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6-02-04 02:38 (Wed)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새벽메아리

[새벽메아리] 시민예술, 무대와 삶을 잇는 다리

시민예술의 현장은 생각보다 폭넓다. 아침마다 모여 합창을 하는 사람들, 주말마다 연극 연습을 하는 시민 배우들, 악기를 처음 잡아본 이들이 결성한 직장인 밴드까지. 이들에게 예술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일상의 일부다. 공연의 완성도만큼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관계와 변화이기에 누군가는 그 과정속에서 자신감을 얻고, 누군가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진다. 이러한 흐름은 해외에서도 이미 중요한 문화적 실험으로 자리 잡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의 예술집단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koll)’이다. 이들은 전문 배우 대신 일상의 전문가들(평범한 시민들)을 무대 위 주체로 세운다. 이 작업은 “전문가만이 예술을 한다”는 오래된 전제를 흔들며, 시민이 예술의 단순한 참여자가 아니라 공동 창작자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사례는 시민예술이 단순한 취미 활동이 아니라, 동시대 예술의 중요한 형식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는 전문예술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이 사회와 만나는 새로운 통로를 확장하는 일에 가깝다. 시민의 경험이 예술적 형식과 만나면서 무대는 더 넓은 세계와 연결되고, 전문예술 역시 새로운 질문을 얻게 된다. 이러한 공존의 모델은 공공극장의 운영 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독일과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는 시립극장이나 주립극장이 전문극단의 공연뿐 아니라 시민 극단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한다. 같은 공간 안에서 다양한 형식의 모두를 위한 예술이 자연스럽게 순환하는 구조다. 시민들은 단순히 관객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극장의 또 다른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공공극장이 시민연극과 전문연극을 동시에 품을 때, 극장은 소비 공간이 아니라 지역의 문화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전문예술은 시민에게 영감을 주고, 시민예술은 전문예술에 새로운 감각을 제공한다. 두 영역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지탱하는 관계다. 그렇게 예술이 확장되며 도시 문화의 생태계를 함께 만들어간다. 우리 지역의 현실을 돌아보면 아직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다양한 시민예술 활동이 단순한 예술교육 내지 평생교육 형태로만 존재할 뿐 지역예술의 한 분야로서 공생을 유도하는 방향성은 아직 이르다는 판단이다. 그렇기에 공공문화시설 역시 여전히 직업예술 중심의 운영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시민예술은 전문가가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구조에서 벗어날 때 더욱 건강해진다. 예술가의 역할은 지시자가 아니라 촉진자에 가깝다. 시민들이 스스로 의견을 내고, 실패를 겪고, 다시 시도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때 시민예술은 단순한 취미 활동을 넘어, 시민이 주체가 되는 문화적 경험으로 확장된다. 그렇기에 시민예술이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해당 분야 직업예술인들의 관심과 협력도 필요하지만 이러한 지원이 없더라도 시민예술단체가 스스로 판단하고, 운영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방법에 대해 교육하고 보조해야 한다. 그렇게 예술이 삶으로 스며들 때, 도시는 더 이상 차가운 공간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가 흐르는 무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무대를 채우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의 도시는 오늘보다 조금 더 따뜻한 내일로 나아갈 것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6.02.03 18:29

[새벽메아리] ‘10개의 서울대’ 왜 필요한가

우리나라에서 일류대는 사실상 하나뿐이다. 서울대다. 이 구조가 지속된다면 국가의 미래는 밝기 어렵다. 어떤 인재의 성취 가능성과 국가 경쟁력이 특정 대학 하나에 과도하게 집중된 사회는 지속 가능하기 어렵다.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되지 못하는 순간, 사회 전반의 역동성도 급격히 떨어진다. 서울대가 10개 있다면 우리의 앞날은 분명 지금과 달라질 수 있다. 일본은 우리와 상황이 다르다. 수도권의 도쿄대 외에도 여러 명문 국립대학이 전국에 고르게 자리하고 있다. 이들 대학은 일본제국 때 제국대학령에 따라 설립됐다.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 엘리트 양성을 목표로 1886년 발포된 제학교령의 일환으로, 국가 수요에 맞는 학술과 기예를 가르칠 일류 교육기관으로 만들어졌다. 그 결과 도쿄대를 비롯해 교토대 등 본토 7개 대학과 함께 식민지였던 조선의 경성제국대학, 대만의 타이완대학까지 총 9개 제국대학이 탄생했다. 이들 대학은 지역과 산업을 떠받치는 일본 고등교육의 중추가 됐다. 다만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은 달랐다. 조선총독부 주도로 설립됐으며 한국인 입학 제한, 이공계 학과 부재 등 구조적 차별 속에 운영됐다. 광복 이후엔 서울대로 이름을 바꾸면서 국내 유일의 일류대라는 인식이 강해 지역 국립대 간 균형 발전의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우리 교육의 구조적 문제점을 양산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일본 본토의 7개 제국대학은 패전 이후 국립종합대학으로 재편됐고 이후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다수 배출하는 산실이 됐다. 일본의 지방 국립대들이 지닌 연구 중심 전통과 학문적 위상은 단기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장기간 축적된 연구 환경과 안정적 지원의 결과다. 이는 대학 한 곳의 성과가 아니라 국가 시스템의 결실이다. 일본은 1990년대 장기 침체 속에서도 과학기술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1995년 과학기술기본법 제정 이후 5년 단위 기본계획을 통해 기초과학을 꾸준히 육성했다. 중국 역시 정부 주도로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AI, 로봇 등 전략 산업 인재를 체계적으로 키우고 있다. 양국은 대학을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국가 전략의 핵심 인프라로 인식한다. 반면 우리는 의대 쏠림 현상이 고착화되며 이공계 기피와 미래 산업 인력 부족이 심화되고 있다. 이는 개인의 합리적 선택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실패 때문이다. 과학기술 경쟁력 약화로 직결될 수밖에 없으며 장기적으로는 산업 기반 자체를 흔들 수 있다.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은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에 “뒤로 밀린 서울대”라며 평가하며 우려를 표했다. 이는 특정 대학의 서열 유지에 매몰된 시각일 뿐이다. 심각한 지역 불균형과 인재 편중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대학 하나의 위상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역량이다. 교육 정책은 과거의 명성을 지키는 수단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도구여야 한다. 서울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지역 거점 국립대는 여러 곳에 골고루 존재해야 한다. 인재가 수도권으로 빨려 들어가는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교육도, 산업도, 지역도 살아나기 어렵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하향 평준화가 아니라 상향 확산이다. 대학 간 경쟁을 촉진하고 연구 저변을 넓혀 국가 전체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전략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학 서열을 지키는 논리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과감한 선택과 실행이다. 조백환 원장은 한국정맥경장영양학회 회장, 국립암센터 암임상연구전문위원회 위원장, 전북대병원 의생명연구원 초대원장 등을 지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6.01.27 19:12

