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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있는 교실

신학기 때 대학 강의실에서 가장 답답했던게 학생들 질문이 없는 거였다. 말이 되는가? 교실에 질문이 없다니. 왜 질문을 하지 않을까? 대략 세 가지 원인이 작동하지 싶다. 첫째,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고교시절 토의, 토론을 즐기는 친구들 모임이 있었다. 대부분의 친구들과 나는 다투어 말을 하는 쪽이고, 친구 A는 주로 듣는 쪽인데 가끔 질문을 했다. "그게 뭐야? 그건 왜?" 우린 그 질문을 무시하면서 살짝 넘어가곤 했는데, 사실 A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바늘에 콕 찔린 기분이었다. 친구의 질문을 받고서야 나는 내가 잘 모른다는걸 알게 되었다. 모르는 걸 난 왜 아는 척 넘어갔을까, 질문하지 않았을까? 친구의 어떤 질문은 내 가슴에 새겨져 오랜 세월 되새기곤 했다. 난 A를 친구이자 스승으로 여겼다. 다른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나 보다. 친구들이 A를 말할 때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는데 '존경하는 친구'라는 것이었다. 말 잘하는, 많이 아는 친구가 아니라 질문하는 친구가 존경을 받았다. 아, 일찍이 공자 선생이 말했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질문을 가로막는 둘째 원인! 자신의 질문이 시시해서 비웃음을 살까봐... 그렇다. 시시한 질문, 피상적인 질문이 있고, 깊이있는, 지혜로운, 깨달음을 주는 질문이 있다. 좋은 질문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운동선수가 훈련을 통해 근육을 기르고 기술을 연마하듯 좋은 질문을 하려면 질문하는 근육을 길러야 한다. 깊이 있는 질문은 시시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자기를 드러내는 용기를 내야 한다. 시시하게 시작할지라도 질문하는 사람은 빨리 성장한다. 질문이 없으면 성장도 더디다. 내가 아는 한 시, 소설, 음악, 방송 모든 분야에서 고수가 된 사람은 모두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제일 나쁜 장애물은 질문을 싫어하는 분위기다. 질문을 '진도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여기거나 심지어 '무례한 도발'로 여기는 풍토가 있다. 질문을 억압하던 군사독재 시대의 유물이 21세기에도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다. 위대한 스승 공자는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공자가 늘 묘당에 들어가 질문을 하자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말했다. “누가 공자보고 예를 안다고 했나? 매사에 묻기만 하는데.” 공자가 말한다. “그렇게 '묻는' 것이 예(禮)이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통해 정확한 앎에 도달하도록 도왔다. 질문은 학생만이 아니라 교사가 해야 한다. 질문이 학생을 앎에 이르게 한다. 천재 물리학자 리차드 파인만은 말한다. “질문이 없는 '답'을 갖기보다 차라리 답이 없는 '질문'을 갖고 싶다.” 교실에서 교사의 정체성은 '질문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새학기, 질문이 풍성한 교실이 되면 좋겠다. 질문이 있는 교실, 교사가 이끌어야 한다. /한긍수 전북도교육청 정책공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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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14 17:45

검찰정권과 언론, 그리고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진시황제가 죽자 환관 조고가 권력을 좌지우지하며 권세를 과시하는 과정에서 나온 고사성어이다. 권세를 부리며 진실을 농락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얼마나 권세가 무서웠으면 사슴을 사슴이라 못하고 말이라고 해야 했을까. 이번 정권 들어 대통령을 위시한 통치 권력과 언론의 갈등이 자주 불거지고 있다. 그럴 때 마다 대통령과 그 주변 권력의 대응은 날카롭고 위협적이다. 비속어 보도 관련 MBC에 대한 외교부 소송, 법무부 장관 명예훼손 이유로 KBS 기자 불구속 기소,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 공개한 시민언론 민들레 압수수색, 장관 자택방문 취재한 시민언론 더탐사에 대한 압수수색과 기자 구속영장 청구, 역술인의 대통령 관저 개입 의혹 보도 한 뉴스토마토와 한국일보 기자에 대한 형사 고발 등.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진위를 따지며 대응하기 보다는 감사, 고소고발, 압수수색, 구속영장 청구와 같은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검찰정권의 면모를 언론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몇 가지 효과들이 나타난다. 첫째는 의혹이나 잘못에 대한 사실 관계 이슈가 특정 언론사의 문제로 전환된다. 이슈가 바뀌는 것이다. ‘바이든/날리면’과 비속어 사용 문제로 불거진 MBC 압박이 대표적이다. 전용기 탑승 배제, 감사원의 방송문화진흥회(MBC 대주주) 조사, 외교부의 소송이 이어졌다. 여기에 정부여당이 사장퇴진 요구, 광고배제 종용, 편파언론 낙인찍기 등으로 가세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된 애초의 이슈는 이미 저만치 지나가 있다. 둘째는 언론의 위축 효과이다. 다수의 언론사가 동일 이슈를 다루었건만, ‘최초 보도’를 빌미삼아 특정 언론사만을 겨냥한다. MBC에 대한 압박이 그러했고, 뉴스토마토와 한국일보 기자에 대한 형사고발 역시 같은 방식이다. 속칭 ‘한 놈만 팬다’는 식의 대응이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할 말 못하는 언론은 없겠지만, 자기 검열과 같은 위축 현상이 나타난다. 셋째는 전략적 봉쇄 효과이다. 고소고발, 압수수색, 구속과 같은 법적 행정이 진행되면 심리적 경제적 부담과 비용이 수반된다. 구속이나 기소가 되면 순식간에 일상이 파괴되고, 해당 언론사와 언론인에 대한 낙인효과까지 일어난다. 특히나 소규모 언론사의 경우에는 향후 언론사 운영과 취재 활동에 막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언론 활동 자체가 봉쇄되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언론윤리의 문제로 접근하면 될 사안들마저 압수수색, 구속영장 청구로 대응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효과들은 권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흐뭇할 수 있겠지만, 언론자유 및 민주주의의 측면에서는 매우 위험스럽고 불행한 일이다. ‘자유’를 강조하는 대통령이 이러한 비판들에 귀 기울여야 하건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하다.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어떤 고통이 따르는지 보여주어야 한다”며 언론 대응을 주문한 대통령의 발언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옥죄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줄 세우기, 길들이기가 현 검찰정권의 언론관이다. 그렇다면 언론 역시 고민해야 한다. 감시견이 될 것인지, 애완견이 될 것인지. 사슴을 보고 사슴이라 말 못하는 ‘지록위마’의 사태까지 가지 않아야 한다. 시민사회가 눈 부릅뜨고 지켜보며, 함께 할 일이기도 하다. /김은규 우석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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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07 15:47

사회적 고립

70여 년 전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은 두 동료와 함께 『고독한 군중: 미국인의 성격 변동 연구』(1950)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대중사회에서 개인은 타인에 둘러싸여 살아가면서도,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외로움을 느낀다고 분석했다. 현대사회의 개인은, 타인에게 격리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내면적 고립감으로 번민한다는 것이다. 고독 또는 외로움은 단지 ‘혼자 있는 상태’가 아니라 ‘개인 내면의 주관적 감정’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개인은 주위에 아무리 사람이 많이 있어도 정서적 교류가 없으면 외로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리스먼은 현대인의 외로움은 ‘사회적 고립’, 즉 타인과의 연결이 단절된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명쾌하게 밝혔다. 미국의 사회신경과학자 존 카시오포는 외로움을, 사회집단에 속하지 않으면 생존에 위협을 느꼈던 수렵채취인 시절 인류의 삶의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한 ‘마음의 진화’의 결과로 설명한다. 개인이 홀로 남았을 때 두렵고 초조한 마음이 들어야 사회집단을 찾는 데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카시오포는 『외로움: 인간 본성과 사회적 연결의 욕구』(2008)에서 현대사회가 ‘외로운 개인’을 더 깊은 수렁에 빠뜨리는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강조한다. 외로운 개인은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기보다는, ‘거절’을 당할 염려가 없는 인터넷이나 TV 또는 반려동물에서 대안을 찾는다. 그러다 보니 외로운 개인이, 정서적 교류를 동반하는 사회적 관계를 맺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는 『외로운 세기: 찢긴 세계에서 인간적 연결을 복원하는 방법』(2020)에서 초연결 세계에서 고립된 현대인을 분석하였다. 그는 한국의 ‘먹방’(먹는 방송)을 외로움 때문에 번창하는 채널이라 소개했다. 사람들은 혼자 저녁을 먹을 때 가장 외로워하는데, 그것을 상품화한 것이다. 렌터카뿐 아니라 ‘렌터 친구’ 사업도 유망 업종이 되고 있다고 알려준다. 또한, 그는 인터넷을 통한 연결이 허상일 수 있음을 강조한다. 개인은 스마트폰을 통해 타인과 피상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정서적 교류는 사실상 차단되어 있다. 개인이 SNS 게시물을 읽고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다는 등 ‘얕은 대화’를 오래 해도 충족감이 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개인의 소통 능력을 퇴화시켜, 외로움을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사회적 고립은 개인뿐 아니라 정치·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SNS는 인공지능이 추천하는 알고리즘 탓에 이용자의 확증편향을 계속 증폭시킨다. 즉, 사회적 고립은 개인 간 소통 단절, 시민성 수준 저하, 정치적 양극화를 추동한다. 또한 그것은 사회의 신뢰 수준에 영향을 미쳐, 경제의 혁신성을 떨어뜨린다. 사회적 고립은 다른 나라의 일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가족·친구·이웃 등으로 통칭하는 ‘공동체’가 해체되었거나 그 성격이 크게 변모하였다. 2021년 기준 한국 전체 가구의 33.4%가 1인 가구였다. 일터나 삶터에서 ‘사회적 연결’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연스레 만나서 소통하며 사회적으로 연결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정부 정책 수단으로 강요한 코로나19 팬데믹은, 개인의 사회적 고립을 더욱 심화시켰다. 비대면 환경에 익숙해져 대면을 꺼리는 현상도 발견된다. 심지어 전화 통화조차 두려워하는 ‘전화 공포증’까지 확산하고 있다. 사회현상으로서의 외로움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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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31 15:10

