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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메아리] 문화의 충돌과 화해 - 허소리

허소라(시인. 군산대 명예교수)

 

요즈음 젊은 세대들의 인생관이나 삶의 지표에 보다 영향을 주는 것은 일명 친구문화, 또는 서구문화로 대변되는 '수평문화'권이지 할아버지나 아버지로 대변되는 전통문화. 즉 '수직문화'권이 아니다. 지난 70년대 초, 영등포공단에서 일하던 남장 아가씨가 칼을 들고 강도노릇을 하다가 붙들린 일이 있었다. 사연인즉슨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미제 쌍마 청바지를 사입기 위해서였다. 친구들이 너도 나도 청바지를 입고 뽐내는데 그 대열에서 낙오되기가 너무 싫었던 것이다.

 

유서 깊은 한국문화 속에서 수세기가 넘게 세도부리던 '수직문화'가 '수평문화'에 치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세기말 이른바 개화기 무렵부터라 할 수 있다. 옛날엔 가족 모두가 수입원이었다. 사내 아이는 제각기 낫과 꼴망태가 있었고 계집애에겐 반달 모양의 달챙이 수저가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점차 학교 수가 늘어나고 근대화의 물결이 일면서 아버지는 온갖 지출원의 상층부에 홀로 남게 되었다. 이무렵 양질의 훈육은 학교보다 오리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엄존하는 가정이었다.

 

어렸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이웃 형들의 강요에 못이겨 남의 참외밭에 들어갔다가 발각돼 도망 나오는데 그 중 한 녀석의 새 고무신 한짝이 벗겨지는 바람에 붙들리고 말았다. 그날 밤 밖에서 소문을 듣고 오신 할아버지께서 당장 광 속에 밀어넣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잘 못했어요' 라며 울먹여도 소용이 없었다. 내 생애 최초의 암흑과 대면이었다. 얼마가 지났는지 두루마기를 입으신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뜻밖에도 선산이었다. 증조부 묘 앞에 이르자 잠시 묵념하시던 할아버지는 갑자기 '아버님 면목없습니다...'로 시작하여 당신의 훈육실패를 구체적으로 통회하는 것이었다. 이 때에 어린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 하나의 범죄는 당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상에게까지 보고가 되는 범죄의 연루성 때문이었다. 이 때 나는 '할아버지 다시는 앙그럴께요!' 라면서 할아버지 두루마기품에 안겨 한없이 울었다. 이후로부터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일거수 일투족은 평생 가감없는 내 삶 깊숙이에서 교과서가 되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 우리집 아이가 7세때 이웃집 세차장 아이들의 꼬임에 공과금 낼 돈의 일부를 가져다가 함께 사탕도 사먹고 써버린 일이 일어났다. 큰일이다 싶어 그 옛날 할아버지가 쓰던 단방약을 쓰기로 했다. 그러나 도시에는 광도 없고 선산도 없어 대신 건넛방 서재 책상위에다 할아버지 사진을 세워놓고 '아버님 면목없습니다......' 라고 조아리면서 슬며시 곁눈질해보니 이녀석은 옛날의 나와는 딴판으로 웃고 있지 않은가? 화가 치밀어 '울어도 센찮은데 웃어?' 하고 따귀를 한 대 쳤더니 눈물을 질끔 흘리면서 '사진이 어떻게 알아들어?' 라고 오히려 아빠가 사리에 맞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충격을 받은 것은 거꾸로 나였다. 이녀석은 옛날의 나와는 달리 벌써 과학의 물을 먹은 놈이었다. 옛날 할아버지가 쓰시던 단방약은 일거에 무산된 것이다.

 

좋든 굳든 지금은 아들문화 즉 '수평문화'의 극치에 와 있다. 그러나 이 두 문화 사이엔 엇박자만 있는게 아니다. 서로에겐 각기 장점이 있다. 이 두 문화가 해야 할 일은 서로의 장점을 용접하기 위하여 시급히 화해하는 일이다.

 

/허소라(시인. 군산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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