기고, 그걸 오롯이 보람과 기쁨으로 여긴 것은 그게 바로 내가 갈망한 단 하나의 삶인 까닭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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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24 14:21

일상의 붕괴

“한낮에 아이에게서 전화가 온거예요. 점심시간이길래, 뭘 놓고 갔나 했어요.” 우리는 함께 커피를 마시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에겐 이런 종류의 일화들이 아주 많았는데, 아무리 들어도 새로이 귀를 기울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엄마, 하더니 우는 거예요. 난 너무 놀랐어요. 왜? 왜? 무슨 일이야? 하고 물으면서, 혹시 피싱인가 하고 의심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어설픈 구석이 없는 거예요. 말투도 그렇고, 분명히 oo이 목소리였어요.” 결국 그것은 흔하다면 흔한 피싱 이야기였다. 그녀는 놀랐지만 끝까지 주의력을 잃지 않았고, 아이가 학교에 안전하게 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좋은 마무리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이전과 다른 한가지 디테일이 더해져 우리를 좀 더 무섭게 했다. 듣는 이가 이미 피싱을 짐작하고 유심히 듣는데도 도무지 의심할 수 없이 똑같았던 ‘아이의 말투와 목소리’였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버전의 많은 ‘철렁한 보이스피싱 이야기’들을 들어왔지만, 듣는 사람이 너무 놀라서 지레 정신줄을 놓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이것이 사기임을 짐작 가능한 힌트들이 있었다. 협박하는 사람이 특정 지역의 말투를 쓰거나 주변 잡음이 몹시 심할 때가 많았고, 무엇보다도, 목소리가 숨길 수 없이 달랐다. 울거나 비명을 지르는 식으로 듣는 사람을 놀래켜서 목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숨기려 애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힌트를 찾을 수 없었다. 아이가 울음이 섞이기는 했어도 또박또박 말했고 그 목소리는 엄마가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 들어도 분명 내 아이의 목소리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전에 들었던 ‘목소리’에 관한 또다른 일화가 떠올랐다. “나 김정은한테서 축하 전화 받았어요. 들어보실래요?” 한 지인이 자랑스럽게 넘겨준 전화기에서는 북한의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가 그의 유투브 채널 개업을 인민의 온마음을 다해 축하한다며 유투브 채널의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고 있었다. 의심할 길 없이 걸걸한 총비서의 목소리였다. 물론, 동해에 미사일이 오가는 판에 그가 한국 유투버에게 축하전화를 할 리 없다. AI의 작품이라고 했다. AI에게 특정인의 목소리를 오래 들려주면 그의 말투와 목소리를 똑같이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사례를 엮으면 피싱단은 이제 AI를 통한 음성 재현 기술을 범죄에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내 손안의 발칙한 물건은 내 개인적인 통화를 귀기울여 듣고, 녹음하고, 그 정보를 유출해 AI가 내 목소리와 말투를 똑같이 흉내낼 수 있도록 도왔다는 뜻이 아닌가? 우리는 피싱보다도 휴대폰에게 더욱 분노했다. 우리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새어나가 범죄집단의 손에 들어간 것인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 통신사와 휴대폰 제조사에는 얼만큼의 책임이 있을 것인가? 그것은 무능일까 악의일까? 