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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주보기] 명품도시는 지금 이곳에서부터 - 전성환

요즘 들어 '명품도시'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인천세계도시축전에서도 '미래를 여는 명품도시'를 주제로 담론이 진행되고 있고, 새만금을 '세계가 부러워할 명품복합도시'로 개발한다는 정부 계획안이 발표되기도 했다.도시 앞에 명품이 붙으니, 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도시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명품도시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보았을 때 아름답고, 살았을 때 편안하고, 그 안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에게서 기품이 느껴진다면 그것이 바로 명품도시가 아닐까. 파리 사람들은 '불편한 것은 참아도 아름답지 않은 것은 참지 못 한다'고 한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명품도시 파리는 그러한 시민의식의 결과물이다.우리는 어떨까? 우리는 거꾸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참아도 불편한 것은 참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건물이 세워지고 있는 서부 신시가지를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곳도 한때는 '명품도시'의 기치를 내걸고 출발한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명품'은 사라지고 '원룸'만 남았다. 품격이 느껴지고 살기 좋은 명품 신시가지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곳이 이렇게 됐다면, 분명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물론 그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 건축주 입장에서는 똑같은 돈을 투자해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건물과 건축방식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건축은 오로지 이윤획득의 수단일 뿐이다. 행정 입장에서는 사유재산권을 침해할 수 없으니 그저 그들의 안목과 자질에 호소할 뿐이다. 그러나 돈 앞에서 건축의 공공성이나 미적 측면에 대한 고려는 설자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재질, 똑같은 구조, 똑같은 층수의 거대한 원룸촌을 보고 살아야 한다. 이것은 공공의 시각적 측면에서는 거의 폭력에 가깝다.그렇다고 좋은 건축이 화려함과 웅장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스웨덴 말뫼나 함마르비 같은 도시의 주거지구에서는 고층 빌딩을 찾아보기 힘들다. 단아한 단층 아파트에 물과 숲과 정원이 어우러져 더없이 안락한 분위기를 풍긴다. 수십 명의 건축가가 주거지구 조성에 참여했지만 행정기관에서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층수, 색깔, 전체적인 톤만 고르게 유지하되, 각각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했다. 그래서 멋진 명품 주거지구가 탄생했다.우리는 왜 그렇게 할 수 없을까? 도시 한복판에 건축을 하면서도 공공성을 고민하는 건축가는 없고 눈앞의 경제적 이득만 따지는 건축주만 있기 때문이다. 건축가 승효상 씨는 "어떤 작업이든 공간적 개념을 품고 있다면 반드시 건축가가 함께 작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면 건축은 지어지는 순간 공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새만금만 명품도시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을 하루하루 명품도시로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좋은 건축은 좋은 삶을 만들지만 나쁜 건축은 반드시 나쁜 삶을 만든다고 한다. 건물 하나를 짓더라도, 작은 장소 한곳을 기획하더라도 그 안에는 반드시 삶을 사유하는 건축가가 있고 미래를 내다보는 철학이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전성환(전북도청 홍보기획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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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8.11 23:02

[문화마주보기] "통섭은 안돼, 한예종은 하던 거나 하라?" - 김윤태

현대 무용은 인습과 형식에서 벗어나 해방된 몸으로 춤을 춘다.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한다. 현대무용의 대표적인 춤꾼 세인트 데니스는 동양의 정신적인 요소가 담긴 춤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특히 동양의 무녀의 춤에서 영감을 얻었다. 무녀가 추는 춤에서 자신이 표현하고자 했던 영혼의 소리를 발견했다. 한자의 '무'는 양 소매를 자유롭게 늘어뜨리고 기교와 형식을 초월하여 신명나게 춤을 추는 무녀를 표현하고 있다. 데니스는 자신도 모른 채 서양 춤꾼으로서는 최초로 무녀의 모양을 본떠 만든 한자 '무(巫)'가 품고 있는 비밀을 푼 셈이다.이사도라 던컨에 의해 촉발된 유럽 현대무용은 루돌프 폰 라반에 의해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무용수인 라반은 탁월한 이론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무용 이론에만 천착하지 않고 다양한 학문과의 학제간 연구를 중시했다. 그는 무용에 운동학의 움직임 이론과 인문지리학의 공간이론 뿐 아니라 철학, 수학, 기하학, 해부학 이론을 접목시켰다. 음악을 활용하여 무대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대학에서 학제간 통섭 교육은 이제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대학에서도 학과가 없어지고 학부제가 시행되고 있는 것도 그 영향이다. 어떤 대학에서는 심지어 인문학부와 자연학부도 구분하지 않는 자유전공학부가 생긴다는 고무적인 소리도 들린다.현대무용의 대가 데니스가 자신의 춤을 통해 영혼의 소리를 표현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의 춤만을 고집하지 않고 과감하게 동양의 무녀의 춤을 응용한 결과이다. 라반이 유럽 현대무용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도 바로 무용을 초월하여 학제간 통섭을 시도했기 때문이다.소위 '한예종 사태'이후 통섭이 세간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한예종의 통섭교육은 예술 장르간 그리고 예술과 과학기술간의 다양한 소통가능성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한예종에서 통섭교육을 주도했던 심광현 교수에 따르면 통섭은 어원상 "함께 도약하기"라는 의미이여 "수많은 지식들이 양팔을 벌려 함께 도약하면 다양한 유형의 지식들 간의 결합방식이 나타날 수 있다. (...) 이런 유형의 도약의 귀결은 미리 결정될 수 없지만, 반복되다 보면 마치 여러 실들이 꼬이듯 여러 지식들이 중첩적으로 연결되어 수많은 지식들 간에 '가족적 유사성'이 형성될 수 있다." 또 "이렇게 얻어지는 가족적 유사성은 결국 전체 지식들 사이의 소통을 강화하고 확산하게 될 것"이다.정부는 틈만 나면 소통을 이야기한다. 촛불집회와 같이 무슨 일이 터졌다하면 소통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마치 정부 현안이 소통인 것처럼 들린다. 그걸 감안하면 소통을 지향하는 통섭교육을 기치로 내걸었던 한예종은 정부의 시책을 앞장서서 실행한 셈이다. 상을 주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한예종에 대해 "하던 일이나 하라"며 통섭교육 중단을 지시했다고 한다. 정부와 관료들의 생각이 얼마나 엇박자가 나고 모순을 이루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김윤태(우석대교수유아특수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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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8.04 23:02

[문화마주보기] 일본의 마츠리(祭)와 지역사회 - 임경택

2주 전에 일본의 마츠리(祭)를 보고 왔다. 나리타 공항에서 가까운 사와라라는 곳이었다. 이 곳은 일본의 도쿠가와 시대에 토네가와라는 큰 강의 유로를 변경하면서 생겨난 상업도시로 내가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하기 위한 필드워크를 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그 당시부터 지역주민들만의 마츠리가 만들어져 지금까지 시행해 오고 있다. 십 수 년에 걸쳐 관찰하고 조사해 왔지만, 언제나 일본 지역사회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마츠리, 한국인이 일본문화를 생각할 때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의 하나이다. 일본관광공사의 달력을 보면, 일본열도 어디에선가 하루도 빠짐없이 마츠리가 열리고 있다. 그런데 얼핏 보면 단순한 축제처럼 보이지만, 실은 일본인의 삶을 질서 짓고, 그 안에 작은 해방공간을 만들어 주는 중요한 기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일본의 지역사회와 그 질서를 이해하는 데 마츠리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임을 알아야 한다.일본의 마츠리는 크게 도시와 농촌의 마츠리로 나눌 수도 있는데, 농촌에서는 농사의 주기에 맞추어 신에게 제사를 지내왔고, 도시지역에서는 주로 여름철에 역병이 도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실시해 왔다. 역신보다 더 강한 신을 모심으로써 그 역병을 제압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며, 거기에 축제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이다. 소박한 믿음에서 출발한 마츠리는 관의 도움없이 철저하게 민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다. 그 안에서 그들은 지역 사회 내에서의 자기 위치를 확인하고, 내부의 역할분담을 통하여 자치의 경험을 익히고 축적시켜 왔던 것이다. 일본어로 정(政)과 제(祭)를 모두 '마츠리'라고 읽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대부분이 비슷한 형태로 진행되지만) 역병을 막기 위해 열리는 사와라의 경우 그 안에 초나이라는 지역집단이자 생활집단이 마츠리를 수행하는 실행단위가 된다. 각 초나이는 마츠리에 필요한 경비를 모두 스스로 충당하며, 그 해의 당번이 된 초나이가 전체 운영경비를 좀 더 부담한다. 각 초나이의 내부는 연령집단으로 구분되어 있고, 각자가 맡은 역할이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다. 이러한 각 단계를 경험해 가면서 사와라의 주민들은 '사와라인'이 되어 가는 것이다. 물론 전체 초나이들의 관계를 조정하는 것은 그 해의 당번 초나이이다. '내부완결체제'와 '협동 속의 경쟁'을 통해 그들은 지역사회의 자치를 경험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마츠리가 그들에게는 삶이요, 일상이 되는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를 '마츠리 바보'라고 부르고, 사와라를 떠나고 싶기도 하지만 마츠리 때문에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어쩌면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도, 바로 그것이 그들의 삶 안에 용해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현재 한국의 지역사회에서도 많은 축제들이 경쟁하듯이 열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지속성을 가지고 지역주민들의 삶 속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마츠리와 축제의 간극 속에 그 답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임경택(전북대 일문과 교수)▲ 임경택 교수는 일 동경대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했다. 동경대 연구원,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2002년부터 전북대 일어일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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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7.28 23:02