행복의 방법, 타자를 위하기

누군가 '행복'의 반대는 불행이 아닌 '욕망'이라고 했다. 행복은 개인에 따라 모두가 다르게 인식하는 것 같다. 같은 회사,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어떤 이는 만족하고 누군가는 불행하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개인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의 맥락이 있다. 모두가 제각각이다. 오래전이다. 모 지자체에서 최고위층까지 오르고 은퇴하신 분이 계셨다. 고향에서 활동 해 보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는지 외국에 나가셔서 사업을 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지인들이 공직에 있을 때의 자기 권위를 내려놓지 못하면서 현실에서 오는 괴리감에 힘들어했다고 전했다. 이 바닥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교육계, 정치계, 행정 등 고위공직에서 은퇴한 분들의 삶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된다. 새로운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분들도 계시지만 또 한편에서 60대 초반부터 80~90 어르신 행세 하는 분들도 있었다. 이런 분 중 은퇴 후 1, 2년 만에 외모까지도 완전히 나이 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마흔이 되면서 월급 주던 직장을 사직하고 프리랜서를 몇 년 하면서 개인 연구소를 운영 했었다. 나와 보니 알았다. 명함에 이전에 내가 가졌던 기관장이라든지 단체에 어떤 위치 등 내세울 게 없었다. 이름만 만들어 놓은 무허가(?) 연구소가 다였다. 완전히 벌거벗은 느낌이었다. 당시 내가 가진 역량이 무엇이고 어떤 사람들이 나와 진정성 가지고 함께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은퇴를 아주 빨리한 거다. 그리고 몇 년 있다가 다시 지역에 돌아와 ‘청소년자치공간 달그락달그락’을 기획 운영하고, 이후 ‘길위의청년학교’도 시작하게 된다. 나는 지금도 20대에 하던 일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현장 활동뿐만 아니라 연구와 집필 등 질적으로나 네트워크적으로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은 ‘청소년활동’이다. 지금이 행복한가? 모르겠다. 행복의 정의를 내리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안다. 이 일이 청소년들에게 복이 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달그락’에 선생님들도 그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군산까지 와서 방 얻어 살면서 청소년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청소년과 지역사회, 그 안에 많은 사람과 연대하면서 그래도 조금은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전문적으로 움직여 가는 활동.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에게 은퇴는 없다. 하는 ‘일’이 바뀌어 갈 뿐이다. 돈을 벌고 안 벌고의 문제는 다른 차원이다. 일의 목적에서 자기 ‘욕망’을 내려 놓고 ‘본질’을 보게 되면 평생에 걸쳐 우리가 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 보인다. ‘행복’이다. 그것은 바로 나를 통해 타자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삶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나를 통해 타자와 이어졌다. 이 글도 누군가 읽히기 위해서 쓴다. 의사도 환자를 돌보고 있고, 기자도 사회 정의를 위해서 누군가를 위한 기사를 쓴다. 택시 기사는 손님을 안전하게 목적지에 태워준다. 정치인은 어떤가. 우리 사회의 모든 일은 누군가를 위해서 함께 하도록 시스템화 되어 있다. 모든 직업이 그렇다. 나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 살피고 조금이라도 복이 되도록 거드는 일이 우리 행복을 판가름한다. 우리우리 설날이 막 지났다. 누군가에게 행복한 삶을 묻는다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인생의 가장 지속적이고 긴급한 질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다.” 또 다른 새해다. 모두 행복하기를. / 정건희 청소년자치연구소 소장 △정건희 소장은 여성가족부 청소년정책위원∙국가인권위원회 아동인권전문위원 등을 지냈으며, 현재 군산시교육발전진흥재단 이사∙한일장신대학교 겸임교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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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24 15:25

이제, 미래교육이다

평소에 코엑스의 번잡함이 싫어서 즐겨 찾지 않았는데 며칠전 '미래교육박람회'를 찾아 코엑스를 다녀왔다. 입구에서부터 엄청난 크기의 디지털 영상이 발길을 붙잡는다. 90도 각으로 휜 양면형, 360도 원통형, 디스플레이의 형태가 기발하고 다양하다. 코엑스에 가면 오늘, 미래를 만날 수 있다. 교육은 근본적으로 미래에 필요한 역량을 기르는 일이기에 ‘미래교육’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교육'은 '교육'과 같은 뜻, 동어반복이다. 그런데 지금 세계는 전례없이 '미래교육'을 말한다. 전북교육의 슬로건도 '학생중심 미래교육'이다. 왜 ‘미래교육’인가? 지금은 4차산업혁명시대, 기술의 발달은 세상을 빠른 속도로 변화시키고 있다. 학생들이 사회에 나갈 10년 후의 세상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역량을 요구할 것이다. 변화된 세상에 필요한 미래역량을 기르려면 교육과정도 환경도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미래교육이다. 코엑스의 미래교육 전시장에 들어서니 미래교육이 얼마나 가까이 와있는지 실감 났다. 수많은 미래교육 도구, 콘텐츠, 플랫폼이 선보이고 있었다. 지금 교실에서 미래교육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미래교육 교실에는 또하나의 교실이 존재한다. 더 크고 경계가 없는 온라인 클래스(가상교실)다. 온라인 교실에는 수많은 수업 도구가 있다. 교사는 필요한 도구를 선택하고 과제를 낸다, 학생들은 인공지능 기반의 콘텐츠로 각자 자기 수준에 맞는 학습을 한다. 학생과 교사는 실제 교실과 온라인 교실을 넘나들며 수업한다. 학생들의 학습과 성장 과정은 온라인 클래스에 저장된다. 학생의 성장 기록은 장차 학생의 진로 진학, 전공선택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미래교육을 위해 학생들에게 스마트기기는 필수도구다. 교실의 무선인터넷 용량은 대폭 증강하고 온라인 교육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교사들의 디지털 활용 수업 역량이다. 학생보다 교사들의 연수가 시급하다. 그간 정부와 17개 시∙도 교육청은 10여년 전부터 미래교육을 준비해왔다. 다만 시∙도별로 추진 실적이 다르고 전북은 다 알다시피 미래교육에 많이 뒤처졌다. 미래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빈약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답답하게도 모든 지역이 미래교육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아직도 전북교육계 일각에서는 스마트기기 관리의 문제점을 내세우며 발목을 잡고 있다. 구더기 무서우니 장 담그지 말라는 것과 같다. ‘미래교육’의 기치를 높이 든 서거석 교육감은 새해를 ‘미래교육 도약의 원년’으로 만들겠다고 천명했다. 미래교육이 성공하려면 교사의 자발성이 중요하다. 그런데 적잖은 교사들이 AI 기반의 디지털 교수법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미래교육에 앞서간 교사들은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일단 시작하라, 수업 중에 막히면 디지털에 익숙한 학생들이 더 빨리 방법을 찾아줄 것이다” 에듀테크 교실은 수준 높은 수업으로 이어져야 한다. 좋은 방법이 있다. 교사들이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는 것이다. 교사끼리 수업을 공개하고 다른 수업을 참관하면 개선점을 찾고 다른 수업의 장점을 배울 수 있다. ‘수업 열고 나눔’은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서툰 디지털 역량을 키우는 데에도 매우 효과적이었다는게 확인되었다. 2023년, 전북 미래교육이 높이 도약하길 소망한다. 작은 걱정으로 큰 걸음을 막기보다 성원과 독려가 필요할 때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전북 미래교육, 속도를 내야 한다. /한긍수 전북도교육청 정책공보관 △한긍수 정책공보관은 2017대한민국독서대전 총감독, 한남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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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17 18:12