공원에서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먹던 새 떼가 무리지어 인간을 공격하고, 아이를 돌보러 온 순한 얼굴의 보모가 내 가족을 살해하려 한다는 식의 뻔한 공포 서사에 우리가 질리지 않고 몸서리를 치는 이유는 평범한 외양을 가진 어떤 사악함이 우리의 일상에 집요하게 스며들어 마침내 균열을 내는 순간을 징그럽도록 치밀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리는 소소한 일상의 배신, 일상의 붕괴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진정하고도 유일한 공포다. 불평 많은 배우자, 속없는 자식들, 직원복지가 형편없는 우리의 직장은 사실 우리가 가진 전부다. 그 보잘 것 없는 것들에 실금이라도 가는 순간 그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기둥이었는지 비로소 깨닫고, 그것이 손상된 이후 우리 인생은 이전과 결코 같을 수 없음을 절감한다. 소중한 젊은이들이 너무나 많이 다치고 생명을 잃은 그 사고 이후 마음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디 앞으로는 더 이상 이런 비극이 없도록, 우리 사회가 무언가 나은 방법들을 배우길 바랄 뿐이다. 피싱 전화 한통으로도 쉽사리 흔들리는 우리 연약한 일상의 안위를 생각할 때 희생자와 부상자, 유족과 가족들의 고통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온 마음을 다한 위로와 기도만을 드릴 수 있을 뿐이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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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17 13:23

민주주의가 위험하다

이태원 이후 조사는 의외(?)다.이전과 변화가 눈에 띠지 않는다.조사시점을 기준으로 이태원 이후 첫 조사는 10월의 마지막 날부터 11월 2일까지의 전국지표조사(NBS)였다.윤석열 대통령국정운영 평가를 보면 ‘긍정평가 31% 부정평가 60%’로 같은 조사의 2주 전과 같았다.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신뢰도도 마찬가지였다.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신뢰한다 35% 신뢰하지 않는다 60%”로 직전조사와 비교하면 신뢰하지 않는다는 2% 포인트 상승하고 신뢰한다가 1% 포인트 하락했다. 11월 1일~3일 조사의 갤럽도 마찬가지다.‘긍정평가 29% 부정평가 63%’로 전주 대비 1% 포인트씩 각각 오르고 내렸다.특이한 점은 긍정평가든 부정평가든 양쪽 모두 이태원 때문이다.한쪽은 ‘사고수습을 잘해서’ 다른 한쪽은 ‘대처가 미흡해서’다.세월호 직후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2주 만에 59%에서 48%로 하락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이태원 이후 비슷한 시기 다른 방식의 조사들도 결과는 유사하다.변화가 있더라도 1% 포인트 내외였다.대체로 ‘20% 후반 또는 30% 초반의 긍정평가와 60% 초중반의 부정평가’다.대통령 국정수행 평가의 일간지표로 보면 11월 첫 주 초반에는 추모 분위기로 지지율 변동이 크지 않았지만 주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사고”에서 “참사”로 “사망자”에서 “희생자”로 바뀌었고 결국 대통령 지지율은 매일 하락의 흐름이었다고 한다. ‘유권자 10명 중 3명은 윤 대통령을 지지하고 국민 10명 중 6명은 반대하는 여론’은 최근 쟁점이 되었던 몇몇 사안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분포와도 일치한다.‘해외순방 중 비속어 논란’에 대해 “외교적 참사(64%) vs. 언론왜곡(28%),‘MBC 보도에 대한 대통령실의 대응’에 대해 “과도한 대응(59%) vs. 적절한 대응(30%)” 그리고 ‘대통령 사과 필요성’에 대해 “동의(70%) vs. 반대(27%)”등이 대표적 사례다. 결국 대통령 취임 100일 기준으로 보면 대통령 지지율은 ‘30% vs. 60%’의 흐름이다.11월 6일~8일 조사된 방송 3사의 조사도 대통령 국정수행 ‘긍정평가는 29%~33% 부정평가는 60%~65%’였다.향후 책임소재를 둘러싼 여야공방이 여론의 향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정당 지지도 역시 이태원 이전의 조사들과 비슷하다.NBS의 11월 첫 주 정당 지지도를 보면 ‘국민의힘 33% 민주당 31%’로 양당 모두 1~2 % 포인트 하락했다.갤럽조사도 ‘국민의힘 32% 민주당 34%’였다.‘30% 후반 또는 40% 초반의 민주당과 30% 후반의 국민의힘 지지율’로 양당 모두 “찐” 지지층에 제한되어 있다는 뜻이다. 