[문화마주보기] 꿈은 이루어진다 - 이명훈

10년 넘게 키워오고 있는 꿈이 있다.커다란 당산나무 옆에는 아기자기한 솟대가 세워지고, 정갈한 마을 공동샘과 시원한 모정이 자리를 하면 주변으로는 소박하지만 정취 있는 흙집과 한옥들이 들어선다. 그곳에는 오래된 지인들이 산다. 글을 쓰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 음악을 하는 사람, 조각을 하는 사람, 굿을 치는 사람 그리고 오래도록 황토빛 흙을 일궈온 사람들, 그들과 함께 마을을 이루고 싶은 꿈이다. 일상의 생활에서 항상 굿이 함께 하는 굿치는 마을을 이루어 같이 사는 꿈이다.이러한 꿈을 꾸게 된 것은 어르신들께 20여년간 굿을 배우고 후배들에게 굿을 가르키면서 어떻게 하면 마을에서 현장에서 사라지고 있는 굿을 제대로 이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생긴 것이었다. 마을에서 항상 굿과 함께 했던 당산제, 줄감기, 천제, 풍어제등이 굿치는 사람이 없어 점점 사라지고 있거나 남아있어도 형식적으로만 남아있음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수 천년동안 이어져온 우리나라 고유의 민속 문화가 각 마을에서 굿을 연희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사라지고 있고 있는 현실이라니. 무형의 문화유산이 보존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연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사람을 통해서 전해져야 하기 때문에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교육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교육이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현실도 아니거니와 전수관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문제이다. 그나마도 다행이기는 하지만 말이다.요즘 굿을 교육 받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젊은 학생들이다. 이들은 굿의 근간을 이루었던 농촌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교육을 통해서 전통의 문화예술을 배우고 익히고 각자 학교에 돌아가서 발표회라는 형식으로 굿을 치고 있다. 판굿 위주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현실 속에서 판굿이 굿의 전부인양 인식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어떻게 교육을 해야 하는가 고민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들에게 굿을 치는 일상적인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어 전수관 마당에 당산나무도 옮겨 심고 당산에 줄을 감고, 솟대와 장승도 함께 매년 세우고 있다. 이후에는 이곳에 집도 여러 채 짓고 공동샘도 만들고 하여 굿치는 마을을 만들고 싶다. 이미 농촌에서 굿을 치기 위한 기본이 사라져버린 오늘날 새로운 개념의 마을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굿치는 마을은 전국 곳곳에 있어야 한다. 지역마다 생활풍습과 억양이 다르듯이 그 지역의 풍토에 어울리는 마을과 굿이 살아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만이 그 옛날 굿으로 화합하고 자존심을 가졌던 우리 한민족의 정신이 아름답게 되살아 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한 지역에서 20년 넘게 한 지역굿만을 지키고 살아오면서 답답하기도 하고 조급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꾸준히 여유를 가지고 지역굿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을 하면서 지역의 굿이 그 지역만의 색깔을 가지고 올바로 살아나야 우리나라 전체의 굿이 풍성해질 것이라는 나름대로 큰 생각이 생겼다. 작게는 풍물 굿판의 중심이었던 전라도 굽이굽이 마을 곳곳에서 모심을 때, 김 맬때, 백중 때, 칠석 때, 정월대보름 때, 아플 때, 기쁠 때마다 주기적으로 굿과 함께 살아왔던 우리 조상들의 삶이 되살아나는 희망을 가져본다. 온 들판 가득 초록 물결이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요즘 굿치는 소리가 마을마다 울려 퍼지기를 꿈꾸며./이명훈(고창농악보존회 회장)▲ 이명훈 회장은 서울예술대와 전북대를 졸업했다. 98년 전주대사습 장원, 2006년 한국민속예술축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고창농악전수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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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7.21 23:02

[문화마주보기] 창고를 박물관으로 활용하는 역발상 - 전성환

지난 6월, 북유럽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유럽의 거리를 걷는 동안 내 손에는 늘 위치우이의 책이 들려 있었다. 그가 쓴 〈유럽문화기행〉은 한 문명과 문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나침반과도 같았다. '한 문명이 외부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없다면 자신의 역사 또한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그의 말은 마치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 같았다.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박물관거리였다. 마인강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박물관 거리는 크고 작은 박물관들이 모여 있어 마치 작은 마을처럼 보인다. 흔히 박물관하면 거대한 건물과 방대한 유물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곳은 전혀 그렇지 않다. 구 국립박물관, 페르가몬 박물관, 보데 박물관 등 진귀한 유물을 소장한 박물관들이 있고, 이 가운데 건축박물관, 유대인박물관 같은 테마별 박물관들이 섞여 있다. 이 때문에 박물관 거리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기도 했다.재미있는 것은 원래 이곳이 부둣가 창고단지였다는 점이다. 19세기 초에 이 일대를 매립하면서 건축가 쉰켈의 주도하에 최초로 박물관이 들어섰고, 이후 갖가지 박물관이 들어서면서 명소가 된 것이다.이런 사례는 유럽 어딜 가나 한 두 개씩은 있다. 영국의 시골마을 '헤이 온 와이'는 책마을로 유명하다. 1962년 리차드 부스라는 사람이 낡은 성을 사서 헌 책방을 열었고, 세계 곳곳의 헌책들을 사서 모았다. "이곳에 가면 헌책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마을 전체가 헌책방이다. 37개의 헌책방과 16개의 갤러리에서는 세미나, 강연회, 작가와의 대화가 열린다. 그들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인구 1천3백 명밖에 안 되는 작은 시골마을이 세계적인 명소가 된 것이다.창고를 박물관으로, 낡은 성을 헌책방 마을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발상의 전환이다. 나는 전주 한옥마을을 박물관마을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옥의 느낌과 구조를 그대로 살려서 박물관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굳이 건물을 새로 지을 필요도 없고 거창한 유물을 들일 필요도 없다. 옛 선조들이 썼던 농기구 박물관, 고서?고지도 박물관, 생활용품 박물관, 사투리 박물관. 생활 속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도구들이 모두 박물관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영국의 책마을처럼 주민들이 직접 박물관을 운영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너무 터무니없는 발상이라고? 모든 성공한 문화도시는 터무니없는 발상에서 시작됐다. 개발계획을 세우고 인공조형물로 치장하는 것이 쉽고 빠른 길일 수 있지만, 그것은 빨리 망하는 길일 수도 있다.위치우이는 문화도시의 등급을 세 단계로 매겼다. '맨 아래 등급은 생활에 가치를 두는 것이고, 그 다음 등급은 역사에 가치를 두는 것이고, 가장 높은 등급은 자연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자연 그대로 두는 상태가 가장 높은 문화라는 얘기다.'진정한 문화인 혹은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문화예술계 안에서 있는 힘을 다해 반대자 노릇을 하는 일'이라고 했던 콜링우드의 말을 새겨본다. 그러기 위해서 문화관계자들은 더 멀리 떠나볼 필요가 있고, 말갛게 씻긴 눈으로 모든 문화현상을 새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전성환(전북도 홍보기획과장)▲ 전성환 과장은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주) 제일기획 카피라이터, 서울미디어 대표이사,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외래교수를 거쳐 현재 전북도청 홍보기획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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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7.14 23:02

