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새벽메아리] 최여겸의 순교지는 보존돼야

 

 

 

 

 

주자학에 찌들 리고 공리공론에 병들어 있던 1784년 봄 조선왕조의 민중들에게 들려온 까치소리는 당시 북경사신행차에 따라갔다가 하느님의 종이 되어 돌아온 이승훈의 복음이었다.

 

 

그때 짓눌리고 부대끼며 내일이 없이 살아온 민중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일깨워 준 이른바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여온 천주교의 새 복음은 우리 전북지방에도 당시 호남의 대부호였던 유항검이 복음의 사도가 되면서 그 서막을 열었는데 1791년 진상땅의 선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해 유교적 제사를 배척하고 천주교신앙을 고집하다가 전주남문 밖에서 외종 4촌인 권상연과 함께 이나라 최초의 순교자가 되면서 이 후 박해 때마다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이 지방 교회(성당)은 밟혀도 베어도 죽지 않는 잡초처럼 되살아 나곤하였다.

 

 

1801년 6월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등극하면서 천주교의 지도자들은 칼바람이 일어 잡혀서 순교하거나 나약하여 배교하는 참혹한 박해를 당하였다.

 

 

특히 전라도 지방은 너무도 처절하게 이뤄져 유항검을 비롯한 천주교 신도의 중심인물 2백여 명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형조와 의금부에서 사교를 믿고 서학인 들을 불러들여 나라를 위태롭게 한 대역부도 죄인으로 몰려 전라감영으로 이송되어 각기 자기가 사는 고을에서 처형시킴으로서 사학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일벌백계의 표본을 삼았던 것이다.

 

 

윤지충은 고산 윤선도의 6대손으로 고종4촌인 정약전, 약용 형제들과의 교류를 통해 명례방의 김범우와 알게 되어 천주교 입문 서적을 입수하여 그에게서 전교를 받아 입교하게 되었는데 윤지충의 「공술기」에 의하면 무장 사람 최여겸이 찾아와 교리를 배웠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최여겸은 충청도 한산으로 장가를 들었는데 여기서 충청도의 사도인 이존창을 만나게 되어 그에게서 다시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고 독실한 신앙인이 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그 후 최여겸은 고향에서 열렬히 전교하여 그가 입교시킨 사람은 문헌으로 알 수 있는 사람만 28명이나 되며 무장에 사는 조카 최수천, 최일안 함평의 남중만 흥덕의 김처당 영광고을 양반으로 그의 제자인 이화백등 많은 사람을 입교시켜 그는 전라도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사람으로 활약하다가 1801년 7월19일 고향인 무장 개갑장터에서 순교하였다.

 

 

순조실록의 순조1년 7월13일 정해조에 보면?호남의 한정흠, 최여겸, 노복 천애 등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여 그릇된 방면으로 인도하고 독실하게 믿으며 따라붙어 익혀서 십계명을 버리기 곤란하고 한번 죽음을 답갑게 받는다고 말하고 있으니 아울러 다시 자백을 받은뒤 전주 감영으로 압송하여 각각 그 고을에서 사형에 처하소서? 이렇게 해서 최여겸 등 세 사람에게 사형이 선고 되었다.

 

 

「무장 최여겸의 결안초(結案招)」를 보면 그는「처음에는 윤지충을 따라 사설(천주교리)에 마음이 쏠렸고 마지막에는 이존창을 따라 독실히 믿고 익히면서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속여 미혹시켰으며 널리 남녀를 가르치고 종당에는 자신을 망치고 남들까지 그르쳤으니 만 번 죽여도 애석함이 없다.....(운운)」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도리 켜 볼 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 등의 사적이 행정구획 변경으로 이미 충남으로 이적된 점을 감안하면 1801년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중 호남의 사도 유항검이 그해 9월17일 유중철(요한)이 10월9일 유요한과 동정부부인 이순이(루갈다)가 12월28일 순교한 한 사실과 비유할 때 최여겸은 한정흠, 김천애와 함께 전북지방에서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는 셈이다.

 

 

여기에서 최여겸의 사적은 몇 년 전에 필자가 향토사를 정리하기 위해 서울 명동성당에 있는 한국천주교회사 자료실에서 문헌에 의한 확실한 근거 자료를 뽑아와 천주교회 당국과 지역신문 등에 밝혀 놓은 적이 있다.

 

 

순수한 신앙적인 성지계발이 아니더라도 지방화시대에 걸맞는 지역문화 관광자원을 발굴하는 차원에서라도 최여겸의 순교지는 우리시대에 꼭 챙겨져야 할 명제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얼마 전에 들은 얘기로는 우리지역의 최초의 신유박해 최여겸의 순교지인 무장 개갑장터가 아직도 사적지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두고 안타까운 감회를 접어 보면서 이렇게 메아리쳐 보는 것이다.

 

 

/ 이 기 화(고창문화원장)

 

 

===================================

 

 

 

 

 

 

 

 

 

 

 

 

 

 

 

 

 

 

 

 

 

 

 

 

李 起 華 프로필

 

 

 

 

 

 

 

 

고창문화원장(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전북지회장(현)

 

 

 

 

한국문인협회 회원(현)

 

 

 

 

전라북도 문화재 전문위원 역임

 

 

 

 

전국문화원 연합회 부회장 역임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100
최신뉴스

군산새만금 글로벌 K-씨푸드, 전북 수산업 다시 살린다

스포츠일반테니스 ‘샛별’ 전일중 김서현, 2025 ITF 월드주니어테니스대회 4강 진출

오피니언[사설] 진안고원산림치유원, 콘텐츠 차별화 전략을

오피니언[사설] 자치단체 장애인 의무고용 시범 보여라

오피니언활동적 노년(액티브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