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집에 가면 어머니 곁에서 잠을 잤다. 내가 어머니 곁에 가서 자는 게 아니고 어머니가 내 곁에 와서 주무셨다고 하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그건 내가 나이가 들어서 모처럼 아들이 오면 아들보다는 내가 아들과 함께 자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잠을 자려는 내 곁에서 불을 끄고 자라고 하면서 그동안 있었던 동네의 이런저런 일들을 구술하셨다. 그건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계없이 한없이 이어졌다. 누구네 머슴이 섣달 그믐날에 도박하다가 일 년 새경을 모두 잃었다는 이야기, 누구네 부인이 바람나서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야반도주했다는 이야기, 누구네 집 아들이 서울대에 들어갔다는 이야기 등,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내가 잠이 들어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고 아쉬워하며 당신도 등을 돌려 주무시곤 하였다. 그리고 다음에 가면 이전의 이야기가 다시 반복되었다. 나는 들었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다시 들어야 했다.
전주최씨이신 어머니는 김제군 공덕면 마현리가 고향이다.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인데, 외할머니의 성씨가 동래정씨이고 그곳에는 정여립 후손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란다. 선조 때 기축옥사로 정여립 직계가 몰살되었고, 그 방계는 김제군 공덕면 일대로 격리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전주최씨인 나의 외할아버지가 정여립 후손이며 동래정씨이신 나의 외할머니와 혼인하여 처가 동네로 이주한 셈이다.
내가 들었던 어머니 구술 중에는 어머니의 자부심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어머니가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송아지를 받았다는 이야기, 나중에 영광스럽게 간호부로 가려고 하였는데 외할머니 반대로 가지 못했다는 아쉬운 이야기도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간호부 이야기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이영훈 교수의 일제강점기 위안부가 자발적 매춘이었다는 주장으로 우리 사회가 시끄러워졌다. 문득 나는 느낀 바가 있어 어머니에게 넌지시 간호부 이야기를 여쭤보았다. 어머니 말씀은 처음에 동네 이장이 아침마다 찾아와서 간호부로 취직하면 외국에 가서 돈을 벌 수 있다고 설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파출소 순사까지 찾아와서 약간은 으름장을 놓기도 하였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숨이 콱 막혔고 어머니께 속내를 드러낼 수 없었다. 혹시 어머니께서 평생을 간직해오신 추억과 자부심이 깨질까 두려웠다.
요즘에는 어머니의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해본다. 어머니는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네로 머잖아 총명도 잃으실 것이다.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와 대동아전쟁, 해방 정국과 남북 분단, 그리고 한국 전쟁, 이승만 정권과 4·19혁명, 5·16 군사쿠데타와 유신 독재, 5공 독재정권을 거쳐 민주화 시대인 오늘에 이르렀다. 한 마디로 어머니는 한국의 역사적 격변기를 모두 거치며 살아온 셈이다.
나의 전공은 구술사와 관련이 없다. 하지만 그것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대단한 거대담론이 아니더라도, 어머니께서 겪었던 집안의 소소한 일상사부터 주변의 보고들은 모든 이야기가 우리 가족사의 추억이 되고 기록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나중에 하나의 훌륭한 생활사 자료도 될 것이다. 나를 비롯한 우리 일반인들도 더 늦기 전에 가족과 주변의 일상을 글로 써보고 사진으로 찍어두거나 음성 기록으로 남겨보기를 새삼 권해본다.
/구사회 선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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