그들은 왜 방통위 공무원과 언론학자들을 수사할까

새해 벽두부터 칼바람이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이다. 얼핏 보면 원칙도 철학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기준이 있다. ‘내 편이 아니면, 나를 불편하게 만들면’이다. 그리고 거기엔 ‘법과 원칙’이라는 규범적 언어들이 동원되고, 법기술 관료들이 주도하는 권력기관이 앞장선다. 한편으로는 보수여당과 보수언론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박자를 맞춘다. 권력 감시를 본연의 책무로 하는 언론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언론은 국익과 헌법수호라는 걸맞지 않는 명분까지 앞세워 철저히 ‘왕따’ 시켰다(MBC).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프로그램(김어준의 뉴스공장)이 방송된다고 지역공영방송(TBS)의 생존 근거를 박탈했다. 그러면서 불편했던 대통령의 출근길 약식 기자회견은 MBC 기자의 도발(?)에 대한 재발 방지를 명분삼아 슬그머니 폐지했다.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은 신년사로 대체하는 한편, 특정 보수일간지를 통해 단독 인터뷰를 내놓았다. 언론탄압, 비상식적 언론대응, 편협한 언론관이라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지만, 수사로 다져진 맷집일까. 그들만의 원칙 앞에서 쇠귀에 경 읽기이다. 방송통신위원회 흔들기도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다. 전 정권에서 임명된 방통위원장의 퇴진을 종용했으나 물러나지 않았다. 보수언론이 나서서 개인적 치부를 드러내고자 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감사원이 나섰고, 방통위는 집중 감사의 대상이 됐다. 2022년 6월부터 통상 감사를 벗어난 고강도 감사를 실시했다. 그리고는 2020년 3월에 실시한 TV조선 재승인 심사과정을 문제삼아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일부 심사위원이 점수를 수정한 것을 빌미 삼았다. 바통을 이어받은 검찰은 심사과정을 진행한 방통위 직원과 심사에 참여한 민간인 전문가들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심사에 참여하면서 점수를 수정한 언론학자들 역시 수사의 대상이 됐다. 압수수색, 통화기록 및 이메일 조회, 출국금지 조치, 검찰 출두 조사를 받았다. 언론 학계는 범학회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심사위원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침해하는 무리한 수사와 언론학자 탄압을 규탄했다. 306명의 언론학자들이 서명한 의견서를 감사원과 검찰에 전달하기도 했다. 지난 3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국무조정실의 방통위 감찰 역시 같은 과정이다. 공영방송인 KBS, MBC, EBS의 이사 추천과 선임은 방통위가 주도한다. 이에 전 정권 시절 진행된 이사 선임과 임명 과정을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다. 감사원 조사, 검찰 수사에 이어 방통위를 압박하는 또 하나의 카드이다. 조그마한 흠이라도 발견된다면 가차 없는 그들만의 법과 원칙 규범이 적용될 것이다. 지난 7일 검찰은 마침내 방통위 간부 2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영장심사 결과는 지켜 볼 일이다. 방통위 공무원 노조는 이어지는 감사원 감사, 검찰 수사, 국무조정실 감찰과 관련 “현정권은 방통위를 방송장악을 위한 도구로 변질시켜 정권수호의 앞잡이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나도 종편재승인 심사에 참여했었다. 검찰 조사를 받고 온 동료 학자의 말이 귀를 울린다. “학자의 자존심이 산산조각 났다. 화가 나서 살 수가 없다”. 나찌 정권 하에서 고초를 겪었던 ‘마르틴 니묄러’의 ‘처음 그들이 왔을 때’라는 시도 귀에 맴돈다. 내 삶에 묻은 티끌을, 언제 어느 때 법과 원칙의 규범으로 불러낼지 불안하다. 그래서 새해이건만 덕담을 나누기가 힘겹다. /김은규 우석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김은규 교수는 현재 한국언론정보학회 학회장이며 전주공동체라디오 대표와 전북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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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10 17:55

파편사회 극복의 과제

며칠 전 미국의 시사 주간지 ‘U.S. 뉴스 & 월드 리포트’는 세계 85개국을 대상으로 ‘2022년 가장 강한 국가’ 점수와 순위를 발표했다. 이 지수는 지도자, 경제적 영향력, 정치적 영향력, 강력한 국제 동맹, 강력한 군사력, 수출 등 여섯 지표에서 점수를 매겨 총점을 계산하여 산출하는데, 한국은 2021년보다 2계단 오른 6위를 차지했다. 이 잡지는 한국을 ‘세계 최대 경제국 중 하나’로 평가했다. 한국은 정말로 살기 좋은 나라라 할 수 있을까? 경기 침체, 부동산 가격 폭등과 폭락, 지속되는 부정부패, 흔들리는 사회 안전 시스템 등에 실망한 한국인은 상당수가 외화내빈(外華內貧)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즉, 한국은 경제·정치·군사적으로 부강한 나라이지만, 시민의 삶의 질은 그다지 좋지 못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모순적 상황이 발생한 원인은 ‘사회적 파편화’에 있다. 그것은 사회관계의 두 측면, 즉 사회체계와 대인관계에서 균열·단절·파괴가 일어나는 상태를 뜻한다. 첫째, 사회체계 차원으로, 한국사회는 유기적 연대를 가진 하나의 통일체로 묶이지 못하고, 소집단 또는 개인 수준으로 조각나 버리는 ‘사회의 원자화’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사회체계를 구성하는 하위부문 간 접면(接面) 또는 연결고리가 파괴됐고, 사회체계의 불균형이 심화하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둘째, 대인관계 차원으로, 사회성 부족과 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해 ‘외로운 개인’이 증가하고 있고, 단절된 대인관계로 인해 ‘정체성 불안’을 가진 사람이 늘고 있다. 또한 계층·인종·종족·성·이념·세대·지역·종교 등에 따라 ‘우리’와 ‘그들’로 가르고, 다른 생각, 이해관계 상충을 이유로 ‘우리’가 아닌 ‘그들’을 무조건 배척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사회갈등’이 심화하였다. 이처럼 파편화된 사회에서는 소통·관용·공존·상생이 약화되고, 외로움·증오·공포·혐오가 강화된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서울 광화문광장 단식농성장 앞에서 이루어진 ‘폭식 시위’, 대구 이슬람사원 공사장 앞에서 행해진 ‘돼지고기 잔치’, 온라인에서 자행된 서울 이태원 압사 사고 피해자에 대한 ‘무분별한 비방’ 등은, ‘우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가해진 ‘폭력’이다. 중세 유럽에서 ‘전염병 확산의 주범’으로 몰려 처형되었던 마녀사냥의 희생자처럼, ‘사회에 위협을 가할 힘조차 없는 사람들’에 대해 혐오를 퍼부은 것이다. 파편사회에는 관용이 자리 잡을 틈새가 없다. 선택적 정의와 선택적 의심의 확증편향만 난무한다. 이처럼 갈기갈기 찢긴 사회에서는, 과거와 같은 동질성에 기초한 연대나 사회통합은 불가능하고, 시민의 행복지수도 낮을 수밖에 없다. 정치와 언론은 사회통합 기능을 수행하는 사회제도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것들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여야 정치인은 상대방을 ‘공존’이 아니라 ‘적폐 청산’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어, ‘대화와 타협의 정치 실현’은 기대난망이다. 언론은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여, 사회적 파편화를 오히려 부추긴다. 정치와 언론은 사회를 분열시키는 요인 중 하나로 전락했다. 정치와 언론의 신뢰 회복이 시급하다. 그뿐 아니라, ‘사회체계 균형의 회복’ 또는 ‘사회적 연대의 회복’을 목표로, 파편사회 극복을 위한 대안적 제도와 정책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개발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선진국 진입을 가로막는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한국사회학회 회장 △설동훈 교수는 한국사회학회장·전라북도인권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조사연구학회장·한국이민학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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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03 14:22

새해 인사, ‘손글씨’로 마음을 담다

한 해가 간다. 부모님이나 은사, 지인들에게 그동안의 고마움을 전하는 때이다. 새해 인사를 주고받는 몇 마디의 언어가 감동으로 다가온다. 상대방의 안부를 물으며 자신의 정중한 뜻을 전하는 글귀에서 우리는 상대의 마음에 공감하며 정성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연말연시를 맞아 쏟아지는 인사말 홍수가 카톡이나 밴드, 문자 메시지, 이-메일을 통해 넘쳐난다. 연하장이나 편지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입력되는 ‘폰트 언어’가 아닌 ‘손글씨’를 본다면 어떠할까.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전하는 데에는 속도의 아이콘인 컴퓨터 글보다 영혼이 깃든 손글씨가 제격이다. 글쓰기의 수단이 펜에서 컴퓨터 자판으로 이양한지 오래이다. 시인 하재봉의 말대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치는’ 시대이다. ‘터치 스크린’시대, ‘디지털 노마드’ 세상에서 손글씨는 번거롭다고 외면 받고 있다. 컴퓨터 글쓰기는 편집과 교정의 편리성으로 인해 일반화되었다. 나의 정신을 손으로 옮겨 자판을 두드리는 행위가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을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글쓰기 완성의 속도와 꼭 비례하지 않는 것 같다. 쓰기의 막힘이나 머뭇거림은 손으로 글을 쓰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다. 나는 컴퓨터로 글을 쓸 때, 모니터에서 깜박이는 커서와 힘겨루기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옛 선비들은 글씨에 그 사람의 정신과 혼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했다. 작가들의 글쓰기가 연필이나 펜에서 컴퓨터 글쓰기로 옮겨 갔지만, 육필의 힘을 믿는 작가도 많다.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작가 김훈의 고백이다.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눌러 쓰는 손글씨는 그의 말대로 ‘아날로그적 기쁨’인지도 모른다.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새기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만년필로 눌러 써서 작품을 완성해간 <혼불>의 작가 최명희 선생의 의지도 되새겨볼 일이다. 디지털 시대에도 손글씨를 버려서는 안 된다. 초등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 첫 단원의 이름은 ‘바른 자세로 읽고 쓰기’이다. 아무리 아이패드 학습 시스템이 미래교육의 한 방식이라고 강조해도 그 기본은 바르게 앉아 바르게 글을 쓰는 일이다. 아이들에게 글씨만 보여주는 경우보다 직접 써보게 한 경우에 뇌가 해당 단어에 훨씬 활발하게 반응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직접 손으로 필기를 하며 수업에 참여해야 학습효과가 배가된다고 한다. 매년 1월 23일을 ‘손글씨 쓰기의 날’로 정한 사례도 있다. 미국에서 제정한 이 날은 ‘독립선언서’에 최초로 서명한 존 핸콕의 생일이다. 제정에 앞선 이들은 “현대인들은 빠르고 편리한 것에 익숙해지면서, 정작 인간적인 숨결이 배어나오는 손글씨가 주는 감성적 소통의 중요성을 잊고 산다”고 경고하고 있다. 손글씨의 생활 문화적 가치를 되새길 때이다. 연하장이나 편지글을 쓸 때 컴퓨터로 작성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더라도 가끔은 손글씨로, 또는 보내는 이에 자필 서명이라도 정성껏 써서 보내면 좋겠다. 로맨틱 영화의 고전으로 알려진 <러브 액츄얼리>에서 남자 주인공이 스케치북에 크게 쓴 손글씨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니가 그리운 날에/ 편지를 쓴다/ 내 추억을 담아/ 내 기억을 담아/ 너에게 보낸다--(중략)--내 작은 손글씨로/ 니가 그리운 날에 편지를 쓴다/ 쓰고 또 쓰고 쓰고 쓰고/널 그리워하며/ 편지 속에 담는다.”(신세미의 ‘손글씨’) 오늘따라 대중가요가 새삼 감동으로 다가온다. /김용재 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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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27 13:49

