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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XX와 제네바의 학살자

루터와 함께 대표적인 종교개혁자로 꼽히는 장 칼뱅에는 ‘제네바의 학살자’라는 악명이 따라다닌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개신교 신정정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잔학무도한 방법으로 자신에 반하는 사람 58명을 죽였다는 구체적인 숫자까지 나온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주장은 거짓이다. 칼뱅 신학의 가치를 떠나서, 또 종교와 무관하게 종교개혁기의 중요한 인물인 그가 학살자인가 아닌가는 ‘사실’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관심 있는 주제이다. 칼뱅 ‘학살자’설을 뒷받침하는 논거를 제공한 주요 인물 중 하나는 유명한 전기작가 스테판 츠바이크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인 츠바이크가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아무튼 그는 역사신학자가 아니다. 정규적으로 신학을 공부한 전공자 사이에서 칼뱅이 학살자가 아니라는 데에 이견이 없지만, ‘제네바의 학살자’라는 거짓은 여전히 인터넷에서 유통되고 심지어 뉴스매체로 분류되는 곳에서까지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대부분 무지에서, 일부는 악의에서 그렇게 하는 듯하다. 칼뱅에 대한 ‘완곡한’ 악의 중에는 비록 학살자가 아니라고 하여도 반대자인 세르베투스라는 인문주의자를 화형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 않느냐는 주장이 있다. 세르베투스는 1530년에 <삼위일체의 오류에 대하여>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당시 종교적으로 살벌한 야만의 분위기에서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공박한 책의 출간은, 가톨릭이나 개신교 양쪽에서 모두 화형감이었다. 실제로 그는 화형에 처해졌다. 칼뱅을 미워하는 이들은 세르베투스의 화형이 칼뱅의 작품이라고 비난한다. 이것도 사실이 아닌 것에 가깝다. 요약하면 칼뱅이 세르베투스의 죽음에 아예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으나, 그의 죽음을 막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간 뒤에는 고통스러운 화형을 막으려고 애를 썼다. 아무튼 ‘제네바의 학살자’는 아니라는 얘기다. 칼뱅과 관련한 오래된 ‘가짜 뉴스’가 아직 떠돌아다니는 이유는 앞서 지적하였듯, 무지 아니면 악의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 지면을 도배하는 소위 ‘가짜 뉴스’인 ‘이XX’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윤석열 대통령의 ‘이XX’ 발언을 방송을 통해 실제로 들어본 적이 없고 확인해 볼 마음이 없다. 그러니 ‘XX’의 실체가 무엇이다는 논란에 숟가락 하나 더 얹을 수가 없다. 얹을 마음도 없다. 다만 ‘이XX’의 실체를 두고 이렇게 국가적인 논란을 벌여야 하는지, 사태를 왜 이 지경으로 끌고 가는지를 두고 저절로 “‘이XX’들”이란 말을 내뱉게 된다. 이 소위 ‘가짜 뉴스’의 진위 논란과 별개로 ‘이XX’가 과연 ‘뉴스’인지도 의구심을 갖게 된다. 공론의 장에서 다뤄지는 뉴스라는 것이 뉴스로 다뤄지려면 ‘이XX’보다는 나은 내용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XX’가 ‘이XX’인지 아니면 ‘이YY’인지 혹은 ‘이ZZ’인지를 다투기보다 ‘저AA’와 ‘저BB’처럼 시급하고 중요한 현안을 취급해야 하지 않을까. ‘이XX’는 ‘제네바의 학살자’와 달리 애초에 첨예한 공방이 필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한심한 사태가 빚어졌을까. 무지와 악의 때문이었을까. 글쎄 무능이 더 본질이 가깝지 않을까. 무능의 근본 책임을 누구에게 묻고 논란을 어떻게 잠재워야 하는지 엎질러진 물 앞에서 답답한 심정이다. 종교지도자 칼뱅은 학살자가 아니었을뿐더러 무능하지 않았다. 옛날 이야기다. /안치용 ESG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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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7 14:19

전북교육은 ‘농촌유학’을 통해 무엇을 얻어야 할 것인가

8월 31일, 전북교육청은 서울시교육청과 농촌유학을 위한 업무협약식을 가졌다. 서울의 학생들이 우리 도의 농촌으로 유학을 옴으로써 그들에게는 생태 친화적 교육 여건을 제공하고 우리에게는 학생 수 부족의 여건을 개선해 줌으로써 공히 교육력 제고를 실현하겠다는 취지에서이다. 주거시설은 지자체가 협력하고 경비의 상당 수준을 우리 교육청이 감당하므로 그 소요예산이 만만치 않다. 게다가 사용해 오던 교육 시설을 유학손님 최적화로 변경하고 손님맞이를 위한 분주한 준비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예산, 분주함, 공사 등을 감수하고 얻을 수 있는 교육적 효과와 상생의 결실이 취지만큼이나 만족스럽다면 이는 당연히 감당해야 할 터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울시의 농촌유학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서울유학이 구체적으로 계획되어 있는지도 궁금하다. 인구소멸로 침체된 우리의 교육과 지역을 소생시키기 위한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농촌유학 그 자체가 핵심이라 한다면, 그로 인한 우리의 실질적인 교육력 제고가 진정 가능한지 내부 소통으로 촘촘히 따져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항간에 학교 현장에서의 회의적인 목소리들이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교육 현장 경험 기반의 정책적 협의와 실무진들의 허심탄회한 교육적 논의와 소통도 있었을 테지만 이들의 효과성 의심의 목소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농촌유학은 우리의 입장에서 야심차게 타진되고 논의되어야 할 일이다. 상호간 균형감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교육적 효과를 가장 먼저 따져봐야 한다. 농촌의 교육력 회복을 위해서는 학기 단위보다 더 긴 일정 기간의 지속성을 보장해야 하고, 교우관계에서 오는 우리 아이들의 정서적 충만감도 중요하다. 학생중심 미래교육 차원의 농촌유학은 우리 아이들의 교육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이미 거쳐간 사례를 면밀히 들여다보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의 도농 간 공동 통학구 운영과 전남의 농촌유학 운영 결과가 있다. 공동 통학구도 농촌 아이들의 마음에 많은 상처를 남겼다고 현장은 말한다. 전남의 사례는 민심의 이슈를 만들어 선거에서 쟁점화 되었고, 결국 그들의 농촌유학은 기간, 방법, 운영 등에서 깐깐한 주체적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다. 교우관계의 정서적 상처도 후문으로 보태지고 있다. 정략이나 이미지가 아이들의 교육에 앞설 수 없다. 학생 수 보장 이상으로 상생의 교육 실현에 방점을 준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실효성 타진은 구체화 되어야 한다. 적용 이후에 이미 사례로 노출된 부작용을 그대로 다시 남긴다면 불찰의 피해는 학생들이 감당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의 행복한 교육 실현과 교육 정책의 성공을 진정으로 기원하는 바이다. 논어의 ‘정명(正名)’에 잠시 머물러 본다.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시고 정치를 할 경우 선생님은 무슨 일부터 하시겠습니까?’‘그야 물론 이름을 바로 잡는 일이다.’ (중략) 그런 까닭에 군자는 이름을 붙였으면 반드시 주장과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하고 주장을 했으면 반드시 실행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당시의 사회, 윤리에 따라 이는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자자(子子)의 행동과 가치에 근간을 두어 해석되지만, 오늘날은 민심으로 큰 역할과 이름을 얻은 이들에게 그 이름에 합당한 실(實)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학생중심 미래교육’이 우리 아이 중심의 상생 교육 실현과 교육력 제고에 든든한 기반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송영주 군산동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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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0 14:08

닫힌 언어, 열린 언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대로 된 사과도 아니고 심심한 사과라고?, 난 하나도 안 심심해! 최근 여론의 관심을 끈 ‘심심한 사과’의 온라인 공지글과 댓글 일부다. 언론에서는 젊은 층의 문해력(文解力)을 꼬집었다. 무거운 탄식까지 곁들였다. 세대 간의 언어 차이를 비교하기도 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교육부는 초·중·고교 학생들의 문해력 교육 강화 내용을 담은 교육과정 시안을 공개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젊은 누리꾼들의 가벼운 재기발랄일 수 있다. 쉬운 우리말을 놔두고 왜 어려운 한자어를 쓰느냐는 지적이다. “정말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표현했다면 ‘심심한’ 논란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말은 고유어, 한자어, 외래어 등을 포함하고 있다.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상황과 맥락에 따른 어휘 선택이 중요한 이유다. ‘마음의 정도가 깊고 간절한’ 심심(甚深) 말고도 ‘지루하고 따분하거나 음식 맛이 싱거운’ 심심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은 그만두고 요점만 말하자면’의 도대체(都大體),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의 어차피(於此彼)는 모두 순우리말 같은 한자어다. 그런가 하면 ‘성질이 곧아서 융통성이 없는’ 뜻의 고지식하다는 한자어 같은 순우리말이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쉽고 편안하게 사용하도록 한글을 만들었다. 그런데 쉬운 우리말과 외래 언어들이 뒤섞이면서 우리말이 어려워졌다. 따라서 쉬운 우리말을 어려운 말로 만들지 않도록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언어 사용에 따른 오해와 불통(不通)을 두고 남을 탓할 일이 아닌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정치권에도 잊지 못할 ‘사과(謝過)’ 사건이 있다. 2004년 당시 국회가 파행(跛行) 사태를 겪었다. 이해찬 국무총리의 거친 발언 때문이었다. 총리의 사과가 여야의 타협안이었다. 하지만 총리는 ‘사과’ 대신 ‘사의’를 표명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감사하다는 사의(謝意)도, 물러난다는 사의(辭意)도 아니고 대체 무슨 사의? 국어사전을 보면 사의(謝意)에는 잘못을 빈다는 뜻도 들어있다. 결국 총리에게는 자존심이 중요했던 모양이다. 사과를 대체하는 어휘를 어렵게 찾아내는 데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그의 진정성은 의심을 받았다. 유력 인사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일탈 행위에 따른 ‘사과’ 표현에 인색하다. 외교적 관례로 사용되는 ‘유감(遺憾)’이 언제부터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섭섭함·아쉬움·불만스러움을 의미하는 ‘남길 유(遺)·섭섭할 감(憾)’의 유감이 격조 있는(?) 사과의 표현으로 둔갑했다. 잘못을 솔직히 반성하고 진정한 용서를 구한다면서 “유감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다. 그들의 유감 표명에 국민이 오히려 유감을 느끼게 되는 꼴이다. 어려운 말은 자신을 뽐내거나 허물을 덮으려는 닫힌 언어다. 쉬운 말은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열린 언어다. 깊이 생각한다는 말을 굳이 ‘사료(思料)’로 표현했다가 강아지 사료(飼料)가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심심한 사과’ 논란 이후 문해력이 여론의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글을 읽고 쓰는’ 문해력은 ‘말하고 듣는’ 언어 소통법과 함께 교육돼야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신조어, 외래어, 한자어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말하고 쓰는 사람은 항상 듣고 읽는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히는 소통의 언어가 필요한 때다. 말과 글로 사는 언론인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박종률 우석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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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13 13:56

