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2-21 21:50 (Sun)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문화마주보기

[문화마주보기] ‘읽는 도서관’에서 ‘찾고 보고 즐기는 도서관’으로

이재 황윤석은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불린다. 고창 출신 그가 남긴 이재난고(頤齋亂藁)는 무려 53년 동안 그가 듣고 보고 배우고 생각한 것들을 담은 일기체 기록이다. 18세기 조선의 생활상과 지식 생태계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백과사전’, ‘타임캡슐’로 평가받는다. 12월 3일 고창에서는 이재 선생의 이름을 딴 의미심장 도서관 개관식이 있었다. 2019년 생활형SOC복합화사업에 선정되면서 시작해 햇수로 7년여 민관이 힘을 합쳐 준비해온 지역 거점도서관이 단장을 마치고 문을 연 것이다. <고창황윤석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달고 자랑스레 첫선을 보였다. 군단위 도서관으로는 이례적이다. 200억을 웃도는 거대 예산에, 지하 1층에 지상 2층 총 3층 높이 3미터 이상 높다란 천정 목구조며, 100여 미터에 달하는 길이 외형은 ‘이례적’이라는 말 그대로다. 설계진과 고창군은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맘껏 책을 읽는’ 특별한 독서의 근본 경험을 건축의 틀로 반영했다고 한다. 지하 1층은 지역문화활동 중심공간이다. 다목적 강당과 동아리실, 배움실은 공동체 독서와 문화 모임을 담는 곳으로 마주침 공간은 작은 전시와 창작 발표가 이뤄진다. 마침 개관기념 팝업북 전시를 열고 있다. 도서관 핵심기능을 담은 지상 1층은 일반자료실·어린이자료실에, 도서관 상징 공간 북마운틴(Book Mountain)이 자리하고 있다. 이재 선생의 실학정신을 담은 다양한 기록관련 자료도 압축해 수서하고 있다. 차분한 독서와 감각적 체험이 가능한 지상 2층은 두 개 일반자료실과 책마루 테라스, 작은 카페와 미디어아트 갤러리, 오디오북 체험공간을 두루 갖췄다. 바야흐로 도서관 전성시대다. 책을 읽는 공간, 지식의 보급처로서 도서관은, ‘도서관이 생기면 집값이 오른다’는 생활중심형에서, 이제 지역의 거점 관광 인프라로서 기능을 확장하는 시대이다. 이웃 일본의 경우만 해도, 북콜로세움이라는 별명이 붙은 가나자와시 이시카와협립도서관이 ‘관광형 도서관’으로 주가를 올리며 ‘핫플레이스’에 등극했다. 마치 고대 로마 콜로세움처럼 4층 높이 서가가 원형으로 웅장하게 펼쳐져 도서관에 들어서는 순간 압도적인 시각적 경험을 주며 지역 주민보다 외부 관광객의 발길을 더 잡아끌고 있어 지역경제를 움직이는 중요한 축이 되고 있다. 이 추세는 ‘읽는 도서관’에서 ‘찾고 보고 즐기는 도서관’으로 변화상을 반영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개관한 경기도서관이 독특한 외관과 나선형 서가로 도서관 전체가 하나의 서가로 이어진 형태로 건축미를 강조해 호평을 받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전주시는 다양한 형태, 테마를 가진 특별한 도서관 도시로 거듭나고 있고, 전북특별자치도는 2027년 완공을 목표로 축구장 4개 넓이, 20만 권 넘는 장서에 야외 정원까지 담는 전북대표도서관을 계획하고 있다. 도서관이 관광 거점으로 역할을 하고 있는 마당에, 지역의 인문테마공간을 찾고 연계해 다양한 책과 문화를 잇는 새로운 문화관광벨트로 확장하기를 바란다. ‘문화로 지역창생’하는 바탕을 다지는 일이다. 도서관을 비롯한 지역의 대표 책 공간을 연결해 조용하지만, 마음 양식을 든든하게 채우는 인문여행의 수요를 확보할 것이다. 물론 인문정신의 확산이라는 도서관의 본래 취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얼마 전 광주광역시 대표도서관 공사현장에서 매몰되어 세상을 떠난 일꾼들의 명복을 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5.12.15 18:29

[문화마주보기] 누렁이와 빼빼

어떤 독서 모임에서 내 시편을 해설해 달라는 강의 요청이 왔다. 고마웠다. 세간에 알려진 유명한 시가 아니라 야인의 숨소리 같다는 내 시를 해설해 달라니. 작품을 몇 편 추리는데 문득 누렁이와 빼빼가 떠올랐다. 누렁이가 새끼를 열두 마리나 낳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틀 뒤 빼빼가 새끼 아홉 마리를 또 낳았다. 신통방통한 일이었다. 똥개가 새끼를 이렇게나 많이 낳다니.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 실제로 생기자 우리 가족은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스물넷이던 그해 봄, 개가 잘 되면 집안이 일어선다고 치성드리던 어머니 치맛자락에 치렁치렁 새벽빛이 매달려 있었다. 누렁이와 빼빼는 새끼를 혀로 핥아서 키웠다. 눈도 못 뜨고 낑낑대는 어린 목숨들의 요모조모를 짬짬이 혀로 핥았고 새끼가 구물구물해도 배곯은 놈에게 먼저 젖을 물렸다. 마릿수는 줄었지만 누렁이와 빼빼는 그 뒤로도 새끼 여러 배를 낳았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마당 화덕에 걸린 큰솥에 미역을 넣고 녀석들 밥을 펄펄 끓였다. 배란기가 오면 대문에 동네 수컷들이 모여들어 주둥이를 킁킁댔다. 어머니는 망설임 없이 덩치 큰 수컷만을 마당에 끌어들였는데 녀석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씨알 굵은 새끼들을 잘도 낳았다. 밤하늘을 빠개 먹듯 번갯불이 내리꽂히며 장대비가 좍좍 쏟아지던 밤, 녀석들 집을 살핀 적이 있는데 내가 다가서니 되레 내 손등을 살갑게 핥았다. 새끼를 낳았을 때마다 제 쌀강아지들을 장에다 몽땅 팔아버린 내가 밉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누렁이와 빼빼의 정은 한결같았다. 낯선 이가 대문께 얼쩡거리면 컹컹 짖어 빈집이 아님을 알렸고, 한 번도 내게서 등을 돌리지 않았다. 시 몇 편을 추리는데 까맣게 잊어먹은 누렁이와 빼빼가 왜 떠올랐는지…. 야인의 숨소리 같다는 내 시를 읽은 사람은 드물다. 시집을 네 권씩이나 냈어도 내 시를 평(評)한 사람은 더 드물다. 남들 시보다 빼어나지 못한 데다 언어의 쓰임새도 문명적 색감을 물고 광휘를 내뿜는 날렵한 섬광과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농경문화 속에 버무려진 삶의 모양새 일부를 전북의 토박이말과 막말이 섞인 입똥내 튀는 말씨로 끌어낸 게 내 시의 주된 밑그림이므로. 하지만 소통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언어에 선행하는 사람다움의 행위를 돋을볕처럼 붓끝에 벼리고자 골을 뺐을지언정 현대성을 앞세워 시행 앞뒤의 맥락을 고의로 훼손하지 않았으니. 그러자 누렁이와 빼빼가 또 떠오른다. 뭔가가 못마땅한 눈치다. 까불지 말라는 것 같다. 남들 일할 때 나도 일하고 남들 쉴 때 나도 쉬는 세상- 이 꿈에 등을 보이지 않았다면, 젊은 시인들 시가 왜 앞뒤 내용을 고의로 왜곡하고 몽환적 관념에 빠진 것도 모자라 돌연 유령까지 출현시키는지 고민해봤냐는 항의로 읽힌다. 이쯤 되면 누렁이와 빼빼는 똥개가 아니라 내 시의 또 다른 현실이자 도반(道伴)이 아닐까. 그렇다면 녀석들은 문득 떠오른 게 아니라 나를 일부러 찾아온 게 틀림없다. 내 주변을 오래 맴돌았음이 분명하다. 아아, 까맣게 잊어먹은 옛정이 시의 정혈에 눈도 못 뜨고 낑낑대는 내 목숨의 요모조모를 혀로 핥아대다니. 난해하다고 자폐적이라고 비판받을망정 서정시의 오랜 질서를 거절하는 젊은 순정을 시의 문법으로 모시라고 나를 말똥말똥 바라보는 누렁이와 빼빼라니! 독서 모임에 가져갈 시편을 추리다 말고 나는 코가 시리다. 순정 한 잔이 간절하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5.12.08 18:10