[문화마주보기] '탈라'와 '대한늬우스'의 화려한 복귀 - 김윤태

탈라는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법관과 성직자가 착용하는 긴 겉옷을 말하지만 대학졸업식에서 교수들이 입는 겉옷을 의미하기도 한다. 대학졸업식에서 교수들이 탈라를 입는 전통은 프로이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마다 저마다 독특한 유형의 탈라를 갖고 있었지만 학과에 따라 깃의 색깔은 똑 같았다. 신학과는 보라색, 법학과는 자색, 의학과는 진홍색, 철학과는 감청색 깃으로 과의 고유한 전통을 과시했다.탈라는 독일에서 오랫동안 독일 대학교수들의 졸업식장 공식복장이었다. 하지만 탈라는 1968년 최고조에 달했던 독일 학생운동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면서 독일 대학 졸업식장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특히 그 당시 함부르크 대학의 학생들은 "탈라 속에 천년 묵은 곰팡이가 피어난다(Unter den Talern der Muff von tausend Jahren)"며 탈라 착용을 빗대 대학교수들의 보수적이고 소시민적인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68운동은 독일에서 나치의 전통을 극복하려고 시도한 유일한 시민혁명으로 평가된다. 독일은 이 운동의 결과 권위주의 시대를 청산하고 건강한 사회로 진일보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독일 사회학자들은 68운동의 '脫탈라'로 상징되는 변화에서 중요한 시대적 의미를 찾는다. 독일 대학은 탈라를 벗음으로써 중세풍의 세레모니에서 나타나는 권위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학문의 본연의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최근 독일신문에서 탈라가 독일의 대학 졸업식에 다시 등장 했다는 기사를 읽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탈라의 복귀소식에 남의 나라 일이라고 부리던 여유는 며칠 전 오랜만에 영화관에 들렀다가 갑자기 '대한늬우스'를 접하면서 사치가 되고 말았다. 코미디언들이 나와 벌이는 코미디에 호들갑을 떨고 싶지는 않다. '복고 마케팅 광고'일 뿐이라는 재미나고 멋들어진(!) 해명도 믿고 싶다.하지만 요즈음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를 보면 '대한뉘우스'의 복귀는 단순히 코미디도 아니고 추억의 복고 마케팅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어야 할 청계천이나 시청 앞 광장이 가두리 양식장처럼 전경차로 그야말로 물 샐 틈 없이 둘러 쳐진 것을 보라. 누가 그것이 사라진 군사정권의 종식을 추억하며 퍼포먼스한다고 생각하겠는가? 또 시국선언교사들을 징계하는 모습에서는 권력의 비열함이 엿보인다. 정작 시국선언을 시작한 교수들을 징계하겠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김윤태(우석대 교수유아 특수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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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7.07 23:02

[문화마주보기] 생태의학과 건강한 밥상문화 - 한면희

태평양의 섬나라 나우루는 주민이 고작 8천명 수준에 불과하지만, 산호초로 둘러싸인 천혜의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서양인들이 몰려오면서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호사를 누리고 있는데, 그것에 수반되는 사회적 후유증도 심각하게 앓고 있다. 주민들은 관광수입으로 벌어들인 외화로 현대식 슈퍼마켓에서 코카콜라와 각종 통조림 등 인스턴트식품을 구매하여 일상으로 섭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서구식 생활습관으로 인해 1954년까지는 거의 없었던 당뇨병 환자가 최근 41%로 늘어남으로써 국가 보건체계에 비상이 걸렸다.미국은 닉슨정부 시절에 암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10년 동안 250억 달러 이상을 지출한 바 있지만,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했다. 국민의 의료비 지출은 갈수록 커져서 1940년에 GNP의 4%에 해당하는 40억 달러 규모였는데, 1992년에는 14%에 달하는 8천억 달러로 대폭 늘어났다. 현재도 3명 가운데 1명이 암에 걸리고, 5명 가운데 1명이 사망하고 있다. 의료기술이 높아지는 것 이상으로 의학이 고치지 못하는 불치병과 그 환자가 계속 늘고 있는 셈이다. 돈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산업사회의 생활양식이 사태의 주범이다. 지난 주 유명을 달리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도 성형수술 후유증을 앓고 있다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런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인다.미국에서 암과 각종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서 자국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1992년에 대체의학연구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대체의학은 마음과 몸을 통합해서 바라보고, 질병치료보다 예방에 우선적 주안점을 두며, 생활습관을 바꾸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최근에는 자연을 맑고 깨끗하게 유지하지 않고서는 인간도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인식이 강렬하게 싹트고, 이에 따라 생태의학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대체의학의 연장선상에서 생태계를 보전하면서 자연적 이치에 따라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알고 보면 동아시아 문명의 의학적 이해는 생태의학의 원형에 해당한다. 장기와 신체, 몸과 마음, 인간과 자연을 유기적 연관관계로 조망했다. 음식도 에너지 공급원이자 질병 예방의 눈으로 보았다. 이제 의식동원(醫食同源)의 관점에서 위험한 밥상을 건강하게 재구축하는 방향으로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 주식으로 쌀밥을 유지하면서 수입 밀 섭취를 최소화하고, 가능한 한 채식 위주의 식단을 짜며, 유익한 미생물이 많은 발효식품의 섭취 비율을 늘려야 한다. 유기농 재배를 계속 늘리고, 패스트푸드를 피하며, 생활 속에서 약초를 가까이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생명의 원천인 자연을 건강하게 하면서 일상생활에서 자연의 생기를 향유하는 데 더욱 노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한면희(전북대 쌀삶문명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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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6.30 23:02

[문화마주보기] 돈키호테 DJ, 6급 세무공무원 - 곽병창

'기사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읽던 시골 선비(hidalgo) '알론소 퀴아노'는 늘그막에 가슴에 불타오르는 열정을 담은 채로 세상의 부정을 바로잡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돕고자 길을 떠난다. 그는 '돈키호테(Don Quijote)'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비쩍 마른 애마 로시난테를 타고 편력의 길을 떠난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라만차(La Mancha)의 들판을 걸으면서 그의 이성이 잠시 작동을 멈춘 사이에, 열정으로 가득한 그의 심장이 시키는 대로 마지막 삶을 불사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양떼를 백만 군졸(軍卒)로 착각해 돌격하거나, 풍차를 흉악한 거인으로 몰아 달려들고, 여관집 하녀인 알돈자를 둘시네아 공주라 부르며 흠모하기도 한다. 그의 이런 행위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거나 놀림감이 될 뿐이었다. 즐겨 읽던 책에 나오는 대로 스스로 행하고자 했던 그의 순진함이 현실에서는 미친 사람 취급으로 되돌아왔다.소설 속 돈키호테의 시대착오적인 꿈과 무모한 도전은 많은 이들에게서 멸시와 조롱을 받았지만, 현실에서의 그 이름은 시대를 뛰어넘어서 불의에 눈 감지 않는 정의와 분투의 상징으로 많은 이들의 가슴에 자리잡았다. 또 그보다 조금 먼저 세상에 알려진 '우유부단한 이성'의 표상 '햄릿'과 대비되는 '저돌적인 열정'의 표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돈키호테의 이야기는, 인간의 얄팍한 이성과 눈 앞의 객관적 사실만을 중시하며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일은 철저히 피해가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훌륭한 우화이다.따지고 보면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돈키호테의 뒤를 따랐는가? 당대의 주류 권력과 기생(寄生) 지식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거짓과 불의의 풍차를 향해, 맨몸으로 달려들곤 하던 시대착오적 이상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멀리 싯달타와 예수가 그랬고, 허준과 김정호와 전봉준이 그랬다. 아주 가까이는 김구와 전태일과 문익환이 그러했으니, 그들은 모두 당대의 권력으로부터 조롱받는 자였고 고통을 당하는 자였다.그러나 그들은 권력 쥔 자들이 보지 못 한 저 거대한 불의의 성채를 꿰뚫어 보았고, 세상이 뒤에서 조롱할 때 그 불의의 성을 부수려고 죽기 살기로 돌진하였으며, 고통 당하는 더 많은 이들과 더불어 세상을 마친 이들이다. 그들의 육신을 핍박하고 영혼을 조롱한 이들은 늘 이긴 자들, 총칼을 쥔 자들이었으니 그들 이긴 자들에게 세상의 어두운 그늘과 부정한 풍차가, 욕망의 거짓 성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런즉 그 눈에 저들 돈키호테는 영원히 허상과 싸우는 존재로만 보일 것이다.전직대통령이 나라의 현실을 우려하며 몇 마디 개탄한 것을 두고 세상의 화려한 입들이 돈키호테 같은 노인이라며 조롱한다. 사리분별이 흐려진 노인이 내던지는 무모한 언사쯤으로 깎아내리고 싶은 생각임이 분명하지만 알고 보면 그런 찬사가 없다. 두 눈 멀쩡히 뜨고도 세상이 잘 안 보이는 이들이나, 한쪽 눈만으로 세상을 보고 싶은 철 지난 포수들에게는 능히 그럴 수 있다.하지만 진짜 돈키호테들은 따로 있다. 광장을 막은 차벽이 그냥 차벽으로 보이지 않고 거짓의 산성으로 보이는 이들, 높은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불의를 보고 손가락질했다가 파면 당하고 고발 당하는 6급 세무공무원, 저들이야말로 빈약한 애마를 타고 낡은 투구를 썼으나, 눈 앞에 어른거리는 불의의 풍차를 향해 앞뒤 안 가리고 차례로 돌진하는 이 시대의 돈키호테들이다.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전직대통령의 입이 아니라, 가진 것도 뒤에 의지할 것도 없이 차례로 돌진하고 있는 저 광장의 돈키호테들 아닌가?/곽병창(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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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6.23 23:02