웨슬리와 감리교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개신교의 한 종파를 세운 인물이자 기독교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살아서 그가 꽃길을 걷지는 않았다. 개인사는 논외로 하더라도 신학적으로 적잖은 공격을 받았다. 웨슬리의 동시대 사람으로 웨슬리와 함께 감리교의 기틀을 세운 주요한 인물로 꼽히는 조지 휫필드는 웨슬리를 이단으로 비난하며 “당신의 하나님은 나의 악마”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했다”는 보편구원설이 공격의 근거였다. 비기독교인 보기엔 보편구원설이 문제가 없지만, 소위 개신교 정통교리에선 은총을 받은 선택된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 보편구원론은 감리교의 사회적 성화 교리와 연결되고, 노예제 반대 등 인권 중시의 실천적 사회참여로 연결된다. 웨슬리의 사회적 관심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였다. 제철과 섬유 산업의 발전은 단순노동을 기계노동으로 대체하여 자영업을 몰락시켰고, 곡물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2차 인클로저는 농촌 사회를 다시 한번 교란하며 도시빈민과 산업예비군을 형성했다. 부르주와 프롤레타리아가 동시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이 시점에 영국에서는 기독교가 역사적 두 계급의 대립을 완충하면서 자체의 활로를 확보해야 하는 전환에 직면했는데, 감리교가 그 역할을 수행할 잠재력을 갖게 된다. 보편구원론은 자본주의의 발흥은 물론 근대국가의 토대 형성에 긴요했다. 웨슬리가 개인적으로 민주주의에 부정적이었다고 하여도 보편구원론과 노예제 반대, 여성권을 포함한 인권 중시 등의 태도는 근대 서구민주주의의 이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보편구원론과 사회적 성화의 교리는 제도적인 보편선거의 도입과 내용상 봉건체제의 대체와 맥을 같이한다. 감리교가 이러한 전환에 복무하였다기보다 이런 시대의 전환에서 종교가 감당해야 할 변화를 감리교가 떠맡았다고 해야 한다. 웨슬리는 가난을 가난한 사람들의 나태함의 결과이거나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불변적 운명으로 여기지 않았다. 가난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극복해야 할 불행으로 여겼기에 끊임없이 그 원인을 연구하고 책임 있는 이들을 질책하며, 또한 격려하고 부지런히 일하도록 부추겼으며, 사회적인 불의를 제거하기 위하여 부유한 사람들과 영향력 있는 이들의 책임의식을 일깨우려고 시도하였다.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 문제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개입도 요청했다. 그렇다고 웨슬리가 혁명적 사상을 전파했다고 할 수는 없다. 노예제 반대, 여성인권 신장, 빈민구제 등 진보적 사유가 확연했지만 정치적으론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왕정을 옹호하고 민주주의에 반대했다. 도식적으로 분류하면 정치적으로 보수, 사회적으로 개혁, 종교적으론 진보적이었다 하겠다. 그의 감리교는 근대사회의 전환기에 사회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며 종교가 해야 할 일을, 정치혁명이 아닌 사회적 성화란 이름으로 수행했다. 웨슬리는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르고 기독교 교회와 성직자의 세계에 부와 권력이 흘러넘치게 함으로써, 이전에 있었던 수십 번의 박해가 가져온 것보다 더 악한 일들을 교회에 불러들였다”며 “콘스탄티누스 이후 종교개혁까지 이런 상태는 실로 한탄할 만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곧 성탄절이다. 지금의 한국 기독교도 한탄할 만한 상황이다. 웨슬리가 꼭 정답을 제시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에 시대정신을 고민하며 종교의 활로를 모색한 건 사실이다. 기후위기와 4차산업의 중층 위협 속에서 지금 표류 중인 기독교가 새로운 ‘사회적 성화’를 제시할 수 있을까. /안치용 ESG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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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20 14:14

‘IB 교육’, 성공을 담보하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우리나라에서 IB 교육을 일반학교에 도입하고자 하는 시도는 2015년 즈음 제주도교육청으로부터 시작되었던 듯하다. 국제학교에 적용된 IB 교육(International Baccalaureate Programme)은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인증학교 교육 프로그램으로, 현재 세계 161개국 5,434교에서 운영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021년 기준). 혁신교육과 미래교육을 거치면서 국제적 미래인재 구현을 목표로 최근 부쩍 IB 교육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것이 창의인재형 미래글로벌 역량을 목표로 학생 주도의 열린 사고와 균형감을 지향하는 교육과정을 펼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위한 적용은 PYP(유,초등), MYP(중), DP(일반고)/CP(특성화고)로 단계화 되어 있고, IB 공식 교수언어(영어 등)는 고교 과정에 적용된다. 평가도 학교와 본부 주도를 병행하지만 과정과 학기 모두 오직 서술을 통해 종합적 사고를 측정한다. 그러나 IB 교육은 우리나라 대입제도에서 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현행 대입제도에서는 수능성적 확보가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다. 국제 감각, 심층사고, 토론, 탐구, 관계, 공감 등의 교육적 요소로 대표되는 미래글로벌 역량은 이 시대의 교육적 역할로 매우 타당하지만, 이를 핵심으로 적용하는 IB 교육은 수능 중심의 대입을 직접 도울 수 없다. 제주도에서는 대입 여건을 고려하여 특정 지역 표선면에 시범 적용했으나 이에 대한 성과를 크게 이어가지는 못해 보인다. 이어서 그 적용과 시도의 움직임이 야심차게 진행되고 있는 곳은 대구다. 대구의 적용 방식은 특정 학교의 일부 학급에만 적용함으로써, IB 교육을 인정하는 대학(학종전형)이나 외국 대학 진학을 전제로 추진하는 것 같다. 둘 다 대입에의 부정적 영향력을 최소화시키면서 IB 교육을 적용하는 조심스러움이 있다. 시대와 논리로 매우 타당한 IB 교육이 대입제도로 인해 많은 제약과 요령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그러함에도 이에 대한 추구는 많은 지역에서 가세되고 있다. 경기, 인천의 가시적인 노력뿐 아니라 전북에서도 적극적 관심을 보이고 있다. IB 교육의 적용과 성공을 위해서는 진실로 중요한 몇 가지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첫 번째는 IB 교육에 동참할 교사들의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교육 역량이다. 학생들의 사고를 열고 탐구력을 증진하는 IB 교육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수업 역량과 외국어 능력은 집중코스로 최소 2~3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물론 전면 시행이 아닌 샘플링 적용에 필요한 선택적 교원의 역량교육만도 그렇다. 두 번째는 이러한 교육 방식을 함께 호흡해 갈 학생의 역량이다. 탐구적 힘, 논리를 채우는 토론, 주도적 배움, 국제적 감각, 공감과 균형을 소화해 낼 수 있는 교육적 저변과 배움 스타일이 학생에게도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IB 교육은 유, 초, 중, 고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원론일 것이다. 세 번째는 대입에서 IB 교육을 인정하는 대학의 수가 최대한 확보되어야 하는 현실적 기반 조성이다. 전북교육은 혁신교육 이후 미래교육을 시작하고 있다. 전북교육이 IB 교육에 의지가 있다면, 지금은 혁신교육의 미비점을 보완하여 무엇보다도 미래교육을 충실히 시행해야 한다. 동시에 IB 교육을 위한 교사와 학생의 역량 기반을 닦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타 지역 사례 기반의 심도 있는 논의와 다른 지역의 방향성 검토도 알찬 준비를 위해 챙겨야 하는 필수 수순이다. /송영주 전 군산동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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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13 14:08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둥근 축구공’

