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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어르신 분들

송준호 우석대 교수

송준호 우석대 교수
송준호 우석대 교수

우리말을 처음 배우는 외국인들이 몹시 어려워하는 게 있다. 다양한 존대 표현을 올바르게 가려 쓰는 일이다. 어쩌랴. 그게 한국어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것을. 동방예의지국다운 언어 특성을 두고 딴지를 걸자는 게 아니다. 요즘 들어 그런 존대 표현이 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아서다. 존댓말의 인플레라고나 할까.

“커피 나오셨어요.”라든가 “모두 6,500원이세요.”와 같은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쯤은 이제 상식에 든다. 그래도 딱 한 번만 더 짚어보자. 이런 해괴한 말 습관이 나타난 까닭은 무엇일까. MZ 세대의 기본적인 상식 부족 탓인가. 그런 점도 있겠지만, 천만에다. 까닭은 다른 데 있다. ‘갑질’을 경계하다 보니 생겨난 말 습관이라는 것이다.

고용주와 손님은 ‘갑’이고, 카페나 편의점 알바생은 당연히 ‘을’이다. 그런데 그것도 관계에 따라 돌고 돈다. 음식점 사장도 자신이 직접 서빙할 때는 “음식 나오셨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던가. 어느 옷 매장 알바생이라고 절친한테까지 “그 빨간 티가 정말 잘 어울리세요.”라고 말할 리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3인칭으로 가리켜 부르는 말이 있다. ‘그놈’, ‘그 자식’, ‘그 새끼’ 등에는 악감정이 담겨 있다. 무난한 건 ‘그이’나 ‘그 사람’이다. 상대를 높여 이를 때는 ‘그분’을 쓴다. 그런데 요즘 들어 높임말 ‘분’이 가는 곳마다 차고 넘친다. ‘고객분들’, ‘관객분께서’ 등이 그런 경우다. ‘고객님분들’도 들은 적 있다. ‘팬분들’도 빼놓을 수 없다.

팬(fan)은 운동선수나 인기 연예인 같은 이들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운동선수나 연예인들 입장에서 ‘팬들’은 모르긴 해도 손아랫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런데도 ‘분’을 꼬박꼬박 갖다 붙인다. “팬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식이다. 그냥 ‘팬들의 기대’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팬분’들이야말로 ‘갑’이라는 걸 잘 아는 까닭이다. 그냥 갑이 아니라 숫제 ‘슈퍼갑’이다. 어쩌다 실수로 말이나 행동 하나라도 잘못 까딱했다가는 SNS를 통해 뭇매를 두들겨 맞을까 두려운 것이다. 알아서 기는 거라고나 할까. 이와 비슷한 현상을 보여주는 말이 또 있다. 바로 ‘어르신’이다.

‘어른’보다 한 단계 위에 드는 존대 표현이 ‘어르신’이라는 것쯤 누가 모를까. ‘어르신’은 본디 남의 아버지를 높여 직접 ‘부를 때’ 써온 말이다. 그런데 이게 언젠가부터 ‘노인’을 대신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60세 이상 어르신들의 백신 접종 예약률이 70%에 이른다.’라는 식이다.

3인칭으로 가리켜 부르는 말이므로 그냥 ‘60세 이상 노인들의’라고 계속해서 쓰면 안 되는 걸까. ‘노인’이 무슨 비하하는 말도 아니지 않은가. 혹시 사사건건 간섭하면서 꼬장이나 부린다고 ‘늙은이’나 ‘꼰대’라고 불렀던 게 마음에 걸려서 이제라도 인심을 쓰는 거라면 또 모르겠다. 하긴 미국에서도 요즘에는 ‘old man’ 대신 ‘senior citizen’을 쓴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다.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듣다가 실소한 적이 있다. 어떤 행사를 리포터가 찾아가서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소개하는 코너였는데, 그 노인회 대표‘분’께서 이렇게, 그것도 아주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는 걸 들었던 것이다. “우리 같은 어르신 분들 입장에서는 이런 행사를 자주 열어줘야 건강에도 좋은 겁니다.” /송준호 우석대 교수

 

△송준호 교수는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소설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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