[새벽메아리] 원작 소설, 영화로 조명하기

부안 솔섬 근처에 사는 친구가 수시로 섬 사진을 찍어 보낸다. 늘 그 자리에서 묵묵하고 아름다운 섬. 섬을 바꾸는 것은 주로 햇빛, 구름, 만조· 간조, 바람, 해무 등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러 사진 중에서 내 몫을 고르는 친구의 기준이 궁금하다. 나는 사시장철 솔섬 이미지에 푹 빠져 산다. 지난해 마지막 날과 올 첫날에도 사진이 왔다. 먼 기적처럼 시간이 흘렀고, 우정을 이어주는 게 사진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사진은 쌓였고, 메타 메시지는 흘려보냈다. 친구여, 우리는 어느 언저리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던가. 사진에 취해있자니 올해 내가 만날 이미지들이 궁금해진다. 책 읽고 영화 보고, 내용을 내담자와 공유해야 하는 나에게 상(像)과 형상화(形象化)의 현현(顯現)은 필수 불가결인 요소다. 엊그제 2025년 개봉 영화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보고 학생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왕비가 거울에 묻는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거울이 답한다. “왕비님이 아름다우신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스노우 공주가 수천 배 아름답죠.” 몇 차례 비슷한 질문과 답변이 반복된다. 이때 관객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백설 공주를 머릿속에 그린다. 대화하는 자리에 없는, 이미 각인된 공주이기에……. 학생들이 말하는 예쁜 공주의 상(像)은 다양한데, 대부분 각자 만든 것이다. 형태주의 심리학자 ‘루돌프 아른하임’은 말한다. ‘세상은 어떤 상(像)을 인간의 마음에 투영한다. 상은 자세히 관찰되고, 해석되고, 재구조화되어 저장된다(…….). 망막의 상과 심상의 상은 크게 다르다. 이는 기관(인체의)이 맡은 일을 한 뒤 일어난 조작(操作) 때문일 것이다.’ 인지심리학자 ‘크리스 프리스’의 말도 있다. ‘우리의 세계 지각이란 현실에 부합하는 환상이다(…….). 내가 지각하는 것은 바깥 세계로부터 내 눈과 손가락에 와닿는 엉성하면서 모호한 단서들이 아니다. 나는 훨씬 풍부한 것을 지각한다. 이 모든 엉성한 신호들은 풍부한 과거 경험들과 결합한 영상이다.’ 예술작품 감상자는 자신의 경험과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이 모호함(앞에 기술한)에 반응하며, 이미지를 창조한 예술가의 경험을 어느 정도 재현한다. 예술가에게 창작과정은 해석과정이기도 하며, 감상자에게 해석과정은 창작과정이기도 하다. 이를 ‘감상자의 몫(Beholder’s share)’이라고 한다. 중학교 때 처음 읽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형상화가 안 되어 애를 먹고 있다.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남태평양 외딴섬 ‘타히티’에 정착하여 그림을 그린다. 특이한 것은 자기 집 벽 사방을 그림으로 꽉 채워 넣는데, 그림과 작업 과정이 소설의 묘사만으로 형상화가 안 된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소설(1919년 발표)을 영화(1942년 개봉)로 만났다. 영화가 보여주는 그림은 내 상상과 거리가 멀었다. 명작소설에 나타난 인간 본성의 경이로운 통찰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누릴 수 있을까? 늘 고민하는 화두다. 영화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차제에 영화화된 원작 소설 몇 편을 골라 조명하고자 한다. 소실점처럼 합치점을 찾자는 게 아니다. 형상화와 감상자의 몫 그 실체에 조금이나마 접근할 수 있다면 성공이다. 나를 위한 조작(操作)이 아니길 바라며. 이승수 고문은 가천대학교특수치료대학원 겸임교수, 영상영화심리상담사(전문수퍼바이저)를 지냈다. <영화 보고 갈래요?>외 4권의 저서가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6.01.20 18:20

[새벽메아리] ‘일손’이 아닌 사람: 외국인 노동자 인권의 공백

최근 언론을 통해 보도된 돼지농장 외국인 근로자 피해 사건은 우리 사회가 외국인 근로자를 어떤 존재로 대하고 있는지를 다시 묻게 한다. 축산 현장에서 일하던 외국인 근로자가 폭언과 폭행, 열악한 근로환경 속에서 심각한 인권 침해를 겪었다는 사실은 일부 현장에만 국한된 사실이 아닐 것이다. 이주민 지원 현장에서 외국인 근로자를 만나온 센터장으로서, 이번 사건은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구조적 문제의 한 단면이라 느껴진다. 전북은 농촌과 축산업, 제조업 노동 현장에서 외국인 근로자는 이미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 되었으며,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내국인 노동력이 빠르게 줄어드는 가운데, 외국인 근로자는 지역 산업을 떠받치는 핵심 인력이 되었다. 특히 돼지농장을 비롯한 축산업은 노동 강도가 높고 근무 여건이 열악해 외국인 근로자 의존도가 높은 분야다. 그럼에도 이들의 노동은 여전히 “일손을 때우는 비용”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고, 인권과 안전은 현장에서 뒷순위로 밀리기 일쑤다. 현장에서 만난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은 공통된 어려움을 호소한다. 근로계약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일을 시작하고,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부당한 지시나 폭언을 겪어도 어디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언어 장벽과 정보 부족, 고립된 생활환경은 이들을 더욱 취약한 위치로 내몬다. 특히 농촌과 축산 현장은 외부의 감시와 지원이 닿기 어려워, 인권 침해가 장기간 방치될 위험이 크다. 이번 돼지농장 사건 역시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이 누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개인의 일탈이나 특정 사업주의 문제로만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외국인 근로자를 값싼 노동력으로만 인식하고, ‘말 못 하니 참을 것’이라는 왜곡된 시선 속에서 유사한 사건들이 반복되고 있다.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노동 현장은 안전사고 위험이 커지고, 숙련 인력은 떠나며, 결국 지역산업 전체가 타격을 입는다. 이 때문에 외국인 근로자 지원은 복지 차원이 아니라 안전망 구축이다. 한국어 교육과 노동권 교육은 권리 보호뿐 아니라 현장의 안전과 직결되고, 지역사회와의 연결망은 고립을 줄이고 위기 시 도움을 청할 수 있게 한다. 더 나아가 상담·통역·주거·의료 지원 등은 최소한의 인권 기반을 마련하는 장치다. 이러한 지원이 작동할 때 외국인 근로자는 단순한 노동력이 아니라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자리할 수 있다. 외국인 근로자의 인권 보호는 특정 집단의 권익을 확대하는 문제가 아니라, 전북 농업·축산업·제조업의 노동 기반을 안정시키는 정책 과제다. 노동권과 주거, 안전, 교육, 통역·상담 등 기본적 지원 체계를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일은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투자이며, 지역경제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필수 인프라다. 지자체와 중앙정부, 사업장, 지역사회가 역할을 분담하고 협력할 수 있는 정책적 장치를 마련할 때 외국인 근로자는 단순 노동력이 아닌 지역의 인적 자원으로 자리할 수 있다. 이러한 전환이 이루어질 때 전북은 안정적인 노동 수급과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고, 지역사회도 보다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6.01.13 18:37

[새벽메아리] 시민예술, 도시의 내일을 키우는 힘

예술은 오랫동안 특별한 사람들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다. 무대 위의 전문가와 객석의 관객은 분명히 구분되었고, 창작은 선택된 소수의 몫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지역 곳곳에서 이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실버합창단, 시민연극, 직장인 밴드와 같은 시민예술은 더 이상 주변부의 활동이 아니라, 도시 문화를 곳곳에서 지탱하는 힘이자, 시민들의 삶 속에서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문화와 예술의 민주주의가 더욱 크게 확장되고 있다. 시민예술의 가장 큰 가치는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 완성도 높은 공연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연습하고, 의견을 나누고, 실패를 겪으며 관계를 쌓아가는 그 시간과 경험에 있다. 이 과정에서 예술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삶의 일부가 된다. 누군가의 취미였던 개인 활동은 공통의 관심사로 모인 공동체의 경험으로 확장되고, 이를 통해 개인의 즐거움은 지역의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전북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대중 예술 중심이던 축제와 문화행사에 시민 예술팀이 자연스럽게 참여하고, 무대예술을 담아내던 공연장은 다양한 생활문화 공간, 시장, 골목, 주차장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예술의 수준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토양을 넓히는 일에 가깝다. 토양이 넓어질수록 그 위에서 자라는 예술 역시 다양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예술은 도시의 지속가능성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대규모 예산과 일회성 이벤트에 의존하는 문화는 쉽게 소진되지만, 시민의 일상 속에서 이어지는 예술 활동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참여한 사람들의 삶이 계속되는 한, 그들의 삶과 함께하는 시민예술 역시 꾸준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문화가 ‘사업’을 넘어서 시민들의 삶 속의 ‘생활’로 자리 잡을 때 더욱 확장될 것이다. 물론 시민예술이 모든 문제의 해답은 아니다. 전문성 부족, 지속성의 어려움, 참여자 간의 갈등 등은 늘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는 시민예술이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성장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를 찾아가기 위해 배우고 조정할 수 있다는 여지와 다시 시도할 수 있다는 기회를 열어두는 것이다. 앞으로의 문화정책은 시민예술을 보호의 대상이나 보조적 영역으로 바라보기보다, 도시 문화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파트너로 인식해야 한다. 행정은 방향을 정해주는 주체가 아니라, 시민의 실험이 가능하도록 공간과 시간을 열어주는 역할에 가까워져야 한다. 예술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은 도시를 바꾼다. 시민예술이 확산된다는 것은 더 많은 시민이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 과정에서 도시는 느리지만 조금씩, 그리고 분명히 단단해진다. 시민예술의 미래가 밝은 이유는, 그 중심에 언제나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하형래 프로듀서는 전북대를 졸업하고 경희사이버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석사를 받았다. 뮤지컬 ‘맘’, ‘왕과의 산책’, ‘곡두식당’ 등 다수 작품을 기획, 연출 및 출연했으며 전북문화관광재단 심의위원, 전주문화재단 심의위원 등을 역임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6.01.06 18:45

