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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 형’이 이겼다

곽병창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곽병창 우석대 교수

한때 나훈아와 남진이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적이 있었다. 하나는 부산 출신의 거칠고 가난한 터프 가이, 하나는 목포 유지 집안의 귀공자 같은 미남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때는 바야흐로 이른바 통기타와 청바지를 앞세운 포크송의 물결이 대학가를 휩쓸어오기 시작하던 즈음이었다. 라디오나 TV와는 달리, 대학가에서 남진이나 나훈아, 이미자에 열광하는 이들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 당시 트로트는 적어도 대학생들에게는 너무 값싼 신파였고, 그 리듬은 촌스러운 ‘뽕짝’의 단순반복에 지나지 않았다. 적어도 트로트를 듣지 않는 것은, 그 시절 지식인들의 일종의 ‘구별 짓기’였던 셈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른바 민중가요의 시대가 열렸고, 그 다음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쏘아올린 ‘X 세대’ 음악들이 청년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도 세월은 한참 더 흘렀다.

그랬던 트로트가 최근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2020년의 트로트가 가히 부활의 경지를 선보이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원래의 트로트가 결코 가보지 못 했던 세계를 너무도 짧은 순간에 너무도 강력한 힘으로 열어젖히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 등장하는 트로트는 단순히 애상적이고 처량한 정서를 단조 위주의 유장한 가락에 얹어서, 꺾고 떨고 밀고 당기는 화려한 기교로 들려주는 노래 정도가 아니다. 때로는 격렬한 댄스와 어우러져 코믹하거나 섹시한 감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기도 하고, 때로는 오리지널 트로트보다 훨씬 진한 애상과 그리움의 정서를 표현하기도 한다. 최근의 랜선 콘서트에서 나훈아는 ‘테스 형’을 외치며 비뚤어진 세상을 향해 신랄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발라드, 랩, 판소리, EDM 등을 가리지 않고 주변 장르를 빨아들여 소화해내는 흡인력으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오죽하면 어떤 이는 국악과에 트로트 전공을 신설해야 할 판이라며 자조 섞인 푸념을 내뱉기도 한다.

트로트에 대한 이 모든 열광은, 오랫동안 이른바 ‘B급 감성’이라 불리던 것들의 총체적 반란을 상징한다.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고 당연시하며 사용하던 ‘B급’이라는 용어에는 사실 매우 낡은 ‘구별 짓기’와 선민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지식인, 중산층이라 자부하던 이들이 즐기는 예술만이 ‘A급’이라는 생각, 클래식 또는 고전이나, 정전(正典, canon)을 둘러싼 오래된 권위의식이 만들어낸 시대착오적 언술이, 곧 ‘B급 예술’, ‘B급 감성’ 등의 용어이다. 두말할 것 없이 서둘러 사라져야 할 단어이다. 지금 새롭게 세상의 전면에 나서는 대중들은 그런 용어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는다. 이제 대중은 클래식도 팝도 재즈도 즐길 줄 안다. 하지만 삶의 희로애락을 가식 없는 언어로 드러내고, 가슴 속 깊은 곳의 원초적 심성을 직설적으로 터뜨려주는 트로트를 내숭떨며 외면하는 이들을 지식인이라 우러러 보지도 않는다. 이런 판에 잘 늙은 노가수가 노래하다 쉬면서 세상 이야기 한 마디 한 걸 두고, 사이비 지식인, 위정자들이 되지도 않은 정치적 덧칠을 해대는 꼴이야말로 저급하기 짝이 없는 ‘B급 상상력’이다. 그의 신곡 ‘테스 형’을 두고 소크라테스를 오독한 것이라는 둥, ‘~형’이라는 호칭이 가부장제의 유산이라는 둥 요설을 붙이는 일도 그다지 심오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섣부른 지식인들이여, 함부로 분석하지 말고 겸허히 받아들이자. 바야흐로 대중의 시대이다. 그리고 그냥 ‘테스 형’이 이겼다.

/곽병창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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