줄임말 유행의 언어 광장에 던지는 화두

우리는 요즘 줄임말 천국에서 살고 있다. 줄임말은 언어의 경제성을 추구하여 해당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동시에 사용자 집단의 유대감을 고양하는 친교의 성격도 있다. 줄임말이 재미를 더하면서 유행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도 사용자의 발화 의도에 따라 언어의 비속함을 드러내기도 하고 언어 파괴의 단초가 된다.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흥미 유발을 위해 줄임말이 상용화된 지 오래이다. ‘결송합니다’(결혼해서 죄송합니다), ‘의느님’이 만든 ‘성괴’(성형 괴물)니 ‘킹받네’(열받네, 화가 나네), ‘완내스’(완전 내 스타일), 갑분싸(누군가 썰렁한 이야기를 하여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짐)는 예능 프로그램 자막에서 쉽게 접하는 언어가 되었다. 이 뿐이랴. 정치 뉴스에서도 ‘소주성’(소득주도성장) ‘윤핵관’, ‘어대명’이 신문지상에서 춤을 춘다. 특히 MZ세대에서 유행하는 언어 양상은 우리의 한글 문법을 파괴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사자성어처럼 사용하는 말이 엉뚱한 의미를 던지고 있을 때, 여기에 친숙하지 않은 어른들은 의아할 수밖에 없다. ‘내로남불’, ‘낄끼빠빠’는 착한 줄임말이다.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쉽살재빙’(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 빙고), ‘만반잘부’(만나서 반가워 잘 부탁해), ‘할많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까지 알아들을 수 있다면 이미 최신 유행에 적응한 사람이다. 유행어 중 형태적 변이를 활용하여 언어 놀이를 하는 ‘야민정음’도 있었다. “네넴띤, 띵곡, 댕댕이”는 글자의 유사성을 활용한 사례이다. 이의 모양을 잘 보면 ‘비빔면, 명곡, 멍멍이’임을 알 수 있다. “곤뇽, 곰국, 롬곡옾눞”은 180도 회전을 하면 형태소가 ‘육군, 논문, 폭풍눈물’로 보이게 만든 사례이다. “쀼, 뚊”은 ‘부부, 돌돔’을 글자의 압축을 통해 한 글자로 표현한 경우이다. 줄임말은 언어 전달의 효율성을 추구한 면이 있지만, 신어(新語)로 탄생하면서 유희적 측면과 동료 의식의 강화로 연계되기도 한다. 반면에 이러한 유행어나 신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기도 한다. 어떤 이는 이러한 유행은 영상매체에 익숙하고 짧은 글 주고받기가 일반화된 언어사회에서 발달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장문의 글이나 복잡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느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OECD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실질 문맹률은 75%에 이른다고 하니 걱정이다. 이를 이겨내는 일은 독서밖에 없다. 줄임말이나 신어는 사용자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조성하기도 하고 언어를 통한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다. 그 즐거움은 옛 선비들이 했던 ‘한자 파자(破字)’ 놀이처럼 지적 유희면 좋겠다. 이 놀이에는 한자의 획이나 부수를 나누거나 합쳐서 현실을 비판하거나 참신한 지혜가 담긴 영민함이 있었다. 파자 놀이처럼 의미 있는 신어의 탄생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고장의 말을 상황에 맞게 되살려 쓰는 일도 생각할 수 있다. 사투리는 무지몽매한 대중의 언어가 아니다. 그 고장의 정감이 살아 움직이는 아름다운 언어이다. 한가위가 다가온다. 부모와 자녀가 모두 모이는 즐거운 날이다. 한 집에 모여 세대차를 줄이는 퀴즈 대회를 열어 보자. 자녀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어른들이 그 뜻을 맞혀보고, 줄임말로 대화하면서 웃기도 해 보자. 어른들이시여, 아이들 말 알아듣지 못한다고 “킹 받지” 말자. 그냥 한 마디 더 해 보고 그들의 말을 배워보자. 이것이 그들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그러고는 한 마디 던지자. “네 말 솔찬히 재밌다. 인자 엔간히 놀고 싸드락싸드락 책이나 보랑께.” /김용재 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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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06 13:57

ESG위원회를 설치하지 않아야 할 조직

OO자산운용이 ‘KB 미국 ESG 배당귀족 펀드’를 선보였다. 미국의 대표 배당성장지수인 ‘S&P 미국 ESG 배당귀족 지수’를 추종하는 인덱스 펀드다. ‘미국 ESG 배당귀족 지수’는 S&P1500 지수 중에서 20년 이상 연속으로 배당이 성장한 120여 종목을 우선 선별한다. 그 중 ESG 실적이 부진한 하위 25% 종목(물 과다 사용 기업, 과도한 탄소배출 기업)과 경영철학이 ESG에 완전히 배치되는 석탄ㆍ담배 산업 등을 제외한 약 80종목에 투자한다. 재무성과 비재무성과를 함께 보는 이른바 ‘투 트랙 어프로치(two-track approach)’에 해당한다. 여기서 배재무성과가 ESG이다. OOOO시스는 ESG 경영 활동과 성과를 담은 ‘2022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발간하며 ‘전사 ESG 경영협의체’를 신설한다고 밝혔다. 협의체는 경영진으로 구성된 의사결정 기구로 환경과 사회 책임 활동 전략을 검토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최근 보도된 두 기업의 ESG 사례다. ‘귀족’, ‘협의체’ 등의 단어가 살짝 거슬린다. 특히 경영진으로 구성된 의사결정 기구에 협의체란 단어를 쓰는 게 과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 정도는 애교다. 어느 신문의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의 서거 24주기 기사는 낯이 뜨겁다. 기사는 “최 선대회장이 뿌리내린 ESG 경영이 재조명되고 있다”며 “기업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으로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신념으로 조림과 인재양성에 집중하며 ESG 경영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대목은 신문의 본령을 넘어선 글로 읽힌다. 최태원 회장이 ESG경영에 열심인 것은 일단 외양상 사실이지만, 최 회장의 부친까지 ESG로 포장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다. ESG가 봇물이 터지면서 저런 것도 ESG에 해당하느냐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위장환경주의를 뜻하는 ‘그린 워싱’에 빗대 ‘ESG 워싱’이란 말이 우려의 분위기 속에 나돌고 있다. 알 만한 기업은 너나없이 ESG위원회를 설치하고 ESG경영을 표방하지만 실제로 달라진 게 무엇이냐는 지적과 함께 나아가 일각에서는 표방과 반대로 기업을 운영한다는, 즉 ‘ESG 워싱’ 혐의를 받는다. 이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산업계 전반의 대대적인 설치 움직임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답한다. 거창하게 보도자료를 뿌리며 먼저 ESG위원회를 만들었지만 어떤 일을 할지 몰라서 “무엇부터 해야 하냐”고 묻는 기업이 있는 상황인데도 부정적이지 않다고 보아야 할까. 내용과 형식이 부합하면 좋겠으나 때에 따라 어느 한쪽부터 시작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보면 일단 고민을 시작했으니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런 위원회라도 있으면 실천으로 옮기도록 사회적 압력을 가할 수 있다. 일단은 하도록, 고백하게 하는 게 좋은 전술이지 싶다. 개인적으로 그럼에도 ESG위원회를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조직이 있다. 정당이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요즘 대한민국 정당의 모습은 더욱더 가관이다. 권력투쟁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듯한 모습이 오래인데 최근엔 부끄러움마저 잃은 듯하다. 국민의힘이 절정을 치닫는 듯하지만, 더불어민주당 또한 만만치 않다. 이 정당들은 ESG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무관하다. 만일 이들이 ESG위원회를 설치한다면 그 자체로 100% ‘ESG 워싱’이다. 만들어 놓고 내용을 채울 것이란 기대조차 품을 수 없다. 딱히 다른 기대도 없긴 하다. 다행히 이들이 ESG위원회 같은 걸 설치한다는 소식은 없다. /안치용 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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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30 13:36

