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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메아리] 이리역 폭발 사고 48주기, 익산의 정체성을 묻다

오는 11월 11일은 이리역 (화약열차) 폭발 사고가 일어난 지 48년째가 되는 날이다. 벌써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셈이다. “콰광!” 천둥보다 더 큰 폭발 소리가 들렸다. 유리창이 산산조각으로 깨지며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안쪽에 있던 문짝도 날려 들어왔다. (김남중의 소설 <기찻길 옆 동네>에서) 익산은 기찻길과 인연이 깊은 도시다. 지금으로부터 113년 전,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곳에 기찻길이 놓이고 기차역이 생기면서 새 도시가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기찻길이 이곳을 지나지 않았다면, 또 역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도시도 없었을 것이다. 기찻길을 따라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고, 도시는 빠르게 번성했다. 기찻길이 번영만을 가져다준 건 아니다. 깊은 상처들도 남겼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950년 7월 11일, 미군 B-29 폭격기 두 대가 옛 이리역과 만경강 철교에 폭탄을 떨어뜨려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졌다. 긴 세월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이 사건은 무려 50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77년 일어난 ‘이리역 폭발 사고’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열차 화물칸에 실려있던 엄청난 양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바람에 59명이 죽고 1402명이 다쳤다. 지축을 뒤흔든 폭음과 함께 삽시간에 초토로 변한 이리시내는 온통 화약냄새로 가득 찼으며 12만 명의 이리시민은 한밤을 공포 속에 새웠다. 시가는 온통 깨어진 유리파편과 초연으로 뒤덮여 전장의 폐허를 방불케했다... 역 구내와 역대합실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었고 부서진 집 앞에서 가족을 잃고 추위 속에 밤새 통곡하는 유족들의 울부짖음이 처절하기만 했다. (<경향신문>, 1977.11.12.) 이 엄청난 폭발은 도시 풍경도 크게 바꿨다. 사고 이듬해에 기차역사는 처음 자리에서 남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새로 지어졌다. 지금 익산역 자리다. 역사에서 동쪽으로 곧게 뻗은 중앙로와 남북 방향으로 멀리까지 뻗어나간 익산대로도 이때 새로 난 길들이다. 익산대로 건너 중앙동엔 현대식 상가들이 들어서면서 오늘날의 모습에 가까워졌고, 역 서쪽 모현동엔 사고가 난 지 200일 만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무엇보다 역 바로 옆 판자촌이 폭발로 무너지면서 도시의 오랜 골칫거리였던 집창촌이 사라졌다. 고여있던 도시는 다시 출렁였다. 이렇듯 기찻길을 빼고 익산이라는 도시를 설명하긴 어렵다. 도시의 번영과 상처가 오롯이 기찻길 위에 새겨져 있으니까. 하지만 이 도시에서 이런 흔적을 찾아보긴 어렵다. (원)도심 한복판에 10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기차역이 있을 뿐 역을 조금만 벗어나면 이곳이 기찻길 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걸 느끼게 하는 그 무엇도 없다. 게다가 100년 가까이 사람들로 북적이며 한때 ‘호남의 명동’으로 불렸다던 역 앞 원도심은 언제부턴가 활기를 잃은 채 아무런 정체성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도시 브랜드’를 만들 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도시의 정체성을 제대로 아는 일이다. 좋든 싫든 익산은 기찻길 위에 세워진 도시고, 그걸 빼고 익산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순 없다. 이리역 폭발 사고 48주기를 맞아 도시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에 더해 이 도시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나아갈지를 함께 고민해보는 것도 뜻깊은 일일 것이다. 익산은 아직도 기찻길 위에 서 있다. 윤찬영 북카페 기찻길옆골목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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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4 17:59

[새벽메아리] 이재명 정부의 2026년 통합돌봄 '기대 반, 실망 반'

양병준 전북희망나눔재단 사무국장 오는 2026년 3월 27일,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돌봄통합지원법)’이 시행된다. 이는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추진해 온 지역사회 통합돌봄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진전이다. 돌봄이 단순한 복지서비스를 넘어 사회권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누구나 자신의 집과 지역에서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 시행을 앞둔 지금, 기대만큼의 실질적 준비가 이뤄지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재명 정부는 국정과제 78번 ‘지금 사는 곳에서 누리는 통합돌봄’을 내세우며 돌봄정책의 대전환을 예고했다. 이전 정부가 노인 중심의 돌봄에 머물렀다면, 새 정부는 장애인·퇴원환자·장기요양 재가급여자 등 돌봄 대상을 확대했고, 의료·주거·일상지원까지 포괄하는 서비스를 제시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새로운 정부의 의지라기보다 이미 사회적 합의와 법 제정의 결과라는 점에서 과연 실질적 실행력까지 담보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문제는 재정확보와 실행력이다.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2026년 전국 시행을 앞두고 정부가 편성한 예산은 777억 원이다. 정부는 서비스 확충에 529억 원, 지자체 전담공무원 인건비 (한시 지원) 164억 원, 통합지원 시스템 구축 등 기반조성에 31억 원을 투입한다. 대상 지자체도 전국 229개 지자체 중에서 재정자립도 하위 80% 183곳에 국한되며, 지원 규모 또한 1개 시·군당 4~10억 원 수준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대상자별 통합지원계획을 세우고 연결해야 하는 지자체 공무원 인건비 예산은 9급 1호봉 인건비를 반영한 2,400명뿐이다. 전국 3,551개의 읍면동이 있는데 전담 인력을 충분히 배치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결국 지역사회 통합돌봄은 지방정부의 ‘자체 책임사업’으로 전가될 가능성이 높다. 지방정부의 역할 강화는 분권 측면에서 바람직하지만, 재정과 권한이 뒷받침되지 않은 분권은 책임만 떠안는 구조에 불과하다. 돌봄정책이 지속가능하려면 지방재정 확충, 사무집행과 행정 재량 권한이 보장되는 등 제도적 개편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전북특별자치도와 14개 시군의 의지와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전북은 고령화 속도가 전국 평균보다 빠르고, 농산어촌 중심의 생활권 구조로 인해 돌봄 사각지대가 넓게 분포한다. 사회적 입원과 요양시설 의존도가 높고, 의료 접근성이 낮은 지역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전북은 이번 돌봄통합지원법 시행의 성과와 정도를 가늠할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전북은 ‘돌봄이 곧 지역경제’라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돌봄 일자리 창출, 돌봄서비스 제공 인력의 전문화 등 지역 사회의 참여 확대를 통해 돌봄을 새로운 지역 성장 동력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복지사업이 아니라, 고령 사회를 대비하는 지속 가능한 지역정책이자 전북특별자치도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미래 전략이다. 돌봄은 국민의 기본권이자 우리 사회가 인간다운 삶을 위해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그래서 공공 돌봄을 강화하고 ‘돌봄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기만 하다. 그래서 중앙정부의 계획에만 그치지 말고 지역의 현실을 반영한 전북형 통합돌봄의 정착을 위해 지역사회와 함께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돌봄국가로 나아가는 길, 그 출발점에 전북이 앞장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양병준 전북희망나눔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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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28 18:24

[새벽메아리]차(車)들을 위한 나라

좌우를 살핀다, 건널까 말까 우물쭈물한다. 지체하는 순간 7-8m 전방에서 차가 등장한다. 저 차만 보내고 건너자 다짐한다. 근데 낭패다. 앞 차량을 뒤따라 어중간한 간격으로 다른 차들이 이어진다. 적절한 타이밍을 놓친 보행자는 다시 한참을 눈치보며 안전한 타이밍을 기다린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의 풍경이다. 아주 가끔 인도 쪽 보행자의 존재를 눈치채고 속도를 줄여 멈추는 차가 있다. 이런 운전자는 서른 대 중에 한 대 정도 될까. 드디어 보행자는 확실한 사인을 받고 횡단보도를 건너게 되는데 이런 배려가 고마웠는지 운전자를 향해 목례를 하기도 한다. 차가 생활의 중심이고 과장해서 말하면 무법천지인 소도시에서는 익숙한 풍경이다. 22년 도로교통법이 개정되었지만 법이 일상의 습관을 개선해 내지 못하고 있다. 이전에는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통행하고 있을 때’만 차량이 정지하면 됐지만 현행법상 횡단보도에 진입하지 않고 ‘통행을 하려는 때’에도 차량은 멈춰야 한다. 즉 대부분의 횡단보도 앞에서 차는 일시정시를 하고, 보행자를 우선해야 한다. 결국 기다리는 사람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모든 차량은 법을 위반한 셈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의식하거나 지키려는 운전자는 얼마나 될까. 자동차 중심의 생활권에서 마주하는 또 하나의 비극은 바로 로드킬이다. 집과 직장을 오가는 그 짧은 거리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동물의 사체를 마주친다. 고라니, 고양이, 너구리, 개, 심어 까마귀와 뱀까지. 필자가 도로 위에서 발견한 동물들이다. 필자 역시 전조등에 의지해 시골길을 달리다 고양이를 칠 뻔한 아찔한 경험이 여러 번 있다. 대낮에 앞서가던 차가 고라니를 들이받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차에 부딪힌 고라니가 몇 초간 경련을 일으키다 도로 위에 고꾸라지던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즉사한 동물의 사체를 제때 처리하지 못하면, 이를 먹으려는 까마귀나 까치가 모여들고 차량들이 이를 피하느라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멧돼지처럼 덩치 큰 동물과의 충돌은 운전자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대형 사고가 되기도 한다. 연간 로드킬로 죽어가는 동물의 수가 9만이라고 하는데 비신고건수와 소형동물을 합치면 대략 20만에 이를 것이라는 전문가의 추산도 있다. 이는 웬만한 중소 도시의 인구수와 맞먹는 수의 생명이 매년 도로 위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로드킬은 고속도로보다 국도와 지방도에서, 특히 수도권 왕래가 잦은 강원과 충청권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동물의 번식기인 봄, 월동을 준비하는 가을에 사고가 집중되는데, 공교롭게도 인간의 여행철과 겹친다. 이를 줄이기 위한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태통로나 유도울타리 같은 물리적 시설은 비용 부담이 커서 전국의 도로에 적용하기 쉽지 않다. 야생동물 등장을 알리는 경보시스템이나 로드킬 다발구간 정보를 내비게이션과 연동하는 기술도 논의되고 있지만, 전면적인 도입은 더디기만 하다. 자동차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다. 이 속도 기계를 버릴 수 없다면, 인간과 동물의 안전을 고려한 강력하고 실효성 있는 조치들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차 중심성은 이미 뿌리 깊어 쉽게 벗어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전민정 부안군문화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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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21 18:41

