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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메아리] 밑그림이 없는 사람 - 전희식

전희식(농부·'똥꽃' 저자)

하루하루가 신비의 연속이고 매 순간이 신성함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빈 마음이 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모든 수행과 성찰은 그 시간을 단축시키거나 없애는 것.

 

지난 일요일은 참으로 오랜 세월을 건너 딸아이와 여유로운 나들이를 했고 서울의 명동 입구에 자리 잡은 다큐전용관에 가서 영화를 봤다. '살기 위하여'라는 영화다. 이강길 감독이 만들었는데 나오는 인물들은 새만금 해창 갯벌과 농성천막에서 낯이 익었던 얼굴들이다.

 

영화관에 도착하기까지 여러 탐색과 선택들이 환상에 가까울 정도로 절묘했다. 딸과의 데이트효과다. 학교를 그만두고 한 학기를 도법스님 따라 순례를 했던 딸아이도 영화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그런데 하찮은 일로 마음을 상하게 되었다.

 

"나 시각장애인인데요. 자막 나오면 좀 읽어주세요."

 

자리를 잡기위해 딸아이와 손을 잡고 통로를 지나는데 억센 손이 쭉 뻗어와 내 팔을 잡았던 것이다. 잔졸하게 이것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상영되기까지 한 시간여를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이 분은 계속해서 큰 소리로 떠들어 댔었다.

 

'꼭 이러지 않아도 될 텐데 참 무례하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상영되는 새만금 영화도 영화려니와 전북인으로서의 자긍과 명예를 살려 딸은 떨어뜨려 놓고 그 분 옆자리에 앉으며 그러마고 했다.

 

영화가 시작되기까지 빈 시간이 있어 나는 그분에게 말을 걸었다. 망막에 연결되는 칩(chip)회로를 이용하여 세상을 완벽하게 볼 수 있는 전자 눈이 나왔다는 기사를 떠올렸던 것이다.

 

두어 달 전에 알려진 소식이었는데 그 분은 "나 그런 것 몰라요."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얄팍한 내 친절이 거절당하는 기분이었다. 머쓱했지만 좀 있다 한 마디 더 했는데 그것 때문에 크게 마음을 상하게 되었다.

 

디브이디(DVD)의 선택사항처럼 영화나 티브이에서도 시청자의 선택에 따라 자막을 읽어주는 기능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을 걸었다.

 

"좀 조용히 할 수 없어요? 나 지금 음성 책 읽고 있거든요?"

 

세상 비장애인들은 모두 장애인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완고함으로 읽혔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딸 곁으로 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영화를 보았다. 충실히 자막도 읽어줬다. 신산한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분은 영화가 끝나자마자 흰 지팡이를 짚고 먼저 일어나 가버렸다. 장애인으로 살면서 학습된 최소한의 자기존재 확인이 아니겠냐고 딸과 얘기를 나눴다.

 

종로로 곧장 가서 박현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야 영화관에서 있었던 일이 내 인생에게 뭘 말하고자 했는지를 겨우 알아챘다. 박현 선생은 감사(感謝)는 감어물 감어심(感於物 謝於心)의 준말로서 모든 사물과 현상, 행위에 공감하며 조건없이 그 대상을 향해 온 마음을 보내드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뭔가에 대한 밑그림을 갖고 있다는 것은 바깥을 향해 덜 열려 있는 내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평소 나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장애인은 정성으로 보살피고 배려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무례하면 안 된다는 완고한 밑그림을 갖고 있었다.

 

/전희식(농부·'똥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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