[문화마주보기] 전주의 헤리티지, 영화

콘텐츠 업계에 시간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 대중음악계에서는 ‘차트 역주행’이라는 표현이 흔해질 정도로 과거의 노래가 신곡이 아님에도 인기를 끌며 재조명 받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최근 영화관도 신작보다 고전영화의 집객 결과가 높을 때가 많다. 이를 반영하듯 수입배급사들은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명작이나, 유명한 영화의 복원판을 구해 재개봉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수치로만 봐서는 음악이든 영화든 신작이 줄어 생긴 현상은 아니다. 음악 소개 사이트를 보면 하루에 수십곡이 발표될 정도로 많은 창작물이 쏟아진다. 한 명의 인간이 내용을 소화하고 즐기고 애착을 느낄 시간에 비해 과도한 선택지가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2주 안에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창작자들에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긍정적 측면은 창작물이 온라인 공간 속 어딘가 존재만 한다면 절적한 시기에 향유자를 만날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고, 부정적 측면은 창작자들은 이제 시대를 초월해 역사 속 모든 창작물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창작물이 있어도 제대로 된 관리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며칠전 대만 감독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1989)가 한국에서 특별 상영을 했는데 표를 못구한 사람들의 개봉 요청이 소셜미디어에 빗발쳤다. 이정도 호응이면 수입사들이 움직일법도 한데 저작권과 관련된 복잡한 사정으로 이 영화는 이벤트 상영으로 그치게 됐다. 80년대 후반 영화가 2025년에 여전히 현재의 영화로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음이 증명되었지만, 저작권에 대한 세밀한 관리가 한 곳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확장성이 제한된다는 것을 깨우친 사례이다. 인터넷이 불러온 디지털 환경은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정보를 찾아서 즐길 수 있게 했다. 오프라인에만 존재하던 과거의 기록을 온라인 공간에 아카이빙 하기 시작한 여러 기관과 개인의 참여로 이제 우리는 대부분의 정보를 온라인에서 접할 수 있게 됐다. 영화분야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한국영상자료원이 만든 자체 사이트 KMDb VOD를 들 수 있다. ‘한국고전영화’ 라는 이름으로 방대한 한국영화와 관련 영상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고 현재는 유투브와 네이버TV에서도 상영중이다. 이는 국내외 시네필, 영화관련 종사자와 학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한국 영화 아카이브 중 하나이다. 전주라는 도시가 영화로 알려지게 된 것에는 전주국제영화제의 활약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 영화제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영화제가 영화를 제작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 ‘디지털삼인삼색’이라는 이름으로 42편의 단편영화를 제작했고 일부를 제외하고는 저작권도 영화제가 확보하고 있다. 이후 장편 영화 투자 프로그램 ‘전주시네마프로젝트’의 경우 약 40편이 만들어졌고 저작권의 일부 권리를 가지고 있는 형태이다. 지금까지는 영화관, 미술관 등과 협업을 통해 특별 상영 형식으로 스페인, 독일, 멕시코 등에서 상영을 해왔지만 콘텐츠 업계의 변화된 시간 개념을 고려한다면 전주국제영화제가 저작권을 보유한 창작물을 아카이빙을 하고 한국영상자료원의 예와 같이 전세계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온라인의 공간이 마련되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제작한 영화들은 수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 유산으로서 관리될 수 있는 행정, 제도적 절차가 필요하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5.12.01 18:42

[문화마주보기]중앙의 문화정책, 이젠 속도보단 방향이다

최근 문화예술정책자문위원회(위원장 은희경)와 대중문화교류위원회(공동대표 최휘영장관, 박진영)가 잇따라 출범했다. 문학, 연극, 뮤지컬, 음악, 국악, 무용, 미술 등 9개 분야에서 현장 이해도와 통찰력, 전문성, 경험을 갖춘 위원 90명으로 구성된 정책자문위원회는 창작 기반과 예술정책 자문을 집중 담당하고, 대중문화교류위원회는 글로벌 진출과 산업 교류 역할을 실행하고자 설립되었다. 창작과 산업, 그리고 해외확장이라는 한국 문화정책의 두 축이 마련된 셈이다. 문화예술 현장을 담아 문화산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문화계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염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위원회의 구성과 역할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가지 결정적인 헛점이 보인다. 바로 지역문화의 비전과 과제를 논의할 분과가 없다는 점이다. 위원 명단에 지역 인사가 일부 포함되었다고 해서 지역문화정책이 자동으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예술교육, 순수예술지원, 중소공연장 활성화, 예술단체의 존속성 같은 과제는 중앙보다 지방이 훨씬 절실할것이다. 지역의 생각과 전략을 다룰 제도적 기구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최근 대통령직속 지방시대위원회와 국립중앙박물관이 국가균형성장과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해 처음으로 공식 협약을 체결한 것은 지역입장에서는 고무적이다. 전국 13개 국립박물관을 지역문화의 중심기관으로 육성하고, 지역 간 문화격차를 해소하며, 각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콘텐츠를 공동 개발하겠다는 것은 분명 중요한 진전이다. 지방시대위원회가‘문화가 함께할 때 국가균형 성장이 완성 된다’고 피력 한 것은 지역문화의 중요성이 국가 전략으로 필요불가결(必要不可缺)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런 외침만으로는 구조적인 변화에 한계점이 있다. 지역의 현실과 니즈를 수시로 분석하고 지원할 지역 단위의 정책기구가 없다면 정책은 여전히 중앙 중심의 흐름 속에서 머무르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우리는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다. 프랑스는 중앙 문화부와 함께 지역 단위의 지방문화청(DRAC)을 운영하면서 순수예술 지원과 지역문화 생태계 조성 관리를 통해 직접 지원 한다. 영국 아츠카운슬(Arts Council)은 런던 본부 아래 지역별 사무소를 두어 지역 예술단체 지원, 투어링 공연 배분, 창작 레지던시 운영을 자율적으로 결정한다. 독일은 연방과 주(州)가 문화정책을 이원화하여 지역의 문화기관이 독립적으로 예술인을 지원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게 도와준다. 해외에서는 이미 ‘중앙–지역’이 병렬적으로 움직이는 구조가 기본이 된 지 오래다. 이제 우리도 지역문화위원회(Local Arts Council)를 출범해야 한다. 단순한 자문기구가 아니라 지역문화를 직접 설계하고 집행할 권한을 주기 위해 전폭적인 예산지원도 필요할 것이다. 위원회가 성공하기 위한 제언을 하자면, 첫째, 지역의 예술인, 공연장, 예술단체를 연결하는 창작 생태계의 조정자 역할이 필요하다. 중앙 공모사업 중심 구조로는 지역 간 격차를 좁히는 건 한계가 있기에 전문 컨설턴트를 지방에 파견하는 사업(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문예회관 공연예술 기획, 제작 컨설팅)을 대폭 확장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는, 지역의 문화 자산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 공연, 축제, 창작 콘텐츠를 발굴하는 중장기 전략을 배양시켜, 문화로 자생할 자양분을 만들어줘야 할 것이다. 셋째, 청년 예술인 지원을 생활 기반, 창작 공간, 멘토링, 네트워크 구축과 같은 지역 기반 체계로 전환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지역문화위원회는 중앙 위원회와 동반성장 할 수 있는 양방향 소통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지역의 주요 어젠다와 의견이 위원회를 통해 중앙에 전달되고, 중앙 정책이 지역에 맞게 조정을 통해 지원되는 구조가 마련될 때 비로소 우리 문화정책은 지속 가능한 생태계 형태를 갖추게 된다. 지금처럼 중앙이 정책을 설계하면 지역이‘실행’만 하는 방식으로는 지역문화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온전히 구현해내지 못한다. 정책자문위원회가 순수예술 창작정책을, 대중문화교류위원회가 문화산업, 교류 정책을 맡았다면, 이제 남은 미션은 ‘지역문화 정책’을 책임질 위원회다. K-컬처를 세계속으로 더욱더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중앙의 성과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역에서 피어나는 문화의 다양성과 창작 역량이 함께 성장할 때 비로소 한국 문화는 지속 가능한 구조를 갖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위원회가 아니라, 더 촘촘한 문화생태계다. 그 시작은 지역문화위원회 설치에서 출발해야 한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5.11.24 18:29

[문화마주보기]로컬, 영화제, 영화, 그림책, 사람이 만난다

들녘은 가을걷이가 마무리되어 간다. 가을 내내 이어진 축제들도 사람들 이목을 끄느라 요란시끌을 가라앉히고 차분해지고 있다. 그 가을 행사 가운데 색다른 영화제에 주목한다. 지난 11월 14~15일 순창에서 열린 제2회 순창어린이청소년영화제다. ‘지구를 쉬게 해주세요’라는 주제로 열린 영화제는 순창지역 여섯 개 초등학교에서 지구와 인류의 모습을 생각하며 만든 영화가 상영되었다. ‘내 친구가 타임머신을 타고 사라진 날(유등초)’, ‘이상한 나라의 숨바꼭질(풍산초)’. ‘케이팝 지구 어벤저스(옥천초)’, ‘내 친구 플라스틱 좀비(동산초)’ 여섯 개의 영화는, 친구들이 앞으로 살아갈 지구와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고민을, 스스로에게 이웃 어른들에게 슬쩍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제는 ‘우리영화만들자협동조합(우영자)’이 지역 안팎 영화 친구들과 함께 품 모아 여는 작은 영화제이다. 2019년 순창으로 이주한 여균동 감독과 김영연 대표가 중심이 되어 지역 어린이 청소년들과 차근차근 영화를 만들어 온 과정의 매듭이기도 하다. 이번 영화제 폐막작으로는 올해 순창청소년영화캠프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 <같이 걷는 중>이 상영되었고, 마지막 일정은 <초등학교 영화캠프 현실과 대안>이라는 주제로 열린 시네포럼이었다. 여균동 감독이 순창으로 내려와 이듬해 책마을해리와 만났다. 어린이청소년들과 2012년부터 출판캠프를 통해 책을 만들어오던 책마을해리는, 우리 지역에서 영화로 함께하려는 시도가 반갑고 고마웠다. 몇 년 사이 그의 <우영자>와 책마을해리는 보름 동안 영화학교를 열어, 청소년 영화 <그해 여름>을 함께 만들기도 했다. 청소년영화캠프를 통해 청소년들이 영화와 스스럼없이 어울린 과정을 담은 단행본 《씨네틴즈, 영화로 이야기해요》도 품 보태 출간했다. 오디션부터 상영회까지 영화캠프의 모든 과정을 담고, 친구들의 고민이 잔뜩 담긴 시나리오도 몇 편, 시나리오 작가부터 촬영, 음향, 조명, 편집 감독 들의 인터뷰도 담았다. 영화제작자로서 역할을 하려면 어떤 준비를 하면 되는지, 청소년들에게 진로 길잡이 역할도 하는 책으로다. 재작년부터는 책마을해리와 그림책 출간 프로젝트를 함께 이어오고 있다. ‘시나리오 그림책’ 시리즈로 영화와 그림책을 사랑하는 독자와 만나고 있다. 시나리오 작업이 어려운 초중등 친구들에게, 등장인물은 많고, 지문은 적고 대사는 많은 장면 장면을 영화의 장면으로 확장할 수 있게 안내하는 그림책이다. 이제까지 《비밀의 정원》, 《초록눈 호랑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에 이어, 최근 《그녀의 꿈은 밀라노에 가는 거였다》가 출간되었다. 여균동 감독이 누군가와 그려내고 싶은 영화, 어린이와 청소년에서 실버 세대로, 경계에 선 이주민들로, 청년으로, 삶의 한 구비를 건너가는 중년 세대로 확장하고 있다. 시나리오 그림책도 그 확장을 차근차근 담아내고 있다. 영화를 마치고 올해 가을걷이 끝낸 헛헛한 마음의 여균동 감독이 이 시나리오 그림책을 가지고 지역의 독자와 만난다. 영화와 견줘 이야기 나누는 그림책이니, 영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도 반가운 일이다. 오래전부터 밀라노 여행을 꿈꾸며 설레는 주인공의 일상을 나누며 우리를 설레게 하는 어떤 존재를 잃은, 꿈을 잃은 우리에게 그 사그라든 불씨를 다시 피워내게 하는 자리가 되어줄 것이다. 11월 29일 토요일 늦은 2시, 일곱 책방이 나란나란 자리한 고창서점마을에서다. 이대건 고창 책마을 해리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5.11.17 18:43