[새벽메아리]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세계시민연대

가자지구 보건부는 지난 2년 동안 가자지구에서 죽은 사람이 9월 기준 6만 5000명이라고 했다. 사망자의 83%가 민간인이고 상당수가 아동이다. 이스라엘이 2년간 가자지구에 쏟아부은 포탄은 7만 톤 이상이고 건물의 80%가 파괴되었다. 생지옥이 따로 없다. 유례없는 민간인 학살에 세계 주요 도시에서 이스라엘 학살을 멈추라는 연대 집회가 이어졌다. 국제 사회의 소극적 대응과 침묵에 22살 스웨덴 출신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6월 1일 세계 시민 12명과 함께 구호품과 의약품을 싣고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7월에는 21명, 9월에는 세계 45개국에서 참여한 500여 명이 51척의 배(이하 구호 선단)를 타고 가자지구로 갔다. 이번에는 한국인 김아현(해초)도 배에 올랐고 가자지구로 가던 중 이스라엘군에 의해 나포되었다. 이스라엘 군에 구호 선단은 모두 나포되었지만 국제 사회 연대는 갈수록 커졌다. 이탈리아와 스웨덴은 이스라엘의 드론 공격으로부터 구호 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군함을 파견하는가 하면 이탈리아 등 유럽의 노동자들은 연대 총파업을 벌였다. 한국도 구호 선단 참여자인 김아현(해초)의 무사 귀환과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이스라엘은 국제 사회에서 더욱 고립되어 갔다. 그레타 툰베리는 인터뷰에서 구호 선단 말고 팔레스타인을 봐달라며 세계 양심에 호소했고 드론 공격을 받을 때조차 "중요한 것은 우리가 드론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인들이 매일 24시간 드론 공격을 겪고 있다는 점"이라며 국제 사회에 관심을 촉구했다. 인류 역사상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처럼 대규모로 전쟁 지역에 민간인이 구호품과 의약품을 싣고 가는 행동을 한 일이 있었던가? 구호 선단의 목적은 오직 학살을 멈추기 위한 직접 행동이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고 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했다. 이스라엘 인류학자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사피엔스에서 허구와 실체를 구분 짓는 요소를 고통이라 했다.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처럼 고통 속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 유대인은 어느 민족보다도 역사적 고통을 가장 크게 느껴온 민족이다. 이스라엘이 누구보다 학살의 고통을 아는 민족이라면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을 진심으로 참회해야 할 것이다. 구호 선단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세계 시민들을 연결했고 그 힘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한옥 마을을 찾는 세계인들이 이스라엘의 학살을 규탄하는 시민단체의 행동에 엄지척으로 연대한다는 소식을 들으며 전주에서도 글로벌 네트워크를 실감한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10월 8일 1단계 휴전에 합의했다. 이번 합의를 트럼프가 자신의 치적처럼 말하지만,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가자지구 휴전 결의안에 6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한 나라다. 지난 9월 18일에도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가자지구 휴전 결의안을 표결했으나 안보리 이사국 15개국 중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가자지구의 영구적 평화를 위해서는 국제 사회의 팔레스타인에 관한 관심과 연대가 중요함을 구호 선단을 통해 확인했다. 갈수록 커지는 구호 선단과 국제 사회의 연대가 없었다면 네타냐후는 학살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하마스의 무모한 테러와 이스라엘의 극악무도한 학살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전 세계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연대가 필요하다. 세계 시민이 함께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생지옥은 가자지구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유기만 새만금상시해수유통운동본부 사무국장·전주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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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14 19:12

[새벽메아리] ‘문학의 도시’를 도둑맞은 익산

“전쟁이 나고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여기 익산에 와서 머물렀다. 한강 이남에서 그렇게 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머물렀던 곳은 익산 말고는 없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만큼 익산은 문학의 전통이 굉장히 강했고, 익산하면 그냥 문학의 도시다.” 지난해 6월 오랜만에 익산을 찾은 박범신 작가는 익산이 ‘문학의 도시’였다는 걸 몇 번이고 되뇌었다. 알다시피 그는 익산 남성고등학교를 거쳐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 그는 남성고 문학반 시절, 겨울이면 익산의 모든 학교 문학반 학생들이 ‘문학의 밤’이란 이름으로 옛 광명예식장에 모여 서로의 시를 나누었던 기억도 꺼내놓았다. 그날만 되면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맨 앞자리에 쭉 앉아서 지켜보았다”다면서 “매우 문학적인 도시에서 성장했다”는 걸 그는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의 대학 선배인 윤흥길 작가는 여섯 살 때부터 익산에서 살았다. 지난해 대하소설 <문신>을 완간한 뒤 익산을 찾은 그는 누가 고향을 물으면 늘 익산이라고 답한다고 했다. 아홉 살 무렵이던 1950년, ‘미군의 이리역 오폭 사고’가 일어난 날 그는 친구와 쑥대밭이 된 역에 몰래 숨어 들어가 철근 끝에 매달린 시체를 보았다면서, 그날 본 광경이 ‘문학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예순을 앞두고는 그동안 미처 쓰지 못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써보기로 마음먹었고, 그렇게 나온 작품이 <소라단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의 작품 곳곳엔 옛 신광교회 종탑을 비롯한 이 도시의 빛바랜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두 작가보다 한참 밑으로 안도현 작가가 있다. 고향인 경북 예천을 떠나 스무 살이던 1980년 어느 밤,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옛 이리역에 내렸다던 그는 "익산에 온 것 자체가 내 시를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이른바 김춘수적인 시 쓰기를 배웠다. 언어를 갈고 닦는 것, 절제...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그런데 익산에 오니 알게 모르게 판소리 가락 같은 분위기들이 스며있는 게 딱 보이더라. 그래서 그걸 배우려고 노력하고 많이 훔쳤다.” 그는 대학 4학년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란 시로 당선됐는데, 이 도시에 살지 않았다면 결코 쓸 수 없는 시였다. 한때 원광대 국어국문학과를 나온 작가들이 한국 문단을 주름잡았던 시절이 있다. 오죽하면 ‘원광 문학 사단’이란 말까지 나왔겠는가. ‘문학’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익산의 자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젠 모두 옛말이 돼버렸다. ‘문학과 책의 시대’가 저물어서일까. 이웃 도시 군산에서 2년째 열리는 ‘북페어’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또 전주가 연화정도서관, 다가여행자도서관 등에 이어 최근 아중호수도서관을 열어 ‘책과 도서관의 도시’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언제 적 박범신이고, 언제 적 안도현이냐는 말도 더러 듣곤 하지만 나는 이제껏 언제 적 톨스토이고, 언제 적 헤밍웨이냐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문제는 책과 문학, 또는 작가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다. 충남엔 ‘강경산 소금문학관’이 있고, 윤흥길 작가가 머물러 온 완주에도 최근 문학관을 지으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 도시에도 ‘이리 문학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만 되면 익산에서 책방을 하는 나는 무언가를 도둑맞은 기분에 왠지 더 쓸쓸해지곤 한다. 윤찬영 북카페 기찻길옆골목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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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30 19:12