국가애도기간 마지막 날 “윤석열 정부퇴진”과 “정치적 이용 반대”를 외치는 집회가 동시에 개최되는 모습은 오늘 대한민국의 정치적 양극화를 상징한다.핵심 지지층만을 바라보는 강한 정파성의 정당정치 또한 그 밑바닥에 자리한다. 정치적 양극화는 강한 정파성과 함께 ‘민주주의 퇴행’을 가져오는 환경적 조건으로 알려져 있다.민주주의의 퇴행은 ‘민주주의의 특성이 불연속적이고 점진적으로 잠식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민주주의의 전복과 달리 상대적으로 장기간 진행되는 특성을 갖는다.여기에 민생과 경제위기가 악화되면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된다. 정파성과 양극화는 정당과 정치인의 정치 엘리트는 물론 시민에게 동시에 적용되며 상호작용하게 된다.정파성은 일종의 ‘사회적 정체성’으로 특정정당에 대한 강한 애착과 일체감을 갖는 정치 엘리트와 시민들이 이슈와 현안 그리고 정책 등을 이해하는 시각을 제공하는 ‘정보의 지름길’이다.정당 리더십 또한 특정 이익집단이나 강성 지지층에 포획되어 있다면 정치적 양극화는 더욱 악화된다. 강한 정파성과 정치적 양극화는 ‘정체성 정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이 때 정치는 우리가 아닌 그들을 무력화 하거나 제거하려는 시도나 노력을 정당화하고 정치는 결국 ‘선과 악 대결적 구도’로 바뀐다.한국의 민주주의가 위험하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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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10 14:11

슬픔(哀)이 상처(傷)로 남지 않기를

하늘은 인간에게 일곱 가지 다양한 감정을 주었다. 기쁨, 분노, 슬픔, 공포, 사랑, 증오, 욕망이다. 이런 인간이 겪어야 하는 다양한 감정을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 칠정(七情)이라고 한다. 칠정은 인간의 네 가지 본성 사단(四端)과 함께 인간의 마음을 구성하는 기본 골격이다. 문제는 일곱 가지 감정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인간의 마음을 교대로 흔들어댄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기쁨에 들떠 춤추며 놀다가도 화내며 슬픔에 젖어 비탄에 젖기도 한다. 공포와 두려움에 떨다가도 사랑과 연민에 어느덧 언제 공포가 있었냐는 듯 잊어버리기도 한다. 인간은 왜 이렇게 다양한 감정의 기복으로 일상을 맞이해야 하는가? 이런 감정에서 벗어나 평정심을 유지하며 평온한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일까? 감정의 조절과 평정은 성찰의 중요한 주제이며, 죽을 때까지 나의 인생 전반에 걸쳐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중용>에서 감정의 조절을 ‘중화(中和)’라고 한다. 중화는 인간의 감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절하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면 삶의 중심축이 무너질 수 있기에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는 감정의 조절을 통해 인간의 생명력을 더욱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분노를 참으면 속으로 병이 들고, 분노가 지나치면 화로 번진다. 기쁨을 억누르면 답답해지고, 기쁨이 넘치면 음란함이 된다. 공포는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 하지만, 조절만 잘하면 긴장감으로 인간의 잠자고 있는 세포에 불을 켜게 한다. 욕망은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고, 탐욕으로 넘치면 인간의 삶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인간의 감정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길들여야 할 대상이다.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는 마음의 감정을 잘 조정하는 것을 ‘조심(操心)’이라고 한다. 