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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불루 화이불치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11월부터 시작된 송년 행사가 12월에 들어서자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어느 모임은 조촐하지만 대접 받은 느낌이 들고 어떤 모임은 비싼 음식에 대접도 받았는데 뭔가 개운치 않을 때가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런 경험을 일찍이 겪었다. 동승처럼 빡빡머리에 솜털이 보송보송 예뻤던 중학교 1학년 때 내게는 두 명의 동무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한 친구는 집이 못 살았다. 그런데도 그 친구의 집에 가면 마치 우리 집같이 편했고 특히 친구 어머니가 내어 주시던 따뜻한 밥과 된장찌개는 지금 생각해도 침이 고인다.

또 한 친구는 몇 번을 자기 집에 가자고 하기에 간 것인데 엄청 많은 책이 있어 읽을 욕심에 친하게 되었다. 그 친구의 집에 들어서면 응접실의 전면을 꽉 채운 고급 유리책장 속에 내가 보고 싶었던 50권짜리 브리태니커사전을 비롯, 국내·외 현대문학과 고전문학, 셰익스피어, 그리스신화, 태평양전쟁, 일본 대하소설 등의 전집류가 금박을 번쩍거리며 양주병들과 함께 빽빽이 들어차 있었고 친구의 방에도 괴도 루팡, 셜록홈즈, 김찬삼의 세계여행, 시이튼 동물기, 역사 및 과학사전 시리즈 등의 전집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친구 어머니께서 나 때문에 아들이 책을 본다며 사골국물에 맛있는 반찬을 잔뜩 차려주셨다. 늘 먹어서 질려 버린 아들이 잘 먹는 내게 자극을 받아 다시 먹을 것이라는 기대였는데 점점 나만 먹어대자 점점 먹을 것도 줄이시고 쌀쌀맞아지셨다. 나도 슬슬 눈치가 보였지만 부지런히 전집들을 읽어나갔다. 읽는 책마다 내가 첫 손님이어서 더 신이 났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그랬듯이 책을 읽으러 갔는데 친구 어머니께서 “이제 오지마! 내 자식은 안 읽고 너만 읽는 꼴을 더 이상 보다가는 울화병이 도지겠다”. 그래서 중지되었지만 그 때의 독서량이 지금도 나를 버티어 주고 있다. 그 때 내가 너무도 눈치가 없었구나 싶어 미안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하지만 내게 그 집은 책과 사골국 이외에는 기억이 없다. 그 집은 모든 것이 풍족했고 여기저기 비싸고 번쩍이는 것들이 가득했지만 부럽기보다는 산만하고 값싸 보였던 이미지만 남아 있다. 한편 앞의 친구를 생각하면 늘 깔끔하던 방안의 내음과 벽에 걸린 하얀 옷덮개들, 장농에 개어 있던 정갈한 이불과 베개들,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던 손때 묻은 책들, 그리고 기어서 올랐던 우리의 아지트인 다락방과 앉은뱅이책상들이 새록새록 내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이 두 느낌의 차이는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을 더듬어보니 집에 들어설 때 눈에 띈 디테일의 차이였다! 작고 낡았어도 정성이 담긴 가지런함과 정갈함의 조화, 그리고 맑은 진정성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반면에, 각각은 고급스럽고 우아한 것들인데 과시를 위한 전시품으로써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여기저기서 그저 비싸다는 것과 번쩍이는 금테만 보여주니 빗물에 분장이 번져도 웃어야만 하는 거리의 피에로를 볼 때처럼 졸부의 천박한 사치에 질렸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시조 온조왕께서 궁궐을 지으며 하명을 하신다.“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도록 하라.” 이 말씀은 백제 예술의 근간이 되었다. 오늘의 예술인들도 명심해야 할 귀한 말씀이다.

가난한 친구네는 검이불루를 이루었고 부자인 친구네는 화이불치에 실패한 것이다.

아~ 온조왕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정말 보고 싶다!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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