[새벽메아리] ‘죽음을 막는 사회’를 넘어, ‘삶을 함께하는 사회’로

정부가 최근 발표한 ‘2025 국가자살예방전략’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현실을 드러낸다. 인구 10만 명당 28.3명이라는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최상위 수준이며, 이는 단순한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 사회적 재난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정부는 10년 안에 자살률을 17.0명까지 줄이고, 5년 내 자살 사망자를 1만 명 이하로 낮추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 고위험군 집중 대응, 자살예방관 지정, AI 기반 모니터링 강화 등 다각적인 대응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정책의 효과는 숫자로만 평가될 수 없는 개인의 아픔이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래 전 영화 ‘레인 오버 미’는 주인공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뒤 깊은 상실감과 고립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고 고통을 피하려 하지만, 결국 새로운 우정과 관계를 통해 조금씩 삶을 회복해 간다. 영화는 상실과 슬픔이 개인을 무너뜨릴 수 있지만, 동시에 관계와 연대가 치유의 시작이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 사회가 자살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자살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고립과 구조적 압박 속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국회입법조사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8년간 동반자살 건수만 1,500여 건을 넘어섰으며, 이 중 상당수가 가족이나 연인과 얽힌 문제였다. 심지어 400여 건은 ‘살해 후 자살’이라는 극단적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자살이 단순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타인의 삶까지 위협하는 사회적 위험요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정책은 ‘개인 치료’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 사회적 안전망 전체를 아우르는 다층적 접근이 필요하다. ‘레인 오버 미’의 주인공이 새로운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서서히 살아갈 힘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 사회 역시 개인을 고립시키는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 취업난, 부채, 관계 갈등, 정신적 질환 같은 위기 요인은 개인의 의지로만 극복할 수 없다. 국가가 제시한 자살예방전략이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제도적 지원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안에서 서로 돌보고 지지하는 연대의 문화가 뿌리내려야 한다. 정신적 고통은 누구나 겪을 수 있으며, 상실과 절망은 특정 집단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자살 문제는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산물이다. 따라서 해답도 공동체 안에서 찾아야 한다. 정책은 더 촘촘한 안전망과 온국민 돌봄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일이다. 안부를 묻는 한 통의 전화, 함께 걷는 짧은 산책, 소소한 모임이나 대화가 생명을 이어주는 힘이 될 수 있다. 자살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선택이 아니다. 2024년 보건복지부 분석에 따르면 자살 사망자들은 평균 4.3개 이상의 복합적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정신적 고통, 가족 문제, 경제적 어려움 등이 겹쳐 쌓이다가 결국 무너진다. 그래서 무너지는 그 순간 전에, 누군가의 곁을 지켜주고, 함께 짐을 나눌 수 있는 토대가 매우 중요하다. 이제 과제는 분명하다. “죽음을 막는 사회”를 넘어서 “삶을 함께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고통 속에 홀로 남겨진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것,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따뜻하고 건강한 공동체로 변화될 수 있다. 양병준 전북희망나눔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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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23 18:26

[새벽메아리] 당신의 말버릇, 그 안에 숨은 것

사람은 말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우리가 하루에 쏟아내는 수많은 단어들은 그냥 흩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과 성격을 담고 있다. 유독 자주 쓰는 단어나 표현, 혹은 어감이 있다면, 그 무의식적인 패턴 속에는 어떤 것이 숨어 있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늘 비워두는 말을 한다. 문장 끝을 “~인 것 같아요”로 표현하는 것은 다수의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뭔가 또렷한 주관은 없어 보이지만 내 말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여지를 열어둔다. 상대방의 말에 연신 “그쵸”하며 맞장구쳐주는 것은 단순한 동의를 넘어 ‘우리 같은 편이죠?’ 하고 유대감을 확인하는 신호이며, “좀~”이라는 부사는 딱딱한 명령이나 요구를 완곡하고 부드럽게 만든다. 말 중에 “가령”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많진 않은데 추상과 구체를 연결시키는 것에 능하고, 현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쓴다. 이런 무의식적 언어패턴을 쓰는 사람에게 대화란 정답을 제시하는 경쟁이 아니라, 긍정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된다. 반면, 어떤 사람은 말을 통해 질서를 세우고 상황을 정리하려 한다. 그의 세계에서 애매한 것은 참을 수 없고 명확한 결론이 중요하다. 자칫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규범화되어 타자의 생각을 자기식대로 판단하는 폭력성이 비어져 나오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간결하고 직선적인 명령형이나 평서형의 어미를 좋아한다. “원래” 혹은 “원칙은”이란 단어는 기존 규칙이나 관습을 따르는 보수적인 태도 같지만 실제 대화 속에서는 나의 주장은 절대 거스를 수 없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무조건”, “반드시” “당연히” 라는 부사는 단정적이고 확신에 차있어 명쾌해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가능성을 차단해 버린다. 내가 제일 불편해하는 경우는 이런 자기 확신을 넘어 타인을 가르치려드는 사람들인데 “내 경험상”을 입버릇처럼 하거나 “그게 뭔고 하면~” 하는 식으로 부탁하지도 않은 설명을 늘어놓는 자들이다. 이런 말투는 상황통제 욕구가 높고 타인의 방식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은 자기중심적인 경향의 사람들에게서 자주 보여진다. 혹시 당신도 습관처럼 누군가의 말을 끊고 “아니”로 시작하거나 “사실은”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상대방의 의견을 부정하고 대화를 자기 쪽으로 끌고 가려는 무의식의 발로 일 수 있으며 “완전”, “진짜”, “대박”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감정이 풍부해 보이지만, 때로는 모든 일을 조금씩 부풀려 말하는 습관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사소한 말투나 자주 쓰는 단어들은 나도 모르게 나의 성향과 무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람을 살리는 말도 있다. 막연한 칭찬이 아니라 상대가 애쓴 과정을 구체적으로 짚어주는 말. “왜 그랬어?”라고 다그치기보다,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궁금하네”라고 의도를 먼저 물어주는 존중의 말. 그리고 실패했을 때 함께 해결해보자고 다독이는 지지의 말. 이런 말들은 ‘나는 당신을 믿고 있다’는 마음을 전하고, 그 믿음 속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결국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무수한 말들은 각자의 세계가 충돌하고, 스며들고, 서로를 휘어 감는 과정의 기록이다. 사람들의 말버릇 속에는 의식하지 못한 각자의 삶과 세계가 숨어있다. 그리고 내가 오늘 뱉은 말 한마디는,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솔직한 거울인 것이다. 전민정 부안군문화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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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16 18:49

[새벽메아리] 결정 앞둔 신공항과 김민석 총리의 정치적 압박

9월 3일 전북을 방문한 김민석 국무총리는 새만금개발청을 찾아 새만금 신공항 적기 착공을 강조했다. 주요 언론이 적극 보도했다. 전북지방환경청이 새만금 신공항 환경영향평가에 대한 동의와 부동의를 결정하는 시점이고, 9월 11일 서울행정법원의 새만금 신공항 취소 소송을 앞두고서 벌어진 일이다. 한국은 전문가의 과학적 합리성은 무시되고 검증되지 않은 포플리즘적 성격의 개발이 난무하는 사회가 되었다.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정책이 수립되고 지식인은 포플리즘적 개발에 면죄부를 주는 들러리로 전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적어도 새만금 위원회와 국정을 총괄하는 국무총리라면 정치 선동적 발언을 삼가야 했다. 오히려 기후 위기 시대에 새만금 사업에 대한 전문가들과 각계각층의 합리적 조언을 청취해야 할 때이다. 2024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도시개혁센터에서 도시 전문가 108명에게 전국 550개 도시개발과 공공사업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최악의 사업 1위가 새만금 잼버리 사업이었고 가덕도, 무안, 청주 등 지역 공항 사업이 합하면 압도적으로 1위였다. 이처럼 전문가들도 반대하고 적자가 뻔한 지역 공항 사업들이 국가균형발전이라는 명목으로 강행되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새만금 신공항은 정부의 공식 예비타당성조사 결과 경제성이 미달했지만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에 포함되면서 예비타당성조사가 면제되어 추진되고 있다. 2019년 국토교통부에서 실시한 새만금 신공항의 경제성 편익 분석(B/C)은 0.479였다. 사업비 1,000억 원을 투입하면 돌아오는 편익은 479억 원으로 경제성이 없다는 것이다. 새만금 신공항 예정지인 수라 갯벌은 군산공항 바로 옆에 있고 활주로가 두 개인 군산공항은 23년 27억 원, 24년 58억 원 적자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적자가 불 보듯 뻔한 활주로 하나를 더 만드는 것이 과연 국가균형발전인가? 국토부 전략환경영향평가서에 따르면 새만금 신공항은 무안 공항보다 조류 충돌 위험이 650배 높다. 또한 신공항 예정지인 수라 갯벌은 멸종위기 동식물이 64종 이상이 서식하고 있으며 국제적으로 보호 가치가 높은 도요새, 물떼새 이동 경로다. 새만금은 담수호 수질 관리도 실패해 영구적으로 담수호를 포기한 상황이어서 수질 정화 능력이 뛰어난 갯벌은 보존 가치뿐 아니라 새만금 사업 성공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이 되었다. 새만금 신공항에 여러 가지 미사여구를 아무리 가져다 붙여도 사실 활주로 두 개짜리 군산공항 옆에 활주로 하나 더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심지어 미군기지 바로 옆에 있으며 관제권이 미군에게 있어 미군기지 확장에 불과하다는 주장까지 있다. 새만금 신공항 예정지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면 그 주장은 더욱 설득력 있다. 새만금 사업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던 2001년 고 노무현 대통령이 해수부 장관이던 시절 새만금에 대해 "우리가 야당 때부터 공약으로 정했던 사업이고 나도 지지했던 사업이다. 지금에 와서 되돌리는 것은 자존심이 상할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밀고 나가는 것은 옳지 않다. 되돌려야 할 것이라면 되돌리는 것이 바로 용기다.”라고 말했다. 이후 전북지역 언론을 비롯한 정치권의 강력한 항의로 그 용기는 침묵과 동조로 바뀌었다.ㅇ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만금 신공항 추진을 위한 압력과 선동의 무모함이 아니라 되돌려야 한다면 되돌릴 수 있는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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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9 19:04