[문화마주보기]첫눈

첫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남녀합반인 우리 교실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첫눈은 시시하게 내리다가 말다 그치고마는 것인데 그해 첫눈은 유리창을 가득 메우며 쏟아졌다.고1이었던 우리. 나는 옥이를 바래다주기 위해서 나섰다. 가시내는 벽골제와 명금산이 가깝게 보이는 동네에 살았다. 손목에 차는 노란 고무줄로 참새 꽁지같이 묶은 뒷머리에 눈송이가 붙들렸다가 떨어지곤 했다. 우산이 없어 스케치북으로 머리를 가려주었다. 그래도 눈송이가 달려들어 옥이의 흰 목덜미를 빨아먹었다. 쌓인 눈 위에 다시 펑펑 눈송이가 쏟아지는, 스케치북이 감당을 못하는 함박눈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냥 눈 맞음서 걷자.” 옥이는 내 어깨에 묻은 눈을 털어주며 입술을 빛냈다. 눈썹이며 볼이며 턱선의 맺음새가 붓으로 그린 것처럼 고왔다. 교문에서 나와 화호 초등학교 담장을 끼고 걸으면 정자동으로 넘어가는 낮은 언덕이 있고 거기를 지나면 방앗간을 낀 작은 삼거리가 나왔다. 우리는 김제 쪽으로 가지 않고 느티나무들이 서 있는 정자 앞 농로, 명금산으로 가는 지름길에 들어섰다. 눈발은 그칠 낌새를 지운 듯 펑펑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신발이 푹푹 빠졌다. 옥이의 자주색 책가방을 내가 들고 얼마나 걸었을까. 눅눅해진 스케치북으로 머리를 가렸고 내게 바짝 붙었지만 감청색 코트를 눈발에 맡기다시피 한 옥이가 턱을 떨고 있었다. 곧 꽁꽁 언 눈사람이 될 것 같았다. 안 되겠다, 무슨 수를 내야겠다. 주위를 둘러보니 초가집 같은 짚벼눌 두 동이 있었다. 그 앞으로 다가섰다. 짚다발을 빼내려고 용을 썼다. 한 개만 빠지면 여러 개가 쉽게 빠질 터, 그러면 우리는 짚벼눌 속 안방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짚다발은 빠지지 않았다. 어른들이 짚다발끼리 밀착시켜 얼마나 아금박스럽게 쌓아 올렸는지 고1짜리에게 짚다발은 숫제 악다구니를 썼다. 엊그제 친구들은 잘도 빼내던데 도대체 왜 이러냐, 기를 쓰며 실갱이를 벌였지만 짚다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발은 함박눈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그때 옥이가 옆의 짚벼눌을 가리켰다. 짚다발을 빼간 흔적이 눈에 덮이고 있었다. 그 앞에 가서 짚벼눌 어개지지 않게 짚다발 여남은 개를 뺐다. 우리는 짚벼눌 속 안방에 들었다. 서로 눈을 털어주며 손을 맞잡기도 하며 앞니 드러내고 맘껏 웃었다. 붓으로 그린 듯한 옥이 얼굴이 발갛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짚벼눌 바깥을 죄다 지워버린 함박눈이 펑펑 짚벼눌 안방을 덥히고 있었다. 키도 작고 못생긴 데다 손이 야물기는커녕 짚다발로 못 빼는 순 엉터리를 아끼는 옥이. 얼굴에 눈송이 녹은 물이 빛났다. 이마며 콧등, 희디흰 목덜미에 맺힌 물기를 나는 손수건으로 찍어냈다. 좁아터진 짚벼눌 안방에서 옥이가 내 팔을 꼬옥 끼고 가만가만 숨길을 열어주었다. “이 길을 걸어 집에 갈 때먼 꼭 니가 따라오는 것 같었어야… 뒤돌아보면 너는 없고, 몇 걸음 띠다가 뒤돌아보면 너는 또 없고… 그래서 아예 뒤로 걸었어야… 하늘엔 초저녁 별이 드문드문 떠 있고. 맞어, 그때보톰 너는 내 별이었어야. 오늘은 첫눈이고…” 새끼염소의 혀처럼 말랑거리는 옥이 목소리가 내 심장에 또록또록 박히고 있었던가. 나를 바라보는 가시내 눈망울 속에 뭔가가 일렁였던가. 집에 가기 싫은, 이 짚벼눌 속 안방에 오래오래 갇히고만 싶은 우리를 응원하듯 함박눈이 펑펑펑 쏟아졌다. 옥이 목선이 더 가늘어졌다. 이병초 시인

  • 오피니언
  • 기고
  • 2025.11.10 18:31

[문화마주보기]인공과 지능의 영화

세상에 없던 것이 나타나면 우리는 이름과 의미를 부여하기 마련이다.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이 느낀 감정은 신기함이었다. 영화의 탄생도 마찬가지였다. 인공지능(이하 AI)의 출현 또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유흥, 지식 전달, 심리 치료까지 다방면에서 “효율성”을 내세우고 있다. 사진은 ‘시간 속의 인간 역사 경험’과 같은 유일무한 장치로 자리매김 했지만 AI가 무엇이 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AI영화가 제작비 0원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동으로” 영화를 만들어낸다고 언론에서 주목한다. 이 말에는 몇가지 모순이 있다. 하나, AI영화는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아이디어, 지시 언어, 이를 구현할 프로그램이라는 토대가 있어야 한다. 기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선 이미지 데이터 확보를 위한 시간, 비용, 인간 노동이 들어간다. 둘, 영화는 창작의 영역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픈 인간의 표현욕구에 의해 시작되는 활동이다. 즉, AI(타율)와 영화(자율)는 주체성의 차이가 명확해 등가관계가 아님에도 상반된 단어를 붙여쓴다. 상용되는 ‘AI영화’는 인공지능을 소재로 한 영화이거나,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여 제작된 영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현재의 단계에서는 AI활용영화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영화와 AI영화는 무엇이 다른가? 현재 AI영화가 하는 것은 ‘창작’이 아니라 ‘조립’이다. 인간이 창조하고 만들어둔 다양한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다 요청이 들어오면 그에 맞게 재조립하는 거다. 창작은 인간의 고민이라는 정신을 물성화시킨 결과이고, AI(활용)영화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조립하는 것이다. 전자는 과정에서 추출되는 무언가가 결과물이 되는 것이고, 후자는 결과물 간의 재조립이다. AI는 인공성의 시대를 열고 있다. 숏폼에는 조잡한 인공 이미지가 대중화됐고 영상의 완성도보다는 이야기 전개에 집착하며 배속보기가 유행하기도 한다. 몇가지 의문이 든다. 아름답지 않은 이미지도 예술이 될 수 있나? 이야기 자체가 영화를 뜻하진 않는데, 이야기만 남은 영상은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인간 경험이 실종된 창작물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AI영화가 진정한 혁신이자 창조라면 왜 기존 영화 문법을 복제하는가. 근본적인 논의도 필요하다. AI 영상의 차이점은 실재와 가공의 ‘이미지’에 있다. 촬영 원본이 없는 인공적인 이미지로만 구성되었을 때, 그것은 애니메이션에 가깝지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영화는 실재 움직임의 이미지를 구성한 것이고, 애니메이션은 정지된 이미지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단계에선 AI는 영화 제작 기간과 비용을 줄여주는 효용성 높은 "도구"이지, 그 자체를 영화라고는 부를 수 없다. 그것이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구체성을 가지고 실재적 이미지와의 어떻게 연결되어 구현될지를 증명해야 한다. 우리는 기술이 촉발한 경제적 속도에 취해 이미지의 사용 윤리와 미학에 대한 연구를 경시하고 있다. 많은 것을 누리지만 어떤 과정이 응축되어 있는지 드러나지 않는 상태다. 물론, 모든 것이 의미를 지닐 필요도 없다. 혼란 속에서 예술의 존재는 더 빛이 날 것이다. 다만, 타인의 고유 저작물을 공정하게 쓸 수 있는, 새로운 제작방식에 필요한 용어와 정책에 대한 논의는 인간의 지능과 기준으로 필요하다. 문성경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 오피니언
  • 기고
  • 2025.11.03 17:59

[문화마주보기]“영화로 생동하는 지역, 로케이션이 만드는 경제 패러다임”