[새벽메아리] 고향사랑기부제 활성화의 답은 ‘민간 주도’에 있다

12월, 고향사랑기부제의 달이다. 올해로 시행 3년째를 맞은 고향사랑기부제로 모인 돈이 처음으로 1000억 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첫해인 2023년 모금액은 651억 원, 지난해엔 879억 원이었다. 고향사랑기부제는 주소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에 기부하는 제도다. 기부를 하면 연말정산 때 10만 원까지는 전액 세액공제로 돌려받고, 여기에 기부액의 30% 가격에 해당하는 답례품도 받는다. 10만 원을 기부하면 13만 원을 돌려받는 셈이다. 이렇게 모인 돈은 지자체가 지역 주민의 복리 증진과 지방소멸 대응 사업 등에 쓴다. 알다시피 이 제도는 일본의 고향납세제에서 따왔다. 우리보다 15년 앞선 2008년에 제도를 시행한 일본은 당시 세수 감소와 지역 소멸 위기에 맞서 지자체 스스로 길을 찾도록 제도를 도입했다. 일본이 한해에 모으는 기부금 액수는 무려 12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우리와 인구나 예산 규모가 다르다고 해도 우리보다 한참 앞서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일본 고향납세제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핵심은 민간 주도의 ‘지정 기부 사업’ 활성화에 있다. 일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금의 주체는 지방자치단체지만 지역 문제를 해결하려는 다양한 시민사회조직들이 특정 사업을 제안하고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일본 최초의 민간플랫폼인 ‘후루사토초이스’가 2013년에 처음 도입한 크라우드펀딩 서비스 ‘GCF(Government Crowd Funding)’가 불을 댕겼다. 고향납세제를 단순히 지역 예산을 추가로 확보하는 통로가 아닌 시민 참여를 통해 아래로부터 혁신적 정책(해법)을 만들어내는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기회로 본 것이다. 가령, 일본 규슈에서 가장 작은 사가현은 2014년 난치병으로 알려진 ‘제1형 당뇨’ 치료제 개발을 위한 재원을 이 GCF로 모으기 시작했다. 모금을 주도한 건 ‘일본IDDM네트워크’라는 민간 단체였고, 지자체는 이곳을 지정 기부 단체로 지정해 모금과 사업 집행에 필요한 권한을 부여했다. 민간의 전문 조직과 행정 그리고 기부자를 잇는 ‘거버넌스’가 만들어지자 두 달 만에 우리 돈 1억 원이 넘게 모였다. 사가현은 이렇게 모인 기부금의 90%가 곧바로 일본IDDM네트워크에 전해지도록 조례도 만들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 사업에 모인 돈은 100억 원에 달하고, 사가현은 국립사가의대를 비롯한 20~30개 연구기관과 함께 1형 당뇨 연구를 꾸준히 해오고 있다. 일본 시민의 지갑을 연 건 답례품이 아니라 효능감이었다. 작은 참여로 사회 문제 해결에 힘을 보탤 수 있다는 효능감 말이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도 지정 기부와 민간의 역할이 조금씩 커지고 있기는 하다. 광주 동구는 비영리단체인 피스윈즈와 함께 유기견 살처분을 막고 입양을 돕는 사업을 진행해 8천 명으로부터 무려 8억 원을 모았다. 아직 고향사랑기부제 참여율은 그리 높지 않다. 경제활동인구 30명 중 1명 꼴이다. 그만큼 앞으로의 성장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향사랑기부제는 지금껏 우선순위에서 밀려있던 지역의 문제들을 시민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문제는 어떻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시민에게 효능감을 느끼도록 할 것인가다. 이건 행정보다 민간이 더 잘하는 일이다. 내년엔 우리에게도 더 많은 민간 주도 사례들이 만들어지길 기대해본다. 윤찬영 북카페 기찻길옆골목책방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5.12.30 18:44

[새벽메아리] AI와 사회복지, 사람을 위한 동행

인공지능(AI)과 로봇을 비롯한 피지컬AI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이미 스마트폰의 음성 비서, 챗봇 상담, 가정 내 스마트 기기를 통한 그 혜택이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 들어와 있고 그것을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AI는 사회복지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인간의 존엄과 관계를 다루는 영역에서 AI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첫째, AI는 복지 서비스 접근성을 크게 넓힐 수 있다. 농어촌이나 고령화 지역처럼 사회복지 인력이 부족한 곳에서 AI 상담 챗봇은 정신건강 돌봄의 기본적인 기능과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감정 분석을 통해 우울이나 불안을 조기에 발견하고, 필요할 때 전문가와 연결하는 역할도 가능하다. 피지컬AI, 즉 돌봄 로봇은 독거노인의 약 복용을 챙기고 긴급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등의 기본 안전망이 될 수 있다. 둘째, AI는 맞춤형 복지 설계자가 될 수 있다. 개인의 생활 패턴, 건강 기록, 경제 상황을 분석해 꼭 필요한 복지 서비스를 추천할 수 있다. 아동 학대, 노인 고독사, 자살 위험군 등 위기 상황을 조기에 감지하고 사회복지사에게 알려 준다면, 지금보다 훨씬 빠른 개입이 가능해질 것이다. 셋째, AI는 사회복지사의 업무를 지원한다. 복지 현장에서 많은 시간을 빼앗는 행정 업무, 예를들면, 신청서 작성, 사례 관리, 보고서 작성 등을 자동화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사회복지사는 본질적인 ‘사람을 만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또한 AI는 복잡한 사례에서 최적의 자원 배분을 제안하며 의사결정을 돕는다면, 효율성과 공정성을 동시에 높이는 과정이 될 것이다. 넷째, 피지컬AI는 돌봄과 일상 지원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이동 보조 로봇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발이 되고, 가사 지원 로봇은 독거 장애인의 손이 될 수 있다. AI 스피커는 외로운 이들의 말벗이 되고, 가족과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이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 고립을 완화하는 정서적 돌봄의 자원이다. 그러나 놓쳐서는 안 될 과제도 있다. AI가 사회복지사를 대체할 수 있느냐는 논란이 있다. 복지의 본질은 인간의 관계와 존엄에 있다. 기술은 사람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보조자여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디지털 격차다. 고령층과 저소득층이 AI 활용에서 소외된다면, 복지는 또 한 번 불평등을 만들어낼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이가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앞으로 사회복지와 AI의 만남은 하이브리드 모델로 나아가야 한다. 사회복지사가 직접 만나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을 AI가 메우고, 24시간 긴급 모니터링은 AI가 담당한다. 그리고 깊은 공감과 관계는 사람이 맡는 것이다. 데이터와 네트워크 관리는 AI가, 인간적 돌봄과 공감은 사회복지사가 담당하는 협력 구조가 바람직하다. AI와 피지컬AI는 사회복지 현장의 여러 곳곳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질 수 있는 매우 긍정적인 도구다. 그러나 도구는 목적이 될 수 없다. 사회복지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어야 한다. 기술이 사람을 대신하는 순간, 복지는 본질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AI로 인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의 대전환은 이제 시대적인 과제가 될 수 밖에 없다. 사회복지 영역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AI와 사회복지의 만남은 선택이 아니라 이제는 필연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가치와 철학으로 이 기술을 활용하느냐이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소외된 이웃의 곁을 지켜주는 따뜻한 동행으로서 AI가 쓰이길 기대한다. 양병준 전북희망나눔재단 사무국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5.12.23 18:42