최적을 향한 진화, ‘미래교육’을 어떻게 펼칠 것인가

교실의 교수매체는 괘도, 실물화상기, TV모니터를 거쳐 지금은 디지털 스마트 기기로 진화해 왔다. 개인별 매체 활용은 물론, 온라인 교수학습 플랫폼인 줌(ZOOM)과 메타버스(Metaverse) 등, 미래교육은 명실상부하게 에듀테크 기반으로 정착하고 있다. 미래교육은 미래인재 양성에 그 목표가 있다. 즉 미래인재 역량 개발이 미래교육의 주안점이다. 그렇다면 미래교육은 반드시 디지털 기기를 활용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미래교육은 완성되는 것일까? 교육은 최상이 아니라 최적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시대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교육은 최적의 대응 모형을 찾아 진화해 간다는 말일 게다. 미래에는 생활패턴과 운용 방법들이 지금보다 더 온라인 기반으로 확충될 것이다. 디지털 기기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열어줄 뿐 아니라, 만남, 경험, 실험 등의 방법을 확장해 줌으로써 학습과 탐구력을 증강해 주기도 한다. 칸랩(스쿨), 테드, 무크 등의 학습 프로그램과 콘텐츠는 이미 교실을 뛰어넘는 양질의 자료로 탐구와 융합에 기여하고 있다. 이는 플립러닝을 포함한 블렌디드 학습에 매우 효과적이다. 미래교육은 디지털 기기의 사용이 목표가 아니다. 디지털 활용은 미래인재 양성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의 방법과 도구이다. 수업은 지식을 넣어주기보다는 가진 지식을 끌어내어 활용, 응용, 통합하도록 촉진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패들렛을 통한 공개적 소통, 코딩 기반의 각종 온라인 프로그램 구현을 통한 창작, 메타버스의 AR, VR, MR, XR 학습 효용성은 생각과 구현을 구체화해 줌으로써 호기심과 몰입감을 준다. 이는 학생들의 역량을 다양한 방법으로 자극하고 동력을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미래교육의 효용성 증대를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교사의 디지털 활용 능력과 리터러시, 그리고 학생들의 기초지식(학력)이다. 사용이 서툰 교사의 디지털 활용 수업은 많은 시간을 낭비하면서 학습 흥미와 몰입을 방해한다. 능숙하고 적절한 디지털 프로그램 적용이라는 효율적 도구 활용으로 문제해결의 수업을 이끌어야 한다. 수업의 질은 교사 역량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은 미래교육에서 더 크게 다가온다. 여기에 학생들의 기초지식 준비도 매우 필수적이다. 응용, 융합, 통합의 역량교육이 추구된다면, 학생들에게는 당연히 끌어낼 만한 지식이 기본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미래교육 시대에는 모든 학생의 기초지식(학력)이 더 큰 책임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공감해야 한다. 미래교육의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은 디지털 기기의 활용 속에 바로 이 기초지식의 부재를 문제 삼고 있다. 기초지식과 디지털 리터러시의 조합으로 세계의 교육은 이미 역량 중심 시대로 움직여 가고 있다. 미네르바 대학은 캠퍼스 없이 온라인 기반의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IT 전문 교육기관인 프랑스의‘에꼴42’는 디지털 기기를 통한 프로젝트 수행 과정으로 전문가를 양성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내년에는 디지털 시스템의 태재대학이 융합 전공을 내세우며 세계인을 대상으로 개교한다. 빅데이터를 통해 딥러닝을 수행한 AI와 공존해야 하는 미래인재는 학습, 능력, 서열보다는 탐구, 역량, 협업이 중요하다. 역량 개발 과정에서, AI는 할 수 없는 인문학적 소양을 챙겨야 하는 것도 미래인재 양성에서는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최적을 향한 교육의 진화’, 미래를 살아갈 학생들에게는 미래교육만이 답이다. 정보 역량 분야에 교사의 생애주기 교육이 필수로 이해되며, 기초지식(학력)의 책임지도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의무로 다가온다. 디지털이주민인 기성세대는, 디지털원주민을 미래인재로 만들기 위한 디지털 활용 역량의 확충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노력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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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23 18:58

TPO를 못 읽는 여권 수뇌부의 공감 리더십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20여 년 전 삼성전자 휴대폰의 광고 문구다. 당시는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이전이라 기술적 문제 등으로 피처폰의 단말기 성능이 약했다. 사용자들의 불편과 불만도 컸다. 그런데 언제(anytime) 어디서나(anywhere) 통화가 잘 된다고? ‘애니콜’은 단번에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됐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는 법. 아무 때나 울려대는 휴대폰 벨이 골칫거리가 됐다. 이제는 진동과 무음이 에티켓의 기본이다. 전화 한 통화를 하더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TPO 법칙’이라는 게 있다.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의 중요성을 가리킨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맥락과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정치인들이라면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할 철칙이다. TPO는 민심과 괴리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채널이다. 최근 여권 수뇌부의 허물과 실수가 잇따르고 있다. 원인은 TPO 망각이다. 여권 전체를 소용돌이로 빠트린 ‘내부총질’ 문자 파동을 보자. 아무리 사적인 문자 메시지라 하더라도 윤 대통령은 지지율 추락 ‘상황’의 엄중함을 인식하지 못했다. ‘체리따봉’ 이모니콘도 가벼움에 한 몫 거들었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사진기자들의 망원렌즈가 즐비한 국회 본회의장의 ‘장소’ 특수성을 어느 순간 잊었다.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난 100년 만의 기록적 폭우에도 TPO 망각 사례는 계속됐다. 국민의힘 김성원 의원은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라고 말했다가 혼쭐이 났다. 김 의원뿐만이 아니다. “비가 예쁘게 왔다”는 말에 덧붙여 여성에 대한 ‘외모 품평’ 발언까지 등장했다. 그야말로 ‘아무 말 대잔치’다. 다른 곳도 아닌 수해 복구 현장에서. ‘장소와 상황’의 중요성을 깜빡한 집권당 사람들의 영혼 없는 모습이다. 말은 양날의 검(劒)이다. 양쪽에 날이 서 상대방을 벨 수도 자신이 베일 수도 있다. 몸에 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문다. 그러나 말로 할퀸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역대급의 집중호우 당시 여권 수뇌부의 언행도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 자택이 ‘청와대 벙커 수준’이라는 해명, “비가 온다고 대통령이 퇴근 안 합니까”라는 반박. 더욱이 대통령실이 제작한 국정 홍보물은 눈을 의심케 했다. 영화 ‘기생충’보다 더 충격적인 ‘반지하’의 비극에 대통령실은 너무도 무감각했다. 야당은 거세게 비난했다. 이재민들은 분노를 넘어 허탈감에 빠졌다. 이쯤 되면 국정을 책임진 여권 수뇌부는 국민에게 재난대피 요령을 알리기에 앞서 소통 공감 요령부터 먼저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권당은 내홍에 휩싸였다. 징계를 받은 이준석 대표가 결국 윤 대통령을 직격했다. ‘이 새x, 저 새x’라는 거친 말이 방송전파를 탔다. 때아닌 ‘양두구육(羊頭狗肉)’ 논쟁도 벌어졌다. 과연 국민이 안중에 있는지 궁금하다. 여당과 정부, 대통령실이 따로 겉돌고 있다. 총체적 난맥상이다. 각종 정책을 둘러싼 정부의 부실한 대응에 국민의 믿음은 메말라버렸다. 윤 대통령은 취임 100일이 갖는 TPO의 비상함을 직시해야 한다. 민심을 읽는 공감 리더십이 절실하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 이어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자유’를 33차례나 강조했다. 단 몇 차례라도 ‘공감’이나 ‘소통’을 언급했으면 어땠을까. /박종률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우석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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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16 13:16

옷 문화의 선진(先進)을 꿈꾸다

그는 “두루마기 격으로 기모노를 둘렀고, 그 안에서 옥양목 저고리가 내어 보이며, 아랫도리엔 중국식 바지를 입었다.” 1920년대 농촌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단편소설 <고향>(현진건)의 첫 대목이다. 조선과 일본, 중국의 옷이 섞인 외양 묘사는 주인공 ‘그’의 험난한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궁핍한 생활을 이겨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서간도와 일본 탄광을 떠돌았지만 살림살이는 나아진 것이 없다. 그사이 부모도 잃고, 결혼을 약속했던 고향 처녀는 유곽에 팔려간 뒤였다. ‘그’의 운명은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에 다름 아니다. ‘그’의 옷차림새는 중국과 일본, 조선천지를 부랑하며 살아갔던 삶의 제유(提喩)이다. 이처럼 소설가는 인물의 몸과 옷차림의 인상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대상의 성격과 삶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어디 소설뿐이랴.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개성 있게 드러내기 위해 패션에 신경을 쓴다. 옷은 우리 몸의 최종 표시물이다. 옷차림은 사람의 인상에 큰 영향을 준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첫인상이 상대에게 호감을 보이는 중요 요소로 작용한다고 한다. 상대를 보고 7초 안에 열 가지 이상의 이미지를 상상한다고 하니 놀랍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일상에서 옷의 선택과 개성 표출에 관심을 많이 갖는다. 옷은 사회문화적 기호이다. 인간 삶의 필수요소인 의식주 중에서 그 첫 번째 항목에 옷(衣)을 내세운 점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옷은 우리의 삶을 뚜렷하게 형식화한 문화기호임에 분명하다. 옷은 신체 보호나 자연에 대한 적응, 사회적 위치나 계층, 직업을 드러내는 도구적 속성이 있으면서도 표현 욕구의 기능도 함유하고 있다. 옷은 개성과 멋을 드러내는 장치이면서 취향을 표현하고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의 산물이기도 하다. 옷을 ‘무성(無聲)의 언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옷은 문화 기호이기 때문에 나름의 표현 형식(기표)과 의미(기의)가 있고 사회생활의 맥락 속에서 작동하는 문법이 있다. 자신의 패션에서 건전한 가치관이나 의식, 타인과 공유하는 공감의 기호 표현이면 다행이다. 반대로 내면의 자기 세계와 상관없이 사치와 겉치레, 가식의 문법만 작동한다면 한심할 노릇이다. 자신의 경제능력과 상관없이 명품 브랜드만 찾거나 과시를 위한 패션에 함몰되면 안 된다. 이는 타인 흉내에 빠져 자신을 속이는 위선일 뿐이다. 반면에 평범한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도 자신 있게 자기 생활을 가꾸는 멋진 젊은이도 있다. 이들에게서 예의와 정중의 기호와 함께 자신감과 진정성이 있는 몸의 언어를 읽을 수 있다. 엊그제 한옥마을에 다녀왔다. 한복 체험을 하며 과거와 공유하고, 현재 삶의 여유를 즐기는 젊은이가 유쾌해 보인다. 여행복도 화려하지도 않고 깔끔하게 차려입었다. 옛날 옷 체험 이벤트가 더욱 확대되어 중요 유적지에서 삼국시대 옷 입기, 고려 옷 입기, 조선군 군복 입기 체험 등이 확산된다면 꽤 흥미로운 여행의 멋이라고 생각했다. 옷은 겉치레의 끝판왕이 아니다. 배냇저고리로부터 시작하여 수의(壽衣)로 돌아가는 인생이다. 옛 것은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문자이다. 한복 입기 체험을 하는 젊은이들이 여유 있는 시선으로 우리 옷의 세계화에도 관심을 갖기를 기대했다. 이것이 옷 문화 선진(先進)의 시작이다. 옷은 날개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역사가 담겨있는 상형문자이다. /김용재 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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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09 13:21