김수일 전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 ​​​​​​ 한 편의 영화가 지역을 기억하게 하고, 그 기억이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는 굴뚝 없는 고부가가치 산업이 될 수 있다. ‘로마의 휴일’의 이탈리아 스페인광장과 ‘반지의 제왕’의 뉴질랜드는 영화촬영지 하나로 도시의 정체성을 변화시키고, 그 여운들이 지역경제를 움직이고 있다. 영상산업 자체가 지역의 풍경을 문화로 전환하고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2007년 부안군에서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정우성, 송강호, 이병헌 주연) 촬영이 8개월간 진행되었을 때 제작사 ‘바른손이앤에이’(기생충 제작사)가 집계한 지역 사용 예산만 18억가량 되었다. 숙박, 식음료, 운송, 소품 등을 대부분 현지에서 쓰이며 부안지역 소상공인들의 즐거운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영화 한편이 지역경제에 미친 파급력을 보여준 사례다. 전북특별자치도에서는 이 흐름을 캐치하여 영상산업을 전략적으로 키워왔었다. 2001년 설립한 (사)전주영상위원회는 전국 최초의 지역 영상위원회로 최근 4년(2021~2024)간 촬영유치 374편, 영상물 제작지원 120여 편, 전문인력 양성 87명이라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전북을 주제로 한 로케이션 관광 활성화 영상 6편을 제작하여 ‘영화에서 관광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면서 전북지역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용인, 문경, 대전 등에서 대규모 첨단 세트장들을 잇달아 세우며, ‘촬영하기 좋은 도시’에서 ‘제작하기 좋은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반면 전북의 세트장들은 여전히 비가 오면 소음으로 인한 녹음이 쉽지 않고, 공간과 건물이 노후화되어 제작 여건이 뒤처지고 있다. 대전의 스튜디오 큐브처럼 완벽한 방음과 배수 시설을 갖춘 곳, 문경의 버추얼 스튜디오처럼 LED월과 인카메라 VFX기술로 현실과 가상을 자유롭게 오가는 환경이 부럽게 느껴질 때가 많다. 최근 박보검, 김남길 주연의 <몽유도원도>가 크랭크인하면서, 제작진은 붉은 노을 장면을 담기 위해 여러 차례 부안을 찾았다. 석양이 바다 위로 떨어지는 순간의 빛과 색을 담기 위해 날짜와 시간 등을 고려한 촬영 포인트를 물색 중이다. 그만큼 부안의 해안 풍경은 한국 영화가 표현하려는 서정미를 가장 잘 담아 낼 수 있는 배경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흐름 속에 전북 부안군의 변화는 매우 고무적이다. 영상제작자 지원을 위한 조례 제정을 추진할 계획이며, 제작비 보조와 촬영 인센티브 제도를 현실화 시킬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는 단순한 행정적 조치가 아닌 로컬이 직접 문화산업의 주체로 나서려는 신호로 보인다. 이제 전북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촬영지의 양적 확장과 디지털화보단 기존 인프라의 질적 개선이 우선이다. 세트장을 리모델링하고, 경상북도 문경시처럼 지역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보조출연자 아카데미나 영상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하여 고용과 산업을 함께 성장시켜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전북특별자치도만의 자연과 아날로그 감성을 살린 스토리텔링으로 AI와 첨단화 중심의 수도권과는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영화는 기술이 입혀진 예술이자 굴뚝 없는 산업이다. 스크린은 닫혀도 이야기는 남고, 그 이야기가 피어나는 곳이 새로운 문화경제의 출발점이다. 한 장면의 여운이 한 지역의 경제를 움직이고, 한편의 스토리가 공장 몇 개의 역할을 대신하며, 새로운 일자리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전북이 지향해야 할 지속 가능한 제작 생태계다. 촬영(지역경제 활성화) → 관광(소비) → 고용(일자리)으로 이어지는 문화예술경제의 선순환 구조, 그것이 전북이 만들어야 할 영화의 다음 장면이다. 김수일 전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5.10.27 17:28

[문화마주보기]문화 거점을 이어 지역 융성 바탕이 되는, 세 빛깔 책 공간의 실험

올해 광복 80주년, 여러모로 우리에게 남다르다. 새 정부에 거는 기대가 큰 것만큼 우리 사회 곳곳 특히 문화판에서 불어올 새 바람에 대한 바램도 은근하다. ‘우리가 어느새 백범 선생이 이야기한 진정한 문화 강국이 되리라’ 하는 소리소리들이 피어나기도 한다. 대한민국 대표 문화거점 가운데 하나, 책마을해리에게도 이번 광복절은 남달랐다. 몇 중국 방문객 때문이다. 이 걸음은, 백범 김구 선생의 중국 유랑생활을 기록한 《위대한 유랑(처음책방)》의 번역 출판과 이어져 있다. 그 책의 중국인 저자 샤녠셩(夏輦生) 선생 집안은 김구 선생의 항일무장독립투쟁 당시, 경호원으로 주치의로 깊은 관계였다. 그 자신도, 백범 선생 아드님 김신 장군과 인연으로 오랜 준비 끝에 이 책을 출판했다. 그 30년 뒤 한국어판 출간에 맞춰 국회 출판기념회와 북토크에 참가하기 위해 제자들과 방한한 것이다. 일행은 수도권 일정 뒤 책마을해리를 찾았다. 샤 선생은 이번 일정에서 우리 전북 지역이 품고 있는 역사, 생태, 문화의 다양한 가치에 감탄했다. 특히 책마을해리의 어린이, 청소년, 청년, 지역민들 특히 연로한 선배들의 기록을 통해 서로 배우는 ‘선한 지혜의 순환’에 깊이 공감했다. 한-중, 중-한 인적 교류를 비롯해 그림책 출판을 통한 ‘서로배움’을 실천하자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와의 며칠 우리는 고창의 책 공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대산면 <고창서점마을>, 신림면 <책이 있는 풍경>, 해리면 <책마을해리>까지 이 책의 거점을 잇는 문화의 삼각형이 말이다. 그 한 거점, 책마을해리는 2006년 초부터 터를 닦아, 문화관광부로부터 대한민국 대표 책마을로 선정되기도 한다. ‘누구나책’을 기치로 14년 동안 이어 5천여 명이 작은 책들을 통해 저자로 다시 태어났다.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상업출판은 지역의 인적, 생태, 역사, 문화 자원을 가다듬어 250여 종을 출판했다. 연간 1500여명이 방문하고 있다. 다른 한 축, <책이 있는 풍경>은 2012년 5월 개인 문학관 작은도서관 성격의 건물을 지어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러차례 증축을 통해 문학관, 어린이도서관, 시인의방 같은 책 공간이 즐비하다. 400여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활발한 인문학강좌 등 배움학교들이 열리고 있다. 2013년 가을부터는 매년 문학과 다양한 예술장르가 결합한 융합인문학콘서드를 열어오고 있다. 마지막 축은 지난 10월 11일 문을 연 <고창서점마을>이다. 문화평론가 이윤호 촌장이 오랜 준비 끝에 여섯 개의 책방과 한 개의 공동운영 헌책방을 마련하고 ‘서점들의 마을’로 긴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이 세 축의 문화실험은 올 시월 각자의 색을 도드라지게 펼쳐낸 축제로 책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책마을해리가 9일부터 13일, 10년 가까이 이어온 <책영화제>에 <전국동네책방 가을운동회>를, 고창서점마을은 첫 책축제 <페이지>를 10월 11일에, <책이있는풍경>은 10월 18일 가을인문학콘서트를 성대히 열었다. 한해 한해 이 책의 이야기는 인문학으로 지역을 어떻게 융성하게 할 것인가, 끊임없는 고민하고 여러 빛깔로 펼쳐낼 것이다. 다른 나라 인문학자의 부러움을 사는 이 실험과 시도에, 도민 모두 더불어 응원주시기를.

  • 오피니언
  • 기고
  • 2025.10.20 18:33

[문화마주보기] 별이 빛나는 밤에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하다. 맑고 차게 빛나는 별들을 헤치면 어릴 적 꿈들이 소도록 소도록 쌓여 빛날 것 같다. 진안고원의 안천면 구롓말, 친구 황의관네 질뚝배미 나락을 다 베고 집에 돌아와 저녁밥 먹은 뒤 마당에서 올려다봤던 밤하늘. 별들이 정말 무수히 반짝였다. 은빛을 뿜어내는 별들의 그물에 풍덩 뛰어들어 나는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싶었다. 그 별들이 그리워 만경 강변에 귀또리가 끊임없이 울어댈까. 별들이 달을 감춘 채 전하는 시간 바깥의 소식을 귀또리가 깨물어 먹는 건 아닐까. 별빛을 구슬구슬 매단 그 소식은 선사의 햅쌀 냄새가 묻어있으리라. 승용차 불빛이 휘익 지나가면서 눈앞을 막는다. 순간 하늘은 깜깜해졌지만 이내 총총해진다. 굳이 자정을 넘겨 마실 나온 저들도 어딘가에 차를 세우고 별을 헤며 둘만의 가을밤을 즐기리라. 불빛이 또 오는 기척이 있어 아예 눈을 감는다. 그런데 낌새가 없어 뒤를 돌아보니 삼례 쪽 비비정(飛飛亭)의 윤곽이 검게 보인다. 괜히 뒤를 돌아봤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정자 앞에는 ‘비비낙안(飛飛落雁)’이라고 적힌, 선인들의 묵향을 시늉하는 표지석이 있을 것이다. 비비정 오른쪽 경치를 KTX 철교가 잘라먹어서 반쪽 풍광이 되었고 백사장에 깃들던 기러기들의 날갯짓이 꺾였다는 말을 쏙 빼놓고. 여기만 이러랴. 경기전을 낀 풍남동과 한옥들이 여유롭고 고즈넉하던 교동은 말할 것도 없는 데다, 한벽당 옆에 육중한 콘크리트 다리를 놔서 정취를 망가뜨리고서도 한벽청연(寒碧晴煙)을 앞세워 전주 8경 중 한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니. 별이 빛나는 밤에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눈에 익은 산천 곳곳을 무덤 속같이 파헤쳐놓고 오죽잖은 콘크리트 건물이나 지어대면서 많은 이의 기억을 점방 구석에 처박힌 북어 꼴로 만들기 일쑤인 개발. 근본 까먹는 장삿속에 불과할- 일반인에게 자괴감과 소외감을 선물한 자본의 탐욕을 만날 때마다, 개발은 훼손을 넘어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내란으로 이해되었다. 사람은 대자연의 공동체적 삶을 물려받는 존재이며, 이런 ‘너나들이’의 생활 태도가 인류의 희망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터이다. 온갖 생명체들이 가꾼 생존의 터를 까뭉개는 야만의 경제와 사람다움을 간직한 삶의 온기가 동거하는 이 기괴한 현재가 우리네 정체성일 리도 없다. 그러므로 편리함에 익숙해진, 어쩌면 길들여졌는지도 모를 생활의 변화는 자본과 문명에 복종하라는 금빛 독배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 엄경희가 “위장된 편리함과 편안함에 자신을 내어준 자가 치러야 할 대가는 자유의 박탈이다.”(『시인동네』, 2018년 9월호)라고 지적한 구절은 현재형이다. 진안고원의 구롓말 밤하늘에도 쌀티밥을 뿌려놓은 양 별들이 반짝이리라. 올가을에는 질뚝배미 나락을 누구랑 벨까. 황의관에게 전화를 걸려다 그만둔다. 그도 자신의 어릴 적 꿈들이 어느 별에서 소도록 소도록 빛날지 생각하리라. 강변에 바람이 소슬하다. 시간 바깥의 소식은 모두의 일상 속에 있다고, 점점 잃어가는 너나들이의 생활 태도를 회복하자는 것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또 있겠냐고 별들이 반짝인다. 제 잇속 채우려고 산천을 까뭉개든 4차 산업이 당도했든 말든, 오천 년 역사가 내장된 자연의 생명력을 자본과 문명이 내미는 엿과 바꿔 먹지 않겠다는 듯- 만경강 하늘에 별들이 총총하게 빛나는 밤이다. 이병초 시인·전북작가회의