[새벽메아리] 시간을 건너온 목소리, 지역문화에서 원로예술인의 자리

처음부터 큰 기대를 품고 만난 자리는 아니었다. ‘원로예술인 인터뷰’라 하면 대개 정해진 질문과 정리된 연보, 미화된 회고가 오갈 것이라 짐작했다. 네 분의 원로예술인을 만났고, 각자의 분야는 서로 달랐다. 그러나 대화가 이어질수록 그 예상은 빠르게 무너졌다. 나는 어느새 질문자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되었고, 기록자가 아니라 지난 시간을 탐색하는 여행자가 되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개인의 성공담이 아니었다. 변산마실길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부안에 예총이 어떤 경로로 만들어졌는지, 최초의 미술단체 청목회가 왜 당구장이나 다방에서 전시할 수밖에 없었는지. 70-80년대 밴드문화와 클럽문화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그리고 그것이 독학으로 악기를 배우고 공연자로 성장한 1세대 예술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생태계였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낡아빠져 리모델링이 필요하다고 말해지는 문화예술회관이나 문화의 전당, 석정문학관은 삼십여년 전 이들이 지역 내의 무수한 반대 의견을 뚫고 만든 최신식 문화거점이었다. 즉, 지금 존재하는 지역문화의 구조들이 어떤 우연과 필요, 환경 속에서 형성된 것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미흡해 보이는 결정들조차, 그 당시 조건 속에서는 최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예산도, 제도도, 인식도 부족했던 시절에 무엇인가를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성취였다. 그래서 더 이상 “왜 그때 더 잘하지 못했나요?” 라는 질문은 떠오르지 않았다. 앞선 세대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그들이 떠안았던 불확실성과 고립을 상상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지역문화의 토대는, 완성된 설계도가 아니라 시행착오의 축적이라는 사실을 이들의 말이 증언하고 있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기억과 자료의 상관성이었다. 어떤 분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분일수록 자신의 창작물도 잘 정리하여 갖고 계셨다. 그러나 어떤 분은 활동하는 동안 잦은 이주로 자료가 소실되거나 장르의 특성상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 공연예술 분야가 특히 그러했다. 미술이나 문학은 작품집이나 도록이 그나마 남아 있었지만 국악이나 대중음악은 영상자료는 고사하고 사진 몇 장, 악보 몇 장이 다였다. 그러니 구술을 하는 과정에서도 정확한 연도나 정황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대부분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흐릿해진 기억이지만 다시 그 시점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원로예술인들은 빛이 났고 청년이 되었다. 지역문화에서 원로예술인의 위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가능하게 한 시간의 몸이다. 그들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기에 더 중요하다. 공식 문서나 자료로 남길 수 없었던 이유, 당시의 선택이 갖는 한계, 그리고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는 문장을 증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로예술인을 예우해야 한다는 말은 자주 공허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는 일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지역문화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는 공동체는 어디로 갈지도 알 수 없다. 원로예술인은 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의 깊이를 남긴다. 그리고 그 질문 위에서, 지금의 우리는 비로소 다음 선택을 고민할 수 있게 된다. 전민정(독립기획자, 전 부안군문화재단 사무국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5.12.16 18:13

[새벽메아리] 베트남 유학생 故 뚜안을 추모하며

2년 전 전주지역 외국인 유학생 시간제 취업 실태조사를 했다. 언어소통 등 조사의 어려움으로 유학생의 도움을 받아 실태조사를 했다. 그때 만난 A는 대학교 4학년으로 미얀마 학생 대표이기도 했지만, 한국말도 잘해 조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실태조사를 하면서 몇몇 유학생들이 임금을 받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는 걸 알게 되었고 A와 함께 사업주를 만나 밀린 임금 지급을 요청하기도 했다. 24년 A는 졸업했고 D-10 구직 비자로 취업을 준비했다. D-10 비자는 유학생이 졸업 후 E-7(전문 숙련) 비자로 취업하기 전, 인턴십 등을 할 수 있는 비자다. 그러나 E-7으로 전환하려면 전공과 맞는 일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찾지 못했고, A는 E-7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면 출국해야 하기에 인턴십으로 몇 개월 일하다가 비자기간 만료로 결국 대학원을 선택했다. 졸업 후 유학생들은 취업을 위해 E-7 비자 전환을 원하지만 전환율은 10%도 안된다. 지난 10월 28일 대구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던 베트남 이주노동자(故 뚜안)가 단속을 피하던 중 3층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뚜안은 2019년 한국에 입국하여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배운 뒤 2025년 2월 계명대학교를 졸업했다. 뚜안은 졸업 후 D-10 비자를 받았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기에 2025년 10월 자동차 부품 회사에 일용직으로 2주간 일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출입국 사무소가 단속을 나왔다. 뚜안은 잡히면 벌금을 내야 했고, 더 무서운 건 비자 변경으로 인한 불이익이었다. 미신고 취업으로 벌금 경력이 있으면 비자 전환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뚜안은 단속을 피해 3시간 넘게 옥상 실외기 옆에 숨었고 단속반이 가기를 기다리다 추락한 것이다. 유학생이면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시간제 취업으로 일하는 유학생은 대부분 신청 절차의 까다로움, 업주의 비협조로 미신고 취업 상태에서 일하며, 졸업 후 정식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미신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많다. 뚜안의 죽음 소식에 상담을 해온 유학생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전북 유학생은 23년 기준으로 9,799명으로, 올해 1만 명을 훨씬 넘었다. 유학생 대부분이 학업과 생계를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현실은 이들을 불법으로 내몰고 있다. 유학생 대부분이 시간제 취업을 하지만 공적인 취업 연계 기관이 없다 보니 노동법과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고 체불임금 등의 경험 비율이 높다. 부당한 일을 겪고도 의사소통 문제나 미신고 취업으로 불이익이 발생할까 대응 조차 못한다. 단속에 걸리면 유학생뿐 아니라 채용한 업주도 벌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해외 사례를 찾아보니 영국, 캐나다, 호주 등은 졸업한 유학생의 경우 자유롭게 취업할 수 있는 개방형 취업 허가제를 운용 중이다. 우리 사회도 유학생 개인에게 맡겨진 시간제 취업을 공공의 일자리 매칭 제도를 만들고 유학 후 일정 기간은 개방형 취업 허가제 도입도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유학생들이 졸업하고 정식으로 취업할 수 있는 E-7 비자 전환율이 10%도 안되는 현실을 개선되야 할 것이다. 뚜안과 같은 안타까운 죽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단속 추방 중심의 이주노동자 정책도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유기만 전주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정책국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5.12.09 19:17

[새벽메아리] 주민 자치 시대의 근거를 지워 버린 익산시의회

2016년 1월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민간인 동장이 임기를 시작했다. 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4동의 황석연 동장(당시 49세)이었다. 그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개방형 공모를 거쳐 2년 임기의 동장이 되었다. 임기 초반, ‘혁신의 전략’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협치와 자치의 원리입니다. 주민들 스스로 지지와 격려를 나누면서 자기 주도하에 마을을 변화시키고 가꾸어가게끔 하는 것이지요. 지금은 ‘통치’가 통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그는 독산4동이 처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가며 마을의 풍경을 조금씩 바꿔나갔다. 그는 먼저 주민센터 3층에 있던 동장실을 없애고 벽을 터서 주민과 머리를 맞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주민 스스로 동네의 문제를 찾고 혁신적 해법을 세워 실행할 수 있도록 한 것. 그렇게 고질적인 골목길 쓰레기 문제와 주차 문제의 해법을 주민과 함께 찾아내 ‘재활용 정거장’과 ‘도시 광부’ 사업을 시작했고, ‘행복 주차 골목’도 만들어냈다. 여름엔 동네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도록 성당 주차장에 공짜 수영장을 열었고, 겨울엔 차들로 북적이던 먹자골목을 막아 골목 운동회를 열었다. 새로운 사업에 필요한 예산은 서울시에서 받아내거나 다른 예산을 줄여 마련했다. 그동안 정부와 광역ㆍ기초지방자치단체가 정해준 일들만 처리하던 ‘동’이 스스로 계획과 예산을 세워 문제를 해결해본 첫 ‘자치’의 경험이었다. 하지만 동장 한 명 바뀐다고 ‘주민(지방) 자치’가 실현되는 건 아니다. 조직과 제도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오래 갈 수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게 ‘주민자치회’다. 지난 2013년 처음 시범사업을 시작한 주민자치회는 주민이 직접 정책을 만들고 결정할 수 있도록 만든 조직이다. 주민자치센터의 사무도 위탁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13년째 시범사업 꼬리표를 떼지 못해왔다. 다행히 이재명 정부는 주민자치회의 전면적 확대·시행을 여러 번 약속했고, 지난달 27일 주민자치회를 법적 기구로 인정하는 <지방자치법> 개정안이 마침내 국회 행정안전위를 통과했다. 이제 법제사법위와 본회의 통과 절차만 남아있다. 이번 개정안에는 ‘① 풀뿌리 자치의 활성화와 민주적 참여의식 고양을 위하여 읍·면·동에 해당 행정구역의 주민으로 구성되는 주민자치회를 둘 수 있다. ② 제1항에 따라 자치회가 설치되는 경우 관계 법령, 조례 또는 규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지방자치단체 사무 일부를 자치회에 위탁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길게는 일제강점기 이후 끊어졌던 ‘풀뿌리 주민(지방) 자치’ 시대의 부활이 비로소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곧 시범사업 꼬리표를 떼고 법적 기구로 자리잡을 주민자치회는 주민자치센터의 위탁 운영과 주민참여예산의 운영 등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익산시에서만은 그럴 수 없다. 지난 2021년 익산시의회가 ‘익산시주민자치회시범실시및설치·운영조례’에서 ‘자치센터 위탁’ 조항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당시 의회는 개정 이유로 ‘상위법에 위배 된다’는 점을 들었으나 당시 관련 법령이나 행안부 <표준 조례안>에 비춰 이는 전혀 근거가 없을뿐더러 다른 지자체에선 찾아볼 수 없는 개정 사례다. 익산시의회는 이제라도 잘못된 조례를 바로잡아 익산시가 ‘자치 낙후 도시’로 낙인찍히는 일이 없도록 하길 바란다. 윤찬영 북카페 기찻길옆골목책방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5.12.02 17:33

