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과거 바르게 이해하고 현재의 성장발전을 약속하며 미래 내다보는 안목 기르는 것
지난 8월 29일, 웅치전적비가 고즈넉이 서 있는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옛 곰티재에서 임진왜란 당시 전주성을 함락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전략에 따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군에게 조선의 관군과 의병들이 장렬하게 산화했던 애국영령추모제를 올렸다. 이날은 425년 전 음력 7월 8일로 지금처럼 몹시도 무더웠을 한여름 밤과 낮이었을 것이다.
완주군수, 소양면장과 웅치이치전적기념사업회, 소양면민과 신촌 동민들, 웅치전에서 나라를 지키려다 끝내 목숨을 바친 김제군수 정담과 황박, 정협 장군, 안덕원전에서 승리한 이정란 장군 후손들까지 참석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리고 선조 25년(1592) 8월 13일과 14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왜군 1만 6000명 중 안코쿠지에케이(安國寺惠瓊)가 거느린 6000명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2일전쟁의 참상을 오늘에 되새기며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추모제가 다할 무렵, 경북 영양에서 전날 정담 장군의 제사를 마치고 새벽부터 천릿길을 달려온 장군 후손의 인사말은 모든 청중의 심금을 울리며 온통 침묵과 정적에 머물게 하였다. 그 후손들은 임란 이후 지금까지 425년간이나 제사를 지내왔다는 위선봉사(爲先奉祀)의 정신도 그러려니와, 웅치전투가 시작되기 전 아들에게 보내는 유서편지 속에 죽음을 예견하고 나라를 지켜낸 장군의 장렬한 충혼 때문이었다.
‘나는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다. 내 갑옷 속에 나의 이름을 써 놓았다. 내가 죽는 것은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니, 내가 죽은 후에 이 아비의 시신을 찾아 가거라. 그리고 내 뜻을 이웃 일가친척들에게 알려 주어라’라 했듯이 장군의 아들이 산더미 같은 시체더미 속에서 장군의 시신을 수습하고 갑옷 속에서 그 서한을 찾아냈다고 하였다. 그날의 전장터는 1934년 왜놈들이 낸 신작로(新作路)였던 이곳이 아니라, 여기서 북쪽 2~3㎞ 떨어진 진안과 장수를 오가던 원 곰칫재 길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혈전을 벌였던 원전적지는 옛 전주부 소양면 덕봉리 앞 적래천 냇가로부터 곰티재 마루까지 황박의 1진, 이복남과 변응정의 2진, 정담의 3진 등 3중의 진영에 이르는 산간계곡이다. 6000명의 왜군들은 1500명도 안 되는 아군에게 3진까지 밀고 밀리는 전투 끝에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전주성 침공을 포기, 퇴각함으로써 조선 8도 중 유일하게 왜적에게 함락 당하지 않았다.
승병장 안코쿠지 에케이는 비록 전쟁에 이겼다고는 하나, 실제 그건 이긴 게 아니라며 ‘조선국의 충성어린 충정과 의로운 담력에 삼가 조의를 표한다(弔朝鮮國 忠肝義膽)’라는 비목(碑木)을 조선군의 돌무덤에 세웠다는 사실이 유성룡의 <징비록> 에 실려 전한다. 다행히도 완주와 진안군이 민관과 하나 되어 전적지를 복원하고 전투기념관을 건립, 성역화한다고 팔을 걷고 나서고 있다. 징비록>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영국의 역사가인 E.H. CARR가 말했듯이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역사란 과거의 사실(史實)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으로 출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성장발전을 약속하며 미래를 내다보는 바른 안목을 기르는 것이므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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