변호사 우영우와 ESG의 E

얼마 전 평소 긴밀하게 지내는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환경·사회·거버넌스를 뜻하는 영어 단어의 첫 글자를 딴 ESG에서 ‘E’에 해당하는 정확한 단어가 무엇이냐는 내용이었다.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엔 이견이 없는데, 환경을 두고는 ‘Environmental’과 ‘Environment’를 두고 어느 게 맞는 표기인지 갑론을박이 있다는 전언이었다. 인터넷의 백과사전에서는 물론 다른 많은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도 비슷한 비율로 영어표기가 형용사와 명사로 엇갈렸다. 맞는 표기는 ‘Environment’이다. 원래 투자용어에서 유래한 ESG는 사회책임 관점에서 투자대상 기업을 고르는 기준이다. 사회책임투자(SRI)에서 투자대상 기업을 선별하는 기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Environment’, ‘Social’, ‘Governance’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모두 명사이어야 한다. 그럼 ‘사회’는 ‘Social’보다 ‘Society’가 맞는 것 아닐까. 답은 간단하다. ‘Social’ 또한 명사이다. 투자대상 기업을 고르는 기준이 ‘사회’일 수는 없다. 기업이 사회와 관계를 맺는, 사회적인 양상을 살피며 투자적격 기업을 선별한다. ‘Social’은 기업경영의 사회적 측면을 뜻하는 내용상의 명사이다. 환경ㆍ사회ㆍ거버넌스를 뜻하는 ESG로 쓰면 되니까 영어표기에 정색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반론이 예상된다. 형용사가 본질에서 주어를 설명하는 보어로 사용되거나 명사를 수식하는 용도로 활용되기에 언제든 명사에 치여 희미해질 수 있다는 걱정은 단지 기우일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 우영우는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이다. 제작진이 극중에서 장애를 다루면서 세심하게 접근하려고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극의 구조상 이 드라마에서 장애의 소비가 불가피하다. 드라마에서 장애인으로 그려진 우영우는, 우영우를 뺀 현실의 거의 모든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에겐 별똥별이나 기러기처럼 비교를 불허하는 저 높은 곳의 존재이다. 자폐스펙트럼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재인 것이 흥행의 핵심 요소이다. 너무 압도적인 그 탁월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으로 장애가 사용됐다고 말한다면 세상을 너무 삐딱하게 보는 것인가. 우영우는 현직 대통령 윤석열을 포함한 서울 법대로 통칭되는 엘리트 집단의 주변인이지,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의 대표가 아니다. 물론 우영우가 현실의 인물이라면,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여 대중예술로 재현한 것이 아닌 진짜 편견과 차별, 소외에 투쟁한 진짜 피와 살로 된 그 실제 인물이라면 그는 삶으로 장애를 공유하기에 장애는 장식이 아니다. 즉 장애는 수식어나 형용사가 아니라 주체이자 명사가 된다. 반면 서울 법대 수석 서울 의대 수석 등을 내세워 엘리트 집단의 정점과 그 집단 내 주변부 사이의 대비를 극대화한 상업주의 드라마에서는 장애인이 사라지고 특출한 변호사 ‘불구하고’만 남는다. 자폐스펙트럼이란 형용사가 탁월한 변호사를 수식하고 증발했다는 견해는 ESG에 더 주효하게 적용된다. ESG의 핵심은 두말할 것 없이 E이다. 일각에서 E를 형용사로 만들어 ESG의 뒷전에 두려 한다는 우려가 전해진다. ESG의 모든 현장에서 E가 ESG의 맨 앞에 자리한 확고한 명사임이 기억돼야 한다는 생각이 우영우를 보며 들었다. ESG는 앞으로 해도 뒤로 해도 ESG가 아니다. E가 형용사이어서도 안 된다. 영어표기가 생각보다 중요한 사안 같기도 하다. /안치용 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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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02 14:00

기대를 실현으로, 닻 올린 희망 교육 공감

전북교육의 희망이 도민의 기대와 함께 시작됐다. 선거에는 유권자의 소망을 정확히 보여주는 최다득표의 진실함이 있다. 그래서 전북교육은 바뀌어야 하고 새로운 손질이 필요하다는 당위성은 타당하다. 이제 공약도 중요하지만, 12년간 눌어붙은 세세한 교육을 조각조각 들여다보고, 이을 것과 바꿀 것을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선거에서 3선은 허용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항간의 진솔한 얘기는 12년 굳은살에 대한 절박한 평가를 표현한다. 교육은 아이를 바른 성취에 도달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도민에게 교육이 절박한 이유는 인재양성에 대한 약속을 함께 품고 싶은 소망에 있다. 7세에서 19세, ‘만들어진다’는 말이 가능할 이 시기의 아이들을 구체적으로 교육하는 초․중등 교육에는, 교육 수장의 이상적 가치 못지않게 현실 여건을 적용한 교육적 실현도 중요하다. 그래서 도민은 그 대응력으로 학력향상과 대입지원을 크게 주문하지 않았나 싶다. 실사구시를 강조한 새 교육감이기에 이것의 실현에 거는 기대도 크다. 타 시·도에 현저하게 뒤진 미래교육, 곧 없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부추긴 자유학기제, 천천히 가자는 말로 동력을 늦춘 고교학점제 등에 대해서는 독선의 반교육부 정책으로 전북 아이들의 교육 수혜에 구멍이 뚫리게 만들었다. 학점제를 위한 그린스마트학교 추진이 전북에서 유독 어려운 것은 이런 맥락의 현재진행형이다. 자기 이해부터 탐색, 성숙, 결정으로 이행하는 단계를 적용하지 않고 예산만 현장으로 내려 보내는 진로교육 실태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진로결정, 고교학점제, 학생부 평가를 이어 감으로써 대입 수시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초․중․고 연계적 시스템을 교육청에서조차 각성하지 않았나 싶다. 기초학력조차도 학력의 역량 요소로 해석해 인지영역에 대한 기초를 소홀하게 다뤘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의 교육 정책은 촌각을 다투어 바로잡혀야 한다. 특히 기초학력과 진학은 학생중심의 으뜸 정책으로 방향을 잡았으니 모두가 고무적으로 바라봐야 할 일이다. 학생자치를 학생의회제로 확대 강화하는 방향성에 아이들의 더 큰 성장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반면, 학교자치의 상향식 의결 방식 속에 절대화되었던 교사 자율성도 그 진솔함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자율적 의지에 교육자로서의 책무성은 어느 정도의 바탕이 되었는지 생각해 볼 문제다. 교육보다는 개인의 편의함에 비중이 컸다면, 자율성과 책무성의 균형감 의식도 학교문화에서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영역이다. 교사 의식은 교육 실현에서 무엇보다도 우선적이다. 앞으로 추진할 많은 계획이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의 교육적 성과로 도달되기 위해서는 교육을 전제한 교사문화의 기반이 절대적이다. 정책은 교육청에서 시작하지만 실행은 학교문화 속에서 교사를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희망의 닻을 올린 전북교육은 할 일도 많고 챙길 것도 많은 조직적 실체다. 방향성도 중요하지만 적용과 실행을 살피는 것은 더 중요하므로, 큰 그림과 작은 그림의 조화로움이 정책에서 중요한 묘수가 될 것 같다. 대외성과 대내성의 균형, 현장 적용과 지원을 살펴가는 정책, 소통과 협치 속에 세세한 교육 현장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은 교육의 본질이며 궁극이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현장이 체감하고, 교사가 함께 하고, 도민이 응원하는 전북교육의 대전환이 모두의 공감으로 더 큰 힘을 받기 바란다. ‘더불어, 미래를 여는 전북교육’에 동참하고 응원하면서 모두가 한 목표를 향해 진지하고 진솔한 뜻을 수렴해 가야 할 일이다. /송영주 군산동고 교장 △송영주 교장은 전북교육청·전주교육지원청 장학사 등으로 활동했으며, 전주시 창의인성교육지원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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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26 13:48

대통령이 풀어야 할 ‘소통 방정식’