[문화마주보기] 제주에서의 문화예술 단상(斷想) - 이 찬

지난 6월8일에서 10일까지 제주에서 해비치 아트페스티벌이 열렸다. 전국의 공연장 관계자와, 동시에 개최된 아트마켓에 참가하는 국내 공연기획사 종사자등 전문가 약 8백 명이 한 자리에 모인 자리였다. 초기에는 전국문예회관연합회의 정례 워크숍 형식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국내 예술시장이 함께하는 축제와 소통의 장으로 발전된 것이다.이번에 수도권에서 약 4백여 명이 참가한 공연기획사들의 현황을 보면 우리나라 문화예술 활동에서 중앙과 지역의 간극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공연예술 작품의 경쟁성과 시장성이 중앙에서는 얼마나 치열한가를 보여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처럼 경제가 침체된 상황에서는 지역보다 중앙의 문화예술계가 더욱 큰 타격을 받게 마련이다. 중앙의 예술 활동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만큼 사회경제적 영향을 지방보다 더욱 크게 받게 되어 있다.이런 가운데 전주에 소재한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전국의 많은 문예회관 가운데 중앙을 포함하여 몇 대표적인 위상을 갖고 있는 반열에 안착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은 비슷한 규모의 수도권 지역 문예회관보다 지역의 시장성이나 재원의 규모는 취약할지라도 그동안 지역성을 뛰어 넘는 전국적 운영 패러다임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1세기는 네트워크의 경제시대라고 한다. 이것은 20세기 규모의 경제시대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이 첨단의 시대에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 나름대로 이미지 구축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앙과 지역을 통섭하는 개방된 마인드세트와 효과적 네트워킹을 실현시켜온 결과라고 생각된다.그것은 국내 최초의 민간위탁 체제에서 선진국의 행정 가치인 '팔길이 원칙'을 토대로 안정적 경영의 지속성이 가능했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나라 공연장의 효시인 세종문화회관과, 그리고 최신 공연장 시설인 김해문화의전당의 조직체계를 두루 경험해 본 필자로서는 상대적으로 역량 있는 민간 체계의 조직이 얼마나 효과적이며 생산적인지를 느낄 수가 있다.이번 아트페스티벌에는 일본의 전국공립문화시설협회를 대표하여 다쑤아키 마쑤모토(松本辰明) 상무이사가 참가하여 일본의 문예회관 현황을 설명하였다. 일본에는 약 3천 개의 공연장이 있는데 이중 약 70퍼센트가 공립이라고 한다. 1980년대 지방자치제의 도입과 당시 경제 버블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많은 공연장이 건립되었다.그동안 대부분 일본 문예회관들이 지방자치단체의 직영이나 문화재단과 같은 공공기관에 의해 운영되던 체제가 지방정부의 재정난으로 한계를 맞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은 2006년부터 민간위탁의 '지정관리자제도'를 도입하여 민간기업이나 비정부기구나 심지어 개인에게도 위탁을 부여하는 체제로 전환하였다고 한다. 민간의 효율성과 자율성을 통해 정부의 재원 한계를 극복해 나가겠다는 정책이었다.그 설명을 들으면서 지금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공연장 건립 붐은 언젠가는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되지나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일본 문예회관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를 가늠하게 하는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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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6.16 23:02

[문화마주보기] '원한의 도덕' 넘어서기 - 김성환

"선천(先天)에는 상극의 원리가 인간과 사물을 지배하니, 모든 인사가 도의에 어그러져서 원한이 맺히고 쌓여 하늘과 땅과 인간의 삼계(三界)에 넘쳐 마침내 살기가 터져 나와 세상의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나니." 지금부터 백 년 전인 1909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증산 강일순은 낡은 인류문명의 질병을 이렇게 진단했다.강증산이 아직 20대 초의 청년이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좌절됐다. 우금치에서 30만 명이 넘는 동학군이 희생됐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도 동학군 토벌에 나선 토포사에게 다시 잡혀 맞아 죽었고, 남은 가족들도 모진 박해를 받거나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 대부분의 희생자가 호남의 너른 들에서 나왔다. 호남에는 산 자들의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했고, 죽은 자들의 원혼이 하염없이 구천을 떠돌았다. 그 때 강증산이 서러운 민초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원한을 풀어라. 척을 짓지 말라."그는 해원(解寃)하고 상생(相生)하는 것으로 낡은 인류문명, 끝없이 상극하는 선천시대의 악업에서 사람들이 벗어나기를 갈망했다.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의 도로써 선경(仙境)을 열고, 조화정부를 세워 하염없는 다스림과 말없는 가르침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세상을 고치리라"는 그의 염원은, 그리하여 그 어떤 분노와 복수와 저주보다 더 강렬하게 조선백성들의 마음을 흔들고 그들의 영혼을 치유했다. 그런데 다시 백 년이 지나, 우리는 또 한 사내의 말을 듣는다.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그러나 상극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 잔인한 무한경쟁시대는 원한분노저주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지 않고, 진리를 자기만 독점한다고 믿으며, 자기가 공격당할 수 없는 존재이고, 최강의 권력이며 절대로 대체될 수 없고 경멸당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사로잡혀있다. 그들이 던지는 사문난적, 반동, 빨갱이, 사탄 따위의 언사가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자기와 다른 남을 적으로 몰며, 증오와 저주의 이빨로 적을 물어뜯어야 스스로 '고귀한 자' '강력한 자' '지배자' '권력자'가 된다고 믿는다. 니체는 이처럼 뒤틀린 자기 확신을 '원한의 도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마음 안에 남을 처벌하려는 강한 충동을 가진 모든 자들을 신뢰하지 말라"고 충고했다.하지만 상극의 세상에서는 이런 충동을 품은 자들이 대개 부유하고 강하며 유식하다. 강증산은 말했다. "부귀한 자는 빈천함을 알지 못하며, 강한 자는 병약함을 알지 못하고, 유식한 자는 어리석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멀리하고, 오로지 빈천하고 병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가까이 하겠노라. 그들이 곧 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강증산이 한 달 동안 쌀 한 톨 입에 대지 않고 빈속에 소주만 붓다가 쓰러져 갔다. 1909년 음력 6월이었다. "후천개벽의 날이 아직도 멀어서 다가오지 않으니 중생의 고통이 너무 심하다. 내 스스로 민중의 밥이 되어, 민중의 온갖 고통을 다 한 몸에 스스로 짊어지고 가노라"며. 그것은 결국 자살이었다. 그리고 백년 뒤 2009년 5월, '대통령'으로 불린 또 한 사내가 잔인한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고 목숨을 끊었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며.강증산이 바보였듯이, 노무현도 바보였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으로 상극의 기운이 가득한 세상의 악업을 대신하고자 했고, '원한의 도덕'에 사로잡힌 자들이 뿌린 저주와 복수심마저 거둬가고자 했다. 다시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인간이 복수심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최상의 희망으로 가는 가교이며 오랜 폭풍우 뒤의 무지개다." 그러나 화해와 상생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는 말라! 그것은 용서를 구해야 할 자들, 잔인한 하이에나의 이빨을 번득이는 자들이 스스로의 악덕을 덮기 위해 쓸 수 있는 언사가 아니므로. 삐뚤어진 지배욕에 사로잡힌 그들의 '원한의 도덕'으로부터 세상이 벗어나는 것, 그것이 곧 상생의 시대로 가는 길이다./김성환(군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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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6.09 23:02