“공은 둥글고 경기는 90분간 계속된다.” 1954년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월드컵 결승전. 우승 주역인 서독의 제프 헤르베르거 감독이 남긴 말이다. 그는 모두의 예상을 깼다. 강호 헝가리를 누르고 ‘베른의 기적’을 만들었다. 축구의 명언이 된 이 말은 ‘공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승부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의미로 쓰인다. Nobody knows. 강팀이 항상 이긴다는 법은 없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약팀이 승리의 감격을 누릴 때도 있는 것이다. 사실 곰곰이 따져보면 공은 둥글다는 표현은 애매하다. 축구공은 진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는 다르다. 대부분 어디로 튈지 알 수 있다. 돌출변수를 빼면 둥근 축구공은 본대로 찬대로 굴러가 결과를 만든다. 공은 둥글다는 진리는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새삼 확인됐다. 우리 태극전사들이 조별리그 마지막 포르투갈 전에서 보여준 ‘추가시간의 감동’이 이를 증명한다.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이를 악물고 뛰었던 우리 선수들은 역전승의 기적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루과이와의 승점, 골 득실에 이은 다득점 기준을 통과하며 월드컵 통산 세 번째 16강 진출의 쾌거를 이뤘다. 물론 안타깝게도 원정 첫 8강행을 앞에 두고 세계 최강 브라질의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해 승리 확률이 높지 않았던 국가들의 선전은 조별리그에서 계속 이어졌다. 일본도 16강전에서 크로아티아에 승부차기 패배를 당했지만, 그에 앞서 ‘전차군단’ 독일과 ‘무적함대’ 스페인을 꺾는 파란을 연출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아르헨티나에 역전승을 거뒀다. 예선전이었지만 튀니지가 프랑스를, 카메룬이 브라질을 꺾은 것도 기억에 남는 경기였다. 둥근 축구공은 땀과 꿈의 결정체다. 남들은 ‘이변’과 ‘반란’으로 약팀의 승리를 평가한다. 하지만 승리를 일궈낸 선수들에게는 이변이 아닌 당연한 귀결이다. 정당한 보상이다. 경기에 나선 선수들은 공이 둥글기 때문에 승부를 예측할 수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땀과 꿈이 없는 기적은 없다. 기적은 생겨나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공이 굴러가는 만큼 선수들은 더 달리고 뛴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만큼 꿈은 더 커진다. 끝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뛴 선수들에게 축구공은 보람과 감격을 선물한다. 둥근 축구공의 진리 앞에 내로라하는 강팀들도 고개를 숙였다. FIFA 랭킹 2위 벨기에를 필두로 독일, 멕시코, 덴마크 등이 우수수 예선 탈락했다. FIFA는 우리 대표팀의 16강 진출을 두고 “그들은 꿈꾸고 믿었고 이뤄냈다”고 박수를 보냈다. 단일 종목 스포츠 행사로는 지구촌 최대 규모인 월드컵. 월드컵은 그야말로 국가대항전이다. 단순한 스포츠 그 이상이다. 국가와 국민의 자존심이 걸린 무대다. 경기 시작 전 녹색 그라운드 위에는 대형 국기가 펼쳐진다. 국가대표 선수들은 국가(國歌)를 부르며 최선을 다짐한다. 자국민들은 목이 터질 듯 열정적으로 응원한다. 모든 시선이 축구공에 집중된다. 공 하나에 울고 웃으며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그러나 진정 둥근 축구공은 승패를 떠나 꿈꾸는 사람들의 것이어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사람들을 위해 공은 굴러가야 한다. 방탄소년단 BTS의 정국이 부른 월드컵 송 ‘드리머스(Dreamers)’는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는 꿈꾸는 사람들이야. 우리는 이뤄낼 거야. 우리는 믿으니까. 우리는 볼 수 있으니까”. /박종률 우석대 교양대학 교수·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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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06 14:04

인터넷 게임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

26세기 초반의 미래 우주에는 세 종족이 버티고 있다. 지구촌 연합연맹에게 버림받은 범죄자들의 집단인 테란(Terran), 집단의식을 가지고 다른 종족을 흡수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 우주괴물 저그(Zerg)와 초능력과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외계 종족 프로토스(Protoss)이다. 이 세 종족은 각자 특유의 장·단점이 있다. 게임에 참여하는 플레이어들은 자원을 모아 건물을 짓고 발전시켜 상대방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자 노력한다. 이들은 여기저기 숨어 있는 ‘광물’과 고급 유닛이나 건물의 생산에 사용되는 ‘베스핀 가스’를 얻기 위해 전략을 짜고 경쟁을 한다. 이 싸움의 승자는 누구인가. 판타지와 전쟁을 모티브로 삼고 있는 실시간 전략 게임 <스타크래프트>이다. 1998년 이 게임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때,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후 컴퓨터 사용이 늘고 인터넷에 익숙해진 문화 환경 속에서 온라인 게임은 더욱 발전하고 일상적 놀이문화로 정착되었다. 게임이 TV(24.5%)나 영화(23.2%)와 함께 여가활동의 20.4%를 차지한다는 조사가 있을 정도이다. 밖에서 뛰어놀았던 놀이문화는 PC방이나 개인용 컴퓨터, 모바일 게임으로 앉아서 즐기는 형태로 바뀌었다. 게임 산업은 경제적 가치도 커서 우리 문화 산업 중 가장 짧은 기간에 급속하게 발전한 분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게임 산업 규모는 세계 5위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으며, 그 매출액도 연간 14조원이 넘었다. 게임의 산업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즐기는 일이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것도 사실이다. 게임에 빠져 학업이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경우가 많았다. 자연히 게임이나 인터넷 중독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게임 이용이 많을수록 폭력성이 강하고 불안감과 적대감의 부정적 정서를 키운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반면에 <스타크래프트>를 위시한 다양한 종류의 게임은 ‘e-스포츠’로 자리 잡으면서 프로게이머도 생기고, 이들은 여느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처럼 인기스타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게임의 긍정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게임은 여가 활용의 수단이면서 학업이나 대인관계 갈등, 업무에 관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정화작용을 한다. 게임을 통해 소속감이나 단결심, 양보심, 협동 등의 사회 학습도 가능하며 게임 속에서 친구와 만나고 한 편이 되어 싸우는 경험도 함으로써 또래관계를 유지하는 놀이문화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 시각과 청각을 효율적으로 자극하여 지식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하는 교육용 게임도 있다. 학습부진아 지도에 보드게임이 활용되기도 하며, 경제·역사·언어 분야의 인지적 훈련이 필요한 교육 분야에서도 게임 프로그램이 큰 효과를 드러내기도 했다. 기억력 게임, 같은 그림 찾기 게임, 간단한 수학 놀이 게임이 노인들의 인지능력을 향상시켜 치매 방지효과가 드러났다는 보고도 있다. 미국에서는 군사 훈련의 수단으로 가상 전쟁 게임이나 게임을 활용한 비행기 조작교육, 폭발물 찾기 게임이 이용되기도 했다. 게임은 오락 문화이다.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인 인간은 노는 행위를 통해 일의 활력을 얻기도 하지만, 게임이나 놀이 그 자체를 즐기기도 한다. 호이징가의 주장대로 놀이는 인간의 문화를 창조하는 원동력이다. 게임 문화가 부정적 시각에서 벗어나 건전한 여가 선용의 문화기호로 정착되길 바란다. 이는 게임의 개발자나 이용자 모두가 인간 중심의 기술(human-tech) 강조, 개인의 행복과 성장, 생활의 여유라는 관점을 견지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김용재 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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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29 13:28