윤석열 대통령은 참모 뒤에 숨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열린 소통을 강조했다. 거의 매일 언론과 마주하고 있다. 이전 정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상징적인 변화다. 출근길 문답이다. 하루짜리 중단 소동이 있긴 했다. 프레스센터가 대통령 집무실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국민제안’이 개설됐다. 온라인 대국민 소통 창구다. ‘102 전화 안내’도 등장했다. 윤석열의 ‘열’에서 10, ‘귀 이(耳)’에서 2를 따왔다. 국민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취지다. 소통의 뼈대는 만들어졌다. 문제는 조금씩 벌어지는 이음매에 있다. 인사가 만사라 하지 않는가. 검찰 편중 인사는 검찰 공화국이라는 비난으로 이어졌다. 부실한 검증은 잇단 장관급 낙마를 불러왔다. 급기야 사적 채용 논란까지 이슈로 떠올랐다. 대통령의 언어는 거칠다. 정제되지 않은 발언, 즉흥적 감정 표출, 특유의 직설화법이 그것이다. 어설픈 실언이 설화로 눈덩이가 됐다.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이런저런 얘기들도 한 몫을 거들고 있다. 윤 대통령의 표현처럼 대통령을 처음 해본 것이기 때문일까. 하루가 멀다시피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다. 어수선한 가운데 훌쩍 취임 두 달이 지났다. 탈권위의 신선한 파격이 생경한 걱정거리가 된 형국이다. 집권 여당 내부의 권력 싸움은 임계점을 넘었다. 볼썽사나움 그 이상이다. 성상납 의혹을 받는 대표는 징계로 떠돌이 신세가 됐다. 윤핵관과 당권 주자들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도 치열하다. 문재인 정부와의 갈등 지수는 급상승 중이다. 탈북 어민 북송 사건과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이 제대로 얽혔다. 그야말로 정치가 민생 경제를 덮어버렸다.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의 3고(高) 위기에 코로나 19는 재유행 국면에 진입했다. 모든 영역이 끓는점으로 치닫고 있다.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만이 데드크로스를 지나 ‘자유낙하’ 중이다. 대통령이 불안한 뉴스메이커가 되고 있다. 소통의 힘은 뼈대가 아닌 이음매에서 나온다. 갈라진 틈을 메우고 하드웨어가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야 한다. 빗물이 새면 아무리 좋은 벽지라도 얼룩이 생기기 마련이다. 소통의 소프트웨어는 윤 대통령이 내건 공정과 상식이다. 대통령의 ‘통(統)’은 통치를 의미한다. 일방향이다. 통(統)한다고 통(通)할 수 없다. 통(通)해야 통(統)할 수 있다. 통(通)은 쌍방향이다. 국정운영의 방점을 소통에 둬야 하는 이유다. 민주 국가에서 정치 커뮤니케이션을 구성하는 세 개의 축이 있다. 권력-언론-국민이다. 대통령의 언행, 언론의 보도 양태, 여론지지율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어느 하나라도 흔들리면 곧바로 위기 국면이 조성된다. 고작 두 달이 지났는데 레임덕에 빗댄 ‘취임덕’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 여러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감의 ‘쩍벌’이 오만한 독선으로, 불안한 ‘도리도리’가 준비 안 된 산만함으로, 힘찬 ‘어퍼컷’ 이 안하무인의 무모함으로 비쳐지지 않도록 성찰해야 한다. 수학계 최고상인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는 “수학은 어렵기 때문에 재미가 더 크다”고 말했다. 소통도 수학만큼이나 어렵다. 그러나 문제를 풀면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윤 대통령 앞에 놓인 소통 방정식에는 해법이 있다. 손에 손잡는 덧셈과 서로를 끌어안는 곱셈을 디딤돌로 활용하는 것이다. 상대를 외면하는 뺄셈과 갈라치는 나눗셈은 걸림돌일 뿐이다. /박종률 우석대 교양대학 초빙교수 △박종률 교수는 제 43대·44대 한국기자협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언론중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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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19 13:35

K-culture, 이제는 시조(時調)이다

한류 문화 열풍이 뜨겁다. K-drama, K-pop을 위시하여 음식, 옷, 일상 소품까지 우리의 문화 산물이 세계인을 열광시키고 있다. 그야말로 K-culture의 전성시대이다. 작년 이맘때 전 세계인은 <오징어 게임>에 매료되었다. 이 드라마의 제작비는 220억 원이지만, 경제적 가치는 104조원으로 추산한다고 하니, 실로 문화 콘텐츠는 국가적 위상을 결정하는 가늠자가 되기도 한다. K-culture가 세계화의 중심에 있으면서 인류 문화의 대명사로 자리할 때까지 우리에게는 어떠한 전통의 힘이 있었을까. 한류 문화 콘텐츠가 전 세계에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데에는 우리 민족의 예술적 감수성과 공감의 감성적 코드, 창의적 상상력이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문화를 숭상하고 이를 즐기며 세상을 다시 볼 줄 아는 여유와 흥이 있었다. 이제는 한국의 전통 문화가 함유하고 있는 정신과 가치에 더욱 관심을 갖고 이를 현대화하여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문학양식인 시조도 그중 한 예이다. 시조는 육당의 선언대로 ‘조선 문학의 정화(精華)이며 조선시가의 본류(本流)’이다. 3장 6구 형식으로 구성된 시조는 고려 말에 발생하여 현대에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세계 유일의 시 형식이다. 시조의 시상 전개는 ‘대상 → 관계 →의미’의 사고과정을 거친다. 즉, ‘문제적 상황 제시’, ‘매개적 연결’, ‘변증적 종합’의 사고의 틀을 거쳐 완결성을 추구한다. 이러한 미학적 특질 때문에 시조의 교육적 가치는 지대하다. 시조의 감상과 창작을 통해 ‘성찰을 통한 인성 함양’, ‘소통과 관계 형성’, ‘경험 공유와 공감’의 교육 효과가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의 시조 교육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초등학교에서 시조 교육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하고, 중고등학교에서도 고시조 감상에만 매달리고 있다. 시조는 발화의 주체와 그 대상이 명료하여 관계 지향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소통과 공감의 제재로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 문학의 생활화는 멀리 있지 않다. 어른과 아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공유제로 시조가 활용되길 바란다. 일본에서는 전통 시형식인 ‘하이쿠’를 짓고 즐기는 애호가만 10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국왕이 주관하는 신년하례행사 때마다 전국 하이쿠 경연대회를 열어 일본 문학의 세계화에 노력한다고 하니 부럽기도 하다. 우리 지역은 시조문학의 성소(聖所)이다. 시조의 현대화에 온몸을 바친 가람 선생의 정신이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시조부흥을 외친 선각들의 정신을 이어 전북이 시조 교육의 메카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이는 《시조교육관》의 건립으로부터 시작된다. 전국에 작가를 기리는 시조문학관은 많지만 교육관은 한 곳도 없다. 이 기관을 통하여 시조의 세계화 방안이나 교육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시조를 즐기며 새 세상을 꿈꾸는 이가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이들은 분명 K-culture를 선도하는 동량(棟梁)으로 성장할 것이다. “바람도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가람 선생의 시조 「별」을 노래로 불러보다 드는 생각이다. /김용재 전주교대 교수 △김용재 전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는 교수협의회장, 학생처장, 산학협력단장, 교육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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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12 13:20

연못에 수련 키우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

연못에 수련을 키우고 있다. 그 수련은 하루에 2배씩 면적을 넓혀 나간다. 만약 수련이 자라는 것을 그대로 놔두면 30일 안에 연못을 완전히 뒤덮어 연못 속의 다른 생물은 모두 질식해 사라져 버린다. 29일째에 수련이 연못의 절반을 덮었다. 연못을 모두 덮기까지 며칠이 남았을까? 이 수수께끼의 답은 “단 하루”이다. 로마클럽이 50년 전에 발간한 <성장의 한계>에 나오는 얘기다. 원제는 “성장의 한계, 인류의 위기에 관한 로마 클럽 프로젝트 보고서”이다. 반세기 전에 한 과학적 시뮬레이션은, 50년이 지난 후에 보니 추세가 거의 맞아들어가고 있다. 기후변화 등 위기가 본격화하고 있음을 이제는 누구나 동의한다. 주요 쟁점은, ‘29일째’라는 게 너무 비관적 진단이 아니냐는 것과 만일 ‘29일째’라면 인류에게 되돌릴 기회가 있느냐는 것으로 좁혀진다. 비관적인 이들은 우리에게 앞으로 10년가량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경고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의 배경은 지구온난화 대처에 실패해 역으로 얼음나라로 변한 미래의 어느 시점이다. 영화적 설정이긴 하나 그런 디스토피아가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반면 에코모더니스트로 불리는 기술낙관론자들은 과학기술로 언제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이 ‘29일째’라 하여도 한나절에 연못의 절반을 덮은 수련을 걷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판이한 사태인식 가운데서 과연 공통의 해법과 행동노선을 찾아낼 수 있을까. 쉽지 않다. 현재의 사회체제와 글로벌 거버넌스를 감안할 때 그것을 찾아내는 시점엔 사태가 돌이킬 수 없게 돼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마냥 넋 놓고 있을 수 없다면, 소극적이지만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만일 요즘 전세계적으로 뜨거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ESG(환경·사회·거버넌스)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내어놓으면 많이 부족해 보일까. 그렇긴 하다. 작금의 엄중한 상황에 비해 ESG라는 방법론이 너무 유약해 보이고,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라는 데에 동의한다. 다만 더 강력하고 확실한 방법론이 없지는 않겠으나 구호를 외치는 것과 현실을 바꾸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ESG자본주의로 지속가능한 미래를 모색한다는 이런 발상은, 인류가 만들어놓은 지금 체제에서 그나마 수용될 수 있는 생각일 것이기에 해보자고 주장하게 된다. 비관론과 낙관론 중 누가 맞는지를 판단하기 어려운 까닭은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인데, 유의할 것은 변수 중엔 의지라는 핵심 변수가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ESG라는 방법론이 더 나은 미래를 열어줄지가 확실하지 않지만, 인류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전세계적으로, 이심전심으로 합의한 게 ESG인 만큼 그 길을 가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어 보인다. ESG가 지금으로선 인류의 의지인 셈이다. 이때 ESG는 할 수 있는 최대가 아니라 최소라는 점이 꼭 기억돼야 한다. 사람의 웃는 얼굴과 비슷해 ‘웃는 돌고래’로 불리는 희귀종 민물 돌고래 이라와디 돌고래가 지난 2월 멸종했다는 소식이 외신을 통해 전해졌다. 몸길이 2.6m에 몸무게 110kg이 나가는 수컷 돌고래는 25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앞으로 더 비극적인 소식을 더 많이 접하게 되겠지만, 수백년 축적된 오류를 1~2년에 바로잡을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각자가 더 나은 사람, 모든 조직이 더 나은 조직이 되어 가는 원론밖에는 다른 해법이 없다. 언행일치하는지 모르겠으나 구글의 모토는 “올바른 일을 하라(Do the right thing)”이다. /안치용 ESG연구소장 △안치용 ESG연구소장은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이며, 경향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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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05 14:36