  • 오피니언
  • 기고
  • 2025.10.13 18:15

[문화마주보기] 예술의 영역에서 성공이란 무엇인가

부산국제영화제가 30회를 맞았다. 개막식에서 이병헌 배우는 자신의 경력과 비슷한 시기에 영화제가 시작됐음을 언급하며 한국 영화의 흐름 속에서 일해온 기쁨을 표현했다. 한국 영화는 1987년 민주주의가 제도로 안착하던 시기에 변화가 일어났다. 영화학교가 설립되어 전문가들이 배출됐고, 95년부터는 영화잡지가 출간됐다. 96년부터 창설된 국제영화제들은 세계의 다양한 영화를 소개했다. 비디오 대여점의 호황과 대기업의 멀티플렉스 진출은 영화 관람을 일상의 문화 활동으로 자리잡게 하고 시장의 성장을 촉진했다. 국민의 상당수가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시기에 ‘코리안 뉴웨이브’의 감독으로 장선우, 박광수, 정지영 등이 이름을 알렸고 임순례, 홍상수, 이창동,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등이 뒤를 이었다. 이들은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경우가 대다수였고, 개별 차이는 있으나 현재까지 활동하는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들이다. 그런데 그 당시 재기 발랄하게 떠올랐던 독립영화 감독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현재 영화산업의 양태를 보면 투자자와 제작사가 분리된 구조에서 ‘데이터로 검증된 성공 요소’가 아니면 투자를 받기 힘들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감독 외에는 지속적으로 영화를 만들기가 요원하다. 산업이 활발히 돌아가고 이른바 돈이 돌 때에는 독립영화 지원과 실험도 가능하지만, 수익이 하양 평준화 된 상황에서 새로운 시도는 투자자에게 손실과 같은 뜻이다. 수익이 보장되지 않아 새로움에 투자하지 않고, 투자하지 않으니 비슷한 영화만 개봉해 관객들이 극장을 외면하는 현상은 자학적 순환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쯤 되니 영화라는 영역에서 성공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위대한 천재 감독 오슨 웰스는 영화 제작을 위해 부족한 돈을 구하러 다니느라 늘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 그는 영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 중 하나로 손꼽히며 <시민 케인>(1941)을 빼놓고 영화 역사를 말할 수 없다. 샹탈 아커만의 영화는 단 한 편도 금전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2022년 영국영화연구소(BFI)가 시행한 국제영화전문가 투표에서 역대 최고 영화 1위에 아커만의 <잔느 딜망>(1975)이 선정됐다. 지난 30년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영화를 우리는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후대에 기억되는 감독과 영화는 상업적 성공이 아닌 예술적 성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예술의 영역에서 성공은 무엇인가. 독창성에 그 비밀이 있다. 그 감독이 아니라면 창작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작가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현존하는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로 손꼽히는 차이밍량, 페드로 코스타, 클리어 드니, 알랭 기로디 등의 영화를 개봉하면 단 10명이 그들의 영화를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10명의 관객이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영화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2002)에는 1976년 록밴드 섹스피스톨즈가 라이브 공연을 하는데 극소수의 관객이 온 사연이 나온다. 그러나 그 장소에 관객으로 왔던 대부분이 조이 디비전과 같은 이후 음악계를 흔든 인물이 되었다. 어쩌면 예술에 있어 진정한 성공이란 영원성과 독창성을 내포한 창작일 것이다. 시대를 초월해 작품이 기억되고 다른 창작자에게 영감을 주어 예술의 확장에 기여하는 독보적 자리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성공 아닐까. 문성경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 오피니언
  • 기고
  • 2025.09.29 17:30

[문화마주보기] K팝 데몬 헌터스가 쏘아올린 공 –하이브리드의 힘

왼쪽엔 ‘밥’, 오른쪽에는 ‘국’, 소파는 앉는게 아닌 기대는 가구, 2025년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애니메이션 K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는 이제 단순한 흥행을 넘어 전 세계인들이 한국으로 몰려와 먹거리부터 우리의 전통문화을 체험하고 스크린 속 세계를 현실로 재현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팬들은 케데헌 속 주인공이 오르던 계단을 따라 걷고, 남산타워 아래에서 인증샷을 남긴다. 요즘 미국과 유럽 학교 교실은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 포스터로 가득하고, 초등학생들은 OST 가사를 칠판에 적으며 한국어 발음을 따라한다. 교실, 도서관, 심지어 학교 복도까지 ‘케데헌 월드’로 변해 가는 지금, 한국 문화는 더 이상 수출품이 아니라 전 세계 아이들의 성장 과정 속에 스며드는 생활문화가 되어, 학교와 교육부 차원에서 K팝과 한국 문화가 가져올 영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논의할 정도다. 이들이 두려워 하는것은 영화 한 편의 성공보다, 특정 나라의 문화가 자국 청소년들의 문화적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케데헌의 성공 배경이 된 핵심 요소가 무엇일까? 그것은 문화다양성을 적극 활용한 하이브리드(Hybrid) 전략이다. 주인공은 악령과 인간의 혼종으로, 조선시대 사인검과 무속 신칼을 사용하며, 레이저검으로 탄생시켰다. 사자보이즈는 갓을 쓰면서 전통복식과 함께 소다팝을 부르고, 까치와 호랑이는 민화 호작도의 상징성을 보여주면서, 전 세계 어린이들이 좋아할만한 캐릭터로 귀엽게 변모시켰다. 또한 OST 중 GOLDEN은 후렴부분에서 3옥타브가 넘나드는 고음으로 시원한 전율(Chills)을 보여주는 반면 사자보이즈는 저음으로 긴 여운(Reverberations)과 힘있는 군무를 남기며 감정을 교차시켰다. 그리고 관객들은 전통과 현대, 빛과 어둠, 선과 악을 통해 세상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마주하면서, 현실의 모순과 희망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입이 성공요소로 판단된다. 하지만 남자주인공 진우가 연주한 악기는 한국 고유의 향비파(5현)가 아닌 당비파(4현)였다. 이는 단순한 자료 오류로 인한 착오와 문화 다양성을 의도한 상징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 전통을 대표하는 장면에서 향비파를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향비파로 교체가 되어 시즌2에 등장한다면 단순한 오류 수정을 넘어 우리의 전통문화를 다시 살리는 의미 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 케데헌이 쏘아올린 메시지는 공연예술계에서도 적극 반영해야한다. 특히 우리전통은 이제 단순 복원을 넘어서 영상과 사운드등 첨단 무대기술을 적극 활용 및 결합하고, 판소리로 다양한 노래를 재해석해보는 시도 역시 필요할 것이다. 또한, 관객이 전율과 여운을 함께 느끼도록 감정 곡선을 재설계하고, 합창과 온라인 챌린지로 참여를 이끌어, 전주한옥마을과 부안영상테마파크가 전통문화 콘텐츠의 거점으로 성장할 수 있게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전북특별자치도가 그 다음 공을 쏘아 올려, K-컬처의 미래를 확장시키는 새로운 장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김수일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5.09.22 18:46