세계정부 없이 국민국가들이 결정하는 세계의 미래

이집트 샤름 엘 셰이크에서 20일 막을 내린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는 기후변화에 따른 개발도상국의 손실과 피해(loss and damage) 보상을 위한 기금 조성에 합의해 역사적인 진전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6일 개막한 COP27은 원래 18일 폐막 예정이었으나, 주요 쟁점에 당사국들이 견해 차이를 보여 20일 새벽까지 협상을 연장하며 마라톤 회의를 한 끝에 손실과 보상 기금에 합의했다. 이 합의는 지구 차원에서 기후정의에 한 걸음 다가간 조치이다. 기후변화의 원인인 온실가스 대부분을 먼저 산업화를 이룬 부국들이 배출했지만, 기후변화의 악영향은 빈국들이 더 많이 받았다. 예컨대 올해 파키스탄은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고 17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십조 원의 물적 피해를 보았다. 수재민이 전체 인구의 약 15%인 3300만 명에 달한다고 하니 홍수 피해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세계 최빈국 연합을 대변하는 셰리 레흐만 파키스탄 기후 장관은 기금 조성 합의 후 “우리는 지난 30년 분투했고, 그 여정이 첫 긍정적 이정표에 당도했다”며 “합의는 기후 취약국의 목소리에 대한 응답”이라고 평가했다. 파키스탄 기후 장관이 말한 대로 그동안 최빈국과 개도국들은 기후변화 보상 기금을 별도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 홍수, 가뭄 등으로 인명 피해나 이재민 발생, 시설 파괴, 농작물 피해 등이 점차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부국들은 온난화의 유발자로서 책임을 져야 하지만, 보상 액수가 천문학적인 수준이기에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번 기금 조성 합의에도 불구하고 부국들은 기금이 ‘보상(compensation)’ 성격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대신 결정문에 “손실과 피해 복구에 초점을 맞춘 손실과 피해 대응 기금(fund for responding to loss and damage)을 조성한다”라고 표현했다. ‘보상’을 ‘대응’으로 규정한 것은 일종의 정치적 절충안이다. 보상을 요구하는 빈국에 부국이 응답하되 보상이라는 용어는 피했다. “기후변화의 부정적 영향에 특별히 취약한 개도국을 지원하고자 신규 재원 지원체계를 설치한다”라는 문구 또한 부국의 이해가 반영됐다. ‘특별히 취약한 개도국’에만 기금이 지원되도록 하여 수혜 대상 국가를 제한했다. ‘합의’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지만 갈 길이 멀다. 누가 돈을 내고 누가 돈을 받을지, 어떤 종류의 피해와 언제부터 발생한 피해를 지원 대상에 포함할지 등 기금 운영의 세부원칙을 정해야 하는데 이게 누가 봐도 합의보다 100배는 어려운 일이다. 유럽연합(EU) 등이 돈을 내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공여국은 대체로 성의표시 차원에서 금액을 결정할 공산이 크다. 최근 분석으론 기후변화에 가장 취약한 55개국이 지난 20년의 기후 재앙으로 인한 피해액이 5250억 달러(약 700조 원)로 추정된다. 선진국이 개도국을 위해 연간 1000억 달러를 기후변화 대처 재원으로 제공하겠다는 (사실상 선언에 불과한) 약속의 이행을 COP27에서 빈국들은 촉구했다. 세계정부가 없는 상황에서 ‘합의’의 후속 조치는 마냥 눈치게임으로 흘러 지지부진해질 수 있다. 세계의 기후정의 못지않게 각국 내부의 기후정의가 시급한데다 ‘정의’는 대체로 국민국가의 핵심 관심사가 아닌 까닭이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또 내부적으로 어떤 국가가 될 것인가. 그것은 결국 국민이 결정한다. 또한 세계정부가 없는 가운데 세계의 미래는 국민국가들이 결정한다. 어떤 미래일까. /안치용 ESG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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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22 14:25

다문화교육, 국제이해와 세계시민교육으로 확장해 가야

국제결혼 가정과 외국인 근로자 가정 등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교육 분야에서도 그들 자녀에 대한 적응 지원과 포용 정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교육청과 학교에 다문화교육이 국가 정책으로 들어온 것은 2006년부터다. 다문화교육의 필요에 따른 논리적 배경은 다문화주의적 관점이었다. 단군을 운운하며 ‘단일민족’의 자부심을 주입했던 교육 이력이 있었으니, 이주민 가정이 늘고 그 자녀들을 포용해야 하는 교육에서 다문화주의를 테마로 내세우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논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교육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이 관점과 정책은 ‘동화(同化)’와 ‘포용’으로 방향이 이분되었다. 이 방법은 이주민 자녀와 일반 아이들의 구별을 전제한다. 이주민 자녀에게는 한국문화에의 동화를 지원하고, 일반 아이들에게는 그들을 배척하지 말라는 포용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굳이 전문가의 분석을 빌리지 않아도 출발점이 된 다문화주의 관점은 은근히 이렇게 둘로 그룹이 나뉘었다는 알 수 있다. 이주민 자녀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자신들을 ‘다문화’라고 부르는 호칭이었다는 연구 보고가 있다. 이는 당시 이 아이들이 얼마나 배척되었는지와 이를 수습하는 것이 가장 큰 교육적 과제였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16년이 지난 지금은 세계 곳곳에서 다국적 이주민과의 어우러진 삶이 보편화 되었다. 오직 이주민 자녀라는 이유로 차별을 두거나 배척하는 분위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주민 자녀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여전히 적응 지원은 필요하다. 한국어교육, 교우, 상담, 문화 이해 지원 등은 어렵고 부족한 부분에 대한 강화와 케어 차원에서 필요하다. 이중언어말하기 대회는 오히려 그들의 강점을 살리고 적응력을 높여주는 좋은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문화교육은 그룹을 나누지 않고 모든 아이들에게 다문화주의를 체화하도록 하는 교육 방향이 중요하다. 이주민 자녀도 한국 문화를 다문화로, 일반 아이들도 그들의 문화를 다문화로 받아들이면서 문화다양성의 인식을 확장해 가도록 해야 한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을 동화와 포용으로 대립시키는 속내를 없애야 한다. 이제 다문화교육은 그 방향성을 손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이주민 자녀가 초등학교에 집중되었던 과거에서 지금은 초, 중, 고로 퍼져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중등 교육 대상에서의 이주민 자녀 현황과 그들에 대한 교육적 지원 항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에 대한 지원 체계를 적극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두 번째는 모든 아이들을 동일한 방향의 다문화교육의 대상으로 보는 일이다. 동화와 포용의 대립적 지향을 지금 이 시대는 요구하지 않는다. 이미 전 세계적 흐름이 된 다문화적 조건이므로 모두가 한 덩어리로 다문화주의를 소화해야 한다. 세 번째는 다문화 또는 다국적 차원의 상호 이해와 교류에 대한 교육적 접근의 실행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문화와 나라에 대하여 그들과 함께 사회적 어려움과 고민을 나누고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국제이해와 교류 그리고 세계시민교육이 바로 그것이다. 직접 이동하면서 만나야 하는 오프라인 소통의 시대는 아니므로, 기획과 방안이 만들어지면 다양한 온라인 시스템이 그 방법을 도울 것이다. 구별이 사라지고 더 넓게 통합과 융합이 이루어지는 이 시대에, 국제이해, 세계시민교육으로 확장해 가는 다문화교육은 모든 학생들이 세계 속의 자아를 확인하는 데에 가장 확실한 교육 기제가 될 것이다. /송영주 전 군산동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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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15 13:35

유 아 낫 ‘언론’

이태원 참사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다. 수은주는 초겨울로 내려갔다. 라디오 방송의 음악은 낮게 가라앉았다. 귀에 익은 마이클 잭슨의 ‘You Are Not Alone’이 흘러나왔다. 쉽사리 가시지 않는 노래의 여운을 느끼려 인터넷을 검색했다. “비록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당신은 항상 제 마음속에 있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랍니다…” 국가 애도 기간에 이태원역 1번 출구에는 국화와 손편지들이 가득 쌓였다. 서울 곳곳에 설치된 참사 희생자 분향소에는 11만 명이 넘는 추모의 발길이 이어졌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처럼 시민들은 어여쁜 청춘의 넋들에게 애끊는 마음을 전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라고. 참 많은 국민이 눈물을 흘렸다. 슬픔과 분노와 억울함이 먹먹해진 가슴 속에서 끈적하게 뒤엉켰다. 무엇보다 국민의 안전한 일상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 책무다. 참사로 희생된 못다 핀 꽃들의 절규와 비명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울다 울다 쓰러지고 지친 유가족들의 아픔을 따뜻하게 보듬어야 한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부상자 치료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충격과 혼돈의 시간이 지나면서 베일에 싸였던 그날의 진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당국의 허술한 대응, 늑장 보고, 컨트롤 타워 부재 등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양상이다. 무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정직한 자세로 국민 앞에 고개 숙여야 한다. 참사 초기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언론의 보도 난맥상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세월호 참사 때 국민은 언론에 낙인을 찍었다.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인 ‘기레기’라는 비아냥이 그것이다. ‘전원 구조’라는 의도치 않은 오보는 맹목적 받아쓰기의 결과물이었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이며 무책임한 언론의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결국 국민은 언론에 대한 믿음을 거둬들였다. “당신들은 언론이 아니다”라고. 급기야 마이클 잭슨의 ‘You Are Not Alone’을 음차(音借)한 “유 아 낫 ‘언론’”까지 등장했다. 언론은 자신을 가리켜 ‘국민의 대변자’라고 강변하지만 정작 국민으로부터 손가락 욕을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당시에 한국기자협회 대표일꾼으로 활동하면서 「세월호 참사 보도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후 주요 언론단체들이 합심해 「재난 보도 준칙」을 제정했다. 어설픈 속보 경쟁과 부정확한 보도로 더 이상 국민의 불신을 초래하지 않도록 하자는 부끄러운 반성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참사 보도에서도 언론은 실수와 잘못을 연발했다. 참사 당일 모자이크 처리 없는 현장 사진, 참사 영상의 무분별한 반복과 재생, “마약이 돌았다”는 미확인 추측 보도, “00머리를 찾아라”는 마녀사냥식 보도, 온라인상의 선정적인 기사, 유가족들에 대한 무리한 인터뷰가 이어졌다. 세월호 참사 당시와 판박이다. 저널리즘은 철두철미하게 공공의 안녕과 이익에 부합해야 한다. 그리고 시민에게 충성해야 한다. 독자이면서 시·청취자인 국민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언론의 존립 의미가 사라진다.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이라고 했다. 국민의 믿음이 없으면 정부도 언론도 제대로 설 수 없다는 뜻이다. 언론은 국민이 처한 삶의 현장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고, 국민과 함께 꿈꾸며, 국민의 불안을 해결하는 ‘공감의 언론’으로 거듭나야 한다. /박종률 우석대학교 교양대학 교수·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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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08 14:09