다시 돌아보는 일상용어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란 구절이 담긴 1863년 11월 펜실베니아주 북군 전사자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행한 2분여의 짧은 ‘게티즈버그 연설’은 링컨대통령의 작품이다. 말이나 연설은 시간과 공간적 배경과의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누가 어디에서 누구를 상대로 했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즉 말을 한 사람의 ‘힘’과 그 연설을 들은 청중들의 분위기와 수준이 명언 또는 명연설로 판가름이 되기 때문이다. 키보드를 몇 번만 두드리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자막이나 영상으로 볼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다. 그러다보니 독서 인구가 너무 많이 줄어들었다. 책을 읽는다는 건 지식을 쌓아가고 정보를 얻어가며, 생각하는 훈련과 사유하는 시간에서 더 나은 인간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겪는 것이리라. 그런 일환으로 일상에서 사용하는 ⌜황소, 도루묵, 인절미, 당신, 자기⌟등의 어원을 알아본다. 언어학적 연구나 사실에 기반 하지 않고 어형과 의미의 우연한 유사성에 근거해서 유래를 찾는데 그것을 민간어원이라 한다. ‘황소’는 누런 소가 아니라, 큰 소를 가리키는 말로 15세기의 ‘한쇼’로 한쇼는 ‘크다’를 뜻하는 ‘하’의 관형사형 ‘한’과 ‘소’가 결합된 단어로 ‘한’은 한길, 한밭, 한울님(하느님), 한글의 뜻과 같다. 언제부턴가 ‘한’을 한자 황(黃)을 써서 황우(黃牛)로 해석해서 황소라고 하면 누런 소를 먼저 떠오르게 한다. ‘도루묵’은 여러 설이 있으나, 여기서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함경도 피난길에 올라 고초를 겪는 상황에서 목(木)이라는 물고기가 수라상에 올라 허기진 배를 채웠다. 고마움에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전쟁이 끝나고 궁으로 돌아온 후, 그 은어가 다시 수라상에 올랐는데, 예전의 맛이 아니어서 은어라는 이름을 삭탈하고 다시 옛 이름 ’목‘이라 부르라고 했다. 이때부터 도로목(도루묵)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기대를 잔뜩 끌어올린 상황이 헛수고가 되었을 때 “말짱 도루묵”이라 한 것과 연결이 된다. 한편 도로묵을 한자어로 쓰면 환목어(還木魚) 다시 목어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인절미’의 유래는 조선 16대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서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켰는데, 인조가 지금의 공주(公州) 공산성으로 피난을 했을 때, 임씨 성을 가진 백성이 찹쌀로 떡을 만들어 진상을 했다. 맛있게 먹은 왕이 떡 이름을 물었는데 이름이 없다고 하자, 임씨가 만든 매우 맛있는 떡이라 해서 임절미(任+ 絶味)라 했다 한다. 뒷날 음의 변화로 임절미에서 ’인절미‘로 불리고 있다.’당신과 자기‘의 용어다. ‘당신’이 이인칭 대명사로 쓰일 때 잘 못하면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당신’은 부부간에 호칭으로 쓰이거나, 싸울 때 상대를 낮춰 부를 때 ‘당신이 뭔데 나서는 거야?’라고 쓰이면서 상대의 감정을 건드릴 수도 있다. ’어머님 생전에 당신께서‘로 쓰일 때는 삼인칭대명사다. 최근에 자주 쓰이는 ’자기‘라는 단어는 당신, 그대, 자네 등의 이인칭대명사들이 쓰이는 자리에 쓰이고 있다. 그러나 연인들끼리 주로 쓰기에 때와 장소, 분위기를 잘 맞춰 사용해야 오해가 없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이외에도 많으리라. 요즘은 원칙 없이 줄여 쓰는 말로 인해 세대 간의 대화가 황당하게 불통되는 기류가 이뤄지고 있는 미묘한 사회풍조다. /김형중 에세이스트·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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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28 13:42

실업팀 창단붐 일어 전북체육 제2의 르네상스 기대

지난 6월 1일 끝난 지방 선거 시기에 덩달아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도내 언론사에서 발표되는 여론조사 추이를 매일 점검하며 후보들을 찾아다녔다. 바로 지자체 실업팀 창단과 운영 관련 사업 때문이었다. 후보들과 대부분 선거사무소에서 미팅이 이뤄졌지만 초를 다투는 후보들이 현장에서 만남을 요구하면 군말 없이 현장 출동을 감행했다. 논두렁에서부터 동네 어귀 마을회관까지 만나기 원하는 장소는 상관없었다. 14개 시군을 하루 300~400km 거리를 돌며 강행군을 지속했다. 시장 군수 캠프만 찾은 것이 아니라 도 예산을 심의하는 일부 도의원 후보들의 방문도 빼놓지 않았다. 지자체 실업팀 창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라면 지옥의 불속이라도 뛰어 들어가야 할 처지였다. 예전 전북은 체육 분야가 유독 강했다. 70년대에 전성기였고 90년대 초반까지 전국 16개 시도 중 상위권의 종합순위를 유지했었다. 1974년 서울에서 열린 제55회 전국체전에서는 당시 최강 서울 선수단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해 도민들의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현재 전북 체육은 초라하다. 가장 최근 마지막으로 참가한 제100회 서울 전국체전에서 11위에 그쳤다. 전국체전의 종합순위는 그 해당 광역단체의 자존심이자 지표다. 올림픽에서 각 국가가 상위권 종합순위에 목을 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실 전북은 현실적으로 아무리 용을 써도 8위 이상의 성적을 거둘 수가 없는 구조다. 실업팀이 없어서 출전조차 못하는 형국이다. 하키의 메카인 김제시의 경우 김제여중, 김제중, 김제여고, 김제고에서 하키팀을 육성하고 있지만 경기를 출전할 엔트리가 부족할 정도로 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키를 하려는 꿈나무 선수들과 학부형들이 외면하는 이유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 때문이다. 도내에서 하키 실업팀을 창단하고 육성할 곳은 사실상 김제시청이 유일하다. 하지만 김제시는 예산을 이유로 난색을 표한지 오래다. 김제시청에서는 여자 태권도팀이 소수의 선수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기간 몇 차례 김제시에 여자 태권도팀을 존속하면서 직간접으로 하키 실업팀 창단을 유도하고 설득했지만 항상 돌아오는 반응은 늘 차가웠다. 하지만 최근 반전 분위기가 벌어지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김제시장으로 당선된 정성주 당선인을 여론조사 1위 후보에 약간 뒤쳐질 때 선거 캠프에 찾았다. 다부진 체격에 똑소리 나는 추진력의 정치인이다. 3선 시의원에 시의장 출신이다. 당시 정 후보에게 실업팀 창단의 필요성에 설명하자 그 자리에서 동의했고 본인의 시의원 시절에 항상 염두에 뒀던 사업이라고 되려 방문자들을 격려했다. 김제시에 이어 전주시 우범기 시장 당선자도 남자 배드민턴 창단을 선거기간 약속했고 순창군 최영일 당선자도 지역 학교 운동부가 있는 역도와 소프트테니스부 실업팀 창단을 공약집에 넣었다. 권익현 부안군수도 현재 운영중인 기존 요트부에 바둑을 추가 창단하겠다고 공언했고, 전춘성 진안군수도 테니스부 창단을 약속했다. 도의원 출신이어서 도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이학수 정읍시 당선자도 정읍중과 정읍고에서 육성하고 있는 검도와 핸드볼 전통의 강호 정일여중과 정읍여고의 핸드볼부 출신들의 타 시도 유출을 걱정하며 검도부와 여자 핸드볼부 창단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인라인 스케이팅과 복싱의 고장 남원은 최경식 당선인이 당선후 실업팀 창단을 적극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장수군수 최훈식 당선인에게는 승마부 창단을 설명해 긍정적 답변을 받았고 완주군수 유희태 군수 당선인은 완주 소양에 있는 전북체고 근대5종 선수들의 타 시도 유출을 공감하며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취임후 근대5종 창단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번 지방선거를 기폭점으로 지자체 실업팀 창단붐이 일어 전북체육 제2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기를 기원한다. /정강선 전북도체육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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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21 13:44