인간의 감정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 마음(心)을 잘 조종(操)할 수만 있으면 더 높은 단계의 삶을 살 수 있다. 마음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뛰게 만드는 것을 ‘방심(放心)’이라고 한다. 마음(心)을 놓쳤다(放)는 뜻이다. 중화(中和)의 중(中)은 중심을 유지한다는 뜻이며, 화(和)는 감정이 적시(適時)에 표출되어 상황에 맞는다는 뜻이다. 슬플 때 울 줄 알고, 기쁠 때 춤출 줄 아는 것이 ‘중화’다. 중요한 것은 슬픔이 지나쳐서 상처가 되면 안 되고, 기쁨이 지나쳐서 음란함으로 변하면 안 되는 것이다. 덕수궁 중화전(中和殿)은 한 나라의 통치자가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고 지어진 이름이다. 지도자가 감정 조절에 실패하면 국가가 혼란에 빠지고, 국민이 도탄에 처한다는 엄중한 경고를 담고 있다. 이태원 참사에 지금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이 널뛰고 있다. 슬픔이 넘쳐 분노가 되기도 하고, 분노와 분노가 만나 갈등과 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해결책은 없고 공방만 있고, 성찰은 없고 떠넘기기만 있다. 슬픔은 없고 상처로 가득하다. 지켜주는 어른은 없었고, 젊은 영혼들은 맥없이 쓰러졌다. 대한민국은 또다시 슬픔의 감정과 마주하고 있다. 많은 젊은 영혼의 꽃들이 채 피우지도 못하고 골목길에서 쓰러져 갔다. 꽃이 지는 것은 환경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당국자가 좀 더 신경 쓰고 살피고 주의했더라면 꽃은 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는 국민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나라 안이든, 나라 밖이든, 그 어느 곳, 어느 시간에서라도 국민의 안녕과 생존을 위해 모든 수단과 노력을 다해야 한다. 이번 참사에 국민 모두 애도하며 슬퍼하고 있다. 그러나 이 슬픔이 상처로 남지 않아야 한다. 이런 일이 또 반복된다면 슬픔은 상처가 될 것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오로지 희생 당사자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이 역시 상처로 남을 것이다. 슬픔이 상처로 남아서는 안 된다(哀而不傷). 슬픔을 통해 정화되어 더 높은 수준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들의 희생이 의미를 지닐 것이다.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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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03 14:00

키오스크 앞에서

몇 년 전 대학 은사님의 칠순 파티가 있다고 해서, 비록 은사님이 애써 가르쳐주신 전공 공부는 진작에 포기해버리고 딴길로 새어버린 불충 제자였지만, 오랜만에 모임에 참가했다. 수십년 만에 다시 만나는 동문 선후배들은 무척 반가웠다. 아침나절 다투었다가 저녁나절 히히덕거리던 철딱서니들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그 옛날 나를 가르치셨던 교수님보다도 더 나이가 든, 중견을 넘어 원로를 향해 달려가는 과학자들이 되어있었다. 왜 이렇게 나이가 들었냐는 소리는 차마 못하고 서로 놀라움이 담긴 헛웃음만 연발했는데, 더욱 놀라웠던 건 은사님의 변화였다. 은사님은 현대 의학기술의 발달로 30년 전보다 오히려 더 젊어지셨는데, 함께 늙어가는 처지가 된 제자들에게 한가지 비밀을 고백하셨다. “햄버거를 먹덜 모대야. 망할놈의 키오스크 때문에.” 우리 실험 데이터의 허점을 매섭게 추궁하시다가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능숙하게 폭소를 자아내시던 그분의 유머감각이 여전했다. 우리는 배꼽을 쥐고 웃으면서도 세월의 무서움에 고개를 내저었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능숙하게 구사하고 그 누구보다 빛나는 연구 업적을 쌓았으며 20대 유학시절부터 미국 본토 햄버거 문화를 즐겨온 은사님이 그깟 자동주문 키오스크의 빛나는 화면 앞에서 얼어붙어 어쩔 줄 모르는 어르신 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때로부터 다시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모 대학의 문학 기행에 참가해 멋진 하루를 보냈다. 