[새벽메아리] ‘전북 청년마을’이 성공하려면

행정안전부는 올해로 8년째, 서울 밖에 청년이 머물고 싶은 마을, 이른바 '청년마을'을 만드는 사업을 해왔다. “지역 살아보기, 일거리 실험 및 청년 활동공간 구축 등을 청년들이 직접 기획 및 운영하여 지역에 청년들이 모이는 마을”을 조성하겠다는 게 행안부가 내건 목표다. 지난 8년 사이 전국에 50개가 넘는 청년마을이 만들어졌거나 만들어지고 있다.전북에선 2021년 완주 ‘다음타운’을 시작으로 군산 ‘술 익는 마을’, 익산 ‘지구장이마을’ 등이 잇따라 청년마을로 뽑혀 지금까지 잘 운영되고 있다. 올해는 무주 ‘파머스FNS’와 장수 ‘락앤런’ 두 곳이 새롭게 뽑혔다. 이 두 마을은 앞으로 3년간 그 지역만의 고유한 자원을 활용해 청년들이 머물고 싶은 마을을 만들어 가게 된다. 알다시피 우리나라가 심각한 저출생을 겪고 있는 건 서울로 인구, 특히 청년세대가 몰리기 때문이다. 2021년 감사원은 10년 넘게 이어진 정부의 저출생·고령화 대책과 인구 구조 변화 대응 실태를 감사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저출산(생) 문제는 청년층의 사회적 이동, 수도권 집중 현상과 관련이 있”다고 꼬집었다. 그런 점에서 인구가 줄어 활기를 잃어가는 곳에 ‘청년마을’을 만들겠다는 건 의미 있는 시도다. 2022년부터는 전북도도 팔을 걷어붙였다. 이른바 ‘전북 청년마을’을 조성하겠다며, 해마다 5-10개 마을을 뽑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을들이 벌써 25곳으로,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청년들의 패기와 새로운 발상, 지역민들의 따뜻한 관심 그리고 도와 시ㆍ군 공무원들의 헌신으로 어렵사리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전북 청년마을을 거쳐 이듬해 행안부 청년마을에도 뽑힌 ‘지구장이마을’은 지난해 익산역 앞 원도심 골목에서 로컬 기업인 삼양식품과 함께 ‘청년 불닭 축제’를 벌였다. 이달 중순엔 ‘라면 전문점’을 열어 익산역을 찾는 여행객들을 골목으로 불러들일 계획이다. 지난해 전북 청년마을에 뽑힌 ‘오후협동조합’은 김제 쌀로 만든 빵ㆍ음료를 파는 카페, 다양한 와인을 파는 바틀숍 그리고 프랑스 자수 공방이 힘을 합친 팀이다. 이들은 오래된 이발소와 중국음식점뿐이던 시골길 죽산삼거리를 주말이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바꿔냈고, 이 경험을 살려 또 다른 청년들이 이곳에 터를 잡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또 올해 뽑힌 정읍 ‘샘샘’은 버려진 농협 창고를 비롯한 마을의 공간과 자원을 엮어 이 지역만의 매력을 만들어 가고 있는데,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최근엔 문을 닫으려던 주유소가 마음을 고쳐먹는 일도 생겼다. 내년이면 5년째를 맞는 ‘전북 청년마을’이 앞으로 한 발을 더 내딛으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먼저, ‘좋은 공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일을 벌이고 사람들을 불러들이려면 이른바 랜드마크가 될 만큼 널찍하고 세련되고 또 이야기가 담긴 매력적인 공간이 절실하다. 다음으로, ‘좋은 어른’이 필요하다. 청년들의 패기와 발상에 중년의 다양한 경험과 자본이 더해진다면 실패 위험을 줄이면서 의미 있는 변화를 더 빠르게 만들어 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좋은 관계’가 필요하다. 청년과 지역 주민, 청년과 행정은 서로 믿어주고 응원해주고 또 기다려주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좋은 공간과 어른 그리고 관계로 전북 곳곳에 청년들이 머물고 싶고 살기 좋은 마을들이 더 단단히 뿌리 내릴 수 있길 기대한다. 윤찬영 북카페 기찻길옆골목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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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2 18:49

[새벽메아리] 돌봄과 연대,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가?

얼마 전에 어린 두 아이들과 함께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 『와일드 로봇(The Wild Robot)』은 자연과 로봇, 그리고 인간의 관계를 그려내고 있다. 인간의 최첨단 AI기술로 만들어진 로봇 ‘로즈’가 외딴섬 무인도에 불시착하면서 시작되는 대자연 속에서의 모험이다. 인간을 위해 프로그래밍 되어진 로봇이 거친 야생 속에서 동물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어느 날, 로즈는 사고로 홀로 남겨진 아기 거위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돌봄’이라는 개념을 체득한다. 명령도 없고 보상도 없는 행위, 그저 누군가를 위해 기다려주고, 지켜보며, 손을 내미는 일이다. 그런 로즈의 변화는 ‘인간성’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웠던 로봇, 생존보다 공존을 택한 로봇이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지금 서로를 얼마나 돌보고 있을까? 현대 사회는 ‘함께’보다 ‘혼자’가 자연스러운 시대다. 이웃은 얼굴을 몰라도 불편하지 않다. ‘관계’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지역사회의 공동체는 기억과 경험, 그리고 관계의 집합이다. 우리가 마을을 고향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곳에 나를 기억해주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삶터는 여전히 ‘공동체’인가?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로즈가 동물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서로 다름’을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동물들은 처음에 로봇을 경계했지만, 로즈가 먼저 동물들에게 다가갔고, 반복되는 기다림 속에 신뢰가 점차 쌓여갔다. 지역사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르지만 함께 산다. 생각, 세대, 문화, 환경이 다른 이들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돌봄을 책임이라고 여기는가? 부담이라고 여기는가? 『와일드 로봇』에서 로즈는 새끼 거위를 키우는 과정에서 단순히 보호자가 아니라, 진정한 관계의 주체가 된다. 그 과정은 쉽지 않다. 자기 시간을 포기하고, 불편을 감수하며, 위험을 감당해야 했다. 이는 마치 지역사회에서 서로를 돌보는 일이 그렇듯이, 선택이 아닌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돌봄은 가정 안의 문제로, 혹은 행정과 복지기관의 책임으로 떠넘겨진다. 고립된 노인, 홀로 남겨진 아이들, 타지에서 이주해 온 주민들이 그렇다. 우리는 정말로 ‘함께 살고자 하는가’? 결국 공동체 회복은 제도나 정책 이전에 질문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정말 이곳에서 함께 살고 싶은가?”라는 물음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언가를 더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누어야 한다. 관심, 시간, 말, 표정 등 아주 작은 것들이 모여 관계가 되고, 관계는 곧 공동체의 뿌리가 된다. 『와일드 로봇』은 결코 거창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 가장 단단하고 오래가는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돌봄은 효율적이지 않지만, 인간적이고 지속 가능하다. 연대는 느리고 복잡하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기술과 속도의 시대 속에서 우리는 이 단순한 진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역사회는 다시 관계를 중심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를 중심으로 하는 제도도 너무 중요하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나는 이 마을에서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이 물음에 진심으로 대답할 수 있다면, 이미 공동체 회복은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양병준 전북희망나눔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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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26 18:47