[새벽메아리] 기본소득, 더 늦기 전에 : 사회적 대화를 시작할 시간

저성장과 인공지능(AI) 혁명이 겹쳐지며 한국 사회의 근본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 성장률은 2%대에 머물고, 청년 실업과 불안정 노동은 일상이 되었다. AI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노동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단순 반복 업무뿐 아니라, 사무직·운송·서비스 등 중간 기술 직종까지 자동화의 파도가 밀려온다. 산업의 효율성은 높아지지만, 생산성의 열매는 소수 자본에 집중되고, 대다수 시민은 소득과 일자리의 불안정 속으로 밀려난다. 부의 집중과 중산층의 붕괴가 전 세계적으로 가속화되는 이유다. 이제 “열심히 일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전제가 흔들리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새로운 사회적 안전망을 고민해야 한다. 바로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조건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일정한 현금이다. 이는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기술·경제 구조 변화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생존을 지켜내는 최소한의 토대다. 물론 기본소득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여전하다. 막대한 재정 부담, 근로 의욕 저하, 보편성과 형평성의 딜레마 등 여러 비판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런 논쟁이야말로 우리가 사회적 대화를 시작해야 할 이유다. 중요한 것은 ‘기본소득이 가능한가’의 찬반 구도가 아니다. ‘어떤 기본소득이 지속 가능하고 사회적 대안을 줄 수 있는가’를 함께 설계하는 일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프레임 속의 논쟁이 아니라, 현실적 해법을 찾기 위한 공론화다. 이미 한국 사회는 여러 실험을 통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전 국민 재난지원금은 일시적 기본소득의 형태로 지급되었고, 지역화폐를 활용한 경기 활성화 효과가 입증됐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농어촌 기본소득 시범사업’도 같은 맥락이다. 전북 순창군은 전국 7개 시범지역 중 하나로 선정돼 2026년부터 모든 군민에게 매달 15만 원을 지급한다. 농촌의 고령화와 소득 불안정 문제를 완화하고, 지역 내 소비 순환을 촉진하려는 시도다. 이는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지역경제 모델을 실험하는 사회적 실험장이기도 하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돈을 나눠주는 정책’이 아니라, 변화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회 계약의 모색이다.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다. 기본소득은 시민이 최소한의 경제적 독립을 갖고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만드는 제도이며, 나아가 모두가 배제되지 않고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의 기반이다. 기본소득 논의는 더 이상 일부 정치인의 공약이나 이념적 논쟁에 머물러선 안 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삶, 나아가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문제다. 재원 마련의 어려움, 제도 설계의 복잡함, 형평성 논란 모두가 공론의 장에서 다뤄져야 할 과제일 뿐, 논의를 멈출 이유는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저성장과 인구 감소, 기술혁신이라는 거대한 구조적 변곡점 위에 서 있다. 위기는 곧 기회다. 새로운 경제 질서와 사회적 연대를 모색할 수 있는 전환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세대와 지역, 계층, 정치적 입장이 참여하는 ‘기본소득에 대한 사회적 대화’가 절실하다. 기본소득은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공동체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지금이 바로 그 대화를 시작할 시간이다. 늦기 전에. 양병준 전북희망나눔재단 사무국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5.11.25 18:13

[새벽메아리] 텅 빈 목욕탕이 우리에게 묻는 것

농촌 지역을 방문하면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이나 ‘정주여건 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진 공공시설을 쉽게 볼 수 있다. 막대한 예산이 들어간 면단위 커뮤니티센터, 다목적체육관 등 외관은 번듯한데 정작 수개월이 지나면 이용자가 적어 운영을 축소하거나 문을 닫는 경우도 있다. 특히 ‘작은 목욕탕’ 사업은 이러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 지역의 성공 사례가 알려지면, 그 고유한 배경이나 특수성은 고려되지 않은 채 유사한 하드웨어가 전국적으로 복제되는 경향이 있다. 이 과정에서 정작 그 시설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생략되기 쉽다. ‘작은 목욕탕’은 건축가 고(故)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면사무소 설계를 의뢰받았을 때, 관습적인 기능 배치를 따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주민, 특히 어르신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실질적인 필요를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평생 논밭일로 허리가 굽었는데, 죽기 전에 뜨신 물에 몸 한번 편히 담그는 게 소원”이라는 목소리가 나온 것은 그 과정에서였다. 이 지점이 바로 ‘공공건축’의 본질이다. 공공건축은 예산을 투입해 구조물을 완성하는 토목 사업과 구별된다. 그것은 그 공간을 사용할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과 필요에 응답하는 ‘사용자 중심의 디자인’인 것이다. 정기용 건축가는 행정의 요구나 건축가의 이상적인 욕심이 아니라, ‘그 땅’의 어르신들의 목소리와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래서 무주의 목욕탕은 단순한 위생 시설이 아니라, 서로의 건강을 확인하고 안부를 묻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면사무소에 목욕탕을 붙인다는 것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것이었다. 허나 이 또한 25년 전의 일이다. 이후 많은 지역에서 이 사례를 벤치마킹할 때, 이 핵심적인 ‘과정’은 생략되고 ‘목욕탕’이라는 ‘결과물’만 넘어왔다. 주민들의 실제 필요를 진단하는 과정 없이 ‘옆 동네도 있으니 우리도’라는 논리가 작동했다. 그 결과 기존 사랑방 기능과 중복되거나, 운영 관리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없이 지어져 이용률이 저조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결국 ‘정신’은 증발하고 ‘껍데기’만 복제하다 보니 이런 상황에 이른 것은 아닐까. ‘유니버셜 디자인’ 개념도 마찬가지다. 이를 단순히 장애인 경사로나 손잡이 같은 법적 기준의 기술적 충족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유니버셜 디자인의 핵심은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것은 그 공간을 사용할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용자, 그중에서도 가장 도움이 필요한 자의 구체적인 조건과 필요를 디자인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유니버셜 디자인은 획일적인 모듈이 아니라, 그 지역의 고유한 맥락 속에서 가장 세심하게 맞춤화된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꼭 필요한 시설인지 가려내야 하고, 짓기로 결정되었다면 지역의 내재적 필요와 삶의 원리와 조응하는 방향으로 디자인되어야 한다. 외부에서 주입된 표준화된 모델이 아니라, 그 지역의 고유한 맥락과 주민들의 실제 삶 속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공공건축은 짓기 전에, 먼저 ‘듣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수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공공시설들이 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그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찾아야 할 때다. 전민정 부안군문화재단 사무국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5.11.18 18:22

[새벽메아리] 2024년 한국 체불임금 일본보다 52배, 미국보다 42배 많다

한 청년이 센터로 체불임금 상담을 왔다. 노동부에 진정도 하고 법원에서 지급 결정문도 받았지만, 사업주는 돈이 없다며 임금을 주지 않았다. 국가가 대신 지급하고 사업주에게 받아내는 대지급금은 사업주가 6개월 이상 사업을 운영한 경우만 신청할 수가 있어 자격이 되지 않았다. 청년은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으며 상담 시간 잡는 것도 힘들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었다. 사업주는 정말 지급 능력이 없을까? 청년 말로는 사업주는 부인 명의로 버젓이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두 달 치 알바 임금을 받기 위해 청년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싸우고 있었다. 2024년 체불임금은 2조가 넘었고 올해는 작년보다 더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임금 채권 보장 기금으로 운영되는 대지급금은 갈수록 커지는 체불임금액을 감당하지 못해 체불임금 노동자들의 대지급금 이용 문턱은 높아지고 있다. 2024년 노동부에 체불임금 2조 4백억 원 중 미해결 체불임금이 약 7천억 원이다. 이처럼 갈수록 체불임금이 많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2024년을 기준으로 한국과 미국, 일본의 체불임금을 비교한 자료에 따르면 체불임금이 일본은 약 933억 원, 미국은 약 2,773억 원으로 한국의 2조 4백억 원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임금노동자가 일본은 한국보다 2.4배 많고 미국 6.6배 많은 걸 고려하면 임금노동자 대비 한국의 체불임금 수준이 일본보다는 52배 높고, 미국보다 42배 높다. 여러 전문가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은 경영자의 높은 윤리 의식 때문에 임금 체불이 적고, 미국은 ‘임금절도예방법’이라는 강력한 처벌로 임금 체불이 적다고 한다. 캘리포니아주는 체불액 130만 원에 대하여 최대 3년의 징역형과 약 2,800만 원에 해당하는 벌금, 고용주의 사업허가 취소까지도 할 수 있다고 하니 임금체불로 진정해도 돈만 주면 아무런 처벌이 없는 한국은 체불임금 사업주의 천국이나 다름없다. 사태가 이렇게 심각해지자 노동부는 10월 23일부터 상습 임금체불 사업주에 대한 제재를 강화했다. 상습 체불 사업주에 신용제재, 정부 지원 제한, 공공 입찰 시 불이익과 퇴직금에만 적용하던 지연이자(20/100)를 재직 노동자의 체불임금에도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2회 이상 형사처벌 받은 사업주가 다시 임금 체불을 할 시 반의사불벌죄(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형사처벌을 할 수 없음) 적용을 제외하여 형사처벌을 하겠다는 것이다. 기타 출국금지, 체불임금의 3배에 해당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도 시행된다. 하지만 모두 상습체불 사업주에 대한 제재이기에 얼마만큼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체불임금의 40%를 차지하는 퇴직금은 퇴직연금제도 의무화가 절실한데 언제 법제화될지 기약이 없다. 또한 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다. 영세한 하청업체와 프렌차이즈에서 발생하는 체불임금 비중이 높아 대기업의 연대 책임을 강화하는 것도 제도화해야 할 것이다. 학비를 벌어가며 주경야독하는 청년이 두 달의 아르바이트비를 받지 못해 1년 동안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 법원과 상담 기관을 쫓아다녀야 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방정부도 임금을 체불한 사업주가 지방 보조금을 받아 가는 사업장이 아닌지 감독하고 사각지대에 놓인 체불임금 노동자가 긴급하게 생계비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유기만 전주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정책국장