문학 명소를 찾아 젊은 친구들과 함께 걷고, 이야기하고, 멋진 사진들을 찍었다. 말할 것도 없이, sns로 단련된 젊은이들의 사진 실력은 놀라웠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장면을 찍었는데 내 사진과 그들의 사진은 감성과 시야의 차원이 달랐다. 칙칙한 내 사진 말고 화사한 그들의 사진을 갖고 싶어진 나는 그들에게 연락처를 알려주고 사진을 받을 생각을 하며 머리를 복잡하게 굴렸는데, 그들에게는 그렇게 복잡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 “작가님, 이리 오세요.” 내 휴대폰에 그들의 휴대폰을 가까이 하고 무언가 가뿐한 보내기를 누르니 연락처를 몰라도 금세 사진이 도착했다. 실은 그런 현대적인 보내기 수단을 평소 자주 사용하지 않아서 나는 쩔쩔맸는데, 젊은 손가락들이 내 휴대폰 설정 화면을 몇 번 터치하니까 수십 장의 사진이 고스란히 내 폰에 도착했다. 사진을 받는 동안 나는, 휴대폰을 어색하게 내밀고 황망한 표정으로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대한민국 표준 어르신의 포즈를 성실하게 완수했다. 그때 내 얼굴은 키오스크 앞 은사님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일화들을 이제 나는 수십 개나 댈 수 있다. 처음에는 인기 있는 티케팅에 도전할 때 번개같이 빠른 딸의 손을 빌리는 것에서 시작했으나 점차 나는 휴대폰 자체의 기능과 각종 앱의 활용성을 묻기 위해 젊은이들을 필요로하게 되었다. 심지어 매일 일상적으로 쓴다고 생각하는 메신저 앱에도 내가 상상하지 못한 수십가지 기능들이 숨어있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메신저 앱의 검색 기능을 안다면 괜찮은 축에 속한다. 우리는 일상적인 안부와 사진, 동영상, 웃긴 짤 정도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크게 만족하다가, 어느 날 작심하고 ‘요새 문물’에 익숙한 한 친구에게 강의 삼아 이런저런 기능들을 배웠다. “난 이정도는 잘 할 수 있지. 젊은 애들이 매일 가르쳐주거든.” 중견 교수인 그는 젊은 제자들에게 배운 것들을 우리에게 전수해주었다. 우리는 안경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첨단기술을 열심히 배웠다. 세월은 인간에게 겸허해질 것을 요구한다. 이제는 나이 든 사람이 젊은이에게 숨가쁘게 배워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배울 생각은 않고 여전히 호통치고 가르치려 들면 우리만 손해다. 사자성어를 모르는 2030보다 손안의 매일 쓰는 기계를 망연하게 쳐다보는 우리가 더 큰일이다. 젊은 우리 스승님들은 어쩌면 학이시습지면 불역낙호아 라는 경구를 모르실 텐데, 그렇다고 쯧쯧거리며 핀잔을 주어선 안된다. 더 이상 2030이 아닌 우리는 먼저 그분들께 다가가고, 감사히 배우고, 배운 것을 기쁘게 때때로 연습해야 한다. 그것이 평생 배워야하는 이 시대의 잘 살아가는 방법이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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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20 13:39

[금요칼럼] 윤 대통령의 몫이다 Ⅱ

취임 23주차의 윤석열 대통령은 여론의 분기점에 있다. 대통령 지지율은 대체로 ‘30%대 긍정평가와 60%대 부정평가의 흐름’이다.당분간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관심은 대통령이 상승 동력의 계기를 확보하느냐 아니면 ‘날개 없는 추락’을 계속하느냐로 모아진다. 지금 윤 대통령은 ‘신뢰의 위기 끝자락’에 있다.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의 문 앞’에 사람들이 충분히 모여 있고 그 가까이에도 사람들이 모이는 중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취임부터 한 달 정도는 대통령의 국정운영 신뢰도가 50%를 넘었지만 6월말 7월초 역전되어 대통령 국정운영의 불신이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대통령 신뢰의 위기’가 임계점에 다가서고 있다는 뜻이다. 7월초 “52%(불신) vs. 42%(신뢰)”였다가 10월 초에는 “63%(불신) vs. 34%(신뢰)”다. 