[새벽메아리] 식물과의 교감, 그 감응의 세계

대도시를 떠나 인구 5만의 소도시로 이주하게 된 결정적 동기는 ‘풀 한포기’ 때문이었다. 지리산 자락 하동에서 열린 야생차문화제에 갔다가 나무를 타고 오르는 ‘마삭줄’을 만났다. 그때 만해도 소유욕이 강했는지 은은한 매력을 발산하는 마삭줄의 일부를 가위로 잘라 유리병에 담아왔다. 일주일 정도 지나자 지리산을 기념하는 나의 채집물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잘라온 줄기의 끝부분 어딘가에서 뿌리가 난 것이었다. 당분간의 싱그러움을 맛보고자 물에 꽂아둔 것일 뿐 녀석에게 지속적인 생명을 보장할 마음은 없었다. 식물에게서 뿌리가 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처음으로 ‘목격’하였고, 이 사건으로 나는 식물에 빠져들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식물의 재생 능력’에 꽂힌 나는 꽃집에서 식물을 사다 모으기 시작했다. 이제 막 식물계에 입문한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허브류였다. 페파민트, 애플민트, 로즈마리, 라벤더 같은 허브들은 키우기도 쉽고 증식도 뛰어났다. 1대 어머니의 몸에서 잘라 낸 허브 가지들은 2대, 3대, 4대로 무수하게 번식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나는 식물의 ‘생장점’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식물에 따라 다양한 뿌리 모양들이 있으며 마치 뿌리는 인간의 ‘치열’처럼 하얗게 빛나며, 물속의 영양분을 씹어삼키는 소화기관임을 직관했다. 집은 점점 더 다양한 식물들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몬스테라, 알로카시아, 스킨답서스, 후마타고사리, 틸란드시아 등 이름도 낯선 외래종이었다. 이들의 시각적 아름다움은 식물의 재생능력에 슬슬 질리던 시기에 발견되었다. 이들은 아름다웠다. ‘녹색’이라는 한단어로 묶을 수 없는 미세한 색감들과 종에 따라 필요한 물의 양과 빈도, 꽃피는 시기 등등 개체의 다양성을 체감하였다. 이 시기에는 잎 상태만 보아도 식물이 뭘 요구하는지 느낄 정도였다. 다종다양한 이들의 요청에 맞추다보니 나는 속칭 ‘식물집사’가 되어 있었다. 물을 줘야하기에 긴 여행을 떠나지 못했고 성장 속도에 맞춰 화분을 갈아주다보니 쏠쏠하게 돈이 들었다. 햇볕이 들어오는 양지바른 자리는 식물이 먼저였고 먹는 것, 자는 것 등은 부차적이었다. 결국 이런 식물의 세계를 좀더 광활하고 찬란하게 살펴볼 환경이면 좋겠다는 열망이 귀촌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귀촌 후 나의 ‘인테리어적인’ 식물 지식은 농부들, 생태주의자들과의 교류 속에서 확대되었다. 봄철 들에 피어난 웬만한 것들은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머위, 쑥부쟁이, 원추리, 참나물, 곰보배추, 꽃마리, 개망초, 질경이 그리고 쑥. 이들이 매년 같은 자리에서 올라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나물 지도를 만들고 싶었다. 2월 말 매화에서부터 시작해서 벚꽃, 살구꽃, 앵두꽃, 등나무꽃, 자두꽃, 배꽃 등 이들의 개화로 일년살이가 가능하니 아름다운 꽃달력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9월경 추수를 앞두고 벼꽃은 얼마나 달큰한지, ‘벼꽃향’을 닮은 향수를 만든다면 대박이겠구나 했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욕망은 잠깐잠깐 떠오르긴 했으나 현실화되지 않았고 식물은 다음 세계로 나를 인도하였다. 이제는 화분을 키우지도 들이지도 않는다. 어쩌면 내가 식물을 돌본 것이 아니라 식물이 나를 돌보는 ‘감응의 세계’에 머물렀던 것 같다. 식물로부터 배운 것도 많지만 이제는 떠나보낼 때이다. 그래야 더 큰 자연과의 감응이 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전민정 부안군문화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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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19 19:24

[새벽메아리] 사람입니다. 이주노동자도 사람입니다

최근 전남 나주의 벽돌 공장 이주노동자 인권 침해 사건은 이주노동자의 노동인권에 대해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독일로 간 터키 이주노동자 가족 이야기를 담은 영화 “나의 가족, 나의 도시”는 “우린 노동자를 불렀는데 사람들이 왔다”라는 자막으로 끝난다. 이 말은 극작가 막스 프리슈가 한 말로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고용허가제는 내국인 고용이 어려운 중소기업에 외국인 고용을 허가하는 제도로 한국 사회의 필요 때문에 생긴 제도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내국인이 꺼리는 일을 이주노동자에게 더 싼 임금으로 시키고, 이주노동자는 체류하는 기간에 똑같이 세금을 내는데도 각종 사회복지 제도 등에서 제외하는 등 차별을 하면서 이를 너무 당연시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특정 국가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마저 심각해지고 있다. 1960년대 독일로 간 한국 광부와 간호사들은 힘든 일을 했지만,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었고 사회복지 혜택에 차별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 간호사들이 1973년 경제 불황으로 집단 해고되었을 때 외친 구호가 “독일이 필요로 해 이곳에 온 우리는 필요 없다고 버리는 상품이 아니다”였다. 이들은 출국을 거부했고 독일 시민들의 연대로 무기한 노동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2025년 상반기 전북에 배정된 계절 이주노동자는 9289명이다. 계절 이주노동자뿐 아니라 결혼이민, 비전문인력, 전문인력 등 여러 가지 비자로 축산 농장과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를 포함하면 농업과 제조업은 이주노동자 없이는 운영이 안 된다. 전북에는 23년 기준 약 7만 4000 명의 이주민이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1970년대 독일에 간 한국 간호사들과 달리 목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다.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노동조합 가입도 힘들고, 인권을 보호할 제도적 장치도 미흡하기 때문이다. 고용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를 시혜와 동정의 눈으로 보지 않고, 차별 없이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며 이를 법과 제도로 보장해야 하는 것은 최소한의 인권이다. 2025년 1월 전주에 온 25세 방글라데시 청년 노동자(이하 C 씨)는 일 한 지 한 달 만에 야근하다가 60kg의 철판에 손가락을 다쳤다. C는 ‘괜찮겠지’ 하고 퇴근했는데 검지 손톱 끝 뼈가 골절되었다. 다음날 사장에게 말했지만, 사장은 C 씨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장은 C 씨가 다른 곳에서 다치고서 일하다 다쳤다고 거짓말을 한다고 했고, 심지어 사업장을 옮기려고 자해했을 것이라고 했다. C 씨는 병원비가 없어 돈을 빌려서 병원비를 내야 했고 사장은 다친 C 씨에게 6개월 휴직을 강요했다. 전주에 와서 100일도 되지 않은 기간에 C 씨가 겪은 일들이다. C 씨는 현장 조사를 거부하는 사장의 방해로 산재 승인이 지연되다가 8월 1일 승인되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일하다 다쳤다는 이주노동자 상담을 받고 찾아간 회사 사업주는 이주노동자 없이는 경영이 어려운데 여전히 많은 기업주가 고마운 줄 모른다면서 다친 이주노동자의 치료와 보상에 적극적이었다. 이런 선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법률과 제도로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정부는 인권 침해가 계속 발생하는 원인 중 가장 큰 것이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전 제도라고 보고 제도 개선을 하겠다고 하고 인권 보호를 위한 원스톱 상담을 하겠다고 했다. 반가운 소식이다. 전북특자도도 이주민 유치에 들인 노력만큼 이주민 인권 보장을 위한 나서 주 길 바란다. 유기만 전주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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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12 18:36

[새벽메아리] 지방엔 돈도 없고 가오도 없나

엊그제 이재명 대통령이 서울ㆍ수도권보다 지방에 더 많은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다시금 밝혔다.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전국 시ㆍ도지사 간담회 자리였다. 이 대통령은 “수도권보다 지방에 더 인센티브를 지급하면 더 많은 지원의 효율성, 균형을 조금이라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이번 정책으로 나름 실현해봤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이번 정책은 알다시피 ‘민생회복 소비쿠폰’이다. 비수도권 주민에겐 3만 원을, 농어촌 인구감소지역 주민에겐 5만 원을 더 주기로 했다. 앞으로 국가 정책이나 예산 배분에서 이런 원칙을 강화해나가겠다는 뜻도 밝혔다. 불리한 이들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주는 이른바 ‘어퍼머티브 액션’(적극적 우대조치)이다. 서울ㆍ수도권보다 여러모로 불리한 여건에 놓인 우리들에겐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쓸 돈이 많아지는 만큼 앞으로 그 돈을 어떻게 잘 쓸 것인지도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더불어 지금까지 어떻게 써왔는지도. 가령, 2022년 문재인 정부는 앞으로 10년 동안 해마다 1조 원에 달하는 ‘지방소멸대응기금’을 마련해 지방자치단체에 나눠주겠다고 했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정부 기금을 나눠주겠다던 전에 없던 이 대담한 사업이 어느덧 올해로 4년째를 맞았다. 여러 평가들이 있지만, ‘또 건물 짓는 데만 쓴다’거나, ‘어디에 써야 할지 몰라 쌓여만 간다’거나, ‘문화ㆍ관광 분야에만 쓰다 보니 주민에게 돌아가는 몫이 적다’는 등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지방 재량으로 써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 ‘공모사업’으로 변질돼 버렸다’는 나라살림연구소의 지적이다. 지역의 제법 규모 있는 공모사업들은 대개 서울의 덩치 큰 업체들 차지가 된 지 벌써 오래다. 지자체 담당자들이 보기에 몸집에서 밀리는 지역 업체들은 아무래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서울 업체가 지역 업체나 사람들을 끼고 같이 들어오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은 들러리만 서다 끝나고 만다. 그나마 지역에 도움이 되는 결과로만 이어진다면야 굳이 시비 걸 일도 아니지만, 지역도 모르고 딱히 애정도 있을 리 없는 서울 업체들이 짧은 시간 지역을 깊이 이해하고 지역에 어울리는 해법을 내올 순 없다. 최근 전주시와 군산시가 이름 짜한 서울의 ㄱ업체와 ㄷ업체에 잇따라 뒤통수를 맞아 논란이 일지 않았던가. 정말 그런 정도의 일을 할 만한 지역의 기획자와 업체들이 없었을까. 공들여 찾아보기나 했는지 궁금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다시피 한 지방 중소도시와 농산어촌에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으려면 물론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오랜 시간 애정을 가지고 그 일에 매달릴 의지와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다. 당장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서울만 쳐다봐서야 지역에 정말 필요한 지역 일꾼은 절대 길러질 수 없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은 퇴임 뒤인 지난 5월, 후원자인 김장하 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지금 이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지역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문제조차도 서울 사람들이 논의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우리 지역을 살리는 일을 서울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도 우스꽝스럽긴 마찬가지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 큰소리치던 누군가의 패기가 아쉽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돈보다 가오다. 우리 스스로 우리 길을 헤쳐갈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윤찬영 북카페 기찻길옆골목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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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05 16:23