[문화마주보기] 전북 사람 천 명이 치르는 ‘전북 담은 도서전’을 꿈꾸며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결이 사뭇 다르다. 몇 차례 비 끝 폭염의 기세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흔들림 사이를 단단하게 붙잡는 도서전, 책의 시절이 왔다. 지난 8월 30~31일 작년 이어 두 번째 만에 1만여 명 가까운 입장객으로 이른바 ‘대박’을 터뜨렸다는 ‘군산북페어’가 열렸다. 책과 문화를 연결한 독특한 감성여행으로 자리매김하며 성황을 이뤘다는 평가다. 이어 9월 5~7일 주말에는 ‘전주독서대전’이 폭염과 큰비를 무릅쓰고도 무사히 진행을 마쳤다. 도내 큰 책 축제가 연달아 열리며 새 계절 가을을 열고, 책의 호시절을 부르고 있다. 마음의 양식을 맘껏 누리며 한편 떠오르는 아쉬운 마음, 이 두 큰 축제에 도내 동네 책방, 우리 지역 출판사, 우리 문화, 예술, 역사, 생태, 사람과 이야기의 살림과 살이를 담은 책의 모습이 도드라지지 않은 것이다. 조금 색다른 도서전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엊그제 9월 12~14일 청주에서 열린 ‘제9회 한국지역도서전’이다.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서울 수도권, 문화로든 산업으로든 <책>의 집중도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출판의 거의 모두가 파주출판도시를 포함한 서울 수도권에 몰려있다. 그 밖은? 서울 수도권 말고도 사람이 사는 것처럼, 출판도 수도권 바깥에서 어울려 잘 살고 있다. 그 지역출판사들이 일년에 한번은 서로 모여, 한 일년 또 어떻게 버텨왔는지 생사 확인하는 자리로, 도서전을 열고 있다. ‘지역도서전’은 지역출판사들이 모여 그동안 펴낸 책들 모아서 사람 안부, 책 안부를 나누는 지역출판 축제 마당이다. 지역도서전은 2017년 제주에서 첫걸음을 떼었다. 지역마다 사라져가는 이야기들을 그러모아 어렵사리 지어낸 책들을 모아 전시도 하고 그 책을 편집한 편집자, 저자들의 이야기도 듣고 하는 자리로다. 해외 지역도서전의 사례며, 우리 지역 책들의 탄생 비화에, 지역출판 활성화를 위한 정책제안의 자리도 챙긴다. 지역도서전의 중심축은 <천인독자상> 수여에 있다. 한사람이 1만 원씩 천명의 독자가 상금을 모아, 온 나라 지역 곳곳에서 펴낸 책들 가운데 뜻 좋고 생각 좋고 맵시 좋은 책들 뽑아 격려하는 뜻깊은 상이다. 첫해 천인독자상 공로상에 책마을해리(도서출판기역)가 펴낸 그림책 <돌그물>이 선정되기도 했다. 이 지역도서전은 다음 해 수원에 이어 고창, 대구수성, 춘천, 광주동구, 부산수영, 대전유성을 거쳐 올해 청주에 이르렀다. 중간에 낯익은 지명, 세 번째 지역도서전은 고창이었다. 고창 책마을해리 공간과 마을 고샅, 갯벌에 책 공간을 펼쳐 보였다. 사람이 숨을 이어 살아가듯 책도 우리 가까이에서 숨을 멈추지 않고 살고 있다는 의미로 ‘지역 산다, 책 산다’를 주제로 삼았다. 올해 열린 청주도서전은 지역 행정과 문화예술 중간지원조직의 도움 없이 오롯 출판단체와 청주지역 시민이 힘을 모아 준비한 도서전이다. 청주에서 책을 사랑하는 민간의 힘으로 치러낸 온 나라 지역책들의 향연을 지켜보면서 우리 지역에서 지역 사람들 천 명의 뜻과 힘과 참여로 치르는 작지만 의미심장 책의 잔치를 꿈꿔본다. 도내 곳곳 동네 책방들이 저마다 독특한 큐레이션으로 어우러지고, 어렵게 명맥을 이어가는 소소한 지역출판사들의 책이 적어도 우리 도민들에게 꼬박꼬박 선을 보이는, 우리 ‘전북을 담은 책의 향연’을 말이다. 이대건 고창 책마을해리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5.09.15 17:56

[문화마주보기] 다시 용천에서

내가 초등학생일 때는 땡땡이치기를 ‘중간치기’라고 했다. 6학년인 노규와 나는 황방산 꼭대기에 있는 용천에서 중간치기를 하기로 작당했다. 이번 달 육성회비를 못 낸 것이 이유였다. 70명이 넘는 급우 앞에서 담임 선생님께 육성회비 언제 낼 거냐고 닦달당하는 건 정말 창피한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노규는 오늘 용천에 큰 굿이 들었다고 했다. 어른들 한패가 몰려올 것이라고도 했다. 용천은 신성한 곳이었다. 초가집보다 큰 바위들이 맞물려 얼기설기 지붕을 이었고 그 바위들 밑에 눈 시리게 맑은 샘물이 솟았다. 그래서 용천(涌泉)이었다. 사람들은 여기에 굿상을 차리고 소원을 빌었다. 굿판을 벌이면 앞뒤가 꽉 막힌 일들이 신통방통하게 잘 풀리는지 어쩌는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다만 만성리에서 온 빼빼한 할매가 용천 위에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점을 치고 굿도 한다는 것은 알았다. 굿상이 차려진 멍석 위에서 붉은 천과 푸른 천을 X자로 걸친 할매가 꽹과리 소리 장구 소리에 감겨 굿하던 모습이 어른거렸다. 흰옷 입은 아줌마들이 손을 비비며 치성드리던 모습, 떡과 지짐이들 사과며 식혜도 어른거렸다. 풍장 치는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산 밑자락에 붙은 산지당에서 용천으로 막 통하는 지름길은 꽤 가팔랐다. 좀 쉬었다 가자고 땀방울에 눈알이 쓰라렸다. 넓적 바위에 앉아서 눈길을 돌리니 색색의 꽃들이 진초록 위로 흐드러져 있었다. 황방산이 차려낸 초가을 정취를 맘껏 끌어당기며 풍장 치는 소리가 더 가깝게 들렸다. 풍장 소리가 메아리로 저만큼 퍼지다가 되돌아오는 메아리들에 섞이는 통에 우리는 풍장 소리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할매는 방울을 흔들며 주문을 외고 있을 터. 집채만 한 바위들 안쪽에 켜진 촛불이 구렁이 입바람에 너울거리고 있으리라. 용천의 신령한 기운을 북돋우듯 풍장 소리가 경쾌해질수록 치성드리는 어른들의 눈시울이 붉어지리라. 웬 사람들이 이렇게 모였냐고, 누가 또 잡혀갔냐고 까투리가 푸드덕 날아오르고 흰 천을 이마에 동여맨 할매가 쌍칼을 창창 부딪히며 춤사위가 달아오를수록 여기저기서 목쉰 울음소리가 더 애통절통하게 터질 것이다. 그 정신없는 틈을 타고 떡이며 밤 대추가 감쪽같이 사라지리라. 그런 걸 훔쳐 먹어도 내 코 밑에 명주털이 거뭇해졌어도 노규네나 우리 집이나 살림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쯤 밭에서 거둔 애호박, 고구마순, 부추 등을 중앙시장 맨바닥에서 팔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나는 중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벌여놓은 채소들이 미처 팔리기 전에 순경들 발길질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호루라기를 불며 포악을 떨었다. “왜 이러냐, 사람이 먹는 것을 왜 걷어차냐, 니들은 흙 파먹고 사냐! 이 빌어먹을 놈들아!” 이리저리 나뒹구는 애호박을 들어 순경들 구둣발 앞에 박살 내며 다발로 묶어간 고구마순을 지근지근 밟으며 악쓰던 어머니. 순식간에 산발이 되어 멍하게 앉아 있던 어머니. 중앙시장에서 중간치기를 하던 아들 눈길이 당신께 쏠린 줄도 모르고 한 곳만 바라보던 내 어머니. 잡목 잡초가 꽉 쩔어버린 용천에 와서 오늘도 나는 듣는다. 수업 중에도 내 이름 부르러 오던 서무과 직원의 슬리퍼 끄는 소리를. 스피커에 대고 수업료 못 낸 내 이름을 부르던 교감 선생님의 목소리를. 그때 나는 외로웠던가. 세상이 아무리 나를 내치더라도 끝끝내 버틸 작정이었던가. 이병초 시인·전북작가회의

  • 오피니언
  • 기고
  • 2025.09.08 18:28

[문화마주보기] 인간 영혼을 세공하는, 문화

최근 정부는 국민 영화 관람 6천 원 할인권 450만 장을 배포했다. 7월 25일 할인이 시행된 후 약 한 달간 사람들이 몰린 곳은 예술영화관이었다. 최근 몇 년간 예술독립영화는 관객 수 5천 명만 넘어도 환호 했기에 혜택 시행 후 일어난 변화는 놀라웠다. 부모의 이혼을 겪는 소녀의 성장담인 <이사>(소마이 신지 감독)는 3만 5천 명, 예상치 못한 죽음이 불러일으킨 마을의 변화를 그린 <미세리코르디아>(알랭 기로디 감독)는 2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었고 평균 관람객 수를 초과했다. 이 현상은 현재 주머니 사정에서 문화생활이 우선순위가 될 수 없을 뿐 조건만 된다면 사람들은 영화관을 찾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한 예술영화관의 이용 비율이 높아진 것은 여전히 완성도 높은 영화에 대한 수요를 나타낸다.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스펙터클한 엔터테인먼트뿐만 아니라 법과 제도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인간 삶을 고찰하고픈 관객이 존재함을 증명했다. 전주국제영화제가 끝나고 관객 반응이 좋았던 작품들이 종종 한국에 수입이 된다. 철거 전날 동네 야구장에서 펼쳐지는 경기를 그린 <마지막 야구 경기>, 요양원에 들어간 80대 노년 여성이 겪는 성장기를 다룬 <친숙한 손길>을 포함한 여섯 편 등이 그 예시다. 이 현상을 영화제가 경제 활동에 미친 영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보단 큰 수익을 내지 못하더라도 영화가 가진 의미를 수입사들이 지지한 결과로 보인다. 이런 사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가치를 알아주길 바라며 경제 논리 속에 사라져가는 소중한 문화의 일부분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또한 최근 젊은 영화예술인들이 주축이 되어 소규모 상영 공간을 운영하고 고전부터 최신 영화까지 아우르는 기획전과 워크숍을 여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창작자이자 관객으로서 한 차원 깊고 넓은 예술 영역의 확대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자생적인 실천의 하나다. 이러한 정황을 지켜보면 지금 영화계의 가장 큰 숙제는 예술영화에 대한 수요와 공급 의지가 있는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영화를 선보일 장소다. 이는 기업의 이윤 추구 논리로는 불가능한 일일지 모르겠다. 그러니 오직 공공 기관만이 양질의 영상 생태계 조성의 주체로 설 수 있다. 정부 기관이 마치 기업처럼 성과지표(KPI)와 같은 성장 위주의 평가 기준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한 변화가 요원하지만 말이다. 한가지 희망은 우리가 전환의 시기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속도와 분석으로 경쟁해야 하는 성장의 영역은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은 길은 탈성장의 영역, 개개인의 특성과 인간만이 겪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철학적 공간이다. 예술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순간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인간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손꼽혀 왔다. 좋은 책과 음악, 영화와 같은 양질의 문화는 영혼을 세공한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논리와 정보보다 감성의 회복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다. 공공영역이 할 일은 글로벌 1위가 아니라, 인류 역사에 남을 문화를 피우고 그것을 소화하는 이들을 위해 판을 일구는 것이다. 2026년 말 완공될 ‘독립영화의 집’이 양질의 문화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공간으로서 제도적으로 보장 받고, 흥행에 집착하지 않으며 영혼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는 문화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수치가 아닌 가치를 우선시해야 한다. 문성경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 오피니언
  • 기고
  • 2025.09.01 19:00