  • 오피니언
  • 주연휘
  • 2025.11.10 14:23

[새벽메아리] 이리역 폭발 사고 48주기, 익산의 정체성을 묻다

오는 11월 11일은 이리역 (화약열차) 폭발 사고가 일어난 지 48년째가 되는 날이다. 벌써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셈이다. “콰광!” 천둥보다 더 큰 폭발 소리가 들렸다. 유리창이 산산조각으로 깨지며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안쪽에 있던 문짝도 날려 들어왔다. (김남중의 소설 <기찻길 옆 동네>에서) 익산은 기찻길과 인연이 깊은 도시다. 지금으로부터 113년 전,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곳에 기찻길이 놓이고 기차역이 생기면서 새 도시가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기찻길이 이곳을 지나지 않았다면, 또 역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도시도 없었을 것이다. 기찻길을 따라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고, 도시는 빠르게 번성했다. 기찻길이 번영만을 가져다준 건 아니다. 깊은 상처들도 남겼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950년 7월 11일, 미군 B-29 폭격기 두 대가 옛 이리역과 만경강 철교에 폭탄을 떨어뜨려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졌다. 긴 세월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이 사건은 무려 50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77년 일어난 ‘이리역 폭발 사고’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열차 화물칸에 실려있던 엄청난 양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바람에 59명이 죽고 1402명이 다쳤다. 지축을 뒤흔든 폭음과 함께 삽시간에 초토로 변한 이리시내는 온통 화약냄새로 가득 찼으며 12만 명의 이리시민은 한밤을 공포 속에 새웠다. 시가는 온통 깨어진 유리파편과 초연으로 뒤덮여 전장의 폐허를 방불케했다... 역 구내와 역대합실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었고 부서진 집 앞에서 가족을 잃고 추위 속에 밤새 통곡하는 유족들의 울부짖음이 처절하기만 했다. (<경향신문>, 1977.11.12.) 이 엄청난 폭발은 도시 풍경도 크게 바꿨다. 사고 이듬해에 기차역사는 처음 자리에서 남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새로 지어졌다. 지금 익산역 자리다. 역사에서 동쪽으로 곧게 뻗은 중앙로와 남북 방향으로 멀리까지 뻗어나간 익산대로도 이때 새로 난 길들이다. 익산대로 건너 중앙동엔 현대식 상가들이 들어서면서 오늘날의 모습에 가까워졌고, 역 서쪽 모현동엔 사고가 난 지 200일 만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무엇보다 역 바로 옆 판자촌이 폭발로 무너지면서 도시의 오랜 골칫거리였던 집창촌이 사라졌다. 고여있던 도시는 다시 출렁였다. 이렇듯 기찻길을 빼고 익산이라는 도시를 설명하긴 어렵다. 도시의 번영과 상처가 오롯이 기찻길 위에 새겨져 있으니까. 하지만 이 도시에서 이런 흔적을 찾아보긴 어렵다. (원)도심 한복판에 10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기차역이 있을 뿐 역을 조금만 벗어나면 이곳이 기찻길 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걸 느끼게 하는 그 무엇도 없다. 게다가 100년 가까이 사람들로 북적이며 한때 ‘호남의 명동’으로 불렸다던 역 앞 원도심은 언제부턴가 활기를 잃은 채 아무런 정체성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도시 브랜드’를 만들 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도시의 정체성을 제대로 아는 일이다. 좋든 싫든 익산은 기찻길 위에 세워진 도시고, 그걸 빼고 익산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순 없다. 이리역 폭발 사고 48주기를 맞아 도시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에 더해 이 도시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나아갈지를 함께 고민해보는 것도 뜻깊은 일일 것이다. 익산은 아직도 기찻길 위에 서 있다. 윤찬영 북카페 기찻길옆골목책방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5.11.04 17:59

[새벽메아리] 이재명 정부의 2026년 통합돌봄 '기대 반, 실망 반'

양병준 전북희망나눔재단 사무국장 오는 2026년 3월 27일,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돌봄통합지원법)’이 시행된다. 이는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추진해 온 지역사회 통합돌봄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진전이다. 돌봄이 단순한 복지서비스를 넘어 사회권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누구나 자신의 집과 지역에서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 시행을 앞둔 지금, 기대만큼의 실질적 준비가 이뤄지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재명 정부는 국정과제 78번 ‘지금 사는 곳에서 누리는 통합돌봄’을 내세우며 돌봄정책의 대전환을 예고했다. 이전 정부가 노인 중심의 돌봄에 머물렀다면, 새 정부는 장애인·퇴원환자·장기요양 재가급여자 등 돌봄 대상을 확대했고, 의료·주거·일상지원까지 포괄하는 서비스를 제시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새로운 정부의 의지라기보다 이미 사회적 합의와 법 제정의 결과라는 점에서 과연 실질적 실행력까지 담보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문제는 재정확보와 실행력이다.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2026년 전국 시행을 앞두고 정부가 편성한 예산은 777억 원이다. 정부는 서비스 확충에 529억 원, 지자체 전담공무원 인건비 (한시 지원) 164억 원, 통합지원 시스템 구축 등 기반조성에 31억 원을 투입한다. 대상 지자체도 전국 229개 지자체 중에서 재정자립도 하위 80% 183곳에 국한되며, 지원 규모 또한 1개 시·군당 4~10억 원 수준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대상자별 통합지원계획을 세우고 연결해야 하는 지자체 공무원 인건비 예산은 9급 1호봉 인건비를 반영한 2,400명뿐이다. 전국 3,551개의 읍면동이 있는데 전담 인력을 충분히 배치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결국 지역사회 통합돌봄은 지방정부의 ‘자체 책임사업’으로 전가될 가능성이 높다. 지방정부의 역할 강화는 분권 측면에서 바람직하지만, 재정과 권한이 뒷받침되지 않은 분권은 책임만 떠안는 구조에 불과하다. 돌봄정책이 지속가능하려면 지방재정 확충, 사무집행과 행정 재량 권한이 보장되는 등 제도적 개편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전북특별자치도와 14개 시군의 의지와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전북은 고령화 속도가 전국 평균보다 빠르고, 농산어촌 중심의 생활권 구조로 인해 돌봄 사각지대가 넓게 분포한다. 사회적 입원과 요양시설 의존도가 높고, 의료 접근성이 낮은 지역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전북은 이번 돌봄통합지원법 시행의 성과와 정도를 가늠할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전북은 ‘돌봄이 곧 지역경제’라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돌봄 일자리 창출, 돌봄서비스 제공 인력의 전문화 등 지역 사회의 참여 확대를 통해 돌봄을 새로운 지역 성장 동력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복지사업이 아니라, 고령 사회를 대비하는 지속 가능한 지역정책이자 전북특별자치도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미래 전략이다. 돌봄은 국민의 기본권이자 우리 사회가 인간다운 삶을 위해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그래서 공공 돌봄을 강화하고 ‘돌봄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기만 하다. 그래서 중앙정부의 계획에만 그치지 말고 지역의 현실을 반영한 전북형 통합돌봄의 정착을 위해 지역사회와 함께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돌봄국가로 나아가는 길, 그 출발점에 전북이 앞장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양병준 전북희망나눔재단 사무국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5.10.28 18:24