노년의 아름다움, 그 영원한 발라드를 위하여

지난 주말 어느 노부부가 아침 일찍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교통 체증에 시달렸지만, 가을의 정취를 즐긴다는 기대감에 피로도 몰랐다. 서울 도심을 빠져 나와 단풍의 명소인 ‘○○숲’에 도달했다. 즐거움도 잠시였다. 매표소에 가니 예매했냐는 질문을 받고 당황한다. 여기는 온라인 예매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들 부부는 직접 현지에서 표를 구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지만, 큰 착오였다. 입장할 수 없었다. 어디 이 뿐이랴. 주변 매장에 가서 늦은 아침을 먹으러 패스트푸드점에 들렀는데, 이제는 ‘키오스크’ 시스템이 사람의 손을 더듬거리게 한다. 일상을 영위하는 노인의 고통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인터넷 뱅킹은 먼 나라 얘기이다. 은행을 직접 찾아 오랜 시간 기다림 끝에 용돈을 인출한다. 온라인 쇼핑이나 카드 사용도 익숙지 않다. MZ세대들은 스마트폰으로 다 할 수 있다지만, 그들에게는 이 기계는 단지 전화일 뿐이다. 병원도 매일 출근하듯이 간다. 그나마 싼 가격으로 치료를 받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오늘의 소일거리를 찾아본다. 딱히 떠오르는 일은 없다. 노인 부부의 평균적 삶의 모습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였다. 경제 소득의 증대와 의학의 발달로 평균 수명이 늘면서 노인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기대 수명도 1970년 62.3세에서 2020년에는 83.5세가 되었다. 2005년에는 65세 이상의 노년 인구가 전체 인구의 7.4%로 증가하여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였다. 2026년에는 20.8%로 예상되어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할 것이라고 한다. 고령화 사회에서는 여러 사회문제가 발생한다. 경제 성장의 둔화, 노인 부양의 부담 증가, 노인 빈곤과 질병 및 소외 문제, 세대 간 갈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우리나라 노인의 삶을 드러내는 통계결과는 그리 밝은 편은 아니다. 노인 4명 중 3명은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니 참 우울하다. 그래도 제도의 개선이나 관계 기관의 노력에 노인 복지가 많이 나아졌다. 반면에 일상 속의 노인 문제인 고독과 사회소외는 세대를 넘어 해결해야 할 공동과제로 남아 있다. 우리의 전통 윤리인 경로효친 사상이 복원되어야 한다. 젊은이도 예비노인이라는 의식이 필요하다. 또한 노년 세대도 젊은이를 이해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가꾸는 당찬 삶을 살아야 한다. 노인은 그저 나이가 들어 힘없는 존재가 아니다. 젊음을 가꾸었던 위대한 경험이 있다. 인터넷도 배우면 그만이다. 노풍당당(老風堂堂)이다. OPAL족 (Old People with Active Lives)이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는 노인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활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가꾸어 가는 노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노인의 눈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가치가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법이다. 그 인생론은 많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여유와 관조에서 나온다. 노인들의 작은 시선이 모여 우리 사회를 가꾸는 아름다운 발라드로 울리길 기대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김광섭, <저녁에> 일부). 대중가요 가사로 친숙한 이 시에서 인생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에 이른 눈을 볼 수 있다. 그 눈은 우리 주변의 노인이다. 별을 통해 삶을 관조하는 시선이 참으로 아름답다. 감동적인 발라드이다. /김용재 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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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01 09:38

SPC 허영인 회장이 카톡을 그만 두어야 하는 이유

며칠 전에 중년 남자 둘이서 막걸리를 한잔했다. 전반적으로 즐거운 분위기에서 가벼운 반주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우리 나이로 60을 살짝 넘긴 맞은 편 남자의 눈시울이 붉다. 아침에는 대놓고 울었다고 한다. SPC 계열 SPL 제빵공장에서 작업 중 숨진 20대 노동자에게 애인이 보낸 카톡이 눈물의 원인이었다. 언론보도를 통해 전해진, 이미 사망한 다음에 사망한 줄 모르고 애인이 보낸 애틋한 내용의 카톡이 많은 이들을 슬픔에 젖게 했다. 꽃다운 나이에 허망한 죽임을 당한 망자에 대해 애도하는 마음이 크지만, 졸지에 사랑하는 사람을 기이한 방식으로 빼앗긴 연인의 슬픔에 대해서도 내 앞에서 술을 마신 남자처럼 많은 사람이 공감한 듯하다. 카톡에서 특별히 애절함을 느낀 대목은 미수신을 나타내는 ‘1’ 표시였을 것이다. 보편문법이 된 카톡 문법에서 0과 1의 이진법은 문법의 근본 구성요소이다. ‘1’과, ‘1’이 없는 내용상의 또는 가상의 ‘0’이란 두 숫자가 만들어낼 대화의 경우 수 중에 이번 카톡처럼 애절한 대화는 거의 없지 않을까. 누구나 경험하는 카톡 이진법 체계의 감성 가운데 사망한 노동자의 애인에게 남겨진 ‘1’만큼 처연한 숫자가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가며 그들이 던진 ‘1’은 창보다 깊이 그의 가슴에 박혔다. 그의 카톡에 남아있는 ‘1’들이 계속해서 그의 가슴을 찌르고 또 찌를 것이기에 우리는 그 ‘1’ 때문에 함께 눈물을 떨군다. 대다수 시민이 아는 이런 ‘1’의 의미를 SPC는 모르는 듯하다. SPC에게 사망한 노동자는,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애인이자 친구인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노동력이었고 한 단위의 비용일 따름인 듯하다. 남들이 돌팔매질할 때 섞여서 돌멩이 하나 더하려는 인민재판 심사(心思)에서 너무 단정적으로 말한다고? SPC의 사고 대처를 보면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게 된다. SPC 허영인 회장은 지난 21일 대국민사과 기자회견에서 “안전경영을 위해 1000억 원을 투자하겠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읽은 뒤 질의응답 없이 회견장을 떠났다.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반응이 나온 것이나 대국민 사과라는 언론플레이를 할 게 아니라 유족에게 먼저 진심을 담아 사과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지탄이 이어진 것은 당연했다. 허 회장에게, SPC에게 이번 인명사고는 노동력 ‘1’의 감소에, ‘1’에다 무수히 많은 ‘0’을 더 붙여서 대처해야 하는 돌발적이고 (사람 때문이 아니고 돈 때문에) 참혹한 비용 이슈에 불과했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SPC 대응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유족에게 장례용품으로 파리바게뜨 빵을 가져다준 행태였다. 물론 그 판단을 허 회장이 내리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러한 사소하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이 가능한, (이런 말을 써도 되는지 망설여지는) ‘기업문화’는 그의 책임이다. SPC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그리면서 ESG경영으로 세상을 밝힌다고 천명한 바 있다. ESG경영의 핵심은 ‘사람’이다. 노동자와 소비자를 사람으로 대하고, 경영자가 사람이 되는 경영. 탐욕을 분식하는 ESG경영엔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비탄에 잠긴, 사망한 노동자의 애인, 즉 허 회장 자신의 직원이기도 한 그의 가슴을 허 회장이 아직 창으로 후벼파고 있다고 말하면 억울한가. ‘0’의 개수보다 ‘1’ 자체가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 리 없으니 억울할 것도 같다. /안치용 ESG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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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25 14:01

효과성 검증 계획이 없는 기초학력 책임제는 공허한 외침이다

비교적 진보 교육 철학이 강했던 지난 시대의 반성으로 급물살을 타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기초학력’ 문제이다. 우리 지역에서는 이에 대한 공감과 열망이 더 커 보이기도 한다. 유독 뒤쳐져 있다고 생각한 학력과 진학으로 과거 전북 교육의 업적을 거의 가려버리는 느낌까지 있다. 이에 기초학력 책임제 공약의 실현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계획과 과정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열망은 정작 그 도달과 성과에 있다. 실현과 도달을 열망하므로, 노력했으나 어려웠다는 결과가 예측되는 계획은 안 될 얘기다. 더 나은 수준의 지속적 지향이 아닌, 오직 기초학력 영역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욕심은 타당성이 있다. 요즘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량 교육과정 시대이기는 하다. 그러나 기초학력에 대해서만큼은 그 결과와 성과가 교육적 양심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기초학력 책임시스템 구축에 대한 구체적 과정에서 ‘학력’에 대한 개념 문제가 아마도 난관이었을 것 같다. 과거의 교육환경에 익숙한 사람들은 학력의 개념을 의심 없이 교과 학습력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미래인재 양성에서 요구되는 것은 교과 학습력보다는 ‘역량’이다. 그러므로 학교교육의 목표와 과정, 방법 등이 역량 개발 중심으로 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늘 사용해 왔던 학력과 실력이라는 말도 어느덧 역량에 가깝게 그 의미가 확장되어 가고 있음이 감지된다. 그러나 역량 교육과정은 최소한의 교과 학습력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법률에 명시된 대로 ‘학교의 학생이 학교교육과정을 통하여 갖추어야 하는 최소한의 성취기준을 충족하는 것’의 도달을 말한다. 따라서 기초학력을 논할 때는 매우 순수해질 필요가 있다. 학력의 확장된 의미를 동원할 필요 없이 기초 학습력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준비하고 있는 기초학력 책임시스템 계획에는 그 도달에 대한 강력한 장치가 없다. 다시 말하면 효과성 검증 단계를 굳이 삭제하고 있다. 진단 후 보정 노력을 했으면 그 도달 여부의 검증과정이 있어야 책임제가 아닌가. 도달 검증까지 하면 역량 중심의 이 시대에 구시대 유물처럼 너무 학습력 중심으로 간다는 비난을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기초학력조차도 역량으로 보는 오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역량 개발의 필요조건인 기초학력은 자기이해, 진로설계 등에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힘으로 규정되면서 이미 학생인권의 출발로서도 해석이 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올해 3월 25일부터 시행된 ‘기초학력보장법’은 ‘모든 학생의 기초학력을 보장하여 능력에 따라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그 기반을 조성’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의무를 학교장에게 주고 있다. 학교는 시행하고 교육청은 적극적 지원을 함으로써 기초학력은 반드시 ‘도달’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계획을 잘 짜도 실행이 만만치 않을 것인데, 계획 단계에서부터 효과성 검증을 삭제하는 것은 학교 현장을 충분히 돕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책임’이라는 말을 무색케 한다. 기초학력 도달의 토대 위에서 실현되는 역량 교육의 생동감은 학생 스스로가 먼저 실감할 것이고, 학부모, 교사도 그 교육력 제고에 한층 더 큰 신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도달할 만한 믿음직한 계획을 통해 기초학력을 보장하고, 여기에 희망찬 역량 교육을 더하여 인재 양성의 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송영주 전 군산동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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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18 14:24