촉법소년 사건의 심각성과 법적 관용의 한계

형벌 법령에 저촉되는 행위를 한 만 10세 이상 14세 미만 소년을 말하는 촉법소년은 형사미성년자라고 하여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상 처벌받지 않는다. 이러한 촉법소년은 형벌 대신 「소년법」에 따라 보호처분을 받는다. 보호처분이란 법원 소년부 판사가 소년보호사건을 심리한 결과 소년의 환경개선을 위해 국가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내리는 처분이다. 보호처분 중 가장 강력한 처벌은 2년 이내의 장기 소년원 송치인데 형벌과 달리 전과 등의 기록이 남지 않아 소년의 장래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소년법」 제32조 제6항에서는 ‘소년의 보호처분은 그 소년의 장래 신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아니한다.’라고 정하고 있다. 촉법소년보다 어린 만 10세 미만의 어린이는 형사책임에서 완전히 제외돼 보호처분 대상도 되지 않는다. 처벌보다는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소년법의 취지에 따라 만들어진 조항이지만 최근 형사미성년자임을 무기 삼아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어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A군은 경기도 광명시의 한 학원 여자 화장실에 몰래 따라 들어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B양을 불법 촬영했다가 적발돼 교내봉사 3시간 처분을 받았다. 사건 당일 학원 CCTV에는 모자를 뒤집어쓴 채 여자 화장실 앞을 서성이다 B양이 화장실로 들어가자 주변을 살피고 뒤따라 들어가는 A군의 모습이 담겼다. 학교폭력 대책위원회에서 A군에게 내린 처분은 교내봉사 3시간으로, 학폭위는 초범이란 점을 고려해 이 같은 처분을 내렸다. 또 승합차를 훔쳐 무면허 운전을 해 특수절도 등 혐의로 조사를 받은 14세 미만의 중학생들에 대한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과거에도 40여 차례 비슷한 범행을 저지른 적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촉법소년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풀려났으며, 만 14세를 넘어선 뒤에야 검거된 사례도 있었다. 이런 법의 관대함을 악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계속 늘어나면서 기준 나이를 조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으며,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서 「소년법」 개정 청원에 약 40만 명 이상의 국민이 참여한 것을 고려한다면 개정의 필요성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를 반영한 의원입법으로 형사미성년자 기준을 낮추자는 소년법 및 형법 개정안이 제안된 상태다. 이처럼 촉법소년 기준을 변경함으로써 실제 '처벌'의 목적보다는 '전과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범죄를 억제하는 예방 효과를 꾀하자는 것이다. 촉법소년의 법적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는 것은 10대 범죄가 갈수록 잔혹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술지 ‘교정 담론’에 따르면 소년원에 신규 입원한 사람 가운데 촉법소년의 비율은 2014년 1.1%에서 2020년 3.1%로 3배 가까이 뛰었다. 소년원 입원이 정도가 가장 심한 처분임을 생각하면 흉악 범죄를 저지르는 10대들의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는 의미다. 그와 반대로 소년범에 대한 형사처벌이 과연 장기적으로 봤을 때 범죄감소의 수단으로의 실효성을 갖췄다고 장담할 수는 없고, 오히려 보호처분 등으로 충분히 교화될 수 있는 청소년을 처벌한다면 미리 낙인을 찍는 것은 아니냐는 반대 의견도 있다. 물론 반대 의견처럼 처벌만이 유리한 해결책은 아니다. 처벌보다 교화에 중심을 맞추는 현 촉법소년 제도의 취지는 기본적으로 반대 의견에 기반한 것이며, 원칙적으로 유지할 수밖에 없는 원칙이다. 하지만 강력범죄, 즉 살인, 강도 범죄 등을 저지른 촉법소년들에게 나이가 면죄부가 된다면 이것에 대해서는 분명 문제가 있다. 과거에 비해 청소년의 정신적·육체적 성장이 빨라져, 소년범죄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어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연령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고, 범죄의 양상도 잔혹해지고 있어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SNS에 영웅심리를 가지고 자신의 범죄 행위를 올리기도 하고, 그로 인해 모방범죄도 일어나고 있다. 이에 발맞춰 적당한 대안을 찾아 개선해야 할 것이다. /홍요셉 전북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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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14 16:10

술 술 술

아버지를 찾는다는 핑계로 날마다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생판 모르는 아저씨들한테 술을 얻어먹고 취하는 고아원 아이. 최인호의 단편소설 <술꾼>의 주인공이다. ‘술꾼’은 ‘술’에 ‘꾼’을 붙인 말로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주량 또한 만만치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진정한 술꾼은 주종(酒種)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모름지기 술꾼은 술시가 되면 술이 고플 줄 알아야 한다. 계절 따라 조금 다르지만 ‘술[酒]시’이기도 한 술시(戌時)는 저녁 7시부터 9시까지다. 그런데 한자어 ‘술(戌)’은 ‘개(犬)’하고 뜻이 크게 다르지 않다. ‘술 취한 개’도 거기서 나온 말일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찰떡궁합이 따로 없다. 어설픈 흉내의 뜻을 가진 말로 ‘풋’이 있다. ‘풋마늘’이나 ‘풋사랑’의 그 ‘풋’이다. 잔 것 같지 않은 잠도 ‘풋잠’이다. 누군들 양손에 술병을 움켜쥐고 태어났으랴. 다들 처음에는 남들 따라서 어설프게 마시기 시작했으니, 그 또한 ‘풋술’이다. 풋술의 대부분은 맛도 제대로 모르면서 따라주는 대로 들이붓는다. 그걸 ‘뻘술’이라고도 부른다. 평소에는 입에 대지도 않던 술을 어떤 일로 ‘회가 동해서’ 갑자기 퍼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한바탕 소나기처럼 퍼마신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소나기술’이다. 술에는 장사 없다고 했다. 소나기술에 엉망으로 취한 이는 제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해 곱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 일쑤다. 아, ‘홧술’도 있다. ‘홧병’을 다스리려고 마시는 술이다. 이 또한 뒤끝이 좋기 어렵다. 술이 나를 마시기 때문이다. 홧술이나 소나기술을 마시고 나면 ‘술망나니’ 소리나 듣기 십상이다. 크고 작은 사고를 치기 일쑤다. 끊어진 필름은 무슨 수로 이어붙일 수 있을까. 술을 ‘도깨비 뜨물’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으리. 논에 물을 대려면 삽이나 괭이로 물꼬를 터주어야 한다. 술도 물이다. 그래서 술이 들어가는 목을 ‘술꼬’라고 한다. 술을 잘 못하던 사람이 주량이 크게 늘어서 술을 잘 마시게 된 것을 두고 옛날에는 ‘술꼬가 터졌다’고 했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앞서 언급한 술꾼들 아니고 무엇이랴. ‘타오르는 물’이 술이다. 술시부터 자시(子時) 끝까지 퍼마신 술은 다음날 아침에도 코나 입을 통해 알코올 기운을 활활 풍겨낸다. ‘소줏불’이다. 빈속에 안주 없이 마시는 술을 최고로 치는 술꾼들이 적지 않다. 그걸 ‘강술’이라고 한다. ‘깡소주’를 마신다고 하지만 그건 군대식 용어를 빌려다 악으로 깡으로 마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프로기사가 되면 초단을 받는다. 다른 이름으로는 ‘수졸(守拙)’이다. 졸렬하나마 스스로는 지켜낼 줄 안다는 뜻이다. 바둑의 최고 단수는 9단이다. 그걸 ‘입신(入神)이라고 한다. 신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술도 바둑의 입신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지가 있다. ‘열반주(涅槃酒)’다. 한평생 술과 더불어 살다가 결국 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야말로 ‘술독에 빠져 죽는’ 경지 아니고 무엇일까. 풋술이든 뻘술이든 상관없다. 가끔 퍼마시는 소나기술이 대수랴. 굳이 술꾼 아니라도 살다 보면 때로는 홧술도 필요하리. 출근해서까지 소줏불 좀 풀풀 날린다고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가끔 깡소주 퍼마신다고 누가 잡아갈 턱 있을까. 그래도 딱 하나, 열반주만은 멀리할 일이다. 입원실 병상에 며칠간 누워 지내면서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다. /송준호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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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07 15:53