[문화마주보기] 생명문화와 노 전 대통령의 자결 - 한면희

노무현 전대통령은 국민의 가슴 속에 진한 감동을 남기고 이 세상을 하직했다. 서민으로 태어나 서민을 위한 아름다운 삶과 정치를 펼치다가 떠났다. 무엇보다도 한국정치의 고질병인 지역주의와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데 앞장섰다. 그런데 그가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자살을 택했다는 점에서 당혹감도 감출 수가 없다. 생명존중의 문화에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조망할 수 있을까?니체는 도덕이 개인의 눈 속에 있다고 함으로써 윤리적 주관주의를 설파했다. 이런 경우, 사람이 취하는 행위의 윤리성이 개개인에게 돌아가므로 타인이 시비를 걸 수 없다. 이완용의 매국 행위도 타인이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없게 된다. 지구촌 여러 사회는 고유한 문화를 갖고 있고 윤리는 문화의 산물이므로, 한 문화권의 행위 양상을 다른 문화권이 시비를 걸 수 없다는 윤리적 문화상대주의도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존중을 가능하게 하는 큰 장점이 있다. 그러나 허약한 여아를 자연에 유기하여 죽게 하는 일부 토착사회의 행위도 문화적 풍습이어서 비난할 수 없게 된다.바로 이런 문제로 인해 칸트는 도덕규칙을 보편화하여 절대적 지평에 올려놓았다. 윤리적 절대주의에 따르면,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지상명령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조선총독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사 안중근과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저명한 신학자 본회퍼를 기억한다. 이분들의 행위는 윤리적으로 그릇된 것으로 볼 수 없다. 왜? 윤리적 객관주의로 설명이 가능하다.주관주의와 상대주의는 도덕규칙을 용인하지 않는다. 반면 절대주의와 객관주의는 도덕규칙을 보편적으로 용인한다. 다만 전자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지만, 후자는 조건부로 승인한다. 객관주의는 타인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도덕규칙을 준수하지만, 또 다른 규칙으로 강력한 사회적 해악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별한다. 성숙한 합리적 직관은 가치 우열의 비교 속에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안중근과 본회퍼는 옳은 일을 한 것이다.노무현의 자결은 어떠한가? 살해와 자살은 조금 다르다. 그것을 옳다고 보기 어렵다. 조선 말 경술국치를 당하여 자결한 애국지사가 여럿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데 따른 책임과 간악한 매국노의 행위를 규탄하는 사회적 저항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번 노무현 전대통령의 자결 이면에도 자신으로 비롯된 책임과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그릇된 현실정치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담겨 있다. 국민이 그의 죽음을 마음 속 깊이 슬퍼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원칙적으로 생명을 앗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다만 사회문화적 의미를 중요하게 갖는 경우에 예외적 평가를 다르게 내릴 뿐이다. 역사성을 띤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 어떤 유형의 자살도 바람직하지 않고 또 옳지 않다./한면희(전북대 쌀삶문명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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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6.02 23:02

[문화마주보기] 비극의 가치 - 곽병창

참으로 착한 한 인간이 죽었다. 자기 조국을 사랑했고, 자신과 가족의 따뜻한 밥 한 그릇, 평안한 잠자리를 궁리하는 대신, 핍박받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못 견뎌 하던 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신의 섭리를 저버린 일이라지만, 그런 걸 가려 자신의 길을 선택하기엔 그에게 주어진 세상이 너무 좁고 강퍅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순결한 영혼이고자 했다. 그 순결함이, 도덕적인 정치, 청렴한 대통령을 향한 그의 필생의 의지가 마침내 그를 봉화산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높은 도덕적 자존심과 구차한 현실 사이의 질긴 싸움 끝에 그는 스스로를 버렸다. 비극적인 바보 노무현은 언제쯤 그 결말을 알았을까?비극은 마지막까지 주인공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극적 선택에 대한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외디푸스'도 그랬다. 나라의 운명과 스스로의 출생에 얽힌 진실을 알고자 했던 그 순간부터, 그 끔찍한 비극의 시계바늘은 여지없이 돌아서 그의 몰락을 불렀다. 진실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의지를 불태우면 불태울수록 비극적 주인공들의 최후는 점점 더 빠르게 다가온다. 외디푸스의 '비극적 결함(hamartia)'이 진실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었다면, 노무현의 그것은 더러운 현실에 어울리지 않게 높은 도덕적 이상이었다.그는 말 뒤집기를 밥 먹듯 하고 거짓말과 배신을 태연히 저지르는 이 나라의 평균적 정치인들과 달랐다. 이 더러운 한국 정치의 늪에 자발적으로 뛰어든 그 순간부터 인간 노무현의 비극은 싹텄다. 감히, 대학도 못 나온 주제에, 돈도 줄도 변변치 않은 주제에, 수십 년 덕지덕지 쌓아온 계보와 부패정치의 성곽을 허물겠다니, 그건 불을 지고 섶에 뛰어드는 일이었다. 그 거대한 거짓과 탐욕의 풍차에 돌진한 결과는 돈키호테보다 더 끔찍한 비극으로 끝났다. 적들은 생각보다 더욱 막강했고 겁 없는 도전자에 대한 응징은 날카롭고 집요했다. 돈키호테 노무현의 창은 너무 무거웠고 그의 이상을 실어 나를 애마는 아직 덜 자랐으니, 그가 말에서 내린 순간 남은 것은 집요한 보복의 칼날뿐이었다.그것이 이 비극의 전말이다. 이 나라 평균 국민의 상식으로는 결코 따를 수 없던 높은 이상을 세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 국민들의 세상이 더욱 깨끗하고 평화롭게 되기를 바랐던 한 인간이, 결국은 평균적 인간들의 야유와 조롱 속에 스스로 세운 이상을 무참히 꺾고 떠났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국민들을 향해서 자신을 버려달라는 말을 남겼다. 외디푸스는 생모가 곧 아내라는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된 순간 두 눈을 찌르고 광야로 떠났지만, 유랑할 광야조차 허락받지 못한 이 나라의 전직 대통령은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어' 허공에 몸을 던졌다.하지만 비극은 깨달음을 남겨야 비극이다. 이 비극 앞에서 목 놓아 우는 동안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어떤 고결한 영혼도 설 자리를 찾을 수 없는 이 위선과 탐욕의 정치판, 휴전 60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좌빨' 타령으로 소일하는 돌심장들, 동서로, 남북으로 갈려 제각기 저주와 분열의 진지전을 이어가고 있는 이 나라의 정치적 조폭들, 욕망의 탑을 쌓느라 눈 뜨고도 진실을 보지 못 하는 청맹과니 백성들을 향해, 그가 허공에서 지금 외치고 있다. 제발 그만 하자고-. 저주는 저주를 낳고 보복은 보복을 부른다. 이 비극의 악순환을 끊는 길은 눈물 속에서 우리가 마침내 서로 뉘우치고 정화(淨化)되는 것이다.오늘도 우리는 살아서 국밥을 사 먹을 것이고, 착한 대통령 노무현은 생사의 긴 틈새를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삼가 고인의 남은 긴 길에, 봉화산 꽃향기 내내 그윽하기를 빈다./곽병창(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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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5.26 23:02

[문화마주보기] 이제는 컬쳐노믹스 시대이다 - 이찬

21세기는 문화콘텐츠 산업의 시대이다. 공연, 영화, 게임, 음악, 인터넷 등을 포함하는 문화콘텐츠 산업은 기존의 제조업 성장률을 추월하고 있고, 전 세계 약 2조억 달러의 시장규모는 기존의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문화의 발전은 인간의 삶의 질적 성장과 이제는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으로 발전하였다. 바야흐로 컬쳐노믹스(Culture+Economics : 문화+경제)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프랑스 파리의 오르세역(驛)을 개축하여 인상파 회화를 비롯한 19세기 미술작품을 소장한 오르세 미술관, 거대한 철골 트러스 속에 도서관(BPI), 공업창작센터(CCI), 음악음향의 탐구와 조정 연구소(IRCAM), 파리국립근대미술관(MNAM) 등이 있는 퐁피두 예술센터 등은 컬처노믹스의 대표적 구조물이라 할 수 있으며, 그 밖에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개조한 영국의 테이트 모건 갤러리, 제철소, 광산등이 있던 도시를 개조한 스페인의 구겐하임 미술관 등은 지역 일자리 창출과 관광객 유치로 지역 경제에 큰 활력소가 되고 있다.이런 하드웨어적 접근 방식 이외에도 소프트웨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나라가 중국이다. 계림의 아름다운 산과 강을 배경으로 한 장예모 감독의 수상뮤지컬 '인상유삼저((印象劉三姐)'는 전 세계의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야외 공연으로 년 간 약100 만 명 이상의 관객유치, 약 600여명의 지역주민들을 배우로 등장시켜 지역 주민들의 일자리 창출은 물론 지역 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이 외에도 아시아 최대의 예술촌을 조성하고, 이와 동시에 콘텐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해 가을에 내한공연을 가진 장예모 감독 발레극 '홍등', 서커스와 발레를 결합한 '백조의 호수' 등은 앞으로 전 세계를 내다보고 기획된 작품으로 앞으로 공연시장에 돌풍을 일으킬 것으로 생각된다.19세기의 산업혁명은 유럽이 중심 이였고 20세기에는 미국에서 발전하여 이제 21세기는 아시아에서 꽃 피울 것이다. 그 내용은 제조업과 굴뚝산업이 아닌 문화콘텐츠 사업 일 것이다. 이런 패러다임 변화에 발 빠르게 움직이는 중국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국내의 문화콘텐츠는 게임과 인터넷 산업을 제외하면 아직 취약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것을 소재로 창의적으로 만들어진 세계적 수준의 콘텐츠는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나 최근의 '안면도 꽃 박람회', '함평 나비축제', '보령 머드 축제' 와 폐석산을 예술문화공원으로 바꾼 포천의 아트밸리, 담배창고를 문화발전소로 변신시킨 대구의 창의적 프로젝트, 전북의 전통소리문화 DB구축사업 등은 우리 문화콘텐츠를 발굴한 좋은 출발의 상징이다.문화콘텐츠 개발은 정부의 문화정책과 지방자치단체의 의지에 달려있다. 즉 중앙정부의 지원과 지역의 문화특성이 결합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21세기 소비 주최의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어야 하고 그들의 정서를 담은 것이어야 한다. 문화는 지역을 살릴 수 있는 힘이자 가치 산업이다.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창의성의 기반으로 불루오션을 개척하여야 한다./이찬(한국소리문화의전당 예술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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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5.19 23:02