[새벽메아리] 돌봄통합지원법 시행 앞두고, 전북 14개 시·군의 준비가 매우 중요하다

2026년 3월 27일, ‘돌봄통합지원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해당 법은 국가와 지방정부가 ‘노쇠, 장애, 질병, 사고’ 등으로 일상생활 수행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살던 곳에서 계속하여 건강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의료. 요양 등 다양한 돌봄 서비스를 국민의 생애주기와 욕구에 맞게 통합적으로 제공하도록 하는 법적 기반이다.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돌봄의 공적 책임과 역할을 제도적으로 구현하려는 첫 걸음이라 할 수 있다. 전북특별자치도는 그 어느 지역보다 이 법의 효과적인 시행이 절실하다. 고령화 속도가 전국 평균보다 빠르고, 농산어촌 중심의 지리적 특성상 사회적 돌봄의 사각지대가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북특별자치도와 14개 시군은 이제 본격적인 대응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법 시행 시점까지 불과 1년도 채 남지 않은 지금, 준비한 만큼 전북형 통합돌봄의 성과나 효과가 나타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4개 시군, 즉 기초지자체의 실질적 역할이다. 법 시행 이전까지 각 지자체는 실태조사를 통한 대상자 발굴 및 지원체계 구축, 재원마련, 조례제정 등 ‘돌봄통합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할 ‘돌봄전담기구’와 ‘전달체계’를 구성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조직 개편을 넘어, 돌봄정책을 총괄할 ‘통합돌봄과’의 신설은 필수적이다. 복지와 의료 등으로 분산된 기능을 통합해 컨트롤타워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 단순한 행정적 구조 개편이 아닌, 시민 삶의 질을 높이는 실질적 플랫폼으로서 기능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이 ‘민-관 협력 구조’다. 통합돌봄은 공공만의 사업이 될 수 없다. 지역사회에서 오랜 시간 돌봄의 공백을 함께해 온 민간 단체, 사회복지기관, 주민조직 등 과의 파트너십 구축이 핵심이다. 계획 수립 초기 단계부터 민간과 함께하며, 실질적 의견 반영과 실행력 있는 공동운영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공공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공적 사회보장 전달체계로서 역할을 확립하고 민간은 보다 많은 자율성을 부여받아 제도적 한계를 보완하고, 기초 지자체와 더불어 실질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체로서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전북형 기본돌봄은 고립된 노인, 돌봄 공백에 놓인 장애인, 일과 돌봄을 병행하는 청년층, 마음의 위기를 겪는 중장년, 사회적 연결망이 약한 지역주민 등, 복잡하고 다양한 돌봄 수요를 포괄하고 마을 단위에서 촘촘한 돌봄망을 형성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런 돌봄체계는 공공 중심의 서비스만으로는 감당하기에는 버겁고 어렵다. 그래서 마을공동체, 사회적경제조직, 주민참여 등의 지역 자원을 적극 연계·활용하는 것이 관건이다. 더 나아가, 전북형 기본돌봄은 단지 복지정책의 개선이 아니라, 전라북도의 지속가능한 미래 전략이기도 하다. 고령화·저출생 구조 속에서 지역 소멸을 막고,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며, 일자리 창출과 사회적 경제 활성화까지 연결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돌봄은 단지 일부만을 위한 ‘선심성 지출’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선순환 인프라가 작동하게 하는 ‘예방적 투자’이다. 이는 장기적으로는 의료비 절감, 고독사 예방, 공동체 회복이라는 긍정적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제 주민 삶의 질을 변화시키는 사회적 전화점에 서 있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단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돌봄이 아닌, 우리 모두의 삶의 질 향상과 지속가능한 지역공동체의 토대를 마련하는 희망이 되기를 기대한다. 양병준 전북희망나눔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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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29 18:40

[새벽메아리] 빈집에서의 마을살이 그리고 나의 재생

이전부터 ‘촌집’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서까래와 대들보가 살아있고 윤이 나는 툇마루가 있는 한옥이면 더 좋을 것이다. 직접 텃밭도 꾸려서 오이나 상추를 따고 지인들을 초청해서 삼겹살 파티도 열고 싶다. 시골살이에 대한 이런 로망은 확실히 지역으로 내려오면서 생긴 것이다. 서울에서는 이런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지역으로 내려온 지 8년차가 되어서야 드디어 나는 ‘마을로’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이런 기회를 얻게 된 배경에는 ‘희망하우스’라는 빈집재생 사업이 있다. 1년 이상 방치된 빈집의 경우 국가의 지원금으로 집 일부를 정비할 수 있다. 그리고 리모델링된 주택은 5년간 무상으로 임대를 내어줌으로써 빈집의 활용성을 높인다. 타 시군의 1만원 주택도 사실상 무상의 개념이니 같은 제도다. 임대인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저소득층, 귀농귀촌인, 청년, 신혼부부, 장애인, 65세 이상 노인, 외국인 근로자 그리고 ‘지역문화예술활동가’(!)이다. 나의 경우 엄격한 심사 과정은 없었으나 이장님을 위시하여 마을분들이 나름 공론화의 과정을 거쳐 이주를 승인하였다. 빈집 정책은 2017년 <빈집 및 소규모주택 정비에 관한 특례법>이 제정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지자체별로 빈집 실태와 현황조사를 시작하던 초기를 지나 최근에는 지역재생, 청년주거, 커뮤니티 활성화와 맞물려 다양한 사례들이 쏟아지고 있다. 주택을 주택으로 바꾸는 경우는 좀 얌전한 경우이고 마을호텔과 게스트하우스, 공방과 카페 등으로 바꾸기도 하고 아예 빈집을 덜어내고 공용주차장이나 쌈지공원 등 공공장소로 전환하기도 한다. 몇몇 성공적인 사례들이 생기면서 빈집은 흉물에서 마을발전의 동력이 되는 공공자원으로 재인식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빈집과 인연이 깊다. 2006년 군산 해망동에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이다. 달동네이던 해망동 곳곳에는 황량하게 남겨진 빈집들이 제법 있었다. 기획팀은 집주인을 수소문하여 일시적인 사용 허락을 얻었다. 빈집의 상태에 따라 수선의 규모는 달랐지만 원칙은 원래 그 빈집이 갖고 있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것. 문패의 이름을 따서 빈집 다섯채가 ‘누구씨네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빈집은 예술가와 만남으로써 새로운 공간으로 경험될 수 있었다. 일반적인 벽화나 조형물을 공공미술로 인식하던 시기에 특정 지역 전체를 문화적으로 디자인한다는 발상은 지금은 오히려 지역재생의 접근법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다. 사실 모든 도시재생, 지역활성화 사업에서 물리적 외관의 재생은 두 번째 문제이다. 어떤 공간으로 어떤 장소로 바뀌어야 하는가를 지역민들이 주도적으로 연구하고 결정하는 참여 디자인이 핵심이다. 최근에는 이 과정에 사회적협동조합, 도시재생지원센터, 공공건축가, 커뮤니티 빌더 등이 결합되어 자립모델을 함께 구상하고 마을과의 협력모델을 구축하기도 한다. 외관보다 프로그램의 재생, 사람의 재생, 삶의 재생이 우선한다는 이야기다. 이장님이 희망하우스에 문화활동가(나!)를 들이면서 마을사람들의 기대가 크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처음으로 마을살이를 감행하는 나로서는 약간 걱정이 들기도 한다. 낮에는 문화활동가이지만 밤에는 철저히 개인적이고 익명적인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기획과 삶이 통합되는 것을 오랫동안 꿈꿔왔지만 이를 실천할 용기가 부족했다. 어쩌면 이번 빈집에서의 시골살이는 마을의 재생 이전에 나의 삶을 재생시키고 전환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내일 마을회관의 점심에 정식으로 초대되었다. 시골살이, 마을살이의 시작이다! △전민정 사무국장은 군산 해망동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장소특정적 공공미술, 리서치와 관계중심의 커뮤니티아트 등을 기획하고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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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22 18:06