[문화마주보기] 무대예술전문인, 어둠 속에서 빛을 설계하는 사람들

객석 위에서 거대한 샹들리에가 순식간에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황금빛 조명 사이로 금속 체인이 팽팽히 당겨지며 나오는 미세한 진동과 효과음, 그리고 관객석 앞에 멈춰 선 샹들리에를 보는 관객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며 유령의 존재를 암시하는 복선[伏線]을 경험하게 된다 뮤지컬‘오페라의 유령’의 첫 시작이다. 이런 극적 긴장감을 만들고자 어둠속에서 조명 각도를 0.1도까지 조절하고, 음향 레벨을 실시간으로 미세 조정하며, 수 톤짜리 장치의 움직임을 밀리미터 단위로 제어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무대예술전문인이다. 공연법 제16조 2항은 객석 500석 이상 공연장은 조명, 음향, 무대기계 파트에 전문인을 의무배치 하도록 명시되어있다. 미 배치로 인한 과태료 부과기준이 150만원에서 300만원까지 횟수에 따라 부과되지만, 현실은 다르다. 대부분의 공연장이 지자체에서 직접 운영하거나 위탁 운영 방식이다 보니 사실상‘셀프 단속’이 이뤄지는 셈이다. 실제 과태료가 부과된 사례를 찾기가 쉽지않다. 2018년 9월 6일 지방의 한 문예회관에서는 리허설 도중 무대 리프트 개구부에 안전난간이 없어 조연출이 7미터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법원은 무대감독에게 업무상 과실치사죄를 인정하면서도 ‘공연장을 소유한 지자체 역시 근로자 안전 확보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수도권의 한 공연장에서는 철제 무대장치에 부딪히는 사고로 출연자가 중상을 입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후 실시 된 감사에서 무대 상부 기계장치 결함과 안전 점검 소홀이 동시에 발견되면서, 대다수 출연자들이 불안해 하면서 작품을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 더 심각한 건 이런 일들이 우리 전북지역에도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일부 지자체 공연장의 경우 무대예술전문인 배치 의무를 알면서도 ‘인건비 부담과, 큰 사고는 없었으니 괜찮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채용을 미루고 있다. 무대는 겉보기와 달리 극도로 위험한 작업 현장이다. 몇 톤짜리 장치들이 수시로 이동하면서 추락의 위험이 있고, 고압 전기 설비와 높은 곳에서의 작업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고, 대부분 어두운 환경속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크고 작은 사고들이 발생되고 있다. 자격을 갖춘 전문인력의 부재는 단순한 인력난과 예산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다. 그동안 여러 연구에서도 이런 문제점들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박영정(2009), 안경석(2012)의 논문을 보면, 전문인력 부족 문제와 제도 실효성 부재를 지적하며 배치 의무 강화 방안을 제시하며, 기존의 공연법 개정도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안전관리비와 무대예술전문인의 배치 기준인 500석에서 300석이하로 축소시키고, 문화체육관광부와 광역자치단체는 기초지자체 공연장에 대한 상급기관 교차점검을 의무화하여 과태료 수준을 현실적으로 높여야 한다. 반복 위반 시에는 운영 중단 같은 강력한 제재도 검토해볼만한 사항이다. 동시에 무대예술전문인이 현장에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별도로 안전관리자 의무 배치와 함께 전폭적인 예산 지원도 뒷받침돼야 한다. 관객이 무대 위 샹들리에에 감탄하는 순간, 그 아래서는 누군가 목숨을 걸고 일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설계하는 이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빛은 결국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허상에 불과할 것이다. 제도의 빈틈을 메우고 전문인력을 제대로 배치하는 것은 단순한 법 준수가 아니라, 예술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이고, 문화주권(Culture Sovereignty)시대를 열어가는 초석이 될 것이다. 김수일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5.08.25 18:42

[문화마주보기] 소작농민들이 피워낸 땅의 민주화, 땅 사람의 이야기

1987년 민주화 바람이 온 나라에 ‘타는 목마름’으로 번지고 있을 때, 고창 심원·해리면 농민들도 마음속 꼭꼭 억눌러온 불길을 꺼내놓았다. 바로 <고창소작답양도투쟁>이다. 이 싸움은 1930년대 삼양사 창업주 김연수 일가가 심원·해리 일대 300여 헥타르에 달하는 거대한 간척지를 조성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근 주민들은 간척사업 전반에 연계되었고, 자연 소작답을 빌어 경작을 시작한다. 일제가 물러가고 대한민국 정부는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단행한다. 이미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의 토지개혁이 농민들의 큰 지지를 받고 있던 터다. 우리는 조봉암 초대 농림부 장관이 ‘유상매수 유상분배’ 원칙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제 해체, 농민자립’ 기틀을 마련하려 했다. 그 유상매수에서 삼양사의 너른 땅은 ‘미간척지’라는 석연찮은 이유로 배제된다. 경자유전, 땅을 짓는 사람이 소유한다는 기본 원칙에서 200여 소작인들은 소외된 것이다. 돌려받지 못한 땅에서 30년 넘게 소작료를 내며 살던 사람들의 ‘땅의 민주화’는 1985~86년 어간에 삼양사 소작답 무상양도 대책위(김재만 위원장)가 만들어지면서 물꼬를 튼다. 김재만 위원장은 광주, 전주의 기독교 카톨릭 농민회와 고창 농민회와 연대의 길을 찾았다. 그 와중에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와 연이 닿았다. 그해 고려대 학생들의 여름농활이 고창 심원·해리면 일대에서 이뤄졌고, 소작농민들의 시위는 학생들의 문화집회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한다. 삼양염업사 앞 시위, 고창 읍내 시가지 행진은, 정읍지방법원 공판싸움으로 이어지고, 8월 종로 삼양사 본사 점거로 번져간다. 이 낯선 싸움은 종교계, 정치권, 시민들의 관심으로 확산된다. 농민과 시민사회 바람은 ‘무상양도’였다. 수십 년 소작료로 땅값은 차고 넘치니, 이제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점거는 9월을 지나고 있었다. “비가 길다, 태풍이 온단다”, 농민들의 가슴을 옥죄는 소식이 들리고, 땅은 제 것이 아니어도, 제 손으로 보살피는 것들이 눈에 밟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김재만 위원장은 농민들과 뜻을 모아 무상양도를 철회하고 정부 고시가격인 평당 1,881원에 사측과 양도를 합의한다. ‘토지양도는 대한민국 국시위반’이라며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던 사측도, 무상양도를 철회한 농민측도 몇 발짝 물러서 이른 대타협이었다. 세계농민운동사에 유래가 없는 이 기억은, 오랫동안 잊혀졌다. 몇 해 전부터 지역민들이 그 기억을 되살리며 크고 작은 기념 모임을 열기 시작했다. 김재만 위원장과 함께 싸우던 농민의 아들이 소설가가 되어, 당시를 팩션으로 기록한 책 <땅울림>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둘 마음이 모이고 행정을 움직여, 소작답양도투쟁 기록화 사업이며 소작답양도기념탑 건립을 잘 마쳤다. 평생 ‘목비라도 하나 세워 우리 이야기를 남겨야 하는데’ 했던 김재만 위원장의 맺힌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졌으리라. 얼마 전 그 김재만 위원장이 세상을 떠났다. 이제 80 중반의 나이, 그가 떠안은 ‘싸움는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소작농민들의 싸움과 대타협 이야기를 더는 전하지 못하고, 그는 이제 세상에 없다. 오는 9월 11일은 양도타협을 한 지 38년이 되는 날이다. 궁산마을 사람들과 고창소작답양도를 기념하는 모임에서 작은 기념식과 김재만 위원장 추모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고창 동학혁명으로부터 이어온 땅과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이대건 고창 책마을해리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5.08.18 18:25