[문화마주보기] 도시의 미래 - 김성환

지금부터 한 달여 전, 2009년 4월 3일에서 5일까지 미국 하버드대학의 디자인대학원에서 미래의 도시로 여행하는 국제컨퍼런스와 전시회가 열렸다. 조경, 도시계획 및 설계, 공공 위생, 건축, 공공정책, 예술과 인문 분야 등에서 50여 명의 석학이 발표를 하고 5백 명에 가까운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첨단 과학과 공학의 중심인 미국, 그 지성의 심장부인 하버드대학에서 그린 미래도시의 풍경은 어떤 것일까. 영화 〈터미네이터〉와 〈메트릭스〉에서 상상하듯 기계와 인간의 역할이 뒤바뀌는 암울한 디스토피아? 아니면 첨단기술이 인류의 미래를 구원하는 유토피아?하지만 지금 세계적인 도시전문가들이 그리는 미래도시는 허리우드 SF영화의 상상력을 비켜간다. 하버드대학의 교수들과 연구팀은 '생태적 도시주의(Ecological Urbanism)'라는 신조어로 도시의 미래를 제안했다. '생태적 도시주의'는 심포지엄의 주제를 넘어, 모센 모스타파비(Mohsen Mostafavi) 학장이 이끄는 하버드디자인스쿨의 미래지향적 연구와 교육의 비전과 실천방향으로 선포되었다.그리고 지난주 5월 6일, 고려대학교에서 다시 생태적 도시주의를 논의하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대체가능하고 지속가능한 미래의 도시들'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하버드대학 디자인대학원 조경학과장 겸 환경기술연구소장인 니얼 커르크우드(Niall G. Kirkwood)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대여섯 명의 도시전문가가 토론을 했는데, 나도 논평자로 초대되었다. 사실 나 같은 인문학자가 도시설계와 개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직업적인 도시기술 전문가와 인문학자 모두에게 주제넘은 간섭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런데도 주최 측에서 인문학자의 참여를 요청했고 나 역시 흔쾌하게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어쩌면 이런 시도야말로 '생태적 도시주의'가 추구하는 목표와 접근방식을 잘 보여준다.오늘날 도시의 설계와 개발은 건축, 토목, 조경, 디자인 등 도시공학 분야의 전문기술로 취급된다. 그런데 '생태적 도시주의'는 이런 도시공학기술이 주도하는 현대의 도시환경이 "인간의 삶, 전통적 관습, 자연환경, 그리고 도시의 지속가능한 다양성과 복합성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실패했다"고 최종적으로 평가한다. 이런 혹독한 평가는, 과학(공학)기술이 인간의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맹신한 20세기의 '과학기술결정론'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도시 공학자들은 도시를 자연에서 분리된 공간으로 보고, 인공적인 기술로 얼마든지 도시를 조작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생태적 도시주의'는 이런 믿음이 결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선언한다.도시는 단지 인공적 구조물들로 이뤄지는 '건물덩어리' 그 이상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 지역적 특성, 자연환경, 지질, 경제, 역사, 예술, 정치, 문학, 철학, 교육, 의료, 종교, 그리고 다양하고도 복합적인 문화가 뒤엉켜 도시의 생태계를 구성한다. 그런데 도시공학의 전통적인 접근방식은 도시의 이런 자연생태와 사회생태, 그리고 문화생태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고려하는데 실패해왔다. 이에 하버드대학에서 제안하는 '생태적 도시주의'는 도시 계획 및 관리의 관행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청하며, "타 분야에 대한 배타성을 버릴 때 도시디자인의 도전적 기회가 더 커진다"고 강조한다. 더 나아가 생태적인 도시설계에서 "인문학적인 주요 이슈가 무엇인가?"하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심포지엄이 끝난 뒤, 나는 사석에서 커르크우드 교수에게 새만금이 '생태적 도시주의'를 구현할 최적의 미래도시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제언했다. 그 역시 깊은 관심을 보이며, 내년 1년 동안 한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새만금을 눈여겨 살펴보자고 기약했다. 뜻 깊은 만남이었다.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도시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더 아름답고 인본주의적이며 생태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사회적으로 고양된 환경의 창조를 위해, 조경건축가와 여타의 디자인 분야에서 아주 높은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미래도시는 단지 도시의 미래가 아니라, '인간의 미래'이자 '자연의 미래'이기 때문이다./김성환(군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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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5.12 23:02

[문화마주보기] 위험사회와 신종 인플루엔자 - 한면희

우리나라에도 신종플루(공식 명칭 인플루엔자A[H1N1]) 감염 확인자가 나타났지만, 처음 우려했던 것만큼 심각한 양태로 확산될 것으로 전망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혼란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돼지 인플루엔자에서 명칭도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발병의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고 있지 못한 현실이 그것을 말해준다.20세기에 발생한 전염병이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과 시련을 가져다준 것을 기억한다. 1918년 스페인 독감과 1968년의 홍콩 독감은 각각 4천만 명과 75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사망하게 만들었고, 가장 최근인 2002년 겨울의 사스는 800명 이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아시아와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전염병이라는 것이 늘 있어왔고 또 과거와 달리 항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는 의학 수준이 높아진 것은 다행이다. 다만 미국은 유사 인플루엔자 확산이 우려되던 1976년에 긴급하게 백신 프로그램을 가동하였는데, 당시 백신이 운동 및 감각 신경을 마비시키는 '길랭-바레증후군'을 야기하여 30명 이상을 숨지게 한 사례가 있었다. 과학이 미처 감당할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최근 전개되는 일련의 사태와 문명사회의 구조적 현실을 보면 깊은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인간이 돈벌이와 물질적 풍요를 위해 자연과 동식물을 희생으로 삼는 산업사회의 제도와 생활양식은 지구촌 곳곳에 시한폭탄을 설치하고 있는 격이다. 환경재난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닭과 돼지, 소 등 조류 및 포유류를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대량 생산하는 과정에서 조성되는 불량한 위생 상태와 질병 예방용 항생제 남용은 언제든 변형 바이러스를 양산할 수 있다. 잡초를 제거할 목적으로 뿌린 제초제 내성의 강력한 잡초가 이미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이번의 신종플루와 달리 전염성과 위력이 강력한 수퍼 바이러스가 출현하여 조류와 포유류, 인간을 가리지 않고 습격할 수 있다고 예측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가설은 아니다. 인류는 점차 위험사회(risk society)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이번 사건을 계기로 인류는 문명적 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호화스러운 삶을 누리면서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생활 속 위험 요인을 구조적으로 최소화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소박한 삶으로 전환할 것인지 돌아볼 때가 되었다. 우리가 향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세대의 인류와 진화의 오디세이 호에 함께 타고 있는 지구 생명체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한면희 (전북대 쌀삶문명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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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5.05 23:02