[새벽메아리] 폭염 대책이 민생이고, 기후 위기에 대한 실천은 생존이다

질병관리청은 폭염에 의한 온열질환을 기후변화에 따른 질병으로 관리한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올해 5월 20일에서 7월 10일까지 발생한 온열질환자는 1,429명이고 사망자는 9명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 온열질환자는 495명, 사망자 3명이었다. 전북은 7월 10일까지 온열질환자 82명에 사망자 1명으로 전체 온열질환자의 6% 수준으로 인구 대비 발생률이 높은 편이다. 유럽 등 세계 곳곳에서도 폭염에 인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지난 2일 레오 14세 교황은 “기후 위기의 원인이 인간이고 기후 위기로 가장 먼저 고통받는 이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라며 환경 정의를 위해 행동으로 실천할 것을 촉구했다. 폭염 대책은 무엇보다도 시급한 민생 문제다. 매일 재난 문자가 오고 정부와 지자체도 연일 폭염 대책을 내놓는다. 정부는 14일부터 체감온도 33도 폭염에는 2시간마다 20분 이상 의무적으로 휴식하도록 보장하는 법을 시행했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폭염 의무휴식제는 50인 미만의 농업은 적용되지 않으며 택배, 배달 노동자 등 특수고용노동자에게도 적용되지 않는다. 코로나19 재난 시에도 발생한 사각지대가 폭염 재난에도 발생하는 것이다. 제대로 시행되는지 점검도 문제다. 최근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온열질환으로 숨진 베트남 청년은 한국 노동자에게 적용된 단축 근무를 적용받지 못했다. 농축수산업, 건설업, 제조업 등은 이주노동자들이 특히 많으므로 철저한 점검이 필요하다. 이렇게 사각지대가 많은 바에야 그리스와 이탈리아 주요 도시처럼 한낮 온도가 일정 정도를 넘어서면 야외 노동을 금지하는 강제 휴무제를 시행해도 좋겠다. 물론 강제 시행에 따라 휴무하는 사업주와 노동자에 대한 휴업 보상은 있어야 할 것이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7월 하순부터 8월 하순까지 폭염 재난 기간으로 선포하고 야외 노동에 노출된 노동자 보호를 위해 강제 휴무제를 도입하면 좋겠다. 그러나 현상에 대한 조치로는 부족하다. 레오 14세 교황의 호소처럼 개인과 사회가 환경 정의를 위해 실천해야 한다. 진통제만 먹으면 아픔을 잊을 수 있지만, 병이 깊어진다. 기후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근본적 대책 마련은 뒷전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정책이 거꾸로 가기도 한다. 7월 1일 도시공원 일몰제로 전주시 도시공원 60%가 사라질 위기이다. 대한방직 부지와 종합경기장 개발로 전주는 여전히 개발 열풍이다. 전주시 인구는 줄고 있는데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계속 지어진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폭염에도 나무를 베고 숲을 파괴하면서 도로에 찬물만 뿌리는 꼴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남원 실상사의 도법 스님은 “부족할 때의 방법으로 남을 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라고 했다. 인류학자 유발 하라리는 “굶주려 죽는 사람보다 많이 먹어 비만과 성인병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현대 사회의 특징이라 했다. 부족해서 온 생존 위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은 개발과 성장이 아니라 회복과 멈춤이 필요한데 여전히 사회는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빨리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남을 때는 생산을 줄이고 나누는 것이 해법이다. 잘 살기 위해 하는 다이어트가 전 사회적으로 필요하다. 또 줄인 만큼 나누면 된다. 인류에게 이것은 윤리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생존의 문제다. 폭염 대책은 민생이지만 기후 위기에 대한 실천은 생존이다. △유기만 정책국장은 새만금상시해수유통운동본부 사무국장, 전북유니온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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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15 18:41

[새벽메아리] 경주는 어떻게 제주를 이겼을까

올해 11월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2025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를 유치하겠다고 가장 먼저 나선 도시는 경북 경주시였다. 경주는 경북도와 함께 2021년 일찌감치 회의 유치를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정작 공모가 시작된 지난해 4월, 제주시와 인천시가 잇따라 유치전에 뛰어들면서 경주의 유치 가능성은 크게 낮아진 걸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제주와 인천의 마이스(MICE) 인프라가 경주보다 한참 앞서있기 때문이다. ‘마이스’란, 큰 규모의 회의와 여행, 전시 등을 가리키는 용어로 많게는 수만 명이 도시를 찾아 일정 기간 머물면서 다양한 행사를 치를 수 있게 뒷받침하는 하나의 산업이다. APEC 정상회의와 같은 대규모 국제회의를 치르려면 수천 명이 한꺼번에 모일 수 있는 회의장은 물론, 이들을 먹이고 재울 식당과 호텔이 필요하고, 여기에 더해 공식 일정이 끝나고 그 도시와 나라의 역사ㆍ자연, 문화를 느끼고 즐길 수 있는 독특한 장소도 필요하다. 이른바 ‘유니크 베뉴’다. 제주엔 무려 4300명 규모의 대회의장을 갖춘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 더해 올해 8월엔 6000석 규모의 회의실을 갖춘 제주MICE다목적복합시설이 준공을 앞두고 있다. 또 특급호텔만 무려 39개에 달한다. 인천도 못지않다. 인천엔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이 자리하고 있고, 마이스 인프라가 집중된 송도국제회의복합지구도 조성돼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모두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집고 경주가 ‘2025 APEC 정상회의’ 개최 도시로 최종 선정됐다. 이유가 뭘까. 대형 컨벤션센터와 특급 호텔이 마이스 산업 경쟁력의 전부이던 시대는 지났다. 최근 경주시가 APEC ‘정상회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국빈 공식 만찬을 호텔이 아닌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기로 한 데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드러난다. 경주시는 국립경주박물관이 회원국 정상들에게 우리의 전통문화와 수준 높은 유산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라고 봤다. 틀에 박힌 크고 세련된 시설들에서 벗어나 그 도시만의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들로 마이스의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등장한 것이 이른바 ‘타운 마이스’란 개념이다. 작은 도시, 또는 마을의 시설과 상점, 서비스를 하나로 엮어 회의와 여행, 전시 등의 행사를 유치하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수만 명을 한꺼번에 받을 수는 없지만, 수십에서 백여 명 정도는 거뜬히 수용할 수 있으니 점점 인구가 줄면서 활기를 잃어가는 지방 중소도시에선 이 정도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실제로 충남 공주시 중학동 제민천 일대 마을에선 지난해에만 150건이 넘는 타운 마이스 행사가 열렸다. 컨벤션센터는 물론 번듯한 호텔 하나 없는 작은 마을에서 식당, 카페, 책방, 갤러리, 여행사 등 70곳에 달하는 업체가 힘을 모아 150명이 넘게 모이는 행사들도 치러냈다고 한다. ‘타운 마이스’ 프로그램으로 생활인구가 늘면서 가게들도 하나둘씩 늘어 죽었던 상권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다른 지역에 견줘 마이스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전북의 도시들이 눈여겨봐야 할 사례다. 마침 전주에 컨벤션센터가 들어선다고 하니 익산을 비롯한 주변 지역의 다양한 매력을 엮어 타운 마이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 둘을 연결한다면 수도권 대도시나 제주가 줄 수 없는 전북만의 차별화된 매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윤찬영 대표는 익산역 앞 원도심에서 북카페와 함께 ‘문화살롱 이리삼남극장’을 운영하고 있고, 여행사 ‘한레일트래블’ 대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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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08 19:11

