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내 나이는 37세다. 벌초의 계절이 돌아오면 아버지가 생각이 난다.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묘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기 때문이다.
추석은 가정의 달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나는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20대를 회상하면 꿈이 없어 대학 졸업과 동시에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에 고민하고 단위농협에 취직했다.
하지만 3년이 되는 시점에 첫 직장을 그만두게 됐다. 이유는 적성이 맞지 않다는 스스로의 결론으로 말이다. 그 후 돈을 벌기 위해 신문사 인쇄소, 생활정보지 광고영업, 보험영업 등을 했다. 역시나 나에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곤 기자가 되고 싶어 지방 신문사에 첫 도전장을 냈다. 하지만 떨어졌다. 준비가 없이 마음만 앞섰던 것이다. 그래서 아는 선배를 통해 재도전해 모 신문사에 문화부 기자로 입사했다. 매우 기뻤다. 하지만 기쁨은 채 석 달도 가지 못했다. 재정이 어려운 신문사를 들어간 것이 원인이었다. 물론 처음엔 몰랐다. 이처럼 나와 맞는 일을 찾기 위해 그리고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고민을 해 왔다. 10년이 지난 이쯤에서 내가 생각하는 행복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행복이 무엇일까? 국어사전에는 복된 좋은 운수 또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껴 흐뭇해하는 상태로 나온다. 그렇다. 사람이라면 태어나서 누구나 꿈꾸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정의는 무엇일까? 고민에 빠진다.
10년 전 그 당시 37세의 나이에 사회복지학을 배우는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효(孝)와 신(信)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유는 효는 행복의 근본이며, 신(信)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으로서의 도리기 때문이다. 잠깐 나의 부모님을 얘기하자면 농촌마을에서 반평생 자식을 위해 칠십이 훌쩍 넘은 연세에도 부지런히 농작물을 가꾸며 삶을 보내셨다. 물론 다 나 때문이다.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통해 나는 행복을 배운다. 그리고 그 행복을 이루기 위해 효(孝)와 신(信)을 실천하려고 오늘도 애쓴다.
10년 전 5월, 어버이날을 맞이해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라고 쪽지와 속옷 선물을 했지만 가슴에는 카네이션을 못 달아 드리고 탁자에 놓고 오는 떳떳하지 못한 나의 마음의 행동에 눈물이 난다. 효를 실천하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되는 상황과 수많은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는 불효자의 공통점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너무 죄의식을 느끼면서 사는 것보다는 내가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실천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효(孝)가 아니겠는가. 예컨대 부모님께 안부 전화하기, 부모님 살아생전에 최소한 고기 한 근 사서 함께 먹는 것 등이다.
이처럼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있듯이 행복은 가정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신을 믿으면서 사는 삶.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다. 벌초의 계절, 추석이 돌아온다.
10년 후 지금,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보고 싶다. 더 잘했어야 했다. 눈물이 난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성민재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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