[문화마주보기] 미워도 다시 한 번? - 곽병창

개봉 당시 서울 인구 열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봤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던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은 명절 때마다 텔레비전을 통해 되살아오는 단골 멜로영화이다. 신영균, 전계현의 이름을 세상에 뚜렷이 각인시켰고 아역스타 김정훈은 그 뒤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당대의 스타가 되었다. 평범한 유치원 교사의 기구한 사랑이야기였던 이 영화는 그 시절을 살던 많은 이들의 고달픈 삶을 눈물로 어루만져 주었다. 그 작품이야말로 온 국민들에게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슬픈 일'을 통해 '연민과 공포'를 극대화시킨 우리 현대사의 대표적 비극인 셈이다. 그래서 명절만 되면 우리 여인들은, 음식 만들던 손으로 눈자위를 꾹꾹 눌러가며 마치 내 일이나 된 듯이 서럽게 함께 울어준 것이다.그런데, 유부남 애인의 처사가 아무리 미워도 끝내 사랑할 수밖에 없던 그 여인의 심정을, 사람들은 명절 때 말고도 심심치 않게 되뇌곤 한다. 선거철만 되면 언제나 별반 잘 한 것 없는 '미운' 후보들을 두고, 그래도 대안이 없으니 다시 밀어 줄 수밖에 없는 심정을 이 오래된 영화 제목으로 대신 달래려는 것이다.마치 망명정부라도 세운 듯이 해외에서 출마선언을 해 놓고는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와서 자신이 만들고 대선후보까지 했던 그 당의 면전에 침을 뱉는 후보를, '미워도 다시 한 번' 밀어줄 수밖에 없다는 이 착한 시민들을 보면서 이 나라의 시계가 수십 년 뒤로 되돌아가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낀다. 자신이 주역이 되어 만든 정권, 그 정권 아래서 이룬 대북사업의 성과를 생애 최대의 치적으로 여기면서도, 그 정권의 주역들이 곤경에 빠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등 뒤에 칼을 꽂아대는 저급한 배신의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는 정치라는 괴물에 치를 떤다. 자신을 정계에 입문시킨 이도, 함께 정권을 창출했고 스스로 그 정권의 중추였던 동료들도, 잘 나가던 미국 대학 교수직을 버려두고 자신의 정치적 반려 노릇을 했던 후배도,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서 헌신짝처럼 차 버리는 그를, 이 착한 전주시민들은 '그래도 다시 한 번' 밀어주려 한다. 양손으로는 다친 동지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려대고, 입으로는 '어머니'를 외치며 흘러간 멜로 영화를 다시 틀어대고 있는 이 삼류 재개봉 영화관이 참 부끄럽다.백 번 양보해서, 마지막 불씨를 고향 사람들이 다시 살려주기를 소망하는 그 심정마저 외면하지 못한다 해도, 아무리 미워도 차마 내칠 수 없는 게 전주 사람들의 심성이라 해도, 이른바 '무소속연대'라는 이름의 해괴한 야합까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다만 당과 그 지도부를 흠집 내기 위한 일념으로 낡은 지연과 학연에 기대어가면서 그야말로 '정-신 나간' 저주의 재를 뿌려대고 있는 모습까지도, 다시 사랑해야 하는가?우리 국민들이 가식과 부패와 패거리의식에 찌든 정치인들을 '미워도 다시 한 번' 사랑해 온 결과는 사실 너무 참담하다. 멀리는 오래 된 독재정권의 기억이, 가까이는 온갖 거짓으로 치장한 정권의 현실이, 모두 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사랑해 온 탓이다. 이웃 논산의 시민들이 선거 때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인제가 지금보다 훨씬 큰 정치인이 되어 있지 않을까?그러고 보니 요즘은 명절이 되어도 '미워도 다시 한 번' 재방송 안 한다./곽병창(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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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4.28 23:02

[문화마주보기] 공연장 문화 예절 - 이찬

공연장은 문화예술의 산실이자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대중 공간이다. 단숨에 세계의 빅 시장이 된 국내에는 전국의 120여개 공연장에서 다양한 장르의 수많은 공연이 개최된다. 하지만 공연장의 문화예절과 질서는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공연이 시작되기 30분전에 로비에 도착하여 공연 관람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공연의 스토리와 출연자 프로필을 살펴보고 가벼운 음료 등으로 편안한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무난하다. 이런 로비 문화를 즐기는 것 또한 또 다른 공연장의 즐거움이 될 수 있다.10분전에 반드시 객석에 입장하여 무대의 구성과 배치 등을 파악하는 것도 공연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다. 만약 조금 늦게 도착하였다면 안내요원의 안내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일부 관중은 티켓의 권리를 주장하며 일방적인 행동과 고성으로 윽박지르는 분들도 있다. 이는 공연의 분위기를 망가뜨리고 일반관객에게 피해를 주므로 삼가 해야 한다. 하우스매니저는 공연시작 전 여러 가지 공연원칙을 출연 단체와 협의한다. 가령 클래식 같은 경우 한 곡이 끝난 뒤에, 뮤지컬과 연극 등 이어지는 공연은 공연장내 분위기를 확인한 후 가장 뒤쪽 빈 좌석을 안내한 후 휴식 시간에 자기 자리로 찾아가게 한다.공연을 제작할 때 관람 연령도 결정한다. 대부분 공연은 초등학교 학생이면 관람 할 수 있지만 어린이 공연인 경우는 24개월 공연인 경우도 있고, '버자이너 모놀로그' 같은 공연은 19세 이상 관람 공연도 있다. 전국의 공연장은 어린이 입장 문제만큼은 철저하게 원칙을 준수한다. 어린이들은 집중력이 약하고 어두운 객석에서 말 또는 행동으로 전체공연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이는 다른 관객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공연을 선택하기 전에 반드시 입장 연령을 확인해야 하고 동반한 어린이가 있을 경우 공연장 놀이방시설을 이용하면 편안한 공연을 즐길 수 있다.껍을 씹는다거나 바스락 소리가 나는 비닐 쇼핑백과 음식물, 카메라, 켐코드 등 저작권에 관계되는 것들은 입장 시 당연히 반입금지 한다. 또 공연 시작하기 전 휴대폰은 반드시 전원을 꺼야 한다.관객과 출연자와의 교감은 박수로 한다. 박수의 양과 질에 의해 공연성공과 만족도를 가늠해볼 수 있다. 클래식 공연에서 악장과 악장 사이에는 박수를 치면 흐름이 흩트려진다. 한 곡이 끝나고 박수를 보내는 것은 상식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오페라, 뮤지컬에서 아리아나 이중창 등 극적인 장면에서는 박수를 아끼지 말아야 하지만 연극, 국악, 무용 등은 흐름에 따라 박수를 보내야 한다.목적된 행사에는 그 분위기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문화고 질서다. 스포츠 경기장에서는 다소 흥분된 마음과 적극적인 행동을 또 문화예술 공연장에서는 차분하고 세련된 매너가 필요하다. 많은 관객 중 한명에 의해 또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울리는 휴대폰 소리 하나가 전체 분위기를 흩트려 놓을 수 있다. 공연의 완성도는 출연자, 공연장 운영요원이 아니라 우수한 관객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 관객의 높은 문화예절과 관심이 문화예술의 성장과 발전을 가져올 수 있고, 글로벌 시대에 경쟁력이 될 수 있다. 문화의 발전은 관객의 몫이요 시발점이다./이찬(한국소리문화전당 예술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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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4.21 23:02