[새벽메아리]차(車)들을 위한 나라

좌우를 살핀다, 건널까 말까 우물쭈물한다. 지체하는 순간 7-8m 전방에서 차가 등장한다. 저 차만 보내고 건너자 다짐한다. 근데 낭패다. 앞 차량을 뒤따라 어중간한 간격으로 다른 차들이 이어진다. 적절한 타이밍을 놓친 보행자는 다시 한참을 눈치보며 안전한 타이밍을 기다린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의 풍경이다. 아주 가끔 인도 쪽 보행자의 존재를 눈치채고 속도를 줄여 멈추는 차가 있다. 이런 운전자는 서른 대 중에 한 대 정도 될까. 드디어 보행자는 확실한 사인을 받고 횡단보도를 건너게 되는데 이런 배려가 고마웠는지 운전자를 향해 목례를 하기도 한다. 차가 생활의 중심이고 과장해서 말하면 무법천지인 소도시에서는 익숙한 풍경이다. 22년 도로교통법이 개정되었지만 법이 일상의 습관을 개선해 내지 못하고 있다. 이전에는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통행하고 있을 때’만 차량이 정지하면 됐지만 현행법상 횡단보도에 진입하지 않고 ‘통행을 하려는 때’에도 차량은 멈춰야 한다. 즉 대부분의 횡단보도 앞에서 차는 일시정시를 하고, 보행자를 우선해야 한다. 결국 기다리는 사람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모든 차량은 법을 위반한 셈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의식하거나 지키려는 운전자는 얼마나 될까. 자동차 중심의 생활권에서 마주하는 또 하나의 비극은 바로 로드킬이다. 집과 직장을 오가는 그 짧은 거리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동물의 사체를 마주친다. 고라니, 고양이, 너구리, 개, 심어 까마귀와 뱀까지. 필자가 도로 위에서 발견한 동물들이다. 필자 역시 전조등에 의지해 시골길을 달리다 고양이를 칠 뻔한 아찔한 경험이 여러 번 있다. 대낮에 앞서가던 차가 고라니를 들이받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차에 부딪힌 고라니가 몇 초간 경련을 일으키다 도로 위에 고꾸라지던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즉사한 동물의 사체를 제때 처리하지 못하면, 이를 먹으려는 까마귀나 까치가 모여들고 차량들이 이를 피하느라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멧돼지처럼 덩치 큰 동물과의 충돌은 운전자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대형 사고가 되기도 한다. 연간 로드킬로 죽어가는 동물의 수가 9만이라고 하는데 비신고건수와 소형동물을 합치면 대략 20만에 이를 것이라는 전문가의 추산도 있다. 이는 웬만한 중소 도시의 인구수와 맞먹는 수의 생명이 매년 도로 위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로드킬은 고속도로보다 국도와 지방도에서, 특히 수도권 왕래가 잦은 강원과 충청권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동물의 번식기인 봄, 월동을 준비하는 가을에 사고가 집중되는데, 공교롭게도 인간의 여행철과 겹친다. 이를 줄이기 위한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태통로나 유도울타리 같은 물리적 시설은 비용 부담이 커서 전국의 도로에 적용하기 쉽지 않다. 야생동물 등장을 알리는 경보시스템이나 로드킬 다발구간 정보를 내비게이션과 연동하는 기술도 논의되고 있지만, 전면적인 도입은 더디기만 하다. 자동차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다. 이 속도 기계를 버릴 수 없다면, 인간과 동물의 안전을 고려한 강력하고 실효성 있는 조치들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차 중심성은 이미 뿌리 깊어 쉽게 벗어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전민정 부안군문화재단 사무국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5.10.21 18:41

[새벽메아리]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세계시민연대

가자지구 보건부는 지난 2년 동안 가자지구에서 죽은 사람이 9월 기준 6만 5000명이라고 했다. 사망자의 83%가 민간인이고 상당수가 아동이다. 이스라엘이 2년간 가자지구에 쏟아부은 포탄은 7만 톤 이상이고 건물의 80%가 파괴되었다. 생지옥이 따로 없다. 유례없는 민간인 학살에 세계 주요 도시에서 이스라엘 학살을 멈추라는 연대 집회가 이어졌다. 국제 사회의 소극적 대응과 침묵에 22살 스웨덴 출신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6월 1일 세계 시민 12명과 함께 구호품과 의약품을 싣고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7월에는 21명, 9월에는 세계 45개국에서 참여한 500여 명이 51척의 배(이하 구호 선단)를 타고 가자지구로 갔다. 이번에는 한국인 김아현(해초)도 배에 올랐고 가자지구로 가던 중 이스라엘군에 의해 나포되었다. 이스라엘 군에 구호 선단은 모두 나포되었지만 국제 사회 연대는 갈수록 커졌다. 이탈리아와 스웨덴은 이스라엘의 드론 공격으로부터 구호 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군함을 파견하는가 하면 이탈리아 등 유럽의 노동자들은 연대 총파업을 벌였다. 한국도 구호 선단 참여자인 김아현(해초)의 무사 귀환과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이스라엘은 국제 사회에서 더욱 고립되어 갔다. 그레타 툰베리는 인터뷰에서 구호 선단 말고 팔레스타인을 봐달라며 세계 양심에 호소했고 드론 공격을 받을 때조차 "중요한 것은 우리가 드론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인들이 매일 24시간 드론 공격을 겪고 있다는 점"이라며 국제 사회에 관심을 촉구했다. 인류 역사상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처럼 대규모로 전쟁 지역에 민간인이 구호품과 의약품을 싣고 가는 행동을 한 일이 있었던가? 구호 선단의 목적은 오직 학살을 멈추기 위한 직접 행동이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고 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했다. 이스라엘 인류학자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사피엔스에서 허구와 실체를 구분 짓는 요소를 고통이라 했다.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처럼 고통 속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 유대인은 어느 민족보다도 역사적 고통을 가장 크게 느껴온 민족이다. 이스라엘이 누구보다 학살의 고통을 아는 민족이라면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을 진심으로 참회해야 할 것이다. 구호 선단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세계 시민들을 연결했고 그 힘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한옥 마을을 찾는 세계인들이 이스라엘의 학살을 규탄하는 시민단체의 행동에 엄지척으로 연대한다는 소식을 들으며 전주에서도 글로벌 네트워크를 실감한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10월 8일 1단계 휴전에 합의했다. 이번 합의를 트럼프가 자신의 치적처럼 말하지만,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가자지구 휴전 결의안에 6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한 나라다. 지난 9월 18일에도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가자지구 휴전 결의안을 표결했으나 안보리 이사국 15개국 중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가자지구의 영구적 평화를 위해서는 국제 사회의 팔레스타인에 관한 관심과 연대가 중요함을 구호 선단을 통해 확인했다. 갈수록 커지는 구호 선단과 국제 사회의 연대가 없었다면 네타냐후는 학살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하마스의 무모한 테러와 이스라엘의 극악무도한 학살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전 세계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연대가 필요하다. 세계 시민이 함께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생지옥은 가자지구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유기만 새만금상시해수유통운동본부 사무국장·전주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정책국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5.10.14 19:12

