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적 노동환경 / 열악한 노동실태 / 재생산 담론에 불과
서양의 가족주의는 부부 중심의 핵가족 원리를 기초로 한다. 가족 내에서 부부 중심의 이익을 극대화 하려는 공리주의적 개인주의를 취한다. 우리나라의 가족주의는 조상-부부-자손으로 이어지는 종단적인 가문을 중심으로 개인의 행동규범이 정해진다. 가족공동체가 우선시되는 문화에서 개인주의는 비판의 대상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족주의는 가족 밖에서 힘을 발휘한다. 가족 같은 노사가 회사의 어려움을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언론에 등장한다. 사장이 직원을 자식처럼 아끼니 자식인 직원은 힘을 모아 가족이라는 회사를 살린다? 왕이 부모로서 백성을 자식처럼 대하면 태평성국이 된다는, 귀에 딱지가 붙을 만큼 들어왔던 이야기다.
5년 전, 지역문화인력의 노동실태를 조사했었다. 유사 직종보다 학력은 높은데 임금은 낮았고, 노동시간은 많았다. 법적 휴가일수를 제대로 채우는 사람이 없었다. 초과근무수당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조직의 충성도는 높았다. 조사한 이들 중 60% 이상이 이직을 고려한 적이 없었다. 몸은 힘들지만 일의 성취감이 크다는 이도 있었고, 일을 배우는 과정이니 참아야한다는 이도 있었다. 힘을 모으면 좋은 시절이 꼭 온다는 무한긍정의 태도를 보이는 이도 적지 않았다.
조금만 힘들어도 직장을 옮기는 요즘 청년과 다르다며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속내는 복잡하다. 지역문화계의 열악한 노동실태는 전근대적인 노동환경이 본질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처한 현실을 문화영역의 특수성으로 합리화하는가 하면, 가족처럼 일하는 것을 문화계의 관행이라며 당연시한다. 이런 생각이 후배에게 이어지면서 지역문화계에서는 열악한 처우를 참으며 조직을 우선해야하는 문화가 재생산되고 있다.
지역의 문화단체는 영세하기 때문에 여러 사업을 맡아 운영비를 마련한다. 직원 수는 적은데 일이 늘어나니 개인에게 맡겨지는 업무가 엄청나다. 직원들의 불만은 당연하다. 하지만 조사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은 당연히 자기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참고 견디면 조직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임금도 오를 것이다”며,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공리주의적 개인주의에 앞서 가족공동체인 조직을 우선시했다.
우리나라의 가족주의가 청산되어야할 대상은 아니다. 회사를 집처럼, 사장이나 동료를 가족처럼 대하는 것이 잘못된 일도 아니다. ‘가족처럼’이라는 말을 내세우며, 본질인 전근대적 노동환경을 바꾸려는 태도를 개인의 이기심으로 치부해버리는 분위기와 이를 당연시하는 문화가 문제다.
열악한 노동조건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두는 직원에게 “직원이 아니라 가족처럼 대했는데 섭섭하다”고 말하는 회사대표가 많다. 정말 가족이라면 이런 막장도 없다. 부모는 자식에게 일을 엄청나게 시키는데 보상은커녕 가족이니 참으라 한다. 자식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묵묵히 일을 한다. 콩쥐처럼.
어떤 부모도 자식에게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가족처럼 일해 회사가 커졌다고 해서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듯 회사를 물려주지 않는다. 가족이라 생각했던 조직은 융성해지나, 내 삶이 반드시 융성해지는 것은 아니다. 조직대표도 어렵다? 그들은 지역문화계에서 명예라도 얻지 않은가.
‘가족처럼’이라는 말은 지역문화계의 전근대적 노동환경을 덮고 열악한 노동실태를 재생산하는 담론에 불과하다. ‘열정페이’와 다르지 않다. 왜곡된 가족주의, 청산되어야할 지역문화계의 적폐이다.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