인간은 욕망의 화신일까

문학인들로부터 계절의 여왕이라 칭송을 받는 짙푸른 오월에 들어 유행성 질병으로 인해 무너져가던 생활패턴이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지구촌 사람들은 수억만 년을 유전(流轉)할 이 땅위에서 우연이나마 한 시대를 함께 호흡하는 대단한 인연을 맺고 있다. 현대를 가리켜 어떤 사람은 탈진실의 시대라 한다. 사실여부를 확인하려는 수고도 없이 일부 극성분자들이 주장하는 이야기가 뉴스가 되는 세상, 그럴듯한 가짜뉴스가 세상을 혼란으로 몰아가고 진실은 힘의 논리에 묻혀버리는 혼돈의 시대다. 아무리 숭고하고 아름다운 가치라 할지라도 행동의 실천을 통해 구현되지 않으면 그 가치는 생명력이 떨어진다. 성선설이나 성악설 같은 인류의 오랜 논쟁으로 인간의 양극을 달리는 이중성 앞에서 종종 길을 잃고 마는 소모적인 갈등으로 인생관을 허비하지는 말고 살아가자. 1970년대 캄보디아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200만여 명을 학살한 폴 포트는 이웃들에게는 매우 친절한 프랑스역사담당 교사였다. 이처럼 인간의 모순적 본성은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 정신을 가다듬기 어려운 혼탁한 시대다. 원로가수 나훈아가 콘서트에서 ‘테스(소크라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라며 자조하는 노래를 하자, 열성팬 일부는 세상이 종말을 맞은 것처럼 우울해 했다고 한다. 인간은 분별력이 있는 현명한 피조물이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서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의식한다면 태양이 새벽을 몰고 오듯 지금처럼 어두운 삶의 시간을 분명히 밀어낼 것이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들은 눈만 뜨면 다퉈야하는 사회적 갈등해소를 위한 방정식은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높고 많고 넓은 것만을 우성(優性)으로 보는 일반인들의 관념은 돈이 권력이고 행복의 전부가 되어버린 사회구조다. 먹잇감만 보면 사투를 벌이는 동물들의 세계와 다를 바 없는 비겁(卑怯)한 세상이다. 행복이나 권력은 경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얻어진다. 그러나 그 뒤끝은 비극을 불러온다. 그러기에 과욕을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과 억제하고 조절하는 절제력으로 자기를 지켜내야만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극한상황에서도 이성으로 인내하면서 질서를 지키는 사람은 그가 바보여서가 아니라, 법제화된 사회규범과 자신의 인격을 지키려는 절제된 행위일 것이다. 네 잎 클로버를 행운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은 세계인들의 공통감정인 것처럼, 행운이나 행복의 문을 두드리며 무지개빛 인생을 그리는 인간의 심리적 본능은 누구나의 공통분모다. 한 번의 서운함에 오해하고 실망하여 토라지는 못난 감정을 지닌 사람보다는 함께한 좋은 기억을 살려내는 따뜻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로 변모하는 모습이 그립다. 누구의 인생이든 일회성의 삶이다. 행복과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 애쓰다가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는 깊은 구릉이 기다리고 있다. 생각처럼 단순하지는 않겠지만 조급증, 집착, 과욕, 스트레스, 의심, 갈등 같은 불행을 부르는 수많은 요소를 미련 없이 버리는 내공도 길러내야 한다. 이런 잡다한 것들이 우리들의 정신을 밤낮으로 짓누르고 있기에 불행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들 모두가 꿈꾸는 행복은 집착하지 않는 데서 찾아든다고 했다. 이런 상황들을 시나브로 감지하면서 인생은 환상과 때로는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달래가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김형중 군산대 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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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24 13:38

체육인들과 도민이 차기 교육감에게 거는 기대

지난 4월 한 달여 동안 전북 14개 시·군 체육회 소속 종목단체장들과 전라북도체육회 산하 72개 종목단체장들, 원로 체육인 등을 대상으로 마련한 정책 간담회는 반응이 매우 뜨거웠다. 최근 언론에서 전북도교육감 선거의 관심도가 시들하다며 흥행이 저조하다는 보도와는 정반대였다. 차기 교육감이 과연 누가 될 것인가는 체육인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정책 간담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한마디로 불신과 희망을 동시에 토로하는 흥미로운 대화의 장이었다. 3선을 이어온 김승환 현 교육감에 대한 피로도와 함께 지난 12년간의 학교체육 정책에 대한 불만의 볼멘소리가 어김없이 터져 나왔다. 반면 전북 교육을 이끌어갈 새로운 교육계 수장 선출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했다. 도내 체육인들은 도 교육청에서 진행하는 학교 체육 행정에 차기 교육감이 메스를 대고 과감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학교 체육의 근간인 도내 초·중·고에서 엘리트 선수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이로 인한 팀 해체가 도미노처럼 속출하고 있다. 그런데도 전북도교육청은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간담회 참석자들이 주장하는 주요 골자였다. 인기 종목인 축구와 야구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종목에서 침체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전처럼 어린 꿈나무 선수들이 전북 체육을 이끌어가고 나아가 대한민국 체육을 선도해야 하는데 꿈나무 발굴과 육성은커녕 씨가 마르고 있는 실정이다. 특단의 행정이 나오지 않고서는 더 이상 전북 엘리트 체육의 희망과 변화의 바람은 메아리로 돌아올 공산이 크다. 전라북도와 전북체육회 등 체육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이 있지만 학교체육의 중장기적인 설계의 주인공은 그래도 전북교육청이 우선이다. 그래서 체육인들 사이에서는 이번 전라북도 교육감의 선출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전북체육회장 자격으로 우리 도내 체육인들에게 학교체육에 대한 많은 건의 사항과 요구의 목소리를 들었다. 먼저 차기 교육감에게 체육 특기교사를 매년 3∼5명 정도를 임용해 달라는 입장이 단연 으뜸이었다. 전북체육 발전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고 노력한 도내 출신 우수 선수 및 지도자들의 자긍심 고취와 사기진작 차원에서 체육 특기교사를 모집 인원의 20% 정도를 선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북체육을 선도한 이들 선수와 지도자들의 타 시도 유출이 지속되고 있는 냉담한 현실을 토로한 것이다. 차기 교육감의 결단으로 현실이 된다면 체육계는 쌍수를 들고 이를 환영할 것이다. 현재 체육 교사들을 가리켜 문무(文武)를 갖춘 교육자라고 칭한다. 문과 무가 균형 잡힌 체육 교사의 등용이 필요하다. 실기에 능한 엘리트 선수 출신 체육교사들은 이제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건강한 육체에서 건전한 정신이 나오는 법이다. 예전 같이 적극적인 학교 운동부 부활 추진도 차기 교육감이 풀어야할 숙제다. 우리 전북지역에 초중고가 768개 학교(초 425, 중210, 고133) 운영 중인데 전체 학생 192,791명 대비 겨우 2,945명이 운동선수로 등록되어 있어 전체 대비 1.5%에 불과한 수준이다. 엘리트 꿈나무 선수 감소에 따른 전북체육이 고사 위기 직전임을 보여주는 수치다. 이런 이유로 도내 모든 학교에서 1학교 1종목 육성을 새로운 차기 교육감에게 바라고 있다. 학교장들에게 재량권을 위임한다며 그 책임을 회피할 것이 아니고 차기 교육감은 자신이 책임을 지고 이를 반드시 적극 실행해야 한다. 노련한 관록과 젊은 패기로 상징되는 차기 교육감 후보들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강선 전북도체육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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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17 14:09

‘불통’ 교육감이 아닌 ‘소통’ 교육감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자녀가 유·초·중·고에 재학 중일 때는 교육행정에 관심을 두지만, 이후에는 무관심해진다. 그 무관심에 교육감 선거도 포함이 된다. 교육감은 선출직 중 유일하게 정당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전문성, 자주성 보장을 명시한 헌법 제31조 4항에 따라 국가 권력을 비롯한 특정 세력에 영향받지 않고 본연의 전문성을 발휘하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정당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이 교육감 선거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는 것도 사실이어서 상당수 유권자가 자신의 지역에서 누가 교육감 후보로 나섰는지를 알지 못한다. 심지어 지방선거에서 교육감을 뽑는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이도 적지 않다. 교육감 선거가 ‘깜깜이 선거’ ‘묻지 마 선거‘라 불리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교육감 선거에 대한 무관심이 오로지 제도적 문제나 유권자의 탓인 걸까? 분명 그렇지 않다. 흔히 교육을 국가의 백년지대계라고 한다. 교육은,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를 기르는 현세대의 책무이기에 눈앞의 이익이 아닌, 백 년 앞을 내다보고 계획해야 한다는 뜻이다. 교육감은 바로 국가백년지대계를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이므로 교육감 후보의 자질에 대한 검증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검증이라는 미명 아래 상대에 대한 인신공격과 근거 없는 비방을 일삼는다면, 이는 선거의 격을 떨어뜨림은 물론 선거에 대한 무관심을 일으키게 된다. 자신의 장점이나 정책을 제시하기보다 상대의 부정적 요소와 의혹을 강조하는 네거티브 선거는 공격하는 측과 공격당하는 측을 떠나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심한 피로감과 실망감을 안기기 때문이다. 교육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후보들의 자질과 도덕성 또한 당연히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상대를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후보보다 자신의 비전과 정책, 소신을 이야기하는 후보를 만나고 싶다. 유권자 앞에 자신의 전문성을 입증할 정책과 공약을 내놓고 떳떳이 겨루는 후보를 보고 싶다. 그러니 상대에 대한 ’아니면 말고‘ 식의 근거 없는 의혹과 비방을 일삼지 말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 학생을 위해, 교육을 위해 무엇을 할지 논의하길 바란다. 얼마 전 전교조 전북지부는 “김승환 교육감의 12년 임기는 혁신학교, 작은 학교 살리기 등 긍정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불통’이라는 별명이 상징하듯 소통 측면에서 부족함을 보였다”며 현재의 교육감과 그 관료 체제에서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겠다는 판단”이라고 밝혔다. 이어 “앞으로 당선될 새 교육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소통’이어야 한다.”라면서 “다른 시도 교육청에서 하는 ‘분기별 지부장-교육감 간담회’, ‘교육감과 조합원과의 대화’를 전북에서도 시행하도록 교육감 후보들에게 요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육감은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사람이다. 불통은 좋은 환경과 최선의 정책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교육에 몸담은 교육자들과 그의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과 소통하고, 새로 거듭날 각오로 절차탁마하여 전라북도 교육을 앞선 교육으로 이끌 수 있는 교육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권자들은 같은 선출직이라도 미래세대의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감에게는 한층 높은 도덕성을 기대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교육감을 선택하는 선거 역시 더 공정하고 깨끗하게 치러지기를 바란다. 비전과 정책은 보이지 않고 흑색선전과 낯 뜨거운 인신공격이 난무한다면 자라나는 세대가 무엇을 보고 배우겠는가, 더욱이 이번 선거는 만 18세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첫 지방선거이다. 모쪼록 교육감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학생들 앞에, 유권자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선거를 치러 주기를 당부한다. /홍요셉 전북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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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1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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