[새벽메아리] ‘문학의 도시’를 도둑맞은 익산

“전쟁이 나고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여기 익산에 와서 머물렀다. 한강 이남에서 그렇게 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머물렀던 곳은 익산 말고는 없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만큼 익산은 문학의 전통이 굉장히 강했고, 익산하면 그냥 문학의 도시다.” 지난해 6월 오랜만에 익산을 찾은 박범신 작가는 익산이 ‘문학의 도시’였다는 걸 몇 번이고 되뇌었다. 알다시피 그는 익산 남성고등학교를 거쳐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 그는 남성고 문학반 시절, 겨울이면 익산의 모든 학교 문학반 학생들이 ‘문학의 밤’이란 이름으로 옛 광명예식장에 모여 서로의 시를 나누었던 기억도 꺼내놓았다. 그날만 되면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맨 앞자리에 쭉 앉아서 지켜보았다”다면서 “매우 문학적인 도시에서 성장했다”는 걸 그는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의 대학 선배인 윤흥길 작가는 여섯 살 때부터 익산에서 살았다. 지난해 대하소설 <문신>을 완간한 뒤 익산을 찾은 그는 누가 고향을 물으면 늘 익산이라고 답한다고 했다. 아홉 살 무렵이던 1950년, ‘미군의 이리역 오폭 사고’가 일어난 날 그는 친구와 쑥대밭이 된 역에 몰래 숨어 들어가 철근 끝에 매달린 시체를 보았다면서, 그날 본 광경이 ‘문학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예순을 앞두고는 그동안 미처 쓰지 못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써보기로 마음먹었고, 그렇게 나온 작품이 <소라단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의 작품 곳곳엔 옛 신광교회 종탑을 비롯한 이 도시의 빛바랜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두 작가보다 한참 밑으로 안도현 작가가 있다. 고향인 경북 예천을 떠나 스무 살이던 1980년 어느 밤,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옛 이리역에 내렸다던 그는 "익산에 온 것 자체가 내 시를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이른바 김춘수적인 시 쓰기를 배웠다. 언어를 갈고 닦는 것, 절제...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그런데 익산에 오니 알게 모르게 판소리 가락 같은 분위기들이 스며있는 게 딱 보이더라. 그래서 그걸 배우려고 노력하고 많이 훔쳤다.” 그는 대학 4학년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란 시로 당선됐는데, 이 도시에 살지 않았다면 결코 쓸 수 없는 시였다. 한때 원광대 국어국문학과를 나온 작가들이 한국 문단을 주름잡았던 시절이 있다. 오죽하면 ‘원광 문학 사단’이란 말까지 나왔겠는가. ‘문학’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익산의 자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젠 모두 옛말이 돼버렸다. ‘문학과 책의 시대’가 저물어서일까. 이웃 도시 군산에서 2년째 열리는 ‘북페어’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또 전주가 연화정도서관, 다가여행자도서관 등에 이어 최근 아중호수도서관을 열어 ‘책과 도서관의 도시’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언제 적 박범신이고, 언제 적 안도현이냐는 말도 더러 듣곤 하지만 나는 이제껏 언제 적 톨스토이고, 언제 적 헤밍웨이냐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문제는 책과 문학, 또는 작가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다. 충남엔 ‘강경산 소금문학관’이 있고, 윤흥길 작가가 머물러 온 완주에도 최근 문학관을 지으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 도시에도 ‘이리 문학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만 되면 익산에서 책방을 하는 나는 무언가를 도둑맞은 기분에 왠지 더 쓸쓸해지곤 한다. 윤찬영 북카페 기찻길옆골목책방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5.09.30 19:12

[새벽메아리] ‘죽음을 막는 사회’를 넘어, ‘삶을 함께하는 사회’로

정부가 최근 발표한 ‘2025 국가자살예방전략’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현실을 드러낸다. 인구 10만 명당 28.3명이라는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최상위 수준이며, 이는 단순한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 사회적 재난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정부는 10년 안에 자살률을 17.0명까지 줄이고, 5년 내 자살 사망자를 1만 명 이하로 낮추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 고위험군 집중 대응, 자살예방관 지정, AI 기반 모니터링 강화 등 다각적인 대응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정책의 효과는 숫자로만 평가될 수 없는 개인의 아픔이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래 전 영화 ‘레인 오버 미’는 주인공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뒤 깊은 상실감과 고립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고 고통을 피하려 하지만, 결국 새로운 우정과 관계를 통해 조금씩 삶을 회복해 간다. 영화는 상실과 슬픔이 개인을 무너뜨릴 수 있지만, 동시에 관계와 연대가 치유의 시작이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 사회가 자살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자살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고립과 구조적 압박 속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국회입법조사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8년간 동반자살 건수만 1,500여 건을 넘어섰으며, 이 중 상당수가 가족이나 연인과 얽힌 문제였다. 심지어 400여 건은 ‘살해 후 자살’이라는 극단적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자살이 단순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타인의 삶까지 위협하는 사회적 위험요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정책은 ‘개인 치료’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 사회적 안전망 전체를 아우르는 다층적 접근이 필요하다. ‘레인 오버 미’의 주인공이 새로운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서서히 살아갈 힘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 사회 역시 개인을 고립시키는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 취업난, 부채, 관계 갈등, 정신적 질환 같은 위기 요인은 개인의 의지로만 극복할 수 없다. 국가가 제시한 자살예방전략이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제도적 지원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안에서 서로 돌보고 지지하는 연대의 문화가 뿌리내려야 한다. 정신적 고통은 누구나 겪을 수 있으며, 상실과 절망은 특정 집단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자살 문제는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산물이다. 따라서 해답도 공동체 안에서 찾아야 한다. 정책은 더 촘촘한 안전망과 온국민 돌봄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일이다. 안부를 묻는 한 통의 전화, 함께 걷는 짧은 산책, 소소한 모임이나 대화가 생명을 이어주는 힘이 될 수 있다. 자살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선택이 아니다. 2024년 보건복지부 분석에 따르면 자살 사망자들은 평균 4.3개 이상의 복합적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정신적 고통, 가족 문제, 경제적 어려움 등이 겹쳐 쌓이다가 결국 무너진다. 그래서 무너지는 그 순간 전에, 누군가의 곁을 지켜주고, 함께 짐을 나눌 수 있는 토대가 매우 중요하다. 이제 과제는 분명하다. “죽음을 막는 사회”를 넘어서 “삶을 함께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고통 속에 홀로 남겨진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것,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따뜻하고 건강한 공동체로 변화될 수 있다. 양병준 전북희망나눔재단 사무국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5.09.23 18:26

[새벽메아리] 당신의 말버릇, 그 안에 숨은 것

사람은 말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우리가 하루에 쏟아내는 수많은 단어들은 그냥 흩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과 성격을 담고 있다. 유독 자주 쓰는 단어나 표현, 혹은 어감이 있다면, 그 무의식적인 패턴 속에는 어떤 것이 숨어 있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늘 비워두는 말을 한다. 문장 끝을 “~인 것 같아요”로 표현하는 것은 다수의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뭔가 또렷한 주관은 없어 보이지만 내 말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여지를 열어둔다. 상대방의 말에 연신 “그쵸”하며 맞장구쳐주는 것은 단순한 동의를 넘어 ‘우리 같은 편이죠?’ 하고 유대감을 확인하는 신호이며, “좀~”이라는 부사는 딱딱한 명령이나 요구를 완곡하고 부드럽게 만든다. 말 중에 “가령”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많진 않은데 추상과 구체를 연결시키는 것에 능하고, 현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쓴다. 이런 무의식적 언어패턴을 쓰는 사람에게 대화란 정답을 제시하는 경쟁이 아니라, 긍정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된다. 반면, 어떤 사람은 말을 통해 질서를 세우고 상황을 정리하려 한다. 그의 세계에서 애매한 것은 참을 수 없고 명확한 결론이 중요하다. 자칫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규범화되어 타자의 생각을 자기식대로 판단하는 폭력성이 비어져 나오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간결하고 직선적인 명령형이나 평서형의 어미를 좋아한다. “원래” 혹은 “원칙은”이란 단어는 기존 규칙이나 관습을 따르는 보수적인 태도 같지만 실제 대화 속에서는 나의 주장은 절대 거스를 수 없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무조건”, “반드시” “당연히” 라는 부사는 단정적이고 확신에 차있어 명쾌해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가능성을 차단해 버린다. 내가 제일 불편해하는 경우는 이런 자기 확신을 넘어 타인을 가르치려드는 사람들인데 “내 경험상”을 입버릇처럼 하거나 “그게 뭔고 하면~” 하는 식으로 부탁하지도 않은 설명을 늘어놓는 자들이다. 이런 말투는 상황통제 욕구가 높고 타인의 방식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은 자기중심적인 경향의 사람들에게서 자주 보여진다. 혹시 당신도 습관처럼 누군가의 말을 끊고 “아니”로 시작하거나 “사실은”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상대방의 의견을 부정하고 대화를 자기 쪽으로 끌고 가려는 무의식의 발로 일 수 있으며 “완전”, “진짜”, “대박”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감정이 풍부해 보이지만, 때로는 모든 일을 조금씩 부풀려 말하는 습관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사소한 말투나 자주 쓰는 단어들은 나도 모르게 나의 성향과 무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람을 살리는 말도 있다. 막연한 칭찬이 아니라 상대가 애쓴 과정을 구체적으로 짚어주는 말. “왜 그랬어?”라고 다그치기보다,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궁금하네”라고 의도를 먼저 물어주는 존중의 말. 그리고 실패했을 때 함께 해결해보자고 다독이는 지지의 말. 이런 말들은 ‘나는 당신을 믿고 있다’는 마음을 전하고, 그 믿음 속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결국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무수한 말들은 각자의 세계가 충돌하고, 스며들고, 서로를 휘어 감는 과정의 기록이다. 사람들의 말버릇 속에는 의식하지 못한 각자의 삶과 세계가 숨어있다. 그리고 내가 오늘 뱉은 말 한마디는,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솔직한 거울인 것이다. 전민정 부안군문화재단 사무국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5.09.16 18:49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