시끄러운 정치, 무책임한 언론

국정감사가 한창이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막말은 으레 단골 메뉴다. 고성과 삿대질, 호통과 으름장, 폭언과 인신공격이 난무한다. 정회는 기본, 파행이 다반사다. 올해는 수위가 한층 높아졌다. “차라리 혀 깨물고 죽지 뭣 하러 그런 짓 합니까”, “뻘짓거리 하다가 사고로 죽어도 공상이냐”, “개나 줘버려”, “너나 가만히 있으세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첫 국정감사. 여야가 뒤바뀐 탓일까. 서로를 벼르며 으르렁댄다. 창과 방패, 공격과 수비의 소재도 즐비하다. 윤 대통령의 외교 참사와 비속어 논란, 김건희 여사의 각종 의혹,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 등 휘발성이 큰 쟁점 현안들이 뒤얽혀 있다. 그야말로 여야 간 힘겨루기의 한판 장이 섰다. 정치인의 막말은 의도된 발언일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국정감사에서는 그럴 개연성이 높다. 보여주기식 다목적 포석이 그것이다. 첫째는 피감기관을 상대로 한 ‘갑’의 힘 과시용이다. 둘째는 대통령이나 당 대표를 의식한 내부 충성용이다. 셋째는 여론과 민심을 의식한 대(對)언론용이다. 의사진행 발언은 불쏘시개다. 자신을 한껏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의사진행 발언은 어느 순간 의사방해 발언으로 변하고 만다. 정책과 민생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국정감사는 행정부를 감시 견제하는 국회의 권한이자 의무다. 그런데 국감에 국정이 없는 꼴이다. 빈 수레가 요란하듯 정치판이 너무 시끄럽다. 정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말이 있다. 자신의 부고(訃告) 기사 빼고는 좋은 것이든 설사 나쁜 것이든 언론에 보도되는 것이 낫다고. 말은 정치의 처음이자 끝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의 99%는 말”이라고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를 가리켜 “흙탕물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이라 했다. 말의 힘이 곧 정치인 것이다. 품격과 인품의 ‘품(品)’ 자에는 입 ‘구(口)’가 세 개 있다. 언어와 인격의 상관관계를 의미한다. 시끄러운 말에 품위가 있을 리 만무하다. 시끄러운 정치에는 언론도 한 몫을 거든다. 아니 한 몫을 뛰어넘는다.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 언론이 정치인의 저질 언어를 무책임하게 퍼 나르는 것이다.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자극적 막말을 무한 재생 반복한다. 시청률을 염두에 둔 선정적 행태다. 결국 욕설에 가까운 정치인의 폭언은 소셜미디어를 타고 번진다. 건강한 사회는 그만큼 더 멀어진다. 정치에 대한 우리 언론의 취재 방식과 낡은 문법을 고쳐야 한다. 언론사 정치부에서만 잔뼈가 굵은 한 전직 기자 선배는 일갈했다. “정치부 기자가 구태 정치를 바꾼 적이 있느냐”고. 정치권의 말싸움과 정치인의 입만 바라보는 언론의 게으른 행태를 꼬집은 말이다. 정치부 기자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기록해야 한다. 공적 사안에 대한 분석과 전망, 나아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과거에는 언론이 「오늘의 국감 스타」나 「국감을 빛낸 인물」을 선정했다. 자연스레 국회의원들끼리 선의의 경쟁이 이어졌다. 혹여 막말을 내뱉은 정치인은 여론의 비난 뭇매를 피해 가지 못했다. 하지만 요즘 등장하는 정치인의 막말은 다분히 방송 카메라를 의식한 계산된 행위로 비칠 때가 많다. 이번 국감도 유튜브로 실시간 중계되면서 막말의 강도와 말싸움의 빈도가 상승 일색이다. 정치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시끄러운 막말은 사라져야 한다. 이와 함께 정치인의 말만 쫓아다니는 언론의 취재 관행도 바뀌어야 한다. 박종률 우석대 교양대학 교수·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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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11 17:47

메타버스 세계와 감성의 ‘아고라’

빈민가 컨테이너 촌에 살고 있는 ‘웨이드 와츠’는 가상현실 ‘오아시스’에 매일 접속하는 청년이다.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도 ‘오아시스’ 안에서는 멋진 캐릭터로 자기 꿈을 맘껏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오아시스’를 만든 괴짜 천재 ‘할리데이’가 죽는다. 그는 죽기 전에 3개의 “이스터 에그”를 다 찾은 이에게 5천억 달러와 오아시스 소유권을 주겠다는 유언을 남긴다. 첫 번째 미션을 깬 이는 바로 웨이드였다. 갑자기 유명해진 웨이드는 거대기업 IOI의 살인 위협에 쫓긴다. 꿈과 희망의 ‘오아시스’는 누가 차지할 수 있을까. 웨이드와 IOI의 대결이 진짜 세계와 가상 세계를 오가며 흥미롭게 전개된다. SF영화 <레디플레이어 원>이다. 이 영화에서는 실재의 현실과 메타버스로 들어간 가상현실이 공존하며 전개된다. 영화 속의 메타버스 현실은 환상이 아니다. 우리 삶에 이미 와 있다. 메타버스는 ‘초월’을 의미하는 “meta”와 ‘세계’를 의미하는 “universe”의 합성어이다. 인공지능(AI) 기술과 함께 메타버스가 우리의 삶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두뇌 스포츠의 꽃이라는 바둑계에서 AI를 이기는 프로 기사를 찾을 수 없는지 오래이다. 이제는 가상인간이 등장하여 현실 세계에서 실제 사람처럼 여러 경제활동도 한다. 광고 모델 ‘로지’나 쇼호스트로 데뷔한 ‘루시’가 낯설지 않다. ‘메타 폴리스’라는 플랫폼을 구축하여 가상 오피스를 만든 회사도 있다. 직원들은 자신의 아바타로 가상 오피스에 출근해 일을 한다. 완전 원격 근무이다. 가상의 지구를 한 구역 단위로 사고파는 부동산 매매 메타버스도 등장했다. 이 플랫폼 안에서 백악관을 구입한 사람이 1년 만에 1415배의 차익을 얻기도 하였다니, 가상세계가 현실을 닮아간다. 메타버스의 세계가 게임이나 오락을 넘어 이제 사무실, 상점, 회의장, 콘서트, 교실, 운동장 등의 가상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다. 정부에서도 메타버스 산업 육성 전략을 발표했다. 메타버스 허브를 구축하여 일상생활과 산업, 교육과 의료, 사무 등의 플랫폼 개발에 적극 나선다는 계획이다. 교육계에서도 ‘미래교육 캠퍼스’ 구축이나 AI, 메타버스를 접목한 수업혁신으로 교실혁명을 꿈꾸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보 산업기술의 도입에서는 모든 소통방식을 ‘사람’을 중심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AI와 메타버스의 세계가 우리의 삶을 통째로 대체할 수는 없다. 인간 세계에 도전하는 과학기술은 감성의 ‘아고라’를 넘을 수 없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아고라(agora)는 일상적인 생활의 중심지이자 시장이었으며 시민들이 서로 만나 소소한 개인사를 얘기한 광장이었다. 메타버스 광장 시대에 더욱 가치를 발휘하는 것은 이러한 아고라 광장이며, 감성의 세계이다. 기술도 휴먼 테크(human tech)이다. ‘돌봄’과 ‘공감’, ‘관계’와 관련한 감성적 세계는 인간의 고유성이다. 메타버스 세상이 와도 ‘아고라’ 광장은 중요하다. “이스터 에그” 미션의 열쇠도 사랑과 우정이었다. 오늘 한번 자신과 친한 ‘관계’가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공감’의 언어를 던져 보자. 직접 얼굴을 보며 환한 낯빛으로 말을 걸어보자. 오늘 잘 지냈어? 정말 보고 싶었어. 네 말이 옳다. 너무 잘 했어, 그래 우리 같이 가자. 옆 사람을 배려하고 소통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자, 그가 바로 진정한 ‘아고라’의 시민이다. /김용재 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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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0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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