[새벽메아리] ‘사회적 재난’에 준하는 ‘기후 위기와 폭염’에 대응하는 복지제도가 필요하다

세계기상기구(WMO)가 지난해 아시아 기후 현황 보고서를 통해 아시아 전역이 전례 없는 기후 재난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했다. 폭염, 해양열파, 빙하 유실, 극단적 강수 등 다양한 기상 재해가 기록적 수준에 달했으며, 이는 이미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고 지적했다. 2025년 여름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기상청은 지난 6월 27일 올해 첫 폭염특보를 발표했다. 전국적으로는 지난 6월 15일 경기북부 6개 지역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이후 12일 만이다. 앞으로 기나긴 무더위 뿐 아니라 얼마나 기록적인 폭염과 마주해야 할지 벌써부터 염려가 된다. 이제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은 단순한 일상 속 더위를 넘어 고령자, 장애인, 독거노인 등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실질적인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전북지역은 이미 초고령사회로 폭염에 취약한 어르신과 생활기반이 어려운 취약계층에게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이미 중앙정부와 전북특별자치도를 비롯한 지자체들이 폭염을 ‘자연재난’이 아닌 ‘사회재난’으로 인식하면서 대응 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정부도 지난 5월에 ‘2025년 여름철 재난(풍수해, 폭염)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정부는 선제적인 폭염대응을 위해 올해 폭염 대책기간을 작년보다 닷새 이른 5월 15일부터 9월 30일까지로 잡았다. 쉼터 수도 작년 12월 말 기준 전국 5만9천곳에서 올해 4월말 6만6천곳으로 확대 운영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해 언론보도에 따르면, 일부 지자체에서는 수치상 확보된 시설이나 인력과 달리, 실제 현장에서는 쉼터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문이 잠겨 있거나, 냉방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곳도 있었다. 그래서 무더위 쉼터가 많다고는 하지만, 쉼터의 위치, 접근성, 이용시간, 야간 운영 부재 등으로 실질적 보호 효과는 제한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정부와 지자체의 이와같은 철저한 준비 및 대응과 더불어 ‘폭염 취약계층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독거노인, 장애인, 기저질환자, 농업인, 야외 근로자 등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심야 등 무더위쉼터를 이용할 수 없는 시간이나 주거취약계층에 대한 선풍기나 냉방용품 같은 지원도 중요하지만, 지난해 국토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주거개선을 통해서 혹한이나 혹서기, 장마 등의 각종 위기에 따른 안전과 건강 문제까지 대응하기 위한 주거안전망 확충과 같은 보다 근본적인 지원과 대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앞으로 기후위기는 더욱 가속화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국가와 지자체가 취약계층 보호를 위해 명확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여 복지제도로써 기후위기나 재난에 따른 국민들을 보호하도록 해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도 “기후위기가 생명권, 건강권, 주거권 등 사실상 인간의 모든 권리에 영향을 미치며 그중에서도 취약계층의 생명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기후위기는 취약계층에게 더욱 더 고통을 가중시킬 수 밖에 없다. 이제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 지역사회가 함께 우리 이웃을 돌보고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복지의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대응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서 단순한 ‘지원’이 아닌 ‘예방적 보호’와 ‘적극적 개입’을 통해 최소한의 삶의 기반과 삶의 질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양병준 사무국장은 전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과 지역복지운동단체네트워크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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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01 18:22

[새벽메아리] 환경 교육과 ESG 교육은 무엇이 다른가

‘공해’라는 단어로 시작된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은, 어느 자동차 회사의 로고가‘굴뚝 그림’에서 ‘글자’로 바뀐 즈음부터인 것 같다. 이후 국가 정책과 함께 학교교육으로 들어온 환경교육은, 40년 이상을 거의 유사한 형태의 작은 실천들이 독려되면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구체적 실천 목록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로 논의되면서 환경을 포함한 다원적 핵심가치가 통합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과거의 ‘환경 교육’과 오늘날의 ‘ESG 교육’은 무엇이 다른가? 환경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는 목표 지점은 둘 다 ‘지속가능한 미래’다. 이에 제일 먼저 실행 가치로 떠오른 것은 당연히 환경보호(E)다. 일회용품 줄이기, 재활용 분리배출, 탄소량 줄이기 등은 긴 세월 동안 온 국민이 실천해 온 것으로 결코 그 효용이 적지 않다. 그러나 2020년부터는 기업 경영 중심으로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ESG의 가치 실현이 화두로 떠올랐다. 우리 삶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환경(E) 영역이 기후, 에너지, 자원 등의 환경보호 활동에 초점을 둔다면, 사회(S) 영역은 더불어 살기 위한 복지, 인권, 봉사 등의 상생 실천을 필요로 한다. 지배구조(G)는 조직문화로서, 조직의 윤리의식, 투명성, 반부패의 실행을 핵심 가치로 삼는다. 과거의 환경교육이 지속가능한 미래의 핵심 과제로 오직 환경보호를 추출해 냈다면, 오늘날의 ESG 교육은 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통합하면서 그 실행 요소를 환경뿐 아니라 인간관계와 삶의 구조로까지 구체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ESG의 학교교육은 바로 이 세 가지를 통합해서 지속가능한 미래의 주제에 수렴하도록 설계돼야 한다. 문제는 사회(S)와 지배구조(G)가 아이들이 실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점에 있다. 그래서 ESG 교육을 하면서도 학생들에게는 환경보호 활동만을 중점으로 독려하는 맹점이 있다. ESG 교육은 미래교육이므로, 현재의 아이들에게 미래를 위한 가치 인식과 실천을 교육하면 된다. 더불어 사는 인간사회의 지속을 위해 경쟁보다는 상생 가치, 나눔과 배려, 협동과 화합을 배울 수 있도록 실행요목을 짜면 된다. 학급이나 학교 등에서 투명하고 합리적인 조직 구성을 지향하고 조직과 구성원의 긍정적 관계를 찾아가도록 다양한 실천의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환경(E) 차원에서 학교교육이 아직도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 등의 소극적 실천에만 머무는 것도 아쉽다. 이제는 적극적 방법도 아이들에게 충분히 열어주어야 한다. 쓰레기를 활용한 재생에너지 생산, 환경적 신소재가 적용된 일회용품 개발, 수월한 재활용이 가능한 용기의 디자인 개선 등, 환경적 발명과 연구의 진취적 세계를 보여주는 것도 환경 훼손에 대한 대응력이다. 이것이 ESG 교육을 통해 지속가능한 미래를 준비해 가는 과정이다. ESG의 가치가 내면화 되면, 아이들은 그것이 구현된 미래를 대화, 토론, 진로설계를 통해 상상해 갈 것이다. 이 구체적 상상이 진실하면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실천에 자발성을 발휘한다. ‘ESG 진로콘서트’를 개최한 어느 교육청의 인상 깊은 사례가 있다. 학생들이 지속가능한 미래에 ESG의 가치가 실현된 직업 세계를 상상했다면, 그래서 지속적인 지구지킴이를 추구할 수 있다면, 이는 ESG 교육의 최종적이고 종합적인 성과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송영주 전 군산동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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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24 19:12

[새벽메아리] 세 살 아이의 신경막과 99세 노인의 신경막은 같습니다 - 총질량 불변의 법칙

총 질량 불변의 법칙은 화학 반응이나 물리적 변화 과정에서도 전체 질량이 변하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즉, 반응 전과 후를 통틀어 전체 질량이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법칙은 화학 반응에서 원자와 분자가 재배열될 뿐, 새로운 원자가 생성되거나 기존 원자가 소멸되지 않기 때문에 성립합니다. 쉽게 말해, 어떤 화학 반응이 일어나더라도 반응 전의 총 질량과 반응 후의 총 질량은 동일하다는 법칙입니다. 이 원칙은 현대 화학과 물리학의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총 질량 불변의 법칙을 인간 생명의 유한성에 비유하여 적용한다면, 이는 인간의 생명이 갖는 제한된 시간과 자원의 한계를 인식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태어날 때부터 일정량의 시간, 에너지, 또는 생명력을 가지고 태어나며, 이 전체 자원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생명의 총량은 변하지 않지만, 그 사용 방식이나 분배에 따라 삶의 의미와 질이 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전체 시간이나 삶의 무게는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의 전체 에너지와 시간이 한정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 현재의 순간과 소중한 사람, 의미 있는 활동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이것은 "생명의 총량은 불변이지만, 그 사용 방식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언젠가 99세 어르신의 허리를 수술한 경헙이 있습니다. 허리의 신경을 싸고 있는 신경막(경막)은 젊은 사람에 비해 너무 얇아져 있고 투명하며 조금이라도 잘못 손대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아주 불안정한 상태의 신경막이었습니다. 마치 전공의 시절에 보았던 세 살 어린아이( 선천척 기형이 있는 어린아이는 세 살에도 수술해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의 경막과 같아 보였습니다. 세 살 아이의 신경막과 99세 어르신의 신경막이 같다는 사실에 나는 한동안 충격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나고 자라 살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살아있는 사람의 신경막을 통해 실제로 사람이 태어나 어린아이가 되고 청년과 중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멍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생명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삶의 가치를 증대시킬 필요가 있다는 가정하에 현재에 집중하고 목표와 가치에 충실하고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자기계발과 성장에 힘쓰고 감사와 긍정적 태도를 유지하며 목적 있는 삶을 설계하여 자신만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렇지만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너무 강하게 느껴지면,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가 증가하거나 우울감이 생길 수도 있고 자신의 생명이 한정되어 있다는 인식이 지나치게 강할 경우, "어차피 끝이 있는데 뭐 하나 제대로 되겠어"라는 무력감이나 절망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삶의 유한성을 보상하려는 욕심이나 강박이 생겨, 과도한 경쟁이나 자기 파괴적 행동에 빠질 수도 있고 불안이나 회피심리는 과거의 후회에 머무르는 경향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거나 가치를 증대하려는 강한 욕구가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으며, 실패하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에 대해 자책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균형 잡힌 태도와 감정 관리가 필요합니다. 적절한 인식과 함께 긍정적이고 건강한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대용 전주 우리들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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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1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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