이 조사의 대통령 국정운영 신뢰도는 8월 이후 계속 하락세다. 대부분의 조사에서 나타나는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로 “국민과의 소통을 잘해서”가 줄어드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취임이후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은 축소 지향적이다. 5월 10일 취임이후 최근까지 21주 동안 실시된 여론조사는 모두 145개.ARS가 104개로 대부분이고 면접조사는 41개다.145개 전체조사에서 나타난 긍정적인 대통령의 국정평가는 ‘평균 37% 부정평가는 평균 57%’ ARS 조사가 면접조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정평가는 낮고 긍정평가는 높은 경향을 보이곤 한다.   취임이후 21주 동안 대통령 지지율은 계속해서 하락세다.대통령 긍정평가는 취임 첫 주부터 5주차까지 주별 평균 50%이상을 기록하는데 최고점은 6월 1일 지방선거 직전 주의 평균 54.6%였다.대통령의 부정평가도 36.6%로 이때가 가장 낮다.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은 6주차부터 50% 아래로 떨어지는데 이후에는 주별 평균이 40%대 30%대로 하락한다.윤 대통령 지지율은 13주차에 이르러 결국 주별 평균 28.9%를 기록하는데 같은 시기 대통령 국정평가의 부정적 의견은 주별 단위로는 최고인 평균 67.5%에 이른다. 대통령 지지율은 최근까지 주간단위로 평균 29.3%, 30.4%, 32.5%, 31.1%, 32.8%, 34.8%, 32.8% 그리고 31.4%로 이어진다.취임 10주차 이후 최근까지 대통령 국정평가의 부정적 의견은 주간단위 평균으로 최고 67.5%(13주차) 최저 61.8%(18주차)를 기록한다. 유권자 10명 중 3명은 윤 대통령을 지지하고 국민 10명 중 6명은 반대하는 여론은 최근 몇몇 사안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분포와 거의 일치한다. ‘해외순방 중 비속어 논란’에 대해 “외교적 참사(64%) vs. 언론왜곡(28%), ‘MBC 보도에 대한 대통령실의 대응’에 대해 “과도한 대응(59%) vs. 적절한 대응(30%)” 그리고 ‘대통령 사과 필요성’에 대해 “동의(70%) vs. 반대(27%)”가 대표적 사례다.   윤석열 대선 승리연합의 해체다. 윤석열 중도(보수)지지층의 이탈이다. ‘30% 초중반의 보수와 중도 그리고 20% 후반의 진보’가 최근 확인된 우리나라 유권자의 이념성향 분포인데 지금 대통령의 지지율은 보수층으로 국한 되어있다. 대통령 지지율이 대체로 여당 지지율보다 상대적으로 낮게 나오는 경향도 윤 대통령 국정운영의 지지기반이 국민의힘 지지층조차 지키지 못한다는 뜻이다. 최근 조사들은 역대급 규모의 무당파 특히 2030세대 무당파의 증가를 확인한다.   구성원의 믿음을 잃고 있다는 것은 더 큰 위기의 입구에 불과하다. ‘능력의 위기’다.‘무능의 문(門)’ 안으로 들어서면 끝장이다.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비판적인 이유로 “경험과 능력이 부족해서”가 계속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능력의 위기징조’다.   권력의 평가는 구성원의 ‘묵인과 공감 그리고 동의와 지지’가 있느냐 없느냐 또는 그 정도로 이루어진다. 득표율과 지지율은 동의와 지지를 수치로 표현한다. 긍정적 권력평가의 최소한은 묵인이지만 최대치는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다.공동체 구성원의 믿음과 함께 하는 권력이 성공하는 권력의 출발점이다. 대통령이 판을 바꿀 때다. 뚝심과 배짱 그리고 자기확신의 대통령 강점이 위기돌파의 개혁과 포용의 정치력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윤 대통령의 몫이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 전공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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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1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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