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한글날이 다가오면 한글학자 정인승 선생님이 생각난다. 선생께서는 우리 고장 장수에서 태어나셨는데, 대학원 시절 '국어학 특강'강좌를 모실 행운을 누린 적이 있었다. 댁으로 찾아뵐 대는 언제나 작은 밥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집필하셨고, 호떡만한 돋보기를 왼손에 들고 원고지 칸을 메우고 계셨다.
한번은 세종대왕과 훈민정음을 얘기하시다가 벌떡 일어나 대왕초상을 향해 국궁4배를 올리며, 수강생들에게 함께 절을 올리라고 명하시기도 했다. 그리고서 평소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세종과 훈민정음을 생각하면, 의관을 정제하고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는 말씀을 들려 주셨다.
[우리 역사에 세종같은 성군이 없었다면, 설령 있었다 해도 그 숱한 치적 중에 정음 창제가 없었더라면]―이런 가상을 하면, 그 성스러운 은혜를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하셨다. 80고령 노학자의 학문과 한글사랑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민족·민족어·민족혼
한 겨레는 한 핏줄을 나눈 언어 공동체이다. '언령(言靈)'이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가 쓰는 말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의미다. {구약}에도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시작하고 있지않은가?. 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정의는 너무도 유명하다.
말의 고어는 ' '인데 이 단어는 ' '에서 파생한 '얼'과 상통하는 어휘다. 곧 언어는 영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서, 서로 고양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타락시키기도 한다.
건전한 영혼을 지닌 사람의 말은 고아하고, 저속한 생각에 젖은 사람의 말은 불량하기 마련이다. 또한 순화된 아름다운 말을 쓰면 그의 영혼도 정화되고, 포악한 비속어를 남용하면 영혼마저 거칠어진다.
지나친 외래어를 함부로 쓰는 사람의 경우, 그의 의식은 많은 영역에서 그가 사용하는 나라에 대한 선망으로 표출된다. 아름답고 고운 우리말을 사랑할 때, 바르고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서리라.
철수대신 토마스가 넘치는 나라
오늘 이 땅에 세종대왕이 다시 온다면, 그리하여 우리말의 실상을 본다면 어떤 실정일까. 외래어의 무분별한 남용, 어법의 무절제한 파괴, 비속어의 거침없는 횡포…‥.
영어 발음을 유창하게 구사하기 위하여 어린아이의 혀 어느 부분을 수술한다는 텔레비전 보도를 보면서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또 아이의 이름도 토마스나 제니, 프랭크 같은 외국인 호칭으로 바꾸어 부른다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리 생각을 뒤집고 비틀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아니 이해해서도 안되는 일이 아닐까? 이런 사고의 사람들이라면, 할 수만 있다면 눈·코·입·귀·온몸을 서양인으로 바꾸고 싶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문화와 우리의 전통, 그리고 우리말과 우리 겨레의 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그렇게도 결여된 사람이 어떻게 이 땅에서 숨쉬며 살고 있는지가 의심스럽다. 금수강산 아름다운 이 나라에 부스럼같은 그런 사람과 함께 발붙이고 산다는 건 부스럼딱지처럼 불쾌하다.
556돌 한글날을 맞으며, 우리의 혼에 대해서 깊이 성찰해 보았으면 싶다. 진정한 나라 사랑은 겨레말 사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종 임금의 위업에 새삼 감읍하면서, 한글 사랑의 외곬 삶을 누리신 정인승 선생님이 그립다.
/이용숙(전주교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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