[문화마주보기] 오솔길 엽서

당신과 맨발로 흙길을 걷고 싶다. 발바닥에 닿는 흙의 감촉, 걸을 때마다 시원한 듯 낯설고 더러 아프기도 한 촉감을 지그시 느끼게 해주고 싶다. 맨발로 흙길을 걷다 보면 잃어버린 줄 알았던 몸의 쾌감이 깜짝 깨어날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오갔는지 흙길이 판판하다. 누군가 걸었을 길에 내 맨발을 올려놓으니 마음이 흐뭇하다. 당신도 맨발을 딛으며 볼에 미소를 띠리라. 소나무와 편백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 판판하게 이어지다가 오르막이고 땀을 좀 흘렸는가 싶으면 어느새 평지인 흙길. 바람이 볼에 살갑다. 고1 때 만난 가시내 숨결도 이랬던 것 같다. 지금은 토요일 오전 8시, 반백의 맨발이 내 곁을 스친다. 초면이어도 낯설지 않다. 때가 되면 찰지게 만날 사람인 것이다. 여긴 선인들이 오갔던 길. 지게질에 숨이 차면 여기서 다리쉼 하며 담배 한 대 물었으리라, 농사일에 이골난 육신을 바람에 맡기고 애기참나무 위를 팔랑거리는 노랑나비와 눈 맞추기도 했으리라. 아줌마들이 맨발로 깔깔깔 다가온다. 무슨 얘긴지 알 수 없지만 흙길에 옛 농담을 들키며 웃는지도 모르겠다. 집들이 문화가 한창이던 1990년대, 친구네가 차려낸 음식을 맛있게 먹어놓고도 “먹은 것 없이 배만 부르네”라고 눙치자마자 “차린 것 없이 돈만 들었네”라고 되받아치던 농담. 사실과 정반대로 헛배만 불렀고 헛돈만 썼다는, 이 깜찍한 반어(反語)를 즐기던 해학 속엔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우리 삶이 풍자적으로 섞였다고 깔깔깔 어제를 감싸는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은 어디 계신지. 귀울림병을 끼고 산다는 당신. 업무에 시달리다 못해 목이 뻣뻣해져서 별을 못 본다는 당신. 은반지를 아끼는 당신. 월말에 조금씩 모은 말줄임표가 친구라는 당신. 군대에서 곡괭이 자루로 얻어터지는 꿈을 또 꾸었다고 어이없어하던 당신. 연필 글씨를 좋아하는 당신. 손톱에 봉숭아 꽃물 들이며 곱게 웃던 당신. 웃을 때마다 눈매에 어리는 열여덟 살로 실뜨기하다가 시간을 보자마자 쉰 살로 돌아오는 당신. 자디잔 풀꽃에 사글세 들고 싶은 당신. 사람 귀한 줄 모르는 이 느자구없는 풍토를 배롱꽃 때깔로 지우고 싶은 당신. 고구마순 김치가 땡기는 당신. 불알 두 쪽만 남았어도 오줌발 끝까지 털자는 당신. 눈물이 먼저 오는 기억을 잠그듯 막걸리 사발을 단숨에 비우던 당신. 이런 당신 덕분에, 삶에 대한 애증과 연민을 껴입은 이름 모를 당신 덕분에 나는 오늘도 살아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당신과 이 흙길에서 만나면 참 좋겠다. 새벽 기운이 남은 오솔길에서 바짓가랑이 걷어붙인 철부지가 되고도 싶다. 눈썹이 짙게 빛나던 시절이 또 오랴만, 돈이 신앙이라는 시절에 누구에게나 평등한 바람과 햇살과 그늘을 닮기가 쉬운 일이랴만, 걸을 때마다 눈이 맑아지는 흙길. 구두와 양말을 벗고 맨발로 걷는 게 무작정 살맛 나는 이 오솔길에서 당신과 함께 몸의 새 눈을 틔우고 싶다. 잡목숲에 헹궈진 바람이 서늘하다. 당신과 만나고 싶은 소망을 전해주는 것 같다. 바람의 이런 낌새를 알아채는 몸은 소중하다. 당신 몸도 금쪽같으리라. 삶은 내게 선물이 아니었고 외로움도 귀찮다고 말한 근거가 몸이었으되, 지난 십수 년 적막이 끼닛거리였어도 조금 더 견디자는 삶의 불씨가 튀어나온 곳 또한 기억을 간직한 몸이었기 때문이리라. 늘 그리운 당신, 맨발에 흙길 어떠신지. 이병초 시인·전북작가회의

  • 오피니언
  • 기고
  • 2025.08.11 18:34

[문화마주보기] 영화를 살아있게 하는 문화실천, 책

상영되지 않는 영화는 무덤 속에 있는 유물과 다를바 없다. 시대의 변화는 양면이 있기 마련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영화를 되살린건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의 발전 때문이다. 극장 문화의 퇴보를 가져왔다고 평가되는 동시에 관람객에게 다양한 영화에 상시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역사 속에서 문화향유의 폭과 접근성을 높이는데 일조한 매체들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갱신되었지만 가장 오래도록 본연의 힘을 잃지 않는 것은 단연 ‘책’이다. 심지어 이 책과 글이라는 영역은 타예술 장르의 보존과 지식전달을 넘어 시대에 반응하는 새로운 가치 생산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2월 초까지 ‘영화문고 - 영화출판과 읽기의 연대기, 1980년 이후’ 전시를 개최하고 동명의 책을 출판했다. 이 기획은 20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대중문화의 지형에서 급부상한 영화문화의 변천을 99권의 책을 통해 소개한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출판한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 - 영화의 미래를 상상하는 62인의 생각들』도 99번째 책으로 선정됐다. 그런데 왜 영화를 책을 통해 소개한 것일까? 편집진은 ‘영화책은 문화적 실천의 한 지류다’고 답한다. 시대적 맥락에 따라 영화를 해석하는 비평가의 작업에 더해, 대중의 호응에 답하기 위한 출판이 실행된다는 지점에서 영화책을 팬덤이 행하는 능동적인 문화 창조의 일환으로 본 것이다. 대부분의 예술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이고 비평은 그에 따른 부속물처럼 취급되는 반면, 신기하게도 영화의 역사에서 어떤 글들은 영화보다도 더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작품 홍보에 도움이 된 명사들은 있었지만 앙드레 바쟁, 세르주 다네 등 비평가의 글이 제작에 영향을 끼쳐 영화라는 예술 자체를 발전시킨 예시를 다른 장르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문학은 비평이 ‘글’이라는 동일한 도구를 가지고 있기에 예외로 둬야겠지만, 예술의 형식과 비평이 다른 도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선상에서 주목받고 논의될 수 있는 건 영화 분야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처럼 영화와 글은 서로 다른 도구를 바탕으로 하지만 강력한 연결성을 지니고 있다. 최근 출판사들이 시대를 막론하고 양질의 영화 역사, 미학 분석, 영화인들의 말을 선정해 출간하고 있다. 전설적인 고전 『물질적 유령: 이론과 비평의 경계를 넘어』 (질베르토 페레스), 『영화작가들과의 대화』 (요나스 메카스)부터 최신 흐름을 반영하는 『미장센과 영화 스타일』 (에이드리언 마틴), 『대양의 느낌: 영화와 바다』 (에리카 발솜)까지 영화에 관한 책이 예전보다 활발히 만들어지고 있다. 비평이 죽었다는 통곡에도 영화책이 다양해지는 현상은 종합예술인 영화를 통해 인문정신을 발굴하고자 하는 대중의 새로운 욕구와 그에 대한 출판업계의 반응일 것이다. 영화와 관련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영화에 관한 정보를 얻고, 다른 사람의 해석을 듣으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킨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세계확장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 삶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이다.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너그러운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서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사유하게 하는 것이다. 영화를 살아있고 존재하게 하는 것, 독자에게서 새로운 이야기와 문화현상이 발현되도록 하는 것이 영화책이다. 문성경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 오피니언
  • 기고
  • 2025.08.04 18:33

[문화마주보기] K컬쳐 300조 시대, 그 중심과 뿌리는 전통예술이다

최근 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위원회에서는 문체부 업무보고를 통해 ‘K컬쳐 시장 300조원 달성’, ‘문화 수출 50조원‘,’글로벌 소프트파워 세계 5위 진입‘이라는 목표를 제안했다. 이는 대한민국이 문화로 국가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명확한 의지이자, 이재명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한 핵심 방향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지금, 이제는 단순히 즐기는 문화를 벗어나 외교, 산업, 교육, 관광, 식품 등 다양한 부문에서 영향을 미치기에 정부와 기업들이 마케팅의 필수 아이템으로 적용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설정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키려면 콘텐츠 성장뿐만 아니라 그 중심과 근본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전통예술과 기초예술이 문화정책의 핵심 기둥으로 균형있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 우리 전통예술은 이제 단순히 옛것을 재현하는 ’보존의 대상‘ 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삶의 방식과 정서, 공동체생활을 겪으며 나온 응축된 문화적 원형의 표출이며, 세계인들이 주목하고 있는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밑바탕에 있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오늘날 K컬쳐가 글로벌 시장에서 ’다른지만 공감되는 문화‘로 인식되는 것도 우리가 지니고 있던 미적 감정 구조에서 비롯된 ’우리다움‘ 덕분일 것 이다. 결국 문화의 지속가능성과 품격은 그 뿌리의 깊이에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무용단이 창작무용 <고섬섬>으로 독일 베를린 국립 오페라극장 슈타츠오퍼(Staatsoper Berlin) 공식초청을 받아 공연을 하였다. 1742년 개관한 슈타츠오퍼는 전 세계 오페라 극장중에 상징성과 역사성을 두루 갖춘 공연장으로서, 이 공연장 무대에 우리나라의 정서를 담은 창작 작품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찬 감동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지역(부안군 위도)에서 시작된 콘텐츠와 순수예술이 세계와 통할 수 있다는 증거이며, 전통예술이 경제성과 거리가 먼 고전예술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확장 가능한 분야임을 입증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들의 정통성을 진심을 다해 보여준다면 자연스럽게 다양한 부문까지 접목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문화다양성의 보호와 증진에 관한 법률」 제9조 규정에 의하여 문화다양성 보호와 증진을 위한 정책 추진현황 및 세부이행 평가결과를 국회에 제출한 내용을 보면 ’한국 전통예술은 글로벌 문화다양성 담론에서 국가 대표성의 핵심 축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하였다.(정윤수외 2023) 이는 전통이 한국 문화의 품격을 구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세계 문화속에서 독창성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핵심임을 보여준다. 이제 정부에서는 전통과 산업, 기술과 예술 사이에 균형을 잡아 어떻게 K컬쳐 300조원 시장 조성을 할 것인지 보다 깊이 있게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윌슨의 법칙(Wilson’s Law)에서는 ‘지식과 지혜를 우선시하면, 돈은 자연히 따라온다’라고 하였다. 문화정책도 마찬가지다. 수치와 속도만을 앞세우기보다 방향성과 철학이 담긴 구조를 설계하여 전통과 지역 그리고 사람이 중심에 있는 문화예술정책으로 결국 국가 문화의 깊이와 품격을 결정짓는 근본이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정부에서 바라는 글로벌 소프트파워 세계 5위에 진입할려면 그 중심에는 언제나 ‘우리 것’이 있어야 한다. 전통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문화생태계를 만들어 나갈 때 비로소 문화로 국가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김수일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5.07.28 19:10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