[문화마주보기] 문화에 대한 두가지 오해 - 김성환

이미 진부한 표현이지만,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다. 문화산업문화콘텐츠지역문화 같은 말이 일상어가 되었고, 도처에서 문화를 국가와 지역의 핵심 경쟁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사회에는 '문화'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팽배하고, 이런 오해에서 잘못된 문화정책과 행정이 비롯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첫 번째 오해는 문화와 역사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발생한다. 20세기에 가장 탁월한 문화평론가이자 미학이론가의 한 사람이었던 독일의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문화는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는 말로 문화와 역사의 차이를 설명했다. 역사가 과거에 벌어진 사건에 대한 '기억의 체계'라면, 문화는 과거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 창조되는 '현재의 지성과 생활'의 총체이다. 문화는 과거의 기반에서 형성되지만, 또한 문화는 항상 변형되고 순간마다 새롭게 만들어져 현재에서 타당성을 얻는다. 즉 역사가 과거형이라면, 문화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셈이다.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역사유산을 정비하고 박물관이나 전시실을 꾸미는 정도로 '문화'의 생색을 내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현재에 대한 배려 없이 일방적으로 과거를 보여주는 장소들이 얼마나 따분하고 재미없는지를. 어릴 때의 수학여행부터 시작해 우리 대부분은 이런 문화 없는 '문화 공간'(?)의 추억들을 꽤 많이 가지고 있다. 이런 장소는 한 번 다녀오면 다시 가고 싶지 않을뿐더러, 문화유산에 대한 흥미조차 아주 잃게 만든다.오늘날 유럽미국과 일본 등의 문화선진국에서 박물관 등을 단순한 전시공간에서 다양한 체험 위주의 공간으로 재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세기형의 시설들은 보여주는 측, 즉 문화재 부문의 관료와 역사학자 등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건립되고 유지되었다. 그러나 21세기의 문화공간은 사용자의 문화적 수요를 존중하고 다양한 문화행위가 이뤄지는 장소로 탈바꿈하고 있다. 문화의 현재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문화 공간'들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문화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문화'를 물질적인 것으로 착각하는데서 발생한다. 흔히 '문화재'라고 하는데, 여기서의 '재(財)'야말로 문화를 단지 재화로 보는 시각을 반영한다. 그러나 백과사전만 보더라도,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언어?관념?신앙?관습?규범?제도?기술?예술?의례 등이 있다. 문화의 존재와 활용은 인간 고유의 능력, 즉 상징적 사고의 능력에서 기인한다."(『브리테니커 백과사전』) 빼어난 문학예술작품이나 역사유산은 물론 민속자료에 이르기까지, 따지고 보면 문화유산은 인간의 정신적 능력과 활동의 결과물이 아닌 것이 없다.그러므로 '문화'에서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정신활동이지, 그 결과로 남은 물질적 흔적과 기록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당연한 사실조차 사람들은 종종 망각한다. 그리하여 문화의 물질적 흔적은 중시하면서도, 정작 문화를 창조하는 인간의 정신활동은 경시한다. 그러다보니 자꾸 지나간 문화의 흔적에만 집착하고, 현재의 살아있는 문화를 창조하는 데는 무능해지는 것이다.문화에 대한 오해가 어디 이뿐이랴! 하지만 우리나라 문화행정의 난맥은 대개 이 두 가지 오해, 즉 '문화의 현재성'과 '정신활동의 중요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문화와 문화행위에는 투자하지 않고, 건물이나 세우는데 혈세를 죄다 쓰고 있다. 그 최대의 수혜자는 '문화'나 '문화산업'이 아닌 토목건축업자가 된다. 그러면서 문화(관광)산업의 경쟁력을 운운하니, 길가는 개가 다 웃을 일이다. 전주전통문화도시와 군산근대문화도시 등의 사업을 벌이는 전라북도에서 특히 유념할 일이다. '전통문화'나 '근대문화'는 지역문화의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에서 타당성을 얻고 사람들의 정신활동과 연계돼야 비로소 '문화'가 된다. 이것이 아니라면 전주나 군산은 결코 '문화도시'가 될 수 없다./김성환(군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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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4.14 23:02

[문화마주보기] 진화하는 페미니즘의 눈으로 세상보기 - 한면희

과거 여성들은 세상 살기 참 힘들었다. 남성들이 쳐놓은 덫으로 인해 꼼짝없이 가정에 갇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연 헤리엇 테일러 밀은 여성이 남성만큼 이성적이기 때문에 하인을 두어서라도 가사부담을 줄여서 사회의 공적인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런 운동 덕분에 영국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기 시작했다. 다만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은연중 계급차별을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적용 대상이 지배계급의 여성으로 국한되었다.마르크스주의도 여성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섰다. 엥겔스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자연에서 얻기 위해 협력적인 사회적 실천에 동참해야 하고, 이것은 여성에게도 해당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여성해방의 첫 번째 길은 여성이 공적인 산업에 투입되는 것이었다. 여성 모두에게 사회진출의 문이 조성된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여성이 떠맡았던 가사와 육아, 자녀교육은 어떻게 할 것인지가 남는다. 이에 대한 두 번째 길은 가사의 사회화였다. 그래서 탁아소 등을 설치하여 사회가 가능한 한, 가정의 일을 떠맡는 방도를 취했다.그렇다면 자유주의나 마르크스주의 이념만으로 여성문제는 해소된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여성이 사회에 진출한다고 해도 여전히 사회에서 지시하고 명령하는 중요 직책은 남성의 몫이었고, 여성은 지시를 받는 일이 주어졌을 뿐이다. 자유주의나 현존 사회주의 국가에서 대체로 그렇게 점철되었다. 왜 그런 것일까? 남성들이 생물학적 성(sex)이 다른 것을 기화로 사회적 성별(gender)에 대한 차별을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가부장제가 의식 속에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서 제도적 차별을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청산하고자 한 흐름이 급진적 페미니즘인데, 법과 제도는 물론 문화도 바꾸고자 했다. 그래야 의식도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위기가 증폭되는 요즈음 생태주의 페미니즘이 출현하여, 여성억압과 계급차별, 인종차별, 그리고 인간에 의한 자연 수탈을 함께 청산할 때 비로소 여성이 남성과 더불어 온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올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이렇게 여성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페미니즘 흐름이 계속 진화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자화상은 어떤가? 많이 나아지기는 했다. 그러나 최근 맑고 고운 이 땅의 여러 여성들이 가부장적 남성의 교묘한 사회적 덫에 걸려서 잇따라 자살을 선택하였다. 가장 최근에 아름다운 청춘을 뒤로 하고 자살을 택한 장자연씨도 마찬가지다. 항상 이런 사건 이면에는 남성 가부장적 문화가 추잡하고 음험하게 드리워져 있다. 계급이든 자본이든 인종이든 차별이 있으면서 권력이 작동하는 지평에서는 여성이 지속적으로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구조적 문제의 청산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이것을 남김없이 해소하지 않는 한 이 땅의 여성은 자칫 죽음의 나락에 떨어지기 십상이다. 특별히 이점은 권력을 행사하는 재계와 정계, 언론계가 명심해야 할 바이다./한면희(전북대 쌀삶문명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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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4.07 23:02

[문화마주보기] 스포츠와 드라마 - 곽병창

스포츠와 드라마는 많이 닮았다. 사람들은 스포츠 경기에서의 역동적이고 우열을 가리기 힘든 승부를 가리켜 극적인 승부라 말한다. 극적인 것은 그만큼 서로 맞서고 있는 팽팽한 힘의 대결과 충돌을 전제로 한다. 5차전까지 치른 한일전 야구처럼, 그 질기고 강한 싸움이 마침내 한 쪽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을 때 사람들은 '극적인 명승부'라며 환호하거나 탄식한다. 물론 아주 드물게는 결과에 승복하지 못 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스포츠의 결말은 상대에 대한 포용과 긍정을 통해 서로의 우열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스포츠 스타들은 많은 사람들의 염원과 기대를 한 몸에 쓸어안고 '운명적인' 도전을 펼친다는 점에서 아득한 제정일치 시절의 제관들과도 닮았다. 뿐만 아니라 제의의 연장으로 극을 만들어서 신께 경배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던 시절의 배우들과도 닮았다. 그래서 학자들은 스포츠를 현대의 제의라 표현하기도 한다.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드라마의 영역도 현대적으로 변형된 제의의 일환이다. 사람들은 드라마를 통해 동시대의 애환을 되새기고 타인들의 삶에 주목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드라마 속의 배우들은 잠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면서 일시적으로나마 스스로의 자아를 남에게 대여해 주는 존재들이며, 그 일정 시간 동안의 홀림을 통해 세상에 대해 성찰하고, 궁극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이들에게 삶에 대한 지혜와 용기를 전해 준다.스포츠는 또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결속력을 다지는 데에 탁월한 기능을 발휘한다. 김연아가 시상대 위에서 애국가를 들으며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면 많은 국민들이 따라서 운다. 야구대표팀의 김인식 감독이 '야구보다 국가가 먼저'라는 출사표를 던지고 천신만고의 승부를 펼쳐 내는 동안 국민들은 온통 하나가 되어 울고 웃는다. 서울역 대합실의 노숙자들까지도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의 소속, 연봉, 최근 성적까지를 두루 꿰고 앉아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한다. 물론 엘에이의 야구장, 피겨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교민들에게 조국은 막연히 강요된 추상명사가 아니다. 스포츠를 통해 그들에게 본능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조국의 이름은, 듣기만 해도 핏줄이 요동치며 돌고 살갗이 더워지는, 분명하고 구체적인 이름인 것이다.스포츠만큼, 드라마만큼, 분명하고 구체적인 감동과 즐거움을 주는 정치권력은 왜 없을까? 운동선수들은 필사즉생의 각오로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훈련한다. 시합에 나가서는 한 치의 후회도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한 승부를 펼친다. 이기면 승리를 만끽하고 지면 묵묵히 돌아서서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이 명료한 과정을 정치의 영역에서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까? 배우들은 늘 자신을 비우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 다른 이의 자아를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내 자아를 잠시 비워 내고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스스로의 편협한 삶을 확장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를 보는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과 깨달음을 준다. 나 아닌 다른 존재를 긍정하는 '대신 살아보는 연습'을 권력 가진 이들에게도 좀 권해보면 어떨까?스포츠나 드라마가 국민들의 의식을 마비시켜서 탈정치적 '중우(衆愚)'를 만들어낸다고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정치적 중우(衆愚)'들이 스포츠만큼만 정직하고, 드라마만큼만 열린 존재들이었으면 좋겠다./곽병창(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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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3.3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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